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갓바위 부처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갓바위에 가보면, 전국 방방골골에서 운집한 군중들이 땅에 엎드려 기도를 한다.
갓바위 부처는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나는 갓바위 부처께 기원을 하지는 않지만, 절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들은 무엇을 기원하고 있을까?" 궁금해하기는 한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 공부를 잘하기는 했지만, 특히 중3- 2학기 이후는 즐겁지 않았다.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너무 철이 없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누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녔다.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 서문시장 옆에 얻은 셋방에 함께 살면서 밥을 했다.
그 후 결국 집이 아주 망해서 나는 고1부터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여동생은 학교를 중퇴했고
막내는 국민학생이라 학교는 다녔지만 몇 달 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하루는 교실에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집이 이사를 했으니 찾아오라고 하던데, 이게 집 주소야."
종이에는 북구 대현동 000번지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덧 캄캄해진 신천을 건넌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질퍽해진 비포장길을 걸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대현동 000번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집에 당도하면 삶에 지친 부모님과 공장에서 돌아온 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밤새 공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 쓰러진 듯 잠이 든 누이는
꿈속에서나마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을까.
나는 한번도 그것을 물어보지 못한 채 지금까지 왔다.
나는 기도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학교에는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당시 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그 생각을 했다.
고등학생은 차비를 절반만 받았는데
정부가 말하는 '근로 청소년'은 차비를 어른과 같이 전액 다 받았다.
학생은 돈이 없으니 반만 받고
공장에 다니는 청소년은 수입이 있다고 반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대학 무상교육'을 반대한다.
대학 학비를 받지 않으면
부잣집 아이들은 그만큼 용돈이 늘어날 것이고
생계비를 벌어야 하는 가난한 집 아이들은 여전히 대학에 다니지 못할 것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학비를 면제해주어야 하고
교내에서 근로장학생이라도 하여 생계비를 벌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
대학 무상교육이 되려면
무상의료, 무상주택이 함께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가난한 집 아이들도 마음놓고 학교에 다닐 수가 있다.
무상의료, 무상주택이 대학 무상교육보다 먼저다.
대구외고 전경
2002년 8월 31일자로 대구외국어고등학교에서 퇴직하였다.
1980년 9월부터 경북여상, 경일여고, 현대여고(현, 청운고), 영신고, 신암여중, 신암중, 제일중 교사로,
영천 영동고등학교 전임강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2002년에 대구시 교육위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낙선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종이었지만 9명 당선자 중 최다 득표,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마당을 잃은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처음 가르친 것은 군대에 다녀와서 사범대학을 졸업한 이후가 아니다.
나는 중3 때부터 아이들을 그르쳤다.
집이 경제적으로 망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재학시에는 신암동의 독서실 뒷방에 머물면서
그 독서실에 다니는 중학생들 중에서 개인지도를 받고자 하는 아이가 있으면
독서실 주인이 내게 지도를 맡겼다.
돈이 없으니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에는 갈 수가 없었고,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에 시험을 쳐보라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를 듣고
"졸업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었는데
"전국에 발령이 난다"고 하여 포기를 하고
서울대 사대보다는 학비가 학기당 2천원 비싸지만
집에서(사실은 셋방에서) 다닐 수 있어 현실적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는데
대학생이 된 후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을 가르쳤다.
당시 사범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6만원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그리고 주 2회 방문하는 가정교사 월급이 2만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30만원 수준)
세 집 가정교사를 하면 한 학기 등록금 6만원을 벌 수 있었다.
한 학기 여섯 달 줄곧 가정교사를 하여
한 달분 월급으로 한 한기 등록금을 납부하고
나머지 다섯 달분 월급(30만원, 지금 돈으로 450만원)은
가족의 6개월 생계를 유지하는 데 보탰다(월 70만원 수준).
그런 식으로 생활하는 시간이 6-7년 이어지자
가정교사를 하여 살아가는 일상이 너무나 지겨웠다.
특히 대학 진학 후에는 날마다 가정교사를 했으니 그 지겨움은 진작에 도를 넘었다.
그래서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왜관에 가서 머리를 빡빡 깎고 군용 기차에 몸을 실었다.
현역 장병들이 나눠주는 건빵을 먹다보니 논산에 도착했다.
훈련을 마치고 울산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훈련병 대부분이 전방으로 배치되었는데
그리 가지 않고 울산에 배치된 것은 아주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울산에 당도한 뒤에야 내가 울산으로 배치된 것을 알았지만
울산 부대에 당도하니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등병들은 가족들이 이미 면회를 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울산 앞바다의 처용바위
재미없는 대한민국 남자들은 축구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군대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으로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를 한다.
그 지경이 되면 이제 더 이상 화제가 없다고 한다.
나도 군대에 갔다 왔으니 돌이켜볼 만한 추억이 없을 리 없다.
그렇다고 장황하게 적을 일은 아니니, 교육과 연관이 있는 일은 기록해 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첫댓글 선생님 안녕하세요? 87년 영신고등학교 1학년 6반 학생이었던 이재진입니다. 너무 오래 간만에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소식은 간간히 인터넷을 통해서 접하게 되었는데 이번 대구시 교육감선거에 출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의 카페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현직에 계실 적에도 어린 저희들에게 국어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길과 더 넓은 시야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는데 이렇게 교육감에 입후보하셔서 당선이 되어 더 큰일을 해 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자서전 속의 선생님의 학창시절을 읽으면서 저도 시골출신으로 선생님의 생각과 느낌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또 인사드리겠습니다. 화이팅 丁萬鎭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