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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3:1-5> 에스겔 성전, 여호와의 영광, 담과 문, 문지기, 거룩한 성전, 골방기도, 제사장의 방, 뜰과 주랑, 성소와 지성소
1. 이제 에스겔 성전 부분에 대하여 영적 의미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이번에는 에스겔 성전 부분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번에는 땅의 분배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직선으로 그어진 땅의 경계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남의 영역을 탐욕으로 침범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물로 드려진 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땅과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도 정사각형 가장 완전하고 좋은 것입니다. 다 내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성읍기지, 성읍에서 일하는 온전히 헌신된 11지파 백성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이제 성전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성전은 예물로 드려지는 땅 안에 있는 제사장의 분깃의 땅에 있습니다.
성전 부지의 크기는 가로 세로 500척 * 500척인데, 이는 가로 세로 266m 수준으로 정사각형의 땅 위에 있습니다. 주변 전원부지를 포함하면 600척 * 600척입니다.
① 성전은 “지극히 거룩한 땅”(겔 45:3), “가장 거룩한 땅” (겔 48:12)이라 불리는 제사장 분깃의 땅으로 둘러쌓여져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가장 거룩하기 때문가장 거룩한 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땅 분깃도 이렇게 거룩하다고 하는데 성전은 얼마나 거룩하겠습니까? 성전은 위치나 구조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거룩 그 자체입니다.
성전의 가치는 크기도 아니요, 화려함도 아니요, 효율적인 구획과 배치도 아닙니다. 오직 “거룩”입니다.
② 성전이 정사각형 부지 안에 있다는 것은 삐뚤어지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반듯한 성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의 모습이며, 진리의 모습이며, 공의의 모습입니다. 비진리가 더덕 더덕 붙어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각 지파에게 편애 없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도 길이와 너비가 같은 네모가 반듯한 모습입니다 (계 21:16)
이런 모습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와 공의와 사랑으로 가득찬 반듯한 마음의 성전과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곡되어 있는 비진리가 판을 치는데, 정사각형의 성전 부지는 다시한번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시청각적으로 보여주신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어진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갤 47:1). 제대로 된 성전이 아니면 생수가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2) 이 성전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바깥뜰과 안뜰에는 각각 담 (히,호마)이 있습니다.
바깥뜰에 있는 담의 높이와 두께가 동일하게 6척 (3.192m)입니다. 엄청난 담의 크기를 보고 에스겔은 “그리고 보라” (베힌네)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겔 40:5) 안뜰에 있는 담의 두께와 높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확실하지 않습니다.
추측하건대 폭은 2척, 높이는 바깥뜰과 같은 6척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높고 튼튼한 담으로 완전히 성소와 지성소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곳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 아닌 다른 부분으로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시 거룩을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요 10:7).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에는 담이 있어 반드시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그 문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의 피로 씻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 거룩은 이와 같이 구별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의 성전도 영적으로 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도 벽옥으로 된 높은 담이 있습니다(계 21:17-20).
우리들도 거룩을 위해서는 담을 쌓아야 하는 곳에 담을 쌓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부분에 더 두껍고 높은 담을 쌓아 놓아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귀환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성벽과 성문을 다는 일이었습니다(느 3장). 여러분들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곳에는 아예 담을 쌓으셔야 합니다. 성전 서쪽에는 문이 없고 담만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문이 없어야 하는 곳에 굳이 문을 달아 열고 닫고 하고자 한다면, 자칫 봇물처럼 터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담을 쌓을 곳은 담을 쌓고, 문을 내야 하는 곳에 문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취약한 서쪽까지 문을 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안뜰, 바깥뜰에 있는 담에는 각각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동향한 문, 북향한 문, 남향한 문입니다. 그래서 모두 6개의 문입니다.
서문은 없습니다. 서쪽은 원어적으로 “얌”인데 바다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서쪽이 대해 곧 지중해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다는 타락한 세상을 의미하며, 종말에 적 그리스도인 짐승이 나오는 곳입니다 (계 13:1). 그래서 서문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하여 아예 없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이 없이 담만 있는 것입니다. 서쪽으로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는 방주의 안팎을 역청으로 바른 것처럼 아예 밀봉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취약한 서쪽은 어디입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예 문을 달지 마시고 담으로 막아야 합니다.
성전으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부분은 유일하게 문입니다.
문은 열고 닫음으로 거룩한 것은 열어주고 그렇지 못하는 것은 닫는 기능을 합니다. 거룩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걸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걸러주기 위해서 문마다 6개의 문지기 방이 있어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6개의 문에 6개씩 문지기 방이 있으므로 모두 36개의 문지기 방이 있습니다.
이것은 겹겹이 지키는 모습입니다. 문의 구조를 보면, 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3단계의 문지기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바깥문에서 안문으로 들어가기 까지 6단계의 문지기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동일한 것을 세번 하는 것은 최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를 세 번 사용해도 최상인 것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더구나 세 번을 두 번이나 하니까 완전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구별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삶 속에서 거룩하기 위하여 몇 번을 생각하고 결정을 하십니까? 거룩한 일인지 아닌지 세 번 정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떨까요?
내 행동과 내 생각이 하나님의 거룩함, 나의 거룩함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문지기가 졸면 아무리 많아도 끝장입니다.
▶ 에스겔 성전의 모든 구조가 둘러싸여 있는 구조임을 볼 수 있습니다 (사비브 사비브), 이것은 거룩함과 보호를 위한 최상의 구조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성전도 거룩함을 위하여 사방으로 담과 문으로 이중 삼중 둘러 쌓여져 있어야 하고 문지기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이든 예배의 장소이든 거룩함 유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에스겔 성전의 첫 번째 모습은 거룩함의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을 유지하십시오.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성전이 성전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 성전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속에서 세상 문화가 들어와 거룩함을 훼손한다면 성문이, 담이 헐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거룩하지 못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룩한 신부들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어지면 성령이 떠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가장 거룩한 장소에 임하십니다.
담과 문, 문지기방은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틀, 시스템이라면, 문지기는 사람이므로 곧 우리들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담만 있어도 안됩니다. 문만 있어도 안됩니다. 문에는 반드시 문지기가 있어야 합니다.
문지기는 영의 눈과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무기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하지 못한 것들이 다가올 때 물리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것이 감지가 되면 즉각 말씀의 검을 휘둘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성속이 잘 구별되지 않는 세태에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가톨릭의 교황이 동성애자를 축복하는 것에 대해 허용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저는 천주교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천주교에서는 진리가 계속 무너져 왔습니다. 과거에는 비진리가 지금은 진리가 되어 있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조상들에 대한 제사가 그런 예입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었습니까? 천주교의 4대 박해 곧,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 (1866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제사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합정동에 절두산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 순교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제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는데, 제사를 진리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또 제사 때문에 순교한 그들을 성인으로 섬기고 있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담이 무너지고 문이 열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비진리가 자꾸 침범해 들오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지키는 담이 무너지고, 문이 열리고, 문지기의 영안이 어두워 잠을 자거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의 문과 담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담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문을 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분별하는 영적 문지기가 삼겹으로 겹겹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담은 우리가 실제로 담을 쌓는 것은 아니지만 거룩을 유지하는 영적인 담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은 성전된 우리가 가지 않을 곳은 안 가고, 듣지 않을 것은 안 듣고, 보지 않을 것은 안 보고, 먹지 않을 것은 안 먹는 것이 오늘날 담을 쌓고 문을 닫는 일입니다. 세상과 교류는 하되 더렵혀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담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안 만나고, 아무 곳에나 안가고 아무거나 먹지도 않고 아무거나 하지 않습니다. 술집을 하면서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술을 퍼먹고 거룩함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담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는데 어찌 검어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건물된 성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해야 하는 장소로 구분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 건물 내에서 거룩하지 않는 활동도 자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성전에 그룹과 종려나무가 새겨진 것처럼 거룩하지 않는 그림이나 사진 등을 붙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최소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뭔가를 부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딤전 4:5).
3) 성전 중앙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의 크기는 가로 세로 20척 * 20척 (10.64m), 지성소의 크기는 가로 세로 20척 * 40척입니다 (21.28m). 성소와 지성소는 높은 지대위에 있습니다. 높이는 6척 (3.192m)입니다 (겔 41:8)
▶ 규모가 작지만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 이곳입니다. 전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르지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마음의 중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성전 문을 두드려 들어오셔서 마음의 좌소에 좌정하시기를 원하시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룹들이 여기 저기 새겨져 있고, 담과 문이 있고 주변에는 골방으로도 성소와 지성소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가장 거룩한 상태가 되면 성소와 지성소까지 진입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앞에 설치된 휘장이 주님 십자가 보혈로 찢어져 대제사장이 아닌 자들도 거룩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앞에 문이 있지만 거룩한 자들에게 열리는 문인 것입니다.
지성소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 뜰에서 충분히 기도하면서 회개하고, 자아가 죽어야 다음에는 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뜰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예배 시간이 급하여 허급지급 성전에 들어간다면 성소에서와 같은 영적 체험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성소에서는 기도로, 말씀으로, 빛으로 주님과 하나되어 연합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다음 단계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교통이 온전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각 단계별로 하나님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들은 인정해야 합니다.
각 단계를 구분하기 위하여 성소로 들어가는 문,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누구나 영적인 단계가 되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막으실 것입니다.
① 성소와 지성소는 6척 높이의 지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지대는 분명히 돌로 되었을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 16:18, 눅 6:48, 고전 10“4),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가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됩니다.
무엇이 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뿌려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과 영광으로 해야 합니다. 내 이름이 아닌 예수 이름 만이 높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성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 기분, 내 감정으로 사역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의 목적을 위해 사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 아닌 다른 것을 기초로 삼습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짓는 것과 같이 결국 무너집니다 (마 7:26).
② 지성소는 솔로몬의 성전, 성막과 같이 정사각형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성전부지와 같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조금도 삐뚤어지거나 흩트러짐이 없는 진리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공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방을 향한 사랑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성소는 직사각형입니다. 지성소를 향하여 길게 뻗어져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좌로나 우로는 지성소와 폭이 같아 치우침이 없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진리를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모습을 성소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성소와 지성소도 이와 같이 동일해야 합니다.
진리이신 하나님 만을 모셔야 합니다. 공의와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한 균형잡힌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좌우를 차단하고 지성소로 가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계시는 성소와 지성소 내부는 나무널판으로 가리워져 있고, 그 위에 종려나무와 그룹들이 새겨져 있으나 솔로몬 성전과 같이, 출애굽 성막과 같이 금으로 입혀지지 않았습니다 (겔 41:16,18)
솔로몬 성전의 경우에도 백향목으로 입히고 그 위에 정금을 입혔습니다 (왕상 6:14-22), 에스겔 성전에서는 금으로 화려하게 내부를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성전에는 내전 곧 지성소에 나무제단 (히, 미즈베아흐- 향단)이라고 하는 여호와 앞에 상과 현관 앞에 나무 디딤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설병의 떡상도 없고. 촛대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내부를 우리들이 금으로 단장해야 하고 채워야 하는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마음의 성전을 신부처럼 단장하듯 말입니다.
솔로몬 성전이나 출애굽 성막도 백성들이 헌물한 것으로 치장을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스겔 성전은 우리들의 기도와, 헌신, 봉사, 연단으로 성전을 금과 같이 단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 그리스도의 것으로 단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치 욥이 연단으로 순금같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욥 23:10)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 3:18). 그러면 새예루살렘 성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자신을 신부로 단장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중보기도자요, 말씀의 떡이시며, 빛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빛을 발하도록 촛대도 세워야 합니다. 말씀의 떡도 올리고 먹어야 합니다. 기도의 제단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성전은 거의 비워있는 성전이요 대부분 치장되지 않은 성전입니다.
우리들이 채우고 단장해야 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단장하고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건물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헌신으로 내부를 꾸며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 의해 다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모두 참여하여 그 단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성전도 서로 교제하며 사역하면서 단장하십시오. 혼자해도 좋지만 서로 도우고 협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마치 화장을 서로 해주고 봐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보석처럼 꾸며지고 신부처럼 단장된 자들이 천국에서 금은 보석으로 가득찬 성에서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③ 성소와 지성소의 벽은 두께 6척 (3.192m)의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으며 성소와 지성소 앞에는 문이 있습니다.
담과 같이 두꺼운 벽은 성소와 지성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최종적인 둘러쌈입니다. 거룩함의 단계별로 들어오는 문 외에는 통로가 없습니다.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고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튼튼한 안전한 구조입니다.
거룩함과 안전함과 영원함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좌소가 있는 부분도 영적으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으로, 행위로, 정으로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룩함을 훼손하기 위하여 접근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마음의 좌소를 이런 두거운 벽으로 둘러싸 주세요“
④ 성소와 지성소 주위에는 삼면에 3층으로 된 골방이 있습니다. 각 층마다 30개가 있고 3층이므로 모두 90개의 방입니다.
층수가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구조입니다. 솔로몬 성전에도 다락을 두어 골방을 두었습니다 (왕상 6:5-8)
골방의 용도는 솔로몬 성전시대에는 이 골방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사용하면서 (대상 9:33,23:28) 성물들을 두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스 8:29, 느 10:39). 에스겔 성전에서는 용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벽과 연접하여 다수의 골방이 3층으로 있는 것은 아마 오늘날 제사장들이 기도해야 하는 장소로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기도로 성소와 지성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장소일 것입니다.
기도 소리로 성전을 둘러싸야 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골방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마 6:6).
성소에서는 반차에 따라 제사장이 들어가 기도하고, 그 외의 제사장들은 성소, 지성소 주변 골방에서 24시간 기도의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층 위로 올라갈수록 골방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그 만큼 영적 단계가 높은 자들이 기도하는 곳으로 기도의 폭이 넓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 건물 성전에서도 기도의 장소 확보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은밀히, 독대할 수 있는 골방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4) 기타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거룩한 방들이 있고, 부엌이 있고, 안뜰과 바깥뜰이 있고, 박석깔린 주랑이 뜰에 있습니다.
▶ 모두 다 제사를 위한 것들입니다.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의 사역을 위한 장소이며, 백성들이 제사에 참여하기 위한 공간들인 것입니다.
① 먼저, 제사장들을 위한 방들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사장들이 옷도 갈아 입고 성물을 먹기도 하고 교제하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가급적 성소와 지성소 가까이에 있어 거룩함을 유지하고, 예배의 준비와 안식을 위한 공간인 것입니다.
오늘날 주의 종들에게도 이런 공간이 필요합니다.
② 부엌은 번제를 제외한 거제로 드려야 하는 제물들이 삶겨지는 곳입니다.
제물이 준비되는 곳이므로 이것도 오늘날 예배를 준비하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준비없는 예배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충분히 삶을 것은 삶고 씻을 것은 씻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성전에 부엌을 만드셔서 충분히 조리된 것을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설익은 것 드려서는 안됩니다.
③ 뜰과 주랑은 백성들이 기도하는 장소요,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교제는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성전에 온 사람들의 영적 교제의 장이 필요하고, 또 기도해야 하는 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제하며 그리고 이웃과 마음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 영적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여기서 장사하면 안됩니다. 여기도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의 당 안에 성전의 땅인 것입니다.
이런 주랑에도 박석이 깔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반석되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랑이 있어 전천후 기도가 가능합니다. 비가 온다고, 눈이 온다고 예배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성전에 영적인 뜰과 주랑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2주에 걸쳐 땅 분배와 거룩한 성전 부분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로운 질서의 땅이 분배되어지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니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2. 떠나갔던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에스겔 성전에 임했습니다.
[겔 43: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5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겔 44: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 새로운 성전이 다 지어지니 바로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여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들어가고”가 완료형입니다. 영광이 떠날 때에는 나가기 싫어서 미완료형으로 지체했던 영광이 거룩한 성전이 지어지니 다시 들어갈 때는 그냥 지체없이 “쑥”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광이 “가득하다“도 완료형으로 들어오자마자 가득찬 것입니다.
얼마나 들어오고 싶었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겠지요?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의 성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마음의 성전이 거룩하게 지어지면 바로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떠나고 싶지 않은 성전을 떠나셔야 했는데, 성전이 다시 지어지니 즉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오신 후에 들어오신 동문을 닫게 합니다.
이 의미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동문으로 하나님 한분 외에 사람들이 출입하면 안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겔 44: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또 한편으로는이 동문으로 다시 나가고 싶지 않은 그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겠다는 영원히 거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가운데서도 영원히 함께 하시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름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이라 지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거하십니다.
[겔 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우리들 마음의 문을 통하여 들어오셔서 함께 먹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같이 좀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원히 함께 살 거룩한 인간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살아 계실 때 머리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 8:20, 눅 9:58)
물론 이 말씀은 실제 거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람산에 주무시기도 했습니다 (요 8:1)
그러나 우리들 속이 거룩하지 못해서 다른 영들로 차 있어서 들어갈 곳이 없는 것을 말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거하고 싶어 성읍 기지의 땅에 있는 성읍의 이름이 “여호와삼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이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입니다.
백성들과도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에스겔 성전은 이 땅에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지어야할 성전입니다.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이루어질 성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하는 건물교회의 모습도 이런 영적 의미가 담긴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거룩”입니다. 거룩을 위하여 이중 삼중으로 다 둘러싸여 있습니다. 담과 문이, 문지기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을 잃으면 다 무너지고 파괴되고 성전도 될 수 없습니다.
에스겔 성전은 대부분 비어 있는 성전입니다. 우리들이 단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의 성전도 건물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보석으로 단장되어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각자의 영역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남의 영역을 땅이든, 사역이든 침범하면 안됩니다. 주어진 영역 안에서 자기의 기름 부으심 안에서 자기의 분량대로 사역하시면 됩니다.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레위인은 레위인대로, 일반 성도 성도대로 말입니다.
아무튼 에스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룩한 성령이 거하는 전과 예배하는 건물 성전을 세우셔서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