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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떤 분인가
마태복음5:10-12; 누가복음2:52
2005년 3월 20일 오전 11:00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잔 평강교회(안산)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예수는 어떤 분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마디로 ?예수는 혁명적으로 말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다가 터무니 없이 죽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좋아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바로 예수님의 이같은 점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죽어간다면 들판에 자라다가 시들어 업어지는 풀이나 나무보다 다를 것이 업는 것이다. 구약성경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을 부정한 말이 아니라 보다 고차원의 인생을 추구한 애기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된 인생은 풀이나 꽃같아서는 안되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목적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존재이며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의미있는 존재이다. 단순한 생물학적인 생존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인생은 하나님의 역사 창조에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 아주 귀중한 존재이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서 이 땅에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생은 또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어로 말하면 A MAN 이 아니라 THE MAN 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 중에 또 하나의 사람으로서의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하고도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좋은 정도의 사람이 이나라 하나님 앞에서 나 홀로 설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늘 읽고 애용하는 성경은 역시 하나의 책이 아니라 바로 그 책이다.
성경은 A BOOK 이 아니라 THE BOOK 이다. 많은 책중에 또 하나의 책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특별한 책이다.
서양사람들이 집에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애 책가져와라 하면 아이는 바로 서재에 가서 성경책을 가져온다. 성경책은 THE BOOK 그냥 책이다. 그래서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할 때에는 성경이라는 설명이 필요없다. 그래서 책 가지고 오라. GET THE BOOK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책이 아닌 다른 책을 가져오라고 할 때에는 말하자면 역사책 가져오너라 할 때에는 GET A BOOK OF HISTORY역사책 가져오라. 성경이 아닌 다른 책은 A BOOK이라는 것입니다. 여러지 종류의 책중에 말하자면 철학 논리학 과학 등 여러 가지의 책 중에 한종류의 책을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할 때에는 성경책 가져오라고 할 필요가 없고 그냥 책가져오라고 하면 그 것은 바로 성경책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진정한 책은 성경책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캐논이라고 합니다. 캐논은 자라는 뜻입니다. 모든 책은 성경으로 재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반이에서 모든 책은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책입니다.
우리 사람도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다. 많은 사람중에 또 하나람이 아니라 바로 그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그 사람이신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 THE MAN이신 예수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THE MAN(호 안드로포스)이라는 말이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고백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유대인의 재판의 관례대로 죄수 한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을 따라 예수를 놓아주려하자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니요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하고 사람드이 소리쳤습니다.
그 때에 빌라도가 예수를 채찍질하고 군인들은 가시멸류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쒸우고 자색옷을 입힌후 예수 앞에 연달아 나아와 유대인의 왕이여 만세 하고 소리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다시 밖으로 나아가 유대사람들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보시오 내가 그(The) 사람을 그대들 앞에 데려 내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을 그대들에게 알리려는 것이요 하면서 예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보시오 그 사람이요 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사람 혹은 그 사람이라는 말은 신약성경 원어인 그리스말로 호 안드로포스라고 되어 있는데 호 안드로포스라는 말에서 호라는 말은 정관사이고 안드로포스라는 말은 사람(호모)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며 예수님은 많은 사람중에 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 말하자면 사람의 원형이 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 THE MAN이 될려면 THE MAN이신 예수님을 닮아야하고 예수님을 닮으려면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혁명적으로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보고 듣고 읽어서 별로 특별한 충격적인 느낌이나 놀라움의 감격이 크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놀라운 말씀으로 새로운 말슴으로 혁명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성경에 자주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다라고 했고 당시 기존의 다른 선생들의 교훈과 다르다고 했다.
예수님의 혁명적인 말씀을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라든가 원수를 사랑하라 든가 하는 말씀은 놀라울 정도가 아니라 혁명적인 말씀이었다. 왜내하면 지금도 마차가지이지만 당시 모든 사람드은 부 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고 부 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모든 랍비라는 지도자들도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그같은 교훈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부자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온 갖 노력을 기우리던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요 그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원수는 미워해야할 대상이었지 결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업다고 생각하던 시대인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엉뚱하고도 그야말로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그리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였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알면 실은 더 충격을 받을 수 있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난 그 차체를 좋아하라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도는 가나한 자들이 부자들에게서 무시당하고 멸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나한 사람들의 인격을 부자들의 인격과 꼭같이 끌어올리려는 예수님의 집념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원수도 원수 그 자체를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원수같은 사람이라도 미움이나 저주의 대상이 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될수 없다고 보셨기 때문에 사랑으로 성취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려하신 의도로 그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원수도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말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죄는 미워해도 죄를 진 사람은 미워하지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고 하신 말씀도 아무에게나 무턱대놓고 불특정 다수에게 말슴하신 보편저인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아니라 권력이나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권력 없고 힘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폭력과 물리적으로 위협하는 야비한 집권층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도 권력에 의하여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아주 고소한 말씀이고 당시 공권력이나 재물 등 힘을 가지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폭력으로 해를 끼치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의 말씀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말씀의 예를 보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도 각종 안식일에 대한 까다로운 규칙 때문에 오히려 가난하고 시간 없는 사람들이 지킬 수 없는 모순을 아시고 안식일의 기본 정신 근본 원리를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법과 법규만 강조하고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당시 지도자들을 일깨워 주시고 반대로 법만 따지고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지도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멸시받느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신 말씀인 것이다.
이같은 예수님의 이 안식일 법에 대한 새로운 혁명적인 말씀은 각가지 까다로운 법과 잡다한 규율로 뭇 백성들을 얽매어 백성들을 억압으로 다스리는 기득권 지도층에게는 안정과 질서를 깨뜨리는 위험한 말로 들렸고, 까다로운 규칙 때문에 안식일을 못 지키고 스스로 죄스럽게 생각하던 일반 백성들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해방의 기쁜 소식이었다. 이스라엘에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 예언자가 사라진후 이스라엘 나라에는 400년동안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예언자가 있어도 권력의 시녀가 되어 올바른 말을 할 수 없는 억압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감히 그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 없었든 것이다. 따라서 예언자가 살아진지 400년만에 예수님과 같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예수님보다 6개월전에 태어난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치고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용감한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왕에게 목베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같은 억압적인 상황에 오셔서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던 전통을 따라 그같은 말씀을 하실 때 당시 지지도층에게 는 충격적인 말씀이었고 못된 지도자들에게 당하는 백성들에게는 오래간만에 듣는 신나면서 놀라운 말씀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에게 혁명적인 말씀고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성경에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지도자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말씀과 달랐다고 한 것이나 놀라운 말이라고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이 이같은 혁명적인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말씀드린 말씀 외에도 예수님은 입만 열면 새롭고 놀랍운 혁명저인 말씀들로 일관했다. 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다. 형제를 향하여 노하는 자는 살인한 자와 함께 심판을 받으리라.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불의한 자에게나 의인에게나 골고루 내려 주신다. 형제를 향하여 라가(바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기도하려면 골방에 가서 남이 안보는 곳에 들어가서 은밀하게 기도하라.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드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말라. 내일일은 내일 염려하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주여주여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기잡는 어부를 향하여 나는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하셨다. 이같은 말씀은 모두가 거의 그 당시 헤롯왕의 권력의 비호하에 헤롯에 아부하는 세사장 서기간 바리파 지도자들 권력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같이 혁명적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그래야 우리도 혁명적인 말을 할 수 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혁명적인 말을 하십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혁명적인 말은 어떤 말들일까 생각해 봅시다. 꼴찌가 되라. 공부만 하지말아라. 대학에 못가도 좋다. 바르게 살아라. 컨닝하지 말아라. 북조선을 사랑하라. 북조선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자살하지 말아라 강대국이 세계적인 테러리스트다.
둘째, 예수님은 용감하게 행동하신 분이십니다.
백성을 억압하고 절대권좌에 앉아 백성을 수탈하는 폭군독재 헤롯왕을 가르켜 여우라고 말씀하신 말 자체가 용감한 행동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안씻고 음식을 먹었다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일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유대인의 전통과 규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동으로서 당시 전통과 율법을 금과 옥조로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온 몸을 바쳐서 지키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가르치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지도자들에게는 괘씸한 것이었고 하루벌어 하루 살기도 바쁘고 벅과 법과 규칙을 따르고 지킬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 고달푼 일반 군중들에게는 공감되고 시원하고 통쾌한 행동이었다.
예수님의 용감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예수를 잡으려고 예루살렘 성내외를 막론하고 여기저기 온통 대자보 방을 붙혀놓고 첨단무기로 무장한 로마의 정예 군인들로 이중 사중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이 철통같은 방어진벽을 쌓고 원천봉쇄하고 그 안에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헤롯왕이 권좌에 앉아 있는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거침 없이 왕의 행세를 하고 용감하게 입성한 것이다. 구약성경 스갈야 예언자의 예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극적인 행동은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헤롯왕이 성안에서 버티고 있는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속에서 보통 용기가 아니면 생각도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당시 기득권 세력들이 볼때는 예수님의 그같은 행동은 용기라기보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면 감히 꿈도 못꿀 무모한 짓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입성하신 둘째날 예루살렘 성전 숙청 사건은 당시 정치 지도자와 종교지도자로 모든 세상 권력을 한 손에 쥐고있는 집권층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유대인들이 1년에 하번씩 지키는 유월절-민족해방절-우리나라로 말하면 광복절-을 지키기 위해서 제물을 바쳐야 했다. 그래야 자기들이 지은 크고 작은 죄가 용서받는 다고 믿고 또 성전 지도자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형편에 따라서 집에서 일년 내내 정성껏 키워가지고 온 비불기나 양이나 소같은 짐승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유월절 1개월 전부터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사를 드리려는 순례객들과 동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제사를 드릴 제물들이 조그만 한 흠만 있어도 성전 문에서 검열에 퇴짜를 맞았다. 비들기의 깃이 하나 빠졌다던가 양의 눈에 눈꼽이 조금 끼었다던가 소의 발톱이 먼길을 오다가 찌그러졌다던가 하면 성전문 입구에서 검렬에 여지 없이 걸리고 거부를 당했다. 그러나 성전 안에서 파는 비싼 제물은 눈이 하나빠졌어도 다리가 부러졌어도 그것만 사면 검열도 할 필요가 없이 무조건 통과가 되었다. 이미 검열을 마쳐놓은 것이었다. 돈을 현금으로 제단에 바칠때에도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돈-화페를 성전 화폐로 바꾸어야 했는데 그것도 성전에서 도맡아서 환전을 해 주었는데 비들기나 양이나 소같은 제물의 값은 말할 것도 없고 환전하는데도 15배에서 20배를 내야 바꾸어주었다. 부자들은 거런대로 비싸게 주고 사서라도 제물을 바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꿈 속의 이애기였다. 1년에 한번 아니 평생 한번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떨고 있을 뿌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유월절을 지킬 위무가 있고 유월절 절기를 지켜야만 사람구실을 한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떳떳한 살을 산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챙피한 일이었다.
유대안에 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들도 일평생 한번이라도 유월절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 있다는 생각으로 어떻게 하던지 적금을 해서라도 한번은 고국에가서 그 그리운 고국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 내에 황금빛 찬란한 사원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만 식성이 풀리는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돈을 마련해서 왔지만 너무 비싼 제물 10배 20배로 지나치게 비싸게 환전하는 검열대 앞에서는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부자나 권력있는 기득권특권층이나 예루살렘 성전 문턱을 넘어들어갈 수 있었다. 한번 제사를 드리면 1주일이나 되는 긴가긴동안 제사를 드리는데 그동안에 제물로 드려지는 동물의 수가 25만 마리었다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동물의 피의 냄새가 구역질을 유발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도 일년에 한번씩 예루살렘 성에 제사드리러 가셨는데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장들의 그같은 잘못된 제사제도를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할 수없었다. 말하자면 그 제단에 바쳐지는 피의 냄새의 구역질보다 더 구역질이났던 것은 성전제단을 장악하고 독과점으로 제물을 팔고 환전을 하는 특권 기득권자들의 착취행위에 때문에 성전예배를 그리워하면서도 문앞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안타까워하는 모습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온 창자밑으로부터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구역질나는 부조리를 해마다 성전에 들릴대마다 경험하신 예수님은 참다 참다 못해 일사각오로 용감한 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성전 안에서 파는 제물들을 챗찍으로 때려 몰아내시고 돈 바꾸는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으신 것이다. 이같은 예수님의 용감하고 과격한 행동을 보는 일반 가난한 군중들에게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한 신나는 일이었지만 종교와 정치를 한손에 쥐고 이득을 노리던 기득권층 지도자들의 눈에는 자기들의 절대권력 체제인 성전체제를 완전히 무너트리는 경고망동이요 내란음모 난동과 폭동 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십자가를 각오하는 몰지각한 행동이었다.
십자가를 진다는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의 이같은 행동은 평범한 소시민적 군중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같은 행동은 정말로 인생을 색깔있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모범이 되는 용감한 행동이요,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은 참 진정한 크리스쳔들에게는 필수적으로 따라야 할 용감한 행동이었다. 이같은 행동을 당시의 상황과 똑같은 오늘의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종교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셋째, 예수님은 터무니 없이 죽었다.
에수님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는 예수를 고소한 대제사장들의 고소장에 잘 나타나 있다. 누가복음23:1-5에 보면 예수님의 죄목이 세가지 기록되어 있다. 누가가 누가 복음을 기록한 때는 주후 65년경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씩 둘씩 다 주어갔고 목격자들에 의해서 입으로 입으로 예수님의 사실이 구전으로 전해졌지만 해가 지남에 따라 예수에 대한 잉야기는 점점 희미해져갔고 전하는 사람마다 이애기가 다르기도 하였습니다. 설상가상 유대를 속국으로 지배하고 있는 로마당국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의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누가는 가능하면 예수님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뿐 아니라 의혹을 가지고 있는 로마 당국에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확실하게 할 필요을 느껴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누가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서 법원에 가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구전을 수집했을 것이고 더 확실한 증거와 확증을 위해서 범원에 가서 예수님의 재판기록을 뒤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누가복음23:1-5절이다. 거기에 예수님의 죄목이 세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셋 모두가 정치적인 것이었다. 일반 범죄가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을 띤 죄목이었다.
그런데 실은 예수님이 제사장들과 충돌할 때에는 정치적인 문제로 충돌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전통과 종교적인 문제였다. 손을 씩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던가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던가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랐다든가 하는 등의 문제였다. 그런데 왜 예수를 그렇게 터무니 없이 정치적인 죄목을 세가지나 걸어 고소를 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로마의 제국지배의 성격을 알지못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로마가 점령한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주었으나 사람을 죽일 권한은 주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전통이나 종교적인 재판문제에 있어서만은 유대인들 스스로에게 맡겼지만 사람을 죽이는 재판권한은 로마가 쥐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국회(71명으로 구성되는 산혜드린)가 있었고 물론 제정일치시대였기 때문에 종교 전통 등 모든 문제를 그들 나름대로 재판을 할 수가 있었지만 단 사람을 죽이는 문제만은 로마의 권한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는 종교적인 문제나 유대나라 조상들의 전통이나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유대인에게 맡겼고 종교적인 일로 사람을 죽이는 재판은 하지 않았다.
그런고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는 예수의 문제를 로마법정에 가지고 갈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실제적으로 충돌되었던 종교문제나 조상들의 전통을 가지고 가봐야 로마는 그 문제는 유대지도자들에게 되돌려줄 것이 뻔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죽이려면 정치적인 죄목이 필요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서는 청치범으로 몰지 않으면 허사였기 가지고 가나 마나 허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적으로 는 종교와 전통문제로 예수님과 충돌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 사형권을 갖고 있는 로마법정에 고발한 것이다.
그 세가지 죄목은 누가복음23:1-2절에 함축되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사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와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이 한 구절에 목숨이 걸려있는 세가지 정치적인 죄목이 들어있다.
첫째, 백성을 미혹하고 (subverting our nation, perverting the nation -inciting our people to revolt)-미혹했다는 말은 국가를 밑으로부터 뒤엎는다, 폭동을 선동했다는 뜻으로 요새말로 말하면 반정부 내란 음모 국가전복을 앞장서서 폭동을 선동한 데모주동자라는 뜻이다. 이같은 고발 치안유지를 위해서 로마에 총독으로 파송된 빌라도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이같은 심각한 문제로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유대인들은 로마황제로부터 총독으로 파송받은 빌리도를 탄핵할 것이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총독 정치를 잘못해서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고 치안유지를 못할 경우에는 로마에 소환되거나 제거되는 위험한 사건이었다. 빌라도가 그대로 묵과할 일이 아닌 큰 문제였다.
둘째, 세금바치는 것을 금하며 - 세금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다. 당시 로마의 속국인 이스라엘은 자기나라 유대왕에게도 세금은 바쳐야 했다. 이것을 반대했다는 뜻이다.(opposing payment of taxes to Caesar.) 로마가 그 막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점령지에서의 세금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세금반대 탈세행동은 반로마 반국가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황제나 헤롯왕의 입장에서는 그냥두고 볼 수 없는 말입니다. 더구나 로마로부터 파송된 총독 비라도에게 있어서 이 세금반대 탈세문제는 총독의 자리와 생명마저 위험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셋째,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claiming to be christ. 자기가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 왕은 그대로 정치적인 권력의 상징이지요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한 왕국의 지도자라는 뜻으로 희랍어로 크리스토스이고 영어Christ로 표기한 것으로 우리말로는 그리스도이다.
이스라엘 나라 안에 헤롯왕이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마당에 헤롯에 대한 정면 도전일 뿐 아니라 로마 가이사황제가 임명함으로 비로서 유대왕이 되는 정치적인 예속 관계에 있고 총독이 파송된 총독정치하의 당시 제국의 구조로서는 로마 황제 가이사가 임명한 헤롯왕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왕이 된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왕 헤롯과 그 수하들은 이 세가지 정치적인 문제로 예수를 고발함으로 꼼작없이 로마법으로예수를 제거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세가지 혐의는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데모를 주동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가가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오게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데모를 주동함으로 백성들을 미혹한 일이 전혀 없다. 또한 예수님은 세금을 안낸일이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해서 물고기 입에서 세겔을 꺼내서 세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세금문제를 가지고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하느냐 안내야 하느냐고 하는 답변하기 곤란한 문제를 가지고 질문했을 때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가이샤에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지혜롭게 대답하셨다.
더구나 스스로 왕이라고 한일이 없다. 예수께서 5000명의 배고픈 군중드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몰려왔지만 그 때에도 예수는 산으로 도망갔다.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오(왕 지도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때에도 그런말이 헤롯왕의 귀에 들어가면 그말은 한 너도 죽고 그말을 들은 사람들도 죽고 나도 죽는다 절대로 다른데 가서는 그런 말을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철저히 당부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같은 정치적문제를 걸어서 고발했나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유대인의 국회에서는 종교적인 죄나 조상의 전통을 어긴것만으로도 사형이 가능했지만 로마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자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죄목을 걸어서 빌라도에게 고발을 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터무니 없이 죽은 이유이다.
실은 예수님은 자신이 터무니 없이 죽을 것을 이미 제자들에게 말한 일이 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신이 그에게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터무니 없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아셨다.
산상수훈 마태복음5: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터무니 없는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그렇게 터무니 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터무니 없이 죽임으 당할 것을 미리 예견하셨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터무니 없이 죽임을 당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기도교가 터무니 없이 죽임을 당해야하는 역사적인 내력이다. 그래서 실로 기독교는 예수를 벽두로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2000년동안 터무니 없이 박해를 받아오고 있는 것이다.
로마 치하에서 로마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라는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했다. 당시 빈번한 유아 유괴 사건을 기독교인의 성찬식에 사용되는 포도주에 연관시켜 기독교인은 피를 마신다고 하면서 크리스챤들이 피를 마시기 위해서 유아를 유괴했다고 뒤집어 씌운 것이다. 당시 유아가 유괴된 진정한 원인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유괴해서 남아는 노예로 팔고 여아는 사창굴에 팔았던 문외한 파렴치 법들의 짓이었다.
다른 예를 보면 기독교인이 강조한 세상 종말에 불로 심판 받는 다는 교리를 이용해서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뒤집어 씌우는데 적용하였다. 로마황제 네로는 주후 64년 7월 구도시 로마를 신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로마시에 불을 질러 놓고 그 불을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불의 종말과 심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방화를 했다고 누명 씌워 기독교도들을 연행, 투옥, 사형시켰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비밀 애찬을 가리켜 먹기를 탐내고 음란한 일을 일삼는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무리들이라고 터무니 없는 비난을 했다.
그러나 이같은 것은 오리려 견딜 수 있는 것들이다. 더 심각한 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박해였다. 그것은 마로 황제 숭배의 강요였다. 로마 황제를 신격화하고 그의 동상을 높이 세우고 그 앞에가서 1년 1회 향불을 피우게 하고 정치적 충성을 테스트하는 장치로 이용하였다. 그래서 로마황제의 신상앞에 향불을 피우고 절하면 리베루스(Libellus-자유)라는 표를 주고 그 사람에게 한해서 자기 자신의 종교를 믿고 신봉할 수 있도록 허가 한것이다. 만일 그 앞에서 향불을 피우지 않으면 비액국자요 반 국가죄로 박해를 가한 것이다. 군대도 갈 수 없었고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없음은 물론 뚜렷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심지어 리베루스라는 표가 없으면 시장에 가서 물건도 살 수 없었다.
여기에 걸리지 않는 기독교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로마황제에게도 향불을 피우고 또 자기자신들이 믿는 신에게도 봉헌을 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쉽게 했다 그러나 유독 기독교인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만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요 지도자로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독교인이 땅굴을 파고 숨어 살 수밖에 없는 박해의 심각성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성지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로마에가면 카타곰을 볼 수 있습니다. 터키 카파도기아에 가면 수많은 동굴과 3층이나 파고들어간 땅굴을 볼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방법 또한 악랄했다. 기독교도가 발각되고 기독교인임이 확인되면 기독교도 몸에다가 역청을 발라서 불을 밝혀 높이 매달아 정원을 밝히고 그 타죽어가는 불빛 아랫니서 연회를 즐겼다.
야생동물의 가죽을 기독교도의 몸에 입혀서 꿰매고 들판에 내놓아 사나운 사냥개들을 풀어 쫗아가서 물어 뜯어 죽게했다. 소위 사람 사냥놀이를 한 것이다. 바늘로 손톱밑을 사정 없이 씨르고 불에 뜨겁게 달은 놋접시를 예민한 살에 붙여 놓았다. 뜨겁게 녹힌 쇠물을 몸에다 부었다. 눈을 빼고 몸의 일부를 잘라서 본인이 보는 앞에서 불에다가 구웠다. 고통을 더 오래 당하게 하기 위해서 손과 발을 불로 태우면서 몸에다가는 찬물을 끼얺었다. 이같이 기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내려오면서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터무니 없이 오해받는 내용이 달랐고 박해 방법도 더욱 더 악랄한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도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그 박해의 내용과 성격은 달랐지만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로 희생되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채으로 많은 천주교 기독교인들이 억을하게 죽임을 당했다. 윤지충 권철신은 불효라는 누명을 쓰고 순교했다. 절라도 해미에가면 대원군시대 그때의 수천명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순교당한 천주교 박해의 참상을 볼 수 있다. 신유박해 을해박해 기해박해 등 수차례의 교란의 종교박해가 있었고 그 때의 고문하고 죽이던 연장들이 지금도 해미성과 마포다리와 양화교 사이 북편 강변 언덕 절두산 언덕에 숙여히 서 있는 천주교 박불관 안에 전시 되어 육모방맹이 칼 주릿틀 등 끔찍한 고문도구들을 누구든지 볼 수 있고 성지 순례 관광객들로 하여금 당시의 처참했던 박해 모습들을 상기시킨다.
일제하에 일본 사람들에게 터무니 없이 당했던 그 수모와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지금도 수원 제암리에 가면 제암리 교회가 당한 참상을 알 수 있다. 70년 말에 우리 경신하교 교목 세분(박한석 김종희 유경재)목사가 기념 예배당 준공예배에 가서 기념 식수를 하고 왔다.
6.25동난 때에 기독교인이 진 십자가는 지금도 우리의 노리에서 살아지지 않고 살아있다. 3.1운동때 자유를 부르짖는데 선봉섰던 우리 한국교회가 이제 앞으로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얼마다 어려움을 당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의 박해는 목숨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박해가 예상된다.
기도교가 그동안 이 땅에 이룩한 여러 가지 공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순수한 신앙의 순수성 때문에 오는 박해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의 순수성과 선교적 열심을 가지고 종교교육을 하고 있는 오늘날 기도교하교는 신앙을 강요한다느니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느니 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비난하고 폄하한다. 2004년 6월 16일 시내 모 기도교하교 학생회장의 예배거부 일인 시위를 시작으로 그의 니테즌들의 기독교 폄하는 기독교 박해 이상의 상처를 가하고 힜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지탄을 받는 다면 하루속히 제정신을 차리고 기도교개선의 힘써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선교뿐 아니라 사회구제등 복지사업에 크게 공헌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회나 교인들의 비행이나 부도덕한 이유로 기독교의 모든 것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서는 안되겠다.
터무니 없이 박해를 받지 않기위해서 사회적 공헌에 힘쓸분 아니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모범적으로 살아야 하겠다.
오늘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기독교 폄하나 기독교 반대는 오히려 기독교를 진보로 이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자기 몸에 박힌 죄의 가시를 빼려는 기독교선교의 열심을 강요라는 또는 종교자유의 침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거부하고 있다. 그것이 가시를 빼내려는 사랑의 노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어제3월 15일 한겨레신문에 연세대학교에서 5명의 학생이 예배거부 및 기독교교육 거부 일인시위를 벌이고 있다는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경신학교는 혁면자 양성소니 불온 사상의 온상이니 하는 터무니 없는 박해를 받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한국기독교서양종교가 한국의 미풍양속을 파괴했다고 비난한다. 한국의 민족종교를 마랄했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했다고 한다.
복음의 야성안에서 기도교(복음) 반대는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다. 바울에게서 우리는 이 사실을 본다. 감옥에 가친 바울은 시위대들에게 복음전파의 기회를 삼았다. 바울의 반대와 매임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 바울의 감옥생활이 옥중서신을 쓰게 했다. 비난의 독화살은 복음의 기쁨이 되었다. 고난중에 복음전파는 바울의 기쁨이 되었다.
***** 이설교는 군사정권하에서 학생들에게 자주 했던 설교이다. 오늘날과 같이 터무니 없는 오해와 기독교가 편화를 당할 때 또는 순교주일 혹은 토마스 선교사 순교를 말할 때에 참고하는 것이 좋다. 너무 길지만 조반복되는 것은 조정하거나 요약하면 좋다.
경신중.고 전교목실장 김종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