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 마을 김한경 부자는 일제 강점기 울산을 대표하는 부자였다. 일제강점기 우정, 성남, 옥교, 학성동 등 도심에 살았던 울산 사람들은 울산에 김씨 성을 가진 3명의 부자로 김홍조, 김좌성과 함께 우정동 강정 마을에 살았던 김한경(金翰經)을 꼽았다.
김한경은 경주 김씨로 아호가 도삼(道三)이었다. 따라서 옛날 마을 사람들은 이 집안을 ‘도삼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강정 마을은 경주 김씨 집성촌으로 울산이 공업도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 주민들 중 90% 이상이 경주 김씨였다.
강정 마을 김 부자 집이 가장 부자로 살았던 때는 조선 조 말기였다. 김 부자 집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산 것은 조선조 초기로 지금까지 17대가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
▲ 강정 마을의 김한경은 일제강점기 김좌성과 함께 울산 도심을 대표하는 부자로 그 동안 집의 규모는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화려한 사랑채가 남아 있어 옛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김 부자 집은 조선조 말 김한경(金翰經)이 살림을 일구어 부자가 되었다.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던 재산은 150석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는 근면과 검소한 생활을 통해 이 재산을 천석으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울산에 특별한 산업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울산에서 부자가 되는 길은 매년 소작인을 통해 들어오는 식량을 아껴 쓰고 남은 돈으로 논을 다시 사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부자들은 노름을 하거나 소실을 두어 다른 살림을 살지 않을 경우 일 년에 20섬 정도면 가정을 꾸려 갈 수 있었다. 따라서 100여마지기 논이 있는 집은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절약 생활을 하면 한해 논 20마지기를 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김 부자가 천석꾼이 되었을 때도 주위 사람들 중 그에게 논을 팔아 다른 사업을 해보자고 유혹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이런 유혹을 뿌리치고 꾸준히 농사를 지어 살림을 늘려갔다.
천석꾼 부자의 경우 천석을 이루는 것 보다 처음 100석을 만드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었다. 이 때문에 울산의 부자들 중에는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 초기에는 식구 전체가 밥 대신 죽을 먹고 심지어는 하루 한 끼를 굶으면서 남은 돈으로 논을 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 사랑채에 있는 문의 아름다운 모양.
김 부자 집 논은 울산 전역에 있었다. 두동, 두서는 물론이고 청량, 범서, 농소, 덕하에도 논이 널려 있었다. 우정동 집 앞에도 직접 농사를 지었던 상답이 10마지기 정도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벼를 저장하는 창고가 두동 인보와 덕하 마을에 있었고 집에도 200가마니 정도의 곡물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지었다.
일제강점기 이 집안 어른들이 소작인들을 상대로 감평을 할 때 손자 김창식(金昌式)이 가끔 따라 다닌 적이 있다.
‘감평’이란 소작인들이 그 해에 내어 놓을 식량을 정하는 일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소작인들이 쌀을 생산하면 가을에 주인이 7, 소작인이 3의 비율로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확기가 되면 주인 집 집사가 들로 나가 생산된 벼를 보면서 이 비율을 바꾸기도 했는데 이 작업을 감평이라고 했다. 예로 한발이나 홍수가 나 수확량이 적을 경우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바쳐야 할 곡수(穀數)를 줄여주기도 했다. 원래 이 일은 주인의 명에 따라 집사가 한다. 따라서 소작인들 위치에서 보면 가을에 곡수를 점검하기 위해 들로 나오는 집사는 대단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김 부자가 얼마나 부자였나 하는 것은 당시 강정 마을에 지었던 집과 문패에서 알 수 있다. 김 부자집은 일제 말기 강정 마을에 집을 지었는데 강정 마을은 물론이고 울산 도심에서는 가장 좋은 집이었다. 집은 춘양목으로 지었는데 울산 인근에서는 이 나무를 구할 수 없어 강원도까지 사람을 보내 구해왔다. 목재는 배에 실어 울산까지 옮겼는데 당시 나무를 실은 배가 닿은 곳이 장생포였다. 나무는 장생포에서 소달구지에 실어 우정동까지 옮겼다. 당시 목재 운반을 위해 동원되었던 달구지만 해도 20여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집안이 부자였다는 것은 당시 집 대문에 단 문패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는 적십자 회비를 많이 거두기 위해 일정액 이상의 적십자 회비를 내는 집에 대해서는 문패에 따로 아름다운 문양을 붙여 주었는데 울산읍 내에서는 이 문양을 붙인 집이 김좌성과 이 집뿐이었다.
김 부자는 울산농고를 건립 할 때 1000원을 내어 놓는 등 재산의 사회환원에도 힘썼다. 당시 군청 직원의 한 달 월급이 겨우 30원이었고 논 한마지기 가격이 200원 정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1000원은 보통 집안에서 희사할 수 없는 큰 액수였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김 부자는 장남 종룡(宗龍)을 비롯해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중 첫째와 둘째는 서울에서 공부를 시켰고 막내는 일본에 유학을 시켰다. 둘째는 나중에 세무서장이 되었고 셋째는 일본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후 귀국해 철도청 고위직에 있었다.
김 부자는 환갑을 맞았을 때 자신의 재산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 장남에게는 재산의 절반을, 그리고 나머지는 두 아들에게는 반반씩 주었다. 그때 둘째와 셋째 아들이 받은 논이 200~300마지기였으니 장남의 논까지 합하면 1000마지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손자 김창식은 할아버지 덕택으로 서울에서 공부도 하고 또 울산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좋은 의복을 입고 멋을 내는 등 할아버지 덕을 톡톡히 보았다.
김창식은 울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했다. 두동면 잠방골 천석꾼의 자식으로 울산에서 6~7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최영근이 보성 동문으로 한 반에서 공부했다. 당시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중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서울까지 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부자였던 할아버지 덕이었다고 하겠다.
당시 서울에서 유학을 하려면 하숙비와 수업료를 합해 한 달 평균 40원 정도가 있어야 했다. 면서기와 군청 서기의 한 달 월급이 20~30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액수는 상당히 높다.
보성중학교 졸업 후 부산 수산대학으로 진학했던 김창식은 대학 졸업 후 1949년부터 울산농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런데 1952년 5년제 고등학교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누어지면서 그는 제일중학교로 옮겨 물상을 가르쳤다.
수업시간 학생들을 엄하게 다루어 ‘호랑이 선생’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그는 울산교육계에 잘 알려진 인물로 요즘도 제자들 중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교사로 있는 동안 양복을 잘 입어 울산의 제일 멋쟁이었다. 특히 울산농고에 있을 때는 수학을 가르쳤던 김영칠 선생과 함께 마카오 양복을 입고 다녀 주위 교사들의 부러움을 샀다.
김 부자가 일제강점기 건립했던 집은 그 동안 많이 줄어 들었지만 아직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집은 우정동 사거리에서 장춘로를 따라 가다가 구 청아예식장에서 북쪽으로 보면 큰 기와집이 두 채 있는데 이중 뒤편 집이 김 부자가 살았던 집이다.
집 앞에는 우정동 2공용주차장이 있고 이 주차장에서 산길로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에 집이 있다. 김 부자가 살았을 때만 해도 현 공용주차장 터와 또 구 청아 예식장 터가 모두 김 부자 소유의 논이었다. 당초 이 집에는 사랑채 외에도 안채와 머슴들이 살았던 행랑채 등 건물이 많았는데 그동안 가세가 기울면서 땅을 많이 팔아 지금은 김 부자가 살았던 사랑채에 김창식이 살고 있다.
집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실내 구조가 보통이 아니다. 우선 대문이 모두 통목재로 되어 있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원이 넓다. 정원에는 수령이 오래된 향나무와 석류나무가 있다.
사랑채는 이 정원을 남쪽으로 끼고 있는데 4칸 접집이다. 옛날 집은 한일자 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집은 4칸 중 두 칸은 동서로 다른 두 칸은 남북으로 앉아 있다.
그런데 기둥과 마루, 문짝들이 모두 100년 전 건립 당시 그대로다. 특히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창호지가 발려 있고 또 다른 문은 망이 있어 여름에는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 이 외에도 방마다 옷과 이불을 따로 넣은 붙박이장이 있고 부엌에도 위로 다락을 따로 만들어 음식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의 문양도 아름답다. 방문 마다 양각으로 조각해 놓은 각종 문양이 아름다워 과거 이 집의 영광을 보여준다.
대문에는 문패가 두 개 있다. 김창식의 문패는 왼편에 있고 오른편에는 김태문(金泰汶)의 문패가 있다. 김태문은 김창식의 장남으로 얼마 전까지 한나라당 울산시당 사무처장과 UNIST(울산과학기술대학교) 감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