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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산천걷기(계족산)
일시 : 2013년 2월 12일(화) 9:30 ~ 13:20
코스 : 비래동고인돌(9:30) - 옥류각, 비래암(10:00) - 절고개(10:30) - 응봉(매봉)(10:50) - 임도삼거리(11:15) - 계족산 정상 성혈(11:40) - 봉황정(11:45) - 점심(11:50) - 봉황마당(12:25) - 용화사석불입상(12:35) - 임천 금석문(12:55) - 제월당(13:00) - 굴다리 8개 - 읍내동 뒷골장승(13:20) - 회덕 비석거리(13:30)
대전의 산천을 알면 대전이 보인다.
그 첫번째 이야기 계족산편을 시작하겠습니다.
첫번째 여정은 계족산이었다. 비래동고인돌부터 시작해 읍내동뒷골장승까지 오는 약 7Km 여정이었다. 그 여정동안 많은 문화유산을 만났다. 계족산을 한번만 가도 대전의 문화유산을 많이 볼 수 있다. 문화유산은 늘 우리 옆에 있다. 인식하지 못할뿐이다. 이번 대전산천걷기로 인해 잠자고 있는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 넣고 싶다. 그렇다면 문화유산이 깨어 날 것이다.
대전의 문화유산을 사랑합시다.
이제 그 첫번째 여정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여보려한다.
출발장소인 비래동고인돌근처에서 모였다. 오늘의 참석자는 대표님 그리고 사무간사인 나, 이렇게 딱 두명이었다. 남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오늘 나는 대표님에게 단독과외를 받았다. 이런 행운이....ㅋㅋㅋ
비래동고인돌 근처에는 문화유산이 많다. 그 첫번째로는 570년이 된 비래골에 있는 보호수이다. 수령은 570년 이며, 그 동안 보호수에서 얼마나 많은 비래골 이야기가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이 폭발한다.
이것이 비래골에 있는 느티나무 이다. 엄청난 세월이 느껴진다.
그 옆에 있는 고성이씨세천비이다. 참고로 비래골은 고성이씨의 집성촌이다. 지금도 비래골은 대부분 고성이씨만 산다고 한다. 고성이씨가 비래골에 들어온 이유는 연산군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때 이계종이란 분이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디트뉴스 : 김유자기자 기사 참고) 여담으로 위에 느티나무를 고성이씨가 처음 이주했을 때 심지 아니었을까 한다.
앞에서 말한 비래동 고인돌안내판이다. 여기서 나는 대표님에게 단독으로 많은 것을 알려 주셨다. 일명 맨투맨 공부이다. 무엇을 알려주셨는지 궁금하면 다섯푼 ㅋㅋ, 나는 오늘도 지식이 쌓여 간다. 그리고 안내판 뒤에 있는 높은 봉우리가 보이는데 저 곳이 응봉(매봉)이다. 저곳의 산자락이 동춘당 뒷산까지 온다고 한다. 그렇게 들어보니 저 응봉(매봉)의 기운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나도 저산의 기운을 받아 동춘당선생님 처럼 되고싶다......될 수 있겠지....
이것이 비래동고인돌이다. 옆에 한기가 더 있으며 고인돌에는 북두칠성모양의 성혈이 있다. 옆에 고인돌이 궁금하다면 한번 찾아가 보시기를.... 사진으로 보는 것 보다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이 감동이 더 크다. 참고로 작년 12월에 (사)대전문화유산울림에서 대전지역 바위그림과 성혈조사을 하였다. 대전에는 여러 곳에 바위그림과 성혈이 있다. 바위그림과 성혈이 궁금하시면 (사)대전문화유산울림에 문의하세요.
비래골의 경로당이다. 이 사진을 찍은이유는 우리가 너무 문화유산을 어렵게 생각한다. 문화유산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문화가 대대손손 전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노인회관도 우리의 문화유산이 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보는 곳은 비래골의 고성이씨 재실로 보여진다. 새로 지어지고 있다. 나는 이런 건물이 상징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조상과 윗어른의 존경하는 모습을 보는 자녀들은 분명 그렇지 않은 자녀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계족산등산로 입구가 보이는 쯤에는 동춘당생애길이라는 큰 조형물이 나온다. 이길을 걸으면 동춘당선생님의 생애를 알 수 있나보다...
조형물에는 엄청어려운 한시가 적혀있다. 딱봐도 어렵다. 그치만 우리 친절한 대덕구는 해석까지 다 적어놨다. 우리도 친절하게 알려준다면 내용은 이렇다.
陽氣發處(양기발처) 양기가 발하는 곳이면
金石亦透(금석역투) 금석도 뚫을 수 있으니
精神一到(정신일도) 정신을 한결같이 하면
下事不成(하사불성) 어떤 일이든지 이루지 못하겠는가
欲驅殘臘變春風(욕구잔랍변춘풍) 남은 섣달 몰아 봄바람 만들려 했더니
只有寒梅作選鋒(지유한매작선봉) 다만 추위 속 매화가 선봉이 되었네
莫把疎英輕鬪雪(막파소영경투설) 듬성듬성 남은 꽃 가지고 가벼이 눈과 다투지 말고
好藏淸艶月明中(호창청염월명중) 맑고 고운 자태 달빛 속에 잘 간직하라.
在彼無悪(재피무오) 저 멀리 있어도 싫지 않고
在此無斁(제차무역) 이 자리에 있어도 싫지 않네
庶幾夙夜(서기숙야) 밤낮으로 도에 가깝도록 공경하여
以永終譽(이영종예) 영원히 영예롭게 잘 마칠 수 있네
우리도 친절할 수 있다. ㅋㅋ
이제 등산로 입구에 오면 스토리가 흐르는 녹색길이라하여 등산안내판이 보인다. 대덕구가 정말 친절하게 길 잃지 말라고 설치를 해주었다. 정말 친절한 대덕구이다. 많은 분들이 꼭 계족산으로 놀러 오셔야 한다.
이 이정표까지 본다면 대덕구는 정말 친절하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절고개 방향이다.
절고개를 가다보면 옥류각이 보인다. 지금 가보니 꽁꽁 얼어있던 얼음이 녹아 옥류각 아래로 흐르고 있다. 정말 기가막힌 타이밍에 옥류각을 방문했다. 옥류각은 조선 효종때 대유학자였던 동춘당 송준길 선생님을 기리기위해 숙종19년에 제월당 송규렴선생님 중심으로 세운 누각이다.(생략) 옥류란 골짜기 옥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율류대산에 수자를 덧붙여 비래수각으로 불린다.(생략) 라고 밑에 써있다.↓
그 옆에는 동춘당선생님이 남긴 '초연물외(超然物外)'라는 금석문이 있다. 뜻을 해석하자면 '물질에 초연(범위 밖으로 뛰어난 모양)하라' 이다.
그 옆으로는 성리학, 동춘당선생님, 옥류각 설명이 있다. 이것을 읽는다면 왜 옥류각을 세웠는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옥류각 만 보다 지나칠 수 있는 옥류각 앞 보호수이다. 수령은 140년 정도 되었으며 옥류각과 맵시를 뽑내고 있다.
더 자세히 본 옥류각 모습이다. 일단 겨울에는 여기서 공부하기 어렵고 여름에 공부를 한다면 동춘당선생님 못지 않은 선비가 나올 것 같다.
옥류각 바로뒤에는 비래사라는 절이 있으며 거기에도 보호수가 있다. 수령은 210년 이며 내가 본 향나무중 가장크다.
이것이 비래사에 있는 보호수 향나무이다. 향나무의 기백이 엄청나다.
이곳이 바로 향나무 뒤에 있는 비래사 모습이다. 비래사에는 비래사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비래사에 있는 비래암 현판이다. 비래암은 동춘당선생님이 세웠으며 학문을 닦기 위해 세언 것이다. 그리고 현판은 우암 송시열선생님이 썼다고 전한다.
길 잊어 먹지 말라고 또 나온 이정표다. 우리는 절고개로 간다.
절고개는 비래사 옆 길로 난 길로 올라간다. 조금만 가면 만날 수 있다.
절고개를 가던 중 비래사 뒷편에 불상이 있다. 각자 소원을 비시는 분들이 보인다. 나의 소원은.....
한 번 더 나온 계족산 등산로 안내판이다.
그리고 이정표도 있다. 계족산에는 갈림길마다 알림판이 있다. 이런 친절함이 나같은 초보산꾼에게 산행을 더 쉽게 만든다.
안내판 뒷편으로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가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차단을 하였고 지금 보이는 약수터만 이용할 수 있다.
약수터를 뒤로하고 쭉 올라가보면 지금 산능성이 보인다. 길 끝이 절고개이다.
절고개를 다 올라와 우리가 와본 길을 찍어 보았다. 생각 보다 많이 올라온 것 같다.
절고개에 있는 이정표이다. 복잡하게 생겼지만 막상본다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절고개에 올라오면 명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매점이 있다. 왜 명물인지는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이게 4천원으로 먹을 수 있는 양이다. 4천원은 참고로 막걸리 값이다. 저기 보이는 멸치는 공짜 안주, 그리고 우리를 반하게 만든 빨간거??? 저거?? 궁금하면 다섯푼..... 이건 공짜로 알려준다면 돼지껍데기이다. 저것도 공짜 안주이다. 분명 파는 메뉴인데 인심좋으셔서 그냥 준 듯 하다. 그리고 주인분이 직접 만드신거다. 정말 맛있다. 4천원으로 밥도 못먹는데 우린 막걸리와 돼지껍데기를 먹었다. 여기 굿이다. 꼭 계족산에 오면 여기 오시기를....
우리는 이제 절고개를 지나서 봉황정으로 가기전 위에서 설명하였던 응봉(매봉)을 간다. 가던 중 송촌동이 보여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응봉(매봉)을 가면서 찍은 우리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봉황정이 보인다. 멀리 보이지만 생각보다 가깝다.
여기가 응봉(매봉)정상이다. 뭐 특별한 것이 없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는 응봉(매봉)에서 엄청난 기운을 받은 것 같다. 나도 이제 동춘당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길에 한 발짝 간 것 같다.
그리고 응봉(매봉)서 본 재미 있는 리본이다. 산여울의 김명근씨가 왔던 갔는데 3,286라는 숫자가 인상깊다. 설마 산에 올라간 횟수가 아닌가 싶다. 난 태어나서 50번도 안된다. 김명근씨가 이 글을 본다면 (사)대전문화유산울림에 전화를 해주세요. 이야기 꺼리가 많을 것 같습니다.
여기는 봉황정을 가기전 잠시 쉴 수 있는 임도삼거리이다.
임도삼거리에도 많은 설치물이 있다. 일단 동춘당선생님과 관련된 안내판,
그리고 올바른 산행을 알려주는 건강정보 표지판이 있다. 기타 시설로는 운동기구, 화장실 등이 있다.
이제 우리가 올라갈 봉황정 이정표이다.
이정표 옆 계단으로 가면 봉황정을 갈 수 있다.
길을 쭉 가다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다행히 친절하게 이정표가 또 나와 쉽게 찾아 갈 수 있다.
이곳이 봉황정이 있는 계족산 정상이다.
계족산 정상을 알려주는 표지석 옆에는 이렇게 세개가 나란히 성혈이 있다. 왜 굳이 계족산 정상 바위에 성혈을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곳이 바로 봉황정의 모습이다. 계족산 정상 표지석에서 약 40m정도 떨어져 있다.
봉황정 옆에는 대덕구 구민헌장이 있다. 지금 대덕구민들이 구민헌장을 몇명이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봉황정에서 찍은 대전의 모습이다. 이날은 안타깝게도 눈이내려 시야 흐려서 잘 나오지 못했다. 다시 한 번 흐리지 않는 날에 와야겠다.
봉황정에서 점심을 먹던 중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박새이다.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고 이렇게 새를 가까이 본 것이 거의 처음이다.
좀 더 가까이 본 박새 사진이다. 참새보다 작으며 계란말이로 크기를 알 수 있다. 특징은 검은 머리에 흰색뺨이다.
봉황정 근처에 있는 보루의 흔적이다. 계족산에는 계족산성이 있다. 계족산성은 대전에서 가장 큰 산성이며 백제부흥군이 활동했던 성이다.
봉황정에서 용화사 방면으로 내려오면 봉황마당이 보인다. 계족산을 예전에는 봉황산으로 불렀다. 그래서 인지 봉황마당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봉황산보다는 계족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친숙하고 정겹다.
봉황마당에는 봉황 두마리와 갓 태어난 봉황이 있다. 지금 알을 깨고 태어난 어린 봉황이다.
그 위에 부모로 보이는 봉황 두마리가 있다.
우리는 다시 이정표를 보고 용화사로 향한다.
이 눈길로 덮힌 곳이 용화사로 가는 길이다.
용화사를 가는 길에는 재미있는 카페가 보인다. 이름은 월화수목금토일 이다. 딱 봐도 이뻐보인다. 산행을 힘들어하는 여자친구를 꼬셔서 산행을 한 다음 여기로 대려오면 좋아할 것 같다.
지금 보이는 곳이 용화사이다.
용화사 입구에는 콘조여래좌상?(콘크리트로만든)이 하나 있다. 용화사는 이좌상보다 더 유명한 입상이 하나 더 있다.
그 것은 바로 용화사석불입상이다. 유형문화재 26호 이며 큰 배 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두광이 있는 여래입상을 비교적 작게 조각하고, 나머지 부분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을 하지 않은 특이한 상이다.(생략)라고 써있다.
이것이 용화사석불입상의 모습이다. 뭔가 검소한 매력이 있다. 내가 본 석상 중 가장 화려하지 않다.
이제 용화사를 나와 이정표를 보고 읍내동쪽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읍내동쪽을 나와 걷다보면 재미있는 조형물이 있다. 솥뚜겅 조형물이다. 멀리서 어 솥뚜껑이네 했는데 진짜 가보니 솥뚜껑이 이었다. 그리고 계족산에는 솥뚜껑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는 계족산 무제의 솥뚜껑은 비를 기원하근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꼭 욕 잘하는 부녀자집에서 솥뚜껑을 훔쳐야 효험이 있다고 한다. 욕잘하는 부녀자는 계족산무제를 지낼 때 뜨끔할 것 같다. 역시 사람은 덕을 쌓고 살아야 한다.
조금만 내려가면 복지센터가 나온다. 그 앞에는 계족산 무제를 설명하는 그림과 글이 있다.
(생략)계족산 무제는 회덕현 차원의 성대한 기우제 였으며 회덕현에 속한 대부분의 마을에서 행사에 참여했다. 계족산 무제를 이해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동'의 정신이다. 그것은 곧 회덕의 모든 주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비를 기원함으로써 가뭄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고자 했던 공동체 정신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생략) 이렇게 써 있으며, 임천은 그 계족산 무제의 흔적이다. 임천은 조금만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
세외성산(世外聖山) 이라는 글귀이며, 세속 밖에 성스러운 산을 뜻하며 계족산을 가르킨다.
덕원(德源)이라는 글귀이며 회덕을 가르킨다.
위에서 말한 계족산 무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임천이다.
이곳이 임천이다.
임천을 알려주는 암각이다. 임천은 샘굿이 이루어 지는 곳이며 임천에서 좌상의 지휘아래 샘굿을 치고서, 정성들여 치성을 드린 물을 항아리에 담아 제수음식과 횃불, 마을기, 황토가래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아낙네는 물병을 거꾸로 들어 비가 오는 듯이 흘리며 키를 들고 온 마을주민이 계족산에 오르는 행사의 장소이다.
임천암각을 지나 내려오면 큰길이 나온다. 그곳에는 후곡공원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제월당이 보인다.
이곳이 제월당이다.
이곳이 제월당이다. 제월당은 조선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규렴선생이 1676년에 자신의 호를 따 지은 별당이다. 제월은 선조의 쌍청당 송유의 쌍청 중 하나로 선조의 맑은 기품을 닮고자 하는 뜻이다.(생략)
제월당을 나와 육교를 건너 뒷골방앗간쪽으로 가면 재미있는 그림들과 굴다리가 나온다.
이곳은 읍내동 경로당인데 어르신들이 오래오래 사시라고 십장생을 그린 벽화가 있다.
그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딱 봐도 오래된 굴다리 하나가 나온다. 나는 이 굴다리를 보는 순간 이쁘다 라는 느낌과 감동을 받았다.
굴다리를 내부를 들어가는 순간 나는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아직 내가 대전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는 걸 느꼈고 이러한 감동이 있는 곳을 늘 찾아야겠다.
굴다리를 나오면 보리밥집이 보인다. 오늘은 금일휴업이다. 이곳도 굴다리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인다. 여기 보리밥은 정말 맛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들려서 꼭 먹어야 겠다. 그리고 계속 굴다리가 나온다.
약간 성문같은 굴다리도 있고,
세월이 묻어나오는 철길 굴다리도 있다. 참고로 이곳 굴다리에서는 대덕문화원이 주관하는 굴다리 축제가 10월에 열린다. 이번에는 그 축제에 꼭 가야 겠다.
굴다리를 나오면 읍내동 뒷골장승이 있다. 꼭 외계인 같이 생겼다. 대전에는 돌장승의 도시 대전이라고 불릴 만큼 곳곳에 돌장승이 많이 있다. 그 만큼 문화유산이 우리까운곳에 있다는 것이다. 어디 한번 눈을 크게 뜨고 돌장승을 찾아보길 바란다. 어렵다면 (사)대전문화유산울림에 문의하세요. 여기까지가 계획했던 여정의 마지막이다. 그렇지만 뒷골장승 근처에도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일단 어사 홍원모 영세불망비이다. 홍원모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성지 본관은 풍산으로 1829년(순조29년) 통정대부 승지로서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해 10월 회덕지방 민정을 살필 때, 이 곳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자 구휼책을 마련하여 주었다. 이런 까닭에 고울에서는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1831년(순조31년) 강덕환이 비석을 세웠으며, 16년 뒤인 1847년 5월 연재호가 보호비각을 세웠다.
그리고 회덕동 주민자치센터 옆에 있는 비각들이다.
여기까지 대전산천걷기 계족산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이 고인돌은 비래동고인돌 근처에 있다. 비래동고인돌과 달리 규모가 작다. 성혈의 흔적은 없으며 유물이 출토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고인돌이라고 추정한다.
아직 대전에는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대전의 문화유산이 많으며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이 있다. 우리가 다시한번 이러한 문화유산에 생기를 불어 넣었으면 한다. 대전산천걷기에 관심이 있고 참가하시고 싶은 분은 다음카페 '대전문화유산울림'으로 오시면 많은 걸 알 수 있습니다.
대전의 문화유산을 사랑합시다.
(사)대전문화유산울림 사무간사
(윤순상 010-2821-0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