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평준화제도는 1973년 "입시제도 연구위원회"의 제안으로 서울과 부산에서 1974년 시작된 이래 올해로 시행 28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이 연구위원회에서 제시한 보고서에서는 인문고등학교의 경우 "고등학교 학군을 설정하고, 연합고사에 의하여, 입학자격자를 선발한 후, 추첨으로 학생을 학교에 배정하되, 후기에 실시하고" 실업고등학교의 경우에는 "시를 하나의 단위로 하여 학교를 임의 지원하게 하고, 연합고사 성적 및 체력장 성적에 의거하여 학생을 학교별로 선발하되, 전기에 실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종전의 고등학교별 경쟁입시제도에 비추어 보면 고등학교 평준화제도는 한국 중등교육정책 중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제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중·고등학생들의 학교교육의 내용과 형식을 좌우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일종의 교육혁명에 버금가는 정책변화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박부권 외, 1990).
고등학교 평준화제도는 경쟁에 의한 선발방식과 비교해 보면, 기초하고 있는 정책적 이념이 자유경쟁보다는 기회의 균등을 더 강조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경쟁 시험 하에서 사회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소위 "일류명문고등학교"를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류 고등학교 출신의 대를 끊음으로서 학연으로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한국 엘리트 집단의 체질과 풍속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엘리트 중심의 교육(elitism)에서 교육기회의 평등을 우선시하는 대중주의에 그 정책이념의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평준화 정책이 기초하고 있는 이러한 이념적 특성은 최근의 평준화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를 전후해서 소강상태를 보이던 평준화 확대 정책은 1990년에 들어와서는 지방자치단체별로 한편에서는 축소하고 한편에서는 확대시키는 혼선을 겪어왔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 울산광역시, 군산·익산시가 평준화를 실시하기 시작하였으며, 2002학년도부터는 경기도 신도시(일산,부천, 안양·과천·의왕·군포, 성남)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평준화 확대의 경향은 한편에서는 내신성적을 중시하는 대학입시제도의 변화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전반적으로 고등학교 취학률이 완전 취학에 가까울 정도로 양적 팽창을 했으며 중학교 단계에서 제기되는 각종 비교육적 측면에 대한 대안적인 방안으로 평준화에 대한 선호도가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중소 도시를 중심으로 평준화 도입에 대한 요구가 계속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평준화에 대한 선호와는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계속적인 평준화 반대론이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올 초에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2011 비전과 과제:열린세상, 유연한 경제"를 통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고교평준화정책을 폐지하고 등록금도 자율화하고 사립고와 입시학원을 통합하고 대학에 기여입학제를 도입한다는 것이었다(한국개발연구원, 2002). 재정경제부는 교육문제를 시장에 맡기자는 논리를 여러 차례 펴온 바 있었는데 이 보고서가 그러한 교육에 대한 경제영역의 요구를 분명하게 담고 있다.
한편 최근 일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학교 붕괴 현상의 책임과 학력의 하향평준화의 책임을 평준화에 두고, 고교입시제도를 비평준화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듯이 경기도 신도시에서 새로이 평준화정책을 도입하면서 학교배정에 오류를 범하게 됨으로써 평준화정책 자체에 대한 불만과 해제에 대한 요구가 매우 강하게 제기되고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영재교육의 필요성이 경제계를 중심으로 제기됨으로 해서 이제는 평준화에 대한 반대론이 찬성론을 압도하는 듯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평준화 정책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쟁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봄으로써, 과연 평준화 해제가 어떠한 문제점을 불러일으킬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평준화에 대한 비판점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 향후 평준화 정책의 지향점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을 살펴보기로 한다.
2. 평준화 실시 초기의 논리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1969년 실시된 "중학교 무시험제도"와 비슷한 이유에서 실시되는데, 여기에서 비슷한 이유란 과열 입시경쟁으로 인한 교육적, 사회적, 경제적 폐해를 의미한다(박부권, 1990).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과열된 입시 경쟁은 중학생들에게 과중한 입시부담을 초래하여 이들의 건전한 정신적, 신체적 발달을 저해한다.
② 중학교육이 고등학교 입시준비 교육으로 변질되어 중학교의 교육과정이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③ 과열 과외의 성행으로 학교교육이 도외시되어 학교교육의 권위가 실추되고 있다.
④ 과중한 과외비 부담으로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게 된 학부모들이 많다.
⑤ 명문고등학교들이 대도시에 밀집해 있어 인구의 도시집중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⑥ 과외비의 부담 능력이 입학 가능학교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학부모들의 인식과 일류 이류 간의 학교시설, 교원 및 학생의 질에 있어서의 현격한 격차는 사회계층간의 위화감을 증대시켜 사회적 화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요컨대, 고등학교 평준화제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긴 생명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과열입시 경쟁으로 인한 상술한 교육적, 사회적, 경제적 폐해들을 상당한 정도로 제거 혹은 희석시켜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평준화 제도가 이상의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시켜주는 완벽한 제도는 아니지만, 평준화 미적용지역의 경우 여전히 상술한 각종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평준화 도입 초기에 당면했던 교육적, 사회적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평준화 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
3. 비평준화 입시제도 하의 교육적 문제
① 고등학교의 지나친 서열화
일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 과열과 이로 인한 과열 과외가 극심하다. 경기도 평준화 도입 이전에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안양권 주민들은 고교평준화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된 이유로 중학교 학생이 입시위주 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다(59.3%)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들고 있는 점만 보더라도 비평준화 지역 중학생들의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교육적 억압적도가 얼마나 극심한지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나친 고교 서열화로 학생 및 학부모의 심리적 스트레스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학생과 그 학부모들이 받는 고교 입시 스트레스가 과중할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과 학부모들도 자신의 자녀가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는지를 놓고 자부심을 느끼는 학부모와 열등감을 느끼는 학부모로 양분되어 있어 심리적 갈등의 정도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② 중학교간 지나친 입시경쟁
초등학교에서 열린교육을 실시하면서 창의성교육, 개성 및 적성을 살리는 교육을 추구하다가 중학교 올라가면서 바로 고등학교 입학준비를 위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학생들의 학교생활 부적응 정도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중학교에서도 어느 고등학교에 몇 명의 학생을 진학시켰느냐를 기준으로 학교의 서열화가 되고 있으며, 학교간 입시 경쟁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③ 중학교에서의 정상적인 교육과정 운영 곤란
입시성적수준별로 고등학교가 서열화되어 있으며 중학교 내신성적 몇 등급이면 어느 고등학교 지원이 가능하다는 등의 공식이 있으나 실제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선발고사 성적이다. 따라서 중학교에서는 선발고사 중 교과 배점이 높은 과목 위주로 학교의 교수-학습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④ 중학생들의 입시위주의 삶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할 학생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학생이 고교 입시 준비에 전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학교 방과 후 과외와 사설학원을 전전하다 밤늦게 귀가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 실정이다.
⑤ 통학거리를 무시한 무리한 고교지원
일류 고등학교라고 생각되면 통학거리에 상관없이 학교를 지원하는 풍토로 통학거리와 상관없이 학교를 지원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로 인한 학생들의 통학 피로도는 학습에 대한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⑥ 고교 입시제도가 거주 이전의 주된 이유로 작용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중 과열 입시 경쟁 풍토에서 자녀를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학부모들이 서울로 이주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물론 이 문제는 최근 신도시 평준화로 인한 서울로의 유턴현상과는 배치되는 설명이기는 하다. 과연 신도시 지역의 평준화와 강남 지역의 부동산 열풍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는 아직 제대로 검증된 바가 없는 언론의 주장에 불과하다(이성, 1998).
4. 평준화 정책에 관한 쟁점
평준화 실시를 축소하거나 해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에 그 힘을 받으면서 평준화 정책이 갖는 각종 문제점들에 대한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평준화는 죽음이다", "평준화가 나라 망친다", "차라리 일제시대 교육이 좋았다"는 등의 표현들이 보수언론에 제기되면서 마치 평준화 정책 실시로 인해 교육이 황폐화되고 그 결과 국가경쟁력이 추락하고 경제가 발전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것은 교육외적 부문이 마치 교육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해석이다. 개발연대에 제기되었던 '발전교육론'과 비슷한 시각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각종 교육 내적 문제점들도 평준화 정책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된다. 이를테면 교실이 붕괴된다든지, 공교육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든지, 학력이 하향평준화 된다든지 하는 주장들은 평준화만 해결하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처럼 전제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평준화에 대한 비판적 주장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과연 평준화 정책과 이들 주장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 논리적 관련성을 밝혀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평준화정책과 관련되어서 제기되어온 주요 쟁점들을 살펴보면, 학력의 하향 평준화, 학생의 학교선택권 박탈, 사학의 자율성 침해, 교육의 경쟁력 약화 등 크게 네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백성준·최돈민·성기선, 1999). 이 글에서는 이들 논쟁들을 정리해 보고 최근 경제계에서 주장하는 논리에 대해서도 함께 검토해 본다.
1) 학력의 하향(下向)평준화
고등학교 평준화정책과 학력의 하향 평준화와 관련된 주제를 주요 분석의 내용으로 삼고 있는 연구에는, 먼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1978년과 1979년에 실시한 '고교 평준화 정책의 평가연구'(김윤태 외,1978,1979) 보고서를 들 수 있다. 1978년에 나온 1차년도 보고서의 결과는 당시 잠정적으로 유보되었던 고등학교 평준화 시책을 확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또한 2차년도 보고서에서는 평준화의 가장 심각한 쟁점이었던 학력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고등학교 평준화 시책 이후의 학력 저하 문제를 규명하기 위하여 대학입학 예비고사 성적과 서울대학교 본고사 성적을 지역별로, 그리고 연도별로 비교·분석하였다. 평준화 정책 실시 전후의 비교조건을 통제하여 산출한 1977학년도의 서울·부산지역 예비고사 평균점수는 평준화가 적용되지 않았던 1976학년도 졸업생에 비해 1.4점밖에 떨어지지 않아 오히려 기타 지역의 3.0점보다 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표1>참고). 아울러 서울대학교 본고사 평균점수를 서울·부산지역 출신자와 기타 지역 출신자로 구분하여 비교하여 보아도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어 결국 평준화를 통한 학력의 하향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표1> 서울·부산지역의 예비고사 평균점수의 조정산출치
자료: 김윤태 외(1978), 고교 평준화 정책의 평가연구, 한국교육개발원
2차년도 보고서(김윤태 외,1979)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서울, 부산, 인천, 광주, 대구 지역의 고등학교 졸업자들의 학력을 측정하기 위해 전국 4개 국립대학의 본고사 결과를 비교하였다. 이 연구 역시 평준화 시책 실시 이후 평준화 지역의 학력 저하현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을 맺고 있다(김윤태 외,1979: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