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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종교
무엇이 참 종교이며,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 엄숙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에 있다.
무엇이 참 종교인가?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단에 바치셨던 사실을 깊이 명상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날마다 키워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마다, 실생활에서 그분의 품성과 생애의 모습을 반사하게 될 것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자신의 소유와 시간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적인 감상주의나,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한 능력 즉, 은혜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채움으로써 생기는 결과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1. 하나님의 사랑을 명상하도록 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양심이 순결하게 되어서, 구세주의 아름다운 성품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날 수 있도록.... 바로 이런 사람들만이 세상이 주는 유혹과 시험을 승리하는 자로서 살아남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에서 완전히 대조되는 두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 두 사람 즉, 요한과 유다가 가졌던 종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무엇이 두 사람에게 그토록 엄청난 운명의 차이를 만들었는가? 먼저, 사도 요한의 생애를 살펴보자. 요한은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한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요한의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성품과 생애를 보았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게 되었으며,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면 할수록 그의 품성은 그분을 닮아서 변화되었다.
요한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은 불완전하고 흠이 많은 것이었다. 그는 조금만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쉽게 화를 내고 흥분하는 사람이었다. 요한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마리아인 촌에 들렸을 때, 사마리아인들로부터 거절당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요한의 천성적인 성품을 읽을 수 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흥분해서 말하는 요한의 모습을 보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요한을 바라보시면서“너희는 아직 너희가 어떤 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도다”라고 꾸짖으셨다(누가복음 9:54-56, 영어성경참조).
복수심은 온유하고 자신을 낮추는 그리스도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정신이다.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우리의 의지 아래로 이끌어 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성령의 계속적인 감화, 감동 상태 하에서만,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상대방의 모욕과 경멸적인 취급을 사랑스런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분의 영을 우리 마음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를 모욕하고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을 보복하고자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타고난 자연스러운 천성이지만, 그리스도의 온유함과는 정반대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슬픔과 억울함이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 거룩하지 못한 분노를 품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정신이 부어지는 영혼마다 분노와 보복의 정신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은 천성적으로 온유하고 착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빚어진 오해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거칠고 강한 기질의 소유자이었으며, 자기 중심적이었고, 명예에 대한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내와 겸손의 교훈을 가르치셨다. 그분께서는 요한의 성급하고 거칠은 성격과 대조되는 당신의 성품과 생애를 그 앞에서 펼쳐 보이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신 앞에 펼쳐질 때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결점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날마다 나타나는 힘과 인내, 능력과 부드러움, 위대함과 온유함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그분께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채워갔다. 그는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의 특징들을 따라서 행하는 자가 되었다. 요한이 가지고 있던 복수하기를 좋아하고, 야망을 품기 좋아하던 기질들은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력에 굴복되었다.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사랑의 모본을 바라보면서, 그분처럼 온유하고 겸비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써 얻게되는 확실한 결과이다. 우리가 그분의 성품과 생애를 명상하면,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사랑에 이끌리게 되며, 그분과 같은 사랑의 품성을 갖게 되기를 소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변화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거하시면, 우리의 모든 천성은 변화된다. 그분의 임재에 의하여, 영혼의 전을 더럽히는 모든 것들이 마음 속에서 제거된다. 추악하고, 저열한 정욕, 불순한 생각들, 자존심, 잘못된 애정, 복수심, 질투, 시기와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사라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시면, 한 때 사랑했던 것을 미워하게 되며, 미워했던 것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과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각과 소원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린다.
우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진리가 가정과 교회과 사회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진리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가 진리와 확실하게 연결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성품과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로마서 8:9
이제 유다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생 밑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동일한 가르침을 받았다. 요한에게 주어졌던 동일한 특권과 사랑이 그에게도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훈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지만, 그 말씀에 따라서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과 탐심을 전적으로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기를 거절한다.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은혜를 계속해서 거절하기 때문에, 탐욕과 이기적인 정신이 영혼 속에서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자라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유다는 자신들보다 훨씬 악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유다는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원했던 사람이었다. 수많은 유대 관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외면하였을지라도, 유다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곁을 3년 반이나 지켰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요한이나 다른 제자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도하면서도,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그분께 바치지 않았다. 유다는 그분의 설교듣기를 좋아하고, 그분의 기적을 경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자신의 이기심과 세속적인 마음을 결정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다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 말씀을 읽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마다, 참 종교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자신의 영혼 안에 간직한 자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우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모든 사람들이 읽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편지서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야말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 종교는 요한을 변화시켰던 종교를 말한다. 참 종교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시키는 종교를 말한다.
그대들은 참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어떻게 자녀를 교육시켜야 합니까?
모든 부모는 두 원수와 상대해야만 하는데, 하나는 부모 자신의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의 자아이다.
두 종류의 부모들
“내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합니까?”라는 절규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수많은 교육학자들에 의해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논문과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수많은 이론과 방법이 있지만, 자녀 교육에 대한 가장 중요한 책임이 부모에게 있으며, 부모에 의해서 자녀들의 성품과 생애가 꼴지워진다는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자녀를 올바로 교육시키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부모가 먼저 올바른 정신과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2종류의 부모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첫번째 종류의 부모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게 자녀를 교육시키지만, 사랑과 동정적인 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부모이며, 두번째 종류의 부모는 지나치게 친절하고 감정적이어서 자녀 교육에 있어서 원칙과 단호함이 부족한 모습을 드러낸다. 대개 후자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잘못된 행동을 변명해 주고, 비위를 맞추어 주며, 어린 자녀들을 순종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장시간을 실강이 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자녀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해서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어머니는 자녀들을 전혀 지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투쟁과 전쟁을 가능하면 피하게 되고, 결국에는 자녀들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자녀들이 이기적이고 비신사적이며 불친절한 말을 하면서 떠들지라도, 어머니는 아무런 재제도 가하지 않은채 내버려 두게 된다. 이런 아이들은 결국 연약하고 거칠며 질서없는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악한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반면에 사랑스럽고 동정적이며 친절한 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원칙과 규칙만을 강요하는 어머니 역시 동일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어머니 모두 균형을 잃은 자녀 교육법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를 교육하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없는 한, 부모는 자녀에게 균형있는 교육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엄격하고 명령하기를 좋아하는 부모는 대개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가정의 분위기를 좌우시키며, 냉정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로 자녀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 자녀들을 차디찬 매로서 제압하려는 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매우 반항적이고, 분노를 폭발하는 형태의 성격을 소유하게 된다. 자녀들은 대개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힘들게 되며,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부모들이시여,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전에 먼저 그대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라. 안정된 말씨와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 그리고 원칙에 철저한 부모의 모습은 자녀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부모의 말을 존중하고 따르도록 만들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녀들은 듣는 일에 지쳐있다. 자녀에게 요구하는 그것을 부모가 먼저 그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들은 부모의 정직과 위선없는 신앙을 보면서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가정으로 돌아와야 할 어머니
몇년 전에 나와 내 남편은 우리 아이들의 교육과 가정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한적한 시골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부부가 자녀들을 위해서 도시의 좋은 직장과 안정된 수입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결국 우리의 사랑과 희생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가정을 위한 하루의 일과표를 만들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예배드리고 그들과 함께 조그만 밭에서 일하고, 뛰며, 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쁜 도시 생활에서 나와 남편이 늦게까지 일하다가 귀가하여 자녀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타이르고 실강이를 하던 때와는 달리, 자녀들이 우리 부부의 말을 가치있고 교훈이 담긴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부모들이시여, 자녀 교육을 위해서 부모 자신이 무엇을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을 믿는가? 자녀들에게 부모인 우리 자신의 시간을 내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교육시키기 전에, 먼저 그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킬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단이 가장 성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시스템은 어머니를 직장으로 내보낸 것이다. 좋은 집과 좋은 차와 여유있는 경제 생활과 이웃과의 경쟁을 포기하는 한이 있을지라도, 어머니는 가정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두개의 자아와의 전쟁
좀더 실제적인 면으로 들어가보자. 자녀들이 고집을 부리고 순종하기를 거절할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많은 경우,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냄으로써 자녀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녀들의 마음 속에 부모에 대한 분노를 쌓아가게 만든다. 부모의 마음 속에서 짜증과 화가 올라올 때마다,“주여, 내가 지금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기도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과 분노를 표현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음으로써 자신을 부인해야만 한다. 부모는 날마다 두개의 자아(self)과 싸워야만 한다. 하나는 부모 자신의 자아이며, 또 하나는 자녀들의 자아이다. 내 자신의 자아를 하나님께 굴복하고, 불순종하는 자녀들의 자아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는 것이 참된 자녀 교육법이다. 자녀의 자아가 그리스도께 굴복될 때에만, 그들은 부모의 말에 즐겁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부모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온유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원칙에 입각한 대우를 부모로부터 받는 자녀들은 부모들을 더욱 존경하게 될 것이며, 부모의 그러한 아름다운 품성을 자신들도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데리고 나가는 방법이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만, 자녀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하는 일에는 반드시 교육과 훈련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한다.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일은 내 자신 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전쟁을 의미한다. 자녀들을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정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희생과 시간이 요구될지라도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 불순종하는 자녀를 그리스도 앞으로 데리고 오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부모마다 자신들이 치루는 전쟁이 혈과 육에 속한 전쟁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에 대한 투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단과의 전쟁을 그리스도의 도움없이 치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불순종하며 고집부리는 자녀들의 영혼을 속박하고 있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그리스도께 간절히 매달려야만 한다. 자녀들이 자신을 교육시키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마음과 생애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낄 때에, 자녀는 자신의 이기적인 고집을 버리고 부모의 소원대로 자신을 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자녀들 역시 자신들의 양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부모의 말을 들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음으로써,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운 정신으로 순종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교육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자녀는 부모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생각하게 된다.
자녀 교육은 끊임없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피곤하고, 지루하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결과가 없을지라도,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경건한 소원과 목적을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말해 주어야 한다. 부모가 뒤로 물러날 때마다, 사단은 자녀들을 죄와 이기심의 노예로 묶고자 할 것이다. 부모들은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자녀들의 자아를 속박하고 있는 사단의 권세와 대항하여 싸우는 부모의 노력과 희생이야말로 가장 높고 숭고한 것이다. 전쟁은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더욱 어려운 과정의 연속이 될 것이다. 부모의 마음 속에 분노와 짜증과 미움이 있는 상태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키지 말라. 부모의 표정과 말투 속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없는 한, 자녀들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자비와 공의로 교육시키고 훈련시켜야 한다. 자녀들에게 어떻게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모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
자녀들의 자아를 그리스도의 음성에 굴복시키는 방법
이것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4가지 원칙들이 선행되어야 한다.1. 먼저 부모 자신의 자아가 계속적이고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께 굴복되어야 한다.2. 모든 상황에서, 자녀들에게 올바른 생각과 결정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라.3. 자녀들의 양심 속에 들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라.4. 자녀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할 때에 그에 알맞는 적당한 보상을 주어라. 반면에 불순종과 부당한 고집을 부릴 경우, 그들이 그리스도께 굴복하고 올바른 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처벌을 주어라. 이점에 있어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확고부동한 인상을 줌으로써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원칙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자녀들이 잘못된 말과 행동을 하거나 부모의 말에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을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단계로서 자녀들에게 접근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라.
첫번째, 자녀에게 어떤 말을 하거나 처벌을 가하기 전에 먼저 조용한 방으로 가서 하나님께 그대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그대가 어떻게 해야될지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라.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자녀들 앞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신을 어떻게 하면 쫓아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자녀와 싸우는 대신에, 자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사단의 영과 대적하라. 사단에 의해서 속박당하고 있는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과 연민의 마음을 소유해야만 자녀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두번째, 자녀에게 부모의 뜻과 명령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자녀로 하여금 순종할 것인지 불순종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하라. 이 때, 자녀가 계속 불순종하기로 결정하면, 그 상황에서 성령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녀와 함께 기도하는 일이 필요하며, 어떤 경우에는 불순종의 댓가로서 벌을 주거나, 일을 시키거나, 매를 때리거나, 혼자서 조용히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방법이 자녀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것인지를 지혜롭게 생각해야만 한다. 참된 자녀 교육법은 어떤 이론이나 인간적인 수단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자녀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자녀가 순종하기로 선택하였을 경우에는, 적절한 보상 즉, 자녀와 함께 놀아준다든지, 다음 식사 시간에 자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겠다고 약속하든지, 또는 자녀와 함께 운동을 함으로써 순종의 결과로서 기쁨과 행복이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자녀가 순종의 조건으로 보상을 먼저 요구하도록 해서는 않된다.
세번째, 자녀의 불순종의 결과로서 매를 때리거나 벌을 주었을 경우, 자녀에 대한 그대의 사랑과 염려를 표현하면서 자녀의 양심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굴복할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말해준 후, 다시 부모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때 또 다시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마음에 담고서 자녀에게 다시 접근해야 한다. 자녀가 순종하기로 선택할 때까지 부모의 뜻을 굽히지 말라.
네번째, 일단 자녀가 순종하기로 결정하면, 즉시로 잘못된 일을 수정하라고 지시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잘못했으면, 그에게 가서 사과해야 하며, 형편상 이것이 힘들 경우에는 편지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도록 해야 한다. 설겆이를 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했을 경우에는, 설겆이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또한 자녀를 올바르게 교육시켜야 하는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부모들을 축복해주셔서, 자녀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간다는 말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변비, 요즘 어떻습니까?
아가타 트레쉬 의사
얼마나 자주 오십니까? 얼마나 오래 동안 앉아 계십니까? 여기에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앉았다가 나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흔한 문제는 무엇일까? 몇가지의 질병을 생각할 수 있지만, 변비야말로 빠뜨릴 수 없는 골치거리이다. 변비는 장의 내부를 정기적으로 비우는데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생기는 현상이다. 대변의 상태가 단단하고 건조할 경우, 변비 현상이 생기게 된다. 변비가 심하거나 장에 문제가 있을 경우, 만성적인 두통이 생기며, 복부가 불편하고, 기운이 없으며, 식욕이 저하되고, 허리에 통증이 온다.
식사를 균형있게 하였을 경우, 매일 3-7 온스(약 90-200g)의 배설물을 배출하게 된다. 섬유질을 많이 섭취하면 할수록, 배설물의 양이 많아짐과 동시에 부드럽게 된다. 고기, 설탕, 치즈와 같은 농축된 식품은 배설물의 양을 감소시키며, 대변을 단단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변비 증세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매 식사가 위에서 소화되어 장으로 내려갈 때마다, 장에 있는 배설물이 앞으로 밀려나가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상태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장에 있는 배설물이 일주일에 한번이나 두번 정도 앞으로 움직여 나간다. 배설물이 장에 머물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장 내부에 각종 질병과 암이 발생되기 쉽다. 변비는 변비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만성적인 변비의 결과로 인하여 생기는 여러가지 다른 질병들이 더욱 큰 문제이다.
대부분의 의학자들은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화장실에 가는 것은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이른 아침, 식사 전이나 후가 화장실에 가야 하는 최적의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변비의 원인에는 저섬유질 식사, 고단백질 섭취, 불충분한 수분의 공급, 운동 부족, 수면 부족, 피로, 긴장과 스트레스 등이 있다.
예방과 천연치료
1. 섬유질이 많이 포함된 식사를 하지 않는한, 변비 증세가 없어질 수 없다. 현미, 채소, 과일 등에는 풍부한 섬유질이 들어 있다. 곡물의 씨눈을 물에 타서 마시면, 대변 배설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장(bowel)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변비의 치료에 있어서, 옥수수의 눈은 통밀의 눈보다 훨씬 많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2. 대변을 잘 나오게 만드는 이완제(laxative)를 사용하여 변비를 치료할 경우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이완제를 먹을 경우, 그것이 몸밖으로 배출되기 전까지 약 20피트(약 6.5미터)나 되는 소화기관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예민한 조직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이완제의 부작용으로는, 포타슘의 손실, 내장 운동력의 저하, 그리고 콩팥의 심각한 손상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변비의 치료를 위해서 광물성 기름을 사용하는데, 광물성 기름은 모든 이완제 중에서 가장 유해하다. 광물성 기름은 칼슘과 인의 흡수율을 저하시키며, 비타민 A,D,E,K와 캐로틴이 손실된다. 광물성 기름을 장기간 동안 계속해서 사용할 경우, 장에 암이 발생될 수 있다.
3. 비만과 변비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체중이 초과된 사람들은 체중을 적어도 정상으로 낮추어야 한다.
4.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찬물을 담은 소형 관장기를 항문에 넣은 다음, 물을 주입시키고 1분 후에 물을 배출시키면, 잠시 후에 장에 있던 대변이 따라나오게 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이러한 방식의 관장을 몇번 함으로써,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화장실에 가는 습관을 형성시킬 수도 있다.
5. 장의 위치와 방향에 맞추어서 복부를 적당하게 마사지 함으로써, 장의 운동을 촉진시켜서 대변의 배출을 도울 수 있다.
6. 모든 종류의 동물성 식품에는 섬유질이 거의 없기 때문에 변비를 유발시키며, 소화를 위하여 내장에서 머무는 시간이 매우 길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7. 식사를 서둘러서 빨리 하거나 불규칙하게 하는 것은 장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8. 모든 종류의 안티히스타민은 그 자체에 건조시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대변을 건조하게 만들 수 있다. 살빼는 약, 통증 완화제, 암피타민, 그리고 코데인을 함유하고 있는 기침약 등은 장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9. 규칙적인 운동은 혈액의 순환을 촉진시키며, 심장을 강하게 할 뿐 아니라 복부 근육을 강건하게 만들기 때문에 장의 기능을 왕성하게 한다.
10. 변기에 앉았을 경우, 상체를 앞으로 숙여서 복부를 최대한으로 가깝게 접근시킨 자세가 배설물을 원활하게 배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세이다.
11. 과식은 변비를 조장한다.
12. 우유는 변비를 일으키는 식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우유를 먹던 사람들에게 우유를 제거하고 과일과 야채를 섭취하도록 한 결과, 장의 운동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음과 같은 식품들은 변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치즈, 요구르트, 계란, 생선, 닭고기, 자극성 양념, 소다수, 아이스크림, 과자, 케익, 파이 등.
13. 어떤 식품들은 천연적으로 이완제의 역활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푸룬 (자두) 쥬스가 있으며, 사과, 무화과, 감초, 시금치 생것, 딸기 등도 대변이 잘 나오게 도와주는 이완제의 역할을 한다. 자두(푸룬)에는 장의 운동을 자극하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바나나, 사과와 같은 과일에는 많은 양의 수분을 흡수하는 펙틴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펙틴은 소화관을 따라서 내려가는 동안, 박테리아와 장의 내벽에 붙어 있는 쓰레기들을 끌어 갈 뿐만 아니라, 상처난 내장의 벽을 고치고 부드럽게 하는 치료의 기능을 한다. 콩나물에도 이완제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4. 임산부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변비 현상이 나타난다. 태아가 성장함에 따라서, 장이 압력을 받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된다.
15. 복부에 압력을 가하는 꼭 끼는 의복을 삼가해야 한다.
16. 날마다 6-8 잔의 물을 마시는 것은 변비의 예방에 필수적이다. 아침 식사 전에 따뜻한 물을 마시는 것은 장의 운동을 촉진하게 만든다.
17. 홍차와 같은 차 종류는 변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변비에 유익한 식물a. 매 식사마다 4-6개의 올리브를 먹을 것b. 현미식을 할 것c. 자두, 푸룬 쥬스, 사과, 옥수수 등등
찌꺼기의 통과 시간을 줄여라!
위장에서 소화된 음식이 장을 빠져나가는데 걸리는 시간(transit time)이 긴 경우, 즉 위에서 소화된 음식 찌꺼기가 비정상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장에서 머무르게 될 경우, 장에 여러가지 질병이 생길 수 있으며, 암의 유발 가능성도 매우 높아진다. 고섬유질의 식사와 운동은 장의 통과 시간을 줄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장의 통과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 2 티스푼의 참깨를 물과 함께 씹지 않고 삼킨 다음, 참깨가 완전히 대변으로 빠져나가기 까지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가를 눈으로 확인하여 측정한다.
MSG를 넣지 마세요!
요즘, 식당에서 특히, 중국음식점에서“No MSG, please”(MSG를 넣지 마세요)라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MSG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MSG를 넣지 말고 요리해 달라고 식당 종업원에게 부탁한다.
MSG란 무엇인가? 그것은 맛을 증진시키는 감미제인데, 특히 중국에서 음식을 요리할 때에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MSG 또는 Monosodium Glutamate(모노소디움 글루타메이트)라고 불리운다. 이것을 과량으로 섭취하였을 경우, 심한 두통이 생기기도 하는데, 미국에서는 이러한 두통을 챠이니스 신드롬(중국인 증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 MSG는 동양 요리에서 고기맛을 강하게 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음식점에 갈 경우에만 MSG를 먹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일반 가정 안에도 여러가지 가공 식품들을 통하여 MSG가 침투해 들어와 있다.
이제는 거의 모든 가공 식품에서 MSG가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서만, 일년에 4천만 파운드의 MSG가 가공 식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제는 감미제의 영역를 넘어 방부제 겸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MSG가 건강에 해롭습니까?
약 30%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음식에 넣어지는 소량의 MSG에 대해서도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 몇년 전에만해도 MSG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식품학자들이나 의사들에게까지도 잘 정립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MSG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최근의 보고서에서, MSG의 섭취 결과로 두통, 얼굴의 홍조 현상, 소화 장애, 우울증, 천식 등의 증세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MSG를 섭취하였을 경우, 인체에서 저항 반응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MSG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 아니라, MSG가 일종의 약품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한 연구소에서 MSG에 대한 동물 실험을 하였는데, 쥐에게 MSG를 주사한 결과, 망막 장애, 시상하부(hypothalamus)의 손상, 뇌 손상 등의 현상이 일어남을 발견하였다. 동일한 실험을 원숭이에게 한 결과, 발육 부진, 비만, 불임증 등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동물 실험을 한 결과, 아기 이유식을 만드는 미국 회사들은 자신들 제조하는 아기 이유식에 MSG를 첨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이후부터, 많은 사람들은 MSG가 뇌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생아들에게 미치는 MSG의 위협은 여러가지 다른 식품들을 통해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MSG가 아기들의 식품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MSG와 비슷한 대체물질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의 이름은 hydrolized vegetable protain(가수분해된 식물성 단백질) 인데 protain hydrolysate 라고도 불리워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의 이름 가운데 vegetable(채소)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안심하지만, 이것 역시 MSG와 대동소이한 화학물질이다. 단백질이 가수분해 되면, 아미노산들이 유리 형태로 생성되는데, 이렇게 생성된 것들 중의 하나가 MSG이다. MSG를 동물에게 주입한 결과, 쥐의 뇌에 손상을 입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만 적어도 2천만명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1억명 이상이 MSG로 인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각종 가공 식품(통조림)이나 음식에서 맛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MSG를 피함으로써, 건강에 얼마나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도 적다.
슈퍼마켓 안에 있는 수많은 가공식품의 첨가물 리스트에서도 MSG를 발견할 수 있다. 각종 통조림, 마요네즈, 샐러드 드레싱, 감자 칩, 과자류, 사탕, 스프류 등 거의 모든 가공 식품에 MSG가 첨가되어 있다. MSG가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식품 회사들이 그것을 선호하고 있는 이유는, MSG가 여러가지 나쁜 냄새들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MSG는 통조림에서 깡통 냄새를 없애 줄 뿐 아니라 고기 맛을 강하게 함으로써 입맛을 돋구어 준다.
거의 모든 대중 음식점에서 MSG를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다. 음식점의 주방장에게 물어보라. 한달에 몇 kg의 감미제를 사용하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주문할 때, “No MSG, please”(MSG를 넣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십년에 걸쳐서 인공 감미료를 사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예상치 못하는 질병의 재앙을 사전에 방지해야 하지 않을까?
가리워져 있는 MSG의 또 다른 이름들
비록, 식품의 겉면에“All Natural(천연 식품)”이라고 쓰여 있을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가수분해된 단백질(hydrolyzed vegetable protein)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MSG나 가수분해된 식물성 단백질이라는 이름이 식품의 겉면 첨가물란에 분명하게 적혀 있어야 하지만, 많은 경우에“천연 향료”(natural flavorings)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대치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잘못 오도당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MSG가 아지노모도(화학 조미료)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시중에 나온 식품 중에 표시되어 있는 MSG의 다른 이름들을 살펴보자: 아지노모도, 엑센트, 제스트, 구어메이 파우더, 수부, 챠이니스 씨즈닝, 글루타빈 등등.
입맛에 시달리는 건강
요즘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조미료는 소화기에 매우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것들은 위장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혈액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없게 만들며, 신경을 흥분시킨다. 자극성 식품과 조미료는 입맛을 자극함으로써, 식욕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게 만들며, 과식과 폭식을 조장한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고속시대일수록 단순하게 마련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보다 빠른 판단력과 예민한 정신력을 유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극적인 음식은 두뇌를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겨자, 매운 고추, 피클 및 각종 화학 조미료 등과 같은 것들은 혈액에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 알콜 중독자의 위장과 자극성 양념을 사용하는 사람의 위장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고 천연적으로 조리된 음식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좀더 맵고, 좀더 짜고, 좀더 자극적인 맛을 추구하게 된다.
완전한 치료로 가는 길
육체와 마음이 피곤하여 병들었는가? 그대에게 놀라운 치료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세가지 처방이 여기에 있다.
1. 병자의 의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의 몸에 넣어두신 생명의 법칙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죄를 자복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이다.
성경은,“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라고 명하고 있다(야고보서 5:16). 어떤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어야 한다.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없으며, 당신의 생애 속에 있는 비밀을 모릅니다. 오직 당신과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만일 당신의 머리 속에 생각나는 죄가 있다면, 또한 그것을 후회스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개인적인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계시는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 고백해야 하며, 공개적으로 범해진 죄는 공개적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동료에게 잘못한 것은 손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가서 올바로 시정해야 하며, 악한 말을 함으로써 죄를 범하였거나, 가정과 이웃에게 불화의 씨를 뿌렸다면, 하나님과 피해를 입힌 사람들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양심의 완전한 자유는 환자에게 놀라운 치료를 가져다 준다.
모든 잘못이 시정되고 진정으로 회개한 후에, 주님의 영이 마음에 지시하는 대로 진지한 믿음을 가지고 병자 자신의 필요를 주님께 아뢰어야 한다.
2. 마음에 생긴 병을 다루는 방법
마음에 생긴 병을 다룰 때에는 큰 지혜가 필요된다. 비탄에 잠긴 병든 마음, 낙망 중에 있는 마음은 부드러운 치료가 필요된다. 때때로 죄에 대한 자책감은 체질을 서서히 쇠약하게 만들며, 마음의 균형을 깨뜨린다. 또한 가정 문제로 인하여 가슴에 진 응어리도 그 생명력과 심령을 잠식시킨다. 이러한 종류의 환자들은 부드러운 동정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병자들은 자신의 의지력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의지력이 살아나면,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놀라운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의지력이 올바로 사용되면, 부정적이고 병적인 상상력을 지배할 수 있게 되며, 정신과 육체의 질병을 저항하고 극복하는데에도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회복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환자들이 질병에 압도되지 않는다면, 회복될 수 있는데에도 불구하고, 질병에게 굴복당하여 흑암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 환자들은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옥외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마음껏 이용함으로써 쇠약한 병자들이 건강과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
환자들 중에는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채워지지 않은 욕심, 병든 정욕, 그리고 스스로의 양심의 가책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장차 얻을 생명에 대한 희망도 없다. 그들의 마음은 계속되는 불만과 낙담으로 인하여 깊고 어두운 절벽으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그리스도는 생명의 샘이시다. 하늘의 치유력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어떻게 온 몸을 그분께 맡길 것인지 끈기 있고 진지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고통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어려움과 시련과 슬픔이 하늘 본향으로 가는 길 위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어려움을 미리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의 짐을 배가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역경이나 실망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 때마다, 모든 것이 파멸될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가장 어려운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두운 그늘을 던진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일에는 단호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생과 내세의 행복은 그들이 즐겁고 가치있는 일에 자신의 마음을 고정시키는 일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상상에 불과한 어두운 장면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 생애에 섭리하셨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분께서 자신들의 앞길에 뿌려 놓으셨을 은혜스런 장면들을 생각해 보라.
온갖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고 찾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이다. 어떤 때에는 시련을 제거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지만, 어떤 때에는 불과 같은 시련을 제거해 주는 대신에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심으로써 도와 주신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어려운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과 불안하게 보이는 미래를 보면서 스스로 마음을 괴롭혀서는 않된다. 자신의 생애를 그분께 완전히 바친 사람들은 결코 혼자서 시련과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잡고 전진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다. 하나님께서 치료의 길을 마련해 두지 않은 슬픔과 비애와 괴로움은 없다. 사단은 때때로 우리 곁에 가까이 와서“너는 끝장났어.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어”라고 속삭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항상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생애하셨던 그분께서는 인간의 고통과 시험을 어떻게 동정해야 될지 아신다. 가장 크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동정과 긍휼을 가장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난처한 문제를 가지고 그분 앞으로 나와서 당신의 발 아래에 놓기를 기다리신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마라. 사단은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용기를 꺽으려고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다. 유혹이 우리를 엄습하고 근심과 걱정과 어두움이 우리의 마음을 에워싸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하나님의 빛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은혜스럽게 변화시켜서 은혜스러운 생각과 감정을 소유하게 만들어 준다.
감사와 찬양의 정신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크게 증진시키는 것은 없다. 우울하고 불만스러운 생각을 물리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불만과 불평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서 걸어갈 수 있는가? 불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름답고 신선한 꽃을 바라보는 대신에 시들어서 죽은 나뭇잎을 쳐다보면서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 웅장한 산봉우리와 녹음이 덮혀 있는 계곡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 천연계의 소리와 향기를 듣고 맡으면서 마음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이 가리운 바되었고, 대신에 침울한 것과 어두운 것만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다.
감정과 생각이 일단 말로 표현되어 나오면, 그것은 마음 속에서 더욱 더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 마음의 법칙이다. 우리가 믿음과 축복을 더욱 더 많이 표현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더욱 더 감사해 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감사의 정신은 더욱 더 높이 올라가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기분이 어떻냐고 묻거든, 동정을 얻기 위하여 무엇인가 슬픈 것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의 믿음의 부족과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사단은 그러한 말을 듣기 좋아한다. 우리가 우울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 주변에 있는 문제와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 함으로써 우리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크게 격려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큰 소리로 찬미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사단이 보낸 어둠의 군대들이 물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이다.
3. 가장 적극적인 치료책
환자들의 회복에 가장 방해가되는 것은 환자들이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병자는 자신에게 쏟는 주의를 돌려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가족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고통을 돌봐주면서 깊은 동정을 기울일 때, 가장 적극적인 치료가 이루어질 것이다.
고통 중에서 슬퍼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염려하고 동정함으로써,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잊어버리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살피기 위해서 노력하는 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어두움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할 때, 놀라운 축복이 자신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58장은 육체와 심령의 질병을 고쳐주는 처방이다. 만일 우리가 건강과 생애의 진정한 기쁨을 갈구한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 기록된 원칙들을 실천해야 한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귀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이사야 58:7-10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병든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는 가장 좋은 약 중의 하나이다. 주어진 의무를 잘 감당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선물하였다는 만족감으로 인하여 마음이 가볍고 환하여질 때, 새로운 생명력이 육체 속에서 생성된다. 환자들은 끊임없이 동정을 요구하는 대신에, 동정을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대 자신의 연약함과 슬픔과 고통의 짐을 자비로운 구세주께 맡기라. 구주의 사랑을 향하여 그대의 마음을 열므로서, 그대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구주의 사랑이 흘러나가도록 하라.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고, 채워진 말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는 말을 꺼내어 사용하라.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환자는 자아를 잊어버리게 되며,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네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약속이 성취되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글은 The pathway to the health &happyness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기적의 현미로 바꾸세요!
어떤 종류의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먼저, 백미를 현미로 바꾸어 보십시오!
현미의 영양적 가치는 정말로 놀라운 것이다. 동서양이 거의 같은 시대에 현미와 통밀가루의 사용으로부터 백미와 흰밀가루로 바뀌는 비극적인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조 중옆 경에 귀족층들이 보기에 좋고 입안에서 매끄러운 맛을 추구함으로써 흰쌀을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흰쌀과 흰밀가루는 상류층의 음식으로 사용되었고, 통밀과 현미는 가난한 평민들이 주식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흰쌀과 흰밀가루가 거의 모든 현대인들의 식생활에서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백미가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은채 우리의 주식으로 예찬되어 왔다. 그러나 요즈음 뒤늦게나마 건강과 치료를 깊이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현미의 가치에 대한 인정이 새로와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라지는 보물들
통밀을 흰밀가루로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이 현미를 흰쌀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현미를 백미로 만드는 과정에서 약 10%의 양이 깍여져서 없어진다. 열 가마의 쌀이 순식간에 아홉 가마로 줄어드는 양적인 손실과 함께 심각한 영양적 손실이 도정 과정에서 발생된다. 양의 손실은 10%이지만, 생명력을 포함하고 있는 영양의 손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현미에는 생명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벼의 겉껍질인 왕겨가 벗겨져 나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현미를 흙에 묻고 물을 주면 싹이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죽은듯이 보이는 누런 갈색의 낟알에 수분을 가하면 싹이 나오는 기적을 볼 수 있다. 벼 속에 담겨 있는 생명력을 깍아버린 흰쌀을 매일의 주식으로 삼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이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소화 흡수율을 살펴보자.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 현미는 거의 완전한 소화흡수율을 나타내지만, 백미는 10% 정도 밖에 소화 흡수되지 못한다. 현미 속에는 조효소 작용을 하는 비타민 B군이 듬뿍 포함되어 있어서 거의 완전하게 흡수되어 충분한 에너지를 발생하지만, 백미는 비타민 B군의 심각한 결핍으로 인하여 소화과정에서 젖산과 초성포도산이 발생됨에 따라서 혈액을 산성화시키고 산성체질을 형성하여 각종 백미병의 원인이 된다. 이와반면에 현미는 체질을 알칼리화시킴으로써 각종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증가되고 질병에 대한 치료에도 도움을 준다.
현미를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
많은 사람들이 현미의 진가를 인정하지만, 세치 혀의 만족을 위하여 흰쌀을 먹고 있다. 현미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오래 오래 씹으라”라는 조언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미에는 천연 염분의 작용을 하는 각종 무기염류와 비타민이 풍부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더해지며, 아울러 입 안에서 나오는 소화액과 잘 혼합되어서 완전한 소화 흡수를 가능하게 해준다. 반면에 백미는 쌀이 가지고 있던 효소가 거의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에 소화 흡수 뿐만 아니라 맛에 있어서도 씹을수록 더해지는 맛이 없다.
현미식을 처음으로 시작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서, 현미밥을 좀 더 맛있게 짓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먼저, 현미쌀을 깨끗하게 잘 씻은 다음, 압력 솥에서 물을 잘 맞춘다. 이때 현미 찹쌀을 조금 넣어도 좋다.2. 물을 잘 맞춘 상태 그대로를 믹서에 쏟아 부은 다음, 20초 정도 믹서를 작동시킨다.3. 적당하게 갈아진 현미 쌀을 그대로 현미솥에 부어서 밥을 만들면, 영양의 손실도 없고 입안에서의 느낌도 부드러운 맛을 즐길 수 있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내일 아침 식사부터 이러한 방법으로 현미밥을 만들면 어떨까?
Life Line
당뇨병과 흡연
당뇨병자들이 흡연을 할 경우, 관상 동맥 질병, 신장병, 신경병, 관절의 운동범위 축소, 입안에서 피가 흐르는 것과 같은 질병 등에 대한 발병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American Diabetes Association
머리 염색약을 사용하십니까?
머리 카락을 염료로 물들이는 것은 혈액 세포의 암 유발과 관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기적으로 머리를 물들이는 여자들은, 전혀 물들이지 않는 여자들보다 암의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호지킨 임파종과 같은 질병이 증가하고 있는데, 머리 염색약 사용의 증가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머리 색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대를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Fast Facts
맑은 정신을 소유하는 법
1.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 잠자리에 누운채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지 말고, 미리 문제를 마음속으로 정리한 다음에 잠자리에 들라. 밤 12시 이전에 깊은 잠을 얼마나 많이 취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그대의 건강이 크게 좌우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부담과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화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라.2. 정기적으로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량이 부족하면, 정신이 흐려지며, 신경질적이 되며, 우울증이 생기기 쉽다.3. 식단을 잘 짜야 한다. 불면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식품을 경계하라. 우유와 우유로 만든 유제품, 그리고 농축된 고단백질 식품, 정제된 설탕, 카페인(커피, 각종 인공 음료수)4. 비타민을 과용하지 말 것. Media Management Newsletter
충분히 먹으면서 살빼는 방법?
복합 탄수화물을 충분히 섭취해도 살이 빠질까? 현미밥과 통밀빵을 충분히 먹어도 살이 빠질까? 귀가 솔짓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1. 탄수화물 1그램에는 오직 9칼로리의 열량이 함유되어 있다.2. 지방은 탄수화물보다 체내에 축적되기가 훨씬 쉽다.3. 일반적으로 고탄수화물 식품은 지방질이 많은 식품보다 위장의 포만감을 빨리 준다.
저지방과 높은 복합탄수화물로 구성된 식단은 그대의 몸무게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물론, 운동을 통하여 태워 없앨 수 있는 만큼의 칼로리를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Last Generation
왜 채식을 하지 않으세요?
미국의 저명한 질병의 예방 및 억제 센타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73년부터 1987년 사이에 발생된 음식과 관련된 질병 164,695건 중에서 9%는 우유제품에서, 10%는 닭고기에서, 11%는 생선과 돼지고기와 계란에서 기인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나머지 기타는 그 원인이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Vegetarian Times
숙녀들에게 보내는 경고!
최근들어 여자들의 흡연 인구가 남자에 비해서 크게 증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신비 속에 싸여 있지만, 부부가 모두 흡연가일 경우, 부인의 폐암 발생률이 남편에 비해서 2배나 높다는 사실이 통계로서 증명되고 있다. 불행히도, 미국에서는 여자들의 흡연 숫자가 남자들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다. Times, 1994년 10월
야채를 가장 효과적으로 조리하여 먹는 방법?
채소를 삶거나 데칠 경우,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채소를 집어 넣은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야채를 조리하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비타민의 손실량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또한 감자를 구워서 먹을 경우, 구운 즉시에 먹으면 약 20% 정도의 비타민 C가 손실된 감자를 먹게 되지만, 구운지 1시간이 지난 후에 먹으면, 약 60%의 비타민 C가 손실된 상태의 감자를 먹게 된다. 채소 음식을 조리한 후 즉시 먹지 않을 경우, 비타민 C가 손실되므로 주부들은 지혜롭게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Berkeley Wellness Letter
1부 - 기독교에 왜 이렇게 교파가 많은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사람이 어떤 교회로 나갈 것인지를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충과 혼돈을 겪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안에 너무나도 많은 교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중 많은 교파들이 저마다 자기들의 가르침이 가장 성서에 맞는 것이라 고 주장하고 있다. 왜 이렇게 교파가 많아 졌을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과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참된 진리만을 가르치고 있는 교파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일까?
장로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파 교회, 순 복음교회, 유니테리안, 몰몬교회,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여호와의 증인교회, 루터교회, 성공회, 천주교회,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교회, 사도교회, 기독과학교회, 동방 정교회, 세계 복음교회, 구세군교회 등등.. 이 세상에 기독교 교파들이 약 200여개나 된다. 또 거기에다가 그 교파들 가운데서도 다시 여러 그룹들로 갈라져 있는데, 예를 들자면 침례교회나 장로교회 안에서도 여러가지 다른 그룹 계열들로 갈라져 있다. 미국에 있는 침례교회 안의 다른 계열들만 약 20여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 온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교파들이 생겨나서 우리를 혼란하게 만드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참된 교회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 기독교회가 초대 시대와 중세기를 통과 하면서 많은 순교자들을 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 가면서까지 성경의 진리와 교회를 옹호하였다.
서기 306년도에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젊고 부자인 빌레아가 로마 총독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하에 단두대에 올랐다. 부인과 자녀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그는 자기의 믿는 믿음을 위하여 생명까지 바쳤다. “너의 미친 마음의 상태에서 돌이키라”는 말을 듣자 그는 대답하였다. “나는 한번도 미쳐 본적이 없고 지금도 정신이 깨끗합니다.” 로마 총독은 소리를 높여 명령하였다. “죄수를 우리의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라!” 빌레아는 말했다. “나는 희생을 오로지 한 분이신 성경의 하나님께만 드립니다!” “너는 그 하나님에게 어떠한 희생을 드린단 말이냐?” “예, 저는 우리 하나님께 청결한 마음과, 진실된 믿음과, 참된 진리를 희생으로 드립니다.” 그렇다. 수 많은 순교자들이 진리를 고수하고 그 순수함을 보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진리와 하나님의 교회는 생명을 바쳐가면까지 지키고 고수해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원래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순수함으로 되돌리기 위하여서 싸워왔다. 우리는 중세기 시대 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종교인들이 다른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수천만명이나 핍박하고 죽여온 사실을 역사에서 보게 된다. 개혁자와 순교자들의 저항은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려는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과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개혁을 시도해야 하는가?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로 인도하는 원칙들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복음서와, 사도 바울과 다른 제자들이 기록한 편지서들을 통하여서 보면 그 원칙들은 꽤 간단하다. 1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용납하신 것처럼 서로 용납하라. 2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라. 3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따라 생애하라는 것이다. 로마의 쥴리안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그네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렇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단순하였고, 그들이 믿고 따르던 진리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들은 또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성경 말씀에 기초하지 아니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추측에 불과한 것이요, 그러한 믿음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한 믿음을 고수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열두 사도들에게서 물려 받은 가르침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진리는 바로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만일 그리스도 교회의 기별이 그렇게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라면 왜 이렇게 많은 교파들이 생겼느냐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다 같은 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왜 이렇게 서로가 멀리 분리된채 다른 교파들을 형성하여 높은 벽들을 쌓아 놓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한가지 간단한 대답이 있다. 우리가 많은 주제들에 있어서 서로 상반된 의견들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어떤 교회들은 신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는 점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간단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서로 불필요하게 어떤 주제들을 마치 머리카락을 자르듯이 논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예를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많은 교회들이 인간들의 유전인 교회의 전통들 때문에 갈라졌다. 러시아의 알렉시스 황제 시대에 많은 선교사들이 러시아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러시아의 교회는 교파의 분리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하는 예배 형식에 대한 의견들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교회의 정통파들은 머리와 가슴에 그리는 십자가를 세 손가락으로 해야 하며 두 손가락으로 하는 것은 불경건한 것이라고 단정지웠고, 나아가서는 예배시에, 할렐루야를 두번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세번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였고 교파가 갈라지게 되었다.
또 다른 예로서는 성만찬 예식(주의 만찬)이 있다. 성경에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주님의 죽으심을 상징하고 기념하여 기억케 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만찬 예식을 행하도록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행하느냐 하는 문제와 또한 그 예식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가 그저 상징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견의 차이가 교파들이 갈라지는 이유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문제가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마는 이 성만찬을 미사(Mass)로서 행하던 중세기 교회는 떡과 포도주를 그저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핍박하여 결국에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왜 이렇게 교파가 많아 졌는가? 그 큰 이유는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며 고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마가복음 7:7,8.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염려하면서 경고한 바 있다. “뱀이 그 간계로 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 하노라.” 고린도후서 11:3
사도행전은 기록하기를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41,42). 초대 교회가 생겼을 때는 복잡한 의식이나 혼돈된 가르침이 없었다. 그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지냈다. 그러할 때 그 교회에 성령께서 같이 하셨고 능력을 가지고 나아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였다. 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 버렸을 때에, 인간의 전통과 가르침으로 그것을 대치하기 시작하였고, 냉냉하여진 교회는 서로 서로 높은 장벽들을 쌓고 자기들만의 교파들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계에 왜 이렇게 교파가 많은지에 대한 또 다른 두번째 이유는 교회의 조직이 타락하기 시작한데서 연유된 것이다. 성경은 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하며 어떻게 타락할 것인지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예언하여 두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요한 계시록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두번째의 중요한 이유를 다음의 기사에서 요한 계시록의 예언을 연구해 가면서 살펴보기로 하자.
2부 - 기독교에 왜 이렇게 교파가 많은가?
요한계시록 6장에 나타나 있는 교회의 타락
우리들에게 익숙한 요한복음 17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라는 말씀이 있다.
교회에 그러한 연합이 이루어 졌는가? 오히려 수백개의 다른 주장들과 교파로 갈라져 버리게 되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왜 이렇게 교파가 많이 생겼을까? 제1부에서 언급한 이유 다음에 그 두번째 이유로 우리는 교회 조직의 타락을 들 수가 있다. 이 사실은 이미 요한 계시록에 예언 되어 있어서 지난 1900여년간 그리스도인들을 줄곳 경고하여 왔다. 그 예언이란 다름아닌 계시록 6장에 나타나는 네명의 말탄자에 대한 예언이다. 사도 요한이 죄수의 몸으로 밧모섬이라는 곳에 유배되어 가 있을 때에 그는 사랑하는 주님으로 부터 앞으로 일어 날 교회의 역사와 사건들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되었는데, 한번은 하늘로 부터 네 말탄자가 달려 오는 광경이 나타났으며 그것은 분명 어떤 불길한 큰 흉조를 나타내는 계시로 느껴졌다. 그 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쳐 보호해 오던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이었다.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세우신 바로 그 교회란 말인가? 예수께서는 지옥의 세력이 교회를 침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아니했던가?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되었길래 성경에 기초하고, 그리스도 중심이었으며, 성령이 충만하였던 교회가 이렇게 깊이 타락하여 내려 앉게 되었을까?
흰말 시대 (승리의 시대): 요한 계시록 6장의 예언은 그 질문에 대한 생생한 답변을 계시로 보여 주고 있다. 그 계시의 서두에 예수께서는 장래의 사건들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닫혀진 인들을 떼기 시작하시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그 첫째 인을 떼시자 흰말이 달려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2절흰색은 순결한 초대의 사도교회를 상징하는 것이고 면류관을 쓰고 말을 탄 자는 교회를 주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그 분은 나아가서 교회를 통하여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이기고 또 이기었다. 로마 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 할 때에 흰 말을 타고 오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므로 흰 말은 순결한 사도 교회 뿐만 아니라 승리하는 교회를 상징한 것이었다. 제 1세기에 하나님의 교회는 순수한 진리를 가지고 있었고 악을 정복하며 복음으로 세상을 쳐서 이기는 능력의 교회로 존재하였었다.
붉은말 시대 (핍박시대): 그러나 요한은 장면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단이 교회를 무섭게 공격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달려오는 말의 색갈은 붉은 색이었고 이 말을 탄 자는 칼을 받아 쥐고 있었으며 서로 서로 죽이는 일이 감행되고 있었다. 이 붉은 말은 핍박 시대를 상징하였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이게 되었다.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의 원형 극장에서 야수들의 밥으로 또는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지방에서 무자비한 핍박과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기간은 역사가들에 의하여 A.D. 100 - A.D. 323 으로 추정하고 있다.
검은말 시대 (타협의 시대): 그 다음으로 요한은 검은 말을 보게 되는데, 그 말 탄 자는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또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핍박이 그치자 기독교회는 갑자기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콘스탄틴 황제의 추천에 따라 수 많은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교도인들이 개종하여 들어 오면서 그들의 이교적인 풍습과 전통들을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 오게 된 것이다. 더 슬픈 사실은 교회 자체가 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서 이교적인 풍습들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교회에 들어 온 이교의 풍습들 중의 하나가 우상들을 들여 온 것이었다. 십계명에 금지되어 있는 우상들을 들여 오면서 그 이름들과 모습들을 바꾸어 가지고 성경적인 냄새가 풍기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 요한, 바울과 같은 형상들로 만들어 교회 안에 들여 와 달기 시작한 것이었다. 쥬피터 신의 이름은 베드로로 바꾸고 다산신을 상징한 여신은 그 이름을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또 다른 하나의 타협은 성경의 안식일 문제 였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기념일로 안식일을 제정하시어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십계명 속에 포함시키시고 친히 당신의 손가락으로 돌비 위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기록하여 두셨다 (출애굽기 20:8).
예수께서도 안식일에 교회에 참석하심으로 하나님의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모본을 남기어 두셨고,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여전히 안식일을 준수해 온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4:16; 사도행전 17:1-3; 18:1-4 참조).
그런데 성경은 다니엘 선지자를 통하여 교회가 정부의 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이미 해 두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핍박하며”, 또한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선지자 다니엘은 후손들을 위하여 기록하여 두었다 (다니엘 7:25 참조).
태양 신 숭배는 로마 제국에서 인기있는 종교였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는 이교도인들을 수용하고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예배일을 일요일로 변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그 당시 미움을 받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또한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 할 때에 훨씬 편안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일석 이조의 효과를 가져 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다. 성경의 계명은 여전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 말 시대의 교회는 참으로 타협의 시대였다. 진리가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으로 드러난 시대였다. 그 시대는 복음의 빛 대신 어두움이 교회를 뒤 덮어 이교적인 미신적 풍습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 온 그러한 시대였다.
청황색말 시대 (영적 죽음의 시대): 끝으로 요한은 청황색 말이 달려 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청황색은 시체의 색깔이다. 그래서 그 말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었다. 그 뒤에는 음부(무덤)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 난 것이다. 교회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예전과 같은 교회가 아니었다. 한 때 흰색으로 상징되었던 순결하였던 교회가 이제는 죽음의 사신이 뒤를 따르는,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린 교회가 된 것이다.
이 네 말 탄 자의 계시는 교회 역사에 대한 생생하고 적라라한 묘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 날 것에 대하여 미리 아시고 이렇게 예언하여 두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게 순종하도록 강요하시지 않으신다. 부드러운 손으로 인도하시고 호소하실 뿐이다. 참된 성품의 변화는 사랑에서 우러 나오는 선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교파가 많은가? 그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조직과 단체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남은 무리와 종교 개혁 운동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혁자들을 일으키셔서 각 시대마다 교회의 개혁과 부흥을 가져오도록 애를 쓰고 계신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챨스 대제와 그 옆에 찬란한 옷을 입고 둘러 서 있는 교회의 대표자들 앞에, 이단이란 죄목하에 끌려가 심문을 받기 위해 서 있는 한 신부가 있었다. 그는 독일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신부가 된 자로서 아무런 특별한 명예나 높은 직위도 없는 한갖 성직자에 불과 하였다. 그의 이름은 다름아닌 마틴 루터였다. 그는 홀로 서 있었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대항할 아무런 인간적 권위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왕과 교회의 권위자들 앞에 패기있게 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한 권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권위였다. 그는 당당히 말하였다. “왜 벌레같은 내가 감히 성경의 복음과 선지자들의 말씀에 위배되는 오류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보여 주시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나의 책들을 불 속에 집어 넣겠습니다.”
루터는 선택을 하여야만 하였다. 성경의 진리를 고수하다가 죽음을 당하던지, 아니면 교회의 권위에 굴복하던지... 그는 전자를 선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성경을 통하여 분명한 이유를 제시 받기 전에는 그 어느 누구의 권위, 설령 그것이 교황이든 의회이든 간에, 누구에게든지 복종 할 수 없으며,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어 있으며 바로 그러한 확신 가운데 나는 서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당시의 고해 성사와 순례 제도와 사죄권을 파는 일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도록 믿게 만드는 제도들을 대항하여 일어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기별을 과감하게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하여금 용기 있게 일어나 설 수 있도록 만들 한 근거가 있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중세기의 교회의 세력을 대항하여서 프로테스탄트(개신교회)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선 자들의 숫자는 적었고 그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였다.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사실 때에도 유대 교회는 인간적인 전통으로 죽은 교회가 되어 있었고 그분께서는 “기록 되었으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개혁을 시도하시지 않았던가? 교회의 권위는 성경보다 높은 곳에 서 있을 수가 없으며, 성경이 교회의 조직이나 전통 위에 반드시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 전서 1:24,25)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타락하고 실패하였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불변하게 견디어 왔고, 그러므로 말씀대로 사는 보이지 않는 참된 신자들이 항상 모든 시대마다 각 나라마다 조금씩 존재하여 왔다. 예를 들어 보자.
13세기에 아씨시에 살던 플란시스는 마태복음 10:5-15절에 있는 예수님의 분부를 단순하게 받아드리고 자기의 모든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위하여 평생동안 봉사하는 생애를 살았다. 14세기 때 영국의 쟌 위클립은 교회를 향하여 단순하고 순수한 신약시대의 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래서 그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성경을 평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 일에 큰 공헌을 세웠다. 같은 시대에 요한 허쓰는 보헤미아에서 성경의 말씀대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교회에게 그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항의하며 일어섰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라”고 말하였다 (디모데전서 3:15).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교회가 부패하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을 지라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의 기초위에 서 있었던 소수의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하나님의 교회가 꾸준히 존재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성경은 남은 무리라고 부른다.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학개 1;12.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로마서 11:5
이러한 남은 무리에 속했던 위클립과 요한 허쓰와 마틴 루터 같은 그리스도인들 이외에도 많은 개혁자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아나뱁티스트” (재 침례파-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성인 침례를 주장함) 가 일어나 양심의 자유 의사에 의한 침례와 또한 물을 뿌리는 세례가 아닌 성경적으로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를 베푸는 개혁을 시도하고 나섰다.
18세기에는 요한 웨슬레가 일어나 형식으로 죽어가는 교회에 개혁과 부흥을 일으켰으며, 신자들의 성화와 거룩함에 이르는 실제 생활의 열매를 강조하는 참된 제자의 가르침을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교회는 죽었던 상태에서 또 다른 진리의 전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남은 무리들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중세기를 통하여 감추어 지거나 타협된 진리들을 하나 하나 다시 개혁하여 내어 진리가 계속 전진해 나가서, 결국에는 사도 교회의 상태까지 회복 되도록 계획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이나 그 가르침이 완전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 주위에 성을 두껍게 쌓고 자체 만의 교파를 형성하여, 계속적으로, 그리고 더 밝은 빛으로 전진하여 나가기를 거절하기에 이른 것이다.
빛은 전진하는 것이다. 진리도 점점 더 밝게 전진하는 것이다. 특히 종교 암흑시대를 통하여서 진리가 많이 타협되어 버린 상태에서, 교회는 온전한 빛으로 회복되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다른 사람들이 줄곳 발견해 나가는 감추어 졌던 진리, 아니면 채 이해하지 못했던 진리들을 접할 때에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성경적이면 새로운 것을 계속 받아드리는 겸손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파의 벽을 두껍게 쌓은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이미 설립한 조직들과 편견의 벽이 너무 높아서 계속 전진하는 진리의 빛을 따라가지 못하고 머물러 앉아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렇게 많은 교파들이 교회 안에 생겨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언 4:18.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들은 과연 어느 편에 속하여 있는가? 여러분은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진리를 따라 계속 전진하고 있는가?
1부 - 참 교회의 역사
참 교단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참 교회를 찾고 있습니까?
참 교회는 실제로 존재할까요? 만일 존재한다면, 그 교회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오늘날 세상에 있는 수많은 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가 참 교회일까요?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하고 심각한 질문은“과연 참 교회는 존재하며, 그것은 어떤 교회일까?”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각종 교단이나 종파 내에 존재하는 세속적인 정신과 부패와 부정직을 보면서 회의와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참 교회”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다른 교회에 비해서“좀더 나은 교회”를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사실은, 이 세상에서 죄와 부패와 세속적인 정신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참 교단이나 참 교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교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 인간이 세운 조직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연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모여서 세운 어떤 종류의 종교 조직 속에도 죄와 실수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참 교단”을 찾으려고 하는 대신에 “참 교회”를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참 교회”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어떤 조직이나 교단이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셨던 진리, 노아가 전파하였던 진리, 아브라함이 믿었던 진리, 엘리야가 경고하였던 진리, 다니엘과 사도 요한에게 계시되었던 예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가르쳤던 가르침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즉, 남은 무리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참 교회란 참 진리를 보존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참 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어떤 교파나 교단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어떤 조직이나 교파의 이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세운 조직에는 항상 죄와 잘못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또한 교회란 영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역사와 초기 그리스도 교회사와 중세기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항상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전수하며 생애하였던 하나님의 교회 즉 남은 무리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당신의 특별한 교회를 가지고 계십니다. 과거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 즉 소수의 남은 무리가 항상 존재해 왔듯이, 말세인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참 교회를 가지고 계시며, 세상 끝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 교회는 진리를 사랑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있는데, 그것은 말세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참 교회를 구성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참 교회의 특징을 묘사하셨습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놀라운 소식을 매우 주의 깊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자로 상징된 참 교회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참 교회의 역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12장 1절에서 우리는 여인으로 표상된 참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a woman)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성경절은 문맥상으로 볼 때, 상징적인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상징적 표현 중의 하나는 교회를 여인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참 백성인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표현하였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라.”고린도후서 11:2. 또한 선지자 예례미야는“아름답고 묘한 딸 시온”이라고 말하였으며(렘 6:2), 이사야는“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라고 말하였는데(사 51:16),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딸(여인)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결한 처녀=시온=아름다운 딸=여인=하나님의 백성=참 교회)
이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인 즉, 교회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이 교회는 해를 입고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머리에 쓰고 있는 면류관에 달린 12별은 12사도들을 상징합니다. 또한 발 아래에 있는 달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지 못하며,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할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참 교회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12제자들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어야 하며,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환하게 빛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12사도들의 가르침과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참 교회가 어떠한 시련과 역사를 통과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놀라운 예언적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중세기에 참 교회(여자)가 받았던 핍박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예언에 나오는 참 교회(여자)가 오늘날에는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2-5절에서, 우리는 아기를 해산하려고 하는 여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자(woman)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만국을 다스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려간 이 아기는 누구입니까? 이 성경절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용은 누구이며, 누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예수께서 마굿간에 태어나셨을 때, 사단은 로마의 헤롯왕을 통하여 2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학살함으로써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용은 사단 자신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특별히 이 시대에는 사단이 로마제국의 권력과 너무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을 용으로 상징하였습니다.
어떻게 아기 예수가 헤롯왕의 살해 명령을 피할 수 있었습니까? 꿈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천사의 경고를 받아서 애굽으로 피신할 수 있었으며, 헤롯왕이 죽은 후에 어린 아이가 된 예수와 함께 나사렛 마을로 돌아와 생애한 사실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과 희생의 생애를 마치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핍박받는 여자, 핍박받는 교회
용으로 표현된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극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요한계시록 12:13.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만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강을 이루었던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교신을 믿었던 로마제국이 교황권의 세도에 굴복한 이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교황권의 핍박은 오히려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역사가들은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죽은 순교자의 숫자가 5천만명에 달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산과 계곡으로 피신하였던 참 교회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요한계시록 12:14. 중세기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여자(참 교회, 남은 무리)는 알프스의 깊은 산속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260년 동안의 종교 암흑 시대
그런데 참 교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광야에서 피신하였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예언은 말하기를“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참 교회가 광야에 피신하였던“한 때와 두때와 반 때”란 얼마나 긴 기간이며, 그 핍박의 기간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날까요? 같은 장 6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여자가 광야로 도망가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2:6. 자, 이제 좀더 분명해졌습니다. 참 교회가 광야에 도망하여 피신한 기간을 한 성경절은“1260일”이라고 했는데, 다른 성경절은“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했습니다. 두 성경절의 문맥과 내용으로 보아서, 두 기간은 동일한 기간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때(time)”란 1년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 임을 다니엘 11장 1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방왕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준비하였다가.” 성경 예언의 기간을 나타내는 상직적 표현에서“때”는 곧“해(year)”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1년+2년+반년=3년 반을 의미하는 예언적 기간인데, 이것은 정확하게 1260일이 됩니다(성경에서 1달은 30일로 계수됨).
여기서 놓치지 말고 지나가야 할 성경 예언 연구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기간을 상징하는 예언에서 1일은 1년이 된다는 원칙입니다. 우리는 에스겔 4장 6절에서 이 원칙을 뒷받침하는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사십 일을 정하였나니 일일이 일년이니라.” 또한 민수기 14:34에도 또 하나의 증거가 나와 있습니다.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러므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와 1260일이라는 예언적 기간은 공히 1260년으로 환산되어야 합니다.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원칙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날짜에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는 예언 해석 원칙은, 날짜가 기간적인 예언을 나타내는 상징어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 해석법이 올바로 적용되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성취된 예언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언 해석법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서, 중세 시대의 참 교회가 광야에서 1260년 동안 핍박을 받았는가를 역사 속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1260년 동안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여 광야 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역사는 이 예언이 시작되는 한 시점을 우리에게 가르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A.D. 538년에 로마제국의 저스티니안 황제가 로마 교회(교황권)에게 절대적인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때부터 교황권은 종교적인 독재를 휘두르다가, 나중에는 유럽제국들의 왕이 취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황의 인가를 얻어야 할 정도로 그 세도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으며, 종교 및 정치에 있어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교황권이 이러한 권력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양심과 신앙을 핍박하였는데, 역사가들은 이러한 시기를 종교 암흑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 교황권의 핍박이 극렬해지자,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전수받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깊은 산과 계곡으로 숨어 들어 갔습니다. 특히, 신실한 왈덴스인들과 휴그노와 알비젠스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산속에 숨어서 수세기 동안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교황권의 압력과 핍박에 대항하였던 사실을 역사에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6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내려가서 하나님의 예언의 시계가 1798년을 가르킬 즈음, 유럽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대변혁을 겪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들을 향하여 저항하는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결국에는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 혁명군의 버티어 장군이 로마로부터 교황 피우스 6세를 잡아다가 파리의 감옥에 수감하여 교황을 감옥에서 죽게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바로 그 해가 1260년이라는 기간의 종점인 1798년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로마 교회의 교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교황권의 핍박 시대였던 종교암흑시대는 역사적인 종말을 고했습니다.
“여자가 광야로 도망가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2:6 “여자가 큰 독수리의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요한계시록 12:141260일=한 때와 두 때와 반 때A.D. 538년: 로마제국의 저스티니안 황제가 로마 교회에게 절대적인 종교적 권한을 인정하기로 선포한 해.A.D. 1798년: 교황 피우스 6세가 프랑스 혁명정부군의 버티어 장군에게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음으로써, 1260년 간의 종교적 암흑 시대가 종말을 고한 해.
다시 미국으로 피신하는 참 교회
1260년 간의 종교 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 사단의 공격으로 하나님의 참 교회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한“땅”을 준비하는 예언의 장면이 나옵니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요한계시록 12:15-16. 이 성경절은 살아남는 이들 5호에서 깊이 있게 다룬 성경절 입니다. 1260년간의 종교암흑시대 말옆에, 그 당시의 참 교회였던 유럽의 청교도들을 정치적, 종교적 핍박을 피하여 신대륙인 미국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의 핍박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미국이라는 새로운 대륙을 사용하셨습니다. (“미국의 출현”에 대한 예언은 살아남는 이들 5호를 참조할 것)
2부 - 누가 여자의 남은 자손인가?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있는데, 그것은 말세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참 교회를 구성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참 교회의 특징을 묘사하셨습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놀라운 소식을 매우 주의 깊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1부에서 배운 바와 같이, 사단과 그의 인간 대리자들의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참 교회는 투쟁과 피신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통하여 소수에 의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1,260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가족을 희생의 제단 위에서 불태웠던 사실들을 중세기의 개혁자들의 생애 속에서 볼 수 있는데, 바로 그들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여자", 즉 참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계시록 12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국이라는 신대륙을 통하여 당대의 참 교회였던 신실한 청교도들을 구원하시자, 사단은 분노하는 모습이 12장의 마지막 절인 17절에 그려져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요한계시록 12:17.
이 성경절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은 중세기 암흑시대 이후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즉, 미국의 출현 이후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참 교회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남은 자손 즉, 참 교회를 설명하면서“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1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참 교회의 특징을,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성경절에서, 우리는 사단이 여자의 남은 무리(remnant)와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남은 무리(remnant)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remnant의 원어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옷감을 파는 집에 가면 천을 큰 두루마리로 말아놓은 것이 있는데, 그 두루마리의 마지막 남은 조각을 remnant라고 부릅니다. remnant는 두루마리의 첫번째 천과 동일한 천으로써, 맨 마지막에 남는 조그만 천조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무리는 사도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던 가르침과 동일한 변질되지 않은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가 강요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짐승의 표가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요한계시록 14:11. 사도 요한은 계시 속에서 마지막 시대에 전세계적으로 강요되는 짐승의 표를 보면서 두려움과 엄숙함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계시에서 그는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승리하는 참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요한계시록 14:12. 바로 여기에 짐승의 표를 피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 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우리는 하늘에 들어갈 마지막 참 교회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될 것인가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누가 끝까지 살아남아 영생을 누리는 자들이 될까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요한계시록 22:14, (한글 성경에는“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킹제임스 영어 성경과 성경의 원문에는“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역자주).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하늘에 들어가는 자들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킨다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를 묘사하면서, 참 교회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 구성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연 누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예언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너무나 많은 목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해졌다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분노하여 전쟁을 벌이는 상대는 오직 여자의 남은 자손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요한계시록 12:17. 하나님의 계명이 폐하여졌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공격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며,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고 오히려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세력에 가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계명을 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고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5:17-19.
물론, 참 교회의 교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였기 때문에, 청결하고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지키는 변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닌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1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참 교회의 교인들을 설명하면서 3번이나 반복하여“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 독자들께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참 교회의 교인들이 되지 않으시렵니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가장 큰 위선, 가장 큰 위험
가장 큰 위선
무엇이 가장 큰 위선인가요?가정에서 읽지 않는 성경을 교회에서 크게 읽는 것이죠.
무엇이 가장 큰 위선인가요?가정에서 나누어 주지 않는 미소를 교회에서 차고 넘치게 흘리고 다니는 것이죠.
무엇이 가장 큰 위선인가요?가정에서 행하지 않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교회의 모든 교인들에게 과시하는 것이죠.
무엇이 가장 큰 위선인가요?가정에서는 무뚝뚝하고, 냉정하며, 독선적인 사람이교회에서는 가장 친절하고, 유머있으며, 관대한 집사님으로 봉사하는 것이죠.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에베소서 6:6)
가장 큰 위험
무엇이 가장 큰 위험인가요?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불순종하는 것이죠.
무엇이 가장 큰 위험인가요?목사님이나 장로님 말에는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불순종하는 것이죠.
무엇이 가장 큰 위험인가요?하나님의 기적과 치유는 열렬하게 구하면서, 성령의 아홉 열매에는 무관심한 것이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