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선생. 이것만은 분명히 합시다. 우린 미전향한 게 아니라 비전향한 겁니다.”
서울 관악구 봉천6동 `만남의 집'에서 만난 장기수 김석형(87)씨는 자신을 `미전향 장기수'로 잘못 부른 기자의 오해를 이렇게 정정했다.
“미전향이란 언젠가는 전향해야될 대상이라는 뜻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가치를 죽는 날까지 주체적으로 견지할 겁니다.”
그의 말에선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당당히 맞섰노라'는 형형한 자부가 배어나는 듯 했다. 하지만 그가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댓가는 컸다.
“70년대 초반 전향서 작성을 거부하다 모진 몽둥이질에 허리뼈를 크게 다쳤습니다. 나중에 보니 3번과 4번 요추 사이에 디스크가 생겼다더군요.” 때때로 엄습해오는 통증과 구부정한 허리에 지팡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의 괴로움 이상으로 견디기 힘든 것은 가족과 생이별한채 혼자 보내야하는 노년의 쓸쓸함이다.
그는 지난 61년 5.16쿠데타 직후 남으로 왔다. 평북 박천 출신인 그는 당시 평양국제여행사에서 `복무'하던 엘리트 당원이었다. “집사람과 4남2녀를 두고 왔지요. 당시 스물다섯이던 큰아들 광정은 군에 가 있었고, 막내는 3살배기였습니다. 중국 인민군 노래를 부르며 제법 재롱을 떨곤 했는데, 엄마 등에 업혀 `빠이빠이'한 게 마지막이었지요.”
임진강의 급류를 힘겹게 넘어 서울로 잠입한 것도 잠깐, 그는 62년 12월께 중앙정보부에 검거됐다. 그 뒤 91년 12월24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까지 30여년을 차가운 감방에서 보내야 했다.
“서대문구치소와 광주, 대전교도소 등을 옮겨다니는 가운데 어느덧 백발에 주름투성이가 됐더군요. 한 세상 용케 버텨온 세월이었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는 현재 남한에 호적과 주민등록증이 없는 무등록거주자 신분으로 살고 있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겠다는 희망을 놓는 것 같아” 북의 호적을 포기한다는 각서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만남의 집' 최연장자인 이종씨는 올해 아흔을 맞는다. 그는 김석형씨와 달리 남쪽 출신이다.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기간 빨치산활동을 하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
“일제 때 소작쟁의를 주도했다고 나를 잡아가뒀던 일본 앞잡이가 해방 뒤 오히려 경찰서장으로 승진해 나를 다시 붙잡아가두는 현실을 그냥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9살 때 남편을 여읜 편모의 유일한 의지처였던 그가 51년 기어이 북으로 간 이유였다.
그 북행길에서 그는 굶주림과 추위로 아들 하나를 잃었다. 부인과 남은 두 아들과 꾸렸던 북에서의 짧은 가정생활도 곧 끝났다. 53년 휴전 직후 통일전선 재건임무를 띠고 남파된 것이다. 59년 검거된 그는 89년에야 창살 틈으로 새어드는 토막난 햇살이 아닌 한줄기 온전한 햇살을 느껴볼 수 있었다.
“돌아보면 허망합니다. 가족들 다 잃어버리고 외롭게 고문당하면서 90평생을 보냈습니다. 남은 두 아이 사진은 커녕 너무 오랜 세월에 기억조차 희미합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편지조차 주고받지 못하는 신세엔 변함이 없습니다.”
한국전쟁 50주년을 앞둔 2000년 5월의 한반도. 하지만 한 허리를 가로지르는 분단의 철조망은 의연히 버티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지만, 한국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아물지않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그 현재진행형의 상흔이 얼마나 깊숙하게 패인 것인지를 존재 그 자체만으로 증거해준다.
젊다고 해야 60대 후반, 이들의 대부분은 인생의 황혼을 맞은 70~80대들이다. 하지만 당장 눈을 감더라도 돌아가 묻힐 고향이 없다. 남쪽에서 태어난 이들도 대개는 처자식을 북에 두고왔다. 이들 때문에 핍박을 당한 남쪽의 친지들은 아예 이들을 잊고 외면한 지 오래다. 수십년의 세월을 시대정신에 따라 통일을 위해 바쳤다는 자부는 온전히 그들만의 것일 뿐, 남쪽에서 그들은 늙어서도 여전히 불온한 체제의 위협세력이자,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다. 북쪽에서도 그들은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해줄 대상으로나 인식될 따름이다.
이 때문에 때가 되면 오가는 남과 북의 송환 논란도 이들에겐 결코 반갑지 않은 정치적 흥정거리로 비칠 때가 많다. 충남 출신인 만남의 집 총무 홍경선(76)씨는 태백산 지역에서 빨치산활동을 하다 북으로 갔던 이다. 5남매와 부인을 두고 다시 남으로 내려와 가족과는 끝내 소식이 끊긴 그지만, “양쪽 모두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북으로 보내준다면 모를까, 조건달아 내 평생의 대의에 손상가는 흥정은 거부하겠다”는 뜻만은 단호했다.
지난해 말 손성모(71)씨와 신광수(69)씨가 출소하면서 공식적으론 `미전향 공산주의자'라 불리는 구금된 비전향 장기수는 더 이상 남한 땅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창살로 둘러쳐진 0.7평의 독거방에서 벗어났다뿐, 고향과 가족 곁에 다다를 수 없는 그들의 닫힌 처지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천주교 인권위원회 등 30여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만든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 권오헌 상임대표는 “비전향 장기수들도 분단으로 생긴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의 희생양인만큼 원하는 사람은 인도적 차원에서 조건없는 송환을 실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원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