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동
인천의 중심지라는 뜻에서 중앙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본래 구한말 구내면에 속했던 지역인데 개항과 더불어 이곳에 외국인들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각국 지계가 생겨 개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 때만 해도 은행과 일반 상점이 밀집했던 인천의 번화가였다.
- 해안동
항동과 마주보고 있는 해안동은 원래 바다였다. 매립해서 생긴 해안지역, 혹은 매립하기 전, 출렁이는 해안선으로 되어있던 곳이라 해서 해안동이란 이름이 붙었다. 1,2가는 1899년에 매립해 창고지대가 되었고 3,4가는 1909년에 매립해 외국인 무역상이 많았다. 지금도 옛 건물이 많이 남아있다.
- 신포동
답동성당 맞은 편 재래시장이 있는 신포동은 바다로 통한 내가 있다고 해서 원래 순우리말로 터진개 또는 탁포라 했다. 개항 뒤 생긴 마을인데, 터진개를 개포동으로 불러오다가 ‘새롭게 번창한다’는 뜻에서 신포동이라 했다. 매립해서 생긴 땅이 많은 지역이다.
- 송학동
자유공원(응봉산) 홍예문 남쪽 언덕에 송학동이 있다. ‘산언덕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운치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인천항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라 개항초기, 구미계 시민의 거주지로 독일인 모오셀의 주택,미국인 데슬러 주택, 타운젠트 주택 등 호화주택이나 정원이 곳곳에 많았다.
- 관동
개항과 더불어 이 일대에 각국의 영사관과 경찰서 등 ‘관청이 많이 모여있던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이제 관청이라고는 중구청(옛 시청건물)만 남아있다.
- 항동
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항동은 선착장과 여객선 부두, 세관 등 인천항구의 주요시설이 있는 항구의 중심지역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동명이다. 지금의 항동은 원래 대부분 바다였는데 개항 뒤 매립했다. 바로 이곳이 오늘의 인천항이 있게 한 최초의 개항장(제물포항)이다. ‘넓고 큰’ 동이라는 의미도 있다.
- 사동
예부터 인근에 모래가 많아 모래마을이란 뜻의 모래말 또는 사촌이라 했다. 신포동과 붙어있는데 외항선원과 그 가족들이 이용하기 편한 위치라 숙박업소가 많이 있어서 여관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지금은 보험사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 신생동
신생동 일대는 원래 아무것도 없는 해안선지대라 이름이 없었다. 일본인들에 의해 사동이나 항동처럼 매립된 곳인데, 교외로 간주되어 주로 일본인들의 묘지로 사용됐다. 1914년부터 인천신사가 있다해서 궁정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해방 뒤 새로 생긴 한인촌이란 뜻에서 신생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 신흥동
신흥동은 원래 신창동(신포동의 옛이름)과 화개동을 합한 지역이었다.개항 초기 일제는 이 지역을 화정이라고 했었는데, 해방 뒤 새롭게 부흥한다는 뜻에서 신흥동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910년경만 해도 지금 인천여상 남쪽 언덕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 답동
논이 많아 원래부터 논골이라 불렸는데 답리 혹은 탁계라 불리기도 했다. 개항 당시만해도 이곳의 중심지였던 공동지계의 변두리로 일본인들의 묘지가 많았고 사찰도 있었다.인천에서 복음이 전파된 답동성당과 선교사들이 설립한 박문초등학교와 신흥초등학교가 있다.
- 선화동
오래전엔 배가 드나드는 부두가 있어서 그냥 ‘부두’라고도 했다지만 별다른 동이름이 없다가 1903년 부내면이 새로 생길때에야 비로소 ‘화개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러일전쟁을 전후로 이 일대에 유곽이 크게 번성했던 탓이다. 유곽지대가 떠나고 시장이 들어선 뒤 일제는 선화동으로 바꾸었는데, 그 의미는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 도원동
지금의 도원동에는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복숭아 과수원이 마을 산 언덕에 있었다. 그 뒤로 이 산을 도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해방 뒤 도원동이 되었는데, 산 언덕에 활터가 있었고 지금 소방서 자리엔 화장터와 전염병 환자를 격리해서 치료하던 덕생원이 있었다.
- 율목동
말 그대로 밤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에서 밤나무골이라고 불려졌다. 1920년대만 해도 율목동은 내동과 함께 인천의 유지가 모여 살던 기와집 동네로 유명했다. 1900년대 초반 미곡중개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1930년대까지 크게 번창했다.
- 유동
율목동과 도원동 사이에 있는 유동은 수양버드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에서 유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경인선이 개통되자 우각리에서 분리되어 유정이 됐다가 해방 뒤 유동으로 개칭되었다.
- 경동
개항 당시에 각국 지계에 접해있던 한국인 주거지역이었다. 인천부 부내면 시절에 내리, 외리, 용리 지역이었는데, 해방 뒤에 각각 내동, 경동, 용동으로 개칭 되었다.
- 용동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용리지역이다. 해방 뒤 용동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용동 큰 우물이 이 지역에 있다. 해방 뒤 까지도 이 물은 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매년 용동큰우물제가 열린다. 예부터 권번(기생)이 있었던 주점가로도 유명했다.
- 인현동
옛날 싸리나무 언덕 지역이라는 뜻에서 축현이라고 불렸다. 인현이란 인천과 축현에서 비롯된 말. 지금 동인천역과 지하상가가 밀집해 있는 상권의 중심지역이다.
- 전동
부내면 시절엔 전리였는데, 1892년 우리나라 돈을 찍어내던 전환국이 서울에서 이곳으로 옮겨 자리잡게 됨에 따라 돈을 찍어내던 곳이라는 뜻의 전동으로 바뀌었다. 전환국은 지금의 인천여고 자리에 있었다.
- 선린동
선린동은 개항 뒤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청관 지역이었다. 일제 때는 지나정, 미생정으로 불리기도 했다가 해방 뒤 선린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해방 후 중국인들과 예전처럼 친선적인 유대를 강조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일대엔 아직도 화교 2, 3세대 들이 살고 있다.
- 북성동
자유공원 정상 넘어 인천역 주변과 월미도를 매립해 연결해놓은 지역이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어선이 많이 드나들었던 북성포가 있었다. 개항 당시엔 외국인의 출입이 잦았던 와국지계였다.
- 송월동
원래부터 마을에 소나무가 하도 많아 솔골 혹은 송산이라 불렸다. 개항 당시만해도 송월동 1가 지역은 한국인 거주지였고 2, 3가 지역은 외국인 거주지였다. 일제때는 이 마을이 송판정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해방 뒤 ‘응봉산(현재 자유공원)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유난히 밝았다’ 는 낭만적인 뜻의 송월동으로 불리게 됐다.
- 영종도
옛날 영종도의 이름은 자연도였다. 송나라 ‘서긍’이 영종도에 들렀을 때 푸른 하늘에 제비들이 떼를 지어 나는 모습을 보고는 ‘제비가 많은 섬’이라는 뜻에서 자연도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던 것을 조선조 효종4년(1654년) 남양주에 있었던 영종진을 이곳 자연도로 옮겨오면서 영종도 또는 영종면으로 통용되어왔다. 운남동, 중산동, 운서동, 운북동 등 모두 네 개의 법정동으로 되어있다.
- 중산동
영종도 동쪽에 있고 백운산을 중심으로 동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중산동으로 부른다.
- 용유도
섬의 모양이 마치 용이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생겼다고 용유도라는 기가 막힌 이름을 얻게 된 섬이다.주섬인 용유도를 중심으로 대무의도, 소무의도 등 3개의 유인도와 실미도, 팔미도 등 8개의 무인도로 되어 있다. 현재 덕교동, 을왕동, 남북동, 무의동 등 4개의 동으로 나뉜다.
- 을왕동
왕자의 묘가 있다고 해서 ‘을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을은 동쪽을 뜻하고 왕은 해와 달무리를 가리킨다.
- 남북동
고려 시절, 용유도에 유배된 사람들이 이 마을에 모여 살았는데, 군사훈련의 하나로 정기적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편싸움을 했다. 이때부터 남쪽을 남리, 북쪽을 북리라 했다.
- 덕교동
남북동에 있는 순지 연못에서 용마가 이 개천에서 울다가 승천한 뒤부터 덕을 받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이곳에 다리를 놓아 용마교라고 불렀다. 그 덕을 받은 다리가 놓였다 해서 덕교동이라 부르게 됐다.
- 무의동
섬의 형태가 마치 무관복을 입고 춤을 추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무의도라고 했다. 혹은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무의도라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 내동
싸리재의 안쪽 이라 하여 안굴 또는 내동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구한말에는 인천부 부내면 선창리에 속했다. 일제강점 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내리(內里)라 했다가 1936년에는 서경정(西京町)이라 했는데, 광복 이후 왜식동명을 내동으로 바로잡았다. 1977년 경동·용동과 합쳐 내경동이 되었다가 1998년 동인천동의 관할이 되었다.
- 운남동 운서동 운북동
영종동의 주봉우리인 백운산을 중심으로 각각 남쪽, 서쪽, 북쪽에 자리잡았다고 해서 백운산의 ‘운’자를 따 운남동, 운서동, 운북동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