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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목차 |
[1-2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 . .
사사기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사 시대의 역사적 교훈을 기록한 책이다. 사사 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 왕을 세울 때까지 약 330년간의 시대를 가리킨다. 사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구주요 재판관이요 통치자이었다. 사사기에는 열두 명의 사사들이 나온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하고 하나님께 물었다. 그것은 바른 태도이었다. 후에 다윗 왕도 전쟁 때마다 하나님께 물었다(삼하 5:19, 23).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고 말씀하셨다.
[3-4절]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 . . .
유다는 그 형제 시므온에게 말하기를,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갔다. 유다가 올라갔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으며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였다.
전쟁은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어린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고(삼상 17:47) 과연 그를 이겼다. 또 여호사밧 때에 하나님께서는 야하시엘을 감동하셔서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증거케 하셨다(대하 20:15).
[5-7절]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 . . .
그들은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을 죽였는데,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므로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었다. 그때 아도니 베섹은,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고 고백하였다. 수족의 엄지가락(보헨)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가리킨다. 아도니 베섹의 고백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한 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그는 거기서 죽었다.
[8-10절]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 . . .
유다 자손은 예루살렘을 쳤고 성을 불살랐으며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사람들과 싸웠고 또 가서 헤브론에 거한 가나안 사람들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는 민수기에도 언급된 인물들로 유명한 아낙 자손 거인들이었다(민 13:22, 33). 여호수아 때에는 그들을 쫓아내기만 하였었다(수 15:14). 헤브론의 본명은 기럇 아르바이었다.
[11-15절]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 . . .
유다가 또 드빌 거민들을 쳤는데, 드빌의 본명은 기럇 세벨이었다. 갈렙은 기럇 세벨을 쳐서 취하는 자에게 그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말했는데,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즉 갈렙의 조카 옷니엘이 그것을 취하였기 때문에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악사는 출가할 때 남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렸고 갈렙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고 요청하였고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다.
드빌 성의 정복에 관련된 이 내용은 여호수아 때에 이루어진 일을 회고하며 삽입한 것 같다. 같은 내용이 여호수아 15:13-19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후에 열둘 중 첫 번째 사사가 될 옷니엘의 믿음과 용맹을 증거하고, 또한 드빌 부근에 있는 윗샘과 아랫샘이 옷니엘의 소유임을 확인시켜 주는 뜻이 있는 것 같다.
[16절]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 . .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었는데,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였다. 종려 나무 성읍은 여리고를 가리킨다(신 34:3). 후에 사사기 4장에 보면, 겐 사람 헤벨이라는 여인은 이스라엘을 도와서 용감하게 하솔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였다(사 4:11, 17-21).
[17-21절]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 . . .
유다는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들을 쳐서 완전히 죽였으므로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고 불렀다.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territory, 경역)와 아스글론과 그 경내와 에그론과 그 경내를 취하였고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적었고 충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큰 믿음을 가졌고 죽도록 충성하려 했다면 가나안 거민들을 다 쫓아내었을 것이다.
한편 갈렙은 모세의 명한 헤브론을 받았고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들을 쫓아내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가나안 정복의 분량을 온전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여부스 사람은 베냐민 자손과 함께 사사시대의 말까지 예루살렘에 거하였다.
[22-26절]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 . . .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갔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다.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명은 루스이었다.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고 말했다. 그는 그 성의 입구를 가르쳐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칼날로 그 성읍을 쳤고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만 놓아 보냈다. 그는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다. 벧엘 거민을 다 죽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수행한 것이지만, 성 입구를 일러준 그 사람과 그 가족을 살려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한 일인 것 같지 않다. 그와 그가 복구한 루스 성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부패에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27-29절]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 . . .
므낫세는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 등의 성읍들과 그 촌락들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가나안 사람들은 결심하고 그 땅에 거했다. 이스라엘은 강성한 후에야 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못했다. 에브라임은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가나안 사람들은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했다.
[30-33절]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 . . .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들과 나할롤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 중에 거하며 강제 노동에 복종하였다. 아셀은 악고 거민들, 시돈 거민들,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으므로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했다. 납달리는 벧세메스 거민들과 벧아낫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은 그들에게 강제 노역을 당하였다.
[34-36절]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 . . .
심지어 아모리 사람들은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지 못하게까지 하였고 결심하고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다. 그러나 요셉 족속이 강성해져서 아모리 사람들은 결국 강제 노역에 굴복하였다. 아모리 사람들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이었다.
사사기 1장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유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취하고자 할 때 먼저 하나님께 물은 것은 잘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한 방법이었고(삼하 5:19, 23) 믿음의 방법이다.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를 의지하며 행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유다 자손과 함께하셨고 또 요셉 자손과도 함께하셨다(2, 4, 19, 22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전쟁은 이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공의로 징벌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시편 62:12,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했다(갈 6:7).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 원수들을 공의로 징벌하심을 알고 담대히 하나님만 의지하자.
셋째로, 본장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와 교훈은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정복에 대한 것이다. 본장은 유다 자손, 베냐민 자손, 므낫세 자손, 에브라임 자손, 스불론 자손, 아셀 자손, 납달리 자손, 그리고 단 자손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멸하고 죽이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고 용기가 부족하고 충성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육신의 연약함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적을 때 세상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의 불완전한 정복은 이스라엘 사회 즉 구약 교회의 부패의 주요 원인이 될 것이다. 작은 누룩은 온덩이에 퍼질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자신의 온전한 성화를 위해 분발해야 한다. 우리 속에 남은 작은 죄성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죄 때문에 실수하고 범죄하고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말했다(골 3:5-6). 또 주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또 세상의 것들을 참으로 버리고 미워하지 않으면, 참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마 16:24; 눅 14:26-27, 33), 이 세상의 염려와 물질과 육신적 쾌락을 극복치 않는 자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하셨다(눅 8:14). 그것은 결실치 못하는 실패하는 씨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중요한 교훈이 된다. 우리는 온전한 교회 건립을 위해 성실해야 한다. 전도와 양육은 병행되어야 한다. 성경은 교회가 부패되지 않도록 깨어 있고 서로 권면하고 충고해야 할 것을 말했다. 교리 사상에서도, 인격과 삶에서도 그러하다. 성경은 또 나쁜 친구를 멀리하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데살로니가전서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권면하자.
히브리서 3:12-13,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2:14-16,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우리는 온전한 교회를 세우자.
[1-2절]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 . . .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말씀하셨다. 그는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다"고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 시대에 천사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네가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다(창 22:12). 그는 야곱에게 나타나셨을 때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13). 야곱은 하나님을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표현하였다(창 48:16).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지적하셨다. 그들의 불순종을 지적하신 것이다.
[3절]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 . .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징벌로 그들이 남겨둔 가나안 원주민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을 것이며 그 남겨진 자들이 그들의 옆구리에 가시가 되며 그 신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포용한 결과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고통과 시험거리가 될 것이다.
[4-5절]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 . . .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소리 높여 울었다. 그러므로 그곳을 보김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우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무리는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징벌과 자신들의 미래에 일어날 불길한 일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참으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깨닫고 그것을 버리고 고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를 결심해야 할 것이다.
[6-7절]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 . . .
이전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어 각기 그 기업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었다. 그들은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에 또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들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다. 지도자의 역할은 참으로 크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지도자가 경건하고 의로우면 그 백성은 대체로 바르게 생활하지만, 그러한 지도자가 없으면 백성은 각기 자기 뜻대로 행하고 사회는 급속히 부패되고 만다.
[8-10절]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으매 . . . .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되었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경건하고 진지한 부모들이 없었기 때문이고 올바른 신앙교육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1-15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 . . .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였다. 바알은 밭의 신이며 아스다롯은 풍부와 성과 전쟁의 여신이라고 한다(NBD). 그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은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범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앞에서 매우 악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고 그들을 노략자들과 대적들의 손에 넘겨주셨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으므로 그들의 괴로움은 심하였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그가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았다. 신명기 28:19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면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경고하셨다. 죄의 값은 죽음과 불행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16-19절]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 . . .
사사는 재판관이며 통치자요 구원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들에게 압박과 고통을 당해 슬피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사사들을 세우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그들이 사는 날 동안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사사의 말도 순종치 않았고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이 좇아 그들에게 절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길을 속히 떠났고,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 열조보다 더욱 부패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절하며 그 패역함을 그치지 않았다. 참으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된 존재이다(렘 17:9).
[20-23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 . .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을 어기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기 때문에 진노하셨다. 그의 진노로 내리신 조처가 그들이 남겨놓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 교제의 대상을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포용의 한계선을 긋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께서 교훈하신 바를 순종하는 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사사기 2장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본장은 지도자의 역할의 중요성을 보인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부패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때도 불순종하거나 연약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도자가 공의를 행하면 사회든지 교회든지 경건과 도덕성이 어느 정도 유지될 것이다. 우상숭배와 부도덕은 엄격히 처단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교회든지 사회든지, 바른 사상과 바른 인격, 바른 분별력과 입장을 가진 지도자가 요청된다.
둘째로, 본장은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보인다. 이스라엘 사회는 신앙의 계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은 후, 후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다른 신들을 좇아갔다. 여기에 바른 신앙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있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셋째로, 본장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을 포용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종교는 부패되고 순수한 경건은 상실되었다. 그들의 불순종은 교제의 문제이었다. 그러나 포용주의의 결과는 큰 불행이었다. 그들은 결국 다른 신들을 좇는 자가 되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고 성경 교훈에 온전히 순종하자.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말고 순수한 신앙생활, 성경적 신앙생활을 지키자. 작은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그릇된 포용주의를 배격하자. 오직 성경대로만 믿고 행하자.
1-11절, 사사 옷니엘
[1-4절]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 . . .
사사기 1, 2장의 내용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을 남김 없이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았고 얼마큼 남겨두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이방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옆구리의 가시와 발의 올무가 되게 하셨고,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기를 원하셨다.
사사기 3장의 분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겨두신 목적이 두 가지라고 말한다. 첫째는 이스라엘 후손들, 즉 가나안 전쟁을 모르는 후손들로 그 전쟁을 맛보고 깨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들의 열조에게 명령하신 말씀들을 순종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원주민들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남겨두신 이 이방인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셔서 그가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듣고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다.
[5-7절]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 . . .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과 친근히 교제하였고, 그들의 잘못된 교제는 그들의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서 드러났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딸들을 며느리로 맞았고 자기 딸들을 가나안 땅의 아들들에게 주었다. 그들의 불순종과 잘못된 교제는 불신 결혼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들을 섬기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 바알은 수리아와 가나안 전역에서 숭배되었던 밭의 신이며, 아세라는 다산(多産, fertility)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아세라는 앗수르의 국가신(神)인 아시르의 아내 이쉬타르(아스다롯) 여신의 별명이었을 것이라고 하며, 어떤 학자(Unger)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사사기 2:13과 3:7을 비교해보면, 그 동일시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된 교제는 이와 같이 그들의 종교와 신앙의 변질과 부패를 가져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성도들의 세상 사람과의 잘못된 교제는 결국 그들의 신앙과 경건의 변질과 부패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면, 우리는 교제 문제부터 조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8-11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 . .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짓는 자들에게 진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파셨다'는 표현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이스라엘이 메소보다미아 왕에게 굴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산 리사다임을 8년이나 섬겼다. 8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압제와 굴욕을 당한 고통의 기간이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8년의 그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더라면 그 고통에서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시편 50:15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며 기도할 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다윗은 성령으로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하였었다(시 51:17).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이스라엘을 위해 한 구원자를 세워주셨다. 그가 곧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이었다. 그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그에게 임하게 하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셔서 나가 싸워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굴복케 하셨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그를 이겼다고 기록한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후에 어린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삼상 17:4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큰 고난에서 건져주셨다. 그 후, 그 땅은 40년 동안이나 평안하였다. 이스라엘은 8년 동안 고생하였지만, 40년 동안 평안을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기간보다 다섯 배나 더 긴 평안의 시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이었고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이셨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시편 30:5,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교제를 조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명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둠으로 그들과 교제하게 되었고 마침내 종교의 변질과 부패를 가지게 되었다. 교제가 중요하다. 성경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한다(잠 13:20). 우리는 믿음 있고 착한 자와 사귀어야 한다. 우리는 믿음 없는 자나 착하지 않은 자들과 사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분위기를 신앙적 분위기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세상적 교제의 장소로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크게 여기지 말고 그를 각 회에서 앞세우지 말고 그런 자를 신앙적인 방향으로 선도할지언정 그가 교회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친구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전 15:33).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한다(고후 6:14). 우리는 우리 중에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며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되는 자가 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히 3:12-13). 우리는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을 더럽히는 쓴뿌리가 나지 않도록 서로 돌아보아야 한다(히 12:15).
둘째로, 우리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된 교제 때문에 종교가 부패되고 변질되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는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 우리는 순수하고 순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행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세에 이를 고통하는 때에 대해 증거하면서, 그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긍하고 교만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치 않고 거룩하지 않고 무정하고 절제치 못하고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고 배신하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고 했다(딤후 3:1-5). 또 디모데후서 4장에서, 그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했다(딤후 4:3-4). 우리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도 순수한 신앙, 성경적 신앙을 지켜 순수하게, 성경대로 하나님을 믿고 그 교훈들에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신다(시 51:17).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징벌의 고난보다 몇 배나 큰 평안을 내려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철저히 회개하며 기도하고 그의 크신 긍휼을 바라며 의지하자.
12-31절, 사사 에훗
[12-14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 . .
이스라엘 자손은 또 여호와의 눈앞에 악을 행하였다. '또'라는 말이 사사기에 여러 번 나온다(3:12; 4:1; 10:6; 13: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된 범죄를 증거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심히 부패되어 있고 선을 행하기에 무능하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 표현은 12절에 두 번 나온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선과 악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사람들 보기에 선한 것 같아도, 사람들이 그것을 선이라고 말해도,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 있다. 잠언 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6:25도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그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를 살피시며 선악 간에 보응하신다. 요한계시록 2:23,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는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셔서 그들을 대적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 왕들의 권력까지도 주장하신다. 다니엘 4: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다니엘서에는 이 말씀이 네 번 반복해 나온다(4:17, 25, 32; 5:21).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그는 우주만물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고 국가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주장하신다.
나라들 간의 갈등과 전쟁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 하나님께서 뜻하심과 허락하심이 없이는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들 간에 평화도 주시고 갈등도 주신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 모압 왕 에글론은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쳤고 종려나무 성읍 즉 여리고(신 34:3)를 점령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은 모압 왕 에글론을 18년을 섬겼다. 옷니엘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섬긴 8년보다 배갑절 이상 긴 기간이었다.
[15-17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 . . .
그때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이다. 사람은 평안할 때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쉽지만, 고난 중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 고난은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고 유익한 것이다. 시편 119편 저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67, 71절).
또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심령을 받으신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요한일서 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한 구원자를세우셨다. 그가 에훗이었다. 그는 사사기에 나오는 두 번째 사사이다. 에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이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 왼손잡이이었다. 베냐민 지파에는 왼손잡이 용사들이 많았던 것 같다(삿 20:16).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에훗은 길이가 한 규빗, 즉 약 45센티미터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우측 넓적다리 옷 속에 차고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다. 에글론은 매우 뚱뚱하고 둔한 자이었다.
[18-22절]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 . . .
에훗은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KJV) 혹은 '우상들'(페실림)(BDB, NASB, NIV)로부터 돌아와서,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이 조용케 하라고 말하자 모셔 선 자들은 다 물러갔다. 에훗은 왕의 앞으로 나아갔다.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에훗은 그에게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에훗은 자신이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확신하였다. 그 말을 듣고 왕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훗은 왼손으로 우측 넓적다리에서 칼을 빼어 에글론의 몸을 찔렀다. 칼자루는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다. 원문에는 22절 끝에 "또 오물들이 나왔더라"라는 말이 있다(MT, BDB; Vg, Targ, KJV, NASB). 에훗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용기 있게 행하였다. 그는 모압 왕을 이렇게 죽였다.
[23-26절] 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닫아 잠그니라. . . .
에훗은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닫아 잠그었다. 에훗이 나간 후 왕의 신하들은 와서 다락문이 잠겼음을 보고 "왕이 필연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라고 생각했다.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변을 본다'는 뜻이다. 에글론의 신하들은 왕을 호위함에 불성실하였고 해이한 마음으로 잘못된 추측과 판단을 하였다. 그들이 "부끄러울 때까지"(원문, KJV) 오래 기다려도, 왕은 다락문을 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열쇠를 취하여 다락문을 열고 보니 자기들의 주(主)가 이미 죽어 땅에 엎드러져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에훗은 피하여 '돌 뜨는 곳' 혹은 '우상들'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였다.
[27-30절] 그가 이르러서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 . . .
에훗은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즉시 소집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합하여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왔다. 에훗은 앞서가며 말했다.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에훗은 하나님의 뜻과 도우심을 확신하였다. 무리는 에훗을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사람 일만명 가량을 죽였는데, 그들은 다 건장하고 다 용사이었다(원문). 모압 군사 중에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다. 그 날에 모압 사람은 이스라엘에게 항복하였고, 그 후 그 땅은 80년 동안 평안하였다. 그 평안의 기간은 징벌의 기간보다 4배 이상이나 긴 기간이었고, 사사 옷니엘 때보다 배갑절이나 긴 기간이었다.
[31절]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 . . .
본장 마지막 절은 사사 삼갈에 대해 짤막하게 기록한다.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었다. 그는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된 때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보내주셨다.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이스라엘 자손을 묵인하지 않으셨다. 그는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대적케 하셨고 이스라엘로 그를 섬기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범죄하는 개인이나 국가를 징벌하신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두렵고 무섭다. 죄의 값은 죽음과 불행,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잊지 말고, 그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를 보내심을 감사하자. 이스라엘 자손이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 구원자를 세워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용감하고 충성된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 결과 그들은 오랫동안 평안을 누렸다. 죄의 징벌도, 고난에서의 구원도 주권자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멸망하는 인류를 위해 보내신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히 받고 그를 따르며 순종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치 말고, 오직 바르게, 의롭게,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겉모습만 의롭고 선한 척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 즉 성경말씀에 비추어, 마음 중심과 생각과 동기에서 의롭고 선하고 깨끗해야 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자.
[1-3절]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 . . .
사사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또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지도자의 역할이 크다. 집에서는 가장의 역할이 크고, 나라에서는 대통령이나 수상의 역할이 크며,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역할이 크다. 훌륭한 지도자를 잇는 후계자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또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다. 그 군대 장관은 시스라이었는데, 야빈왕은 철병거 900승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20년 동안 심히 학대하였다. 옷니엘 때의 8년이나 에훗 때의 18년보다 더 긴 고난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사람은 평안할 때 범죄하기 쉽지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한다.
[4-7절]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 . . .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셨다. '여선지'라는 원어(잇솨 네비아)는 '여자 선지자'라는 말로서 '여자'(잇솨)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보통 때는 하나님께서 남자들을 들어 선지자의 일을 하게 하시지만, 비상한 때에는 비상하게 역사하시는 것 같다. 여선지자는 성경에서 극히 드문 경우이다. 드보라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다. 사사는 재판관이요 통치자이었다.
드보라는 사람을 보내어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 그에게 말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드보라는 바락이라는 남자를 앞세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여자의 일반적 한계성이며 또한 미덕이었다. 드보라는 또한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락에게 분명하게 전했다. 전쟁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8-10절]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 . . .
바락은 드보라에게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바락의 연약한 마음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상 그의 믿음을 반영한다. 바락은 드보라라는 여자가 전쟁에서 무슨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의지한 것이 아니고,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바락은 드보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말하기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고 했다. 사사 드보라는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갔다. 그는 실천하는 지도자이었다. 바락은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일만명이 그를 따라 올라갔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갔다.
[11절]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 . . .
사사기 저자는 헤벨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사를 여기에 삽입하기를,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고 말한다. 모세의 장인을 호밥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이 르우엘(출 2:18)이나 이드로(출 3:1) 외에 호밥이라는 이름도 있었는지 아니면 모세의 장인의 [아들] 호밥(민 10:29)이라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다. 모세의 장인 겐 사람은 유다 자손과 더불어 유다 황무지에서 거하였었다(삿 1:16). 그러나 헤벨이 이곳에 와 거주했다. 사사기 저자가 헤벨의 기사를 여기에 넣은 것은, 드보라가 하나님께서 시스라를 그 손에 파실 것이라고 말했던 그 여인이 바로 헤벨의 아내이기 때문이다(17절 이하).
[12-16절]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산에 오른 것을 . . . .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바락이 다볼산에 오른 것을 듣고 모든 병거 곧 철병거 900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군사들을 기손강으로 모았다. 다볼산은 갈릴리 호수와 지중해 중간에 있는 산이다. 그때 드보라는 바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전쟁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붙여주시면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 행하실 것이다. 바락은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에서 내려갔고 여호와께서는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모든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셨고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하였다. 바락은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그들을 쳤다. 시스라의 모든 군대는 칼에 엎드러졌고 남은 자가 없었다.
[17-21절]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 . . .
시스라는 도보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하솔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엘은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했다.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시스라가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은 이불로 덮었다. 시스라가 말했다.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야엘은 젖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었다. 시스라는 또 말했다. "장막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시스라는 곤비하여 깊이 잠이 들었다. 그때 헤벨의 아내 야엘은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즉 귀와 눈 사이의 관자놀이에 박았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혔고 시스라는 기절하여 죽었다. 야엘은 참으로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그 시대는 참으로 여인 장부들의 시대이었다. 성경은 여선지자 드보라와 함께 여장부 야엘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22-24절] 바락이 시스라를 따를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 . . .
바락이 시스라를 따를 때에 야엘은 나가서 그를 맞으며 말했다. "오라. 내가 너의 찾는 사람을 네게 보이리라."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죽어 누웠고 말뚝은 그 살쩍에 박혀 있었다.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패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를 통해 말씀하신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승리를 주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이기어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멸망시켰다.
사사기 4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치 말자. 지도자도, 백성도 그러해야 한다. 특히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부모가 바르게 행해야 자녀들이 바르게 되고, 대통령이 바르게 행해야 백성이 바르게 되고, 목사가 바르게 행해야 교인들이 바르게 될 것이다. 또 백성들은 바른 지도자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처럼 백성이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백성들은 이념과 사상, 지식과 인격성, 그리고 도덕성에 있어서 바른 지도자를 택하고 세워야 하고 그런 자를 존경하고 따라야 할 것이다. 온 백성이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혹시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또 그래서 하나님께 징벌을 받을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부르짖으며 죄를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다(2절). 하나님께서는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바락의 손에 붙이실 것이다(7절). 또 그는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다(9절). 드보라는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고 말했다(14절). 여호와께서는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셨다(15절).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패하게 하셨다(23절).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은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바라보자. 우리는 주권자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자.
셋째로, 우리는 영적 용사가 되자. 비상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선지 드보라를 세우셨고 또 헤벨의 아내인 용감한 여자 야엘을 사용하셨다.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이것은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교훈이다. 에베소서 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세상에 죄악의 풍조가 만연하고 교계에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풍조가 만연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적 옛신앙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성하는 영적 용사가 되자.
[1-3절]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 . . .
본장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이고 그 군대를 격파한 날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드보라는,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두령들이 영솔하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다고 말한다. 즐거이 헌신했다는 말은 자원적인 헌신을 가리킨다. 드보라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한다. 드보라가 하나님을 찬송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두령들이 영솔하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승리이었다.
[4-5절]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 . . .
드보라는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셨을 때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고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친 후 가나안 땅에 가까이 왔을 때의 광경인 것 같다. 신명기 33:2도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인도하셨고 그들과 함께 행하시며 큰 능력을 보이셨다.
[6-7절]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 . . .
삼갈의 날이나 야엘의 날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징벌로 이방인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때 사람들은 큰 길로 다니지 않고 골목길로만 다녔다. 또 이스라엘 나라에는 관원들이 없었다. '관원'이라는 원어(페라존)는 '시골 거주자들' (BDB, KB)이라는 뜻도 있으나(KJV, NASB), '관원들, 지도자들'(게세니우스), '용사들'(LXX)이라는 뜻도 있다. 그때 드보라가 일어났다. 7절 하반절은 "이스라엘의 한 어미인 내가 일어났도다"라는 뜻이다.
[8-11절]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 . . .
드보라는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그들의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삿 4:1-2).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 40,000명 중에는 방패와 창이 없었다. 그러나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방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사모한다고 말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증거한다.
그는 또 말하기를, "흰 나귀를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하라. 활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말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징벌뿐 아니라, 또한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가리킨다.
[12-14절]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 . .
드보라는 또 말하기를,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라고 한다. 13절은, "그때에 남은 자가 백성의 방백들에게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용사들 가운데서 내게 내려오셨도다"라는 뜻일 것이다(원문; 영어성경들은 오역인 듯).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요"라는 구절은 "그들의 뿌리는 에브라임에게서 났고 아말렉을 대항하며"라는 뜻일 것이다(MT, KJV). 그 다음에 베냐민은 전쟁에 동참한 그 백성 중에 섞여 있고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다고 한다. '대장군의 지팡이'라는 원어는 '검열관 혹은 사령관의 지휘봉'을 가리킨다.
[15-17절]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하니 . . . .
드보라는 또 "잇사갈의 방백들이 그와 함께하니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 전쟁에 마음을 같이했다. 또 바락은 맨발로 골짜기에 보내졌다고 표현된다. 그것은 용감하고 빠르게 전쟁터에 나아갔음을 말한다.
또 르우벤 지역에 마음에 큰 생각들이 있었다. '시냇가'라는 원어(펠라고스)는 '구역,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마음에 생각만 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찜이뇨?"라고 말한다. 그러나 르우벤 지역에 마음에 큰 살핌이 있었다. 또 길르앗은 요단 저편 곧 동편에 거하고 단은 배에 머물렀다고 표현되고, 아셀은 해변에 앉고 항구에 거한다고 말한다. 17절의 '시냇가'라는 원어(미프라츠)는 '부둣가, 항구'라는 뜻이다.
[18-22절]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 . . .
드보라는 또 말하기를,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다"고 한다. 스불론 자손과 납달리 자손은 그 전쟁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바락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스불론과 납달리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갔었다(삿 4:6, 10).
드보라는 말하기를, "왕들이 와서 싸울 때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돈을 탈취하지 못했고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연 현상들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지원하신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천둥과 번개, 폭우와 우박 등으로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징벌하셨다.
또 본문은 "기손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강은 옛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있는 자를 밟도다. 그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소리는 땅을 울리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원수들을 제압하고 승리했음을 보인다.
[23절]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 . .
그러나 드보라는 무서운 말씀도 증거한다. 그것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메로스를 저주하라"는 말씀이다. 메로스 거민이 거듭 저주를 받는 까닭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24-27절]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 . . .
그러나 반면에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장막에 거하는 여인들 중에 가장 큰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시스라가 물을 구할 때 우유 곧 엉긴 젖을 귀한 그릇에 담아주었고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장인의 방망이를 들고 그 방망이로 시스라를 쳐서 머리 곧 살쩍을 꿰뚫었다. 시스라는 여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다. 힘있는 나라의 가장 큰 용사이었던 시스라가 한 연약한 여인의 손에 이렇게 힘없이 쓰러졌다.
[28-30절] 시스라의 어미가 창문으로 바라보며 . . . .
드보라는 또 시스라의 어머니와 그 시녀들의 말을 상상하여 말한다: "시스라의 어미가 창문으로 바라보며 살창에서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고 그의 병거 바퀴가 어찌하여 더디 구는고 할 때 그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라. 시스라는 채색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놓은 채색옷이리로다. 곧 양편에 수놓은 채색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31절]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 . . .
드보라는 결론적으로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라고 말한다. 그 땅은 40년 동안 평안하였다.
사사기 5장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장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함을 증거한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김을 깨닫자.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는 그들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이다(2, 9절). 하나님께서는 용사들 가운데로, 그에게로 내려오셨다(13절). 또한 별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싸웠다(20절). 이스라엘의 승리는 단지 드보라나 바락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승리이었다.
둘째로, 본장은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백성들의 자원적 헌신을 모범으로 보인다. 2절,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9절,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또 여인 야엘의 놀라운 역할도 강조되었다. 이와 같이, 그 전쟁은 하나님의 종들의 헌신적 동참과 협력으로 승리에 이른 것이었다. 신약 시대에도 헌신적인 인물이 많이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한 예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의 목숨을 위해 자기들의 목숨을 내어놓았다고 증거된 자들이다(롬 16:4).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에 자원적으로 참여하자.
셋째로, 본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인다. 전쟁에서 싸우지 않는 것은 원수들을 이롭게 할 뿐이다. 메로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치 않고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일에 즐거이 참여하는 자가 되고, 결코 방관자가 되지 말자. 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라고 하셨다(마 12:30; 눅 11:23).
본장의 마지막의 말씀대로 사람들 가운데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시스라처럼 결국 비참하게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정오의 햇빛같이 밝게 빛날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자. 또 하나님의 일에 방관하는 자도 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원적으로 헌신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말씀을 사랑할 것이며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일을 사랑할 것이다.
[1-6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 . . .
이스라엘 자손들은 또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된 범죄와 실패를 증거한다. 이것은 사람들 속에 있는 죄성(罪性)의 본질이다. 이 죄성은 사람이 중생(重生)한 후에도 남아 있다. 그들의 범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7년 동안이나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 붙이셨고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겼다. 육신적 고통은 죄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미디안을 인해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해 만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씨를 심은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은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유다 땅의 서쪽 해변에 인접해 있는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떼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들과 약대들이 수없이 많았다. 이렇게 이웃의 이방인들이 그 땅에 들어와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려 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해 미약함이 심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고난의 풍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만든다.
[7-10절]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 . . .
이스라엘 자손들이 미디안을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셨다. 그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종 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며 그들을 학대하던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약속의 땅의 원주민들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고 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현재의 고난이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온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11-13절] 여호와의 사자가 . . . .
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셨다.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했다. 기드온은 그에게 대답했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가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신다고 절망적이게 생각하고 있었다.
[14-16절]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 . . .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본문은 '여호와의 사자'(11-12, 21-22절)나 '하나님의 사자'(20절)를 '여호와' 자신(14, 16절)과 동일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 네 힘을 의지하여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또 그는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기드온은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집이 므낫세 중에 약하고 자신이 아버지의 집에서 작고 보잘것없다고 말했다. '극히 약하다'는 원어(핫달)는 '가장 약하다'는 뜻이요, '제일 작은 자'라는 원어는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기드온은 겸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반드시'라고 원어(키)는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지만(KJV, NASB), 아마 단지 직접화법을 도입하는 접속사일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번역할 것이 없다(NIV, BDB).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은 사명을 받은 기드온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모세에게도 그런 말씀을 주셨고(출 3:12) 여호수아에게도 주셨다(수 1:5).
[17-18절]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 . . .
기드온은 그에게 사명을 주신 자가 하나님의 사자이심을 확인하기를 원하면서, "내가 당신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자가 바로 당신이라는 표를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기드온이 그를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또 기드온은 예물을 가지고 다시 그에게 와서 그 예물을 그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고 말씀하셨다.
[19-21절]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 . . .
기드온은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렸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고기와 무교전병을 그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고 말씀하셨다.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는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었는데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종종 사람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22-24절]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 . . .
기드온은 자기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음을 알고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라고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기드온은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고 그 이름을 여호와 살롬, 즉 '여호와는 평안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사무엘의 때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범죄하는 자는 쇠약해지고 불행해지고 죽고 말 것이다(롬 8:13).
둘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즉시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신다.
셋째로, 본문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덕목을 증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셨고 사명을 주셨고 보내셨고 함께하셨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둘째는 겸손함이다. 기드온은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라고 말했다. 기드온은 겸손하였다. 모세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였다(출 4:10, 13). 하나님의 일꾼들에게는 겸손함의 덕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약 4:6).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을 13권 혹은 14권을 쓴 가장 훌륭한 사도이었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였고(고전 15:10), 또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신이라고 표현하였다(엡 3:8).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매우 필요한 덕은 겸손이다.
셋째는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이다. 기드온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했다(17절). 그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할 때 그에게 사명을 주신 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확신하고자 하였다. 과연 그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임을 알았고 확신하였다(22절).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을 확신해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하고 구원을 확신해야 하고 복음 진리를 확신해야 하고 주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후배 교역자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했다(딤후 3:14).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그 책을 쓴 목적을,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다(눅 1:4).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은 그 책을 쓴 목적을, 그 책을 읽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요 20:31).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모든 진리들을 믿고 확신하게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25-40절, 기드온을 준비시킴
[25-27절]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 . . .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던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몇 가지 명령을 하셨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그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이 견고한 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규례대로 단을 쌓으라는 것이고, 셋째는 네 아비의 수소 곧 7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 어려운 명령이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공개적 행위이며 아버지와 가족들과 성읍 사람들의 반대를 받을 것이 예상되는 행위이었다. 그러나 기드온은, 비록 아버지의 가족들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그 일을 대낮에 행치 못하고 밤에 행하였으나, 열명의 종을 데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대로 다 행하였다.
[28-30절]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 . . .
예상대로 성읍 사람들의 반대는 강하였다. 그들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알의 단이 훼파되고 단 곁의 아세라가 찍히고 새로 쌓은 단 위에 그 둘째 수소가 드려진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서로 자세히 물은 후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행위임을 알았다. 그들은 요아스에게,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고 말하였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반대와 핍박을 일으키기도 한다.
[31-32절]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 . . .
그러나 그 부친 요아스는 그를 대적하는 성읍 사람들에게,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고 잘 대답하였다. 그렇다. 바알이 신이라면, 그가 친히 기드온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요아스는 그 날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부르며 말하기를,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으니 바알로 하여금 그와 다투게 하라고 하였다.
[33-35절]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 . . .
이와 같이, 기드온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일차적 준비를 하였다. 그때에 미디안 사람들과 아말렉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 이스르엘은 이스라엘 땅의 북부에 있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셨다. '강림하셨다'는 원어(라베솨)는 '옷 입히셨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지혜와 능력으로 덧입히셨다는 뜻이다. 그것은 주의 일꾼들의 필수적인 준비이다. 기드온은 나팔을 불었고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 그를 좇았다. 그는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었고 그들도 모여 그를 좇았다. 그는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도 보내었고 그들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을 위해 준비시킨 지도자에게 자원하는 병사들을 많이 허락하셨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룰 수 없지만,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가능하다. 사사들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힘으로 하였다. 사사 옷니엘도, 입다도, 삼손도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오셔서 사사의 사역을 수행하였다(삿 3:10; 11:29; 13:25; 14:6, 19; 15:14). 기드온은 두려워하며 용기를 갖지 못하는 소심한 인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영을 옷 입음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스가랴는 성전 건립의 일에 관해 예언하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영]으로 되느니라"고 하였다(슥 4:6).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일에 적용되는 진리이다.
[36-40절]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 . . .
그러나 기드온은 전선(戰線)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말하였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四面)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소원대로 그대로 되게 하셨다.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였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또 말하였다.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四面)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이 밤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행하셨다.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표적을 두 번이나 구한 것은 그의 확신과 용기가 없음, 곧 그의 연약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며 우리 모두의 연약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성경 자체를 통해 올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올 것이다. 성경 자체가 많은 기적들의 증거와 예언 성취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성경을 통해, 성경과 함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주실 것이다.
본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먼저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사사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을 때에 먼저 바알의 단을 헐며 아세라 상을 찍고 하나님을 위해 규례대로 단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종은 우상을 품고 주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모든 우상, 즉 돈이나 쾌락이나 명예의 우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악과 함께하실 수 없다(시 5:4-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은 먼저 죄를 버리고 주의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집에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려면 먼저 모든 불신앙과 불의를 떠나야 한다(딤후 2:16-21).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영으로 옷 입고 주의 일을 행하였다. 개인의 성화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도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교회의 참된 건립도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스가랴 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성전 건립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영]으로 되느니라." 우리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항상 구하며 얻자.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해야 한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두 번이나 재확인하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주의 일을 바르게, 힘있게, 고난 중에도, 끝까지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했다(딤후 3:14).
[1-3절]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 . . .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기드온을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너무 많으므로 미디안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거슬러 자긍하며 우리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모인 무리 중에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말하게 하셨고 2만 2천명이 돌아갔고 1만명이 남았다. 그 1만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해 용기를 가진 자들이었다.
[4-8절]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 . . .
하나님께서는 만명도 아직 많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물가로 데려 내려가게 하셨다. 거기서 물을 마시는 모습에 따라 두 부류가 나뉘었다. 하나는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대고 혀로 핥아 마시는 자들인데, 조심성이 있는 자들이며 그들의 수는 300명이었다. 나머지 9,700명은 무릎을 꿇고 마셨는데, 그것은 조심성이 없음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그 300명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미디안 사람을 그의 손에 붙이시기를 원하셨다. 남은 백성은 자기 처소로 돌려보내게 하셨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순종했다. 믿음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따른 300명도 믿음과 용기와 일치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300명으로 저 큰 미디안 군대와 싸운단 말인가?" 하고 불평하며 그를 떠나지 않았다.
[9-14절]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 . . .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기드온 속에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으로 하여금 미디안 진에 들어가 한 군사의 하는 말을 엿듣게 하셨다. 그것은, 한 사람이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렸다는 꿈 이야기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기드온의 칼이다. 하나님이 미디안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군인들 가운데 두려운 마음을 심어주셨다. 그것은 기드온에게 확신을 주었다.
[15-20절]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 . . .
기드온은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중에 돌아와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고 말했다. 그는 그 전쟁에서 한 방책을 세웠다. 그는 300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 가에 이르러서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기드온과 그들을 따른 100명은 2경 초, 즉 밤 10-11시경에 미디안 진 가에 이르렀다. 보초병이 교대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군인들이 피곤하여 쉴 시간이며 마음이 해이해질 시간이었다. 기드온의 군대는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었다. 세 대가 다같이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쳤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작전은 지시대로 잘 행해졌다.
[21-23절]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 . . .
미디안 진을 사면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그 온 적군은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다. 그 300명이 나팔을 불 때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자기들끼리 서로 칼날로 치게 하셨으므로 적군이 도망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다.
[24-25절]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어 에브라임 온 산지로 . . . .
또 기드온은 에브라임 온 산지에 사자를 보내어 내려와서 미디안 사람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요단 나루턱을 취하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 나루턱을 취하고 또 미디안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였고 기드온에게로 나아왔다.
본장은 무엇보다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교훈한다. 하나님께서는 군사들의 수가 많을 때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슬러 자긍하고 자기들의 손이 자기들을 구원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본장은 하나님께서 미디안 사람들을 기드온의 손에, 또 이스라엘 군대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한다(9, 15절).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이루어졌다. 기드온의 300명의 군사들이 나팔을 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온 적군으로 자기들끼리 칼날로 서로 치게 하셨다. 그 전쟁은 군사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고, 확실히 하나님의 역사로 이겼다.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이 진리를 깨닫고 세상에서의 여러 가지 영적 싸움에서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또한 인간편에서도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함을 보인다. 우선,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믿음 없음을 나타낸다. 두려워하는 자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조심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전투에서 항상 깨어 근신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 믿음으로 항상 순종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면 가능한 일이다. 또 우리는 솔선수범해야 한다. 기드온은 병사들에게 '나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모범을 보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지혜롭고 민첩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승리가 작정된 전투지만,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세 대로 나누었고 나팔과 빈항아리를 준비했고 밤 2경 초에 작전을 개시했다. 또 그는 에브라임 온 산지에 사자들을 보내어 미디안 사람들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요단 나루턱을 취하게 하였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가 해야 할 몫을 다하자.
[1-3절]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 . . .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왜 우리를 이같이 대접하였느냐"고 말하며 크게 다투었다. 그들은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난다(잠 13:10). 그러나 기드온은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며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맏물 포도는 포도수확을, 끝물 포도는 포도줍기를 가리킨다. 기드온의 이런 선한 말은 그들의 노를 풀게 하였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잠 15:1).
[4-9절] 기드온과 그 좇은 자 300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 . . .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300명은 요단에 이르러 건넜고 비록 피곤하지만 미디안의 두 왕들을 추격하였다.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나의 부하들이 피곤해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숙곳 방백들은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기에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며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기드온은 그들에게,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고 말하였다. 거기서 브누엘에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요청하였으나 브누엘 사람들도 숙곳 사람들처럼 대답하였다. 기드온은 브누엘 사람들에게,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고 말했다.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의 전쟁을 동감하지 않았고 지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믿음도, 지식도, 분별력도, 용기도 없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지 않는 것은 결국 원수들을 이롭게 할 뿐이다.
[10-12절] 이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 . . .
그때,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와, 남은 군사 1만 5천명 가량은 갈골이라는 곳에 평안히 머물고 있었는데, 기드온의 군대는 올라가서 그들을 쳤고 기드온은 도망가는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여 결국 사로잡았고 그 온 군대를 파하였다. 기드온과 그의 300명 용사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끝까지 충성하였다. 그들은 비록 피곤하였지만 그 사명과 임무를 완수하였다.
[13-17절]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 . . .
기드온은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신문하자 숙곳 방백과 장로 77인을 그를 위하여 기록하였다.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와서 말했다. "너희가 전에 나를 기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기에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그는 그 성읍 장로들을 잡고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교훈하였다. '징벌하다'는 원어는 '교훈하다'는 뜻이다. 7절의 "너희 살을 찢으리라"는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것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을 죽임으로써 그 성 사람들에게 교훈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는 브누엘 망대도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다. 하나님의 싸움을 위해 협력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이게 행했던 자들은 그렇게 징벌을 받았다.
[18-21절] 이에 세바와 살문나에게 묻되 . . . .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가 다볼에서 자신의 친형제들을 죽인 것을 확인한 후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하면서 일어나서 그 두 왕을 죽였고, 그 약대 목에 꾸몄던 새 달, 곧 초승달 형상의 장식을 취하였다.
[22-23절]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 . . .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요청하였다.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그러나 기드온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기드온에게는 교만이나 명예심이나 개인적 욕심이 없었다. 자신을 높이지 않고 하나님만 높이며 겸손히 하나님의 통치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바른 마음가짐이다.
[24-27절]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 . . .
기드온은 그들에게 단 한가지를 요청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탈취한 귀고리를 그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귀고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라고 말하며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 던졌다. 모아진 금귀고리의 무게는 금 1,700세겔, 약 19.5킬로그램이었다. 그 외에 새 달, 즉 초승달 형상의 장식들과 패물들, 또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들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들이 있었다.
기드온은 그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그것은 그의 큰 실수이었다. 그가 에봇을 만든 것은 율법 중심, 성전 중심의 예배에서 이탈하는 자기중심적 경건에서 나왔던 것 같다. 온 이스라엘은 그가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고 그 에봇은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었다.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우상숭배에 떨어지는 참으로 무지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28-32절]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 . . .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의 사는 날 동안 40년간 그 땅은 조용하며 요란함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 때문에 그 땅에 평안을 주셨다. 기드온은 아내가 많았고 아들이 70명이었다.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하나님의 뜻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옛시대에 일시적으로 일부다처(一夫多妻)를 허용하셨다. 세겜에 있는 그의 첩은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그에게 낳았다. 기드온은 나이 많아 죽었고 아비의 묘실에 장사되었다.
[33-35절]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 . . .
"이미 죽으매"라는 원문(카아쉐르 메스)은 "죽자" 혹은 "죽자마자"(KJV, NASB)라는 뜻이다.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고 사방의 모든 대적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선한 일을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다. 인간은 참으로 무지하고 배은망덕한 존재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기드온처럼 하나님 중심으로만 행하자. 기드온은 하나님만 의지했고 교만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낙심치 않고 끝까지 충성했고, 모든 명예심과 욕심을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의 바른 모습이다. 우리도 겸손히 하나님 중심으로만 행하며 충성하고 헛된 욕심을 버리자.
둘째로,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조심하자. 숙곳 방백들은 무지하고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위하지 않고 오히려 적군을 위하였다. 또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을 만든 것은 그의 큰 실수이었다. 또 기드온이 죽자마자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숭배에 떨어진 것은 인간의 연약한 죄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거울삼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인간의 연약한 죄성을 따라 행치 말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협력자가 되자. 숙곳 방백들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기드온과 그 300명 용사들을 돕지 않았다. 그들은 피곤한 그 용사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300명 용사들은 끝까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렸고 기드온의 지휘에 순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좋은 협력자들이었다. 오늘날 참된 교회의 건립과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좋은 협력자가 되자.
[1-6절]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 . . .
기드온이 세겜의 첩에게서 낳은 아비멜렉은 세겜에 가서 그 어머니의 형제들, 즉 외삼촌들과 외할아버지의 온 가족들에게 골육지친 됨을 강조하여 지지를 얻었다. 그들은 아비멜렉에게 은 70개를 주었고 그는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좇게 하고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자기 형제 70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다. 그는 심히 악했다. 그러나 막내동생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살아남았다. 세겜 모든 사람은 세겜의 상수리나무 기둥 아래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다.
[7-15절] 혹이 요담에게 그 일을 고하매 요담이 그리심산 . . . .
그 일을 들은 요담은 그리심산 꼭대기로 가서 외쳤다. 그는 비유로 나무들이 왕을 세우려 한 이야기를 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감람나무에게 기름부어 왕을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기름 짜는 직무를 버리고 나무들 위에 서는 것을 거절하였다.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도 요청했으나 그도 달고 맛있는 실과 내는 직무를 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나무들은 포도나무에게도 요청했으나 그도 좋은 포도즙 내는 직무를 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요청하였는데, 그는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고 말했다.
[16-21절]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을 삼았으니 . . . .
요담은 그들이 아비멜렉을 세워 왕 삼은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인지,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인지, 이것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인지 따졌다. 또 그는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었거늘 너희가 오늘날 우리 아버지의 아들들 70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고 그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의 왕을 삼았다고 책망하면서 "만일 너희가 오늘날 여룹바알과 그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고 하였다. 요담의 이 저주는 정당하였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었다(57절).
[22-24절]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3년에 . . . .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3년에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므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3년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기간일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을 그들에게 보내셨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사람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여룹바알의 아들 70인에게 행한 포학한 일, 즉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그와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셨다.
[25-29절] 세겜 사람들이 산들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하여 . . . .
세겜 사람들은 산들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하여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그 길로 지나는 자들을 겁탈하였다. 가알이라는 사람이 그 형제로 더불어 세겜에 오자 세겜 사람들은 그를 의뢰하였다. 그들은 포도수확 후 잔치를 베풀고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였다. 그는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하였으리라" 하고 호언장담하며 공공연히 아비멜렉에게 도전하였다.
[30-33절] 그 성읍 장관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 . . .
그 성읍 장관 스불은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아비멜렉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말했다. "가알과 그 형제들이 세겜에 이르러 성읍 무리를 충동하여 당신을 대적하게 하나니 당신은 당신을 좇은 백성으로 더불어 밤에 밭에 매복하였다가 아침 해 뜰 때에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소서."
[34-45절] 아비멜렉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 . . .
아비멜렉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밤에 일어나 네 떼로 나눠 세겜을 대해 매복하였다가 새벽에 그 성을 공격하였다. 가알은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그에게 쫓겨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서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다.
아비멜렉은 이튿날 자기 백성을 세 떼로 나눠 밭에 매복하였다가 사람들이 세겜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그들을 쳤다. 그는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다.
[46-49절] 세겜 망대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 . . . .
세겜 망대의 사람들은 엘브릿 신당의 안전한 곳으로 들어갔으나, 그 일을 들은 아비멜렉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나뭇가지를 찍어 그곳에 대어 놓고 불을 놓았고 세겜 망대에 숨었던 사람들, 약 1,000명의 남녀가 다 죽었다. 세겜 성은 이렇게 완전히 멸망을 당했다.
[50-57절]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를 대하여 진 치고 . . . .
아비멜렉은 또 데베스에 갔는데, 그 성 백성의 모든 남녀는 그 성중의 견고한 망대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갔다. 아비멜렉은 망대 앞에 이르러 치며 망대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였다. 그때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 두골을 깨뜨렸고, 아비멜렉은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을 급히 불러 자신을 찔러 죽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그 형제 70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이렇게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본장에서 어떤 교훈을 얻는가? 우리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과 하나님의 징벌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아비멜렉처럼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의롭고 성실해야 하며, 물질이나 육신이나 명예에 대해 욕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불의편에 서지 말고, 항상 정의편에 서야 한다. 우리는 특히 반역자의 무리에 들지 말아야 한다. 잠언 24:21은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질서를 주시고 평안과 기쁨을 주실 것이다. 잠언 16: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잠언 20: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位)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잠언 25:5,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位)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잠언 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잠언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스라엘의 열왕의 역사를 보면,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게 행하면 그 나라는 평안을 누렸고 신하들은 왕에게 순종했지만, 왕이 범죄하면 그 나라가 평안치 못했고 반역이 계속 일어났다. 히스기야 같은 경건한 왕 때에는 나라의 평안과 형통이 있었다. 역대하 31:20-21,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우리도 경건하고 의롭게만 살자.
[1-5절] 아비멜렉의 후에 잇사갈 사람 . . . .
아비멜렉이 3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후, 잇사갈 사람 돌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그는 여섯 번째 사사로 에브라임 산지의 사밀에 거하여 23년간 다스렸다.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 일곱 번째 사사로서 22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의 아들들 30명은 길르앗 땅의 30개의 성읍들에 거하였고 그 성들은 하봇야일, 곧 '야일의 천막 마을들'이라고 불리웠다. '하봇'(카봇)은 '천막 마을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역사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던 것 같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꼭 필요한 내용만 기록하였다.
[6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 . . .
이스라엘 자손은 또다시 여호와의 눈앞에 악을 행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사람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음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그 계명을 어기는 것은 다 악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악은 하나님께 대한 악이었다. 그들은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겼고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겼다. 즉 그들은 가나안 토착민들의 신들과 그들 주위의 이방 나라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다. 반면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않았다. 사실,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공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십계명의 제1계명을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7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 . . .
여호와께서는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신다. 시편 5:4-6,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눈앞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편 7:11-12,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편 11:5-6,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들의 손에 파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파실 권한이 있는가? 그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며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므로 그럴 권한이 있으시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 안에 있다.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들의 손에"라는 표현은 사사 시대의 연대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햇수와 평안을 누린 햇수를 다 더하면 약 410년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연대 계산에 의하면, 실제로 사사 시대는 약 326년간이라고 보인다(열왕기상 6:1을 참조). 이러한 연대의 차이는 징계와 평안의 햇수들이 중복되었음을 보인다. 그러므로 예컨대 암몬 자손들의 손에 학대를 당한 입다의 시대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학대를 당한 삼손의 시대(삿 13장 이하)는 중첩되었을 것이다.
[8-9절]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 . . .
암몬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에게 파신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을 학대하였다. 요단 건너편 길르앗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18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다. 암몬 자손들은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곤고함이 심하였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가져오고 그 결과는 사람들의 심한 곤고함이다. 이것은 공식과 같다. 시편 107:10-12,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0-14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 . . .
이스라엘 자손은 심한 곤고함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다고 금방 도우시지 않는다. 그는 그의 고백이 참된지, 그가 참으로 죄에서 떠나기를 원하는지 시간을 두고 살피신다.
[15-16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 . . .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내옵소서"라고 아뢰었다. 또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렸고 여호와를 섬겼다. 그것은 참된 회개의 모습이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다. 16절 끝부분의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영혼이 이스라엘의 곤고함을 인해 견디지 못하시니라"이다. 자기 백성을 무섭게 징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했다(애 3:33).
[17-18절] 그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 쳤으므로 . . . .
그때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 쳤다.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은 서로에게 말했다.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할꼬? 그가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본장은 어떤 교훈을 주는가? 첫째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된 존재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해서 범죄하였다. 성경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하며(렘 17:9), 또 흑인이 피부색을 변할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인생이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렘 13:23). 또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말했고(롬 7:18), 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다(롬 8:7-8).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시작도, 진행도, 완성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신다. 이스라엘은 죄에 대한 징벌로 18년 동안 암몬 자손들에게 학대를 당했다. 성경은 죄의 값은 죽음이라고 말했고(롬 6:23), 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롬 8:13). 우리는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시는지를 잊지 말고, 범죄치 말고 죄악된 일을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며 의를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자. 그것이 참된 회개의 증표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이방신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긴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만 섬기자.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신 6:4; 딤전 2:5). 우리는 모든 우상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치 말고(요일 2:15) 돈을 사랑치 말고(딤전 6:10),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자. 그것이 평강의 길이며 영생의 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8:18은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다"고 말씀했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의 계명만 순종하자.
[1-3절]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 . . .
본장은 사사 입다에 대해 증거한다. 입다는 요단강 동쪽인 길르앗의 사람이며 힘있는 용사이었다. 그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다. '기생'이라는 원어(잇솨 조나)는 '매춘부, 창녀'라는 뜻이다. 길르앗의 아내의 아들들이 커서 입다를 쫓아내었으므로 입다는 길르앗 동쪽 끝의 돕 땅에 잡류들과 함께 거하였다.
[4-11절]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 . .
얼마 후에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였다. 그때 길르앗 땅의 장로들은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암몬 자손들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장관'이라는 원어(카친)는 '대장' 또는 '통치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입다가 와서 암몬 자손들과 싸우면 그들 모두의 머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입다는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들은 입다에게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반드시 행하리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갔고 백성은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대장을 삼았다. 그는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였다. 그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12-15절]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 . . .
입다는 먼저 암몬 자손들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왜 이 땅을 치러 왔는지 물었다. 암몬 왕은 입다의 사자에게 대답하기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취한 까닭이니 이제 그것을 화평히 다시 돌리라"고 하였다. 입다는 다시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입다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은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에게는 바른 지식이 있었다.
[16-18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광야로 행하여 . . . .
놀랍게도, 입다는 민수기 20장과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로 행하여 홍해에 이르렀다. 그들은 가데스에 이르러서 사자를 에돔 왕에게 보내어 "청컨대 나를 용납하여 네 땅 가운데로 지나게 하라"고 말했으나 에돔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또 그들은 사람을 모압 왕에게 보내었으나 그도 허락지 아니하므로 그들은 가데스에 유하였었다. 그 후 그들은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둘러 행하여 모압 땅 동편에서부터 와서 아르논 저편에 진쳤고 아르논은 모압 경계이므로 그 경내에는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다.
[19-22절]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에게 . . . .
이스라엘은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들의 땅을 통과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시혼은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 모든 백성을 모아 이스라엘과 싸우려 나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으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쳐서 아모리 사람의 온 땅, 즉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사람의 온 지경을 취하였다.
[23-28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 . . .
입다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말한 후 암몬 자손들의 요구가 정당치 않다고 반박한다. 첫째,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고 주신 땅을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정당치 않다. 둘째, 모압 왕도 국경선을 인정하고 그 문제로 이스라엘과 다툰 일이 없었는데, 그들이 이것을 요구하니 부당하다. 셋째,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아로엘과 아르논 연안의 모든 성읍들에 거한 지 300년인데 그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이제 그들이 그 땅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넷째,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는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쳐서 악을 행하려 하는 것은 부당하다. 입다는 이렇게 반박하며 심판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에 판단하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암몬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않았다.
[29-31절]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 . . .
이제 여호와의 영 곧 성령께서는 입다에게 내려오셨다. 사사들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였다. 입다는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께 한가지 서원을 하기를,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서원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입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32-33절]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 . . .
입다는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웠는데,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붙이시므로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24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적군들을 죽였다. 마침내 암몬 자손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주권적 손에 달렸다.
[34-35절]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 . .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 그의 무남독녀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하였다. 그러나 입다는 이것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다.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돌이킬 수 없도다." 입다는 승전(勝戰)의 기쁨 중에서도, 하나님께 한 서원을 기억하였고 그것을 이행해야 함을 알았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36-38절]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 . . .
입다의 딸도 그의 아비처럼 경건하였다. 그의 딸은 그에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딸이다. 그는 단지 아버지가 그에게 두 달만 허락하셔서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서 그의 처녀로 죽음을 인해 애곡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였다.
[39-40절]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 . .
딸은 두 달 만에 아버지께로 돌아왔고 아버지는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였다. 그는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 두 달이 지났어도 입다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입다도 그의 딸도 참으로 훌륭하였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맹세하며 약속한 것을, 자기들에게 해로울지라도 그대로 이행하였다. 그들은 성경대로 행하였다(신 23:21; 시 15:4).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한 규례가 생겨서 이스라엘 여자들은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해 나흘씩 애곡하였다.
다수의 현대학자들(Lange, NIV)은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니고 그를 평생 처녀로 지내게 한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다. 그들은 본문 37-39절에 '죽음'이나 '죽으니라'는 말이 생략된 것과, 또 딸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인간 본성이나 성경에 반대된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옛날부터 유대교 학자들과 고대의 거의 모든 교부들과 대다수의 주석가들(Matthew Poole, A. R. Fausset, NBC)은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린 것으로 해석한다. 그 근거는, 31절에 입다의 서원의 내용이 분명하고, 35절의 입다의 큰 슬픔과 고통이 그것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의 뜻은 분명하다. 어둡고 부패한 시대에 입다는 무지한 서원을 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으로 그것을 이행하였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를 신앙의 용사들 중에 포함하였다.
입다는 매춘부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었다. 우리는 입다의 신앙을 본받자. 그러면 입다는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첫째로, 입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을 그의 손에 붙여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우리는 온 세상을 홀로 섭리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을 믿자.
둘째로, 입다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먼저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였다(11절).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동행하는 길이며 믿음의 증표이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자.
셋째로, 입다는 바른 지식을 가진 자이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과거의 역사에 대해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른 지식은 바른 행동을 가져오고, 잘못된 지식은 잘못된 행동을 가져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가지자.
넷째로,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하였고 그의 서원을 이행하였다. 그는 승전의 기쁨 중에도 그것을 잊지 않았고, 하나뿐인 딸에게도, 또 2달 후에도 변함없이 그것을 이행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가 되자.
본장은 길르앗 사람들과 에브라임 사람들 간의 전쟁에 대해 증거한다. 그 전쟁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교만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전쟁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은 크게 패하였고 많이 죽었다. 또 본장은 입다 후에 입산, 엘론, 압돈 등의 사사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기록한다.
[1절]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 . . .
입다가 암몬 자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은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말했다.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는 구절의 원문은 "우리가 너 때문에 네 집을 불로 사르리라"는 뜻일 것이다. '너와'라는 원어(알레카)는 '너 때문에' 혹은 '너뿐 아니라'라는 뜻이라고 본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간 것은 잘못된 걸음이었다. 그들은 교만하였다. 그들은 입다의 승전(勝戰)을 축하하고 격려하고 감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그와 그의 집을 멸하려 하였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런 마음과 태도는 습관적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전에 기드온에 대해서도 시비한 적이 있었다(삿 8장). 교만은 시기 질투를 낳고 거기서 미움이 생기고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교만의 싹을 잘라야 한다.
[2-3절]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 . . .
입다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그와 그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그가 에브라임 사람들을 불렀지만 그들이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하므로 그가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붙이셨는데 그들이 왜 오늘날 그에게 올라와 그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고 하였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말과 싸움은 정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형제의 형편과 수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만 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자존심만 세우려고 하였고, 자신들의 명예만 의식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서 입다를 사용하셨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 변론하고 논란한 셈이었다.
[4절]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 . . .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다. 이 전쟁은 길르앗 사람들편에서 보면, 불가피한 전쟁이며 정당방위적 싸움이었다. 정당한 전쟁은 가능하다.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쳐서 파하였다. 특히 길르앗 사람들이 단합한 것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들을 업신여기며 말하기를, 그들이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들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의 비난은 옳지 않았던 것 같다. 길르앗 지역은 요단강 동쪽 지역으로서 얍복강 북쪽의 땅과 얍복강 남쪽의 땅을 다 포함하였다. 이 지역은 갓 지파와 므낫세 반(半)지파의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므낫세 지파와 갓 지파의 자손들이 섞여 살았을 것이다.
[5-7절]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 . . .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들보다 먼저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켰고 도망가는 에브라임을 사람들을 분간하여 죽였다. 그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도망하는 자가 건너게 하라고 청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원문발음)이라는 단어를 발음해 보라고 했고 에브라임 사람이 그 발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십볼렛(원문발음)이라고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들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던 것이다. 그때 에브라임 사람들의 죽은 자가 4만 2천명이었다. 입다는 6년간 사사로 있었고 죽어 길르앗의 한 성읍에 장사되었다.
[8-15절] 그의 뒤에는 베들레헴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 . .
입다 뒤에는 베들레헴 사람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다. 그는 아들 30과 딸 30을 두었고 딸들은 타지역으로 시집 보내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지역에서 여자 30을 데려왔다. '타국'이라는 원어(쿠츠)는 '타지파, 타지역'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NASB, NIV). 입산은 7년간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고 죽어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다.
입산 뒤에는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엘론 뒤에는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다. 그에게 아들 40과 손자 30이 있어서 어린나귀 70필을 탔었다. 압돈은 8년간 이스라엘의 사사이었고 그가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다.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들은 모두 열두 명이다. 그들의 이름을 다시 열거하면,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바락),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등이다. 또 그 열두 명은 적어도 일곱 지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므낫세 지파가 셋(기드온, 야일, 입다), 에브라임 지파가 둘(드보라, 압돈), 유다 지파가 둘(옷니엘, 입산), 베냐민 지파가 둘(에훗, 삼갈), 또 그 외에는 잇사갈 지파(돌라), 스불론 지파(엘론), 단 지파(삼손)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은 열두 지파 지역에 골고루 속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을 배려하신다.
본장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교만치 말고 겸손해야 한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교만하였고, 그래서 다른 형제들을 시기 질투하며 멸시하였고 다투었다. 다툼은 교만에서 나온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교만은 사람의 얼굴 표정이나 말이나 행동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잠언 6장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죄악을 열거하면서 첫 번째로 "교만한 눈"을 언급하였다(잠 6:17).
사람이 왜 교만하는가? 그것은 그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흙이라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온유하고 겸손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0:26-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사도 바울도 겸손에 대해 강조하였다. 빌립보서 2:3-8,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둘째로, 우리는 교만하면 패망할 줄 알아야 한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교만하였고 입다와 그의 집을 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그들은 크게 패하였고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사람이 교만하면 패망한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요 교훈이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교만은 큰 죄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마귀는 교만하여 마귀가 되었고 지금도 감히 하나님과 다투려고 한다. 그러나 마귀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만치 말고 항상 그리고 끝까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품안에 살자.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 . . .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서부에서의 형편이었고, 동부에서의 입다의 통치와 아마 시대적으로 중첩되었을 것이다(삿 10:7 참조).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를 택하셨다. 마노아에게는 그의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출산치 못하는 부족함이 있었다.
[3-5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 . . .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不淨)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이는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임이니라. 그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말라. 이는 이 아이가 모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니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나실인에 관해서는 민수기 6장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거룩히 바쳐진 사람을 가리킨다. 남자나 여자가 나실인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거룩히 바치면,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멀리하고 포도나무 열매는 껍질이라도 먹지 말아야 하며 그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말아야 하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했다(민 6:1-7). 그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말고 거룩한 서원을 계속 기억하며 지켜야 했다.
[6-9절]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 . . .
마노아의 아내는 남편에게 하나님의 사람의 나타나신 일에 대해 고하였다. 그는 그의 모습이 심히 두려우므로 그가 어디서부터 오셨는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지 못했으나, 그가 말씀하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不淨)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고 하셨다고 했다.
마노아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람을 그들에게 다시 임하게 하시고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주셨다. 마노아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 그때 그의 남편 마노아는 그와 함께 있지 아니하였다.
[10-12절]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 . . .
그의 아내는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였다. "보소서 전일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나이다." 마노아는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와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 여자에게 말씀하신 사람이니이까?" 그는 "내가 그로라"고 대답하였다. 마노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려 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라고 물었다. 이 구절의 원문은 직역하면, "그 아이의 생활방식(미슈팟)과 그의 행위(마아세후)가 어떠하겠나이까?"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가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13-14절]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 . . .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말했다. "내가 그 여자에게 말한 것들을 그 여자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不淨)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나실인 서약의 규정에 준하여 술을 멀리하고 깨끗지 못한 음식을 먹지 말고 하나님의 사자의 명하신 대로 다 지켜 행해야 했다.
[15-16절]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 . . .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염소 새끼 하나를 대접하기를 원하며 조금 머물러 주기를 청하였다.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이 머물러 주겠지만 그의 음식을 먹지는 않을 것이며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노아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만 생각했고 여호와의 사자인 줄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7-18절]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 . . .
마노아는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으며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라고 말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에게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라고 대답했다. '기묘'라는 원어(필리--케팁; 혹은 펠리--케레)는 '놀랍다, 오묘하다'는 뜻이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 시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는 이사야 9장에서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등의 명칭으로 불리웠다(사 9:6).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인격이시다.
[19-23절] 이에 마노아가 염소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 . . .
마노아는 염소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렸고 여호와의 사자는 이적을 행하였다. 마노아와 그 아내는 그 일을 보았다. 또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갔다. 마노아와 그 아내는 그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마노아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말하자, 그 아내는 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마노아와 그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를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겼다.
[24-25절]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 . .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고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었다. 아이 삼손은 자랐고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40년이나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보내주신 지도자이었다. 삼손은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마카네단) 즉 '단의 진영'(KJV, NASB 난외주)에서 여호와의 영 곧 성령의 감동을 받기 시작하였다.
본장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하신 때에 그의 종을 보내주신다. 그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들에게 오랫동안 고통당하게 하기도 하셨으나, 때가 되어 그들을 구원할 종을 보내셨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한 사람에게 보내셨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셨다. 인류의 구원은 우리가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에 즐거이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자가 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을 보내실 가정을 택하셨다. 그것은 마노아의 가정이었다. 마노아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성경에는 자녀가 오랫동안 없다가 하나님께 받은 자들이 경건하게 산 예들이 있다. 노아는 500세된 후에 세 아들을 낳았고(창 5:32),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외아들을 낳았다(창 21:5). 이삭도, 한나도, 사가랴도 그러했다. 마노아 부부는 경건한 자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자녀가 없었음이 그들을 더욱 경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부족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는 것 같다. 마노아는 기도하며 응답을 체험하였고(8-9절),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했고(12절),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다(19절).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정에 나실인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가정을 택하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의 쓰임을 받을 만한 경건한 그릇이 되자.
셋째로, 우리의 소망과 능력은 하나님밖에 없다. 40년간 블레셋 사람에게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에게 소망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한 나실인을 보내주시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나실인 삼손이라도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문은 삼손이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 곧 단의 진영에서 여호와의 영의 감동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일꾼을 보내주셔야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해주셔야 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과 능력은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며 그의 계명만 순종하자.
[1-4절]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 . . .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중에서 결혼할 상대를 찾고자 했다. 그는 딤나에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중 마음에 드는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 자기 부모에게 말했다.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그의 부모는 삼손에게 말했다.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그러나 삼손은 아버지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라고 간청했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관할하였기 때문에 삼손은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고 함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그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다. 본문은,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한다. 삼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의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선한 소원이 있었다.
[5-7절]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 . . .
삼손은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들에 이르렀다. 그런데 거기서 한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질렀다. 삼손은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이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다.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다.
[8-10절]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 . . .
얼마 후에 삼손은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갔고 돌이켜 그 사자의 시체를 보았는데,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었다. 그는 손으로 그 꿀을 취하였고 길을 가며 그것을 먹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왔을 때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않았다. 삼손의 아버지는 그 여자에게로 내려갔고, 삼손은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은 그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1-14절] 무리가 삼손을 보고 30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 . . .
무리는 삼손을 보고 30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하게 하였다. 그런데 잔치 중에 삼손은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7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줄지니라." '베옷'이라는 원어(세디님)는 '세마포 보자기들'이라는 뜻이다(BDB, NASB). 그것은 밤에 겉옷처럼 걸치기도 했다고 한다. '겉옷'이라는 원어(칼리폿 베가딤)는 '갈아입는 옷들'이라는 뜻이다(BDB, KJV, NASB).
그들은 삼손의 제안에 동의하며 수수께끼 듣기를 원하였다. 삼손은 그들에게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고 말하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 맞추라고 했다. 그들은 3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다.
[15-17절] 제7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 . . .
제7일이 되었다. 어떤 영어성경들은 '제7일'이라는 말 대신에 고대의 역본들(LXX, Syr, It)을 따라 '제4일'이라고 본문을 고쳤다(NASB, NIV). 그것은 문맥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지만, 우리가 더 신뢰해야 할 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또 라틴어 벨겟역은 '제7일'이라고 되어 있다. 제7일에 그들은 삼손의 아내를 위협하였다.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어떤 이유로든지 이웃에게 이렇게 위협하는 것은 옳지 않고 선하지 않다. 우리는 그런 악한 말을 하지 말고 악한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2:9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전 13:5).
삼손의 아내는 남편 앞에서 울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은 그에게 대답했다.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그러나 7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7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말했고, 그 아내는 그것을 그의 민족에게 고하였다.
[18-20절] 제7일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 . . .
제7일 해 지기 전에 그 성읍 사람들은 삼손에게 말했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즉 그들이 그의 아내를 통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냈다고 말한 것이다.
여호와의 영은 삼손에게 크게 임하셨고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30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었다. 그것은 딤나인들의 불법, 즉 삼손의 아내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위협과 그 수수께끼를 불법하게 알아낸 것에 대한 보복이었고, 또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오랜 압제에 대한 보복의 시작이었다. 삼손은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이었던 자에게 준 바 되었다.
본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마음의 선한 소원을 따라 행하자. 삼손은 기회를 타서 블레셋을 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소원이었다(4절). 빌립보서 2:13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한다. 또 선행은 자원적인,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몬 14). 그것이 죄 되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마음의 선한 소원을 따라 행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싸우자. 삼손은 딤나 사람들의 불법에 대해 분노하였고, 또 40년 간의 블레셋의 압제에 대해 보복하기를 원하였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과 의가 짓밟히는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하나님의 참 교회를 위해 싸우며 일하겠는가! 주께서는 주와 복음을 위해 집이나 가족을 버린 자에게 금세와 내세의 복을 약속하셨다(막 10:29-30).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바울을 위해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다(롬 16:3-4). 사람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할 때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빌 2:21-22).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살았다(빌 2:30).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하며 싸우며 일하는 자가 되자!
셋째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자. 삼손의 능력의 비결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있었다. 주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에 대해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영]으로 되느니라"고 하셨다(슥 4:6). 우리는 모든 봉사의 일에 있어서 오직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며 행하자.
[1-2절]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 . . .
결혼 잔치가 있은 지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은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아내를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인은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말했다.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그러나 정당하게 결혼한 자기의 딸을 그의 아버지가 임의로 다른 이에게 준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다.
[3-5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 . . .
삼손은 그 일에 대해 매우 분노하였고 그의 분노는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 대해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가서 여우 300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서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더미와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사르었다. '감람원'이라고 번역한 원어(케렘 자이스)는 '포도원과 감람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BDB, KJV, NIV, LXX, Vg, Targ).
[6절]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 . . .
블레셋 사람들은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말했고, 어떤 이가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친구 되었던 자에게 준 까닭이라"고 대답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노하였고 그들은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태웠다. 그들은 그 물질적 손실 때문에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태워 죽였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크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는 악하고 잘못된 것이었다.
[7-8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 . . .
삼손은 그들에게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고 말하며 그들을 크게 죽였다. '크게 도륙했다'는 원어는 '그들의 다리와 허벅지를 치며 크게 살육하였다'는 뜻이다. 그런 후 그는 내려가서 에담 바위틈에 거하였다.
[9-10절] 이에 블레셋 사람이 올라와서 유다에 진을 치고 . . . .
이에 블레셋 사람들은 올라와서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하였다. 유다 사람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고 말하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고 올라왔노라"고 하였다.
[11-13절] 유다 사람 3000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 . . .
그러므로 유다 사람 3000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말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은 그들에게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삼손에게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려고 이제 내려왔노라"고 말하자, 삼손은 그들에게 "너희는 친히 나를 치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삼손에게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붙일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며 새 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틈에서 그를 끌어내었다.
[14-17절]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 . . .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때 여호와의 영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였다. '여호와의 영의 권능이 임하였다'는 원어는 '여호와의 영이 힘있게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그러자 삼손의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졌다. 삼손은 마침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1천명을 죽이고 말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1천명을 죽였도다."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 즉 '턱뼈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레히)는 '턱뼈'라는 뜻이다.
[18-20절]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 . . .
삼손은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말했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며 그 승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한 것이다. '구원'이라는 원어(테슈아)는 '구원'이라는 뜻과 더불어 '승리'라는 뜻도 있다(BDB, NIV). 그는 자신의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셨고 물이 거기서 솟아나왔다. 그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삼손이 심히 피곤하고 목말라 하던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었다. 그것은 삼손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이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였다. 그 샘 이름은 엔학코레, 즉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고 불리웠다. 이 샘은 사사기를 기록할 당시에도 레히에 있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때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지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인정하시는 삼손의 행위의 정당성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악행을 추론할 수 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행한 악행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그 아내와 그 아버지를 불사른 일은 악한 일이었다. 거기에 대해 삼손은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임으로 정당하게 보복하였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부당하게 이웃을 죽이거나 해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일들을 통해 인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존귀하다고 말하지만, 징벌을 받아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지옥에 던지우는 악인들의 가치가 과연 있는가? 시편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119: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는 데 있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을 누릴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삼손의 힘의 원천을 생각하며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자. 삼손의 힘과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 여호와의 영이 힘있게 삼손에게 오셨고(14절) 그는 나귀의 새 턱뼈로 1천명을 죽였다(15절). 그는 자신의 승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했다(18-19절). 주께서는 그의 기도를 응답하심으로 그를 인정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자. 시편 62: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오늘도 하나님은 전심으로 그를 찾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대하 16:9).
[1-3절]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 . . .
본장은 삼손이 20년간 사사로 활동한 후에 어떻게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는지를 증거한다. 이것은 사사 삼손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이다. 삼손은 블레셋 지역에 있는 가사라는 성으로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다. '기생'이라는 원어(잇솨 조나)는 '창녀, 매춘녀'라는 뜻이다. 삼손은 자신의 정욕을 통제하는 데 약하였다. 그가 거기 왔다는 소식을 가사 사람들이 듣고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손은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갔다.
[4-6절]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 . . .
그 후 삼손은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였다. 그 여인도 창녀의 부류이었던 것 같다. 그도 참 사랑보다는 돈에 더 큰 관심을 가진 여인이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말했다.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 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일백을 네게 주리라." 은 1,100개가 은 1,100세겔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약 13킬로그램에 해당하고, 1데나리온이 은 5그램이므로 약 2,500데나리온의 가치이며 그것은 노동자의 약 7년치 수입에 해당한다. 들릴라는 삼손에게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고 요구하였다.
[7-9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 . . .
삼손은 그에게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고 말했다. '푸른 칡'이라는 원어(예사림 라킴)는 '새 줄'(BDB), 혹은 '새로 잡은 짐승의 힘줄'(KB)이라는 뜻이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마르지 아니한 새 줄 일곱을 여인에게로 가져왔다. 그 여인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이미 사람을 내실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삼손은 그 줄을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같이 하였고, 그들은 그 힘의 근본을 여전히 알지 못하였다.
[10-12절]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 . . .
들릴라는 삼손에게 말했다.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노니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삼손은 그에게 말하기를,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고 했다. '새 줄'이라는 원어(아보심 카다쉼)는 7절의 '새 줄'이라는 원어와 다르나, 뜻은 비슷하다. 들릴라는 새 줄을 취하고 그것으로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고 말하였으나, 삼손은 팔 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같이 하였고 그때에도 사람들이 내실에 매복하였었다.
[13-14절]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 . . .
들릴라는 삼손에게 말했다.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삼손은 그에게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고 말했다. '위선'(맛세케스)은 '베틀체의 실이나 천'을 가리킨다. 들릴라는 바디로 그의 머리털을 단단히 짰다. '바디'는 베틀의 핀을 가리킨다. 들릴라가 그에게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고 하였으나, 삼손은 잠을 깨어 직조틀의 바디와 위선을 다 빼어 내었다.
[15-17절]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 . . .
들릴라는 삼손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고,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삼손은 그에게 진정을 토하였다. '진정'이라는 원어(콜 립보)는 '그의 모든 마음'이라는 뜻이다. 삼손은 말하기를, "내 머리에는 삭도(모라)(razor, 면도칼)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고 하였다. 나실인이 머리를 깎지 않는 것은 율법에 규정된 바이며(민 6:5),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모친에게 지시한 바이기도 하였다(삿 13:5).
[18-22절] 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 . . .
들릴라는 삼손이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번만 올라오라"고 통보하였다. 블레셋 방백들은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왔다. 들릴라는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다. 들릴라는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고 말했다. 삼손은 잠을 깨며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고 말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그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다. 그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본문 22절은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고 은혜로운 암시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23-27절]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 . . .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라고 말하며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였다. 또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말하기를, "우리 토지를 헐고 우리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그들의 신을 찬송하며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고 하였다. 그들은 감옥에서 삼손을 불러내었고 삼손은 그들을 위해 재주를 부렸다.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우자 삼손은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나로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였다. 블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3,000명 가량이었다.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았다.
[28-31절]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 . . .
삼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또 그는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혔다. 그러자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였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은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였다. 삼손은 이스라엘 사사로 20년을 지내었다.
사사기 16장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음란에 빠지지 말자. 사사 삼손은 말년에 가사의 창녀에게 들어갔었고(1절)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였다(4절). 그는 육신적 욕구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실패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맺는 열매 중에는 '절제'의 열매가 있다(갈 5:23).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당하지 않은 욕구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삼손처럼 실패자가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잘 교훈하였다. 고린도전서 6:12-13, 15-20,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음란에 빠지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서약을 잘 지키자. 삼손은 나실인 서약을 잘 지키지 못했다. 그는 그의 머리를 깎이지 않게 하여야 했다. 삼손이 실패한 가까운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힘을 잃어버렸고 두 눈이 뽑히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몇 가지 서약들이 있다. 첫째, 세례 서약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고 끝까지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 결혼 서약이 있다. 결혼한 모든 부부는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어떤 형편에서든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부부로서의 순결과 의무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셋째, 임직 서약이 있다. 목사나 장로는 그 직분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신구약성경과 우리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성경의 교훈대로 살며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며 섬기기를 서약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우리의 서약들을 성실히 지키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구하자. 삼손은, 비록 범죄하고 실패하였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구하였고 응답을 얻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또 자신을 향해 행한 악에 대해 원수 갚기를 원했다(28절).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그가 기대어 있던 그 건물의 두 기둥을 붙들고 힘을 다해 몸을 굽혔고 함께 죽기를 구했다. 집이 무너졌고 블레셋 모든 방백과 모든 백성이 함께 죽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들이,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29-30절). 삼손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자신을 드려 원수를 갚은 헌신과 희생의 행위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구하자. 시편 86:15-16,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우리는 늘 부족하고 실수가 많은 자이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구하면 이 세상을 승리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근거하고 우리의 담대함과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항상 기도하며 살아가자.
사사기 17장부터 21장까지의 내용은 사사 시대에 두 가지 죄악의 예들을 말씀한 것 같다. 그 하나는 우상숭배의 죄악이며 다른 하나는 음행의 죄악이었다. 첫 번째 것은 미가의 집과 단 지파의 우상숭배의 예를 기록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베냐민 지파 기브아의 음행의 예를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사사 시대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대표적인 두 가지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1-3절]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 . . .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은 1100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은 1100개, 아마 1100세겔은 삼손 때 블레셋 방백들이 들릴라에게 준 금액으로서 매우 큰 액수이었다. 미가는 그것을 어머니에게서 도둑질하였으나, 어머니의 저주의 말씀을 듣고 아마 두려운 마음이 들어 어머니께 사실을 고한 것 같다. 어머니의 돈을 훔친 것은 큰 죄이다. 잠언 28:24,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의 고백을 듣고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여기에 도덕적 혼란이 있는 것 같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마땅히 엄히 책망했어야 했다. 죄의 고백이 결코 복받을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가 이미 저주를 선언한 후이었다. 그는 쉽게 저주하고 쉽게 축복한 것 같다. 그것은 다 도덕적 결함이었다.
미가가 은 1100을 그 어머니에게 도로 드리자, 어머니는 말하기를,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고 하였다. 미가의 어머니의 경건은 순수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의 아들을 위해 한 신상을 새기며 부어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을 위하는 행동이 아니고 아들을 멸망케 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아들을 참으로 위하려면 모든 우상을 버리고 모든 우상숭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했다. 또 미가의 어머니는 이런 우상을 만들기 위해 그 은을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기를 원했다. 이것은 참으로 무지와 혼란일 뿐이다.
[4-5절]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 . . .
미가가 그 은을 어머니에게 도로 드리자, 어머니는 그 중 은 200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고 그 신상들은 미가의 집에 있었다. 우상숭배는 미가의 어머니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미가의 집에는 신당이 있었고 그는 에봇과 드라빔도 만들었다. 에봇은 제사장의 옷들 중 하나이다. 또 드라빔은 가정수호신으로 섬기는 우상이다. 창세기 31장에 보면,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신상인 드라빔을 훔쳐 자기 약대의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아서 그것을 숨긴 일이 있다. 미가는 또 자기 아들들 중 하나를 세워 제사장을 삼았다.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만 될 수 있는 직분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던 미가는 에브라임 지파의 자손이었을 것이다. 그가 후에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을 보면 그는 레위 지파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 아들들 중 하나를 임의로 세워 제사장을 삼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악이었다. 이와 같이 미가는 열렬한 우상숭배자이었다.
[6절]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본문은 사사 시대를 가장 잘 묘사한다. 사사기 맨 끝 구절도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말한다(삿 21:25).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주관주의와 인본주의의 넓은 길을 걷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통일된 하나님의 지식이나 통일된 신앙적 지식이 없었다. 진리 안에서의 다양성은 좋은 것이지만, 진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 그것도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견해를 용납하는 것은 영적 혼란일 뿐이다. 사사 시대가 바로 그러한 종교적 포용주의 혹은 다원주의의 시대이었다. 그것은 결국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이다. 바른 길은 인간의 주관적 사상을 버리고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바른 사상을 가지고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다.
[7-9절]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 . . .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었다. '유다 베들레헴'은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수 19:15)과 구별된 표현으로서 사사기 17장과 19장 및 룻기 1장 등에 나온다. 그 소년은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하였다. 이 사람은 거할 곳을 찾으려고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렀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지역에서 그들의 거처할 성읍으로 여섯 개의 도피성을 포함하여 48개의 성읍들을 얻었었다(수 21:1-4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잘 바치지 않음으로 생기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레위인들이 경제적 안정을 찾아 방황한 것 같다. 미가는 자기 집에 방문한 그 레위 소년에게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뇨?"라고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고 하였다.
[10-11절]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 . . .
미가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레위인은 제사장이 될 수 없다. 단지, 그들 중 아론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가는 그 레위 소년을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초청한 것이다. 그 레위 소년은, 아마 경제적 어려움을 가진 터이었으므로, 그 초청을 수락하고 그 집에 들어갔고 그와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다. 그것은 그가 미가의 아들 중 하나같이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12-13절] 미가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 . . .
미가는 그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였고 그는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거하였다. 그러자 미가는 말했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미가는 매우 종교적이었고 열심이 있었고 하나님의 복을 사모했으나,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보다 오히려 그의 징벌을 받기에 적합하였다.
본장은 사사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예로 증거한다. 그것은 특히 지식의 어두움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현실이었다. 미가의 가정은 가정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그의 모친은 우상숭배자이었다. 미가 자신도 우상숭배자이었다. 그의 아들도 우상숭배자이었다. 미가의 집에는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이 있었다. 그의 집에는 우상을 모셔 놓고 그를 섬기는 신당이 있었다. 그의 집에는 하나님이 인정치 않는 제사장이 있었다. 미가는 처음에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다가, 그 다음에는 자기 집을 우연히 방문한 한 레위 소년을 제사장으로 세웠다. 그 레위 소년은 마땅히 그 제사장직을 거절해야 했으나, 그는 경제적 안정 때문에 그 직을 수락했다. 그는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었다.
이런 어두움에 덧붙여 도덕성의 혼란도 있었다. 어머니의 거액의 돈을 아들 미가는 도둑질하였었다. 어머니는 그 돈을 훔친 자를 저주하였으나, 아들이 그 범인이라는 자백을 듣고 그를 책망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축복하였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뒤죽박죽의 혼란이었다. 우리는 현실의 삶에서 진리와 사랑을 둘 다 유지해야 한다.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지 않는 곳에는 도덕적 혼란만 있을 것이다.
본문 6절이 증거하는 대로, 사사 시대의 특징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관주의, 인본주의, 종교적 다원주의이다. 그것은 결국 멸망에 이를 넓은 길이다.
본장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우상숭배를 버려야 한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우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다 우상이다. 우리에게 하나님 대신에 절대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은 다 우상이다. 우리의 절대적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종적, 절대적 의미이시며 가치이시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어두움에서 방황하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참된 경건성을 회복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성경책에 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 66권에 다 계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책에 정통해야 한다. 오늘날처럼 여러 사상과 주장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더욱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귀를 기울이며 그 교리와 생활 교훈에 집착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건전하게, 주관적이지 않게 해석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성경의 교훈대로 도덕적이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거기에 도덕적 온전함이 있다. 죄인들은 구원을 받고 도덕성의 회복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온전한 인격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주의 말씀은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다(시 119:105). 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1절]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사사 시대에, 단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했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 단 지파는 여호수아 때에 이미 소라와 에스다올과 아얄론과 에그론 등의 성읍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 기업으로 얻었으나(수 19:40-46), 사사기 1:34에 보면,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다른 곳에서 기업의 땅을 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2-6절]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 . . .
단 자손들은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온 가족 중 용맹 있는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살피게 하였다. 그들은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 유숙하였다. 그들은 거기에서 레위 소년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 말했다.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그는 그들에게 미가가 여차여차히 그를 대접하며 그를 불러 그로 제사장을 삼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분별하고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청했고, 그 제사장은 그들에게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말했다.
[7-10절]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 . . .
이에 그 다섯 사람은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보았는데 그들은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평안하였고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아무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와서 그 형제들에게 이르러 보고하였다.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말라. 너희가 가면 평안한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11-16절] 단 지파 가족 중 600명이 병기를 띠고 . . . .
그래서 단 지파 가족 중 600명이 병기를 띠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떠나 올라가서 유다 기럇여아림에 진쳤다. 이러므로 그 곳 이름이 사사기를 쓸 당시에도 마하네단 즉 단의 진영이라고 불리웠다. 그곳은 기럇여아림 뒤에 있었다. 무리는 거기서 떠나서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렀다. 이전에 라이스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다섯 사람은 그 레위 사람 제사장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문안하고 단 자손 600명은 병기를 찬 채로 문 입구에 섰다.
[17-20절]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 . . .
땅을 탐지하러 갔던 그 다섯 사람은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만든 신상을 취하였다. 그것은 명백히 강도짓이었다. 그때 제사장이 병기를 띤 600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다가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그 제사장은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갔다. 그 레위 사람은 전혀 의와 진리 안에서 행하지 않았다.
[21-26절] 그들이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 . . .
그들은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였다. 본문의 어린아이들은 그 제사장의 자녀들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이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들을 따라와서 그들을 불렀다. 그들이 낯을 돌이켜 미가에게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지고 왔느냐?"고 말하자, 미가는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고 대답했다. 그러나 단 자손들은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고 말한 후에 자기들의 길을 갔다. 단 자손들은 미가의 우상들을 강탈하였고 그들을 따라온 사람들을 죽음으로 위협하였다. 우상숭배는 부도덕과 친구이다. 참 경건만이 정직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을 동반한다. 미가는 단 자손들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다.
[27-29절] 단 자손이 미가의 지은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고 . . . .
단 자손들은 미가의 지은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고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살랐으나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다.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상거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 자손들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였다.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이었다.
[30-31절]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 . . .
단 자손들은 자기를 위해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다. '모세'라는 본문은 히브리어 전통본문에 '므낫세'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은 마소라 학자들이 구약성경에서 그 글자의 진실성을 의심하여 글자를 정상적인 줄 위에 걸어놓은 네 곳 중의 한 곳이다. 즉 마소라 학자들은 이 구절을 므낫세보다 모세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 듯하다. 모세라는 본문이 맞다면 그가 레위 소년이라는 뜻에도 맞다. 그러나 므낫세라고 하면 어려움이 있다. 또 성경에는 레위 자손 중에 므낫세라는 이름의 아들이 없는 것 같다.
'사로잡히는 날까지'라는 표현은 사무엘이나 사울 때에 블레셋에게 패배한 때를 가리키든지, 아니면 북방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때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미가가 만든 새긴 신상이 단 자손들에게 있었다. 사사시대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이었다. 단 지파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사사 시대의 한 예로서, 단 지파의 다섯 명의 정탐꾼이나, 선발된 600명의 병사들이나, 단 지파 전체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사사 시대에는 거짓된 신들, 거짓된 제사장들, 거짓된 예배들이 유행하였다. 오늘날에도 교회들 속에 여러 가지 혼란한 일들이 많다. 물질주의, 명예주의, 쾌락주의, 심지어 부패된 음악과 예배들이 들어와 있다. 더 이상 경건하고 거룩한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 교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성경의 교훈대로만 믿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이 밝히 계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그의 재림만 소망해야 한다.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대로,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올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야 한다.
본장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성읍의 동성애와 집단 강간의 악행을 부끄러운 일을 그대로 기록하여 증거한다. 성경은 이런 심히 부끄러운 일도 사실 그대로 기록한다. 이것은 인간의 극악한 부패성과 구약 교회의 심각한 부패상을 증거한다.
[1-3절]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 . . .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라는 말은 사사 시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사건이 사사 시대의 언제쯤에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 구약시대에 일부다처(一夫多妻)가 일시적으로 허용되기도 했지만,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와 최초의 결혼사건에서 보듯이,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경건했어야 하는 이 레위인은 육신의 감정에 있어서 연약했고 절제심이 적었고 한 아내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의 첩은 음행하였고 그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의 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이나 보내었다. 음행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重罪)이다. 이 첩은 행실이 단정치 못했을 뿐 아니라 아내의 의무에 성실치 않은 자이었다. 그러나 그 남편은 그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기 위해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갔다. 그는 너그러운 용서심을 가진 자이었다. 여자는 그를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여 들였고 그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보고 환영하였다.
[4-15절] 그 첩장인 곧 여자의 아비가 그를 머물리매 . . . .
그 첩의 장인은 그를 삼일 동안 머물게 하였고 그와 함께 거하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였고, 나흘째 날에도 그를 머물게 하였고 다섯째 날에도 그렇게 하려 하였으나, 그 레위인은 해가 기울어가는 때에 일어나 떠났고, 해가 지려하는 때에 여부스 곧 예루살렘 맞은편에 이르렀다. 안장 지운 나귀 둘과 첩이 그와 함께하였다.
종이 주인에게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라고 청하였으나, 주인은 그에게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고 말하며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나아가 거기서 유숙하자"고 하였다. 그들이 다 앞으로 가서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자 해가 졌다. 그들은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다. 경건과 이웃 사랑은 같이 간다. 악한 자는 불경건할 뿐 아니라, 이웃에게 친절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이웃 사랑도 없다.
[16-21절]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 . . .
이미 저물어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왔다.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이었고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이었다. 노인은 눈을 들어 성읍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물었다.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뇨?" 그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보리가 있으며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 우리들과 함께한 소년의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노인은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내가 처리하겠으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고 말하며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며 그들은 발을 씻고 먹고 마셨다. 그 노인은 인정이 있는 선한 자이었다.
[22-26절]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 . . .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 즉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기를,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하였다. '상관하다'는 원어는 '안다'는 뜻으로 '성관계를 가지다'는 뜻이다. 그 불량배들은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나 나그네에 대한 친절이나 예절이 없었고 폭력적이었고 음란하였다. 특히 그들은 동성애적 음란 행위를 원하였다. 그것은 마치 소돔 고모라 시대의 상황과 비슷하였다(창 19:5).
집 주인인 그 노인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했다.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망령된 일'이라는 원어(니발라)는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악행'이라는 뜻이다. 그는 두 번 "이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고 말했다. 두 번째의 원어는 강한 금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노인은 경건하고 도덕성이 있는 자이었다. 그의 딸이 '처녀'이었던 것도 그 사실을 증거한다.
무리가 노인의 말을 듣지 않자, 그 레위인은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었고 그들은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며 새벽 미명에 그를 놓아 보내었다. 집단 강간을 한 것이다. 동틀 때에 그 여인은 그 주인의 우거한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누웠고 마침내 죽었다.
[27-30절]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 . . .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였는데,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고 말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가서 자기 동네에 돌아가서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그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었다. 그것을 보는 자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고 말했다.
사사시대의 두드러진 두 가지 죄악은 우상숭배와 음란이었다.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은 그 두 가지 죄악의 예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단 지파의 우상숭배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냐민 지파 중 기브아의 음란이었다. 기브아의 음란은 불량배들의 동성애의 요구와 집단적 강간으로 나타났다. 우상숭배와 음란은 모든 시대에 모든 인간 사회의 두드러진, 대표적인 두 가지 죄악이다.
어떻게 이스라엘의 한 지파에 이런 부패함이 있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작은 죄악의 포용이 한 지파 전체의 분위기를 부패시킨 예일 것이다. 작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는 성경 말씀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분위기가 중요하다. 경건한 분위기, 도덕적 분위기, 작은 죄도 용납지 않는 분위기, 작은 죄라도 통분히 여기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경건하고 도덕적인 분위기를 잘 유지하지 않고 사상적, 도덕적 작은 죄를 포용할 때 점차 영적 감각이 무디어져서 큰 죄를 포용하게 되고 마침내 온 교회, 온 사회의 심각한 사상적, 도덕적 부패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음행을 피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음행은 죄악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3-5에서 교훈하기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고 하였다. 또 히브리서 13:4은, 혼인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은 것이지만,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또 인간편에서도 우리는 거룩하게 살려는 굳은 결심과 성실한 노력을 해야 하고, 또 하나님이 주신 방법인 좋은 부부관계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주신 이유 중 하나가 음행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고린도전서 7:2-3은,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 말한다. 좋은 부부관계의 유지를 통해 음행은 예방된다. 오늘날같이 심히 음란한 시대에, 성도들은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함으로 음행을 예방해야 한다.
또 우리의 교회, 우리의 공동체는 어떻게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베냐민 지파처럼 도덕적 해이와 부패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교회의 순결, 공동체의 순결은 권징의 성실한 시행으로만 가능하다. 권징이란 잘못한 이에 대해 권면하고 책망하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회개치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말한다. 교회나 공동체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분위기를 보존해야 하고, 교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가지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권면하고 책망하여 건전한 분위기를 유지함으로써 공동체의 순결성이 보존될 것이다. 교회에 권징이 성실히 시행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점차 교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고 마침내 심각한 부패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1-3절]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 . . .
모든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다. 본장에 '일제히'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두 번은 '일제히'라고 번역되었고(1, 8절) 한 번은 '하나같이'라고 번역되었다(11절). '일제히' 혹은 '하나같이'라는 원어(케이쉬 에카드)는 '한 사람같이'라는 뜻이다. 세 번째의 경우는 '합심하여'라는 단어(카베림)가 첨가되었는데, 그 단어는 '연합하여'라는 뜻이다. 비록 기브아와 베냐민의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의 단합은 깨어졌지만, 그 나머지 지파들은 일치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한 사람같이 모였다.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40만명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도 들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 아내의 시체의 조각을 각 지파에 보낸 그 레위인에게 이 악한 일의 상황을 말하라고 하였다.
[4-7절]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 . . .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은 대답했다.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라.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본문에 '음행'이라는 원어(짐마)는 '악행, 음탕함'이라는 뜻이며, '망령된 일'이라는 원어(네발라)는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뜻이다. 기브아인들의 집단적 강간은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8-11절]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가로되 . . . .
모든 백성은 일제히, '한 사람같이' 일어나 말했다. "우리가 하나라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며 하나라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우리가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 뽑아서 그들을 치되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에 열, 천에 백, 만에 천을 취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예비하고 그들로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하나같이 연합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다.
[12-14절]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행하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이 어찜이뇨? . . . .
그들은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행하며 말하였다.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이 어찜이뇨?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그러나 베냐민 자손은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도리어 각 성에서 기브아에 모여 나가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였다.
[15-18절] 그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 . . .
그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용사의 수는 26,000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거민 중 택한 자가 700명인데 그들은 다 왼손잡이였고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전사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의 용사들의 수는 40만명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갔고 거기서 하나님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고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먼저 가라"고 말씀하셨다.
[19-23절]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 . . .
이스라엘 자손은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해 진을 쳤다. 그들이 전투대형을 갖추고 베냐민 자손과 싸웠으나 베냐민 자손은 이스라엘 사람 22,000명을 땅에 엎드러뜨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투대형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대형을 갖추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는 "올라가서 치라"고 말씀하셨다.
[24-28절]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 . . .
그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갔고 베냐민도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 다시 이스라엘 자손 18,000명을 땅에 엎드러뜨렸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틀 동안 40.000명이 전사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이틀 동안의 전쟁에서 패배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기브아의 죄악에 대한 권징을 일찍 실행하지 않은 죄에 대한 징벌일 것이다. 기브아의 음란한 소문은 일찍 이스라엘의 다른 곳들에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에 틀림없다. 작은 누룩은 마침내 베냐민 지파 전체에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다. 권징을 성실히 실행치 않은 죄는 적은 죄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와 음행은 단 지파나 기브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 전반의 문제이었던 것 같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징벌하셨다고 보인다.
베냐민에게 또 패배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벧엘로 올라가서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고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렸다. 그때에 하나님의 언약궤는 벧엘에 있었고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것을 섬겼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물었다. "우리가 다시 나가 우리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그들이 두 번이나 패배하자 그들은 마음 속에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여호와께서는,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면 그들이 승리할 것이다.
[29-32절] 이스라엘이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하니라. . . .
이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하였다. 그들이 제3일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를 대하여 전투대열로 서자 베냐민 자손은 나와 이스라엘 백성을 맞았고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다. 그들은, 큰길 곧 한편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요 한편은 기브아의 들로 가는 길에서 백성을 쳐서 이전처럼 이스라엘 사람 30명 가량을 죽이기 시작하자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고 스스로 말했고, 이스라엘 자손은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길로 꾀어내자"고 말하였다.
[33-37절]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그 처소에서 일어나서 . . . .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 그 처소에서 일어나서 바알다말에서 전투대형으로 섰고 그 복병은 그 처소 곧 기브아 초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초장'이라는 원어(마아레)는 '빈 들판'이라는 뜻이다(BDB). 온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택한 사람 10,000명이 기브아에 이르러 쳤고 싸움이 심히 맹렬하였으나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쳐서 파하게 하셨으므로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 사람 25,100명을 죽였다. 그때에야 베냐민 자손은 자기가 패한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38-42절]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상약하기를 . . . .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서로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미는 것으로 작전신호를 삼자고 하였다. 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갔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30명 가량을 쳐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들이 정녕 처음 싸움같이 우리에게 패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연기 구름이 기둥같이 성읍 가운데서 일어날 때에 베냐민 사람은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음을 보았고 이스라엘 사람은 물러가던 걸음을 돌이켜 베냐민을 공격하였다.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이켜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들을 다 죽였다.
[43-48절] 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쌌더니 . . . .
그들은 베냐민 사람을 포위하였고 기브아 앞 동편까지 쫓으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았다. '쉬는 곳'이라는 원어(메누카)는 '쉬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地名)인 것 같다(BDB).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18,000명이었는데 다 용사이었다. 베냐민 자손은 림몬 바위를 향해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큰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또 5천명을 이삭 줍듯 하였고 또 급히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2천명을 죽였다. 이 날 베냐민의 용사들 중 엎드러진 자가 모두 25,000명이었다. 베냐민 자손 중 6백명은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베냐민의 땅으로 돌아와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들을 다 칼날로 쳤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다. 도망한 6백명 외에는, 한 지파가 거의 다 멸절되었다.
이렇게 베냐민 자손은 큰 징벌을 받았다. 그들이 이처럼 큰 징벌을 받은 까닭은 기브아 성읍의 음란한 불량배들을 징벌하지 않고 두둔하고 도리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만했음에 틀림없다. 교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이행과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고 그것은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본장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거룩과 연합을 잘 지켜야 한다. 우선, 교회는 거룩하며 또 그 거룩함을 잘 지켜야 한다. 교회는 법적으로 거룩하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실제적으로도 거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엡 5:26-27).
교회는 또 연합을 힘써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들은 다 한 몸이다. 교회는 이 하나됨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한다(엡 4:1-3). 우리는 교회의 거룩과 연합을 잘 지키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에 권징이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권징이 없는 교회는 사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해이해진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롬 16:17), 또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고 하며, 또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고 한다(고전 5:11-13). 교회는 성경의 교훈대로 권징을 성실히 시행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모든 죄를 버리고 겸손히 의와 선만 실행하자. 경건과 의, 성결과 선을 행하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며 하나님의 뜻이고 평강과 영생의 길이다.
[1-4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 . . .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고 맹세하였다. 그들은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그들의 통곡은 한 지파가 거의 멸절되었기 때문에 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튿날 일찍 일어나 거기서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번제는 속죄와 헌신을 상징하며 화목제는 속죄와 교제를 상징한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속죄의 은혜를 구하며 헌신을 다짐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한 것이다.
[5-7절]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 . . .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과 전쟁하기 전에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맹세하였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인가라고 말하며, 한 지파가 거의 멸절되었음을 슬퍼하였고 베냐민의 남은 자들에게 아내를 얻어주며 그 지파를 회복케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지파의 회복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8-12절] 또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 . . .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들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할 때 하나도 거기 없었다. 이스라엘 회중은 큰 용사 12,000명을 그리로 보내며 명하기를,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 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또 남자와 잔 여자를 다 죽일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들은 임무를 행하며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400명을 얻었다. 그들은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이었다. 그들은 실로의 진으로 끌려왔다.
[13-15절]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보내어 . . . .
온 회중은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고 그때 베냐민의 남은 자들이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베스 길르앗 여인들 중에서 살려둔 처녀들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오히려 부족하므로 그들은 베냐민을 위해 뉘우쳤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비게 하셨다.
[16-18절] 회중 장로들이 가로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 . . . .
회중의 장로들은,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라고 말하며, 또 "베냐민의 도망하여 면한 자들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회복을 위해 생각하였고 배려하였다. 그들은 잘못했던 형제들에 대해 너그러운 사랑을 가졌다.
[19-21절] 또 가로되 보라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 . . .
그들은 한 방책을 생각해내었다.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편 실로에 해마다 여호와을 위한 절기가 있었다. 그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명하기를, "가서 포도원에 숨어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 한 맹세를 어기지 않고 베냐민 지파를 회복시킬 한 방도라고 생각하였다.
[22절] 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 . . .
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고 말하였다.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는 원어(콘누누 오삼)는 "우리를 위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라"는 뜻이며 그렇게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BDB, KJV).
[23-25절]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 . . .
베냐민 자손은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거하며 성읍들을 중건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절)는 말씀은 사사 시대의 형편을 가장 잘 요약한 구절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왕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를 추종하지 않고, 왕이 없는 자들처럼 자신들의 생각대로 살았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장은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께 한 맹세를 지킨 예를 증거한다. 그들은 맹세한 대로 야베스 길르앗을 징벌하였다. 또 그들은 맹세한 대로 베냐민 자손에게 딸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맹세를 지켰다.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며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전도서 5:4-6,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시편 15:4,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한 맹세를 중시하며 지키자.
둘째로, 본장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인 베냐민 지파에 대해 긍휼의 마음을 가진 것을 증거한다. 비록 베냐민 지파가 잘못하여 징벌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거의 멸절된 그 지파를 긍휼히 여기며 그 지파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며 그 방책을 모색하였다.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배려하는 것이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5,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로마서 15:1-2,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형제를 책망하며 징벌할 때에도 우리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6:1-2,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4-15,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디모데후서 2:24-26,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던 저희로 깨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까 함이라]." 우리는 형제에 대해 긍휼과 배려의 마음, 곧 참된 사랑의 마음을 가지자.
셋째로, 본장은 사사 시대의 실상을 증거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절). 왜 이스라엘에게 왕이 없었는가? 옛부터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아니신가?인간 왕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왕이 아니신가? 우리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며 하나님의 주신 계명과 교훈을 법전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고 십계명을 주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출애굽기 20:3-1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 열 가지의 계명은 우리의 생활의 지침이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머리말
우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은 모든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신념이다. 누구든지 무엇을 주장하려면 성경에 근거해서 주장해야 하고 누구든지 무슨 이의를 제기하려면 성경에 근거해서 제기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목회 전반, 목사의 설교나 지교회 혹은 전체 교회의 모든 활동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우리는 성경을 제쳐놓고 무슨 활동을 계획하거나 수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룻기의 저자는 전통적으로 사무엘이다. 유대교의 바벨론 탈무드는 "사무엘이 그의 책과 사사기와 룻기를 썼다"고 말한다(Baba Bathra 14b). 본서의 끝에 다윗에 대한 언급을 보면, 사무엘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내다보면서 예언적으로 본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룻기는 나오미 가정의 실패와 회복을 통해서 교훈을 준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난 죄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빈 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하나님의 긍휼로 며느리 룻과 함께 오게 되며 룻을 통해 그 가정은 회복된다.
룻기의 주요 내용은 이방여인 룻의 신앙과 복이다. 또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1) 이방인의 구원, (2) 친족 구속자(고엘)의 역할, (3) 효도 등이다. 특히, 친족 구속자는 메시야의 모형이다.
본문 혹은 각주에 자주 사용된 약어
KJV 영어 King James Version
NASB 영어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 영어 New International Version
LXX 고대 헬라어 70인역
Syr 고대 수리아어역
It 고대 라틴어역
Vg 고대 라틴어 Vulgate역
BDB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 T.
KB 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Poole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NBD The New Bible Dictionary. IVP.
NBC The New Bible Commentary. IVP.
내용 목차 |
[1-5절]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 . .
사사들이 통치하던 때에 유다 땅에 흉년이 들었다. 흉년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국가적 재난이다. 그때에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다. 그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었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마치 오늘날 성도들이 물질적 어려움 때문에 바른 교회를 떠나 잘못된 교회로 가거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나오미의 가족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 거기 유하는 중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다. 그 후 나오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었다. 그들이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한 것도, 또 나오미가 자기 아들들을 그렇게 결혼시킨 것도, 하나님의 법을 어긴 행동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의 모압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과 같이 성경에 금한 것이었다.
그들이 모압 땅에 거한 지 10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도 다 죽고 나오미는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다. 그의 남편이 죽은 것이나 그의 두 아들이 죽은 것은 다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나오미는 그 일들을 하나님의 징벌로 깨닫고 있었다.
[6-10절]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 . . .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권고하다'는 원어(파카드)는 '은혜로이 방문하다, 돌아보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징벌과 재난도 주시지만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돌아보신다. 나오미는 그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을 떠났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였다.
그러나 나오미는 돌아오는 중에 생각이 바뀌었던 것 같다. 그는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두 며느리는 착한 여자들이었던 것 같다. 나오미는 그들이 죽은 자들과 자기를 선대했다고 증거한다. 또 그는 그들이 젊은 과부로 늙지 말고 친정에 돌아가 재혼하여 안정을 얻으라고 권하며 그들에게 입맞추었다. 나오미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그 며느리들에게 진심의 사랑과 배려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 며느리들은 소리내어 울면서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11-14절]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 . .
나오미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 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밤에라도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가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고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행보다 더 그 며느리들의 불행을 마음 아파하였다. 그들은 다시 소리내어 울었고,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며 그에게 입맞추었으나, 룻은 그를 붙좇았다.
[15-18절]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 . .
나오미는 룻에게 말했다.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그러나 룻은 대답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비록 자기 남편이 죽었어도, 홀로된 나이든 시어머니를 버려두고 혼자 가지 않고 그를 보살피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착하고 효심 있는 여자이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부모와 형제들이 믿는 모압 신을 버리고 시어머니 나오미가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자이었다. 그는 시어머니를 통해, 그의 말과 행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오미는 그 며느리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쳤다.
[19-22절]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 . .
그 두 사람은 걸어서 베들레헴까지 이르렀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 사람들은 그들을 인해 떠들며 "이 사람이 나오미냐?"고 말했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나오미는 '기쁘다, 사랑스럽다'는 말(나엠)에서 나온 말이며, 마라는 '쓰다, 괴롭다'는 말(마르)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자신이 모압으로 이민을 떠날 때 풍족하게 나갔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셨고 괴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인간적인 지혜와 계산으로 행했던 모압 이민은 완전히 실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압 땅으로 이민 간 죄와 그의 두 아들을 이방 여인들과 결혼시킨 죄를 엄하게 징벌하셨다.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그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다. 그들은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본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자. 나오미 가정의 실패의 원인은 모압으로 이주한 데 있었다. 그것은 인간적 지혜에 근거한 이주이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배치되는 일이었다. 본장은 나오미 가족이 모압 땅에 갔음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본장에는 '모압'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온다(1, 2, 4, 6, 6, 22, 22절). 하나님께서는 나오미 가족을 치셨다. 그의 남편과 두 아들들은 거기서 죽었다. 그는 풍족하게 나갔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그를 치셨고 심히 괴롭게 하셨다(13, 20, 21절).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어디인가? 그것은 바른 교훈, 성경적 교훈에 세워진 참된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요즈음엔 순결치 못한 교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교회, 순결한 교회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신앙을 저버리거나 성경말씀을 저버리거나 참된 교회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원의 신앙을 굳게 붙들고 참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잘 분별하고 성경적 교회를 선택하여 그 교회에 충실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섭리를 깨닫고 믿자. 하나님께서는 한 때 가나안 땅에 흉년을 보내셨지만, 또 때가 되어 자기 백성을 권고하셨다. 그는 자기 백성을 은혜로 방문하셨고 돌아보셨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아보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한가지 얻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를 끝까지 따른 착한 며느리 룻이었다. 룻은 그에게 실패 중에 큰 위로이었고 장차 그의 가정을 회복시킬 인물이었다. '룻'이라는 말은 '우정, 친근함'이라는 단어(레웃)에서 나온 말인데, 룻은 과연 나오미에게 친근한 벗과 같은 존재이었다. 그는 시부모와 죽은 남편을 선대하였다(8절). 더욱이 그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다(16절). 그는 죽음 외에는 어머니와 자신을 갈라놓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며 굳게 결심하였다(17-18절). 룻은 믿음 있고 착하고 효심 있는 며느리였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여 혹독한 징벌을 받았던 나오미에게 룻을 통해 큰 위로를 주셨다. 이것이 룻기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고 오늘날도 하나님의 긍휼의 섭리가 변함 없음을 깨닫고 믿자. 또 그가 우리 모두를 가장 선한 길로 섭리하심을 믿자.
셋째로, 우리는 본장을 통해 이방인의 구원을 감사하자. 룻은 모압 땅에서 태어난 모압 여인 즉 이방 여인이었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복과 상관없어 보이는 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 룻을 한 성경책의 중심내용과 이름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어 택함받은 이방인들도 다 구원을 얻는 것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도 그들 중에 속해 있다. 우리는 이 일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 이 복음을 온 세계에 널리 전파하자.
모압 땅에 이민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며느리인 룻과 함께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1-3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 . . .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에 한 유력한 자가 있었다. '유력한 자'라는 원어(이쉬 깁보르 카일)는 '힘 있고 부요한 자'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였다. 또 전장에 이어서(1:4, 22) 본장에서도 룻을 '모압 여인 룻'이라고 3번이나 표현한다(2, 6, 21절). 룻기는 룻이 모압 여인 즉 이방 여인이며 그 이방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강조한다.
룻은 나오미에게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추수기에 이삭을 줍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하는 일이었다. 룻은 자존심을 버리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 하였다. 나오미는 그에게 "내 딸아 갈지어다"라고 말했다. 그는 며느리를 딸이라고 불렀고 그의 선한 소원을 존중하였다.
룻은 가서 곡식 베는 자들을 따라 밭에서 이삭을 주웠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 룻기는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조상인 오벳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보아스와의 인연은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간편에서는 우연한 일이었지만, 하나님편에서는 모든 일이 작정된 일이며 그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고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적 진리이다. 이사야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4-7절]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 . . .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곡식 베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자, 그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보아스'는 후에 솔로몬 성전 앞 두 기둥 중 하나와 같은 이름으로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보아스는 그 이름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또 그의 밭에서 일하는 자들도 그러하였던 것 같다. 보아스는 룻을 보고 곡식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물었다. "이는 뉘 소녀냐?" 곡식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은 대답했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그 사환의 증거대로, 룻은 성실하고 근면한 여자이었다.
[8-10절]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 . .
보아스는 룻에게 말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보아스는 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룻은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말했다. 땅에 엎드려 절한 것은 그의 겸손함과 예절 있음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보아스에게 말했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그는 자신이 이방인임을 인식하면서 보아스의 호의에 대해 감사하였다.
[11-13절]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 . . .
보아스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의 선한 성품과 행위는 보아스에게도 이미 들려졌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룻의 선행에 대해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에 대해 상 주시기를 기원하였다. 룻은 말하였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계속 은혜를 얻게 하소서(원문).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룻은 보아스에게 겸손한 마음과 말로 감사를 표현하였다.
[14-16절]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 . . .
식사할 때에 보아스는 룻에게 말했다.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들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그에게 주었고 룻은 배불리 먹고 남았다. 보아스는 룻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풀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는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였다.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17-19절]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 . . .
룻은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다. 한 에바는 약 22리터(1말 1되)이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렸다. 시어머니는 그에게 말하였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은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어머니께 알게 하여 말하였다.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20-23절]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 . . .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말했다.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보아스는 나오미가 증거하는 대로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선한 사람이었다. 나오미는 또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의 가까운 친척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기업 무를 자'라는 원어(고엘)는 가난한 자의 팔린 기업을 그를 대신하여 사서 회복시켜 줄 자를 가리킨다. 레위기 25:25,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모압 여인 룻은 말했다.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내 소년들'이라는 말은 그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가리킬 것이다(NASB, NIV).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말했다.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므로 룻은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어머니와 함께 거하였다. 보리 추수는 무교절 때이며 밀 추수는 맥추절 때이니 추수기간은 약 한 달 반 이상이 될 것이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줄곧 이삭을 주웠다. 그는 자신과 시어머니를 위해 그 한 달 반 동안 끈기 있게 봉사하였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본장은 착한 룻의 모습을 증거한다. 룻은 자신과 시어머니를 위해 이삭을 줍는 힘든 일을 자원하였다. 그는 잠시 집에서 쉰 것 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삭을 주울 정도로 성실하고 근면하였다. 또 그는 겸손하여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보아스에게 땅에 엎드려 절하기도 하였다. 그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에게 한 선한 행위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은 보아스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는 추수기간이 끝날 때까지 끈기 있게 일하였다. 우리는 본장에서 착한 룻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아모스 5:14은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한다. 디도서 2:14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였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본장은 하나님께서 믿음 있고 착한 룻에게 좋은 보상을 해주셨음을 증거한다. 룻은 비록 모압 여인 즉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상을 주셨다. 우선, 룻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을 만났다. 룻이 우연히 한 추수하는 밭에 갔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의 일생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보아스는 힘이 있고 부요한 자이었을 뿐 아니라, 또 경건하고 자비심이 많은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방 여인 룻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 주시기를 기원하였다. 그는 룻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다. 그는 얼마 후 룻과 결혼하게 될 자이었다. 보아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시며 이방인인 우리를 구원하신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보아스를 상으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상에 대해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했다(갈 6:7). 우리가 하나님의 복 받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살고 오직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자.
[1-4절]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 . . .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말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나오미는 며느리를 위해, 그의 행복을 위해, 그가 안식할 곳을 위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며느리를 극진히 생각하고 사랑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이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랑하는 성도들에게서 기대되는 선한 모습이다. 나오미는 룻이 그날 밤 그들의 친족인 보아스에게 조용히 나아가 기업 무를 일을 요청하도록 암시하였고, 또 그 일을 위해 어떻게 행동할 지에 대해서도 일러주었다.
[5-9절]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 . . .
룻은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그는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한 대로 다 하였다. 룻은 온유하고 순종적인 인품을 가진 자이었다. 보아스는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곧 곡식더미 곁에 누웠다. 룻은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다. 밤중에 보아스는 놀라 몸을 돌이켜 보니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었다. 그는 말했다. "네가 누구뇨?" 룻은 대답하였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은 자신을 '보아스의 시녀'라고 겸손하게 표현하며 자신이 찾아온 목적, 즉 그가 그들의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 요청한다.
[10-11절]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 . . .
보아스는 말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貧富)를 물론하고 젊은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는 룻이 육신적 감정이나 쾌락을 추구하여 젊은 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이전보다 더 선을 베푼 것을 칭찬하며 축복하였다. 또 그는 말했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그는 룻의 요청대로 행하겠다고 약속한다. 보아스는 너그럽고 긍휼심이 많은 자이었다.
그는 룻이 현숙한 여자인 줄 그의 성읍 사람들이 다 안다고 증거한다. '현숙한'이라는 원어(카일)는 '힘 있는, 휼륭한, 덕 있는'이라는 뜻이다. 잠언 31장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는 것이 진주를 얻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착하고 부지런한 여인이 그러하다고 증거하였다(잠 31:10-31). 룻은 지혜와 덕을 갖춘 현숙한 여인이었다. 그는 모든 여성들이 본받을 만한 인격의 사람이었다.
[12-13절]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 . . .
보아스는 또 말했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보아스는 경우에 맞게 모든 일을 처리하려 하였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면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그에게 행할 것을 거듭 약속하였다.
[14-15절] 룻이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 . . .
룻은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다. 보아스의 말에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또 보아스는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고 말했다. 룻이 겉옷을 펴서 잡자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었다. 그리고 그는 성으로 들어갔다. 3)
[16-18절] 룻이 시모에게 이르니 그가 가로되 내 딸아 . . . .
룻이 시어머니에게 오자, 그가 말했다.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룻은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고하며 말했다.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시어머니는 말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나오미는 보아스가 신실한 사람이며 약속한 일을 속히 행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본장에서 몇 가지 배울 점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나오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착한 시어머니의 모습을 배운다. 나오미는 며느리의 안식과 행복을 위해 생각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착하고 좋은 시어머니의 모습이다. 나이 든 모든 여성도는 나오미의 착한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룻의 말과 행동을 통해 착한 며느리의 모습을 배운다. 룻은 시어머니의 말씀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였고 자신보다 시어머니를 더 생각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선을 베푸는 착한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그는 현숙한 여인으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룻의 이런 아름다운 점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며 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교훈한다. 에스더는 왕후가 된 후에도 삼촌 모르드개가 명한 대로 그 민족을 고하지 아니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그의 명을 양육받을 때와 같이 좇았기 때문이었다(에 2:20).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며 순복하였다. 베드로전서 3:5-6,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크게 여기고 외모 단장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내면적 경건과 도덕성을 크게 여기며 마음과 인격의 단장을 강조한다. 디모데전서 2:9-11,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베드로전서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나오미와 룻에게 보아스를 통해 복을 예비하셨음을 본다. 보아스는 룻에게 기업 무를 책임을 행하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그의 뜻대로 착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고 은혜와 복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와 복을 사모하고 기대하면서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자.
[1-6절]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 앉았더니 . . . .
보아스는 성문으로 가서 거기에 앉았다. 옛시대에 성문 앞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토론하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공적인 재판을 처리하기도 하는 곳이었다(왕상 22:10). 그때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보아스는 그에게 아무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고 말하니 그가 와서 앉았고 또 성읍 장로 열 사람도 청하여 앉게 하였다. 보아스는 그 기업 무를 자에게 말하였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3절에 '관할한다'고 번역한 원어(마케라)는 '팔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지만(KJV, NASB, NIV), 원문의 완료형 동사는 보통 과거시제로 번역된다. 나오미는 엘리멜렉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모압에서 돌아온 후 생활이 어려워서 팔았던 것 같다. 비록 그 땅의 소유권은 나오미에게 있어서 희년이 되면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지만(레 25:28), 그 동안 그들이 살아가려면, 친족 중에 누가 그 땅을 사주어야 했던 것 같다.
레위기 25:25-27,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보아스의 말을 들은 그 기업 무를 자는 "내가 무르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보아스는 또 말했다.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기업 무르는 일은 가정의 끊어진 대를 잇는 일도 포함하였고, 이것은 신명기 25:5-6의 수혼(嫂婚) 제도에 근거한 것 같다(NBD). 나오미, 즉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려면, 나오미의 며느리 룻을 아내로 취해 자녀를 출산케 함으로써 엘리멜렉의 집의 대를 이어주어야 했다. 그러자 그 기업 무를 자는 말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7-10절]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 . . .
옛적에는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해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었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되었다. 이에 그 기업 무를 자는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고 말하며 그 신을 벗었다. 보아스는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했다.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들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11-12절]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 . . .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은 말하였다.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22절]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 . . .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셨으므로 그가 아들을 낳았다.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말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14-15절을 다시 번역하면,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또 그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이는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가 그를 낳았음이라.'"
14절의 '기업 무를 자'는, 본서의 앞장의 구절들(2:20; 3:9)에 비추어보면, '보아스'를 가리킨다고 보이지만(매튜 풀), 본문 14-15절의 내용에 가장 잘 맞는 자는,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집을 회복시킬 자, 곧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이다(카일-델리취). 손자 오벳은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이며 그의 노년기의 봉양자이다. '생명의 회복자'라는 말은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나오미는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다. 그 이웃의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아들이 출산되었다고 하여 그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벳'은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카일-델리취).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이다. 베레스의 세계(世系), 즉 족보는 다음과 같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룻기 4장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 룻에게 좋은 것을 주셨다. 그는 룻에게 보아스라는 좋은 남편과 결혼하는 복을 주셨다. 좋은 결혼은 분명히 하나님의 복이다.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는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 곧 구속자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구속자이시다. 또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오벳이라는 아들을 주셨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신 복이었다. 그것은 룻의 경건과 헌신과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고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보상하시고 복 주시는 이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나오미에게 큰 위로를 주셨다. 나오미는 모압 이민 생활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며느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다고 말했다. 그는 고향사람들에게 자신이 풍족하게 나갔으나 비어 돌아왔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자신이 믿음 없이 행했던 과거의 생활을 반성하고 회개했음에 틀림없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위로를 주신 것이다. 시편 119편 저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했다. 나오미는 고난을 통해 경건한 자가 되었다. 바울도 큰 고난 중에서 하나님만 의뢰해야 함을 배웠고 또 하나님의 큰 위로를 체험하였다고 고백했다(고후 1장).
우리가 현재 실패 가운데 있고 고난 중에 처해 있을지라도, 깨닫는 죄가 있으면 철저히 회개하면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믿음 중심으로 살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게만 살아가면, 우리는 반드시 좋은 결말을 체험하고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모든 일을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며, 경건하게, 의롭게, 거룩하게, 선하게만 살아가자.
미주
1) 어떤 영어성경들(KJV, NASB)은 히브리어 전통본문대로 ‘므낫세’라고 읽지만, 고대 헬라어 70인역(LXX), 옛 라 틴어역, 라틴어 벌게이트역은 ‘모세’라고 읽는다. ‘게르손’은 원문에 ‘게르솜’이라고 되어 있다.
2) 첫 번째의 ‘행치 말라’는 원어는 알 타아수이지만 두 번째의 ‘행치 말라’는 원어는 로 타아수이다. 로라는 단 어는 강한 금지를 표시할 때만 쓰인다.
3) 어떤 히브리어 사본들과 옛 수리아어역은 “그 여자가 들어가니라”고 되어 있고, 어떤 영어역이 그것을 채택하였 다(KJV, NASB). 그러나 히브리어 전통본문은 “그 남자[보아스]가 들어가니라”고 되어 있다(MT, 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