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綿花始培 事蹟碑 1965년 5월 일립(日立) 안동 김순동 삼가 지음
사람이 만물의 영장 됨은 오직 충(忠)과 효(孝)를 알음으로써이다. 집에서는 어버이를 섬김에 지성을 다하며, 밖으로 벼슬길에 오름에 맡은 바 직분에 힘쓰고, 위난(危難)에 처하면 한몸을 잊고 의(義)에 나가니 이는 아무에게나 기할 수 없는 바이다. 또한 천에 하나 얻기 어려운 절호의 기회를 만나서 만고(萬古)에 누구도 이루지 못할 영구히 온 생령(生靈)에 입히는 바 큰 은덕을 베풀면 그 공적은 우주에 드리워 빛나며 명성과 덕망은 태두(泰斗)보다 높으리라.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오 자는 일신(日新)이며 진주 강성현(江城縣)인이니 충정공(忠貞公) 숙선(叔宣)의 아들이다. 고려(高麗) 충혜왕 신미년(1331) 3월 8일에 태어나서 이가정(李稼亭)선생 곡(穀)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신경동당급제로 벼슬이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동지경연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이르고, 계해에 효자리(孝子里)의 표정(表旌)을 받았으며 경진(1400년) 2월 8일에 졸하니 향수 칠십이라. |
태종시에 이르러 참지 의정부사를 증(贈)하고 강성군(江城君)을 봉하며 시호를 충선(忠宣)으로서 부조를 명하며 고려충신지문(高麗忠臣之門)이라 포장하였고, 세종조에 영의정(領議政)을 가증(加贈)하였으며 부민후(富民候)를 봉하고, 세조조에 도천서원(道川書院)을 사액(賜額)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공민왕 13년 계묘(1363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때에 적신(賊臣) 최유가 원나라 황후 기씨(奇氏)와 깊게 결탁하고 충선왕 별자(別子)인 덕흥군(德興君)의 옹립을 몰래 도모함에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선생이 이에 항쟁하다 덕흥의 저택에 구속됨이 무릇 42일이오 마침내 교지(交祉)로 멀리 귀양갔는데, 풍토(風土)가 고르지 않아 질병이 많았으나 선생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항상 역경(易經)과 예서(禮書)로서 자기를 스스로 위로하였다. 문득 샘물이 솟아 올라 토인(土人)의 풍토병이 이로하여 완쾌되었다. 달성귀(達成貴)학사와 종유(從遊)하고 운남풍토집(雲南風土集)을 저술하였다.
3년 후 돌아오는 도중 목면화(木棉花)를 보고 민생(民生)에 이로움을 생각하여 종자(從者) 금용(金龍)으로 하여금 그 종자를 필통에 넣어 가지고 오니, 이는 금망(禁網)의 엄함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정미년(1367) 2월에 환국하여 살으셨던 배양리(培養里)에다 손수 심었는데, 처음은 그 땅에 적합한 작물인지를 몰랐으나 마름과 젖음을 가려 심고, 그 성하고 솨함을 보아 배양(培養)의 묘를 얻어 3년만에 번성하여 드디어 전국에 퍼지니 주저마갈(紬苧麻葛: 명주, 모시, 삼베 칡넝쿨)만 입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로소 무명옷으로 추운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 후에 선생의 손자 정혜공(靖惠公) 래(萊)는 물레를 만들어 문래(文萊)라고 이름하고, 군수(郡守) 영(英)은 베짜는 요체를 얻어 이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는데, 지금 와음(訛音)되어 무명이라 부르니 대를 잇는 아들이 선열의 일을 이어 받는 좋은 행실은 세상 사람들의 흠탄(款歎)하는 바이다. 정사(丁巳)에 왜구가 왕성하여 모두 달아났으나 홀로 선생은 상제(喪制)로 묘를 지키고 곡읍(哭泣)을 평일과 같이 함에 후진(後陣)의 적(賊)도 서로 감복하여 효자를 해치지 말라[勿害孝子]의 네 자를 써두어 욕보임을 금(禁)하니 온 고을이 안도하였다. 그리고 정포은(鄭圃隱;정몽주) 이도은(李陶隱;이숭인) 박 정재(朴貞齋;박의중) 제현(諸賢)과 함께 정주서(程朱書)를 깊이 연구함에 몰두하여 정학(正學)을 부르짓고 유풍(儒風)을 일으킨 공은 지금껏 빛나고 있다.
선생은 이미 충효(忠孝)를 두루 갖추었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당함에 우뚝 솟은 절의(節義)를 지켜 들리는 명성이 백대(百代)에 움직이었다. 그리고 인류에게 무명옷을 입은 자 뉘아니 존경하며 그리워하리오. 이제 전쟁의 유적보존회(遺蹟保存會)를 조직하여 돌을 깎아 선생의 면화를 처음 파종한 밭에 세워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에 향인(鄕人) 변종봉(卞鍾捧) 이우상(李宇相) 제군과 후손 정동(正東)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때 정부의 원조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선력(宣力)을 힘껏 주선하고 권붕용(權鵬容)이 나에게 글을 청하니, 비록 글에 능치 못하나 선생의 덕망과 학문을 흠앙(款仰)하여 사양치 않고 대망(大網)을 기술(記述)하여 밝게 빛나는 공을 후세에 밝히고자 하노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단성면(丹城面) 사월리(沙月里) 배양촌전(培養村田) 106번지 대한민국(大韓民國) 사적(史蹟) 제10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