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덥다. 몇 년 전에는 대구의 열대야 뉴스가 나라 전역에 보도된 적이 있는데, 단순히 온도 문제만 기사화한 것이 아니라 타지에 나가 사는 출향인들이 대구의 친인척이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무사하냐?"고 확인(?)했다는 내용까지 밝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대구는 덥다.
그런데 문제는, 타지인들이 "대구는 정말 더워!" 하고 말할 때 그 화두 속에는 온도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말의 행간에는 다른 지역이 결코 추종할 수 없는 대구 지역의 강력하고 완고한 '보수' 기질을 은근히 질타하는 어감이 깔려 있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언어나 음식문화도 마찬가지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진 'ㅸ(순경음비읍)'을 아직도 쓰는 곳이 바로 대구이다. "더워라"를 "더ㅸㅓ라" 로, ""기워라"를 "기ㅸㅓ라"로 쓴다.
음식 중에는 '생고기'가 대구의 보수성을 말해주는 대표 선수이다. 동물을 잡아 날것으로 바로 먹는 행위는 아직 불이 발명되지 않았던 아득한 옛날의 고기 섭취 방법인데, 대구에서는 지금도 쇠고기의 일부 부위를 생으로 그냥 씹어 삼킨다.
갤러리상(相), 그림으로 "대구를 시원하게"
중구 봉산문화회관 인근에 있는 갤러리상이 그림으로 대구를 식히겠다고 나섰다. 화가 12명을 초대하여 '여름 향기전'을 개최한 것. 화가 1인당 2점씩 신작을 내놓아 모두 24점의 작품이 갤러리에 시원하게 걸려 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애호가들의 발걸음 소리가 개관 직후인 아침부터 드물지 않게 들려온다.
갤러리상의 이상숙 대표는 "봄이 유난히 짧고 그 대신 여름은 유난히 긴 곳이 대구입니다. 대구시민들에게 정서적으로나마 시원한 여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초대전을 준비했습니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6월초에 12분의 작가님들을 모시고 24점의 시원한 그림을 시민들께 선사하고자 합니다"하고 말한다.
초대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고찬용, 권유미, 김광한, 김동진, 김정기, 김종언, 박병구, 윤장렬, 이영철, 이종갑, 정동철, 조융일 이렇게 열두 분이다. 대구미술협회장, 대구사생회 회장, 대구수채화아카데미대회장, 대구미술대전 초대작가,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 대구교대 명예교수, 대구예대 교수 등의 경력과, 개인전 20회, 16회, 11회, 각종 초대전 300여 회 등 이력도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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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갑 작 '숲- 안개' (기사에 올려진 그림들은 카메라로 촬영했거나, 리플릿 수록분을 스캔한 것이므로 실제 작품과는 같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진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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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상이 기획한 <여름향기 초대전>에 출품된 작품들 - (위 왼쪽부터) 고찬용 권유미 (아래 왼쪽부터) 정동철 김광한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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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안으로 들어서면 과연 '여름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온다. 초여름을 상징하는 참외의 노오란 내음이 코끝을 진동하는가 하면(김광한), 그 무렵 꽃의 여왕인 붉은 장미가 초록빛 풀밭 속에 곱게 피어 있다(윤장렬). 여름 이미지 그 자체인 푸른 바다와 하얀 물보라가 방문객을 시원하게 맞이하는 것도 물론이다(김정기).
뽀얗게 물안개가 자욱한 숲길의 운치는 보기만 해도 온몸에 찬물이 내리는 것만 같다(이종갑). 그리고 짙은 녹음을 뽐내는 가야산 자락(정동철), 언제나 푸른 소나무 군상(조융일), 산으로 가는 길(고찬용), 곧게 자란 버드나무와 맑은 호수(김동진), 동화 속 세상을 고스란히 재현해 보여주는 남해의 풍경(박병구)도 말 그대로 여름의 향기이다.
그뿐이 아니다. 행여나 그것으로도 덜 시원하다는 분을 위해 지난 밤에는 눈까지 내렸다(김종언). 왜 여름향기 전에 눈 내리는 겨울밤 풍경인가. 이것이 바로 여름의 정신적 기운이기 때문이다. 청나라 시인 동옥(童鈺)이 시 '畵梅(화매)'에서 보여준 절창 '我是人間避熱人(아시인간피열인)'을 떠올려 보자는 말이다.
해마다 한여름이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납량특집이라는 것을 내보낸다. 주로 귀신 이야기이다. 영화도 여름철만 되면 귀신들의 독무대가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수의 피서법이다.
고수의 피서법은 적어도 '지독한 폭염에 먼지가 풀풀 날리는 한여름,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 그림을 그리노라면 소매 끝에 찬기운이 넘쳐난다'는 동옥의 노래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렇게 더위를 이기는 사람이야말로 '더위를 이기는 인간 중의 인간' 아니겠는가.
그림으로 무더위를 물리치겠는 기획을 한 갤러리상이나, 전시장의 그림들을 보며 혹서를 극복하겠다는 시민들이나, 한결같이 진정한 '我是人間避熱人'이라 할 만하다.
6월 17일부터 26일까지 열흘간 열리는 '여름향기전', 서둘러 한번 감상하면 올 여름 무더위를 앞두고 좋은 보약 한 재를 먹는 효과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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