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제1회 "행복한 암환자, 가족 수기공모" 가족부문 우수상
아버지의 그리운 손
(조금 더 힘내세요)
□ 건강에 무관심한 세월
칠십 평생을 농사일로 땀 흘리며 손 마를 날 없이 아홉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시며 남은 것은 얼굴에 생긴 깊이 페인 주름과,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해진 손바닥, 검은머리보다 많아진 하얀 머리카락 이었습니다.
무뚝뚝하고 호랑이 같았던 아버지셨지만 그래도 속정은 깊은 분이셨습니다.
몸무게가 조금씩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줄어들었고, 평소 식사량이 많지 않았기에 밥맛이 없다고 말씀하셔도 무심히 지나쳐 버렸고, 콜록콜록 기침을 해도 하루에 한 갑씩 피우던 담배 때문이려니, 몸이 나른하고 피곤해도 농사일로 피곤하려니 하며, 열이 있어도 감기 때문이려니 하고 감기치료만 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살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며, 바쁜 농사일로 건강검진 한번 제대로 받은 적 없는 건강에는 무관심한 세월이었습니다.
□ 몸에서 자라고 있던 암
체중이 줄고 미열이 있어 혹시나 하고 객담검사를 해도 정상이고, 혈당검사를 해도 정상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되는 기침이 의심스러워 2000년 3월 내과에 모시고 가서 증상을 이야기 하니 엑스선 촬영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검사결과 이상이 없다고 하여 안심하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2000년 5월 아버지의 칠순생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엄마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막내야 너희 아버지가 많이 아프신 것 같다” “목에서 피가 넘어왔다” 라며 전화를 하셨습니다.
공주의료원에 모시고 가서 진찰을 받고 엑스선 촬영과 CT촬영을 하였습니다.
의사선생님은 폐암이라고 설명하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진료소견서를 써 주셨습니다.
충남대학교병원에 갔을때 그때가 마침 의약분업을 시작하려는 때여서 의사들의 진료 휴진으로 검사일이 늦어져 가족들 모두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답니다.
다시 엑스선 촬영을 하고, CT촬영, 조직검사 결과 폐암3B(비소세포폐암-편평상피세포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6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오빠와 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동안 고생만 하시고 이제는 조금 편안해질 연세가 되셨는데 말입니다.
건강검진 한번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고,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자식들도 다 장성하여 결혼하고 손주들 재롱잔치에 한참 즐거우셔야 하는데 ,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수술하기는 어렵고 항암화학요법과 방사선 요법 시행 후 종양의 크기가 작아지면 수술을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 암과의 전쟁 - 가족들의 관심
진단을 받고 아버지께 어떻게 설명 드려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 상의를 한 결과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의사 선생님의 치료에 따르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암이라는 말씀을 들으시는 순간 당신의 병을 걱정하는 대신 89살 할머니가 마음 아파하실까봐 걱정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입원과 퇴원생활의 반복, 항암화학요법, 방사선요법 등은 아버지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아버지와 우리가족 모두는 암과의 전쟁에서 이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병원에 가셔서 아버지의 입맛에 맞는 음식과 간호를 하였고 가족들은 집에 계신 연로하신 할머니를 보살펴 드리며, 교대로 병원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하였습니다.
병원치료를 받고 오시면 며칠씩 아무것도 못 드시고, 물만 먹어도 토하시고, 식사를 조금씩 하기 시작하면 또 병원에 갈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퇴원해서 집에 오시면 식사를 못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정맥주사를 준비했고, 큰올케는 뚝배기에 삼계탕 뽀글뽀글 끊여 드리고, 서울 사는 큰언니는 미숫가루와 복숭아 통조림을 직접 만들어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드시게 하려고 모두들 무진 애를 썼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 베개며 이불은 온통 머리카락 투성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가보니 밤송이 머리가 되어 있는 아버지를 보고 뒤돌아서서 속으로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낮에는 농사일로 밤에는 아버지 병간호에 잠을 못 이루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항암치료 받으시고 집에 오시면 89살 연로하신 할머니께서는 지팡이를 짚고 부엌에 가셔서 손수 숭늉을 만들었고,
아버지께서 힘들어하시는 걸 보면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니 에비가 많이 힘든가 보다” “니 에비 어떡한다냐” 하시면서요.
그렇게 하기를 7차례, 젊은 사람도 견디기 힘든 항암화학요법을 아버지는 모두 마치셨고,
효과도 좋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리고 몸에 빠알간 선을 그려가며 방사선 치료도 모두 받으셨습니다.
□ 또 한번의 좌절
항암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를 받으신 다음 수술을 하려고 검사를 실시하였는데 한쪽 폐를 잘라내면 정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폐기능이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또 한번 좌절하였습니다.
아버지께 설명을 드리고 주치의의 결정에 따르고 수술은 하지 못하고 퇴원하였습니다.
평소에 워낙 부지런하고 하루도 누워서 생활하시는 분이 아니었기에, 수술하고 누워서만 생활하고 싶지 않으시다며 퇴원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 후 6개월에 한번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면 주치의선생님도 아버지의 상태를 보며 놀라워했고 종양의 병기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우리가족의 8년 투병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 8년의 투병생활
8년 동안의 투병생활은 정말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지루한 싸움이었지만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의지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병을 이겨 낼 수 있다는 믿음과 할머니께 불효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결심, 민간요법에 현혹되지 않고 의료진의 말을 믿고 그대로 따른 덕분인 것 같습니다.
워낙 부지런한 분이셨지만 퇴원 후에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 농사일을 틈틈이 도왔고 신선한 공기 마시며 아침 저녁으로 동네를 한바퀴씩 걸었습니다.
운동을 하면 기분도 좋아지시고 식욕도 좋아지신다고...
하루 1갑도 모자랐던 담배는 암진단을 받고 끊어 버렸고, 좋아했던 술은 입에 대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폐암 때문에 오빠들 모두가 금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도 마른 편이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체중이 줄어들었고, 주기적으로 식욕부진, 변비, 설사, 대상포진 등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고른 영양섭취를 위해 어머니께서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방금 먹고 싶다고 해서 준비해서 드리면 하나도 드시지 않는 다며 정말 속이 상한다고 우울해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봄이면 쑥을 뜯어 손수 떡을 만들어 조금씩 냉동실에 보관하였다가 찾으실 때마다 드시게 했고,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자연식을 간식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우유, 요구르트, 베지밀 등 유제품과 사과, 토마토, 바나나 등 과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한 번에 많이 드시지는 못했지만 식사와 식사사이에 간식을 드시도록 했고, 아무것도 드시지
못할 때는 시판중인 암환자 식이도 준비하여 따뜻하게 데워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대로 시골집을 방문하여 아버지와 함께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손자들의 재롱을 보면 즐거워하시고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하면 맛있어 보인다며
조금 더 드셨습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면 가까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며 그럴 때마가 가족들이 교대로 병원에서 아버지와 함께 했습니다.
2006년 정기진찰에서 병소의 크기가 커져 다시 항암제를 먹기 시작하였으나 입안은 물론이고 머릿속, 온몸에 발진이 생겼고, 너무 힘드시다며 2개월 정도 약을 복용하고 중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찾아와 괴롭히는 진짜 범인은 통증이라는 정말로 나쁜 놈 이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불면증에 걸리고 식욕을 더 떨어뜨렸으며 우리 가족들의 생활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공주 의료원을 찾아 진료를 받고 마약성 진통제 처방받아 복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오래 기간동안 약을 먹으면 나중에는 통증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통증이 있을 때만 약을 복용하여 한참을 통증에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의사선생님의 설명으로 아침 저녁으로 복용하면서 통증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약의 용량도 처음보다 늘었습니다.
암환자에게 통증은 정말로 큰 고통입니다.
암환자에게 통증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만 된다면 말기 암 환자들의 행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아버지께 드리는 싶은 글
아버지
시골에서 자라고 사랑한다는 말에 익숙하지가 않아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외칩니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버지 당신을 존경합니다.
어느날 아버지와 함께 자고 싶은 마음에 손녀딸과 막내딸인 제가 아버지 옆에서 잠을 청했지요.
가끔은 쿨럭쿨럭 기침도 하시고 쉭쉭 숨소리가 커서 걱정이 되어 잠을 못 이루지 있는데,
“왜 이불도 안 덮고 자누” 하시면서
아버지가 살며시 다가와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속으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조금만 더 힘내세요.
아버지가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시던 막내손자 첫돌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예쁜 막내손자도 할아버지를 보고 방긋 웃을 거예요.
막내손자 무럭무럭 예쁘게 커가는 모습도 지켜보셔야죠.
아침 저녁으로 논에 물꼬 보러 다니셨는데 농사지은 맛있는 쌀 수확해서 매년 연례행사인 큰 딸네, 작은 딸네 한가마 씩 부치고, 서울 사는 사돈댁에도 보내고 하셔야지요.
예전처럼은 일을 못해 아버지의 손은 보드랍고 부드러워 졌지만 저는 8년 전의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하고 거칠었던 아버지의 건강한 손이 정말 그립습니다.
□ 모두 힘내세요
무섭다는 암과 싸워온 8년
아버지의 투병의지에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치열한 전쟁을 치루고 계신 아버지 조금 더 힘내세요.
그리고 오랜기간 옆에서 아버지의 힘이 되어드리는 어머니 조금 더 힘내세요.
우리가 아버지를 외롭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지치고 힘드셔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짜증도 많이 늘어 어머니와 우리들도 가끔은 힘들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함께 있어 우리 가족은 행복합니다.
아버지의 투병생활 동안 가족들의 화합과 단결된 힘이 지금까지 아버지를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환자의 의지와 가족들의 관심만이 암환자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큰 힘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를 위해 애써주시는 분들과 우리가족 모두 다시 한번 힘내세요.
아버지가 통증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통증관리에 신경써주시는 공주의료원 담당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국가에서에서 지원하고 있는 폐암환자 치료비도 투병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암환자들이 통증 없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시기 바라며 모든 암환자 여러분 힘내세요. 그리고 암과 싸워 이기세요.
-----------------------------------------------------------------------------------------------------------------------
2007년 12월 24일 크리스 마스 이브에 홍할아버님 환자분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나서, 오늘 의료원으로 방문하신 홍 할아버님
따님과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응급실 한켠에서 잠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아버님, 하늘에서는 이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written by cancernews 20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