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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교의 특성 1)
황필호*
머리말
정진홍은 한국의 종교사를 서술해온 학자들에게서 두 가지 ‘훼손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한국의 고대종교를 그냥 애니미즘으로 규정함으로써 그것을 저급한 종교, 사이비 종교, 혹은 진정한 종교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다. 둘째는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종교는 불교․유교․그리스도교와 같은 외래종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발생했다는 태도다.1)
물론 이상의 두 가지 태도는 일말의 진리를 담고 있다. 만약 한국의 고대신앙이나 고대신앙의 한 주류가 무교라면, 그리고 무교가 모든 만물에 일종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의미의 애니미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한국의 고대신앙은 자연히 애니미즘적 신앙이 될 것이다. 또한 만약 진정한 종교는 단순한 애니미즘적 신앙 이상의 어떤 요소, 예를 들면 윤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 무교가 불교․유교․그리스도교 등의 외래종교보다 낮은 차원의 윤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 지적하겠지만 무교는 어느 종교보다 더욱 철저한 현세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 정진홍의 표현을 빌리면 ― 한국의 고대사상에 ‘구제의 논리’나 ‘해답을 제시하는 상징체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함유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종교적 동물(homo religiosus)이라면, 한국의 고대인들도 나름대로의 종교적 신앙과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에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고대종교는 어떤 것이었는가? 내가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이,1) 우리는 아직도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우리의 고대종교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 중의 하나가 바로 무교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와 같은 외래종교가 한국에 전파될 때 민중 속에서 가장 활발하게 살아있던 종교는 무교였다. 그래서 무교는 이런 외래종교와 종종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외래종교 속으로 들어가서 외래종교를 어느 정도 변형시키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외래종교에 대한 무교의 영향은 오늘날도 상당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와 불교도 내용적으로는 무교적인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성장하고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이 글에서 한국 무교의 특성을 논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무교의 일반적 특성을 기술해야 할 것이다.
Ⅰ. 무교의 가족유사성
어느 종교의 일반적인 특성을 기술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 종교 안에도 여러 교파가 난립해 있으며, 또한 동일한 교파의 종교인도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의식은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승려는 육식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타일랜드의 승려에게는 그것이 전혀 금기사항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무교는 가장 오래된 신앙체계 중의 하나로서, 세계 여러 곳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고대인 뿐 아니라 현대인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교의 일반적 특성을 지적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다만 우리는 대부분의 무교가 가지고 있는 가족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무교는 제재초복(除災招福)의 현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무교의 이런 현세주의는 무교를 지나치게 기복종교로 만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그래서 민중의 얼을 사로잡는 살아있는 종교로 만든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물론 무교에도 죽은 사람을 위한 사령제(死灵祭)가 있으며, 한국에서의 그것은 진오기굿이라고 한다. 그러나 “설사 죽은 영혼의 천도를 위한 사령제라 할지라도, 궁극의 목적은 사령이 현세적 삶의 공간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기 때문에 망자(亡者)로 하여금 삶의 세계에 대해 지니고 있는 모든 집착과 원한을 풀고 유감없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게끔 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다.”2)
이런 현세주의는 오늘날에도 그 위력을 전혀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느 외국인은 오늘날의 한국 무교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무교는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영적 자세가 없다. 즉 개인, 가정, 단체의 모든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만이 중요하다.
2. 무교는 불교와는 달리 속세의 온갖 환락의 포기를 거부한다. 인간의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3. 현세의 행복에 대한 추구, 즉 이 풍진 세상에서의 삶의 기쁨을 단적으로 나타낸다.3)
많은 사람들이 샤마니즘이 종교의 경지로 올라오지 못하고 미신으로 남게 된 이유를 바로 이 현세주의적 기복사상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기복신앙이 완전히 배제된 신앙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아마도 종교신앙을 의존감정(dependence feelings)에서 찾았던 슐라이에르마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둘째, 대부분의 무교는 평등주의, 특히 인류 역사 이래 보편적 현상인 남성우월주의보다는 남녀평등을 주장한다. 특히 한국의 무당은 크게 강신무당과 세습무당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강신무당은 남자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여자며, 세습무당은 전부 여자다. 특히 “세습무의 문화권에서 남자는 굿을 주재하는 사제로서의 기능보다는 굿의 음악을 반주하거나 굿에 부수되는 연희를 맡을 뿐이다.”4)
오늘날도 무당의 다수는 여자며, 전통적으로 내려온 업신․터신․주신․성주․조왕(竈王)․조상 등의 가정신을 섬기는 신앙행위에 남성들은 관여하지 않고 주로 주부들이 수행해 왔다. 일부의 학자들이 한국 무교를 ‘가정 무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한국종교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했던 아키바 타카시(秋葉 隆)가 “한국 남성은 유교중심적이고 한국 여성은 무속중심적”이라고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5)
또 다른 실례로, 경북 지역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님을 골맥이 하씨 할배․최씨 할배․양씨 할배의 3신위로 모시는데, 여기서 ‘골맥이’란 ‘고을’(邑, 洞)․‘막’(防)․‘이’(명사형 어미)의 뜻을 가진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뜻이며, ‘할배’는 조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1968년 동제(洞祭)에 나타난 신명(神名)을 성별로 나누면, 남신 93명, 여신 2백26명, 성별을 알 수 없는 것이 4백31명이었다. 그러니까 여신이 남신의 2.4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서낭당은 대개 풍요다산의 지모신(地母神)을 섬기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남신보다 여신이 훨씬 많다는 것은 일단 여성상위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동서양 샤마니즘에 있어서, 적어도 굿판에서는 남녀차별이 사라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6)
셋째, 대부분의 무교는 녹색주의를 주장한다. 그들은 다른 어느 종교인보다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았으며, 자연을 파괴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연을 신이 존재하는 거룩한 실체로 파악한다. 무교인들의 이런 환경친화적인 성격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대부분의 무교는 공동체주의를 따르며, 대개 이 공동체주의는 춤과 노래와 함께 표현된다. 특히 고대 한민족의 무교신앙에서 하늘과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는 염원은 음행오행설과 연결되기도 했다. 그들은 음행오행의 원칙을 따라서 신이나 자연과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다만 이때 무당이 사용하는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우주의 언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서낭당에서 올리는 제사로는 당제(堂祭), 동제(洞祭) 등이 있다. 그러나 호남 지방에서는 이런 제사 이외에도 정월 14일 저녁에는 마을의 남녀노소가 다 나와서 줄다리기로 한바탕 힘을 겨루면서 흥을 돋군다. 그리고 그들이 그 줄을 신목(神木)에 감고 나면, 솟아나는 새벽 대보름달 밑에서 제관들이 제의를 올리기도 했다. 이어서 그들은 대동회를 열어 일년간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제사음식을 다같이 음복(飮福)하거나 조금씩이라도 집집마다 나누어 주는데, 이것은 서낭님과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서낭당을 중심으로 마을의 정신적인 유대감을 다지는 공동체주의를 채택했던 것이다.7)
우리는 지금까지 무교의 네 가지 가족유사성으로 현세주의, 평등주의, 녹색주의, 공동체주의를 들었다. 물론 이들 속성 중에는 부정적인 것도 있고 긍정적인 것도 있다. 또한 긍정적인 성격도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오히려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무교가 초월주의보다는 현세주의, 남녀차별보다는 남녀평등, 환경파괴보다는 환경보호,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Ⅱ. 한국무교의 특성
그러면 한국무교는 지금까지 토론한 무교의 일반적인 특성 이외에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첫째, 한국무교는 어느 무교보다 더욱 철저한 현세주의를 따른다. 예를 들어서, 모든 무교는 죽은 자를 위한 일종의 위령제를 갖고 있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부분은 약간씩 다르다. 일본의 무당은 죽은 자의 실태를 강조하고, 퉁구스 무당은 지하의 정령을 위로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 무당의 주된 관심은 어디까지나 살아 남은 사람들의 복락 기원에 있다. 그야말로 한국의 무교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해서 사령제를 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퉁구스 무교의식의 중심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희생제를 드리는 것이며, 일본 무교의식의 중심은 죽은 자의 영혼의 메시지와 신탁을 받아서 전파하는 것이며, 한국 무교의식의 중심은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함으로써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다.”8)
한국무교의 이런 철저한 현세주의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일단 살고 보자”는 한국인 전체의 심성과 일치한다. 필요하다면 아부나 아첨과 사대(事大)까지도 서슴치 않았으며, 어느 경우에는 남을 속이고 이간질하는 비윤리적인 행위까지도 서슴치 않는 우리들의 심성과 일치한다.
이 현세주의는 종종 신도들에게 ‘힘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종교학자들이 무교를 신현(神顯, theophany)이나 성현(聖顯, hierophany)보다는 역현(力顯, kratophany)으로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현은 초월적인 신성이 일상적인 현상에 나타나 있다고 믿는 신앙이며, 성현은 성스러운 것이 속된 것 속에 나타나 있다고 믿는 신앙이며, 역현은 초인간적인 힘이 인간사회에 나타나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1. 신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은 무한하면서도 스스로 존재하고, 인격적이면서도 사랑과 선의 존재며, 창조주인 성스러운 절대자와 이 절대자에 상응하는 관계로서 인간을 파악한다. 그리고 이 절대자를 인간을 초월하면서도 인간 속에서 활동하는 내재적 존재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존재와 그 존재를 지속시키는 근원적인 실재로 파악한다.
이러한 종교 문화 속에서 살아온 민족은 대체로 종교적 상징에 의해 단합되고, 드높은 윤리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삶의 근원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이른바 사회 통합의 계기가 신의 초월성이나 절대성에 의하여 유효하게 될 뿐 아니라, 현실의 윤리까지도 신의 계율에 의하여 억제되고 순화된다고 믿는다. 또한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모든 존재의 기본적인 질서를 찾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의 관계도 자연스러운 조화보다는 결단과 선택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신의 창조 섭리를 이해하고, 그 창조 섭리를 성취하려는 종교인들은 막연한 내세지향적인 은둔생활을 하기 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 (중략)
2. 성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은 절대자․초월자․인격자라는 개념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일상적인 가치 체계를 초월하는 실재가 있으며, 그 실재가 곧 인간의 가치 체계를 가치 체계로 받아들이게 하는 의미 부여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속(俗)을 떠난 성(聖)이 존재하며, 속은 성에 의하여 속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중략)
이 종교 문화권 안에 있는 민족들은 신현의 문화권 안에 있는 민족들보다는 역사 창조라고 하는 본원적인 시간관을 결여하고 있다. 그보다는 자연의 순환과 그 섭리에 조화되어 ‘커다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죄의식에서 나오는 윤리 의식보다는 무위(無爲)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삶을 윤리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이념적 논구가 결코 부족하지는 않으면서도, 그 실재로부터 유래되는 계율의 준수를 중요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아 안에 이미 내재해 있는 실재를 직접 실현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3. 역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은 인격적인 절대자나 자연 혹은 원리를 따라서 인간의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 다만 삶이 부딪히는 실존적인 한계 상황에서 뼈저린 좌절과 패배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 이상의 어떤 힘에 대한 의존과 희구, 그리고 그 힘에 의한 위안을 통하여 삶을 영위한다. 그들은 형이상학적인 종교 이론이나 윤리적인 강경성을 요청하지 않는다. 단지 위대한 힘의 이용을 통한 현실적인 위기 타개를 모색할 뿐이다.
그 힘은 하늘․비․구름․태양․달․나무․바위와 같은 자연물이 될 수도 있고, 특수한 사회 계층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살아 남는 것이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살아 남고 볼 일이다. 불경, 비굴, 굴종, 아부가 되어도 당장 내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길만을 모색한다. 이러한 민족으로는 전통적인 무교와 현세를 중요시하는 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의 특성은 현실주의적이며,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주어진 목적 달성을 추구한다. 또한 윤리적이거나 원리적인 이념보다는 실용적인 이해와 개인적인 편의를 중요시한다.9)
유동식은 ‘힘’으로 나타난 한국 무교의 기복제를 크게 대감(大監)거리, 제석(帝釋)거리, 성조(成造)거리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1. 대감신은 재복신(財福神)인데, 여기에 나오는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먹고 남게 도와주고/쓰고 남게 도와주는 몽주대감/보물대감, 재물대감이 아니시냐.”
2. 제석신은 자손을 축복하고 수명을 관장하는 수복신(壽福神)이다. 이것은 불교적인 환인제석(桓因帝釋)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며, 단군신화에도 나오듯이 토착적인 천신(天神)을 뜻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짧은 명 길게 잇고/길고 긴 명 서리 담아/무쇠 목숨에 돌끈 달고/ 바위 목숨에 쇠끈 달아/여든에 퇴를 달게/도와 주신 성존불사.”
3. 성주님은 가택(家宅)의 주재신(主宰神)으로 집안의 평안을 관장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가중(家中)이 부(富)하도록/소원성취 하도록/가중에 탈 없도록/잡귀잡신 범접(犯接) 못 하도록/부디 거두어 주사이다.”10)
여기서 우리는 한국무교가 철저한 기복적 현세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실로 기복이 없는 무교는 무교가 아니며, 한국의 경우는 그것이 다른 어느 무교보다 더욱
뚜렷한 듯이 보인다.
예를 들어서 부리야트족의 무당은 크게 서방의 선신을 섬기는 ‘흰 무당’과 동방의 악신을 섬기는 ‘검은 무당’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그들의 자비로운 힘으로 인간을 도와주기 때문에 존경을 받지만, 후자는 악령을 통해 인간을 처벌할 수 있으며 ― 어느 경우에는 인간의 영혼을 훔쳐가기도 하여 ―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검은 무당의 힘은 흰 무당들보다 훨씬 비밀스럽게 전수되고 있다. 이 두 무당들은 서로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에스키모족의 무당은 가끔 갓 태어난 아이를 죽여서 시체를 말려 보관하기도 한다. 그래야 그가 망령(亡靈)을 언제나 불러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11)
그러나 한국 무당의 역할은 언제나 인간의 질병을 치료해 주고, 부귀다남의 행복을 주는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무당은 진짜 무당이 아니라 선무당일 뿐이다.
둘째, 한국무교는 어느 무교보다 더욱 철저한 평등주의, 특히 남녀평등주의를 따른다. 이미 말했듯이, 한국무교에는 남성 무당보다 여성 무당이 절대적으로 많은데, 우리는 이것을 한국무교의 또 다른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퉁구스족, 오스티야크족, 부리야트족, 야구트족의 무교에도 여성 무당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의 지위는 남성 무당의 지위보다 낮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엘리아데는 한국무교가 원래 유목문화의 전형적인 의례라고 추측하면서, 여성 무당이 남성 무당보다 훨씬 많다는 것은 ‘전통적 무교의 쇠퇴의 징후’를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무교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무교에는 남방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한(漢)나라 시대(206 B.C.E.-219 C.E.)의 샤만 모자에 숫사슴 뿔이 있는 것을 보면, 고대 터키의 숫사슴 의례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숫사슴 의례는 수렵 및 유목 문화의 전형적인 의례다. 이런 문화권에서 여성 무당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현대 한국무교에서 여성 무당이 우세한 것은, 전통적 무교가 쇠퇴의 징후를 보인 증거이거나 남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증거일 것이다.12)
그러나 엘리아데는 여기서 ‘남방적인 요소’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으며, 또한 한국무교를 다루는 태도가 극히 피상적이어서 여성 무당의 숫자가 무교의 쇠퇴와 연관된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이것은 그가 그의 대저 Shamanism(샤마니즘) 에서 한국무교에 대하여 오직 한 단원만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또한 한국무교의 기원에 관계 없이, 현재 여성 무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성차별적인 한국사회에서는 명확한 남녀평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무교의 이런 남녀평등주의는 이미 조선왕조 시대부터 ‘남성적인 유교’에 반대되는 ‘여성적인 무교’로 표현되기도 한다. 최준식은 유교의 제사와 무교의 고사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제사는 여성이 너무도 철저하게 소외된 종교의례로 유명하다. 음식은 모두 여성이 만들어 놓고 정작 메인 이벤트 때 여성은 대청마루 위로 올라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으니 여성들은 억울할 뿐이다. 다시 말해, 제사에서의 제주(祭主)는 그 집안의 가장인 남성이 맡는다. 이렇게 보면, 한국가정에서도 ― 적어도 조선조 시대에는 ― 종교의례 집전권은 남성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한국가정의 종교의례로서 제사보다는 그 중요성이 떨어지지만 고사라는 것이 있었고, 이것은 그 집안의 여성이 집전했다는 사실이다. 10월 상달이 되면, 나이가 가장 많은 부인은 집안일을 관장하는 성주신을 비롯해서 집터 담당의 터줏대감, 안방 아랫목에 산다는 삼신할머니, 부엌의 조왕신 등에게 정성스레 떡을 해 바친다. 집안의 으뜸 신령에게 그 집의 여성 가장이 직접 종교의례를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은, 부인의 권한이 적어도 집안에서만큼은 절대적이라는 것을 방증해 준다.13)
셋째, 한국무교는 녹색주의보다는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해 있다. (특히 밤중에 깊은 산에 올라가서 굿을 하면서 마구 자연을 파괴하는 오늘날의 한국 무교는 더욱 그런 듯하다.)
모든 무당은 일정 시간에 걸쳐 황홀경에 빠지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북방의 무당들은 그것이 바로 귀신을 만나러 천계나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의 무당들은 귀신을 인간세계로 끌어들여서 사정하고 아첨한다. 한 마디로 “북방 샤마니즘에서는 샤만이 움직이지만 한국무교에서는 귀신이 움직인다.”14) 그만치 인간이 중요한 것이다. 엘리아데는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의 무당을 이렇게 설명한다:
무당이 치료사일 수도 있고 영혼의 안내자일 수도 있는 것은 무당이 바로 접신술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당은 자기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아주 먼 곳을 방황하게 할 수도 있고, 지하계로 내려가게 할 수도 있으며, 하늘에 오르게 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접신 체험을 통해 이 땅이 아닌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무당은 천상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지하계로 내려갈 수도 있다. 이 두 세계를 드나들 수 있는 것은 그가 일찍이 이 두 세계에 있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금단의 지역에서 길을 잃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무의례를 통하여 성별(聖別)된 몸인데다가 수호영신들의 보호까지 받기 때문에 무당은 위험에 도전하면서, 이 신비스러운 땅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인 것이다.15)
그러나 한국의 무당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귀신에게 인간계로 내려오라고 명령한다. 즉 인간이 신을 조종하는 것이다. 김인회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무교에 나타나는 신들의 경우, 특히 강신무의 경우에는 대개가 조선조 시대의 관복을 입고 등장하는데, 처음 등장할 때는 자신의 존재를 소개하면서 위엄을 과시하며, 인간들의 대접이 충분치 못함을 불평하거나 더 많은 것을 바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신을 설득하고 속여가면서 결국에는 인간의 뜻대로 신을 조종한다.
이렇게 굿에서는 언제나 신들이 인간에게 조종당해서 가능한 모든 약속과 축복을 전한 다음에 인간들과 함께 즐기며 놀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인간의 세계로부터 신의 세계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굿에서는 인간을 섬긴다기보다 신을 불러서 농락하고 이용한 뒤에 쫓아보내는 것이다.16)
이 한국무교의 인간중심주의도 한민족의 일반적인 속성과 일치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홍익인간이나 인내천(人乃天) 등으로 표현된 인간존중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무교의 성격을 “돈 나고 사람 났지, 사람 나고 돈 났냐?”가 아니라 “사람 위해 귀신 있지, 귀신 위해 사람 있나?”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인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듯이, 다른 지역의 무교에도 어느 정도의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처절한 삶의 고통을 즉석에서 해결하려는 가장 소박하고 원천적인 인간중심주의를 한국 무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넷째, 한국무교는 어느 무교보다 평화정신을 따른다. 이것은 무교의 일반적인 특성인 공동체주의를 한 차원 더욱 높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무당과 귀신의 대결은 ― 비록 그것이 철천지한을 품은 원귀라도 ― 서양에서와 같은 선과 악의 대결도 아니고, 삶과 죽음의 사투(死鬪)도 아니다. 그는 귀신을 어우르고, 회유하며, 그에게 아첨하고 빈다. 이런 사실은 한국의 무가(巫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한국무교의 이런 평화 정신도 한민족의 심성과 일치한다. 한민족이야말로 백의(白衣)를 사랑하며,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하지 않은 민족이다. 우리의 이런 평화 정신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875-86)의 사건이라고 전해오는 「처용가」(處容歌)라는 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커다란 힘을 상대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고, 폭력에는 폭력으로 진압하려는 방식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도 있고, 남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둘째는 나를 침범한 힘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방식이며, 여기서는 일 대 일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 셋째는 대항할 힘도 없고 굴복하기도 싫어서 그냥 도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슬기는 네번째 방식을 택하는데, 그들은 타협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용감하게 도전한다. 그러나 그들이 폭력으로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힘의 균형이라는 정치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노래와 춤이라는 예술적 차원에서 도전한다.
밖에서 돌아온 처용은 악신이 사람으로 변모하여 그의 집에 침입해서 아내와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온다.
서울 밝은 달에 밤새워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라리 넷일러라.
둘은 내해인데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련만 빼앗겼으니 어이 하리꼬.
이것을 본 악귀는 드디어 처용 앞에 무릎을 꿇는다.
평화의 힘이 폭력의 힘을 이긴 것이다.
내가 그대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잘못을 범했는데
그대는 분노하지 아니하고 춤추며 노래를 하니
나는 이에 감격하여 고개를 숙입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은 물론이려니와
당신과 같은 형상(形象)만 보더라도
나는 일체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섯째, 한국무교는 어느 무교보다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무교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무교가 외래종교와 가끔 대결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외래종교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 편안히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런 특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무교가 마치 부리야트 무교가 소련연방 시절에 받았던 것과 같은 가혹한 탄압을 모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인간주의, 평화정신, 평등정신, 관용정신 등을 가르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진리와 비진리를 엄격하게 구별한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관용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반대의 명제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의 이런 진리 주장은 자연히 다종교 상황에서는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무교는 다른 종교를 모두 수용해 왔다. 이런 뜻에서 무교야말로 ‘종교백화점’ 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종교 현실에서 하나의 모범사례가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조흥윤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무(巫)는 고대 사회에서부터 한민족의 전통신앙이면서 기층신앙인 동시에 민중신앙이었다. 우리는 그 바탕 위에서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를 수용했다. 그러면서 무는 고려조에 이르도록 저들 외래종교와 함께 이른바 다종교 공존(多宗敎 共存)의 상황을 연출하였다. 물론 조선조 이래 오늘에 이르도록 무는 부정적인 것으로 핍박받아 왔지만, 그것은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기반의 역할을 역사 속에서 누차 체험해 왔다. 실로 무는 다종교 공존의 상황 속에서 다른 종교들의 가치와 의의를 인정해 왔다.17)
왜 한국무교는 철저한 현세주의, 철저한 평등주의, 철저한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평화정신과 관용정신을 갖게 되었는가?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치사회적인 이유도 있고, 무교에 대한 불교와 유교의 탄압이라는 이유도 있고, 일제의 강점기의 특수한 현실적 산물이라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한국무교의 특성은 바로 그것이 지배층보다는 피지배층, 양반보다는 상놈, 특수사람들보다는 보통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해 왔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수많은 외침에서 가장 피해를 입었던 계층은 언제나 민중이었다. 그리고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 온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억압은 도리어 무교의 평등정신을 만들었다. 또한 홍익사상으로 대표되는 인간중심사상은 언제나 민중의 이상으로 남아 있었으며, 미륵불 사상으로 대표되는 평화정신과 관용정신은 언제나 민중의 희망으로 살아 있었다.
그래서 홍일식은 한국의 고유사상을 일단 무교라고 단정하고,
그것을 관인사상(官認思想)과 구별한다:
1. 관인사상이 주로 지배층의 권력유지 수단과 도구로 이용되어 온 반면, 고유 전통사상은 언제나 민중의 생활 속에서 그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생활의 반려자로 일관해 왔다.
2. 관인사상이 정치적 변혁 또는 권력 구조상의 변동에 따라 그 성쇠기복이 무상한 데 비하여, 고유사상은 민족심성의 저변에 뿌리를 박고 줄기차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
3. 관인사상이 민족적 주체성이 희박한 데 비하여, 고유사상은 강인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4. 권력의 비호를 받아 온 관인사상이 학적으로 연마되어 체계화된 데 비하여, 고유사상은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아직도 미신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 관인사상이 배타적인 데 비하여, 고유사상은 관용과 조화로 임하는 포용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를 사대적이라고 규정짓고 있으나 이는 피상적 관찰이다.
6. 고유사상은 장구한 시일을 두고 우회적으로 외래사상을 자기 체내에 용해시켜서 결국 내 것으로 동화시켜 버리는 강력한 특질을 지니고 있다.18)
비록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엘리트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유교와 불교는 왕권이나 지배계층을 통해 한국에 들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먼저 중국에 가서 받아들였으며, 그후에도 그리스도교는 가진 사람들보다는 상속받지 못한 백성․민중․서민을 통해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무교의 주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중심권의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권의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자연히 현세중심적, 평등주의적, 인간중심적, 평화중심적, 관용적 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무교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백성을 떠난 종교는 이미 종교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각기 다른 무교들 사이에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접신을 하고 병을 치료해 주는 행위 등은 모든 무교에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무교의 기본구조는 동일하지만 오직 그것을 수행하는 굿의 형태가 지역과 시간에 따라서 상이할 뿐이라는 엘리아데의 주장에까지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모든 무교가 그들의 엄청난 유사성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형식과 구조상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한국무교의 특성을 가능한 한 규명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일례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무교의 인간중심주의는 다른 무교의 경우보다 더욱 확고해서, 무당이 귀신을 찾아가지 않고 귀신을 볼러낸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한국무교의 특성인 평화정신과 관용정신을 실증하기 위해 무교와 외래종교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겠다.
Ⅲ. 한국무교와 외래종교의 만남
1. 무교와 불교의 만남
어느 학자는 우리나라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몽골에서는 부처를 자신들의 고유한 신의 호칭인 ‘burkan’으로 부름으로써 불교의 독자성을 흐려버렸고, 이와 반대로 만주에서는 ‘fuchi’(佛)라는 호칭에다가 그들의 고유한 신까지 포함시킴으로써 그들의 재래종교의 독자성을 흐려버렸으나, 한국에서는 재래의 신을 ‘불거내’(purkan)라고 부르고 불교의 부처를 ‘불’(佛)이라고 부름으로써 양자를 구별해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동식은 ‘엄격히 말하면 한국은 몽고와 만주의 경우를 합친 형태’라고 말한다. 즉 “외형적으로는 만주와 같이 외래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인 듯이 내세우지만 내용적으로는 몽고인들처럼 재래의 신앙체계를 그대로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팔관회(八關會)란 원래 불교적 수양법 중의 하나였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팔계(八戒)를 엄수하는 평신도들의 수양법회였다. 그런데 고려 시대의 팔관회는 사실상 금욕적 법회와는 관계없이 옛날부터 지켜오던 가을의 제천의례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이름은 불교식인 팔관회였지만 그 내용은 술 마시며 노래와 춤으로 천령(天灵)과 명산대천 및 용신(龍神)에게 제사드리는 재래의 민족제전이었다. 따라서 도를 닦는 불교법회가 아니라 복을 비는
무교적 제례며 굿이었다.
봄의 연등회도 원래는 부처님께 드리는 등공양(燈供養)을 하던 법회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가을의 팔관회와 마찬가지로 노래와 춤으로 삼계(三界)의 신령들에게 제사드리고 복을 비는 재래적인 제의의 연장이었다.19)
불교에 대한 무교의 이런 영향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살아 있는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불교사찰 어느 곳엘 가도 볼 수 있는 삼성각 혹은 산신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연명(延命)과 생산(生産)과 수호(守護)를 주관하는 재래 무교의 산신과 도교의 칠성을 함께 모신 신각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삼성각이 신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법당은 없고 삼성각만 모시는 절이 있을 정도로 민간신앙의 주체가 되어 있다.
이제 불교는 이 무속적인 삼성각을 버려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최준식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젊은 승려들 사이에는 이 삼성각이 비불적(非佛的)인 요소라며 추방해야 된다는 주장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고, 서로 그렇게 평화공존하는 모습도 보기에 나쁘진 않다. 또 불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될 때 항상 자랑으로 내세우는 방편설(方便說)의 일환으로 삼신각을 생각하면, 삼신각을 유지해도 불교 자체에 크게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20)
그러나 무교와 불교가 만나면서 불교가 무교적인 요소를 받아들인 것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욱 많은 듯하다. 우선 무교의 내세관이나 심판관이 여기에 속한다.
무교에서는 내세를 크게 천상계(극락)와 지하계(지옥)로 나누는데,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은 민간불교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또한 무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명부(冥府)로 가 시왕(十王)들 앞에서 생전의 선악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완전히 불교적인 것으로, 불교 사원에 있는 명부전 혹은 시왕전에 얽힌 교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무교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주재 보살인 지장보살 이야기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망자의 혼을 심판할 때 사용되는 기준을 바리데기 무가에서 보면, 그것은 다분히 유교적이다. 그러나 유교적 심판을 받고 가게 되는 지옥은 다시 완전히 불교 일색이다. 칼만 꽂혀 있는 칼산지옥이니, 너무 추워 견딜 수 없는 한빙지옥이니 하는 것들은 바로 사찰의 명부전이나 시왕전에 그려진 탱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모습이다.21)
2. 무교와 유교의 만남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조는 불교와 무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김인회는 당시 무교의 위치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수많은 기록에서 계속적으로 무속 탄압의 기사가 발견된다는 것은 그만큼 무교가 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둘째, 더 나아가서 “조선조의 무속 탄압은 어쩌면 말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체제옹호와 정치적 힘의 균형유지를 전제로 한 적정 수준에서의 견제 혹은 공존을 목적으로 한 정책이었다. 무당에게 세금을 물리고, 질병퇴치를 위해 국가가 무당을 동원하고, 재난을 만났을 때 무당에게 굿을 하도록 허락한 기록 등은 조선조의 유교문화가 무속과의 양립을 전면 거부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서의 공존을 원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마치 우주 질서에서 음양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듯이, 조선조 사회에서 유교와 무교는 각각 양과 음의 기능을 함으로써 서로 보완․공존할 필요가 있었다.”22)
셋째, 무가에는 유교경전의 구절들과 유교적 덕목들이 무수히 삽입되어 있으며, 무속의례와 유교의례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마을굿에 유교적 제사 절차가 들어있는 것 등은 무교가 무속 의례를 더욱 화려하게 하기 위해 유교를 이용한 경우가 되겠다.
3. 무교와 도교의 만남
한국무교가 불교 뿐 아니라 도교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부분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느냐 하는 것을 문헌으로 증명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도교 자체가 도학사상․역리사상․음양오행설․점성술 등을 불로장생 사상과 결합시킨 것이라 쉽게 도교적인 요소를 구별해 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한국으로 유입된 도교는 처음부터 자체의 사당이나 제의의식을 갖지 않고 다른 종교들과 습합해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도교와 무교의 만남에 대한 거의 독보적인 논문을 발표한 김태곤은 ‘편의상 조선조 도교의 요람으로 잡을 수 있는 소격서(昭格署, 혹은 昭格殿)를 중심으로 펼쳐진 도교의 제반 의례, 이와 관련된 행사 및 기타 종교적 현상을 기점’으로 해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 신관(神觀)의 측면에서 보면, 도교와 무교는 일방적인 영향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듯 하다:
한국의 민간에서 신앙되는 신들의 일차적 상관소(相關素) 중에서 옥황천존신(玉皇天尊神)과 성신(星神) 계통의 신들은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신들로 보인다. 또한, 한국도교의 이차적 신들(민간신앙과 습합된 신들)을 통해서는 한국 재래의 민간신앙이 한국도교에 미친 영향을 살필 수 있어 한국도교와 재래의 민간신앙은 서로 깊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23)
이어서 김태곤은 일반적으로 무교에 자리잡은 도교 계통의 신으로 알려진 성황(城隍), 칠성(七星), 조왕 신앙을 중심으로 그들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우선 성황신앙은 중국 북제(北齊) 때(550-577)로부터 시작되어 송대(960-1279) 이후에 널리 퍼진 것으로서, 팔사(八蛇)의 7번째 신인 수용(水庸)을 제사하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다. 이런 성황신앙은 내용적인 면에서 한국 재래의 마을 수호신인 서낭신앙과 비슷하고, 또한 ‘성황’과 ‘서낭’의 발음이 비슷하여 결국 그들을 동일어로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칠성신앙과 무교의 관계도 밀접하다. 무당굿에는 으례 칠성굿이 포함되게 마련이며, 또한 국내의 모든 마을에서는 아들 낳기와 아이 잘 키우기를 기원하기 위한 칠성제도 열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학자들은 도교에서 북두칠성은 인간의 수명․부귀․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이었는데, 그와 같은 칠성신의 장수 기능이 민간으로 점차 확산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김태곤은 오히려 “민간에서 보편적으로 신앙하던 재래의 천상존재인 일월성신에 대한 신앙의 기반 위에 후대에 들어온 도교의 칠성신앙이 습합된 것”으로 본다.
조왕은 한국 어디를 가나 민가의 부엌 부뚜막 뒤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주부들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신인데, 학자들은 이것도 원래는 중국 도교에서 유입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김태곤은 한국의 재래신앙 속에 이미 화신(火神)이 있었으며, 이것은 자연스레 부엌의 불과 연관되게 되었기 때문에 조왕신앙도 전래의 고유사상 위에 도교 사상이 습합된 것으로 본다. 더구나 “조왕은 국내 절에서도 신앙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교의 조왕신앙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민간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24) (그러나 인생관․영혼관․내세관의 측면에서 보면, 무교와 도교는 다같이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도교는 민간신앙의 기복적 인생관 뿐 아니라 인간의 윤리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김태곤은 도교와 무교가 이렇게 서로 상호작용을 주고 받게 된 주된 원인은 그들이 모두 ‘미분성(未分性)에 기반을 둔 원본(原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여기서 어떤 의미로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무교와 도교의 기저에는 근원적으로 우주질서를 초월하려는 원본적 욕망이 있으며, 그 열망은 분화된 논리의 세계가 아니라 미분화된 초논리의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는 뜻인 듯 하다.
최준식은 무교와 도교의 만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첫째, 무교의 칠성신앙은 도교에서 온 것이다. “이 칠성신앙은 얼마나 위력이 강했는지 불교에도 스며들어 한 건물을 차지하게 되었고, 무교에서는 신령의 마음을 상징한다는 명도 거울의 뒷면에 일곱 개로 양각(陽刻)된 칠성으로 나타난다. 또 제주도에서는 인간의 장수를 위해 하는 굿을 특별히 칠성굿이라고 하며, 다른 지방에서는 제석거리나 불사거리를 할 때 칠성신을 같이 모신다.”25)
둘째, 무교의 관제(關帝)신앙도 도교에서 온 것이다. 관운장이 “우리 나라에 신격으로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이 전쟁의 신으로 관우를 모시고 온 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전쟁 후 선조(1567-1608)는 그 은공을 갚으려는 뜻에서 관우를 조정에서 모시는 신으로 공식 제정하고, 전국에 몇 개의 사당을 짓게 했다. 그 중 현재는 ― 서울에서만 보면 ― 동대문에서 신설동 쪽으로 다 가서 오른 쪽에 있는 동묘(東廟)가 남아 있다. 아마도 관우는 이 때부터 한국 무교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러한 모습은 6․25가 끝난 다음 한국 정부가 미국의 맥아더 장군을 대단하게 생각해 동상까지 세운 것과 ― 실제로 맥아더를 무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있지만 ―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관우는 그 강한 무공에도 불구하고 사로잡혀서 한 많은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무교의 신령으로서의 자격에 전혀 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관우는 무당들 사이에도 강한 신령, 무서운 신령으로 이름이 나 있다.”26)
셋째, “도교의 영향은 무당들의 부적 처방에서도 보인다. 아마도 동북아시아 종교 가운데 부적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도교일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문헌 가운데서 살펴 보면, 4세기 초에 남중국의 도교를 대표하는 꺼훙(葛洪)이 저술한 포박자(抱朴子)에 이미 다양한 부적이 보인다. 이 부적신앙이 한국에 전해진 것인지, 혹은 우리나라에도 고유한 부적신앙이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부적에 그려진 그림 내용이 비슷한 것을 보면 서로간에 어떤 영향이 오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27)
넷째, 최준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교가 우리나라에 종교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 고유의 기존 세력’인 무교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도교와 무교의 관계에 있어서 중국과 한국은 완전히 상반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중국의 경우는 무교가 도교에 흡수되어 맥을 못 추었던 반면, 한국의 경우는 워낙 무교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도교가 고구려 말에 수입되어 고려조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신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나 유교처럼 가시(可視)적인 뿌리는 내리지 못했다.
중국에는 불교의 절과 함께 도교의 사원인 도관이 온 천지에 깔려 있다. 그곳에서 도사들은 우리나라의 무당들이 하는 것처럼 수많은 신을 모시고, 천도제를 지내 주기도 하고, 귀신과 통교도 하게 해주는 등 무당들의 직능을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무당을 특별히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도교는 중국 민족의 고유 종교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중국 민중의 종교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종교여서 민중들은 도교만으로도 많은 종교적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우리 고유의 성정에 맞는 무교가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원시적’이며 완전히 중국적인 도교를 받아들일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고등종교의 높은 윤리와 철학, 폭넓은 세계관 등은 이미 불교(혹은 유교)를 통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뒤진다고 볼 수 있는 도교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 지도 모른다.28)
최준식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여간 한국 무교와 도교의 만남이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보다 우리 학자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분야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무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불교와 도교가 무교에 대해 어느 정도 호의적이었다면, 그리고 유교가 무교를 공식적으로는 공격하면서도 민심수습을 위한 목적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 방관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무교를 미신으로 간주하고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개신교)의 무교화’를 걱정한다. 김원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는 4세기까지만 해도 완전히 샤마니즘이 지배했다. 그후에 중국으로부터 여러 종교가 들어와서 이 땅에 정착했다. 그래서 찬란한 황금색 문명을 창조한 신라의 불교는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선비 문화를 이룩한 조선조 5백년은 유교의 전성기였다. 그리고 불교와 유교는 모두 샤마니즘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 바톤을 그리스도교에게 넘긴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서양문명의 측면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마저 샤마니즘과의 대결에서 기가 꺾이고 있다.29)
요즘 유행하는 부흥회의 2부 순서는 주로 철야기도회 형식의 신유(神癒) 집회인데, 이것은 바로 무당굿의 일종이다. 삼삼칠 박수에 맞는 찬송가를 골라서 요란한 율동을 하고, 고래고래 고함소리로 기도하는 이 집회는 대개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부흥사가 인도하는데, 그는 하느님과 신자와의 중재자인 샤만이라고 할 수 있다. 안심입명(安心立命)과 제재초복(除災招福)의 샤마니즘적 집회가 특별집회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30)
오늘날 한국의 기성종교는 모두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발전의 한복판에는 예외없이 무교의 기복적 현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내가 평소에 “외형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 여러 종교가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오직 무교라는 한 종교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재영도 개신교의 교회성장은 결국 기복적 현세주의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일찍이 교회성장신학의 챔피언인 로버트 슐러는 교회성장의 원칙으로 다음의 7가지를 내세웠다. 첫째, 교회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넓은 주차장 뿐만 아니라 보조 주차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셋째, 교회는 신자들의 나이와 성격에 따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 넷째, 모든 평신도는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다섯째, 화려한 광고를 통해 상품을 항상 선전해야 된다; 여섯째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해야한다; 일곱째,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 해야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한 마디로 ‘복음의 상품화’라고 부를 수 있다.31)
정재영은 한국교회가 이런 미국의 사조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성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어느 목사의 설교 내용을 증거로 제시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부자십니다.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가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떡을 달라 하면 떡을 주시고,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을 주시고, 얼마든지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그를 우리들의 아버지로 믿고 사는 것을 충심으로 감사하기 바랍니다.32)
이어서 정재영은 이런 복음의 상품화 현상은 그리스도교를 사적 영역으로 퇴거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더욱 적극적 사고방식․물질적 축복․헌금 강조․치유 운동․성령 운동․부흥 성회․산상 기도회․계절에 따른 대형 연합집회․총동원 주일행사 등을 강조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이제 “교회의 양적 성장 자체가 해당 집단을 사회적으로 정당화시켜 준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33) 결국 교회성장의 중심 원인은 무교적 현세주의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부적을 공공연하게 신도에게 판매하는 불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교와 여러 외래종교와의 만남을 논했다. 여기서 우리는 무교가 다른 외래종교를 배척하기보다는 도리어 배척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교적인 요소가 다른 종교들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만큼 한국무교는 관용주의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불교․유교․도교․그리스도교 등의 모든 외래종교가 무교의 맥락 안에 수용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윤이흠은 이렇게 말한다:
불교는 고려조의 문화를 건설하는 역할을 했지만, 고려조를 완전히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또한 고도로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유교는 사회를 재편성하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건설한 데는 탁월한 힘을 가졌지만, 자연과 역사의 재앙 앞에서 불가피하게 당면하게 되는 공포를 극복하려는 직접적 욕망 표현인 기복신앙적 해소책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까지 불교․유교․도교는 각각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한국 정신문화의 발전에 각기 공헌했지만 결코 한국사회를 완전히 변형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전통적 기복사상의 맥락 안에서 수용된 것이다.34)
Ⅳ. 한국무교와 윤리의식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가 무교적 요소에 의해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는 무교와 가장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종교다. 그리스도교 중에서도 천주교는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의식까지 발표할 정도로 한국인의 고유사상을 수용하고 있지만, 개신교는 무교를 공공연하게 미신으로 낙인찍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무교를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교는 우선 선악에 대한 명확한 구별도 하지 않는 비윤리적이며 반윤리적인 현세주의 사상일 뿐 아니라 무교의 이런 반윤리성은 심판사상의 결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교에서 “죽음은 삶의 미완성이다. 채 살지 못한 죽음은 곧 죽지 못한 삶이다. 그러기에 완전히 죽지 못한 넋은 저승에도 못 가고, 중음계를 방황하게 마련이다. 무당은 이 넋을 불러 넋두리를 하게 함으로써 죽음의 원한을 풀고 못 다 산 삶을 채우게 하여 죽음을 완성케 한다. 즉 완전히 죽은 영만 저승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언제나 억울하고 한스러운 것이다. 복 중의 복은 수복이다. 재복도 수복을 장식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래오래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한다.”35)
무교의 이런 현세주의 사상은 이승 뿐 아니라 저승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무교의 사후세계는 현세와 다른 어떤 이상세계가 아니라 현세를 그대로 투사한 세계다. 즉 내세는 현세의 연장이다. 그래서 저승사자는 망자(亡者)를 잡아가면서 “저승도 이승 같소, 만조상을 보러 가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예를 들어서 바리공주 설화에 나오는 사자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적 욕망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그는 바리공주에게 자신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처럼 저승은 이승과 동일한 평면상에 위치하며, 저승은 이승의 복사판으로 묘사되고 있다.”36)
무교의 이런 현세주의는 당연히 선악을 가르는 심판사상의 결여로 나타난다. 물론 무교에도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생전의 행실에 대해 문초를 받는 장면이 있으며, 바리공주 설화에는 그가 저승으로 가는 길에 칼산지옥․불산지옥․독서지옥․한빙지옥․무간팔만사천지옥을 넘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이런 관념은 바리공주가 저승에서 환생약(還生藥)을 구해 가족과 함께 황천강(黃泉江)을 건너 집으로 오는 도중에 만나는 세 종류의 배에 대한 묘사에서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던 망자들이 탄 극락세계로 가는 배며, 둘째는 불효와 불화를 일삼던 망자들이 탄 지옥세계로 가는 배며, 셋째는 자식이 없거나 사후에 유족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못한 망자들이 탄 배다.37)
그러나 학자들은 무교의 이런 심판사상은 원래 무교적인 것이 아니라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추가된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는 철저한 인과응보 사상에 지배되어 있다. 살아서 삼보(三寶)를 믿지 않고 적악(積惡)을 일삼던 나복(羅卜)의 어머니는 지옥에 떨어져야만 했다. 또한 중생들이 방아 속에서 몸뚱이가 천 토막으로 끊겨 고생하는 방아지옥을 본 목련(目蓮)이 그 이유를 옥주(獄主)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들은 생전에 다른 중생들을 잘라 죽이고, 남녀가 둘러 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그 맛이 좋다고 떠들던 자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굿에는 이런 인과응보의 사상이 없다. 흔히들 사람이 죽어서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하나, 이것은 도교나 불교에서 가져온 관념이며, 실제 오구굿에서는 이런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망령이 방황하는 것은 생전에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더 오래 살지 못한 원한 때문이다. 거기에는 선악을 심판할 시왕(十王)이 있을 필요가 없다. 다만 무당이 망령의 한을 풀어 주고, 상문(喪門)을 씻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황천을 건너 저승으로 가면 그 뿐이다.
무교의 저승에는 선인만이 가야 할 천당이나 악인만이 가야 할 지옥이 따로 없다. 다만 원한 없이 저승에 가서 편안히 산다는 것이 그 전부다. 따라서 거기에는 불교적인 윤회사상이나 명복기원 사상이 없다. 무교에는 다만 명조(冥助)를 비는 사상만이 존재한다.38)
시베리아 무교의 경우도 이와 같다. 즉, 다른 종교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예니세이 족속이나 그 북쪽에 사는 족속은 저승을 극락과 지옥으로 나누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응보 사상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남쪽의 터키인, 타타르인, 몽골인의 샤마니즘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훨씬 복잡한 천당과 지옥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39)
그래서 우리나라 무교연구의 선구자였던 김태곤도 무교가 인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그것은 ‘공리적 신앙관’이라고 진단한다:
무교는 주술적 자연종교로 인위적인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는 조직화된 종교적 교리나 현대적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윤리성이 있을 수 없다. 높은 정신적 이상이나 세계적 구원의 이상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감성적 정념(情念)에서 눈 앞의 현실 그대로 생활상의 당면한 문제를 초월적인 신력(神力)에 의존하여 해결해 나가려는 것이 무교의 신앙적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신앙 목표가 소원성취로서의 행운, 초복, 제재, 치병 등의 현실적 생활상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 소원 방법이 정신성보다는 신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그 제물의 양(量)과 질(質)에 비례하는 신의 응현(應現)을 바라는 공리적 신앙관을 따른다.40)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중에도 조흥윤은 무교가 원래 윤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첫째, 입무식인 내림굿에서 신부모(神父母)는 애기 무당에게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돕고, 부자에게 축원해주고 받은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둘째, 굿판 자체가 모든 사람의 화합을 이루는 장소가 된다. “우선 굿판에는 당연히 단골집안의 식구들이 모일 것인데, 본가를 비롯하여 외가․처가가 참석하고, 출가한 딸네도 빠지지 않는다. 또한 이웃들이 즐겨 자리를 같이하여 일손을 돕는가 하면, 같은 신도인 단골네들도 역시 참여한다. 단골집안과 관련된 모든 사회조직이 고루 참여하는 셈이다.”41)
셋째, “단골이 비는 복은 흔히 생각하듯 개인을 위한 이기적인 복이 아니다. 단골집안의 어머니, 아니 한국의 어머니들은 한 번도 스스로를 위하여 복을 비는 법이 없다. 오히려 집안 식구들, 특히 자식들이 잘 되도록 부단히 간구한다. 자식들이 잘된다는 것도 터무니없이 횡재하여 부자가되고 출세하여 남들보다 잘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식들이 추구하는 바가 떳떳하고 조화롭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나아가서 단골은 집안과 사회와 국가의 평안 및 번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42) 우리는 이것을 단골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무조(巫祖)로 불리는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의 병을 고치는 약을 구하려고 저승까지 간다. 이것은 효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다섯째, 삼국을 통일한 주체 중의 하나인 화랑도의 윤리는 한 마디로 풍류(風流)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풍류란 곧 당시 토속종교인 무교였다.
여섯째, 무교의 이런 영향은 그후에도 증산교의 강일순(姜一淳), 단군교의 나철(羅喆), 각세도의 이선평(李仙坪), 원불교의 박중빈(朴重彬), 뒷날 갱정유도(更定儒道)로 알려진 일심교의 강대성(姜大成) 등의 신흥종교로 계승되었다.43)
조흥윤의 주장 중에는 일리가 있는 것도 있고, 문제가 많은 것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무교가 기복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기복사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며, 또한 그것은 무교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는 바로 기복사상에서 출발하며, 또한 그것이 아무리 고등종교로 발전해도 기복사상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다. 다만 신앙의 다른 측면들은 도외시하면서 오직 기복사상만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인은 무교가 아직도 성숙한 종교라기보다는 유치한 종교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모든 종교가 윤리를 초월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윤리성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면, 무교의 무조건적인 “일단 살고 보자”는 사상은 윤리의식의 결여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교가 진정 다른 종교들과 어깨를 겨루면서 존재하려면 어떤 형태로든지 선악에 대한 나름대로의 심판사상을 추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하나의 세계가 된 오늘날의 종교들은 서로 만나면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데, 지금까지 한국 무교는 불교․유교․도교․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는 한국 무교도 이런 외래종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김인회는 무교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순기능으로는 인간 이익의 절대화와 신적 권위를 상대화시키는 기능․놀이를 통한 화해의 기능․삶의 가치와 자기정체성 확인의 기능․공동체의 조직 및 질서를 재정비하는 기능․삶의 윤리와 의무와 희망을 의식화시키는 기능․문화전승의 교육적 기능이 있다; 그러나, 역기능으로는 책임감 결여와 의타주의․자기반성의 결여․국가의식과 역사의식의 결여․추상적 및 형이상학적 가치의식의 결여․목적제일주의․도덕적인 자기 합리화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여기서 지적한 역기능은 한 마디로 윤리의식의 결여와 심판사상의 결여라고 말할 수 있다.44)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 중에서 기복신앙, 윤리의식, 성스러움에 대한 경배심 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는 없다. 다만 어느 종교가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 하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틸리히가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각각 사회윤리적인 종교와 신비적인 종교로 성격지우면서도, 이런 규정은 단지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는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에도 아시아의 프란시스나 말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 신비주의 전통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45) 그러므로 무교에 윤리의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교에는 윤리의식만 있는 것도 아니다.
둘째, 더 나아가서 각기 다른 종교가 강조하는 특성들도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상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것은 마치 대통령제의 장점은 내각책임제의 단점이 되고, 대통령제의 단점은 내각책임제의 장점이 되는 경우와 같다. 윤리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는 당위와 참여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 쪽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현실의 실존에서 부딪히는 병고침․액땜․수복장수의 염원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쉽다. 반면에 무교는 실존의 처절한 문제들에 대한 위로책을 즉석에서 제공하면서도 국가의식이나 역사의식을 결여하기 쉽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는 윤리의식을 가진 반면, 무교는 기복신앙을 위주로 하며, 불교는 신비사상으로 가득차 있다는 등의 단선적 규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종교는 비트겐슈타인적 가족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강조하는 특성들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는 모든 종교가 다른 종교로부터 자체의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제 세계는 문자 그대로 지구촌이 된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무교를 한민족의 원류사상 혹은 모든 인류의 기본적 종교라고 무조건 찬양해온 측면과 비윤리적인 원시종교, 혹은 이단의 괴수로 규정하면서 무조건 배척해온 측면을 동시에 견지해 왔다. 특히 개신교는 무교의 가장 두드러진 속성인 현세주의를 곧 ‘내세사상의 결여’라고 비판하는데, 김열규는 죽음에 대한 한국무교의 독특한 견해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 때 후딱 삶을 등지고 떠난 뒤에 삶은 영영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의 세계에서는 죽음의 세계대로 따로 마련될 구원이나 해탈이 있다는 생각은 결코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삶의 완성 없이는 죽은 자의 잠이 깊을 수 없고, 그 꿈이 편안할 수도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얻은 교훈이다. 잠이 편하자면, 그래서 꿈이 안온하자면, 무엇보다 매일매일 누리는 낮 동안의 삶이 편안해야 했던 것을 사람들은 알아차린 것이다. 죽음이 기나긴 잠일진대, 그리고 잠들면 꿈이야 꾸기 마련일진대, 그 죽음의 잠과 꿈도 삶의 편안과 안식을 떠나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을 눈치챈 것이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생활의 자리가 어수선하기 때문인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
그래서 급기야 죽음의 자유, 죽음의 평화를 삶의 완결에서 구한 것이다. 살아서 못 다 깎은 소망의 구슬을 죽어서도 깎는 공장(工匠)이듯이, 가다듬어진 그 구슬에 환히 비쳐 보는 영롱한 죽음의 모습, 그런 꿈을 한국 사람들은 꾸고 있었던 것이다.46)
그러나 무교에서는 오히려 다른 종교를 ‘현세사상의 결여’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도대체 종교가 인간이 이 험난한 세상을 살면서 맞부딪혀야 하는 수많은 현실적 고통에 대한 어떤 위로책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인간의 현재 삶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누가 그런 종교를 믿고 따르겠는가?
특히 과거의 그리스도교가 가진 ‘현세사상의 결여’ 때문에, 그리스도교인은 무조건 죽은 다음에 영혼이 천당에 가는 것만 위해 살다가 현실도피적으로 되었고, 과거의 불교는 아예 현실을 떠나 산중불교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종교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종교는 어느 정도의 현세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현세사상이 모두 나쁜 것만도 아니며 내세사상만이 모두 좋은 것도 아니다.
무교는 오늘날에도 서민․민간․백성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지나치게 이론화되고 조직화되고 엘리트화된 제도권 종교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김태곤은 무교가 일반 백성의 종교를 주도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인의 종교적 욕구가 무교의 핵(核)을 생성․계승하고 있다고 말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이후의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무교는 계속 억압을 받아온 탓에 그 종교전통은 한 번도 그 사상을 활짝 꽃피우지 못했다. 또한, 무교는 일제치하에서도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무교는 오늘날까지 민중의 살아 있는 현대 종교로서 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결국 무교가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생멸하지 않고, 민간층이 존재하는 한 민간인의 생활 속에서 생활적 현상으로 존재하며, 민간인들의 생활 자체도 무교적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이것은 민간층의 종교의식이 무교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상에서 오는 민간인의 자발적인 종교 욕구가 끊임없이 무교의 핵을 생성․계승하고 있음을 뜻한다.47)
김용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교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교적 신념체계는 모든 종교의 ‘원시태’가 아니라 ‘근본태’라고 주장한다:
무교는 물활론적(애니미즘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무교적 물활론은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라는 이원성을 부정한다.
따라서 무교는 조상숭배와 떠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종교는 조상숭배로부터 시작한다”는 스펜서의 명제와 “모든 종교는 그 원초적 형태에 있어서 무교적 충동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나의 명제는 결국 동일한 내용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교는 결국 죽음의 제식이며 엑스타시(황홀, 환희)의 예술이다. 우리는 무당의 엑스타시를 통하여 죽음의 세계로 왕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조상)의 넋과 영매작용을 통하여 대화를 하게 되고, 죽음은 삶의 연장으로서, 즉 타계(他界)로의 통과[과정으]로 이해된다. (중략)
무교는 인류의 모든 종교사를 관통하는 원초적 힘이며 영원히 꺼질 수 없는 활화산(活火山)이다. 이것은 곧 무교가 ― 마르크스의 단계적 발전사관처럼 ― 종교의 단계적 진화의 과정 중 원시적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매한 진보사관의 오류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무교는 종교의 원시태가 아니라 종교의 근본태다. 모든 고등종교의 과제는 이러한 무교적 특성, 그 에너지를 어떤 작위(作爲, 문명)의 양식에 따라 전위시키느냐는 데 있다. 그 활화산을 어떻게 활용하여 온갖 종교문화의 여러 양태를 창출하느냐는 데 있다.48)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는 무교의 애니미즘을 변용시키고 승화시키는 작업도 동시에 병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나는 너보다 더욱 훌륭하다”는 태도를 취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중용의 입장이다. 박일영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무교 신앙을 보는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무교를 성급히 미신으로, 우상숭배로, 사회 근대화와 발전의 장애물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다.
반대로, 엄밀한 연구를 수행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막연하게 호감을 나타내어, 무교야말로 한국 종교의 모태(母胎)라든지, 종교 심성의 기반이라는 등 무조건 찬양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민간 종교성의 기능과 공헌을 제대로 평가하는 한편, 민간 서민에 국한되는 계층성이나 피지배층의 종교성을 대변한다는 한계 내지 역기능을 균형있게 보는 태도가 요구된다.
민중종교의 강한 역동성, 그 내적인 폭발력은 고등 종교의 예언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의식과 조우할 때 불신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것이다. 덧붙여서, 무교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주로 들여다 보려는 한국인 고유의 종교성에 대한 분석과 그에 따른 그리스도교의 토착화와 한국화를 위한 시도 역시 다양한 종교간의 비교 연구로 보완되어야 한다.49)
틸리히는 종교간의 대화가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의 단계와 상대방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일부를 배척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배척과 수용의 변증적 연합’(a dialectical union of rejection and acceptance)의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50) 한국무교도 다른 종교와 이렇게 만나야 할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각주와 참고문헌이 없다는 사실이네요. 다음에는 함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