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고
▶ 책 줄거리
심영빈, 한광은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둘 다 의사가 되겠다는 희망을 표력한다. 그날, 그들의 동창생인 유현금은 의사 마누라가 되겠다는 농담적인 청혼을 한다. 심영빈과 한광은 그들의 소원대로 둘 다 의사가 된다. 영빈은 결혼할 때까지 이따금씩 유현금의 농담 같았던 청혼을 떠올리며 그녀의 소식을 궁금해 하지만 그녀의 소식은 알 수가 없다.
한광은 부유한 병원 원장의 아들로 태어나 가계를 이어 곧바로 유능한 산부인과를 개업할 수 있었지만, 어릴 적 부정공직자로 해고되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영빈은 인턴, 레지던트를 거치면서 종합병원의 유능한 내과의사가 된다.
영빈의 동생인 영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잉태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태어난 유복자(遺腹子)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영묘가 태어난 것을 수치스러워 했다.
영묘는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공부를 준비하다가 재벌가의 맏아들인 송서방과 결혼을 한다. 송서방은 폐암말기인 선암에 걸린다. 하지만 송씨 가문에서는 송서방에게 그가 죽기 전까지 병명을 알리지 못하게 만류한다. 영빈은 송서방이 죽기 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의 생각은 밝히지 못한다. 나중에 영빈과 영묘는 송씨 가문의 그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송서방이 그의 처자식에게 유언할 기회를 남겨두지 못하게 하여 영묘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게 하려고 한 계획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빈은 어느 날, 그의 병원을 찾아온 현금과 재회를 한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할 때 꽤 큰 재산을 물려받았고, 그 돈을 잘 활용하여 경제적으론 어려움이 없는 유복한 이혼녀였다. 그들은 곧 정사를 나누는 사이까지 발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애정행각은 영빈의 처가 늦둥이를 배면서 갈라서게 된다. 유현금 역시 영빈의 애를 낳으려고 한광의 산부인과를 들락날락 하다가 늦둥이 아들을 낳으려는 영빈의 처와 친해지게 되고, 그러다가 한광으로 인해 영빈의 처의 정체를 알게 된 현금은 영빈과 헤어지게 된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영빈의 형, 영준이 모교에 100만 달러라는 거금을 희사하면서 한국에 나타난다. 영준의 계획대로 영묘와 그의 아들 둘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영빈은 치킨박이라는 사람의 죽음을 접하게 된다. 치킨 박은 폐암 초기의 환자로 수술을 하면 충분히 완치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암’이라는 사실에 지레 겁을 먹은 그는 자살을 하고 만다.
▶ 책을 읽고서
조금은 두서없는 글이지만 이 책은 몇 가지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이다.
첫 번째, 작가는 독자들에게 남아선호사상에 대해서 명제를 던져준다. 송서방이 죽었을 때, 결혼한 지 3년도 되지 못한 딸을 가진 영묘의 모친은 사돈집에 아들 잡아먹은 며느리를 둔 엄마라는 죄의식을 나타낸다. 송서방은 송씨 가문의 집안 내력인 ‘폐암’으로 사망했음에도 영묘의 모친은 딸 가진 어미의 죄의식을 갖는 것이다. 또한 딸만 둘을 둔 영빈은 아들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영빈의 처는 마흔이 넘어 아들을 낳겠다고 늦둥이를 갖는다. 그는 영빈의 친구인 한광의 산부인과에 드나들며 아들을 낳기 전, 벌써 아기를 두 번씩이나 지운 상태였다. 영빈의 처는 영빈의 모친이 영묘가 남편을 사별하고 시댁에서 괄세를 받는 것을 보고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말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남아선호사상, 또는 남존여비 사상은 과연 누가 만드는 것인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남자들에게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 여자들이 과연 아들을 원하는가, 딸을 원하는가. 어쩌면 남아선호 사상이라든가 남성우월주의는 여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여기서 여류소설가인 박완서의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다. 그녀 역시 남성 소설가에 못지않게 찬란한 필력을 자랑하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한 집안의 시어머니, 한 집안의 어머니로서 역시 딸을 둔 어머니로서보다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자랑스러움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두 번째, 저자는 이 작품에서 임종을 맞은 사람들의 마지막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서 고뇌하고 있다. 임종을 맞은 사람들이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와 마지막 남은 시간동안만이라도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하는가 작가는 말하고 싶어한다.
영묘의 남편인 송서방이 폐암으로 죽어갈 때, 영빈은 송서방에게 그의 병명을 말하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의 병명을 ‘결핵’으로 축소하여 극구 알리려들지 않는다. 결국 송서방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죽는지도 모르고, 가족들에게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죽게된다.
하지만 치킨 박의 죽음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그는 치킨 집을 하는 자영업자로서 상가 주민들과 건강검진을 받고 그가 폐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 종합병원 내과의사인 영빈에게 찾아온다. 송서방의 전철을 밟았던 영빈은 이번엔 치킨 박에게 적절하게 설명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병에 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그의 병은 폐암 초기 증세로서 수술만 하면 간단히 고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치킨 박은 며칠 째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지하실 보일러실에서 목을 매단 시체로 발견이 된다. 돈을 모으는 데만 급급했던 어리숙한 치킨 박은 영빈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고 암에 걸리면 집안 재산 다 말아먹고 결국엔 처자식 거리에 내몰게 해놓고 죽게 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믿고, 처자식에게 고생을 남겨주지 않기 위해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작가의 고민이 많이 나타나 있다. 작가는 송서방의 죽음에서 과연 인간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의 고민을 안겨준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죽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본인 스스로 자기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부르짖었던 작가는 치킨 박의 죽음에서는 정반대의 질문을 던져준다. 인간이란 알아야 할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적절히 조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역효과가 나타나는 사람이 있듯이 송서방과 치킨박의 죽음에서 작가는 극명한 대조를 나타내며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이 문제는 송서방과 치킨박의 경우처럼 너무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내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영빈이 치킨 박에게 설명을 해주었듯이 송서방에게도 자기 삶을 정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남들만큼 배웠다는 자의식이 앞서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치킨 박처럼 하루 하루를 진지하게 살기만 했던 사람들에게 별것 아닌 병을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허무함은 상상 이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쉽게 단언을 내릴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 마지막에
이 책은 영빈과 한광이 초등학교 시절 동창이었던 유현금의 농담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되어 영빈과 현금, 영묘와 영준의 이야기들이 삽화처럼 삽입되면서 소설이 전개된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삽화를 그려내다 보니 시간적, 공간적 이동성이 심하다. 따라서 이러한 소설은 진부함은 덜 하지만, 이야기의 차분함이라는 면에서는 떨어진다. 한마디로 정신이 산란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내가 이 책을 text형식의 PDA를 통하여 읽은 탓도 있겠지만
2005년 9월 16일
오금동 빗새 서재에서
이 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