카프카를 찾아서
김용만
오랜 세월 카프카를 찾아 헤맸다. 서점, 극장, 패션가, 카페, 사진관, 빌딩 광고, 연극 포스터에도 존재하고 심지어 내 서재에도 존재하는 그 흔하디흔한 카프카를 나는 진정 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의식 속에는 그가 인간이면서 인간의 전형을 비켜난 존재로 입력되었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그에 대한 연구서가 수천 권을 넘을 만큼 친숙한 이름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세계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이름이지만 내게 있어 카프카는 무슨 암호처럼 안개에 가려진 작가였다.
카프카의 이미지가 그처럼 낯설게 인식된 까닭은, 그가 죽은 지 8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생생한 현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카프카의 작품이 기존 틀과 아주 어긋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인데,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작품들은 독자에게 신비의 세계를 체험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마력은 시공을 초월한다.
버스가 비엔나를 출발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까, 기사가 <프라하의 봄>을 틀어준다. 한국에서 상영된 영화보다 훨씬 길고 노골적인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는데, 여주인공 줄리엣 비노쉬의 나체와 음부가 보일 정도로 리얼한 장면이 많았다. 두 번째 틀어준 <글루미 선데이>는 버스 여행과 어울리는 고전 영화였다. 순결한 사랑과 역사적인 비애가 우울한 선율로 녹여진 그 영화는, 수많은 사람을 자살로 몰고간 노래 <그루미 선데이>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으로 언제 보아도 새롭게 가슴을 울린다.
어둠이 깔려서야 프라하에 도착하여 볼타바 강가에 있는 호텔에 들었다. 이튿날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곧장 흐릿챠니 언덕에 올랐다. AD870년 보헤미아 독립국의 보리보주 왕자가 세운 중세풍의 육중한 프라하 성은 궁궐, 교회, 미술관, 박물관, 광장 등이 어우러진 고풍스런 문화공간으로, 카프카가 자주 산책했고 그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언덕을 내려오며 체코 4대 성인 중 하나인 초대 왕 바츨라프1세가 창건한 비트성당에 들렀다. 그리고 곁에 있는 고풍스런 비카르카(VIKARKA) 오픈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황금소로(黃金小路)에 갔다. 동화 속에 나올법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인데 길가의 집들은 모두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다. 이 거리는 원래 성안에서 일하던 집시와 하인들이 거주하기 위하여 지어졌으나, 나중에는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황금소로(黃金小路)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벌서 5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16세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현재는 선물 가게, 레코드 가게, 서점 등이 들어서 있다. 그 황금소로 중간쯤인 22번지에 카프카가 집필하던 집이 있다.
드디어 카프카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도 역시 카프카답다. 마당 복판에는 파란색의 조형물로 된 두 남자의 벌거벗은 입상이 서 있고, 전시관에는 카프카의 저서, 가족사진, 육필원고, 일상용품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허공에 걸려 있는 여인들의 유리판 속 얼굴이 인상적이다. 처음 약혼한 펠리체 바우어 등 카프카와 인연이 얽힌 여인들로 그 중에서도 도라 디아만트의 얼굴이 가장 육감적이다. 20대인 다아만트는 카프카와 처음 동거한 여성이며 카프카가 이 세상과 마지막으로 작별한 키를링 요양소에까지 동행한 연인이다.
카프카에게 있어 문학은 그의 실존의 바탕이며 존재의 당위였다. 그는 허위가 진실이 되어버린 현실세계와 맞서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학이란 주먹으로 뒤통수를 때려서 각성시켜주는 것이며 우리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썼다.
1883년 7월 3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부유한 유대 상인 헤르만 카프카와 뢰비 가문의 율리에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는 그의 작품 주인공들처럼 중간적 위치에 머문 ‘경계적 존재’였다. 소년시절부터 스피노자, 헤겔, 니체 같은 철학자에 빠졌던 카프카는 원죄와도 같은 상처를 지닌 채 이방인으로 태어난 셈이다. 프라하의 도심과 유대인의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ghetto)와의 중간지점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정통적인 동방 유대인이 아닌 유럽화한 서방 유대인이었으며, 유대교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독교도도 아니었다.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이 아니고,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인도 아니고, 관청에 다녔지만 진정한 관리도 아니었다. 프라하 노동자 재해보험국 법규과에 근무하면서도 밤에는 새벽 두세 시가 넘도록 소설이라고 하는 반역행위에 몰두했던 것이다.
카프카는 법률공부를 시키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프라하의 독일계 학교인 카를대학교에서 법률학을 전공은 하되 독문학과 예술사 강의를 듣기도 했으며,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서 1년간 법관 수업까지 마쳤으면서도 결국은 법조계를 떠나 보험화사에 들어간다.
전쟁과 인간성 파괴의 먹구름이 드리우던 20세기 초의 위기감과 합스브르크가 요세프 1세의 해방령(유대인 거주 자유)에도 불구하고 아직 잔존하는 유대인에 대한 관습적인 배타가, 민감한 카프카의 체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카프카의 문학은 그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실존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간의 존엄성은 여지없이 추락하고 일반 대중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으며 획일적인 규격품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 <변신>에서는 그레고르 아버지가 직장에서 입고 일했던 은행 사환의 제복을 집에 돌아와서도 입은 채 소파에 누워 자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인간은 어디에든 소속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당위를 적절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