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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순정만화의 여왕 엄희자,
그녀는 지금 남편 조원기씨와 함께
은퇴 하기 전까지 미국 LA에 있는 비디오 애니메이션 전문 제작사인
캘리코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아들 둘, 딸 하 나를 둔 채 이민생활 14년째를 맞고 있는 그녀는
1942년생 .... 66세의 노년을 맞고있었다.
.........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했으나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세월이 그녀를 ‘순정만화’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밀고온 것일까...........
[1]
상쾌하고 담백한 얼굴의 순정만화 캐릭터.
60년대 말~70년대 초반 한국 만화는 엄희자 시대다.
엄희자 이후 순정만화가 대중화됐고,
아이들은 잡기장에 엄희자 캐릭터를 본뜬 인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국 만화의 선구자들>(박재동 외 지음, 열화당 펴냄)에 따르면,
한국 순정만화는 60년대 초반 권영섭 최상록 조원기 등 1세대 작가들에 의해 시작됐고,
그 다음 엄희자 민애니 송순희에 의해 대중화됐다.
그리고 그중 최고의 스타 작가 가 단연 엄희자였다.
엄희자 조원기 부부가 출판사를 옮기면서 1천만원의 계약금을 받았는데,
당시 이미자가 지구레코드로 옮겨가면서 받은 전속료 가 1천만원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녀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네자매> <긴다리 아저씨> <사랑의 집> 등이 있다.
그녀의 만화들은 크게 서양 명작의 각색, 일본만화의 모작, 순수 창작의 세가지로 분류 된다.
그러던 그녀가 80년대 이후 언제부턴가 국내에서 소식을 알 수 없게 됐다.
[2] (다음은 10년전에 나눈 한겨레와의 일문 일답이다)
- 만화가 이현세 아세요.
(엄) ....글쎄? 아마 내가 떠난 다음에 유명해졌나보죠.
- 한국 만화 잘 못보시나 보지요.
(엄) ...궁금하기는 하지만 접할 기회가 없었어요.
최근 박재동씨가 만든 <한국 만화의 선구자들>을 받아보고 좀 알게 됐지요.
우리도 자료를 제대로 못 보내드렸는데, 어디서 그렇게 자료를 다 구하셨는지. 상상도 못했는데,
그런 대접을 받으니 너무 행복했어요.
- 지금도 만화가협회로 이따금씩 엄희자씨 연락처를 묻는 전화가 걸려온 다고 하더군요.
미국 가서 행방불명됐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엄) ... 그렇군요. 여기서는 엄희자도 아니고 조희자니까 아무도 날 몰라요.
여기 와서 말을 다 잊어버렸어요. 회사에 출근하면 하루종일 입 딱 다물고 그림만 그렸으니까요.
- 언제 미국으로 오셨지요.
(엄) ... 이 분이(남편 조원기씨) 83년에 먼저 오셨고, 나는 84년에 왔어요.
오기 전에 1년 정도 한국서 애니메이션에 관해 준비를 했지요.
여기서 레이 아웃부터 시작했어요.
처음엔 필르메이션(Filmation)이라는, 직원 6백명 넘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내가 건너오자마자 남편이 한국에서 그린 그림 들 가지고 회사로 가보자고 했어요.
80년대 초에 만들어둔 포트폴리오였 는데, 여기서 이력서로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회사에선 포트폴리오를 보고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고 그랬어요.
영어를 못한다고 했더니 통역을 붙여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12년 동안. 남편과 나는 늘 한팀이 돼서 같은 방에 등을 맞대고 일했어요.
30년 이상을 하루 24시간 붙어살아온 셈이에요.
- 애니메이션에서 어떤 부분을 맡아하시지요.
(엄) ... 모든걸 다해요. 캐릭터 디자인, 스토리보드, 레이아웃 등.
(옆에서 조원기씨가 “사람들이 신사적이고 예술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라,
우리 같은 사람들이 활동하기는 좋다”고 거든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받으면 조원기씨가 아이디어 내고 데생 뜨고
엄희자씨가 색깔을 입히는 작 업을 하는데, 주변에서 환상적인 팀이라 한다고 했다.)
- 두분이 어떻게 결혼하게 됐지요.
(엄) ... 스물한살 때 만났는데
그때 이미 그는 4년째 활동중이었어요.
조원기씨 는 벌써 휘문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작가활동 시작해
<백조의 꿈> <옹달 샘> 같은 만화책들을 출판하기도 했었지요.
나는 동덕여고 미술부였는데 미술부 선생님 가운데 임직순, 최덕규 같은 분이 계셨고,
지금 기억에도 그때 수채화 컬러가 기막혔던 것 같아요. 학교를 졸업하고
열아홉인가 스 무살 때 을지로 시장에서 우연히 만화학원 간판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가 등록하게 됐는데,
원생 50명 가운데 여자는 나 혼자뿐이었어요.
그때 학원에 신동우 신동원 송방 같은 이들이 있었죠.
3개월 수료하고 스물한살에 조원기씨 화실에 들어갔는데
그는 이미 유명한 작가였고 나는 그의 문하 생이었어요. 그러다 결혼까지 하게 됐지요.
- 두분은 60~70년대 가장 잘나가던 만화가들이었는데 왜 한국을 떠나셨지요.
(엄) ...조원기씨 누님과 여동생이 이미 와있기도 했지만, 작품에 대한 욕망보다는
종교문제 때문에, 그리고 자식을 위해 다른 것들은 다 포기했어요.
- 데뷔하신 65년부터 80년대 초까지 출판하신 만화책이 몇권이나 될까요.
(엄) ... 글쎄요. 하지만 우리 두 사람 원고들을 다 모아보니 정확히 두 트럭분 이었어요.
그걸 보관했어야 하는데.
올때 라면박스 두개에 넣어온 책들 외에는 지금 모두 사라져버렸어요.
- 창작에 대한 그리움은 없습니까.
(엄) ... 있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할 수 없으니까 포기하는 거지요.
사실 여기 서 하는 것도 창작이에요. 캐릭터 디자인부터.
캘리코의 만화 캐릭터들은 거의 우리 부부가 만든 것들이에요.
- 한국서 그렸던 만화들 가운데 가장 아끼시는 작품이 뭐지요.
(엄) ... 글쎄? <행복의 별>이라고 있었는데.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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