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
1.낭만에 대하여
2.행복한 사람
3.베사메 무쵸
4.정주고 내가우네
5.꼬마인형
박진광(1959년생)
태산과도 같은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의 마술사 박진광이 가수로 데뷔한 때는 76년 9월
명동의 쉘브르에서다. 그 전에 후라이 보이 곽규석의 사회로 유명했던 KBS 전국 노래자랑에서
부산 장원경력도 있다. 70년대 초 당시는 청바지와 통기타가 유행했다.
박진광은 재수를 하려고 서울로 상경하여 우연히 가수의 등용문인 쉘브르란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수시험에 응시하여 가수의 등용문에 만점으로 합격한다.
그 이후 계속 한국 모던 포크의 대명사 라이브 카페 “쉘브르”에서 가수로 활동을 했다.
DJ 이종환 사단인 셈이다. 그 출신들은 모두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가수가 되었는데
유독 박진광만이 예외였다.
이종환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박진광보다 노래 잘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였으나
그는 그늘에 묻혀있어야 했다.
그는 한때 미사리에 가서 통기타 라이브 카페를 했다. 그곳이 입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해 차츰 한두개씩 라이브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박진광은 미사리 라이브 카페 촌의
산파 역할을 한 것이다.
“무명가수의 설움이요? 그것은 춥고 배고픈 것이 아닙니다. 지방 공연 등을 가게 되면 유명가수,
무명가수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노래 실력 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매스컴에 소개가 된
가수인지 아닌지로 대우와 관객의 태도가 다르지요. 그런 점들이 무명가수를 서럽게 만드는
것이지요. 실제로 언더그라운드 가수 중에는 대중에게만 안 알려 졌을 뿐이지
유명가수보다 실력과 재능이 월등한 사람이 많아요. 그게 가장 안타까운 점입니다"
박진광의 첫 데뷔앨범은 <먼 길 떠나면서 아내에게>로 오아시스와 전속 계약을 맺고
그 이후 지구 레코드사와도 전속으로 가수 활동을 했다. 박진광을 잘 아는 주변사람들은
그를 “정직한 사람, 신선한 가수”라고 평한다. 3옥타브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트롯트, 재즈, 팝,
가곡, 이태리 가곡의 모든 쟝르가 가능한 가창력이 풍부한 가수다.
“가수는 가창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가수가 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