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 규모의 자연발생적 대재앙 이후 이야기
대재앙 이후 이야기 (3)
과학소설에서 묘사되는, 인간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재앙의 성격은 20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천재지변보다는 인류가 자초한 위기 쪽으로 쏠리는 경향을 보인다. <유성 Meteor, 1979>1)과 <아마겟돈 Armageddon, 1998> 그리고 <딥 임팩트 Deep Impact, 1998> 같은 영화들이 20세기 후반에 나와 영화관객들의 이목을 끌어 모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러한 소재는 과학소설에서는 이미 반세기 이전에 우려먹은 구닥다리 아이템이다.
▲ <유성>은 일찍이 1970년대 말에 개봉되어 <아마겟돈>과 <딥 임팩트> 같은 외계천체와의 충돌로 인한 재난영화의 선구가 되었다. 이러한 소재의 이야기들은 특수효과 기술의 한계로 20세기 후반에야 모습을 드러냈지만 소설에서는 19세기 말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
인재(人災)가 아니라 지구촌 또는 태양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천문학적 규모의 자연재앙을 그린 인상적인 과학소설들은 까밀 플라마리옹과 H. G. 웰즈가 선구적인 작품들을 선보인 19세기 말부터 그 아류작들이 나온 20세기 초중반에 주로 발표되었다.
천재지변으로 인류가 멸망의 구렁텅이로 떠밀리는 과학소설들이 인재(人災)를 원인으로 하는 작품들에 비해 후대로 올수록 수가 적어지는 것은 작가들이 우주의 경이로움보다는 우리가 눈앞에 직면한 보다 현실적인 차원의 어리석음과 부조리를 적시(摘示)하는데 관심을 보이게 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2) 과학소설에서 외부 요인으로 인해 우리 세계가 천문학적 규모의 대재앙을 맞이하는 시나리오는 다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질 수 있으니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외계천체와 지구가 충돌하거나 지나치게 근접하는 경우 (1)
설사 직접 충돌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중력을 교란시킬 만큼 질량이 큰 외계천체가 지구에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되면 바다와 지각 판을 뒤흔들어 놓는 바람에 인류 전체가 아틀란티스 문명보다 더 파국적인 운명을 맞을 공산이 크다. 외계천체는 혜성과 소행성급에서부터 위성과 행성 그리고 항성에 이르기까지 작품마다 크기가 다양하다.
이러한 소재를 다룬 이야기들은 프랑스 천문학자 까밀 플라마리옹(Camille Flammarion)의 장편 <오메가, 세상의 마지막 나날 Omega, The Last Days of the Worlds, 1893>과 영국작가 H. G. 웰즈(Wells)의 단편 <항성 The Star, 1897> 같은 19세기말의 유럽작품들에서부터 미국작가 필립 와일리(Philip Wylie)와 에드윈 발머(Edwin Balme)의 장편 <세계들이 충돌할 때 When Worlds Collide, 1933>와 R. C. 쉐립(Sheriff)의 장편 <추락한 달 The Hopkins Manuscript, 1939>3), 프리츠 라이버(Fritz Leiber)의 장편 <떠돌이 행성 The Wanderer, 1964>, 래리 니븐(Larry Niven)과 제리 퍼낼(Jerry Pournelle)의 장편 <루시퍼의 해머 Lucifer's Hammer, 1977> 그리고 영국작가 아서 C. 클락의 <신의 망치 The Hammer of God, 1993> 같은 20세기 영미권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맥이 이어질 만큼 인기가 높다.
▲ 까밀 플라마리옹의 <오메가, 세상의 마지막 나날>은 지구와 혜성이 충돌하는 이야기 유형의 효시다. 25세기, 치명적인 일산화탄소를 잔뜩 품은 한 혜성이 지구와의 충돌궤도에 들어서자 대기와 바다가 교란되면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지표의 기온이 급락한다. 결국 인류문명을 위시하여 온 생태계가 위기에 처한다. ⓒHeart and Mind Publishing
<오메가, 세상의 마지막 나날>은 지구와 혜성이 충돌하는 이야기 유형의 효시라 할 수 있다. 25세기, 치명적인 일산화탄소를 잔뜩 품은 한 혜성이 지구와의 충돌궤도에 들어선다. 혜성이 지구에 가까이 다가오자 대기와 바다가 교란되면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지표의 기온이 급락하여 온 생태계가 위기에 처한다. 일각에서는 일찍이 이러한 위험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대비를 당부하지만 악덕 기업가의 사주를 받은 무지한 정부당국은 이러한 경고를 주식시장을 교란하고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불순분자의 소행이라 단정하고 수배령을 내린다.
마침내 혜성이 육안으로 보일만큼 접근하면서 사상 유례가 없는 태풍과 해일이 세상 곳곳을 덮치자 사람들은 기도밖에 할 수 없는 곤경에 놓인다. 다행히 혜성은 가까스로 지구를 비껴나간다. 프랑스의 저명한 천문학자 까밀 플라마리옹이 집필한 이 장편소설은 천문학적 규모의 천재지변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이러한 대파국이 초래한 다양한 정치적 철학적 여파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기성찰적인 사변소설 형식을 띤다.4) 따라서 막판에 소수이나마 우주로 대피하는 식의 편의적 설정은 등장하지 않으며, 인류는 지상에 남아 종말로 치닫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오메가, 세상의 마지막 나날>의 집필목적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소설 형식을 빌려 1890년대까지 연구된 우주론과 진화론에 관한 당대 최신 과학지식을 친근하게 전달하는데 있었다. 혜성 같은 외부 천체와 지구의 충돌이란 소재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대중영화 덕에 익숙하지만 고전과학이 급성장하는 신진과학에 자리를 내주던 시기의 사람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자가 쓴 소설이다 보니 문장이 건조하고 투박한 약점이 있긴 하지만5), 이 장편은 곧바로 20세기 들어 여러 작가들의 손에 의해 유사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게 될 후속작들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이 소설은 1931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아벨 강스(Abel Gance)에 의해 <세상의 종말 La Fin du monde>이란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 H. G. 웰즈의 단편소설 <항성>은 떠돌이 항성이 우리 태양계 안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다른 행성들은 물론이고 지구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면서 인류가 멸망을 향해 치닫는 이야기다. 이런 천문학적 규모의 재앙 이야기들은 인류가 얼마나 우주에서 왜소한 존재인가를 일깨움으로서 우리가 반목과 질시를 거두고 겸허한 마음으로 타인, 다른 집단, 다른 국가와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기를 넌지시 권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Ludek Marold
H. G. 웰즈의 단편 <항성>은 후발주자로서 차별화된 포인트를 찾으려 한 탓인지 까밀 플라마리옹의 혜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태양계에 무단 침입한 외계 천체의 덩치를 키워 놓았다. <항성>은 우리 태양계에 또 다른 항성(태양)이 뛰어들어 행성들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엎는 이야기다. 특히 이 와중에 가장 낭패를 보는 쪽은 인류를 포함하여 무수히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는 지구다.
어느 날 수수께끼의 항성이 외행성계로 들어와 해왕성과 목성을 차례로 먹어치우더니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 우리 태양과 무법자 태양 간의 상호 중력간섭 탓에 두 거대천체는 갈수록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지구가 바로 그 경로 사이에 끼어있다는 점이다. 낯선 항성과 가까워짐에 따라 지구의 지각과 대양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요동치는 바람에 인류 대부분이 멸종하고 문명이 종언을 고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달의 중력이 다가오던 항성의 궤도에 미세한 영향을 주는 바람에 지구는 이 무법자와의 충돌을 간신히 모면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극소수의 생존자들은 이제 두 개의 태양 빛 아래 옥토로 거듭난 그린란드에서 새로운 삶을 가꾸게 된다. 이 단편은 천체들의 변덕스런 운동에 비해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처럼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보여줌으로서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상대를 핍박하고 전쟁을 불사하는 작금의 인류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우쳐주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