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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신약: 약속대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
1. 신약(27권)성경목록
*역사서: 5권
사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서신서: 21권
바울서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13권)
일반서신: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8권)
*예언서 : 요한계시록..(1권)
2. 신약,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언약의 성취-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역사가운데, 자기의 자녀들로 가득한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큰 가족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다. 성경은 천지창조 이후 에덴동산에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이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담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는 노아, 아브라함, 야곱, 이스라엘로 이어져 왔다. 그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제사장, 그리고 왕을 통하여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며 그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되기에 실패했다. 그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회복된 이스라엘, 즉 새이스라엘 공동체는 구약에서 미완성으로 끝을 맺는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언약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5:39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경(구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언약의 성취(신약)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복음서의 책은 모두 예수님이 옛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외에도, 마1:22,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눅4:21- …이 글(이사야서)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요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
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외에도 요12:38,
예수님이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는 인간으로서 율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일 인류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가 있었다면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불순종한 남자(아담)의 후손이었기에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원죄)를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끝까지 불순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죄에서 돌이킬 수 없음을 알게하신다.
모든 인류가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시작 되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가 하나도 없는 인간 대속제물이 필요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구약의 희생제사이다. 그러나 구약의 어린양의 피는 온전한 속죄가 되지 못하여 사람의 마음까지 깨끗케하지 못했다. 또한 사람이 죄를 지을때마다 새로이 희생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그래서 온전한 대속제물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구약의 ‘희생제사’였다. 희생제사가 바로 구약(율법)의 핵심이다.
선지서들은 구주로 오실 어린양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실 것이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인지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예언대로 베들레헴에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이사야에 예언된 대로 자기백성에게 버림을 받고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왕이며 구주가 되셨다. 그분은 곧 다시 오셔서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다.
구약성경을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중심 주제는 바로 ‘어린양 예수, 기름부은 받은 왕 예수’이다. 구약에서 오리라고 넌지시 말하여 왔던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예수, 그는 누구인가?
사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요한 쟁점은 ‘예수, 그는 누구인가?’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침례요한(마11:2-3)에서부터 열두제자(눅8:25), 헤롯왕(눅(:7-9),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요8:25)들, 그리고 일반백성(눅4:36)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Who are you?’라고 질문하며 그를 믿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한다.(요8:25)
시골마을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평범한 청년에 대하여 유대 땅의 온 나라가 소동한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그가 율법을 가르칠 때면 그의 권위에 눌려 당대의 바리새인이나 율법전문교사들이 쩔쩔맸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쫒아내고, 죽은자를 다시 살리는 등, 그는 위대한 선지자나, 혹은 하나님이라야 하실법한 일들을 하며, 자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고 주장한다. 그 출신이나 외모를 보면 배운 것 없는 시골 청년인데, 그의 가르침이나 능력 행함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명문출신도 아니고 유학파도 아니고 학위도 없는데 그분의 말씀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권세가 느껴지는 것이다.
도저히 비천한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귀족들은 급기야 예수님이 ‘바알’을 힘입어 능력을 행한다느니, 귀신의 왕이라느니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비방했다. 심지어 예수님의 친 동생들은 형이 미쳐서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나서기도 했다. 부요하지만 마음이 가난하고 진리에 목마른 자들은 밤에 남몰래 주님을 찾아왔다. 부자나 학식 있는 자들이 비천한 청년 예수와 어울리는 것은 조롱 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6:20) 라고 말씀하신 누가복음의 말씀은 그래서 더욱 의미있게 느껴진다.
예수께서 여러가지 이적을 행하며 떡 다섯과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 그를 따르던 군중들은 강제로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 삼으려 하기도 했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기들을 굶주림과 이방민족들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이스라엘의 왕 정도로만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로마군병들에게 힘없이 붙잡혀 갔을 때, 그들은 실망한 나머지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런 논란들 때문에 모든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구약의 성취자이며 오리라 예언된 메시야임을 입증하기 위해 예수님의 계보를 추적하고 여러 선지자의 글들을 인용한다.
예수님은 태초부더 계셨으며,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고,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 하나님 안에서 독생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그의 백성들은 메시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요1:10-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셨다. 누가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 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눅16:16)고 말한다. 이제 하나님나라의 백성에게 율법은 더 이상 상관이 없게 되었다. 율법의 역할은 실체이신 그리스도께 백성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서 율법이 주장하던 시대는 갔고 이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
우리는 역사를 기록할 때, 주전(B.C)과 주후(A.D)라는 것으로 기준을 삼아 기록한다. 주전이란? 예수이전 시대를 의미하고, 주후란? 예수 이후 시대를 의미한다.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든 부인하든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인정하는 셈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를 구분 짓는 분깃 점이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 당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쫒아내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시며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셨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들마다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어떤가?
예수님을 진정 만났는가? 예수 그분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이 단지 자주 들어서 알고 있는 좋은 분은 아닌가? 아니면 그분께 내 생명 전체를 맡길 만큼 예수님을 신뢰하는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죄로 말미암아 어그러지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으신다. 진정한 회개와 인격의 변화, 가정의 회복, 사업의 회복이 일어나고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평안이 우리에게 부어진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구주요 내 삶의 주인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이루어지는 사실이다.
보혜사, 성령님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진정 누구인지를 바로 알지 못했다. 주께서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한 후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자이며 율법을 이루신 분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께서 오시기전에는 제자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온 후에도 베드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를 잡으러 돌아 갔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자 그들은 변화되었다. 진리의 성령께서 그들을 가르치셔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았다. 승천하신 후 주님은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셨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예수)에게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주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천국문의 열쇠: 율법교사에서 베드로에게 넘어가다.
구약시대(율법과 선지자시대)에는 천국문의 열쇠가 율법을 가진 자(율법해석자)들에게 있었다.
‘화 있을 진저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11:5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마23:14)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율법을 잘 가르쳐서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전통을 더하고 율법을 더 까다롭게 해석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말씀을 잘 못 가르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최초로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양도하신다. 그리고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주를 그리스도로 믿는 베드로와 동일한 신앙고백이 바로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인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16:18-19)
새언약 공동체-교회(하나님나라)
승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약속대로 베드로에게 권세를 주셔서 교회를 세우도록 하셨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동일한 믿음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의 첫 시대를 여는 사도행전의 전반부(12장까지)는 예루살렘교회를 세워나가는 베드로의 활약이 크게 부각된다. 그리고 사도행전 후반부에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방나라에도 교회가 세워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전세계를 향하여 나아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르렀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모형을 구현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나라는 눈에 보이는 혈통적 이스라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새 언약의 공동체, 즉 지역이나 인종이나 나라를 초월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는 개인과 그 개인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나라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건물(성전)에 거하셨지만, 이제는 주의 영(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심으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다.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이다.(고전3:16)
주님은 눅17:20-21에서 ‘하나님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나라는 개인 속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신 모든 개인 이 모여 거대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주님은 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는 선교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므로 선교지에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는 일은 선교사들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다.
교회와 예수그리스도는 구약시대에는 하나의 미스터리였다. 예수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엡3:1-6)이었기에 천사도 사탄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구속경륜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과)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엡3:6)이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 율법에서 은혜로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며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2:21-22)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아래 놓인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해방을 선포하신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죄로 인하여 마귀에게 눌리며 질병으로 고통 당하던 자들을 해방시키시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용서와 치유와 평강과 영생의 복음, 즉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왔음을 알리신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될 때 부대를 터트리게 되는 것처럼, 은혜의 시대가 왔는데도 계속 율법을 고집하며 살게 되면 그 인생은 실패하고 말것이다. 구약시대에 그림자요 모형으로 제시되었던 예수께서 실물로 나타났기 때문에 실물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제 더 이상 그림자와 모형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도 늘 깨어 있어서 우리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지 잘 분별하고 시대적인 소명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이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11:25-27)
구약시대의 거의 모든 예언서들은 불순종한 이스라엘백성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최종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다.(사54:7-10)
메시야는 이 땅에 두번 임하신다.
한번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죄인들을 사망권세에서 구하시기 위해 이미 오셨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메시야가 고난 받아야 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대부분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크게 긍휼을 베푸셔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제 다시 주님이 오실 때, 그 때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큰 권능으로 세상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2. 신약성경읽기
1) 첫주과제 : 사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읽기
구약성경 말라기를 거쳐 신구약 중간시대 400년을 지난 후 연결되는 책들이 사복음서이다. 사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에 따라 기록에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며 히브리식 정신을 가지고 기록했다.
마가복음- 여호와의 종으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며 로마식 정신을 가지고 기록했다.
누가복음- 사람의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며 헬라식 정신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예수님에 대한 깊은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기록했다.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복음서를 읽을 때 팔래스티의 지도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3년 반 동안의 예수님의 활동은 주로 팔래스틴 북부 갈릴리와 남쪽으로는 유대(예루살렘과 성전)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달력의 첫해를 알리는 유월절을 깃 점으로 삼으면 된다.
마태복음
저자는 유대인 세리(세금을 거두는 자) 마태가 기록했다. 로마가 유대나라를 지배하던 당시 세리들은 로마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마태는 레위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었다.(눅5:27, 막2:14)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마태복음은 맨 먼저 예수님에 대한 계보와 더불어 소개하는 내용이 나오고 두번째는 갈릴리 사역, 세번째는 유대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역이 소개된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기사부터 비유와 가르침들,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일등을 번갈아 기록하며 조직적이고도 주의 깊게 복음서를 구성했다.
마태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이사야나 예레미야등 예언서들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오리라한 메시야,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왕이심을 강조한다. 산상수훈과 같은 많은 탁월한 교훈과 비유의 말씀도 많이 나온다.
또한 예수님의 수난기사와 부활 후 주님이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마28:18-20)’는 명령을 기록하는 데까지 복음서를 완벽하게 마무리 하고 있다. 공무원으로서 그의 지적인 면이 엿보인다. 주로 유대인 독자들을 겨냥하여 쓴 글이다.
마가복음
저자는 마가요한이라 불리워진 마가가 기록했다고 본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주후 60-70년대 사이 기록된 것으로 사복음서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간주한다. 마태나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주된 기초자료로 차용한 듯하다. 다른 공관복음서처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계보가 없고 탄생기록도 없으며 곧 바로 복음의 선포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행적과 사역 위주로 빠르게 진행하면서도 주님의 감정까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주면서까지 사람들을 섬기러 오신 분임을 강조한다.(막10:45)
누가복음
저자 누가는 헬라인이며 의사로서 바울의 제 2차(행16장) 선교여행 때 드로아에
서 합류했던 바울의 동역자이다. 바울의 편지중 많은 것들이 누가의 손에 의해 쓰여졌으며 복음서에 이어지는 사도행전도 누가가 기록했다.
누가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이
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사역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한 후에 데오빌로라는 로마총독에게 보낸 편지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자세하고 생생하게 다루었으며 주님과 관련된 일화와 독특한 비유들이 가득한 책이다.
누가는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한다. 예수님은 창3:15절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으로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다.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반면, 누가는 마리아의 아버지를 거슬러 올라가 온 인류의 조상인 아담으로, 아담에서 하나님까지 이르러 기록하므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으며 예수님과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이 이해하기 쉽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복음서이다. 그는 예수님을 인자로서 소개하며,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분임을 나타낸다. 특히 소외계층의 사람들, 이방인들, 여인들, 죄인들에 대하여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요한복음
마태.마가.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말한다. 공관복음이란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하여 공통된 기록이 많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하여 열두사도 중 나이가 가장 어렸고 예수님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요한은 이 세 복음서들이 다루지 못한 영적인 부분을 심도 있게 다룬다. 특히 예수님의 신성과 영적진리들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깊은 묵상에서 나온 통찰력을 가지고 기록한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과 말씀을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해하도록 돕는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요한복음에는 ‘나는…이다’( I am )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과 생명, 길.진리.생명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예수님과 우리의 영적인 관계에 대한 어려운 영적진리들을 자세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묘사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단어 하나 하나를 깊이 묵상하며 읽을 때 영적이해가 훨씬 풍부하고 깊어진다. 요한복음의 말씀들이 진실로 믿어진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웠던 요한은 예수님을 만난 뒤, 요한1.2.3서를 기록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중 가장 오래(약 80세) 살았으며, 로마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거기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대한 환상을 보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뒤 순교당했다.
2) 둘째주 과제 :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읽기
사도행전 누가복음의 후속 편에 해당하는 책으로 서문이나 수신자가 누가복음과
일치하는 점이나 누가가 바울의 제 2차 선교여행부터 로마감옥이후까지도 계속 동
행한 것(골4:10-14, 빌1:24, 딤후4:11)으로 보아 누가의 기록임이 확실하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혹은 ‘선교행전’이라 불리기도 하며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린 지상명령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전1:8)는 선교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가지고 성령을 힘입어 세계로 나아가는 성령과 사도들의 선교행전이다. 구약시대, 약 이천 년 동안 이스라엘민족에게 매여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는 교회를 통하여 전 세계로 빠르게 확장된다.
사도행전은 초창기 기독교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의로마까지 전파되었는지,, 또한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는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라 갈등을 극복해 나가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누가는 기독교가 정체된 전통이 아니며, 유대교의 기원에 뿌리를 둔 초기 기독교의 연장인 동시에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 맞춰 변화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전파되고 받아들여지는 복음의 능력을 사도행전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예루살렘교회의 회의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말씀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비젼 속으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교회공동체의 역동적인 모습을 본다.
진리는 기록된 문자(말씀)에만 매여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살아 역사하는 인격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구약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림자(율법과 선지자)로 나타냈고 복음서들은 진리의 실제되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 승천 후 교회시대는 예수께서 영(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율법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침례요한은 바톤을 예수님께 넘겨주었고 예수님은 시대의 바톤을 성령님께 넘겨주신 것이다.
성령님은 매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진리를 밝혀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 있다. 성경은 학식이 많거나 지혜롭다고 해서 더 잘 깨닫는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어린아이 일지라도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시면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거짓 영의 인도함을 받게 되면 이단에 빠지게 됨으로 조심 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 말씀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구약 전체를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한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구약시대처럼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거나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구약시대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무엇이 다른가? (마11:11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셨다. 이제 율법과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왕(그리스도)’께서 자기 나라에 오셨다. 구약시대에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지만 왕을 직접 알현하고 그 왕을 세상에 소개한 종은 침례요한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침례요한은 그때까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즉 교회는 왕의 신부이며 왕의 친구이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율법시대에는 아무도 감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내안에 성령님이 계셔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롬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 침례요한보다 더 큰 자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열두제자처럼 예수님을 보거나 만날 수는 없지만 구약시대와는 달리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친히 예수님을 증거해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사도행전은 공동체의 영성을 추구하며, 주요테마는 ‘교회의 형성’에 있다.
공동체의 영성은 기도를 통해 생성되고 유지된다. 누가는 기도를 교회 영적 성장의 토대로 이해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았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여 주기 위함이지 베드로나 바울등 어느 개인의 영웅담을 들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교회를 인도해 가시며 또한 성령의 뜻대로 하나님 나라(선교)를 확장해 가신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했을 때 성령께서는 보다 더 먼 유럽.헬라지역(아가야지방)까지 전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아시아로 가려던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환상을 통하여 마케도냐(유럽)로 인도하셨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서 연결하기
사도행전 1-12장까지는 예루살렘교회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역이 소개된다.
7장에서 스데반집사가 순교한 후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그외 온 땅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된다.(행8:1,
9장에서는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되고 12장에서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 투옥사건이 일어난다.
13-28장까지는 안디옥교회에서 출발하여 세계선교로 나아가는 바울행전이다. 바울이 중심인물이지만 그렇다고 바울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울에게는 그를 돕는 충실한 많은 동역자들이 항상 함께 있었다.
l 바울의 1차 선교여행(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된다. (
바울은 가는 곳마다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에 복음을 전했다
그 때 소수의 경건한 유대인만이 말씀이 그러한가 하며 경청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대적했는데, 오히려 다수의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안디옥에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교인들에게 선교보고를 하며, 유대인들 보다도 많은 이방인들이 주께 회개하며 돌아왔다고 말했다.
1차 여행 후, 안디옥교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몇몇 유대인들이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며 바울과 바나바에게 변론을 제기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외 몇 사람을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냈다. 예루살렘교회에 장로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베드로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신 것(고넬료사건)을 증언하고 바울일행도 선교여행 중에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증언하자, 야고보는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예루살렘회의에서 확정되었다.
l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후 1차때 복음을 전했던 지역들을 돌아볼 목적으로 2차 여행을 계획한다. 마가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져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쪽으로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 쪽으로 떠났다. 2차선교여행 경로는 안디옥-다소-더베, 이고니온, 루스드라(이곳에서 디모데를 만남) -비시디아 안디옥-무시아-바울은 소아시아의 중심도시인 에베소로 가고자 했으나 성령이 막으셔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지방을 다니다가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또 성령께서 막으셔서 드로아에 이르게 된다. 드로아-여기서 헬라인 의사 누가가 동역자로 합류한다-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베뢰아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죽이려고 소동을 피우자 실라와 디모데는 거기 남고 바울은 먼저 아덴으로 떠난다-아가야(그리스반도-아덴, 고린도, 겐그레아) 지방까지 갔다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 이때, 바울은 동업자이자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만난다.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대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데리고 드디어 에베소에 도착한다. 에베소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바울은 배타고 안디옥으로 돌아온다.
2차여행에서 바울의 목표는 소아시아의 중심도시 에베소까지였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멀리 유럽과 그리스 헬라지역(고린도)까지 복음을 확장시키셨다.
고린도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동서가 만나는 항구도시이며 동방의 종교와 사상이 소개되는 곳으로 굳건한 유대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많은 도시이며 의를 추구하는 자와 의를 배반하는 자들이 뒤범벅이 된 도시’라고 고린도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고린도는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있는 도시이며 로마나 다른 도시들로부터의 이동인구가 많아서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바울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
2차여행 중에 바울은 평생의 동역자를 여럿 얻었다. 디모데, 누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로 바울은 이들을 선교지에서 만나 말씀으로 양육시키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선교지보 보냈다.
l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다시 본부 안디옥교회- 다소-이고니온-에베소(고린도전서 기록)-미둘레네-앗소- 드로아-(배타고)-빌립보(고린도후서 기록)-데살로니가-베뢰아-고린도(3개월 겨울을 지내며 로마서 기록)- 다시 베뢰아-데살로니가- 빌립보(배타고)-드로아_앗소- 미둘래네(배타고 기오, 사모를 지나)-밀레도-바다라-두로-가이사랴-예루살렘.
에베소에서 바울의 집중사역(약2년 3개월간)-
바울이 2차 여행 때에 복음전파의 목적지로 에베소를 정했으나 성령께서 고린도에서 1년 반동안 지중사역을 하도록 이끄셨다. 그래서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 고린도에서 양육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데리고 에베소를 거쳐 지나오면서 그 두사람을 에베소에 두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부부는 에베소에 오자마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를 만난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하여 이미 성경을 근거로 예수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요한의 침례를 알았을 뿐 성령을 알지는 못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부부는 그를 데려다가 복음을 자세하게 가르치고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하도록 보냈다.
아볼로는 당시 지성의 센터(구약성경 70인역이 헬라어로 번역되고 유명한 도서관이 있었던 도시)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에서 온 사람으로 구약성경에 능통한 학자였다. 그런데 그가 천막짓는 일로 생업을 삼고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부부로부터 새로운 복음을 배우고 그들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말씀을 배우는 일에 얼마나 겸손하며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진리의 음성은 박학다식한 학자에게서도 들을 수 있지만 어린아이를 통해서도 들려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항상 겸손하게 마음을 열어 둘 필요가 있다.
바울이 3차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요한의 침례만 알았던 것으로 보아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한 뒤 곧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를 바울에게 맡기고 로마로 교회를 개척하러 떠난 것 같다.(롬16:3)
바울은 3차 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러 처음 3개월 동안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친다. 유대인들 중에는 바울을 비방하는 무리들과 말씀을 경청하는 두 부류가 생겨났다. 그래서 두란노(주로 철학자들의 강연장소)로 장소를 옮겨 2년 동안 집중적으로 제자들을 양육했다.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분쟁에 관한 소식을 듣다.- 고린도전서를 씀.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바울은 고린도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고린도교회가 여러 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과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몇가지 문제를 가지고 바울을 만나러 왔다.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한 것이 고린도전서이다. 바울이 답장을 써서 보낸 후 어떤 시급한 문제로 인하여 에베소 사역중에 급히 고린도를 다녀오는데(고후2:1,고후12:3) 그 때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의 면전에서 그를 모욕하며 바울의 권위에 도전했던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눈물로 쓴 편지’라고 불리우는 서신을 디도 편에 보내면서 영적인 아버지로서 그들을 엄히 꾸짖었다. 그 편지에 대한 반응과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에베소에서 폭동이 일어나 바울을 잡으려 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가 오고 있는 마케도냐를 향하여 출발한다. 드로아에 이르러 거기서 복음의 문이 크게 열렸으나 고린도교회로 인하여 마음이 편지 못한 바울은 그곳을 떠나 마게도냐로 간다. 거기 빌립보교회에서 디도를 만났는데,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사도들과 죄를 범하고도 교만하게 말했던 자들을 엄히 징계했다는 기쁜소식을 듣는다.
마케도냐에서 디도를 만난 바울은 이제 기쁨가운데 고린도후서를 써서 디도와 함께 먼저 보내며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부탁해두었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를 미리 준비해 줄 것을 권한다.
바울은 2차여행 때 처음 고린도에 방문하여 1년 6개월을 머물며 심혈을 기울여 제자들을 양육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 뒤 아볼로가 거기서 목회를 하다가 에베소로 다시 왔고 아볼로가 떠난 뒤 유대교에서 개종한 거짓사도들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울이 교회 안에서 음행하는 자와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하여 엄히 징계할 것을 명하자 교회 안에서 세력을 갖고 있던 이들이 반발하여 바울의 사도권을 운운하며 바울이 잠시 거기 들렀을 때 면전에서 그를 모욕했다. 피땀 흘리며 세운 교회가 이렇게 잘못 되어져 가는 것을 보며 바울은 마음의 고통 가운데 눈물과 기도와 편지로서 영적 자녀들을 바로잡는다. 고린도후서는 복음에 투철한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면(연약함과 두려움, 분노등)을 가장 잘 드러낸 서신서이다. 이것은 아마도 제자훈련을 하는 모든 이들이 겪게 되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다.
바울은 이제 마케도냐를 지나 마침내 고린도에 도착한다. 성도들과 얼마나 감개무량한 만남이 되었을지 아마도 제자들과 부등켜 앉고 울지 않았을까?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고린도에서 석달 동안을 머물며 겨울을 지나는 동안 로마서를 집필한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를 지나 로마에 가고 싶었지만 물질로 어려움을 당하는 예루살렘성도들을 돕기위한 연보를 맡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로마방문 계획을 세우며 로마서를 쓰게 된다. 로마에서는 그가 아는 동역자들과 제자들이 이미 사역(롬16:1-15)을 하고있었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후원을 받아서 서바나(스페인)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 머물러 근처 도시 에베소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교회를 부탁하며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바울은 자신이 받을 고난을 예견하며 유명한 구절을 남긴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에 여러 제자들과 선지자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할 줄 알고 만류하지만 바울은 뿌리친다(행21:12-13: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 가면 갇히거나 죽을지도 모르는 줄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늘 순교자의 자세로 살아온 그이기에 복음전파 외에 죽거나 사는 문제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l 예루살렘에서 체포- 로마까지(
예언대로 바울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소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다.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죄목으로 법정판결도 없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데 그 소식을 듣고 로마 천부장이 달려와 바울을 구했다. 바울은 성전을 범하지도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이과 같이 있는 것을 본 자들이 착각을 한 것이다. 바울이 미결수로 있는 2년동안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 갖은 간계를 꾸미는 중에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에 가기위해 로마황제에게 상소를 요청한다. 구금 중에도 바울은 기회만 있으면 복음을 전하거나 구원간증을 했다. 특히 왕이나 로마총독 앞에서 복음을 변호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우여곡절 끝에 가고 싶었던 로마에 들어간다. 로마에서는 재판을 기다리는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로마의 형제들과 복음안에서 교제할 수 있었다.
l 사도행전 이후 바울의 행적
1) 로마감옥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세서, 빌레몬서
로마에 갇혀 있으면서 바울은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쓴다.
또 골로새에서 목회하고 있는 빌레몬에게 로마 감옥에서 낳은 영적인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편지를 쓴다.
2) 바울의 4차 전도여행 - 디모데전서, 디도서
4편의 옥중선신을 쓰고 난 뒤 바울은 2년 동안의 구금상태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4-5년간 디모데, 디도와 함께 복음을 전한다.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바울은 4차 여행중 마케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아 목회하도록 남겨두고 떠난다(딤전1:3). 그레데섬에 갔다가 거기에 디도를 목회자로 남겨두고 온다. 바울은 여행중에 현지에 남겨두고 온 제자들에게 목회를 잘 하도록 편지를 쓴다.
3) 바울의 2차 감옥생활(66-67)- 바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
주후 64년에는 미친 네로황제가 로마시내에 불을 지르고 화제의 원인을 기독교인에게 돌려 기독교인들을 크게 박해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울이 이때 또 투옥된 것같다.
두번째 감옥은 로마보다는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이 다시 투옥되자 그동안 바울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바울을 떠났다.(딤후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잘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가난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은 피하고 싶어한다. 바울이 기적을 행하며 힘있게 복음을 전할 때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늙고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서 이제는 모두 떠나고 누가와 디모데, 디도, 브리스기라와 아굴라 등 몇몇 사람들만이 마지막까지 바울곁에 남아 있는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떠났던 것처럼 임종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외로워하는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본다.
(딤후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일을 네가 아나니,,,)
(딤후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느라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래도 바울에게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가 있어서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이제 바울은 떠나 가지만 그 믿음의 아들에게 세계선교의 바턴을 넘겨주고(딤후2:2) 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모습이다.(딤후4:6-8: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기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제자훈련을 하는 자들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큰 건물이나 어떤 업적이 아니라 ‘잘 키워 놓은 제자들’이다. 사역현장에서 충실한 제자 하나를 얻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축복이다. 내가 떠나더라도 누군가 나의 뒤를 이어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해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디모데는 그 자체로 바울의 기쁨이요 자랑이며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과 수많은 주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지금도 계속 쓰여지고 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생애말기에 ‘여러분의 행전’을 기록으로 남기길 바란다.
바울의 서신서중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세서등 많은 편지들이 교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깊이 공부해야할 내용들이 많이 있다. 특히 로마서 같은 경우는 여러 번 정독해야 내용이 이해가 될 것이다.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바울이 구약의 인물과 사건들을 은유적으로 비유하며 설명하고 있다. 바울서신서들은 단순한 편지들이 아니라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새로운 신약적인 진리들을 계시로 받아 적은 것들이므로 신구약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한 뒤 자세히 정독하며 연구하기를 권한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13권외에도 공동서신이라고도 하는 일반서신이 8권(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이 있다.
일반서신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초대교회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바울이나 아볼로로 추측하기도 한다. 히브리서는 천사와 모세보다도 더 높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우월성과 십자가의 보혈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신 것 그리고 구약의 제사보다 우월하여 단 한번의 제사를 통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며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행15장)였던 야고보가 기록한 것이다. 야고보는 첫째, 환난과 시험에 처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겪려하며, 둘째는 바울의 서신서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오해하여 방종으로 흐르는 사람들의 거짓믿음을 지적하고 참 믿음은 그 결과로서 행위가 나타남을 강조함으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다룬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도록 겪려하는 서신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와 온유함으로 감당하도록 권면한다.
베드로후서는 성도들이 말씀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도록 구체적인 덕목을 제시한다. 또한 거짓교리를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을 주의하며 주님의 재림 때 심판이 있을 것이므로 거룩하고 흠이없는 삶을 살도록 권한다.
요한1.2.3서는 사도요한의 편지이다. 요한1서는 잘못된 교리로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영지주의 이단을 경계하도록 권면하려는 것이며, 또한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된 성도들 또한 하나님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것을 강조한다. 요한2서는 요한일서의 축소판으로 형제들이 사랑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거짓교사나 이단을 사귀지 말것을 명한다. 요한3서는 진리안에서 행하는 가이오의 신실한 사랑을 칭찬한 후, 그와는 반대로 으뜸되기를 좋아하고 순회 전도자들을 접대하지 않는 디오드레베를 고발한다. 오늘날 교회안에도 이런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요한계시록
주후 95년경 로마의 도미티안황제 때,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들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책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나 어떤 관점이 전혀 들어 있지않고 오직 듣고 본 바를 기록한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먼저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들에 대한 책망과 칭찬을 언급한 후 심판, 대 환난, 재림, 천년왕국등 종말의 때에 되어질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록목적은 첫째,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속에서도 장래 소망을 품고 믿음을 지키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온 교회에 전하기 위해서다. 둘째, 반드시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셋째는 택함받은 자들이 거하게 될 새하늘과 새땅이 있음을 알고 소망을 가지라는 메시지이다.
l 에필로그
성부.성자.성령하나님께서는 세밀한 계획 가운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시대마다 각 역할분담도 하셨다. 구약이 성부시대라면 신약은 예수님시대, 그리고 사도행전 이후 지금까지는 성령하나님 시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성부하나님이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오실 성자하나님을 증거하셨다.
성자하나님은 이땅에 오셔서 성부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셨고 항상 성부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성자하나님의 시대가 가고 성령하나님이 오셨다. 성령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며,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있게 살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님이다.
성경에 나타난 중심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사랑(예수. 구원)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에는 계속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도 나온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중심메시지는 인류의 역사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될것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흙먼지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게 만드신 것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이요 큰 사랑이다.
창세기 2-3장의 선악과 사건만 없었다면 우리는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알뿐, 저주나 심판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며, 성경도 이렇게 길게 기록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조차 하나님은 왜 그런 저주의 선악과를 만드셨는지 은근히 원망하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고 살아간다. 어쩌면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진실이다.
신구약성서 읽기를 마무리 하면서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그런 의문이 사라졌는지 질문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선악과 사건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적인 목표를 어디에 두셨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사람을 하나님처럼 영화로운 존재로 만드셨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엡4:13-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시면서 나타내셨던 그분의 사랑, 인내, 너그러우심, 겸손등 그분의 성품은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셨던 권세와 능력도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다만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천국의 유업을 맛보게 될 것이다. 즉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를 형제로 끌어 올려주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함을 입는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찮은 미물 같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형제들이었기에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죽으셨던 것이다. 우리를 단지 영원한 지옥에서 건져주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화로운 존재로 다시 빗어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영광스런 존재가 되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은 사람 앞에 선악과 나무를 두신 것이었다. 선악과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며 살 수 있지만 오직 한가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라는 것,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안전장치였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 그 자리를 잘 지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언약의 표로서 혹은 하나님의 보좌(존재)를 대신하여 선악과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창조주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마음속에 종종 질문하던 대로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지 않으셨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 아니었을까? 그러면 저주나 심판도 없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아직도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 것은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아무 생각이나 목적도 없이 심심풀이로 사람을 만드셔서 너희들 마음대로 살아보라고 지구상에 던져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역사에 전혀 개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지금쯤 이 세상은 어찌되었을까? 하나님이 통제하고 계신데도 지금 인간들의 죄악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창조주께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하나도 예외없이 사탄의 밥이 되어 세상은 생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선악과 시험은 지금도 우리의 삶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선악과의 본질은 사람이 피조물된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교만)이다. 이것은 내 삶에서 창조주(주인)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내 뜻대로 살려는 마음, 즉 자아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경험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 일지라도 이 수준을 넘어서기가 힘들다. 계속 이 문제로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며 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생을 전폭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왠지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면 내가 즐기고 싶은 것들 다 버려야 하고 재미없고 손해보는 삶을 살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버지께서 아까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문제에서 아직도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럴지라도 이것을 계기로 계속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한다면 분명히 내 모든 것을 드리고 희생해서라도 충성스럽게 섬기고 싶은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셨던 그 자체가 고난이셨듯이 우리가 연약한 육신으로 이땅에서 살아간다는 것 또한 고난이다. 평범한 우리의 삶에는 드라마틱한 순교나 영웅주의 같은 것은 없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겪는 고뇌와 삶의 과정들 또한 순교못지 않게 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신으로 살면서도 믿음을 잘 지킨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 뿐아니라 여러가지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사람들은 세계 올림픽에서 받을 썩어질 영광(금메달)을 위해서 밤낮 쉬지 않고 훈련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이 땅의 나라들이 주는 금면류관만 못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아무 칭찬과 영광을 받지 않고 산다 하더라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만으로도 소망이며 기쁨이지 않은가? 우리가 육체로 살아가는 기간은 사실 장차 하나님앞에 섰을 때 상받기 위한 기회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들이다. 믿음을 잘 지키고 환란과 시험을 잘 통과하며 끝까지 사명을 잘 감당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실 상급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들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하게 다가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겪려하기 위하여 주님이 주신 계시의 책이다.
계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0-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사도 요한이 본 에덴동산(천국, 새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선악과 나무는 없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강가에는 오직 생명나무만이 있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이 땅에서 선악과의 시험을 거쳐 승리한 자들이 가는 곳이다. 아담은 마귀의 시험으로 넘어졌으나 우리 주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과 십자가 시험을 통과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길이 아니라 시험에서 승리한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때 승리할 수 있다(사28:16) 천국에는 더 이상의 시험이나 저주가 없다. 우리는 거기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소원하셨던 하나님의 큰 가족 공동체를 비로서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거나 시험을 이기지 못한 자들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주를 배반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계21: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불못은 불지옥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경청해야한다. 이것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은 영생을 얻지만 듣지 않아서 모르거나 듣고도 믿지 않은 자들은 분명히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3개월의 힘든 여정을 마지막 시간까지 함께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