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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
이현래 목사님 2009년 9월 13일 디모데전서 말씀 - 디모데전서7
7. 양심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는 거짓 없는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였다.
디모데전후서에는 양심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양심’은 희랍어로 쉬네이디시스(συνειδηις)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함께 인식한다. 함께 본다.’는 뜻이다. 특별히 비판적인 눈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유대인의 회당을 쉬나고게(Synagogue)라고 하는데 Syn은 단어의 앞에 붙어서 ‘함께’라는 의미를 갖는 전치사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양심은 사회적인 것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보아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사실상은 그렇지 않고 개인적인 것으로 자기 안에서 스스로 자기를 살피고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양심이다. 항상 행위에 대해서 감시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 긍정적인 면으로는 견책하고 부정적인 면으로는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양심이다.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책을 받으면 양심이 꿀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다 지키고 살려면 사람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 정신과 환자들 중에는 양심의 가책을 호소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마음이 약하다 보니까 사소한 일에도 굉장한 가책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다.
양심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과 같은 기능을 행하고 있다. 양심은 항상 완전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양심대로 사는 것, 양심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 정도인 것이다. 그렇지만 양심대로 살지 못하면 항상 견책을 당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양심이 없다면 동물처럼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없어도 안되고 있으면 괴로운 것이 양심이다.
1.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양심은 없음
양심은 항상 완전한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양심은 없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양심상으로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인 갈등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경우에 양심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완전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항상 심판을 받고 그 심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러므로 양심마져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도 양심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양심은 옳은 것을 판단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 옳은 것을 판단하는 것도 그렇다. 변질되었기 때문에 옳게 판단한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요구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본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를 파악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은 종교의 영향을 받는다. 모슬렘의 양심과 유대인의 양심은 다를 수 있고 유대인의 양심과 기독교인의 양심은 다를 수 있다. 종교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 양심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심이 같다면 싸우겠는가? 양심이 다르니까 싸우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교도들을 학살했던 일이 있었다. 만약 양심이 같았다면 어떻게 이교도를 학살하겠는가? 기독교의 양심과 이교도의 양심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절렀던 것이다.
양심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양심은 본성적인 타락과 종교적 영향, 그리고 문화적 영향으로 잘못 길들여질 수 있고(고전8:7), 약해질 수 있으며(고전8:12), 더러워지고(고전8:7), 무감각해질 수 있다(딛4:2). 그러므로 양심은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양심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양심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고 하거나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침략자의 양심과 피침략자의 양심은 서로 다르다. 일제가 우리를 침략했을 때 그들의 양심과 우리의 양심은 전혀 달랐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애국자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사람들에게는 이등박문이 애국자다. 일본 화폐에는 이등박문의 초상이 들어 있는데 이등박문은 그들에게는 명재상이지만 우리에게는 원수였다. 그런데도 상심으로 서로 거리끼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대로 옳고 우리는 우리대로 옳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얼핏하면 양심을 내세우지만 가해자일 때의 양심과 피해자일 때의 양심이 서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왜 양심이 그러냐?”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의 양심만 옳고 남의 양심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2. 구약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음
구약성경에는 양심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 구약성경에는 양심이라는 말이 없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심은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를 율법이 규정해 주기 때문에양심이 필요가 없었다. 율법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니까 굳이 개인의 양심을 말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특이하게 구약성경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율법이 감시도 하고 심판도 하고 정죄도 하고 질책도 하는 기능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에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일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대로 하기만 하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때 일하지 않으면 되니까 양심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일이 다 그러했다. 세세하게 전부 다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양심이 필요 없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행했던 것이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한 것도 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무조건 멸했고 사람을 아무리 죽여도 전혀 가책이 없었던 것이다.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고 그 성을 완전히 허물었지만 그에 대해서 양심적으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양심보다 율법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양심이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율법-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전혀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의 실재는 율법이었다. 하나님이 실제로 나타난 것이 율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실재가 율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공경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실상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율법만 그대로 지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율법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였다.
그런데 이방인은 하나님도 없고 율법도 없기 때문에 양심이라는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희랍인들은 양심을 다이몬의 소리, 즉 신의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이 없었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신의 소리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양심이 곧 신이었다. 그만큼 양심은 이방인들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의 경우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하니까 교육을 통해서 선한 본성을 개발시켜야 한다며 성선설을 주장했다. 무엇 때문에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양심 때문이다. 양심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양심을 잘 지키면 선한 사람이 되지만 양심을 짓밟고 눌러 버리면 악한 사람이 되니까 교육의 목표는 사람의 속에 있는 선한 것을 개발시키는 것이었다.
3. 신약에서는 주로 바울이 사용했음
신약성경에는 양심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바울이 주로 사용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양심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유대인을 상대하던 사도 요한의 경우에는 양심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는 양심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장 9절에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라는 말이 한 번 나오지만 이 구절은 많은 사본들에는 없는 말이라고 하니 사실 요한은 양심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율법주의자가 아닌 이방인이니까 양심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는 하나님을 말하기가 어렵다. ‘양심’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베드로가 베드로전서에 두 번 사용한 것 외에는 모두 바울이 사용한 것이다. 그만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다.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고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있다. 그러면 다시 난 사람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율법이 있어야 하고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양심을 대치한다. 새 생명 안에는 옛 생명을 위한 율법도 없고 옛 생명 안에 있는 양심도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만 있을 뿐이다. 유대인에게는 율법-하나님이고 이방인에게는 양심-하나님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하나님인 것이다. 우리는 율법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양심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는 신앙과 양심은 분리할 수 없다. 유대인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만 이방인은 양심을 통해서 판단하니까 양심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가. 율법과 양심의 정죄로부터의 해방
그러면 율법과 양심의 정죄로부터 어떻게 해방되는가? 유대인은 율법이 항상 거리낌이었다. 아무리 잘 지켜도 늘 율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양심을 따라 산다고 살아도 늘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여기서 어떻게 해방되는가?
1) 율법의 정죄
율법의 정죄는 하나님의 정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정죄하시는 것이니까 곧 하나님의 정죄다.
이 정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피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올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안에서 양의 고기를 먹었다. 문설주에 바른 피는 누가 보았는가?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이 보시고 피가 발라져 있는 집은 지나가셨다(passed over). 이것이 유월절이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하셨다. 피를 보시고 그들을 간과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막을 건축한 후에 제단에서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렸다. 하나님의 현존이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그 피를 가져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피를 시은소에 뿌려야만 비로소 속죄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피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속죄소에 뿌려진 피로 말미암아 백성의 죄가 사해졌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이다.
피 뿌림, 이것은 죄 사함을 위한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다. 피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시기 위한 것이다. 로마서 3장 25절에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은 그리스도의 피로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피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9장 9절과 14절, 그리고 22절에는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 하였다. 우리는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피 뿌림을 통해서 용서받으려고 우리는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피를 뿌리면 용서가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무 말이 없다. 왜 피를 뿌리면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우리 생각에는 피를 뿌리면 오히려 더러울 것 같다. 물로 씻는다면 이해가 되지만 피로 씻는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된다고 하였다. 율법에 따르면 모든 것이 피로서만 정결케 될 수 있다. 성전의 모든 기물들에 피를 뿌려야 했다. 그래야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 쓰임이 될 수 있었다. 피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보혈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피가 없이는 한 발짝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피를 가지지 않고 지성소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면 어째서 꼭 피를 필요로 했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해석이다. 피가 흘려진 것을 보면 우리는 ‘사람이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거나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피는 우리의 몸 속에 있을 때는 생명이지만 밖으로 나오면 죽음의 표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왜 피를 보고 넘어가셨으면 피를 보고 용서하셨던 것은 죽었다는 표시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 사람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 추적을 하지 않는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아담이 살아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아담은 살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아담은 살아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녕 죽으리라.” 하신대로 아담이 자기를 죽은 자로 알았으면 죽은 자로 행세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를 죽은 자로 알지 않고 산 자로 알았다. 그래서 산 자로 행세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다. 가난한 자가 부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사기이고 죽은 자가 산 자처럼 행세하는 것은 죄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은 자인데 산 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아담은 죽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고 죽은 것을 가지고 산 자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증오스러운 것이다.
어떤 죄인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대법원에서까지 다 사면을 해 주었는데 어느 날 보니 멀쩡하게 살아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또 잡아다가 형을 집행해야 되지 않겠는가?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 하신 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었을 때 죽었다. 우리가 볼 때는 죽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었다. 하나님께 쓸모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행하는 것은 다 죄다.
가인과 아벨을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렸다. 사람들은 제물을 드렸으니까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죽은 자가 가져온 제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는 가증한 것이었다. 산 자가 와서 제물을 드려야 기쁘지 죽은 자가 와서 제물을 드리는데 기쁘겠는가? 죽은 자가 하는 행동은 다 죽은 행동이다.
죽은 자에게서 나온 것은 다 죽음이다. 시체에서 나온 것은 다 죽은 것이지 산 것은 하나도 없다. 조금이라도 살아 있으면 죽었다고 하지 않는다. 다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뱀이나 지렁이는 한쪽이 잘려도 나머지가 꾸물거리니까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지만 고급 동물일수록 죽으면 다 죽고 살면 다 살지 한쪽만 죽고 한쪽이 살아 있는 경우는 없다. 연어가 그렇다고 한다. 다른 동물은 한쪽이 죽고 나머지는 차츰 죽는데 연어는 죽으면 일시에 모든 세포가 한꺼번에 죽는다고 한다. 연어가 그만큼 고급 어종이라는 뜻이다. 사람도 한꺼번에 일시에 죽어야 고급 인간이다. 건강한 사람은 잘살다가 죽을 때도 금방 죽는다. 건강한 사람은 죽기도 쉽지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죽기도 어렵다. 하도 죽기가 어려우니까 안락사를 시켜 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피를 보시고 넘어갔는가? 그것은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는 가짜였는데 죽었으니까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로서는 불가능했던 것이 우리는 죄인이고 불완전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왜 꼭 예수의 피가 필요한가? 왜 양의 피가 필요했던가? 그것은 죄 없는 피, 완전한 피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때 ‘저것은 불완전하다.’고 생각되는 피는 안된다. 인간이 볼 때도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피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완전하다.’고 하는 그것, ‘나는 살아 있다.’고 하는 그것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양심 때문이다. 양심이 있으니까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나는 양심이 있으니까 살아 있다.”고 하고 “나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개도 양심이 있다. 먹는 것을 보니 그렇다. 먼저 온 놈이 먹고 있으면 나중에 온 놈은 입맛만 다시고 있지 양심 없이 빼앗아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배고플 때는 몰라도 보통 때는 기다리고 있다. 그것으로 보아 개도 사람 만큼은 없지만 어느 정도는 양심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양심이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는 양심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육신은 죽더라도 양심은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양심이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정녕 죽으리라.” 하신대로 죽은 것이다. 돼지를 잡아서 배를 갈라 보면 간도 있고 콩팥도 있고 염통도 있다. 그렇지만 돼지가 죽었는데 염통이 살아 있겠는가? 사람이 죽은 사람인데 양심만 살아 있겠는가?
죽는다는 것은 나쁜 것이나 악한 것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죽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죽어야 죽는 것이다. 육신은 아무리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육신은 다 죽으니까 그것은 죽어도 소용이 없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죽은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이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죽은 사람은 육신이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고 ‘나라고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은 죽었어도 산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각을 없애려고 화장을 한다. ‘인생은 완전하게 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다비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장을 해서 완전하게 재가 되어 다 날아가 버렸다 해도 자기 양심이 살아 있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것이 아니다. 육신이 살아 있어도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죽었으면 하나님은 죽은 것으로 보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이다.
보통 사람의 피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피는 흠이 없는 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흠이 없는 피만 효과가 있다. 예수만큼 완전하게 흠이 없는 피만 속죄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50점짜리가 죽었다 해도 60점짜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90점짜리가 불합격해도 95점짜리는 합격할 수 있다. 그러니까 90점짜리도 속죄를 할 수 없고 99점짜리도 속죄를 할 수 없다. 100점짜리가 죽어도 다 죽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피가 필요한 것이다.
내 피로는 여러분을 속죄할 수 없다. 예수의 피만 우리를 사할 수 있다. 옛날 찬송가에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찬송이 있다. 사람들을 교리로만 알고 그 찬송을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덮어 주고 씻어 줄 피는 예수의 피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피를 의지하지 말고 예수의 피를 의지해야 한다. 예수의 피를 봐야 진짜로 죽은 것이다. 나의 피로는 구속을 받지 못한다. 예수의 피라야 구속을 받을 수 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의 피도 우리를 구속할 수 없다. 예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왜 예수의 피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무의 피나 속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는 하나님의 정죄다.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해방되려면 그 피가 있어야 한다. 완전하신 분의 피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피는 그의 피만 못합니다. 나의 피는 그의 피와 비교가 안됩니다. 그의 피밖에는 하나님께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내 피는 내놓을 수 없지만 나는 예수의 피를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의지해야 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피를 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양의 피를 드렸다. 자기의 피로는 안되니까 양의 피를 대신 드렸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내 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나의 죽음을 의지해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의지해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다. 그 피는 제사장의 피가 아니라 양의 피였다.
완전한 제물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도 제물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완전한 제물이 아니다. 그래서 완전한 제물을 의지해서 다른 모든 제물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추석이 되면 제사상을 차리는데 그 중에는 메인 요리가 있다. 다른 것은 없어도 되지만 메인 요리는 있어야 된다. 부자집에서는 많은 종류의 요리를 제사상에 올릴 수 있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그렇지 못하니까 최소한 맹물이라도 올려야 한다. 옛날에 하도 가난하니까 맹물을 떠놓고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 있다.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제사를 드리겠는가? 그래서 맹물을 한 그릇 떠놓고 “조상님, 나는 드릴 것이 없어서 이것을 드립니다.” 하며 내놓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맹물 한 그릇, 그것이 부자집의 많은 요리 전체의 총합이다. 많은 것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그것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 홍동백서(紅東白西)라고 하지만 홍동만 있고 백서는 없어도 된다. 예수의 피밖에 없다. 예수의 피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가는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어린아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피가 아니라도 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성장했으면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수준이 높아지면 ‘내 피로는 안되는구나.’라고 알게 된다. 이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자기의 피로 될 수 있는 줄 안다. 어려서는 다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안다. 또 그렇게 알아야 성장한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알고 자기가 최고가 아닌 줄 안다. 나는 우리 영관이에게 “영관이가 최고다. 잘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좋아한다. 그런데 진짜 자기가 최고인 것을 확인하려고 그러는지 의심이 되니까 그러는지 “정말 내가 최고야?”라고 묻는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아이에게는 “그래, 나는 네가 최고로 이쁘다.”고 대답해 줘야 되지 “아니야, 너는 누구보다는 조금 못하다.”고 하면 안된다. “네가 최고다. 네가 제일 낫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더욱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나로서는 안되고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멀리 있을 때는 대충 알기 때문에 잘 모른다. 그분에게 더 가까이 갈수록 그분의 그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학문도 그렇다. 멀리서 보면 박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우리 교회 안에는 박사가 많은데 같은 형제니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그 공부를 하려고 들어가 보면 하늘과 땅이다. 철학을 모르니까 철학박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면 박사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엊저녁에 양심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고 박사님들에게 질문을 했다. 서양의 양심에 대해서는 김윤동 철학교수에게, 동양의 양심에 대해서는 김지엽 맹자 박사에게 물어 보았다. 가까이 갈수록 더욱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모른다. 초등학교 학생은 학사와 석사가 무슨 차이가 있고 석사와 박사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른다. 학사와 석사는 공부하는 방식부터 다르다. 석사과정을 공부해 보면 석사가 돼야 그래도 어느 정도 공부를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석사과정을 배우지 않으면 학부과정만 마쳐도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이 생각된다. 박사과정은 더욱 그렇다. 공학박사가 돼야 자기가 팀을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무엇을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한다. 자기가 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박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학박사가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소꿉장난을 하는 정도밖에 안되니까 전자의 세계에 들어가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갈수록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고 주님이 될 수 있는지, 왜 그분만이 독생자가 되는지도 가까이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 보면 한계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의 정죄는 곧 하나님의 정죄다. 하나님의 정죄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예수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예수의 피밖에는 드릴 피가 없는 것이다. 우리끼리야 비교가 될 수 있지만 예수의 양심과는 비교가 안된다. 우리끼리는 ‘저 사람의 양심보다는 내 양심이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와는 비교가 안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해방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죄를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까 어디까지 가야 되는 것인지 잘 모른다. 종교생활을 해 보신 분들은 조금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얼마나 깨끗해야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실 것인지, 얼마나 정결해야 정결하다고 하실 것인지 해 볼수록 막막했을 것이다. 율법을 어느 정도로 지켜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지 해 볼수록 더욱 막막해지고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부를 해 볼수록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박사 공부를 시켜 버리면 아무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낫 놓고 기역자 쓰기부터 가르치니까 쉬워서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점점 올라갈수록 하늘과 땅처럼 점점 어려워진다. 전자공학 박사가 하는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대충 알아듣는 것이지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해방되려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 이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2) 양심의 정죄(이방인의 문제)
이방인의 문제는 양심의 문제다. 양심의 정죄가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방인은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만 속에서 양심이 정죄하기 때문에 편하게 살 수 없다. 하나님은 피할 수 있지만 양심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머리만 긁으려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자기를 감시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이 속에 들어 있어서 자꾸 괴롭게 한다. 그래서 사람이 도덕적이 되는 좋은 면도 있지만 반대로 양심이 있어서 괴롭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항상 양심이 찌르니까 괴롭다. 그렇지만 더욱 더 도덕적이 되려고 하면 더욱 양심이 찌른다. 무슨 기준이 있어서 몇 점에 도달하면 양심이 나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덕을 쌓으려고 해도 그렇고 도를 닦으려고 해도 그렇다. 높이 오를수록 양심도 그만큼 커진다. 정죄가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덕을 쌓으려고 하면 양심도 그만큼 수준이 올라간다. 그래서 항상 양심이 자기 하나님으로 있는 것이다.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 해서 양심이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면 더욱 양심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
그런 양심의 정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이방인의 문제다. 이방인으로서 성도가 된 사람들의 문제다.
가)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써(죄에 대하여 죽음)
로마서 6장 3절과 5절과 6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8절과 10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그분과 함께 죽었으므로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죽으면 양심도 함께 죽는다. 내가 죽으면 양심은 안죽는다. 그런데 그분과 함께 죽으면 양심도 함께 죽는다. 내가 혼자 죽으면 양심을 떼어놓고 죽기 때문에 양심은 안죽지만 그분과 함께 죽을 때는 양심도 함께 죽는다. 사람들은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못한다.”는 말을 한다. 그것은 양심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 혼자 죽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형제들이 “죽어야 하는데 왜 안죽느냐?”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성질문제를 말하는 것이지 양심은 그보다 근원적인 문제다. 죽어야 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하는 그것’이다.
왜 싸우는가? ‘내가 옳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싸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 할 말이 없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다 보면 ‘내가 옳다는 것이 있으니까 이 말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말을 못할 텐데 은연 중에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고 싸우고 하는 것은 다 자기가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소리를 하다가도 뜨끔할 때가 있고 ‘나도 그런데’라는 생각이 들면 말이 막혀 버린다. 남에게 잘못했다고 열심히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정당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 같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은 잔소리를 하다가도 찔려서 ‘나도 그런데 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고, 기껏 말을 하고서도 후회할 때가 있다. 양심에 찔려서 ‘나도 그런 사람인데 괜히 그런 말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무엇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이 없어져야 완전히 없어지는 것인데 나 혼자 죽어서는 절대로 양심이 없어지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만 자기의 선이 없어진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고 한 것이다.
세례는 왜 받는가? 그분과 함께 죽으려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세례의식은 자기의 죽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죽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지 죽으려고 받으면 소용이 없다. 침례를 받는다고 죽겠는가? 옛날에 우리도 침례를 행해 보았다. 춘천 집회에서도 했고 문경 집회에서도 했는데 물에 들어갔다 나와 봤자 소용이 없었다. 물에 담갔다가 내놓아도 도로 살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뒤로부터 침례를 하지 않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침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을 물에 집어넣는다고 죽겠는가?
침례는 죽으려고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선포하려고 받는 것이다. 유대교에 대해서 “나는 이제 유대교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당신들에게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고 선포하려고 침례를 행했던 것이다. 침례를 행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자기가 유대교에 남아 있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임을 확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침례를 받는 것을 보면 ‘저 놈은 이제 우리 유대교에서 벗어난 놈이구나.’라고 알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중동에서 선교를 했는데 사람이 불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해서 침례를 주기만 하면 그 사람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죽지 않은 사람을 죽은 것처럼 표시를 해 놓으니까 침례를 받기만 하면 모슬렘에서 그 사람을 죽여 버렸던 것이다.
사도행전 시대에는 침례가 필요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서 분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침례의식을 통해서 스스로에게는 다시는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그들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었기에 침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침례를 받는다 해서 세상 사람들이 ‘저들은 우리와 상관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미 죽었으면 되지 또 물에 담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왜 침례를 받지 않느냐고 물으면 “나는 아직 덜 죽었기 때문에 침례를 받지 못한다.”고 하거나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침례를 받은 것이다.”라고 대답하면 된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 이것이 완전하게 죽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 양심이 죽는다.
나) 예수와 함께 다시 삶으로(하나님께 대하여 삶)
그리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야 한다. 로마서 6장 5절과 10절에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라고 하였다.
그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 다시 산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고 전에 살았던 것은 죄에 대하여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 예수와 함께 산 것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것이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이제는 양심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왜 그리스도는 우리를 포함하고 죽으셨는가?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양심을 대치하는 것이고 율법을 대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해해서 자기의 생명대로 살면서 새 생명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초창기에 그런 일이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그때는 어렸을 때니까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나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지 옛 생명으로 살면서 새 생명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남의 집에 가서 아무렇게나 하면서 ‘생명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남의 신발을 신고 오면서 ‘내 생명대로 한다.’고 하면 되겠는가?
그러므로 새 생명 안에서, 죽고 산 생명으로 행해야 한다. 불의의 병기였던 우리를 의의 병기로 드리고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순종의 종으로 드려야 한다.
죄의 반대는 순종이다. 순종이 이렇게 중요하다. 우리는 원래 죄의 종이었다. 죄에게, 사탄에게 순종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 안에 들어왔으면 당연히 주인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옛 주인을 그냥 섬기면서 “나는 주님의 종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순종의 종이 돼야 하고 불의의 병기로 드려졌기 때문에 의의 병기로 드려져야 한다. 그래야 확실히 전환이 된 것이다. 확실하게 불의의 병기를 의의 병기로, 죄의 종을 순종의 종으로 바꿔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율법 안에 있는 죄의 씻음을 받았고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옛 생명을 끝내는 것, 이것이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길이다.
나. 새 생명 안에서 해방
로마서 8장 1절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왜 이 말이 나왔는가? 어떻게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었는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죽었고 새 생명 안에서 행하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불의의 병기로 쓰일 때는 불의의 법 아래 있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의 법 아래 있었다. 그 법을 따라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에게 왔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로마서 8장 1절은 완전한 승리의 선포다.
옛 사람에게는 양심의 주관 하에 죄와 사망의 법이 작용했다. 양심이 없으면 죄와 사망의 법이 작용할 수 없을 텐데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이 작용하는 것이다. 미성년자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다. 책임감이 없기 때문에 미성년자는 죄를 지어도 벌을 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양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벌이 소용이 없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돼지와 같다. 돼지는 똥을 싸도 똥을 쌌다는 것을 모른다. 주인은 똥을 쌌다고 때리지만 돼지가 똥을 싼 것이 잘못인가, 주인이 똥 싼 돼지를 때리는 것이 잘못인가? 양심이 없으면 죄와 사망의 법이 작용할 수 없다. 그리고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주관 하에 죄와 사망의 법이 작용했다.
그런데 새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주관 하에 생명의 영의 법이 작용한다. 옛날 사람에게는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주관했고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주관했다. 율법과 양심을 통해서 정죄가 가능했다. 그렇지만 율법도 없고 양심도 없는 사람은 정죄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율법도 없고 양심도 없으면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 안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새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관해서 생명의 영의 법이 작용한다. 율법도 아니고 양심도 아닌 다른 법이 작용하는 것이다. 마치 물 속에 있는 법의 영역에 있다가 공중에 있는 법의 영역으로 바뀐 것처럼 법이 바뀐 것이다. 사람이 바뀌었으니까 법이 바뀐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양심 수준과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 폐지되어야 할 법이 많아질 것이다. 우리가 옛 사람에게서 벗어나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면 다른 법은 다 폐지되고 생명의 영이 작용하게 된다.
우리는 양심의 주관 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율법의 주관 하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주관 하에 있다. 그래서 생명의 영의 법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의 피를 의지하지 않고는 완전한 속죄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으므로 율법과 양심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방인은 양심의 정죄로부터 해방되었고 유대인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삶으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양심은 어디로 갔는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말았다. 예수님은 율법과 양심을 짊어지고 죽으셨다. 그분의 몸 속에는 양심이 있었고 그분의 어깨에는 율법이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이 두 가지가 처리되었다. 이것은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옛 율법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옛 양심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한 법이 없어지면 다른 법이 와야 한다. 이 법도 없고 저 법도 없으면 안된다. 예수께서 옛 법을 없앤 것은 새 법으로 살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면 옛 법은 우리에게 무효하지만 우리가 옛 생명 가운데서 행하면 옛법이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지도 않으면서 옛 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면 무율법, 무양심 주의자가 되고 만다. 개 돼지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옛 법을 폐지하신 이유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양심보다 차원이 높은 법이다. 그런즉 이제는 “양심껏 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살라.”고 해야 한다. “너는 양심이 그게 뭐냐!”라고 하는 것은 수준이 낮은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초등학생에게는 더하기 빼기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였지만 고등학생에게는 미분적분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인 것과 같다. 고등학생에게 더하기 빼기를 할 줄 아느냐고 묻는 것은 큰 실례다.
‘우리는 어디서 사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율법과 양심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 그나마도 사람 노릇을 하려면 율법과 양심의 법 아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수준도 못되어서 “아무개는 양심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되겠는가? 그래도 성도(聖徒)인데, saint인데 “저런 양심도 없는 놈이 있느냐!”는 말을 하거나 들으면 되겠는가? “저 사람은 새 생명인데 좀 서툴구나.”라고 하면 말이 되지만 “저것은 양심도 없구나.”라고 하면 곤란하다.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율법과 양심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신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다시 쓴다면 양심이라는 말 대신에 새 생명이라는 말만 쓰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간의 본성에 가장 선하고 가장 소중한 것이 양심이라 할지라도 당신 앞에서 완전한 양심은 없습니다. 당신 앞에 갈 때는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우리가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아무리 선하고 완전해도 하나님께 드릴만큼 완전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큼 정결하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앞에 세울 피를 허락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피의 뿌림과 가리움 안에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피의 씻음 안에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주께서 율법과 양심을 짊어지고 죽으셨으니까 이제 우리를 새 생명 안에서 살게 해 주시고 새 생명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