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와 이수>
“꼬~오마리”
국민학교 등하교 길에서 우리는 쉽게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구든 자기를 향해 이 소리를 들었을 때의 반응이란 냅다 그런 한호를 향해 앞다투어 가서는 줄 서는 것이었다. 물론 그 줄의 끝ㅇ에 선 사람에게 내려진 벌이란 겨우 알밤 한 대의 하찮은 것이었지만 아마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들의 대장으로서의 한호에 대한 예를 갖춘 것으로 생각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한호는 나 보다는 2살이나 위였다.
그는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담이 좋고 늘 힘이 넘치는 에너지를 품고 있어서 그를 보게 된 우리들 또한 새로운 힘을 얻곤 했다.
그 때 당시의 우리들의 하교 후의 일과에는 몇 가지로 정해져 있는 일이 주어져 있었다. 여름 철에는 꼴 망태기를 둘러 메고 풀을 베는 일이었고, 가을 겨울에는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는 일이었다.
나는 농사일에 그리 흥미도 없었고 특히나 그런 일에는 별 재주를 부리지 못했다. 시공에 살면서 누가 낫질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새끼 꼬는 방법을 전수 해 줘서 하는 일도 아니건만 나는 낫질이 설었고, 겨울 밤 사랑 채에서 꼬는 새끼는 그 굵기가 중구난방이어서
결국 허드레 것으로 밖에는 쓸모가 없게 되곤 하였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그리 부자는 못 되었다. 그런 우리 집이었는데도 동네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좀 남달랐다.
들에서 일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지나치다가 인사를 할 때면 의례히 듣는 말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부잣집 아들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오냐, 우리 부잣집 막둥이, 어디 갔다 온가?”
대개의 어른들은 나의 하찮은 인사에도 그냥 다가와 엉덩이라도 토닥거릴 모양으로 다정하게 이런 식의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전혀 일을 안 하거나 전혀 일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서툰 낫질이지만 풀을 베는 데 참여했고, 빠른 놀림의 갈퀴질은 아니었지만 산에 가서 소나무들을 흔들어 떨어진 낙엽들을 긁어 망태기를 채우는 일에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곤 했었다.
“ 야, 니들 얼른 망태 들고 갓구렁으로 올라 오라!”
한호는 보통의 일과처럼 평호와 문호에게 말을 했다.
물론 나를 향해서는 ‘너는 어떤 의향이냐?’는 듯한 알지 못할 눈치만 주었을 뿐이였다. 이런 한호의 말에 나는 대개의 경우는 합류하여 어울리곤 했는데 낫질이 서툰 나는 늘 그들의 마지막 과제를 안겨주곤 했다.
꼴 한 망태기를 그득 채운 한호는 겨우 반이나 밖에 채우지 못한 나를 보고도 괘념케 여기지는 않았다.
그저 어디선가 몫 좋은 언덕 풀밭을 남겨 놨다가는 나의 망태기를 질끈 끌고 가서 빠른 낫질로 금방 나머지 나의 꼴 망태기를 채워 놓은 것이었다. 물론 손이 빠른 문호며 평호도 함께 거들었으니 십시일반으로 나의 망태기는 순식간에 배가 불러지곤 했었다.
이렇게 일을 마무리 하고 난 다음 우리들의 다음 차례는 대개는 이웃에 있는 작은 산으로 향해서 괴상한 모양의 나무 뿌리며 더러는 말 벌 집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경력을 요구 하는지 늘 나 보다는 한호는 멋지고, 나도 갖고 싶을 정도의 작품을 구했다. 칡 넝쿨이 타고 올라 골골히 홈이 패여 흡사 도사들의 지팡이가 연상되는 오리 나무 가지며
바위 틈으로 눌러져서 바탕 부분이 넓적하게 생겨 주걱처럼 생긴 나무뿌리…등등
그래서 늘 한호의 지휘 봉은 시시때때로 변해 있었다. 더러는 내가 좀 갖고 싶다는 눈치가 보이면 냅다 두말 않고
“ 너 이거 갖고 싶냐? 자, 가져”
한호는 언제나 이런 식이였다.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나는 동네 어귀에서 막 배우기 시작한 장기를 두려고 관호 형네 집을 향하다가 말쑥하게 차려 입고 자기 아버지를 따라 어딘가를 향해 걷는 한호를 볼 수 있었다.
한호는 멀리서 나를 보더니 엷은 미소만 보이면서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아버지 몰래 입에 손을 가리고는 뭐라고 입 모양을 지여 보였는데 하여간 어딜 간다는 신호인 것 같았다.
중학교를 가면서 나는 한호의 ‘꼬~오마리!’라는 소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진학을 못 했고 그가 없는 학교 길은 웬지 뭔가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중학교에 가고부터는 늦어지는 하교 때문에 예전 같이 정해진 일들로부터는 조금씩 멀어졌기 때문에 한호랑은 일과 후의 만남을 갖을 수는 없었다.
같은 동네를 살면서도 이런 한호를 다시 만난 것은 그 후로 없었다. 은자네 집 앞의 은행나무가 그야말로 샛노랗게 물들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어린 나였지만 그 길을 거쳐 하교를 하고 있던 나는 그 샛노란 은행잎을 보고는 왈칵 울음을 쏟아 내고 싶은 묘한 감상에 젖었던 그 날이었다.
마침 집 앞에서는 어머니랑 작은 어머니가 애 호박을 넙죽넙죽 썰은 것을 담벼락에 널고 있었다.
“다녀 왔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막 방으로 들어 서려는데 작은 어머니가 말씀 하셨다.
“아야, 한호가 너랑 동창 아니냐?”
좀 뜨악한 질문에 나는 그냥 처다만 보고 이었다.
“짠한 것, 어린 것이 돈을 벌먼 얼매나 번다고…쯔쯔”
나는 그 때서야 한호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눈치 채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아, 글씨 한호가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었단다.”
“예!”
나는 순간 그가 가면서 나에게 입 모양 지었던 그 영상 속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꼬~오마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머리가 쭈삣 선 것 같은 묘한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이렇게 한호는 우리 곁을 떠났다. 미워 할 수 없었던 우리들의 대장이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의 친구인 한호는 겨우 열 댓 살의 어린 삶을 무덤도 하나 남기지 않고 무정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내색은 않았지만 중학교 생활에 점점 더 적응해 간다기 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조금씩 우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딱히 한호에 대한 생각 때문이라고는 여겨지진 않았지만 모든 일과에 활기찬 몰두 보다는 늘어진 내 가방 끈처럼 무겁게 처져있었다.
그래도 세월은 우리 같은 나이 어린 애들한테도 빗겨가는 법은 없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의 설을 맞은 때였다. 우리 동네 앞으로는 전라선 철도 길이 있었는데 바로 친구인 이수네 동네는 그 철도 길을 따라 가면 나오는 섬진강 변의 나룻멀이었다.
이수 또한 나 보다는 두 살 위의 친구였다. 그는 한호와는 달리 늘 말수가 적은 편이였고 있어도 없는 듯이 조용한 성품에 공부도 썩 잘했다. 그는 나랑은 한 분단에 속해서 학교에서는 늘 같이 생활하다시피 했는데 그 또한 집안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포기 해야 했다.
설 연휴가 있던 그 날은 그래도 날씨가 썩 푸근한 편이였다. 이수가 살고 있는 나룻멀 사람들 뿐 아니라 섬진강 건너 남원의 금지 주생 사람들까지 마치 소풍 객들처럼 읍내로 향하고 있었다. 십중팔구는 읍내에 있는 극장 구경을 가기 위함이었다.
이런 날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마을 껄렁이 형들은 몇몇이서 그 길목 하나를 진을 치고는 무슨 재미있는 거리라도 사냥할 것처럼 포진 해 있곤 했었다.
“야아, 봉덕이 유방 크네”
철길을 따라 걷던 무리의 처녀들은 그런 힐끔거리는 농지거리에서 얼른 벗어나고자 한 쪽으로 고개를 내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내 달리곤 했다.
그 때 나는 형들이 썼던 그 말들 중에 ‘유방’이란 말뜻을 몰랐었다. 그러고는 언젠가 내가 그 말 뜻을 알았을 때 느낄 수 있었던 내 상상 속의 유방이란 단어는 약간은 애로틱한 무엇으로 자리 하고 있었고 아울러 하나의 금지어로서 못박아져 있었다.
나는 그런 와중에서 이수란 친구를 조우 할 수 있었다.
졸업하고 처음으로 만난 그는 보다 성숙해 보였고, 나랑은 친구가 아니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듬직하게 변해 있었다.
“ 야, 오랬만이다. 어째 너 학교는 재밌냐?”
“별로…. 근디 너는 지금 어딨어?”
“남원 약구에서 일해”
나는 이수가 약국에서 일 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그 일이란 것에 대한 대강의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묻고 싶은 맘은 없어서 그렇구나 하고는 지나쳤는데 웬지 나랑은 훨씬 어른스럽게 비쳐진 이수랑은 별 말 할 것이 없었다. 아무튼 우리의 오랫만의 만남은 이렇게 나의 무심으로 별 의미 없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학년이 올라 가서도 나는 학교 생활에 재미를 별로 못 느꼈다. 공부에도 그리 관심이 없었고 한참 생기발랄할 나이에도 늘 어깨는 처져 있었다. 그 날도 나는 처진 어깨로 가방을 막 부리고는 반쯤 남긴 도시락을 빼 부엌으로 갔다 주려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너, 이수가 누구냐?”
“왜? 알아서 뭣허게”
나는 늘 집안에서의 대화에 약간의 신경질 적인 어투가 삐져 나오곤 했다.
“ 이수한테서 뭔 소포가 왔드라 너한테”
“어디?”
나는 어머니가 턱으로 가리키는 행랑 쪽 방에서 작은 소포 꾸러미를 뜯어 봤다.
부피는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 번 겹쳐진 포장 속으로는 둥글고 작은 프라스틱 연고통과 접어진 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안녕!
학교는 잘 다니냐?
전에 너를 봤더니 얼굴에 마른버즘이 많아서 우리 약국에 있는 연고를 보낸다.
자기 전에 바르고 자면 좋아진대.
잘 바르고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럼.
-- 남원에서 친구 이수가
나는 그 편지를 읽고는 그날 만났을 때 나의 행동에 대해 더없이 후회가 앞섰다. 워낙 표현을 잘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나는 왠지 이수랑의 그런 조우를 좀 서먹하게 여겼을 뿐이었음을 속 깊은 이수는 알고 있었다는 듯 편지 속에 그 모든 감정들이 녹아있었다.
이수는 그 뒤로도 항상 나보다도 앞선 마음 씀으로 나를 감동시키곤 했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서울로 올라갔다는 소리를 그 동네 사는 친구 공수한테 들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별다른 고맙다는 답장도 못 썼고 훌쩍 세월은 흘러 내가 대학에 다닐 때쯤 중앙시장에서 참기름 가계를 하고 있는 이수를 만나 볼 수 있었다.
가슴팍 넓은 사내
- 친구 김이수에게
어느 유행가 가락에서처럼
왕십리에 비가 내리면
해동 다방 송양과
한 번쯤 그 다방 구석진 자리에 앉아
헤픈 술잔도 나눴다 했지
넌, 내가 아직 철모를 생활 속을 거닐 때
그 낯설었을 중앙 시장 골목을
시래기에서 흐르고
때론 비릿한 이국의 생선에서 흘렀을
영 가시지 않은 상처 같은 진물을 밟으며
그리 세상을 익혀가고 있었지 - 그 시절.
메마른 포르노 같은 인정만
밤거리에 휘돌던 뒷골목
말라비틀어진 세상의 그늘을 동네삼아
넌 고소한, 세상에서 젤 향내 나는
참기름을 짜내고 있었지
종소리에 품은 한 어린 영혼의 울림처럼
가시지 않았을 젊은 날의 모진 인생을
깨 틀에 담고
세상에서 제일 진한 참기름을 짜내던 넌
어느 날 문득, 가슴팍 넓은 사내가 되어있었고
나약했던 나의 청춘 앞에
우람히 서 있는 널 볼 수 있었지
짓이겨진 깻묵 속의 향기가
왜 그리 그리운 떡밥이 되어
우리들을 네 곁에 묶어두는지를 알 수 있었지
첫댓글 이수가 어릴적에도 그렇게 인정이 많았구먼 참 멋진칭구여 구수한 참기름 향 보다도 이세상에서 제일 멋진칭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