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Kingdom of Nepal)개요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세계연구23-31p
: 이근후 신은 우리들의 입맞춤에도 있다(길벗 1995)
히말라야 산맥 중앙부의 남반(南半)을 차지하는 나라.
위치 : 아시아 히말라야 산맥 중앙
면적 : 14만 7181㎢ (한반도의 2/3)
인구 : 2249만 9000명(1999)
인구밀도 : 152.9명/㎢(1999)
수도 : 카트만두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네팔어
통화 : 네팔 루피(NRs)
환율 : 68041 NRs = 1달러(1999.10)
1인당 국민총생산 : 220달러(1997)
(1)네팔의 자연
네팔은 히말라야산맥 남사면에 위치하여 동서 850km, 남북 250km의 동서로 긴 국토를 이루며, 북쪽으로 중국의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티베트]와 접하고, 동·남·서쪽은 인도에 둘러싸여 있다. 네팔의 국토는 대체로 대(大)히말라야산맥 ·소(小)히말라야산맥 ·시왈리크산맥 및 타라이라고 불리는 산록 평지의 4개 지역으로 나뉜다. 대히말라야산맥 지역은 티베트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에베레스트산을 비롯한 칸첸중가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등 8,000m급의 고봉이 줄을 이어 네팔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다.
대히말라야산맥 남쪽의 소히라말야산맥은 제3기 조산운동 때에 형성된 산지로 마하바라트산맥이라고도 하며, 대개 해발고도 3,000m 미만의 산들이 불규칙하게 산재하여 군데군데의 곡간(谷間)에 작은 분지들이 열려 있다. 그 중 수도 카트만두가 자리하는 카트만두 분지는 평균 해발고도 1,350m의 고지에 주위 20km 정도의 큰 분지를 이루어 네팔의 심장부가 되고 있다. 시왈리크산맥은 해발고도 600∼1,000m, 평균 너비 30km의 산지로, 산맥의 축(軸)을 따라 동서방향으로 형성된 곡간은 고온다습하고, 산정부는 식생(植生)이 빈약하여 사람이 살기에 부적당하다.
타라이 지역은 힌두스텐 평원의 북단부를 이루는 남부 산록지대로, 너비 20km 정도의 평지가 산록을 따라 띠 모양으로 펼쳐지는데, 근래 농경지 개발이 진척되어 네팔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주요 하천은 코시강(江)·나라야니강·카르날리강 등인데, 그들 하천의 상류는 여러 지류로 나뉘어 히말라야 산계(山系)를 가로지르는 선행하천(先行河川)을 이루고,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하는 것도 있다. 그들 계곡은 인도와 티베트를 잇는 통상로로 히말라야의 중간에서 산맥의 주행(走行)과 평행하게 서북서에서 동남동으로 흐르다가 시왈리크산맥을 횡단하여 갠지스강에 합류한다. 기후는 고도에 따른 변화가 심하며, 전반적으로 몬순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남부 타라이 지방은 고온다습한 아열대기후를 이루나 겨울에는 쾌적하고 서늘하다.
근래 개척이 되긴 했으나 아직 사라수(沙羅樹) 등 삼림이 많아 맹수사냥의 명소가 되고 있다. 대 ·소 히말라야 산지는 여름 기후는 쾌적하나 겨울에 한랭하며, 몬순기(期)의 강설량은 각 곡지(谷地)마다 차이가 있다. 식생은 고도에 따른 변화가 현저한데, 저지와 산간의 곡지에서는 사라수가 주종을 이루고, 그 위쪽으로 떡갈나무류가 많으며, 다시 단풍나무대(帶)·침엽수림대·자작나무대가 차례로 연속되다가 해발고도 3,800∼4,000m에서 삼림한계에 달한다.
(2)네팔의 주민
네팔의 인종 구성은 극히 복잡하나 북방으로부터의 몽골계(系) 인종과 남방으로부터의 인도아리아계 인종이 주류를 이룬다. 주요 종족은 북부의 부티아족(族), 서부의 마가르족·구룽족, 중부의 네와르족·구르카족, 동부의 렙차족·림부족 등이다. 그 중 16세기 중엽 이래 지배민족인 구르카족은 인도의 라지푸트계(系) 종족으로 알려져 있고, 또 흔히 각국의 등산대에 고용되는 셰르파족은 몽골인종의 티베트계 종족이다. 공용어는 인도아리아어계(語系)의 힌디어(語)에서 유래한 네팔어이나, 티베트-버마어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도 꽤 많다. 종교는 힌두교(86%), 불교(8%), 회교(4%)를 믿는다.
(3)네팔의 역사
현재의 카트만두 분지에는 본래 호수물이 괴어 있어서 네팔계곡이라고도 불려 왔는데, 네팔이란 국명은 그 계곡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네팔의 고대사는 전설과 사실(史實)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네팔의 타라이 지방 룸비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7세기 초에는 티베트의 속국이었으나,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서 이슬람교도의 침략에 쫓긴 라지푸트족(族)이 인도로부터 이주하여 옴으로써 인도적인 문화 요소가 섞이기 시작했다. 현재의 지배민족인 구르카족은 라지푸트족과 선주(先住)의 네와르족과의 혼혈족이다.
1769년에 구르카 왕조의 프리트비 나라얀 왕(王)이 네와르족의 제국을 정복하여 오늘날에 이어지는 왕조의 기초를 마련했다. 뒤에 티베트 진출을 꾀하다가 청(淸)나라 군대에 패하고 다시 인도 침입을 꾀하다가 1814년에 영국과 충돌하여 패배하였다. 그 후, 영국과의 조약에 따라 영국 사절(使節)의 카트만두 주재를 인정하고, 나라가 분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846년에 라나 일족(一族)의 장 바하두르 장군이 쿠데타에 의해 전권을 장악하고, 그때부터 라나 일족의 세습 재상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장 바하두르는 영국과의 제휴가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인도의 세포이 반란(1857∼1859) 때 그 진압군으로 다수의 구르카병(兵)을 파견하였다. 그와 같은 대영(對英) 협력체제는 그 후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3년 영국과의 사이에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어 완전독립을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51년에 인도의 지원을 받은 트리부반왕에 의해 왕정(王政)이 부활되고, 1959년에 마헨드라왕에 의해 신헌법에 의한 입헌왕정(立憲王政)이 실현되었으나 1960년 12월 마헨드라왕은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 일부를 수정하여 국왕의 친정(親政)을 폈다. 1962년 12월에 다시 국왕이 기초한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4)네팔의 정치
네팔은 국왕이 국가 원수와 군통수권을 행사한다. 하원은 직선, 상원은 하원에서 선출한 35명과 지역 대표 15명, 국왕이 지명한 10명으로 구성. 임기는 하원 5년, 상원 6년이다. 신헌법하에서의 대의제도(代議制度)는 이른바 판차야트 제도(Panchayat system:평의회제도)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 읍면(邑面) 판차야트에서 전국 판차야트까지 4단계의 피라밋 구조로 형성된다. 전국 판차야트는 입법권을 장악하는 국왕의 자문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아울러 판차야트 제도는 국왕이 주재하는 국가지도회의의 감독하에 놓여 있다. 행정권은 국왕이 지명한 각료로 구성되는 내각(內閣)의 보좌를 얻어 국왕이 행사한다. 따라서 입법·행정의 권한이 대부분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고 특히 국왕이 칙령으로 긴급사태를 포고하는 경우에는 헌법이 정지되어 전 권력을 국왕이 장악한다. 1972년에 마헨드라 왕의 뒤를 이은 젊은 비렌드라왕은 판차야트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지식인의 반정부운동 등으로 인해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90년 2월 이래 민주화운동이 격화, 판차야트 제도가 폐지되고, 복수정당제가 부활하였다. 1990년 11월 비렌드라왕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고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1991년 5월 총선 결과, 네팔의회당이 하원 205석 중 110석을 차지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의회당 서기장이었던 ‘기리자 프라스드 코 이달라’가 새 총리에 취임하였다. 1992년 4월 100% 외자 도입을 허용하는 등 경제자유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같은해 4월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7명 사망, 50여 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외교면에서는 비동맹·중립을 기본으로 하여 ‘네팔평화지대 구상’을 이루기 위해 인접한 인도·중국 및 미국·영국·러시아 등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는 1949년에 우호통상조약, 영국과는 1950년에 평화우호조약을 맺은 뒤 양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고 있으며, 인도와는 1950년에 우호통상조약을 맺고 중국·러시아와도 1960년대 이래 무역협정·경제기술협정 등을 맺고 있다. 1989년 3월 인도와의 관계 악화로 인도로부터 경제봉쇄를 당했지만, 1990년 6월 바타라이 총리가 뉴델리를 방문하여 관계회복에 합의하였다. 1996년 1월 장쩌민 국가 주석이 방문하였다. 부탄으로부터 네팔계 난민 10만여명이 유입돼 동부 난민촌에 수용되었다. 군대는 지원병제이며, 총 병력은 3만 5000명, 1994년 국방예산은 4,230만 달러였다.
네팔 왕궁에서 일어난 대학살의 의문
“사랑에 눈 먼 왕자가 일가를 몰살시켰다”는 공식 보고에 정치적 음모설 무성
네팔 김점기 특파원
네팔 왕실 대학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알려진 디펜드라 왕세자의 시신이 카트만두의 파쉬파티나스 성전에서 태워지고 있다.
네팔은 왕실과 국민 사이의 결속력이 강한 입헌군주국이다. 1768년 프리티비 나랴얀 샤가 네와르족의 제국을 정복, 분열되어 있던 네팔을 단일국가로 통합한 이래 샤 왕조(또는 구르카 왕조)는 11대 국왕 비렌드라(55)의 통치까지 무난히 왕정을 이어왔으며 1990년대 들어서 비렌드라 국왕이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여 절대 왕정을 입헌군주국 체제로 전환했다. 지난 5월까지 네팔 국민들은 비렌드라 왕을 아버지로, 아이스와랴(51) 왕비를 어머니로 여기고 따랐다. 힌두 신앙을 가진 그들에게 국왕은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까지 추앙받았다. 영국 이튼칼리지에서 유학한 지적인 디펜드라(30) 왕세자는 왕실의 든든한 기둥이요, 국민들의 자랑이었다.
왕궁의 대학살, 범인은 왕세자로 지목돼
이런 네팔에서 믿을 수 없는 참극이 발생했다. 네팔연도 2058년 제스타 19일, 서력으로 말하자면 2001년 6월 1일에 수도 카트만두의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국왕과 왕비, 왕세자를 포함한 10명의 왕족들이 총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사건이 발생한 1일 밤은 2주마다 왕실 가족의 모임이 열리는 금요일 저녁이었고 비렌드라 왕의 동생 갸넨드라(현재의 국왕)을 제외한 왕족들이 모여있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여자 친구인 데브야니 라나(22)와의 결혼문제를 놓고 어머니 아이스와랴 왕비와 격론을 벌였다. 디펜드라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서 총을 들고 나와 식사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왕족들에게 마구 쏘아댔다. 가장 먼저 총에 맞은 사람은 부왕인 비렌드라였다. 왕실 일족들에게 총격을 가한 뒤 디펜드라는 자살을 시도했다.
이 사건으로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스와랴 왕비, 니라잔 왕자, 쉬루티 공주, 국왕의 동생 디렌드라 샤 왕자(4일 사망), 국왕의 조카 자얀티 샤 공주, 국왕의 남매인 샤라다 샤 공주 부부, 샨티 싱흐 공주 등이 사망하고 디펜드라 왕세자도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4일 오전 사망했다. 부상한 왕족도 20여 명이나 된다.
왕실 참극이 벌어진 직후 네팔 왕실은 뇌사상태의 디펜드라 왕세자를 국왕으로 선포하고, 죽은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 갸넨드라 왕자를 섭정에 선포했으나 디펜드라가 사망하자 다시 갸넨드라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상은 사건 초부터 흘러나온 목격자들의 말과, 새 국왕 갸넨드라가 등극 직후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최종 보고한 사건의 개요다.
현 국왕 개입설, 인도 개입설 등 음모설 무성
CNN, BBC 등 세계적인 유명 방송국들은 ‘왕실에서 승인하지 않은 결혼 문제’를 부각시켜 보도를 내보냈지만, 네팔 국민의 대부분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왕실 지지자들은 유례없는 왕실 참극 뒤에 숨겨진 진실의 규명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지난 3일 일요일, 비렌드라 국왕 부처 외 희생된 왕족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울부짖으며 운구 행렬을 뒤따랐다. 이는 죽은 왕과 왕비에게 마지막 예의를 표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였다. 카트만두 시내의 국가평의회 건물 앞에서는 시민 수백 명이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4일, 혼수상태의 신임 디펜드라 왕이 결국 서거했다는 슬픈 소식은 네팔 국민들에게 더욱 충격을 안겨주었다.
현 갸넨드라 국왕과 그의 아들 파라스 왕자는 그간 네팔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다. 거기다 참극이 일어날 당시 갸넨드라는 현장에 없었고 파라스 왕자는 현장에서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들 부자는 사건으로 인해 왕권을 차지하게 된,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못하다. 갸넨드라 현 국왕의 반대자들은 이번 사건이 “파라스 왕자가 일으킨 왕실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마오쩌둥계 지하조직 CPN 반군들은 갸넨드라 국왕을 ‘악당’이라고 부르며 갸넨드라 배후설을 퍼뜨렸다. 그들은 네팔 정부가 왕실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이 5년 반 동안 주도한 ‘위대한 인민 혁명’을 분쇄시키려는 것을 고 비렌드라 국왕이 막아왔었다고 전제하며, 비렌드라 국왕 일가의 죽음 배후에는 정치적인 시나리오가 있다고 주장했다. 왕의 이런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용인할 수 없었던 국내의 갸넨드라 세력이 국외의 인도와 결탁하여 이루어진, 반동주의자들의 음모라는 것이다. CPN의 지도자는 학살사건이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 바로 정치적 음모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논박했다.
언론 탄압, 통행금지 …, 불안한 네팔
“왕실 주치의가 납치되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타살되었다” …. 소문은 그치지 않는다. 사건 후 네팔 국민들은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며 나라얀히티 왕궁 앞에 수천 명이 모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격화되자 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 가운데 사상자도 발생했으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4일부터 네팔 정부는 카트만두 일대에 사흘간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검문에 불응하면 현장에서 사살하겠다고 경고했다.
정부는 네팔의 유력한 언론도 강력히 통제했다. 마오쩌둥 계열 반군 지도자의 기고를 실은 신문 관계자들이 국왕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에 앞서 사건 발생 직후 목격자의 말을 인용하여 디펜드라 국왕이 학살극을 저질렀다고 보도한 주간지에 대해서도 여론을 조장하지 말라며 경고 조치했다.
반군들은 “BBC나 CNN과 같은 국제적인 뉴스들도 사실을 조사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고 정부에서 주는 잘못된 보도자료를 싣고있고 국내 뉴스 역시 사실을 감추고 있어 사람들은 여전히 의혹과 미스테리만 가중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수의 네팔 국민들이 이에 공감하지만, 억압되고 경직된 국내 분위기에 눌려 일체의 표현을 자제하고 있다.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대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적극적인 자세로 맹렬히 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위원회도 언론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의문에 명백한 답을 주지 않았다. 조사위원회의 보고가 진행되는 동안 정부는 한편으로 경찰 병력을 동원했다.
사람들은 정부가 통행금지를 다시 선포하고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어 그들의 삶이 힘겨워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래서 현재 아무도 감히 정부에 반대하여 자기 의사를 개진하지 못한다. 진상은 조사·발표되었지만 네팔 국민들의 가슴 속에 이번 사건은 여전히 충격과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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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네팔의 경제
네팔의 토지이용은 영구빙설지(永久氷雪地)를 포함하여 삼림이 32%, 농경지 14%, 목초지 13%로 경지면적은 약 1만 9800㎢이다. 근래 전통적인 토지소유제도의 개혁을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경지의 90% 이상이 라나 일족 등 봉건적 지주계급에 의해 점유되어 있다. 또 계단경작지가 많은 지형이나 고지기후(高地氣候) 등의 조건으로 인해 토지생산성도 매우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이 주종 산업이 되어 취업인구의 약 90%가 농업에 종사하고, 국민총생산의 약 55%, 수출의 80%를 농업생산에 의존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밀·옥수수·콩류·감자 등이고, 또 소·물소·야크·양·염소 등의 축산업도 비중이 크다. 임산자원 및 석탄·철·구리 등 지하자원도 약간 개발되고 있으나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타라이 지방의 목재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급(自給)을 위한 개발에 그치고 있다. 공업은 전부터 인도인에 의해 주트(黃麻) 가공업이 영위되어 온 정도였으나, 근래 주트 ·설탕 ·성냥 ·피혁 ·잎담배 ·목재 ·시멘트 등 경공업 위주의 공업분야에서 국영 ·사영(私營)의 기업들이 생겨나고 있다. 경제의 후진성과 비동맹·중립외교 등으로 인해 네팔의 경제는 외국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주요 원조국은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미국·영국·독일 및 국제기관 등이다. 무역은 여전히 후진국의 무역구조를 보여 주트 ·쇠가죽 ·쌀 ·밀 ·목재 등을 수출하고, 철강 ·기계 ·시멘트 ·화학약품 ·섬유류를 수입하고 있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인도로, 전체수출입의 각각 36%, 33%를 차지한다. 국내총생산은 59억달러(1997)이다.
(6)네팔의 사회
네팔 국민의 90%가 국교(國敎)인 힌두교도이나, 그 밖에 불교도 및 소수의 라마교도·이슬람교도도 있다. 주민의 생활양식은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특히 힌두교도의 카스트 제도(신분제도)는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어왔다. 그러나 신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1963년에는 카스트 제도를 폐지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법령은 카스트 제도의 폐지 외에 종교 ·성별에 의한 법적 차별의 폐지, 일부다처제 ·유아혼(幼兒婚)의 금지, 이혼 및 과부(寡婦)의 재혼 허가 등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성인(成人)의 문맹률은 현재도 80%에 달하고 있다. 근래 교육의 보급에 힘을 기울여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다. 매스컴의 발달도 뒤져 있어, 네팔어(語) 정부기관지인 《고르카파트라》 등 외에 Rising Nepal 등 영자 신문 몇 종만이 발행되고 있는 정도이다.
(7)네팔의 문화
네팔은 여러 층의 석탑, 돌 조각품, 위협적인 눈의 가면, 기도하는 사람의 돌아가는 바퀴, 몽롱한 탕카 두루마리, 티베트의 카펫 등이 그들의 문화를 대변한다. 4줄의 사링히나 프릇을 공중에 매달고 윙윙 울리며 중얼거리는 것은 네팔의 한 음악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힌두의 산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전통 포크 음악가들은 저녁이면 카투만두 계곡에 모여 가면 춤과 고전 춤을 출 때 이 곳에 모여 노래한다.
(8)네팔의 대한 관계
네팔은 1974년 5월 15일에 한국과 수교, 동시에 북한과도 수교하고 남·북한에 다같이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다. 1971년 5월에 한국과 무역협정, 1988년 문화협정,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비동맹 원칙에 의거 남북한 등거리 정책을 펴고 있고 1998년 UN 총회시 한국의 유엔 가입 지지 발언을 했다. 수출입은 액수는 적으나, 네팔의 주요 수입대상국이 되어 인도·일본·미국 다음으로 무역량이 많다. 1998년 현재 대한국 수입은 2,209만 6천 달러, 대한국 수출은 18만 9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철강, 유기화학품, 기계류, 전기용품 등이고 수출품은 양모 카펫, 원피 등이다. 1999년 현재 175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한국인 잘못 용서해요, 찬드라"
일자:2002.5.10 매체:한겨레
외국인 산업연수생으로 왔다가 행려병자로 오인받아 6년4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풀려나 고국인 네팔로 돌아간 찬드라 쿠마리 구룽(46)에게 한국인들이 참회의 뜻을 전하는 성금을 전달했다.(<한겨레> 3월16일치 15면 참조)
지난 3월부터 참회성금 모금운동을 벌여온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최성각 사무처장은 지난달 11일 네팔에 가 성금 1천만원을 전하고 돌아왔다고 9일 밝혔다.
최 사무처장은 “찬드라가 원망은커녕 `못 배우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또 다시 한국인에게 갚을 길 없는 신세를 졌습니다. 내 머리카락 숫자보다 더 많이 받은 이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해 몸둘 바를 몰랐다”고 말했다.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www.fulssi.or.kr)은 다음달 15일까지 모금을 계속해 2차분 성금을 찬드라에게 또한번 전할 계획이다. 최 사무처장은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환대하면서 그렇지 않은 45만 이주 노동자들을 푸대접하는 우리 안의 서열의식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성금모금의 취지를 설명했다.
또 그는 찬드라가 고향 집에서 농사를 돌보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딸의 실종에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웠던 찬드라의 어머니는 지난해 10월 숨을 거뒀다고 덧붙였다.
찬드라는 1992년 한국에 와 서울 광진구의 한 섬유공장에서 일하다 실종됐다. 합법적으로 체류하던 그는 행색이 초라하다는 이유로 행려병자로 분류돼 정신병원을 전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손을 묶이고 강제투약을 당하는 모욕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찬드라는 2000년 3월 이화여대 이근후 교수(정신과)에 의해 발견돼 불법감금 상태에서 풀려났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외국인 산업연수생으로 왔다가 행정착오로 한국의 정신병원에 감금됐던 네팔여성 찬드라 쿠마리 구릉의 고난과 눈물의 세월은 끝나지 않은 것일까.
찬드라 쿠마리 구릉은 지난 93년 행색이 초라하고 한국말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6년4개월간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야 했던 불행한 여인이다. 심지어 손발을 묶이고 강제투약을 당하는 등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학대를 당했다.
그는 2000년 3월 우연히 발견돼 불법감금상태에서 풀려났고 네팔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세의 암흑을 연상케 하는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우리 국민은 오랫동안 눈과 귀를 열어두지 않았거나 애써 외면해왔다. 이와관련, 환경단체인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 지난 3월부터 오는 6월 15일까지 범국민 참회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어 관심을 끈다.
최근 네팔을 방문, 1차 성금을 전달하고 돌아온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최성각사무처장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찬드라 구릉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찬드라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오랫동안 앓다 적지않은 빚을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 찬드라는 “너는 온 세상에 눈물만 뿌리는 사람이다. 네 어머니는 너 때문에 세상을 일찍 떠났다”는 이웃의 싸늘한 시선과 질책까지 받고 괴로워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조차 “넌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시집갈 생각은 아예 접고 내 대신 아버지나 잘 모셔라”는 유언을 찬드라에게 남겼다.
이처럼 참기어려운 수난의 수레바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찬드라가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으로부터 참회의 성금을 전달받은 뒤 어눌한 어조로 했다는 말이 가슴을 친다.
“아! 이 못 배우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또다시 한국인에게 갚을 길 없는 폐를 끼쳤군요.제 머리카락 숫자보다 더 받은 이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겠습니다.”
나쁜 기억보다는 신세진 한국인에게 감사의 마음만 품고 있는 찬드라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야만적 학대를 가한 한국인에게 엄청난 빚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인 연수생 제도가 차츰 자리를 잡으면서 외국인 인권침해 사례가 줄어들고 있다지만 단 한사람에 대한 학대가 있어도 그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얼마전 인도네시아를 취재하고 온 한 동료 언론인의 말은 외국인에 대한 인권 침해가 한국 자체에 대한 증오까지 유발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인도네시아의 한 벽지에서 만난 현지인 목사는 몇년전 한국에 있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한국말 욕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며 한국에 대한 악감정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
세계 곳곳의 위성을 통해 엄청난 TV 광고비를 쏟아부어 국가이미지를 높이려 해도 국민총생산(GNP)이 낮은 국가 출신이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를 멸시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는 한 국가이미지가 추락할 수밖에 없고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권 국가라는 이미지도 뒷걸음질치게 될 것이다.
네팔여성 한국인의 도움을 받다
'THE RISING NEPAL' Kathmandu, Monday, April29, 2002-NATION(3면)
일자:2002.4.28 매체:THE RISING NEPAL
Nature Trail(풀꽃세상) - 환경보전을 위해 일하는 남한의 어느 NGO가 Kaski 지구에 있는 Ghandruk 마을에 (찾아가) 찬드라 구마리 구릉여사에게 576,372루피의 현금을 전달했다.
구룽 여사는 Ghandruk 마을에 사는 거주자인데, 한국에 일하러 갔다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음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찰에 붙잡혀 1993년11월21일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6년여의 기간동안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녀의 상태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어디에 있는지 소재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 문제의 병원에 근무했던 의사중 네팔에서 병원 캠프를 운영했던 의사(이근후 풀씨님)에 의해 찬드라가 네팔인이고, 정신적으로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한국에서 일하는 네팔인들로 이루어진 네팔인공동체와 의사의 도움으로 찬드라는 2000년3월8일 자유가 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건강했으며 정신적으로 아무런 질병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다른 이들의 사소한 실수에 의해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풀꽃세상은 찬드라를 돕기 위하여 2002년 3월15일부터 6월15일을 기한으로 (참회)모금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우리가 (1차)모금한 돈의 전액(1천만원=7,377달러=576,112루피)을 우리는 찬드라님의 댁에서, 그녀의 인생에 대한 사과의 표시로 그녀에게 전달했습니다."라고 풀꽃세상의 최성각씨는 말했다.
최성각씨는 또한, "우리는 아울러 찬드라 꾸마리 구룽님이 겪으신 일과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심심한 사과의 마음을 표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단지 찬드라님을 돕기 위한 시작일 뿐이며, 우리는 한국정부를 대표해서 보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우리는 단지 그녀를 인간적인 견지에서 도운 것일 뿐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욱 그녀와 같은 이들을 도와 나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스태프 리포터 Arun Ranj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