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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설교에 이어서 전합니다-
5) 이제 제단에 태워서 화제로 드려야 할 것을 분리해 내야 합니다.
이 부분이 화목제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태워 드려야 하는 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화제로 태워드리는 제물을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드리면 안됩니다.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3:16]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음식(히,레헴)은 떡, 빵, 음식의 뜻을 가져 있습니다. 베들레헴(떡집) 참조
① 먼저 기름을 분리하여 화제로 드려야 합니다.
내장에 덮힌 기름 (내장에 감추어진 기름), 내장에 붙은 기름, 콩팥 위에 있는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기름입니다. 이것은 먹으면 안됩니다.
▶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16)
기름을 화제로 태워 드리면 그것은 여호와의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향기로운 냄새는 이해가 가는데 왜 음식이라 했을까요?
음식은 “레헴”입니다. 떡, 빵이란 뜻입니다. (베들레헴-떡집 참조)우리 인간의 언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음식과 같이 떡처럼 취한다는 것입니다.
▶ 또 왜, 하나님께서는 기름을 먹지 말라고 했을까요?
기름은 성경적으로 가장 좋은 것, 윤택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18: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세기 49:20]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 제사에 있어서 기름은 생명되는 피와 마찬가지로 “선악과”와 같은 개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가 십일조를 오늘날 선악과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선악과와 마찬가지로 제물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가장 중요한 제물의 일부, 기름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이 되면 제사,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고백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는 제사에 있어서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 오늘날 예배의 대상, 경배의 대상, 찬양의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면 화제의 음식을 인간이 취하게 되는 우를 범합니다.
▶ 어떤 이단 집단은 교주를 찬양합니다. 찬양 가사를 보면 놀랍습니다. 그 교주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교주를 목자라고 부르면서 삼위일체 성령님 자리에 목자를 넣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배의 대상이 잘 못된 것들입니다. 화제의 음식을 저들이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입니다. 영적으로 기름과 피는 오늘날 선악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벨도 제사를 살펴보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4: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아벨은 기름을 드림으로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예배는 가장 좋은 것을 주께 드리면서 자신의 생명까지 드리겠다는 고백이 있는 예배이며 하나님만을 예배입니다.
또 더 깊은 차원으로 본다면, 피는 생명이므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눅 11:13절에서는 성령을 “좋은 것”이라 했습니다. 기름은 좋은 것이므로 곧 성령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래서 오늘날 예배시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예배입니다.
▶ 어떤 분은 기름이 몸에 해롭게 때문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② 다음은 두 콩팥입니다.
콩팥은 원어가 “킬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콩팥”, “마음”, “폐부”, “양심”, “속”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시 16:7,잠 23:16, 렘 11:20, 렘 17:10, 렘 20:12)
그리고 장기 중에 아래 허리 쪽에 깊숙이 자리한 장기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콩팥의 영적 의미는 “깊은 속 마음“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제사, 예배와 관련하여 본다면 회목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마음이 없는 예배가 많습니다. 그저 예배 장소에 앉아만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단계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오래 지속되면 안됩니다.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중심을 드린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송, 마음의 예배- ♬ 중심 잃은 예배 내려 놓고~).
또한 두 콩팥을 화제로 태워드리는 것은 내 마음을 그대로 솔직하게 하나님께 드러내어 보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 아픈 마음, 힘든 마음, 감사의 마음, 죄송한 마음 등을 그 마음을 그대로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가식이 아닌 마음인 것입니다.
▶ 예배의 말씀과 관련된 요한복은 4:24절을 개역한글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개역개정에서는 진정은 진리로 번엯하고 있음)
여기서 ”진정“은 헬라어로 ”알레데이아“입니다. ”진실, 진상, 참“ 등의 의미와 함께 ”가리워져 있지 않음“이란 뜻이 있습니다. 숨겨지거나 위장되거나 거짓되지 않음의 반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혼신을 다해서 예배에 참여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 보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데도 마치 없는 것처럼 앉아 있지 않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서 나아가야 하고 상한 마음도 그대로 내어 보이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두 콩팥을 내어 드리며 나아가는 제사, 예배인 것입니다. 깊게 있는 두 콩팥을 감추지 마세요~
▶ 마찬기지로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음이 없는 사귐이 많습니다. 그러면 화목되기 쉽지 않습니다. 마음만 열어 놓아도 관계가 좋아집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자기의 연약함을 내어 놓듯이 자기의 연약함을 오히려 털어 놓을 때 더 가가워집니다.
속마음과 겉이 다른 오늘날 우리들에게 참 화목이 무엇인지를 두 콩팥을 태워드니는 화목제를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 각자 깊숙이 있는 콩팥을 내어 보이세요. 속 마음을 터 놓고 다가가세요. 그러면 화목해 집니다.
③ 간에 덮힌 꺼풀입니다.
꺼풀은 ”요테레트“인데 부가물, 매달린, 부속물을 의미합니다. 간에 붙어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간에 붙은 기름덩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역시 귀한 기름을 하나님께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어디에 붙은 기름이든 기름은 태워서 하나님께 태워서 향기로운 화제로 드려야 합니다.
염소의 경우에는 미골에서 뺀 기름진 꼬리까지 제단에 불 태워 드려야 합니다.
모두 기름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 화목제에 있어서 간의 전체를 말하고 있지 않고 간의 꺼풀을 태워야 하지만 굳이 간에 있는 꺼풀일까요? ”간“ 자체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간은 동물이나 인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장기입니다.
간은 원어가 ”카베드“인데 무겁다는 ”카바드“에서 나온 단어로 ”중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셈족은 간에 사람의 감정과 생명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간을 신성시 했으며 간으로 점을 보기도 했습니다(겔 21:20-22).
그러므로 화목제에 있어서 간에 붙은 꺼풀을 드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기름과 같이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내 생명을, 감정을 다 드리는 제사인 것입니다.
▶ 태워드려야 하는 기름과 장기들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무엇을 태워드려야 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따 먹고 맙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선악과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음도 압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내 생명까지 드려야 함도 압니다. 그럼에도 인간들 중심의 예배가 되고 있고 하나님께는 남는 것과 찌꺼기를 드리고 있습니다.
화목하기 위해서 예배의 중심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가장 귀하고 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시고 마음을 열고 중심을 다한 예배를 드리시므로 예배의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화목하기 위하여 화목제를 드리는 세가지 경우, 화목제물 (제바흐 하셀라임)의 세가지 종류
레위기 7장에서는 화목제에 대한 세부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7:11-21, 오늘 봉독한 말씀입니다.
1)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이 있습니다. (감사제물, 감사제,수은제로 표현, 셀라임)
감사제사로 소제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지난날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을 기억하며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화목제에서 감사함으로 드리는 제사는 무엇일까요?
▶ 사실 잘 구분이 안됩니다. 그러나 제가 깨달은 부분은 소제는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며, 화목제에서의 감사는 구원과 관련된 감사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감사의 단어가 ”토다“(원형은 야다)로서 감사, 감사의 찬송, 감사제, 그리고 또 고백의 뜻이 있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할 때에도 ”토다“를 사용합니다 (수 7:19, 아간의 자복, ~자복하고)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인 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런 차원입니다.
여러분, 이런 감사와 찬송이 넘칠 때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입니다.
→ 이러한 감사를 잃으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너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배가 불러서 구원의 감사를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다면 ”감사“가 넘치면 됩니다. 감사만 잘 해도 믿음 생활 성공합니다. 감사의 반대가 불만입니다.. 불만이 많은 자 세상사에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 화목제에 있어서 감사도 감사의 소제와 마찬가지로 화목제의 희생제물과 함께 소제의 예물인 기름 섞은 무교병, 기름 바른 무교전병,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구운 과자를 제물로 드립니다. 그리고 소제 예물과 조금 다른 것이 있는데 화목을 위한 것이므로 화목제에서는 유교병도 허락 하셨습니다.
→ 참으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 감사의 화목제물의 일부를 거제로 드리고 거제로 드린 그것은 제사장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들과도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화목).
오늘날 기르부으심을 받은 자 주의 종들과도 좋은 것을 나누며 화목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리고 나머지 고기는 함께 참여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음으로 다른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화목).
→ 결국 감사의 화목제도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화목을 위한 것입니다.
2) 서원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이 있습니다 (서원을 할 때,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할 때).
[잠언 7:14]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 서원기도는 가장 강력한 기도입니다. 뭔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서원을 합니다. 그 서원을 할 때나 서원을 하고 이루어진 후에 갚으려 할 때 서원의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
서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원을 갚지 않으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갈 때에 벤엘에서 돌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서원을 합니다 (창 28:10-22),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이후 20년 만에 서원의 조건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셔서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서원한 것을 잊고 세겜에서 머물면서 정착하고자 할 때에 야곱의 딸 디나 강간 사건이 일어납니다. 서원제를 드릴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나타난 좋지 않은 열매입니다.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 서원기도가 강력하지만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입니다. 지키지 못할 서원은 안한 것만 못합니다.
[전도서 5: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전도서 5: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이를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서원했던 벧엘로 올라가라 말씀하십니다 (창 35:1), 야곱이 거기서 다시 제단을 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원함으로 드리는 서원제의 모습입니다.
▶ 또한 한나도 화목제를 드리러 가서 아들을 낳기 위하여 서원을 합니다. 그가 아들을 낳고 젖을 뗀 후에 다시 화목제를 드리는데 이것도 서원제입니다.
(삼상 1:9-28)
→ 오늘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마음에 결단을 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적 서원제를 드리셔야 합니다.
3) 자원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이 있습니다.
자원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느껴져서 자원하여 드리는 화목제입니다.
[레위기 22:21] 만일 누구든지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하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흠이 없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부 소나 양의 지체거 더하거나 덜한 제물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2:23] 소나 양의 지체가 더하거나 덜하거나 한 것은 너희가 자원제물로는 쓰려니와 서원제물로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리라
→ 신앙의 단계가 올라가면 자원하는 화목제를 많이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4.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 비하여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화목제물을 먹는 날자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화목제물을 드릴 경우 제물의 고기는 그날에 다 먹고 이틑날까지 남겨서는 안됩니다.
다만, 서원이나 지원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고기는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고 셋째 날에는 먹으면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만, ① 감사의 화목제물을 당일에 다 먹어야 하는 것은 제 깨달음으로는 구원과 관련된 감사제물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구원은 여러 날 걸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일에 순간에 이루어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의 구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날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이 오랜 시간 교육과 학습으로 또 뭔가를 심사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도 구원을 받아야 하고 내일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오늘 10% 받고 다음날 또 몇 % 받고가 아닙니다. 구원은 일회성입니다. 구원을 받고 낙오될 수는 있지만 (히 6:5-6) 어쨌든 일회성입니다 (이 부분은 장로교에서는 다르게 가르칩니다)
번제를 드린 자 너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의 미래가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감사 제물도 당일에 다 먹게 한 것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② 또 다른 이유로 화목 제물을 당일에 다 먹어야 하니까 많은 사람을 동참시켜 많은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으면 제사장 몫으로 돌아가는 흔든 가슴 (요제)과 든 뒷다리 (거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누어 먹어야 하므로 상당히 많은 양의 고기를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몇 명이 다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족, 친족 모두 불러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③ 먹는 기간을 정한 또 다른 이유는 먹다 남은 고기를 예배자가 다시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배자가 고기를 가져가면 나누어 먹어야 하는 원래 화목제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욕심을 다 알고 있습니다.
④ 또 다른 이유를 든다면 고기가 셋째 날이 되면 팔레스타인 지방의 기후로 보아 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먹을 수 있는 날자까지 정해주셔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람들과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⑤ 다만, 서원과 자원 제물은 이튿날까지 먹게 하는데 이것은 구원과 관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조금 더 오래동안 화목의 시간을 이웃과 가지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 오늘날도 구원 받은 자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고 화목을 도모한다면 이것이 화목제인 것입니다.
또 떡을 떼며 포도주를 마시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 성만찬도 화목제의 한 모습입니다.
2) 몸이 부정한 자가 화목제물을 먹으면 안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것에 접촉된 제물도 먹을 수 없습니다. (레 7:19-21)
→ 구약적으로 부정(히, 타메)한 것은 깨끗하지 못하고 더려워졌다는 것입니다.
부정은 거룩함의 반대의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거룩함을 잃고 더렵혀진 모습이 부정한 모습입니다.
레위기 11장에 부정한 것들이 나옵니다. 부정한 동물들이 있습니다. 비늘이 없는 고기, 되새김질하지 않거나 발굽이 나누어져 있지 않는 짐승,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의 것들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나 짐승의 사체도 부정합니다. 그리고 사람이지만 나병을 가진 자, 유출병이 있는 자들도 부정합니다. 월경이나 설정한 자도 일정 기간 동안 부정합니다.
이런 부정한 것들에 접촉된 자도 일정 기간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결국 화목제물을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자라는 것은 부정한 것에 닿은 자나 나병과 같은 부정한 병을 가진 자나, 사체에 닿은 자와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부정한 자가 누구입니까?
▶ 먼저는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 보실 때 오늘날 부정한 자입니다.
화목제로 본다면 믿지 않는 자는 화목제를 드릴 수 없습니다. 화목제물을 먹을 수 없습니다. 번제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부정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롬 6:19) → 믿지 않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래서 성경은 대부분 번제를 드리고 동시에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거의 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무엘하 6: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오늘날 영적 번제를 거쳐야 화목제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성찬의 모습이 화목제의 모습이라면, 성찬에 세례를 받지 않는 자를 참여시키지 않는 이유 하나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 오늘날 믿음의 주를 고백하고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세요. 이것이 번제입니다. 그런 후에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화목제에 동참하세요.
우리 주님은 우리와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한1서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그리고 믿지만 거룩함을 더렵힌 자들이 부정한 자입니다.
지금은 구약시대처럼 부정한 짐승이나 나병환자와 같은 자들을 부정하다 말하지 않지만, 영적으로 부정한 짐승들이 그에게 역사하거나 영적으로 나병과 같은 병든 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부정함이 끝이 나면 화목제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것에 접촉된 제물도 먹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제물이 더렵혀졌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것에 접촉된 제물은 다 불 살라야 합니다.
먹으면 백성 중에 끊어집니다.
[레위기 7:19]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레위기 7:20]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레위기 7:21]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이 모든 것이 거룩함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거룩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감사한 것은 구약적으로는 거룩한 자가 부정에 닿으면 부정해지지만 신약적으로는 거룩한 자가 부정한 것에 닿으면 거룩해지는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정한 우리들을 만지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부터는 거룩한 우리들이 믿지 않아 거룩하밍 없거나 믿다가 거룩함을 잃은 자들을 터치하여 거룩하게 하는 사역도 감당해야 합니다.
안수하는 자마다 성령을 받는 것 같이 말입니다.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화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동시에 화목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한 화목제로 하나님과 사람과 동시에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의 피로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구원에 대한 감사를 드리시므로, 깊은 마음의 예배를 드리시므로, 생명과 함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드리므로 삶의 화목제를 드려 날마다 화목을 유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