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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승리(Victorious Failure)
16세기식 화승총을 든 '원시군대' 조선군을 상대로, 주권국가인 조선정부(조정)의 사전허락은 애시당초 무시하고 자국의 정예부대를 태운 무장함대를 끌고 온 미국. 그들은 조선의 수도 한양이 바로 코앞인 인천 앞바다 작약도에다 버젓이 정박했다. 미국의 식자층은 물론 전세계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무력침공'이었다.
아시아함대가 조선을 무력으로 응징하러 떠나기 전에도 미국유수의 일간신문이던 '뉴욕 헤럴드'(Newyork Herald)는 "미국정부의 조선침공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 했다. 이런 이유로 로저스 제독은 원정군 함대에 승선한 뉴욕헤럴드의 종군특파원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취재를 거부,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강제 하선시킨 바 있다.
미국의 강화도 '무력원정'이 끝나고 한달뒤 쯤 '뉴욕헤럴드'는 한미전쟁에 관한 기사를 이틀에 걸쳐 내보낸 바 있는데 "동양의 먼 나라와 미국간의 작은 전쟁"이란 제목으로 미군의 강화도 무력점령 이야기를 게재했다. 기사 말미에 "로저스제독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권공사 로(Low)는 외교에서 실패했다" 는 결론을 내려, 당시 미국사회의 싸늘한 반응을 잘 대변하고 있다.
1871년 한미전쟁은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시아에서 벌인 자그만 헤프닝"에 불과했을지 모르나, 조선으로서는 엄청난 국력손실과 민생의 고통을 겪은 국가변란 이었다. 40여일간 중무장 미국함대가 충청·전라·경상도의 식량 등 각종물자가 한양 으로 수송되는 강화해협 수로를 봉쇄했기 때문에, 그 기간 중 한양에서는 식량난이 발생하고 물가가 급등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미국함대가 철수한 뒤 고종임금은 "수천년 예의지국인 우리나라가 어찌 무지막지한 바다건너 오랑캐들과 화합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통상을 주장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매국노로 다스리겠다"는 교서를 내리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빗장을 더욱 단단하게 걸어잠궜다.
참전 미군가운데 해병대원 상륙군 지휘관이던 맥라인 틸턴(McLane Tilton)대위는 조선을 철수하기 전 작약도 함대정박지에 머무는 동안 미국의 아내 내니(Nannie) 에게 보낸 편지(1871년 6월21일자)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나 개인적으로는 한국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누구도 쫒지 않았다는 것에 진정 만족하고 있지만 - 난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오! 화승총과 징겔(gingall; 대구경 장총열 화승총) 탄환이 핑핑 날아다니는 그런 (원시전쟁) 전투에 참여한 모든 순진무구한 미군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여, 나도 그 순진한 병사가운데 하나였으며 난 더 이상 이 구역질나는 (미국정부의) 비즈니즈에는 간여하고 싶지가 않소."
<편지원문>
"... As for me I am quite satisfied, 'I have not lost no Coreans', and 'I ain't alooking for none neither'--I want to go home! The way the 'gingall' or match-lock bullets whizzed was a caution to all those innocents engaged in war. My precious girl I am one of those innocents, and I dont (sic) want to engage in any more sick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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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강화도 한미전쟁(韓美戰爭) - 전투일지(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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