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의 아들이다.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윤관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돌아가자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되었다.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尹瓘)의 묘로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놓여있으며 왼쪽에 묘비가 서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장군의 영정이 봉안돼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2010년 11월 10일(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소재 여충사 (문숙공 윤관) 장군님 묘역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파평윤씨 후손 (500여명) 제관이 모여 "문숙공 윤관 장군님"에 대한 추향제가 봉양되었다. 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다시 여충사 (문숙공 윤관) 장군님 추향제 실황을 촬영하여 바쁜 업무로 이곳 여충사 추향제에 참석하지 못하신 전국의 파평윤씨 후손에게 온라인을 통하여 여충사 추향제 봉양 과정을 보여주기 위하여 열심히 취재를 하였다. 이날 필자가 찍은 여충사 문숙공 윤관 장군님 추향제 봉양 과정을 소개 합니다.
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인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에 392년을 끌어온 조상 묘를 둘러싼 다툼(산송.山訟)이 두 문중 후손들의 극적인 타협으로 마무리됐다. 10일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대종회에 따르면 두 문중은 지난해 8월 청송 심씨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소재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호) 4만 평 내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는 데 합의했다.
파평 윤씨 소정공파 윤도현(71)씨는 "조선조 명문가인 두 집안이 400년 가까이 조상의 묘소를 놓고 대립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판단해 화해했다"고 말했다두 문중은 2월 다시 만나 파평 윤씨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 2500여 평을 500m 정도 떨어진 청송 심씨 문중 땅 옆에 제공하기로 했다. 청송 심씨 측은 다음달 묘지를 이장할 예정이다. 두 문중 간 묘지 다툼은 조선시대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단은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윤관(?~1111)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며 비롯됐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 년이 지난 1763년(영조 39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이어져 왔다. 당시 임금이던 영조(1694~1776)는 고민 끝에 윤관 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두 문중의 화해를 구했다.
그러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 "용미(龍尾:산소 뒷부분)를 누르는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매를 맞아 죽는)을 당하는 사태까지 빚어졌으며 이로 인해 두 문중 간 원한은 깊어져만 갔다. 현대에 이르러 두 문중 후손들은 원한을 풀기 위해 1969년 9월 화해각서를 교환하는 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번번이 최종 단계에서 실패했다가 최근 대타협을 이루게 됐다.
파평 윤씨 소정공파 윤도현(71)씨는 "조선조 명문가인 두 집안이 400년 가까이 조상의 묘소를 놓고 대립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판단해 화해했다"고 말했다.
청송 심씨 안효공파 심종복(67)씨는 "400년 가까이 끌어온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게 돼 기쁘다"며 "두 문중 모두 조상을 올바로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더 이상 원한은 없다"고 말했다. 파평 윤씨는 성종비.중종비 등 조선시대 왕비 네 명을, 청송 심씨는 세종대왕비 등 조선시대 왕비 세 명을 각각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이다. 파주=전익진 기자
◆ 산송(山訟)=산소, 곧 묘지(분묘)에 관한 송사를 일컫는다. 조선 중기 이후 명당을 찾는 음택(陰宅) 풍수가 유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땅의 형세나 특성을 인간의 행복.불행과 연관시키는 풍수지리설이 특히 유행했으며, 산송은 이러한 명당과 깊은 관련이 있다.[펌기사]
문숙공의 추향제 사진으로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청송심가의 묘를 투장함으로써 400년동안 산송이 지속되다가 2005년 8월 4일에 양문중이 문숙공묘역안에 있는 19기묘를 전부 이장하기로 합의하여 경기도에서 심의를 하던 중에 김우림서울역사바물관장이 '윤관장군묘 장단군에 있다.'는 주장으로 제기함으로써 당시 윤정원파평윤씨대종회장과 부회장 10여명이 김우림을 찾아가서 장시간 격론끝에 김우림이 잘못을 사과하였고 2007년 11월에 의결하여 김문수지사의 결재가 나서 2008년에 청송심묘 19기를 전부 이장함으로써 400년 산송이 마무리되고 갈등이 종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우림의 기사내용은 삭제바랍니다.
(스크랩으로 올린 글이 되어 수정이 안돼 원문 수정한것을 새로 올렸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