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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명가에 얽힌 감동의 휴머니즘
글//박찬란
어느 분야든지 한 곳을 집중하여 파고 들다보면, 어느 순간 돈오돈수를 체험하게 된다. 우직한 내공 결과로 머리가 열리면 사물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는 혜안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 마디로 고수가 되면 고수가 될 재목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긴다는 것이다.
함석현 옹의 말처럼, “그대 사람을 가졌는가?”의미심장한 말은 지인지감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람도 명품이 있지만 그 명품으로 명문가를 이룬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고스란히 풍경처럼 국경을 넘나들며 은혜한 이가 있었다.
한국에서 명문가라고 할 때 과연 그 자격 기준은 무엇인가? 명가 명택의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조건은 그 집 선조 또는 그 집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꼭 벼슬이 높았어야만 명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선미(眞善美)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정승 3명보다 대제학 1명이 더 귀하고, 대제학 3명보다 처사 1명이 더 귀하다.’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는지도 모르겠다.
전주 시가지 한복판을 지나다보면 ‘객사(客舍)’라고 불리는 고색창연한 기와 지붕 건물이 나그네 눈길을 끈다. 객사는 그 지역을 방문한 외부의 귀빈이 머무르는 건물로, 요즘 말로 말하면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해당된다. 전주 객사는 조선시대에 건축된 객사 가운데 그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주 객사 정면에는 커다란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초서체의 호방하고 힘찬 필체인데 가로 4.66m,세로 1.79m의 크기이다. 이 정도 크기의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붓 크기도 엄청났을 것 같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을 굳이 이처럼 크게 써야 했을까.하는 의문에 마음이 설렌다.
풍패(豊沛)는 한나라 건국자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에 왕도(王都)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풍패지관은 이 근방 명필이 쓴 글씨가 아니며, 더 나아가 조선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씨는 중국인 사신 주지번이라는 인물의 작품이다. 조선을 방문한 중국 공식 사신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다 이러한 현판을 남긴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현판에 얽힌 사연은 풍류의 멋이 감도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명당이다. 여기에는 국경을 초월한 명나라 때 대문장가인 주지번과 익산 왕궁의 표옹(瓢翁)송영구 집안의 아름다운 인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06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명나라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 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서울에 오니 국왕인 선조가 교외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비중 있는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이러하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표옹이 그 읊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여관 뽀이’인데, 그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는냐?”
“저는 남월 (南越)지방 출신 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듣고 표옹은 그러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하였는 지 종이에 써 보라고 했다.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지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지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 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그 후 2년만에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주지번은 을미년(1595)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에 수석합격한 셈이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학사 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하였다.
주지번의 벼슬은 한림학사라고 소개되는데, 한림원은 당대에 학문의 경지가 깊은 인물들이모여 있던 곳이다. 그는 또 ‘한서기평(漢書奇評)’의 서문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주지번은 보통 관료가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일급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것이다. 중국측의 주지번- 양유년 조를 상대할 수 있는 조선의 복식조로 50대 후반의 유근과 30대 후반의 허균이 선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근은 주지번의 고모부였다. 공식적으로는 양국 외교관의 만남이었지만, 비공식적 차원에서는 한.중 문장가들이 재주를 겨루는 국가 대항 문장겨루기적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해서 당대 중국과 조선에서는 난다긴다하는 문장가인 주지번과 허균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시가 북경의 선비들에게 소개된 것도 주지번과 허균의 만남에서 비롯 되었다. 주지번이 허난설헌의 시에 매료되어 중국에 가지고 가서 알린 것도 이 때이다.
송씨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주지번이 한양에 도착해서 전라도 왕궁에 사는 송영구라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주변에서는 “죽었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주지번이 좀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이 살아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추궁하니까“대국인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서 시골까지 찾아가면, 접대 준비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폐가 심하니 부득이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주지번은 말했다. “말 한 필과 하인 1명만 준비해 줘라. 다른 준비는 필요없다.”이렇게 해서 전주객사를 거쳐 장암에 도착한 것이다.
주지번은 조선에 올 때 희귀한 책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일생 일대의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그 책 분량이 80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책들은 나중에 모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주지번이 왕궁면의 장암에 위치한 표옹의 집을 방문해서 남긴 흔적은 현재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군자의 덕을 지닌 이가 살기에 평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바라보며 사는 집이란 뜻의 ‘망모당(望慕堂)’에 실린 그 마음의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묘자리)를 택지해 준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의 양택에는 망모당이라는 글자를, 은인의 편안한 사후를 위해서는 음택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세상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인간애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학문 배양만이 군자의 도에 이를 수 있고,그 뜻을 위해 벼슬을 해서 많은 이들의 사회 이불이 되어주는 것이 선비로서 가장 명예로운 삶이라고 할 것이다.
그 길에서 가난은 성공적인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지만 자신을 시험대에 들게 하는 담금길의 매가 되기도 한다. 그 때 사람을 알아보고 삶의 사다리가 될 수 있는 인재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행운은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다.
표옹이 절대절명의 시기에 주지번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런 당대의 문장가도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가뭄의 단비처럼 주지번에게는 표옹이 건네준 학문의 용기가 철부지급(轍鮒之急)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표옹을 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바가지의 물로 호흡이 가빠 헐떡이는 물고기의 생명을 건졌듯이, 어렵고 힘들 때 표옹이 건네준 학문에 대한 희망의 밧줄은 고고한 군자로 드러날 수 있는 한 줄기 생명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조선 선비, 표옹을 죽어서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나라의 공사업무를 끝내고 천릿길도 마다하고 한 필을 말을 타고 은인을 만나러 찾아가는 그마음이 오죽 들뜨고 가슴 설레었을까? 이 날을 고대하며 기다린 세월이 그 얼마이던가. 그런 은인을 찾았을때의 그 기분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표현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주고 싶은 그 마음에 은인이 기거하는 처소를 찾아 명당이라 명명했고, 죽어서 평안한 안식을 위한 묏자리 하나 선물한 것으로 주지번은 옛날 자신의 보은에 작으나마 보답을 표현했던 것이다.
선비로서 사람으로서 이런 신념과 고고한 정신으로 마땅히 살아 실천했던 그들이기에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절개와 지조를 생각하는 백아절현의 고사를 보는 듯하여 가슴 가득 훈훈한 인간애로 충만하고 아득한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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