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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최고의 문학상인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들을 통해 현단계 우리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가늠해보고 시인들에게 보다 세계적인 작품성을 창작하는데 기여하고자 2021년 가을호부터 시작한 ‘왜 노벨문학상인가?’가 이번 호를 끝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동안 편집부의 마감 시간과 오민석 교수의 집필 시간이 맞지 않아 몇 번 빠진 점, 독자들에게 너그러운 이해를 구합니다. 무엇보다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들의 작품들을 일일이 번역하고 작품세계를 짚어주신 오민석 교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이번 호의 주목하는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대표작품을 게재하지 못함을 알려드립니다. 국내 판매되는 번역본이 폴란드어보다 영어로 번역되고 또 한국어로 번역되거나 폴란드 번역에 대한 심층적인 검증이 안 되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완벽한 폴란드어의 시의 정수를 전달할 수 없다는 편집부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이점, 다시 또 한 번 독자의 이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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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벨문학상인가? :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시인-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질문의 문학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세계
오민석(단국대 교수, 문학평론가)
I.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는 1923년 폴란드 쿠르니크Kórnik에서 태어나 16세기 말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던 고도古都 크라쿠프Kraków로 여덟 살 때 이사한 이래로 2012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그곳에서 살았다. 평생 거의 변화가 없는 그녀의 서식지만 고려하면, 그녀는 비교적 평온한 일생을 보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16세일 때(1939) 2차 세계대전이 터졌으며, 그녀는 소위 ‘지하 학교’에서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계속 이수하다가 1943년부터 철도노동자로 일하며 강제로 독일에 차출되는 사태를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비로소 그녀의 ‘문청文靑’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문학은 애초부터 ‘평온’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였으며, 1945년에 <폴란드 데일리>라는 신문의 문학란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였다. 그 시의 제목은 「단어를 찾아서」이었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하여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고문실 벽처럼 피로 흥건하게 물들고,
그 안에 각각의 무덤들이 똬리를 틀기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기를,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중략)…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소리는 적나라하고, 미약할 뿐.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찾을 수가 없다.
―「단어를 찾아서」 부분
문학청년의 기개와 포부와 절망으로 가득 찬 이 시는 데뷔작이면서 동시에 평생 쉼보르스카가 씨름했던 시 쓰기의 주요 테제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계시적이다. 첫 번째 연에서 쉼보르스카는 기호의 지시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보여준다. 기호는 사물 혹은 개념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재현해주지 못한다. 소쉬르F. de Saussure가 ‘자의성arbitrariness’의 개념으로 지적한 것처럼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기표와 기의는 유동하는 두 개의 층위일 뿐, 기표는 기의 밑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언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담는 투명한 창이나 평면거울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는 찌그러진 거울 혹은 깨진 거울이라는 인식은 쉼보르스카뿐만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하는 다양한 작업, 가령 철학이나 시의 오랜 주제였다. 쉼보르스카의 많은 시는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불신, 회의, 그리고 질문을 담고 있다.
둘째 연은 시가 언어의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 도달해야 할 어떤 황홀한 파국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시는 상징계 안에서 상징계의 질서와 싸우며 도달할 수 없는 실재계로 몸을 던지는 순간에 터지듯 써지는 파열의 언어이다. 그래서 시적 언어에는 늘 극도의 긴장과 죽음과 사건과 위기의 냄새가 난다. 시는 왜곡의 언어와 싸우며 언어 안에서 언어 너머의 것을 꿈꾸는 언어라는 점에서 자기 모순적이다.
셋째 연에서 피로 흥건한 “고문실”은 정치적 폭력을 가리키고, “각각의 무덤들”은 그로 인한 죽음들을, 그리고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역사적 사건들을 지시한다. 쉼보르스카는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파시즘과 이념의 폭력성에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사유와 성찰을 보여주는 시를 여럿 발표했다. 그녀가 볼 때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쉽게 정리할 수 있는 희망과 진보의 기관차도 아니고, 무질서와 혼란의 실존태도 아니다. 그녀는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과 그것의 배후에 있는 신의 태도,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인간들의 삶을 주목하였다.
마지막 연은 문청으로서 시 창작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매지만, 그것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은 시인에게 평생 주어진 보편적인 난제이다.
이렇게 시작된 쉼보르스카의 시적 여정이 처음 도달한 것은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그녀의 첫 시집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1952)에는 「레닌」, 「노바 후타를 건설하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시들이 실려 있다. “노바 후타”란 당시에 크라쿠프 인근에 건설되고 있던 스탈린주의를 표방한 산업단지였다. 그녀는 여당인 “폴란드 통합 노동당”(1948년부터 1989년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을 지배했던 유일 정당으로서의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에드워드 허쉬E. Hirsh와의 인터뷰(1996)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나는 공산주의의 교리를 믿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를 통해 세계를 구원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인류를 사랑하였다. 나는 인류를 위해 무언가 선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곧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류를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인류를 좋아할 필요는 있다. 사랑이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것. 이것이 내 젊은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을 통해 내가 배운 교훈이다.”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 『나에게 던진 질문』(1954)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에 충실한 시집들이었다면, 세 번째 시집 『예티를 향한 부름』에서부터 그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이 시집에서 그녀는 스탈린을 혐오스러운 눈사람(“예티”)에 비유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난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은 쉼보르스카의 시선이 원래부터 개인의 사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사회, 역사적인 현실로 항상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멀리한 것은 스탈린주의였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 아니었다. 다음 작품을 보라.
한때 우리는 세상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만치 작았고,
웃으면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했으며,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처럼 평범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승리의 팡파르를 울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더러운 먼지를 내뿜었고,
우리 앞에는 아무 데도 인도하지 않는 머나먼 길과
독이 든 우물들과 쓰디쓴 빵 조각만 남았을 뿐.
우리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세상에 대한 지식,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만치 크고,
웃으면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하다는 것,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처럼 낯설다는 것.
―「***」 전문
미출판본 시들 가운데(1945) 하나인 이 작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적으로 표방하기 이전부터 쉼보르스카의 시선이 이미 “세상”과 “역사”로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작품은 1연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역사가 그렇게 작고, 간단하고, 평범한 것이 아니라, 3연에서 말하는 것처럼 크고, 복잡하며, 낯선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2연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는 인간이 머릿속에 구상하고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역사는 인간의 기대를 끊임없이 외면하며, 길을 잃게 하고, “독이 든 우물들과 쓰디쓴 빵 조각만” 남기기도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F. Jameson의 유사한 표현을 빌리면, “역사는 우리를 해친다History hurts.” 이 시는 역사가 정치적인 이념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예견함으로써 역사에 대하여 훨씬 복잡하고 엄밀한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사회, 역사적 현실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관심은 나치즘과 유대인 학살을 다룬 「아직은」, 「야스오의 강제 기아 수용소」, 「히틀러의 첫 번째 사진」 같은 시들 속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이 중에서도 「히틀러의 첫 번째 사진」은 자주 읽히고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다.
앙증맞은 유아복을 입은 요 갓난아이는 과연 누구?
히틀러 부부의 아들, 꼬맹이 아돌프.
법학 박사가 될까나, 아니면 비엔나 오페라의 테너 가수가 될까나?
요건 누구의 고사리 손? 요 귀와 눈, 코의 임자는 누구?
우유를 먹어 빵빵해진 이 조그만 배는 또 누구 거지?
…(중략)…
부모를 닮았고, 바구니 속 새끼 고양이를 닮았고,
가족 앨범 속의 모든 다른 애들과 꼭 닮은 귀여운 아가.
쉿, 아가야, 지금은 울면 안 돼.
사진사 아저씨가 검은 천 아래서 찰칵 하고 사진을 찍을 거야.
클링거 사진관, 그라벤 거리, 브라우나우.
브라우나우는 작지만 멋진 도시.
건실한 회사들, 선량한 이웃들,
효모로 반죽한 맛있는 케이크와 회색빛 빨랫비누 내음.
개의 불길한 울음소리도, 운명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이곳에서 역사 선생님은 옷깃을 느슨히 풀고
공책을 쌓아놓은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히틀러의 첫 번째 사진」 부분
괴물은 태어날 때부터 괴물인가? 이 작품은 귀엽고 앙증맞은 아기였을 히틀러의 “첫 번째 사진”을 찍는 분위기를 상상하여 쓴 글이다. 마치 동화 속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이 천국에서 희대미문의 악이 자라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역사가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 이 평화의 그림 속에서 “역사 선생님”은 “옷깃을 느슨히 풀고” “하품을 한다.” 역사 공부가 필요 없는 상태야말로 역사의 최종 도착지, 파라다이스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개의 불길한 웃음소리도, 운명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20세기 최악의 범죄가 자라났다. 세계는 얼마나 많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20세기는 행복을 향해서,
따뜻한 봄을 향해서 전진할 예정이었다.
공포는 골짜기 너머, 산 너머,
멀리멀리 내동댕이칠 예정이었다.
진실은 거짓보다 한발 앞서
목표 지점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몇 가지 불행이
우리를 엄습했다.
전쟁과 굶주림,
그와 유사한 다른 것들.
…(중략)…
바야흐로 신神을 수긍할 예정이었다,
인간이 선하면서, 동시에 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선함과 강함은 여전히 공존하지 못한다.
선한 인간은 강하지 못하고, 강한 인간은 선하지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바로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엇던
질문이었다.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부분
쉼보르스카에게 20세기는 다른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들에게처럼 ‘악몽’이었다. 20세기에 그녀가 믿고 확신하며 기대했던 모든 것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전문을 인용하지 않았지만, 이 시의 각 연의 시작은 그녀가 희망했던 20세기의 풍경을 언급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은 그 모든 희망이 어떻게 박살 났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그녀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 세계의 ‘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아포리아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출구 없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쉼보르스카가 평생 던진 질문이다. 그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작별하면서 문학에서의 과도한 당파성, 정치성, 선동성을 버렸지만, 사회, 역사적 이슈들에 대한 시선마저 버린 것은 전혀 아니다.
II.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1996) 수상 기념 연설문에서 “알고 있다”는 주체와 “나는 모른다”는 주체의 커다란 차이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녀가 볼 때 “살인자들, 독재자들, 광신자들, 몇 가지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들”은 모두 “알고 있다”는 주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것,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한다. 그들은 알고 있는 주체이므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으며 “결국엔 생존에 필요한 열정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소멸되고 만다.” 쉼보르카가 볼 때, 모름지기 시인은 “나는 모른다”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녀가 볼 때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한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작품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다른 이가 아닌 오직 이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가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행성에?
수없이 오랜 세월 존재조차 없다가 왜 갑자기?
모든 시간과 지평선을 뛰어넘어 왜 하필?
―「경이로움」 부분
전문에서 절반쯤 인용한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쉼보르스카가 볼 때 시는 대답의 언어가 아니라 질문의 언어이다. 질문의 언어는 모든 낡은 것을 새롭게 만들고, 모든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은 것들로 만들며, 정해진 답의 근거를 뒤흔들고, 모든 진리-담론의 영속성을 훼손한다. “나는 모른다”라는 진술 앞에 당연한 권리나 진리는 존립할 수 없다. “나는 모른다”고 진술할 때, 사유는 가장 불온한 것이 된다.
사유보다 더 음란한 것은 없다.
데이지 꽃을 위해 마련된 화단에서
바람에 날아온 잡초가 무섭게 번식하듯
이런 외설스러움은 우리 안에서 금세 자라난다.
사유하는 자들에게 성스러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사물들을 존칭 없이 무례하게 이름으로 부르기,
저속한 분석과 음탕한 통합,
벌거벗은 사실에 대한 야만적이고 방탕한 집착,
은밀한 주제에 대한 호색스러운 접근,
뜨거운 토론은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음악.
―「포르노 문제에 대한 의견」 부분
이 작품을 학문 혹은 사상의 저속한 속성에 대한 비판으로만 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외설’이다. 텍스트의 양가성을 고려할 때, 이 시는 금기를 뒤흔드는 사유의 전복성을 은유한 것으로 읽어도 된다. 사유는 마치 포르노처럼 관습과 권위와 위계를 무시한다. 사유는 심지어 “성스러운 것”의 존재마저 의심한다. 사유는 그 모든 위장과 위선을 까발리고 뜨겁게 토론하며 “발가벗은 사실”에 다가간다. 이런 점에서 사유의 기본은 질문이고 의심이다. 사유는 그 어떤 권위에도 “존칭”을 부여하지 않으며, 관습이 볼 때 “저속한 분석과 음탕한 통합”을 경유하며 진리에 접근한다.
부서지기 쉽고, 유동적이며, 바위처럼 단단한,
휘발성으로 변했다가, 또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는
하늘의 조각들, 하늘의 얼룩들,
하늘의 파편과 그 부스러기들.
하늘은 어디에나 현존한다,
심지어 어둠의 살갗 아래에도.
나는 하늘을 먹고, 하늘을 배설한다.
나는 덫 속의 덫이고,
거주된 거주인이며,
껴안긴 포옹이고
질문에 대답하는 질문이다.
하늘과 땅을 나누는 것은
이 전체성을 곰곰이 생각하기에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 나를 찾아야 할 때
바로 찾을 수 있도록
더 정확한 주소지에
나를 단지 계속 살게 할 뿐
내 정체성의 자질들은
바로 황홀과 절망.
―「하늘」 부분
세계는 분석과 분할로 규정되지 않는다. “하늘”은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무수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파편과 그 부스러기들”의 종합이다. 하늘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위치화localization되지 않는다. 하늘은 “어디에나 현존한다”. 하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식 주체인 나도 이중적이며 대척적인 것들의 모순 형용 속에 존재한다. 나는 먹는 존재이자 배설하는 존재이며, “덫 속의 덫”이고 “껴안긴 포옹”이다. 나는 덫으로 덫을 잡는 덫이며, 포옹당하며 포옹하고, 대답하면서 질문하는 존재이다. 나는 이 모든 “전체성” 속에 탈영토화된, 탈중심화된 혼종hybrid이다. 만일 내가 이 세계 속의 특정 자리로 위치화되고 영토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이 세계가 나를 찾기 편하도록 마련한 방편에 불과하다.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질은 오직 “황홀rapture과 절망despair” 뿐이다. 시인은 존재와 세계의 편재성과 종합성에 감탄(황홀해)하며, 불분명하여 포획되지 않는 존재의 비결정성에 수시로 절망한다.
III.
1996년 스웨덴 한림원은 쉼보르스카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의 시는 반어적인 치밀함ironic precision으로 역사적이고 생물학적인 맥락을 인간 현실의 파편들 속에서 밝혀지도록 한다. … 그녀는 풍요로운 영감과 더불어 단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진정한 평이성으로 인해 시의 모차르트라 불려 왔다. 그러나 그녀의 창조적 작업 속에는 또한 베토벤의 격분 같은 것이 있다.” 그녀가 모차르트와 비교되는 이유는 그녀의 시가 일상의 평이한 용어와 소재를 사용해 시의 가독성을 높였고, 동시에 베토벤과 비교되는 이유는 그런데도 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사물들이 결국
스스로 정돈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중략)…
원인과 결과들을 덮은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벌렁 드러누워
옥수숫대를 입에 문 채
멍하니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끝과 시작」 부분
대부분의 전쟁 관련 시는 전쟁 자체의 콘텐츠에 주력한다. 이 시는 전쟁의 파사드facade가 아니라 매우 평범한 이면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스웨덴 한림원이 이야기한바 “진정한 평이성”에 도달하고 있다. 전쟁의 끝은 전쟁이 아니라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매우 복잡하고도 원시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면 그 자리에 전쟁의 모든 “원인과 결과들을 덮은” 풀밭이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거기에 누워 끔찍한 망각 상태에서 “멍하니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 전쟁은 그렇게 끝도 시작도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때마다 그 자리에서 죽고, 살고, 치우고, 바라보는 주체들(“누군가”들)을 호출할 것이다.
죽는다―당신은 그런 짓을 고양이에겐 해서는 안 된다.
혼자 남은 고양이가 이 텅 빈 아파트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벽을 타고 기어오를까?
가구들 사이에서 몸을 문지를까?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듯하지만
틀림없이 뭔가가 달라졌다.
아무것도 치우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공간이 더 넓어졌다.
어둠이 찾아와도 이제는 아무도 불을 밝히지 않는다.
계단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그러나 그것들은 새로운 것들이다.
작은 접시 위에 물고기를 놓는 손도,
예전의 그 손길이 아니다.
이곳에선 평소의 그 시각에
더 이상 뭔가가 시작되지 않는다.
이곳에선 지극히 당연한 일과처럼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빈 아파트의 고양이」 부분
이 작품에서도 쉼보르스카는 죽음 자체를 논하지 않는다. 그녀는 매우 평이한 언어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죽음의 이면을 호출한다. 주인이 죽고 난 후 텅 빈 아파트에 남은 고양이의 모습을 통해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의 폭력을 언급한다. 주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죽음은 홀로 남은 고양이의 삶에 오래도록 남아 주술처럼 아파트의 공간을 지배한다. 사라진 “발자국 소리”, 사라진 “손”, 사라진 “일과”는 죽음의 후폭풍으로 고양이에게 다가온 끔찍한 고립과 고요를 너무나도 쉽게 그러나 깊게 설명한다. 이 시야말로 모차르트적 평이함과 베토벤적 격노가 함께 스며들어 있는 작품이다.
해결 불가능한 실존과 역사의 거대한 스펙트럼을 샅샅이 후비고 다니는 쉼보르스카의 사유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신이고, 그로 인한 결과물은 신에 관한 의식, 즉 신-의식God-consciousness이다. 그녀는 사물의 세계를 미시적으로 관찰할 때조차 그것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신의 손가락을 감지한다. 그녀는 신에게 따지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한다. 때로 신에게 항의하기도 한다. 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녀의 시의 근저에는 항상 신-의식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의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그녀의 절실한 대응에서 온다. 현세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어떤 능력도 인간에게 없음을 확인했을 때, 주체가 마지막으로 응시하는 것은 저 위에 있는 신의 모습이다. 그 모든 처절한 생각의 끝이 신에 관한 사유로 모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초기부터 순서대로 열거하면 「무제」, 「개요」, 「풍경」,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조그만 실험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대낮 한 개의 전등불 아래서,
밤엔 수십억 개의 불빛 아래서?
우리는 실험용 세대들이 아닌가?
한 유리병에서 다른 유리병으로 부어져,
시험관에 담겨 흔들리고,
눈보다 더 정교한 그 무엇으로 면밀히 관찰되고,
그러다가 결국엔 핀셋으로 집혀서
제각기 따로 들어 올려지는 거 아냐?
아니, 어쩌면 영 딴판일지도 몰라:
아예 아무런 간섭이 없는 것?
모든 변화는 계획에 따라
스스로 일어나고?
…(중략)…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몰라:
그곳에선 사람들이 자질구레한 에피소드에 관심을 갖는 거 아냐?
자, 보라구! 거대한 화면 위에서 어린 소녀가
소매에 단추를 달기 위해 열심히 바느질하고 있잖아.
레이다가 비명을 질러,
관계자가 뛰어와.
박동하는 조그만 심장을 품고 있는
저 가냘픈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중략)…
누군가가 황홀경에 빠져서 소리칠 거야:
자, 보스에게 전해,
와서 직접 이것을 꼭 보셔야 한다고!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부분
이 시에선 신에 관하여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몇 가지의 가정들이 열거된다. 첫째는 피조물을 실험실의 실험 대상처럼 철저한 수동성의 위치에 놓는 신이다. 둘째는 마치 태엽을 감아놓은 시계가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 돌아가듯이 “정해진 계획에 따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미리 설정해놓고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는 신이다. 셋째는 바느질하는 어린 소녀의 “박동하는 조그만 심장”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신이다. 이런 신들을 열거해놓고 대하는 쉼보르스카의 태도는 선택이나 대답이 아니라 철저하게 질문이다. 그녀는 특정한 신의 개념을 선택하지 않고 오로지 “어쩌면”이란 가정하에 질문을 던진다. 그렇지만 문맥상으로 볼 때 시인이 가장 원하는 신의 모습은 마지막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신의 세계에서 가장 큰 사건은 어린 소녀의 가냘픈 심장의 박동이다. 그것의 움직임에 감격하고 주목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인류에게 죽음과 전쟁의 역사는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쉼보르스카는 마지막 신의 개념마저도 물음표에 맡긴다. 그녀의 사유는 이렇게 다양한 신의 이미지 주변을 맴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세계는 광대하다. 그녀의 스펙트럼은 개인의 사소한 일상에서 인류의 역사로, 그리고 신에 관한 명상으로 확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개념에 잘 어울리는 ‘보편성’에 도달해 있다. 게다가 그녀의 시들은 대부분 일상의 평이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수준 높은 가독성이야말로 그녀의 시를 모차르트의 음악에 비견케 한다. 그녀는 또한 평이한 언어에 넘치는 영감과 상상력을 덧보태고 삶의 비극과 고통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그녀를 베토벤의 음악에 비견케 하는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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