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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남 현숙회 원문보기 글쓴이: 강기주
작가 이석범에 대한 보고
고원정(소설가)
이 보고는 출처를 확인 할 수 없는 첩보사항과 보고자의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작성되었기에 객관적 사실과 상당한 편차가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보고자는 그의 이름을 이미 초등하교 6학년 때부터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다지 넓지 않던 제주시의 어느 골목길쯤에서 몇 번 마주쳤던 것 같은 아스라한 느낌도 있습니다.
보고자는 당시 제주시에서 가장 명문으로 꼽혀진 남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이석범은 역시 명문이라고 본인들이 우기는 북 초등학교에 재학 중 이었습니다.
남과 북이라니, 벌써 무언가 비극적이고 숙명적인 냄새가 풍기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진작에 남북화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둘 모두 제주의 명문인 제일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하나의 울타리 안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1968년의 일입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검은 교복을 입은 우리는 각각 자기반의 실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보고자는 2반, 이석범은 4반이었습니다. 보고자의 입학 성적이 2등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석범의 성적은 4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후세의 연구자들을 위해 밝히는 것입니다.)
1학년 시절 우리는 별달리 가까워질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건 아닌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어교사이던 강용소 선생님께서 각 각급별로 이를테면 ‘문예신문’ 같은 것을 만들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4반 신문에 실린 이석범의 시를 접하고 보고자는 적지 아니 놀랐습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전투와 전투사이의 짧은 휴지기를 노래한 시였던 것 같다는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어째든 상당히 어른스러운 시여서 보고자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석범이라는 이름이 보고자의 파일에 깊숙이 저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2학년으로 진급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보고자와 이석범은 같은 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운 심정은 보고자나 이석범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비유를 하자면 프랑스와브라질이 월드컵예선에서 같은 조에 편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나 할까요?
당장 누가 실장이 될 것이냐에 강호들이 관심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단임이던 김한호 선생께서는 임시실장으로 보고자를 지명하였고 보고자는 결국 투표를 거쳐 정식실장으로 취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날의 작은 승리가 훗날의 무참한 패배를 예고하고 있을 줄이야.....
맹세코 보고자는 그 작은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석범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 보고자는 조그마한 상처도 없이 관중과포숙의 사귐을 만들어 갈수 있었으니까요. 그와 보고자가 주도하던 그 학급, 그 학년의 분위기를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요?
그와 보고자는 똑같이 조숙했고, 똑같이 박학다식(?)을 자랑했고, 똑같이 달변이어서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분위기를 주도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두 사람은 동급생친구들에게 틈만 나면 성교육을 실시하곤 했는데 보고자는 이론의 대가, 이석범은 실기의 대가임을 자부하던 기억이 납니다.
두 사람의 주동으로 이른바 백지동맹사건을 벌이기도 했지요.
순전히 참고삼아 밝혀 두자면 당시 이석범의 별명은 닉슨이었고, 보고자의 별명은 모택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학교 안에서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두 사람은 방과 후에도 거의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습니다.
제주시의 명소 중 하나인 서 부두 방파제를 주로 찾았는데 거기서 우리들은 설익은 문학의 꿈을 펄치곤 했습니다.
당시의 이석범은 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하겠다는 마음까지는 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문학을 함께하겠다는 그에게 문학만으로 먹고 살 수(?)있다고 보고자는 틈만 나면 충동질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째든 그렇게 신념의 차이가 있는 채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문학 소년이 되어갔습니다.
그래도 보고자는 은근한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석범을 문학으로 이끌었다’는.
가끔 노골적으로 그런 눈치를 보여도 이석범은 크게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 그러나 말 입니다.
경천동지할 사건은 오래지 않아 터지고 말았습니다.
중2이던 그해 1969년 당시 학생 문단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학원문학상’에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응모를 했습니다. 물론 시와 산문 두 부문에 모두. 결과는 ..... 보고자는 모두 낙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석범은? 시와 산문에 모두 입선을 했습니다.
보고자에게 그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지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쓰린 마음을 홀로 달래가면서 둘도 없는 친구의 행운을 축하해야하는 소년의 마음을....
또 표정관리란 정말 힘든 것이더군요.
그러나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화불단행’이란 말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상처도 아물기 전인 그해 12월, 이석범은 다시 한 번 보고자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고 맙니다.
바로 전교학생회장 선거에서였습니다.
사실 보고자는 그 선거에 나설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권력이란 것이 얼마나 무상한가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이석범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가 보란 듯이 출마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보고자에게 한마디만 상의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배신감과 함께 오기가 치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둘도 없는 친구이며 실장인 보고자를 무시하고 부실장인 그가 전교회장선거에 출사표를 던지다니... 며칠 고민 끝에 보고자도 출마를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오기는 오기일 뿐, 회장에 당선된 것은 이석범 이었습니다. 그것도 압도적인 득표로.....
보고자의 생애에 그토록 참담한 시절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온몸이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느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지만 조금은 서먹한 기운이 감도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중3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봄이 다 가기 전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단 한 가지, 사실 웃어넘기자면 웃어넘길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만 보고 드리겠습니다.
나른하게 잠이 오는 봄날의 교실에서 흔히 일어 날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중에서 이석범은 조금 불손했고, 담당교사는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였고, 교장 선생께서는 지나치게 일벌백계의 원칙을 내세웠던 듯합니다.
이석범은 우습지 않게도 정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그는 거기서 그칠 수 없었던 것이 그는 학생회장 아닙니까? 징계와 함께 그는 회장직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이석범은 전학을 가벼렸습니다.
오현 중학교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그가 전학을 간 이후 보고자는 학생회장 보궐선거에 나설 것을 학교 측으로부터 권유받았습니다만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 어느 술자리에서 이석범이 “그때 네 의리에는 감동했다”고 말 하길래 보고자가 바로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의리는 30%였고, 내 자존심이 70%였다’라고 말입니다. 이석범은 뒤늦게 무언가를 깨우친 듯한 표정이 되더군요.
학교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제주시라는 게 다 그 바닥이 그 바닥 아니었겠습니끼?
전처럼은 아니어도 우리는 가끔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고자는 제일고에, 이석범은 오현고에 각각 진학을 하면서 우리의 만남은 조금씩 뜸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석범이 잘 못이 아닙니다. 보고자의 생활이 워낙 상식을 벗어나게 비뚤어져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아, 한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고2때의 초가을쯤이던 것 같습니다.
내가 사는 하귀리라는 마을로 이석범이 찾아온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여학생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이었고, 운동복 차림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서 그 커플을 맞았습니다.
보고자는 두 사람을 데리고 밤길을 걸어 근처에 있는 저수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내려와서 단골로 다니는 막걸리 집 뒷방에서 술을 마셨는데 이석범은 불과 두어잔에 떨어져 버리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기억이 이상하게 어딘가 슬픈 듯한 색조로 남아 있습니다.
도대체 왜 보고자는 슬퍼 던 것일까요?
혼자 외로워서일까요? 이석범이 대리고온 여학생이 깜찍하게 예뻣기 때문일까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알든 모르든 세월은 흘러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보고자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이석범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재수생이 된 것입니다.서울에서 보내던 재수생 시절, 그는 상당히 힘들어 했습니다.
보고자의 하숙집을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지만 그것마저도 그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아시는 이는 다 아시는 것처럼 그는 술이 세지 못합니다.
그는 결국 재수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을 했고, 다음해에 고향에 있는 제주 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방학 때에만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70년대의 중반의 그 시절, 이석범과 보고자의 주변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물 군이 출현하게 됩니다.
김덕남, 문무병, 김상철, 강창일, 나기철 ,김용훈, 고호경, 김창후... 주로 제주시 남문로의 ‘소라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들을 하나로 싸잡아서 ‘골빈당’으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아, 지겹도록 이어지는 술자리와 술자리들...... 이석범은 꼭 한차례 구토를 해야만 제 몫의 술자리를 마감하곤 했습니다.
지금 그 멤버들은 저마다 시인 학자, 교사, 문화 운동가가 되어서 여전히 우리들의 주변에 출몰하고있습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참으로 인연이란 질긴 것이고 정이란 더러운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방학때만 만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석범은 비교적 순탄한 대학생활을 보낸 것 같습니다.
글도 쓰고 연애도 하고 총학생회장도 지내고 ....그 사이에는 해병대를 다녀오기도 했지요.
해병대 출신이라고 해서 그가 특별히 그쪽 체질이거나 하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주 출신들은 절반정도가 해병대에 징집이 됩니다.
체질이기는커녕 그는 아마도 가장 군기 빠진 해병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 시절 이석범보다 고참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문학평론가 김종회와의 조우했던 에피소드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만남으로 해서 이석범의 군대생활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던 것만은 사실인 듯합니다.
어째든 그는 제대를 했고, 졸업을 했고, 교사가 되었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어찌하다보니 이석범의 결혼식에 보고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 점만은 그에게 미안함을 느낍니다.
어째든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한 사람의 가장이 되었고 각각 서울과 제주에 생활의 근거지를 가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보고자는 잠시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그 후, 이석범이 한 사람의 작가로 데뷔하고 문명을 얻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과연 미주 알 고주 알 언급을 하는 것이 옳겠느냐는 점입니다.
가급적 객관적으로 간략하게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적들을 찾아서>로 문단에 데뷔를 하고, “작법”동인으로 활동하던 시기만 해도 이석범은 그저 조용한 ‘교사 소설가’로 살아갈 것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풍운아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전교조가 태동하기 전 ‘전교협’ 이라는 단체가 먼저 그 기치를 올렸던 일이 있습니다.
이석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바로 이 전교협의 조직에 뛰어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인사 파동이 일어났지요. 그는 사립여고의 국어교사였는데, 전교협을 추진하던 그와 그의 동료들이 모두 같은 재단 안의 여중으로 발령이 났던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단순한 인사조치라고했고, 이석범과 동료들은 전교협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을 했지요.
우여 곡절을 겪은 끝에 이석범은 결국 교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왔지요.
서울에서 그는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는 한편으로 교직생활의 경험을 담은 <칼라의 분필>, <권두수 선생의 낙법>같은 소설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문제의 <윈터 스쿨>에 이르게 됩니다.
이석범은 이 세 작품을 스스로 ‘교육 소설3부작’이라 부르곤 합니다만 마지막 <윈터스쿨>이 일으킨 사회적 반향은 대단한 것이었지요.
아직도 기억들 하실 걸로 압니다만 심지어 학원 비리 수사를 맡은 검사들이 이 책을 참고로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그의 출세작인 셈입니다.
하지만 판매가 기대에 못 미쳐서 이석범은 적지 아니 실망하기도 했을 겁니다.
이 작품에는 한때 학원강사로 일하기도 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기도 합니다.
눈치를 체신 분도 있겠지만 이석범은 자신이 직접 ‘살았던’ 세계만을 소설로 다뤄 왔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는 경험한 것은 모두 소설로 섰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언젠가 그는 ‘70년대는 자신에게 고난의 시기’였다면서 지긋지긋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80년대도 90년대도 그에게는 편안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소설을 건져 냈습니다.
엎어져도 그냥은 안 일어났다고나 할까요?
2000년도의 벽두에 이석범은 다시 생활의 무대를 제주도로 가져갔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어쨌든 그는 이제 교직에 복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삶에 무언가 하나의 매듭을 지을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집도 그러한 하나일 줄로 생각합니다.
이제는 대략 이 장황한 보고를 맺음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보고자는 지난번 제주도에서 이석범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지극히 보수파의 모습을 하고 조용히 살아라.’
그는 웃으면서 그러마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직 40대 중반의 한창 나이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는 작가로서나 교사로서나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한 생활인으로서나 한두 차례 더 대형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의 사고는 모두 작품이 되었다는 점을 유념합시다.
조심해야 할 분들은 조심하시고, 기대하실 분들은 기대를 해도 좋을 것입니다.<끝>
강기주 본인은 어둠의 입술을 읽고 독후감을 쓸 생각이었으나 고원정 소설가의 보고서가 맨 뒤에 첨부돼 있길래 용택말 처럼 손가락 혈압오르게 타이핑했습니다.
좋은 친구, 선의의 경쟁, 어렸을때의 자존, 그리고 지존 싸움 등등
리얼하게 쓴 고원정의 글을 읽으면 그 당시 함께 생활한 우리 동기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고원정 동기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에 경의를 보내고 그 친구의 말대로 앞으로 이석범 친구가 한번 큰 사고를 칠 것이라는 믿음을갖습니다.
관포지교의 우정과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는 선의의 경쟁에서 보듯 친구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학적 소질에서는 이석범이 앞섰지만 꾸준히 한우물만 판 친구와 학맥 인맥 등에서 차이가 있고
견눈질 한 이석범은 고교시절에 보면 그의 꿈이 정치가(국회의원)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어설프게 듭니다.
지금까지의 내공을 바탕으로 멋있는 소설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이 세상에 태어날 소설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데 의심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중에 어둠의입술을 읽은 친구도 있을 터이고 읽지 않은 친구가 있다면 교보문고에 주문하면 3일만에 집으로 배달됩니다.이석범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