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고마움 새기기
종교를 초월해 지구촌 이웃들은 지난 2013년 3월 천주교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고국 아르헨티나 국민이 대거 즉위 기념 미사에 참석하려 하자, 바티칸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비싼 돈 들여 저를 보러 오지 말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부하세요."라고 당부하는 등 즉위 기념 미사를 전후해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해온 이 분의 언행일치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2013년 부활절 기념일에는 이에 화답하듯이 한국 가톨릭 주교들께서 소외된 이웃들이 있는 곳들로 달려가 이 분들을 위로하고 부활 미사를 봉헌하며 귀의할 만한 스승의 본보기를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잘 찾아보면 종교와 시공(時空)을 초월해 자신과 코드가 맞는 귀의할만한 스승들은 도처에 계십니다. 제 경우 학문과 인생에 대해 회의가 강하게 밀려오던 20세 때인 1975년 인연 따라 자연스레 '귀의삼사(歸依三師)', 즉 선 수행자의 삼보(三寶)에 해당하는 '불(佛)’이신 '석가세존(釋迦世尊)'과 '법(法)'에 해당하는 《무문관(無門關)》의 저자이신 남송(南宋) 시대의 '혜개(慧開)' 선사, 그리고 '스승[僧]'에 해당하는 선도회 문하생들과 이 시대를 함께 하셨던 '종달(宗達. 1905-1990)' 선사인 세 분 스승님들께 귀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2대독자로 태어나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 속에 형편없는 마마보이로 성장하다 '독화살의 비유'를 통해 석가세존의 가르침에 매료되었으며, 그 직후 서강대 불교동아리인 '혜명회(慧命會)'를 통해 종달 선사 문하에서 <무문관> 점검을 받으며 치열한 수행을 지속하다 학문과 인생이 둘이 아님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순간순간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가 지금 필자에게 가장 고마운 분을 말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누구와도 다른 필자만의 삶을 겸허하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온몸으로 일깨워 주신 '종달 선사님!'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참고로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의 선승(禪僧)이셨던 종달 선사님은 일제 강점기 때 동경에 위치한 폐사 직전의 도림사를 중창해 주지직을 수행하시면서 이 도량을 한국유학승을 위한 기숙사로도 활용하셨으며, 동경 유학 시절부터 절친하셨던 시인 유엽으로 더 유명한 화봉 선사님(효봉 선사님의 사제)과의 인연으로 1953년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교수를 3년 간 역임하셨으며, 또한 1963년 1월 당시 종정이셨던 효봉 선사님으로부터 조계종 포교사로 임명되면서 매주 수요일마다 조계사에서 참선법회를 주관하셨습니다.
아울러 1960년대에 월간 법시사 편집장을 역임하시면서 언론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그러다 1965년 무렵 조계사 참선법회에서 도심이 견고했던 선도회 1호 제자인 철심 거사(현재 선도회 회장)를 만나면서 재가자도 간화선(看話禪)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시고 선사께서 선도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입실점검 지도에 발 벗고 나선 인연이 마침내 1975년 10월 당시 형편없는 마마보이였던 필자와의 숙명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과 짐승을 구별할 때 '네 가지 고마움[四恩]'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로 판별하기도 하는데, 물론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으나 특히 소중한 것은 스승의 고마움입니다.
그 이유는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할 경우 지혜롭지 못한 우리 중생들은 마음은 있어도 나머지 세 가지 고마움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으며, 이렇게 될 때 거의 영의 확률로 어렵게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대부분 소중한 세월을 허송세월하다 헛되이 탐욕에 가득 찬 생(生)을 마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필자의 견해로는 누구나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세 분 정도의 스승님들을 마음속에 모실 경우, 마치 지하철역에 내려 개찰구 근처 벽에 그려진 안내 지도를 보고 현 위치에서 목적지를 어느 출구로 나가는 것이 가장 빠른지를 확인한 후 곧바로 목적지를 향할 수 있듯이, 남녀노소, 재가와 승가를 불문하고 나름대로 각자 이 분들을 통해 '인생의 지도'를 그릴 수 있고 이 분들의 생애와의 비교를 통해, 살아가는 순간순간 인생의 현 위치를 확인하며 각자의 가치 있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간다면, 누구나 뜻한 바를 반드시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여 천주교 신자의 경우 세 분은 예수 그리스도, 서양 영성(靈性)의 대가인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 및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인도 출신으로 동서양을 아우른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 또는 앞에서 언급했던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 같은 분을 택하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조심할 점 하나를 말씀드리면, 비록 바른 스승 문하에서 수행했다하더라도 '언제까지 스승의 그늘에 안주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종교와 종파를 불문하고 필자가 접하고 있는 종교계를 살펴보면 이미 돌아가신 스승을 너무 오래 붙들고 계신 제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자 된 도리로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유지ㆍ계승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자칫 잘못하면 스승을 모방해 흉내 내며 스승의 그늘 속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아니 어쩌면 인간으로서 누구나 지니고 있는 사소한 허물까지도 감추거나 미화하는 등, 인간적인 스승의 모습을 완벽하게 신격화(神格化)하며 스승의 이름을 팔아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선가(禪家)에는 '일인일파(一人一派)'라는 선어(禪語)가 있습니다. 즉, 스승과 그 제자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스승의 고마움에 대한 제자의 진정한 보은(報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통은 동양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가까이에서 수행하셨던 한국예수회 관구장이신 정제천 신부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신 적이 있는데 이때 "훗날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고 정 신부님 옆에 계신 이 분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도록 영적으로 더욱 깊게 성장하시기를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즉 교황을 추종하지 말고 넘어서라는 스승의 엄중한 경고인 것입니다. 또한 <하씨딤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 길> (마르틴 부버 지음/ 장익 옮김) 가운데 '독특한 길: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의 무한한 다양성'에 다음과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현자 랍비 부남은 고령에 이르러 눈이 멀고 난 뒤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선조 아브라함과 자리를 바꿀 마음이 없다. 아브라함이 눈먼 부남같이
되고 눈먼 부남이 아브라함같이 된다면 하느님께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그런 변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내가 좀 더 나 자신이 되도록 힘써 보겠다."
이와 똑같은 생각을 랍비 수냐는 임종하기 직전에 더 함축성 있게 천명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세에서 나보고 '너는 왜 모세가 아니었냐?'고 묻지는 않고,
'너는 왜 수냐가 아니었냐?'고 물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같지 않다는 사실에 입각한 가르침
이다. 따라서 인간들을 똑같게 만들려고 들지 않는 가르침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
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나 각자 나아가는 길은 다르다.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은 사람간의
바로 이런 상이함에 있다. 능력과 성향이 서로 다른 데에 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힘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의 무한한 다양성에서 드러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