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리(校洞里)는조선조 제22대 정조(正祖)때(1777-1800) 언양현(彦陽縣) 중남면(中南面) 덕천리(德泉里)와 평지리(坪地里)에 속했다가 제26대 고종때 언양군(彦陽郡)에 소속되었다.
일제(日帝)시대 1911년 행정구역개편 때 이지역을 수남(水南),교동(校洞), 평리(平里)란 세행정(行政)리.동(李.洞)으로 개편하였다가 1914년세개 동(洞)을 통합하여 교동리(校洞里)라 하였다.
이때 언양군(彦陽郡)이 울산군(蔚山郡)으로 병합(倂合)되어 언양면(彦陽面)이 되므로 울산군 영역(領域)에 들어갔다.
1932년 10월31일 경상남도령(慶尙南道令) 제17호로 이듬해 1월 1일부로 중남면(中南面)과 삼동면(三同面)을 합하여 삼남면(三南面)이라하자 이때부터 삼남면((三南面)에소속되었다. 현재 교동리(校洞里)에는 상평(上平), 중평(中平), 봉화(烽火), 평리(平里),수남(水南), 향교(鄕校), 벌장(閥場), 대진(大進), 태봉(太奉), 수정(水晶)의 10개 행정리(行政里)가 있다.
교동(校洞)의 이명(里名)은 향교(鄕校)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이런 마을 이름은 전국에 걸쳐 있다.
지금 본면 교동리에 있는 언양향교의 창건은 언제 지어 졌는지 알 수 없으나 네번 짓고 세번 옮긴 복잡한 과정을 밟고 있다. 헌산현(지금의 언양초등학교부지)의 북쪽 2리(里), 반월산(半月山:밤버든) 아래에 있었다가 현(縣)의 남쪽 3리 떨어진 덕천(德泉)인 지금의 곳으로 옮겨지었다. 세번째로 현의 서쪽 화장산(花藏山) 아래, 지금의 언양읍 송대리 성당 자리에 옮겨지었다. 거기서 네번째로 덕천(德川)에 옮겨지으니 지금의 향교자리로 두번이나 옮긴 셈이다. 결국 언양향교는 4번 짓고 3번 옮긴(4建3遷) 복잡한 변천사를 보이고 있다. 언양읍의 성당마을을 구교동이라 한다. 이와같이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한다.
상평마을
상평마을은 순수농가는 없고 도시의 성격을 띠고 발전하고 있다. 교동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이 끝나 도시 주거지역상가로 변모하고 있는 모습이다. 2007년 말 현재로 세대수 303호, 인구 807명에 달하고 있다.
국도 35호선상에 있는 남천교가 당초에는 일제시대 때 시공되었으나, 사라호태풍으로 인하여 유실되었다. 홍수 때마다 범람하여 교통이 두절되기 일수였다. 다리의 양 끝 평리에는 물문이 없고 언양 쪽에는 물문이 있어 '물문걸'이라 하였다.
봉화마을
봉화마을은 교동구획정리지구 내 주공아파트 신축으로 700여 세대가 증가하여 2005년 9월 15일자로 기존 상평마을로부터 분동되어 2007년 말 현재 세대수 703호, 인구 1,600명에 달하고 있다. 봉화라는 이름은 주공아파트 뒤편에 봉화산이 자리잡아 봉화마을이 되었다.
수남마을
수남부락은 남천(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수남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조 정조 때에는 덕천(德川)이라 하였다. 덕천은 역(驛)이 있던 곳이기에 일찍이 알려져 왔다. 고려 때에는 덕천역이 금주도(金州道:경주)에 속하였고 조선조에 와서는 황산도(黃山道:양산물금역)에 소속된 역이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덕천(德川)을 가리켜 속되게 천(泉)으로 그릇되게 쓴다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덕천(德川)임을 밝힌 것이다. 수남 마을은 역이있었던 마을이라 마을 안길을 한길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 때는 전국의 도로를 대중소로 삼분하였다. 경주의 금주도(金州道:경주)에서 덕천역을 거쳐 황산도(黃山道:양산물금)역까지 구간은 대로(大路)에 해당되었다.
덕천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지금의 작천한증막(일제시 일인학교) 뒤 진장으로 가는 길의 모서리 집(교동리479-1번지) 부근이다. 역부지를 일본인 가와가미(川上)가 상점을 경영하다가 광복을 맞아 국유로 귀속된 땅이다. 역에서 수남마을로 통하는 중앙로가 나있었던 길을 수남부락에서는 지금도 한길(大路)라 부르고 있다.
명승지 작괘천, 작천정이 있는 마을이다.
향교마을
향교 마을은 우리면 내에서 단 하나뿐인 간월산을 할아버지산으로 하는 봉화산의 바로 아래 있는 마을이다. 원래 수남행정마을의 자연마을이다가 분동되어 '향교'마을이 되었다. 옛날 언양현의 향교가 본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향교라 불린다. 수남마을은 중남초등학교학군이고, 향교 마을은 언양초등학교 학군에 속해 있어 분동되었다.
봉화산 꼭대기에는 조선조 때 통신 수단으로 쓰였던 봉화대의 석축물이 남아 있다. 봉화대 그 자리에 텔레비전 난시청지구 해소를 위해 KBS 방송국중계탑이 설치되어 있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교동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봉화산 세 손가락이 잘려 나가 혐오스러운 모습을 자아내고, 문전옥답이 택지로 변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사초는 뭐라고 써야하나.
언양향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돼 있으며, 향교에 보관되어온 언양현 호적대장은 지방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돼 있다.
벌장마을
벌장 마을은 수남행정마을 제11반이었다가 인구 증가로 1990년 9월 1일부로 분동. ‘벌장’이란 행정 마을이 되었다. 벌(閥)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므로 벌장마을이라 한다. 벌(閥)은 들보다 더넓은 들을 의미하는 뜻이 있다.
이 마을에는 1934년 최경택, 1936년 서정식, 1938년 김재도가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박곤수가 농장경영과 동시 중남농지수리조합 이사(理事)로 역임하였으며, 1990년 벌장이 행정동으로 분동되고 마을 발전에 기여하였다. 박곤수의 농장을 안덕기가 인수하여 농장 2만여 평에 과수원을 조성하여 사과, 배단지를일구었다. 또한 대대적인 소, 돼지 목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자유당시절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마을을 빛내기도 하였다. 전작물로는 담배, 삼, 고구마를 많이 생산하여 식량으로 대용했다고 한다.
현 서석원의 창고터에 디딜방아간이 있어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진아파트 터에 남천산업 PP포대 공장이 1973년에 입주하여 종업원 300여명 규모로 운영하다가 1991년에 폐업하였다.
안덕기 농장 토지는 일제시 일본인 가와가미(川上)의 소유였으나 광복과 더불어 국유로 환원된 것이다. 여러 사람 소유를 거쳐 지금 소유자는 ㈜농심가 메가마트로 1997년 7월 23일 개장하여 영업 중에 있다.
대신마을
2007년 11월 29일부로 벌장마을에서 분동되어 2007년 말 현재 세대수 280호, 인구 947명의 신설 행정마을이다.
태봉마을
벌장마을로부터 대진마을과 더불어 2007년 11월 29일부로 분동되었다. 3개반으로 구성되었으며, 364세대, 1,072명으로 구성된 대단위 아파트 마을이다.
수정마을
수정마을은 옥산영역에 있는 자연마을로 교동리에 속하고, 고장산영역에 있는 면소재지가 소가천천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다. 면소재지 마을은 국도35호선을 중심으로 농협, 파출소가 있는 서편은 가천리, 길 아래 부락 측 학교, 면사무소, 보건소가 있는 부락은 신화리에 속한다. 이 세 곳의 법정리가 걸쳐있는 마을이 '수정' 행정마을을 이루고 있다.
면사무소, 보건소, 배밭 및 산80-10번지 일대가 황씨 관장인(冠匠人:갓쟁이)의 소유였다하며, 신화리1485번지, 산81-13번지와 초등학교부지 일부, 농협저온저장고부지 일대가 본면 면장을 지낸 김효동의 소유였는데 학교에 희사하였다고 전해온다. 중남초등학교를 창립할 당시 마산에 야학당이 있었는데 초등학교(심상소학교)가 생기자 그 재산을 학교설립에 기부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근래에 와서 새진흥아파트, 부일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1,540세대 규모의 장백공공임대아파트가 준공단계에서 IMF 여파로 부도가 나자 공사가 중단 상태에 놓여 있다.
'작알'은 유(兪)씨, 김(金)씨, 권(權)씨, 박(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옥산의 자수정은 폐광된 동굴을 이용하여 '자수정동굴의 나라'로 개발하여 관광사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울주군 삼남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