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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안두희의 감형과 석방
안두희는 선고가 끝난 뒤 일단 헌병 사령부 감방에 수감되었다. 그러다 안두희가 사령부 감방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군 당국은 하는 수 없이 이태원의 육군형무소로 그를 이감시켰다.
그러나 감방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안의사’에 대한 대접은 소홀함이 없었다.
안두희는 별도로 지어진 건물의 특별 감방에 수감돼 있었다. 말이 수감이지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형무소 소장이었던 백원교 소령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랬다. 감방엔 침대로 있고 응접실도 있었다. 물 떠다 주고 심부름을 하는 당번도 있었는데 헌병 하사 김모였다.
안두희는 육군형무소에서 죄수로서 복역한 게 아니다. 식사도 죄수들이 먹는 것을 안 먹었다. 내가 순찰을 돌다 가보면 과일도 쌓여 있었다. 술 먹고 노래도 부르고, 서청 애들이 와서 같이 놀고 그랬다.(장흥 전 헌병 사령관의 조카 장석인 씨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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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 소위로 근무했던 장석인은 전봉덕이 사령관이 되면서 이태원 육군형무소 경비과로 쫓겨났으며 그가 전출된 지 10여 일 후에 안두희가 이감되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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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종신형을 선고받은 지 3개월 만인 11월에 안두희는 15년으로 감형조치를 받았다. 국방장관 신성모가 “안두희가 모범수로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으므로 종신형을 15년 정도로 감해 달라”는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의 상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안두희가 감형조치 되었다는 보도에 한독당은 정당으로서는 이미 생명이 끊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6․25가 발발한 지 이틀 후인 6월 27일, 안두희는 마침내 잔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육군형무소에 있다가 6․25를 만났다. 못 믿겠지만 이튼 날부터 무기수인 내가 총 들고 나가서 헌병들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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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1992년 4월 12일 내게 이때 자신이 좌익사범 28명을 한강 모래사장에서 사살했다고 밝혔다.
“후퇴는 해야 하고 서대문 교도소 안에 수감되어 있던 빨갱이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판인데 겁이 나서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지원해서 들어갔다. 15년 이하의 사상범들을 모조리 형무소 내에서 처치하고 15년 이상의 사상범 28명을 내가 인솔하고 나왔다. 데리고 한강을 건너려는데 인민군의 총성이 너무 가까이까지 압축되어 와서 할 수 없이 28명 전원을 강변에 끓어 앉혀 놓고 총살시켰다.”
그는 그 공로로 무공훈장을 탔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나중에 또 무슨 전투에서 공을 세워 훈장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걸 아직 못 받았다며, “정부가 내게 훈장을 하나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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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헌병 사령관 송요찬 대령이 시켜서, 내가 헌병 전투부대 형무소 중대장 노릇을 했다. 육군형무소에 있던 장사병들이 총도 쏠 줄 몰라서 내가 가르쳤다.
그런데 그때 형무소 소장인 백원교 소령이 송요찬 헌병 사령관이 날 찾더라고 했다. 헌병 사령부에 갔더니 송대령이 이러는 것이었다.
“안소위, 이제 시집살이 그만 해라. 포병에서 너희 보스(김계원)가 와서 네가 꼭 있어야 한다니, 백소령(형무소장)한테 가서 인사나 하고 가라.”
그래서 나는 헌병 사령부에서 벗어나 대전에서 포병으로 갔다. 김계원씨가 포병 사령관을 대행했는데(포병 사령관이었던 장은산은 안두희 재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지은이) 대포도 없고 포병 장교도 없어서 쩔쩔 맬 때였다. 그때 맥아더가 155밀리 포를 보내 와서 내가 부산 가서 그걸 인수해 오고, 또 유성온천 뒤에 마련된 포병 교육장에 가서 김안일 대위와 포병들 교육을 시켰다.(안두희, 1984년 7월 『월간 조선』인터뷰)
이어,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와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인 7월 10일,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부장관인 신성모는 국방부장관 특별명령 제4호로 안두희를 육군 소위로 임명, 원대복귀 하도록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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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부산에 내려가니까 신성모 국방장관이 자신을 이대 총장 김활란 박사 사무실로 불러 ‘그 동안 수고했다’며 금일봉을 주었다”고 밝혔다. 또 부산 피난 시절, 자신의 형인 안규희가 군용 휘발유를 몰래 빼내 팔아먹다 걸려들었을 때, 노덕술․ 최운하에게 부탁해 풀려나게 해주었다고 밝혔다. 노덕술, 최운하, 김태선, 윤치영 등과는 그 후로도 교분을 계속해 군납업에 손대기 전 다소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 사람들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한다. “찾아가서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면 두말없이 돈다발을 건네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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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후퇴해 와 갈팡질팡하고 있던 그 경황 중에 안두희를 복귀시키는 특별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안두희의 말대로 ‘한 사람의 사병이라도 아쉬워서’였겠고, 어찌 보면 안두희에 대한 신성모 및 암살배후자 일당의 각별한 신의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일화’였다.
복귀 두 달 후에 안두희는 다시 중위로 진급하였고 1951년 2월 15일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지시로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 명령 제56호에 의해 형을 완전히 면제받게 되었다. 일사부재리, 이젠 누가 뭐라고 해도 백범 암살사건으로 안두희를 건드릴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최소한 ‘법률적으로는’ 티끌만한 제약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법률의 원칙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1951년 8월 20일, 제47차 국회 본회의에서 무소속의 서이환(徐二煥) 의원은 ‘고 송진우씨 살해범과 고 김구씨 살해범 출옥에 관한 긴급 질문’을 제기했다(송진우 선생은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돌아가셨다).
그는 ‘한현우는 내무부장관실을 무상출입하고 안두희는 국방부 모 국(局)의 대령급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따져 물었다.
이때의 국회 답변에서 그간에 있었던 안두희에 대한 각종 법률적 조처들이 상세히 밝혀졌다. 국회에서 안두희를 둘러싼 논란이 있은 다음에도 안두희는 별탈 없이 대위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너무나 알려지고 장교 생활에 거북한 일이 겹쳐 일어나 1951년 12월 25일 육군 본부 특명 갑 제718호로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 조치되었다(안두희에 대한 재판이 진행될 때의 육군 참모총장은 채병덕 소장, 그가 석방된 후 복권 승진할 때는 정일권 소장, 그를 현역장교에서 예편시킬 때의 육참총장은 이종찬 소장이었다).
한편 김창룡은 피난지 부산에서도 ‘안의사’의 가족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대전에 있을 때 삼성국민학교에 가보니 포병의 가족들이 피난 나와 있었다. 여편네와 아이들이 교실에서 가마니 한 장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릇이 없어서 수박껍데기에 김치를 담아 놓고 있었다. 며칠 후 또 한 번 갔더니 김창룡이 다녀갔다고 했다. 안소위 가족을 찾아서 광목 한 통과 모포, 또 애들 옷가지 같은 걸 주고 갔다고 했다.(안두희, 1984년 7월 『월간 조선』인터뷰)
그 후 안의 가족들은 전란 중에도 남부민동 천마산에 집을 짓고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75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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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안두희의 전성시대
안두희는 예편 뒤에도 자신을 극진히 보호해 주는 자들의 도움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냈다. 육군 특무대를 무상출입하고 있던 김지웅이 여전히 뒤를 봐주었고 송요찬의 뒤를 이어 헌병 총사령관이 된 원용덕 중장은 그를 헌병 총사령부 문관으로 채용하여 지프차까지 제공했다.
그 후 그는 김창룡의 도움으로 서울 명동성당 근처에서 건설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말이 건축회사이지 실제로는 원용덕과 김창룡이 돈을 대주고 안두희가 경영하는 우익 단체였다는 말도 있다. 이때 안두희는 예전에 김성주가 데리고 다니던 서청 출신 청년들을 자기 밑으로 끌어 모았다고 한다.
이 건설회사는 얼마 못 가 망해 버렸다. 아마도 후견인이었던 김창룡 특무대장이 피살된 게 주요한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때 포병 출신 사단장 이기건 소장(그는 평북출신)이 안두희에게 기별을 해 왔다.
명동에서 부사장 하다가 망했을 때였다. 그때 포병 출신인 모 사단장 이기건 장군이 부관을 시켜서 날 좀 양구로 오라고 했다. 가서 보니 제발 와서 군납을 좀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갔더니, 사단, 군단에서 불도저를 내줬다. 또 그곳 특무대에서도 많이 봐줬다.
그 후 나는 군납을 해서 강원도에서 세금을 두 번째로 많이 낼 만큼 큰돈을 벌었다. 두부, 콩나물, 쇠고기, 돼지고기 뭐 이런 것들을 여러 사단과 군단에 납품했다. 김장도 큰 장사였다.
이때 차린 군납공장의 이름이 신의(信義)기업사였다(묘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실제로 자유당 정권과 안두희는 신의로 맺어진 사이여서인지 흥망을 같이했다).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안두희의 군납업은 번창일로였다. 장교들은 묘한 외경심까지 가지고 안두희를 대했고, 그는 주로 사단장, 군단장과 상종했다. 그러니 안두희가 고백한 대로 “속잎이 시퍼렇게 돋은 콩나물이나 썩은 돼지고기, 쇠고기”를 납품해도 “양은 적게 단가는 비싸게”해도 누구 하나 뭐라 그러는 사람이 없었다. 군납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인 시절에 “제발 와서 군납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군납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나, 제대로 납품을 하고도 굽실거리며 정기적으로 상납을 해야 했던 풍토 속에서 오히려 적은 양을 비싸게(때로는 불량품까지!) 납품하고도 “돈을 긁어모으다시피”했다는 이야기로 당시 안두희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양구에서 군납을 할 때 안두희는 자유당의 고관대작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소문으로는 사단장과 군단장이 안두희에게 문안을 드렸고 또 안두희는 그들의 관사에 무시로 출입했다고 한다.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자주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이상철, 인태식, 김진만, 이재학 이런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고관대작들이 우리 집에 우르르 몰려오니까 지방의 관리나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난리를 피웠다. 사단장은 그런 권력자들이 온다면 저 멀리 나가 칸보이를 했다. 이재학은 꼭 양담배를 피웠는데 빨간 팔말을 가지고 다녔다. 사단장도 그걸 알고 미리 사 놨다가 대령했다.
이렇게 자유당의 권력자들이 우리 집에 드나드니까 옆에서 보던 관리나 군인들이 내가 이박사랑 깊은 관계가 있는 줄로 믿었다. 심지어는 모 사단장까지도 내가 이박사랑 가까운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두희는 내게 배후를 털어놓기 전까지는 그런 ‘오해’와는 달리 자신은 그저 돈 많은 재산가였을 뿐 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군납공장이 양구면 중리 65번지에 있었다. 양구 군청에서 150미터밖에 안 되는 곳이었다. 파로호 상류가 우리 집에서 200미터도 안됐다. 그런데 파로호에 좋은 낚시터가 있었다.
나한텐 모터보트가 있었다. 낚시질을 하자면 그걸 타고 김일성 별장이 있는 데까지 가야 했다. 아무리 사단장 군단장이라도 모터보트는 없으니까, 낚시하러 가려면 우리 집 앞에 와서 나의 보트를 타고 가야 했다.
양구엔 머루, 다래가 유명했다. 그래서 내가 머루술, 다래술을 담갔다가 그들에게 대접하곤 했다.
단순히 모터보트가 있다고 해서 그런 고관들이 안두희의 집을 찾게 되었을까?
남들이 자꾸만 나와 이승만 정권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그걸 마음껏 이용했다. 군납하기 전에 내가 돈이 없어서 쩔쩔맸는데, 그때 대구에 있던 모 장성한테 가서 군용 지프 8대를 민간용으로 바꿔 달라고 했더니 선뜻 해줬다. 그걸 팔아서 서청애들 나눠줬다. 그 뒤에도 관청 같은 데 가서 “나 안두희요”하고 큰 소리를 빵빵 치니까 다 통했다.
요컨대 자신은 그저 애국심에서 단독으로 김구를 살해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이 지레 이승만 정권과 자기 사이에 무슨 큰 관계라도 있었던 양 생각하고 알아서 기니까 자기도 그걸 역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거족적인 추앙을 받던 민족지도자를 살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한 살인범이 전란의 와중에서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려 마침내 대자산가가 될 수 있었던 까닭치고는 참으로 깜찍스럽다.
그러나 가짜 이강석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면서라도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암살에 관련되지 않았다고 버텨 온 안두희의 뻔뻔스러움, 그 무거운 입이야말로 안두희를 이런 화려한 날들로 이끈 열쇠였다.
76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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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입이 가벼운 사람은 일찍 죽는다
그러나 안두희의 직속상관인 포병 사령관 장은산은 그 점을 자각하지 못했다. ‘무거운 입’을 가지지 못한 탓에 그는 제 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만군 출신인 장은산은 건군 초기에 소령으로서 초대 육군포병단장이 되었고, 1948년 12월에는 중령이 되어 육군 잠정(暫定) 포병 사령관에 부임했다. 국방부 발행 『한국전쟁사』1권에 의하면, 1949년 4월 1일 경기도 광주(廣州) 사격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임석하에 포병 사격 훈련이 실시되었는데, 그 훈련성과가 매우 좋았다 해서 4월 30일에 장은상 중령의 육군포병단은 전군 중 최초로 이대통령의 표창장을 받았다.
건군 후 대통령 부대표창 제1호를 받은 장은산 중령은 6월 10일에 포병 사령부가 포병연대로 개편될 때 연대장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이 무렵에 안두희 소위를 전속부관으로 발령하여 손아래 두었다. 그러나 전속 부관이라는 직명은 형식뿐이었다. 안두희는 지프차 한 대를 배당받아 근무시간에도 마음대로 시내를 돌아다녔으며 김지웅 등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연대본부에서는 안두희를 ‘안형소위(安兄少尉)’라고 불렀다. 장은산과 안두희가 사석에서는 ‘안형’ ‘장형’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장은산은 암살이 있기 며칠 전인 6월 22일, 난데없이 서울대학병원 특실에 입원하였다. 폐가 좋지 않아 검사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6월 25일은 포병 사령부 본부가 영등포에서 후암동으로 이전하는 날이었는데도 사령부의 최고책임자가 급하지도 않은 신병을 핑계로 병원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안두희 소위도 24, 25일 양일간 결근을 하였다. 그는 취조 당시 결근 이유를 묻는 홍영기 소령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 국사봉 사건에 국군 창설 후 처음으로 포병대가 출동하게 되었는데 포병 사령부 작전 명령이 제7대대 중에서 1개 중대 출동이라 하기에 당시 제7대대 제1중대장이었던 나는 틀림없이 우리 중대라고 믿고 숙원이 달성되었다는 기쁨에 환호작약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 6월 21일부로 연락장교로 전속되었으니 그 실망이 얼마나 하였겠습니까. 이런 기분 관계로 며칠 부대에 나가지 않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연락장교로 배속된 까닭은 “전임 연락장교인 김소위가 수일전 술자리에서 상관과 싸우다가 두들겨 맞고 입원과 동시에 휴직명령을 받는”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부관은 고대했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돼 마음을 달래려고 결근하고 그 상관은 갑자기 몸이 아파 입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장은산 사령관은 안두희가 백범을 암살하는 데 성공한 다음 군 당국의 명령에 따라 2명의 부관을 데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백범 선생의 국민장이 치러지는 북새통 속에서 소리 없이 몰래 떠나 버린 것이다.
그 장은산이 국내에 다시 나타난 때는 9․28 수복 직전, 안두희가 특사조치로 장교에 복귀한 직후였다. 그는 국방부(육군본부)의 귀국명령을 받지 않고 자의로 돌아왔다. “귀국명령은 없었으나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하기 때문에” 귀국했노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장은산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육군에 독립적인 포병 사령부가 없어지고 각 군단 단위로 포병부대가 배속 개편되었으므로 ‘포병의 아버지’라고 자화자찬하던 그에게 상응하는 요직이 없었다. 그 사이에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채병덕 장군이 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하동(河東)전투에서 전사한 것도 장은산에게는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런 장은산으로서는 김창룡이 그 동안 중령으로 승진하여 천하를 좌우하고 다니는 게 못내 눈에 거슬렸다. 그는 빈둥거리며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고 하루는 술기운이 도도해져 부산 모처의 술집에서 “내가 안두희의 진짜 보스다”라고 기염을 토했다. 한두 번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 아예 술만 먹었다 하면 그런 얘기를 떠벌리고 다녔다.
이 정보가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들어가자 김창룡은 장은산의 입을 틀어막기 위하여 부하로 하여금 대구 거리에서 술에 취해 돌아가는 장은산을 연행케 하여 육군형무소 특별감방에 처넣었다. 그에게 씌워진 죄목은 군무이탈죄, 명령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귀국했으며 정세가 불리해지면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부산에다 배를 준비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아무도 장은산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가족들에게 수감 중 자살하였다는 통지서와 함께 유골이 전해졌다. 군대내에서는 장은산이 자살한 게 아니라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입이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77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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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성주 살해사건
암살 당시 서청 부단장으로서 서청원들을 동원하여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시위를 벌였던 김성주 역시 장은산과 같은 이유로 죽었다.
1953년 6월 25일 오후 2시, 김성주는 을지로 2가에서 갑자기 몰려든 수명의 헌병들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고 헌병 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연행된 지 4시간 만에 그는 헌병 사령관 원용덕 중장의 명령으로 긴급 구속되었다. 계엄 중이라 구속영장도 필요 없었다. 그의 죄목은 국가변란죄, 조병옥, 장면 등과 모의해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고 정부를 전복하려했다는 것이다.
헌병 사령부에서는 처음에는 김성주와 조병옥을 대질시키고 그 둘이 반공포로 석방을 비난했다는 혐의로 심문했다. 그러다 별 성과가 없자 김성주를 고문하며 북괴에서 제공해 준 선거자금으로 조봉암과 함께 국가변란을 모의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했다. 김성주가 고문에 못 이겨 의식을 잃은 사이에 취조관들은 그의 허위자백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구속된 지 3개월 만인 9월 14일에 열린 고등군법회이는 검찰측의 기소를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기각해 버렸다.
당황한 원용덕은 새로운 죄목을 붙여 김성주를 재차 기소했다. 이때 김지웅이 증인으로 나섰다. 김지웅은 이때 백범 암살의 대가로 필동에 대궐 같은 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돈을 물쓰듯 쓰고 다녔다. 당시 김지웅의 공식 직함은 헌병 총사령부 특수정보고문 및 육군 특무대 촉탁 문관이었다. 김지웅은 재판정에서 1952년 10월 하순경 미국으로 떠나는 와빈슨이라는 미군 장성이 부산 부두에서 자신에게 “김성주가 당신과 신성모, 김태선,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 하고 있으니 주의하시오”라는 경고를 했다고 증언했다.
1954년 3월 다시 군사재판이 속개되었다. 김성주의 변호인들은 공소장 내용은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라며, 서울 의대 김자훈 교수에게 신체 감정을 의뢰했고 감정 결과 김성주의 온몸이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음이 판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미군을 통틀어 김지웅이 증언한 ‘와빈슨’이란 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보가 왔다.
4월 7일 검찰관 정덕균 대위는 김성주에게 7년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4월 19일을 언도 공판일로 정하고 폐정했다. 그러나 예정된 언도공판이 아무 이유도 없이 5월 6일로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내무부 치안국장 문봉재는 김성주가 1950년 11월 초순경부터 말까지 국군의 북한 진격으로 평양이 탈환되었을 때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대신해 정부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유엔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진격이 순조롭게 되자 김성주를 평안남도 지사대리로 임명하여 행정을 맡도록 했다. 수복지구의 모든 행정권은 유엔군에 있었기 때문에 이 조치는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이승만은 문봉재, 김병연 두 사람을 평안남도 도지사로 임명했다. 두 사람이 임명장을 가지고 평안남도 도청에 도착했을 땐 이미 유엔군의 임명장을 받은 김성주가 먼저 도지사실에서 집무하고 있었다. 문․김은 자기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임명된 평안남도 도지사임을 주장했으나, 유엔군에 의해서 일축당하고 김성주와 논쟁 끝에 돌아오고 말았다. 음모자들은 이것을 트집잡아 김성주가 남북 협상을 해서 연립정부를 수립할 목적이었으며, 이의 실천을 위해 대한민국의 명령을 받고 입북한 문․김의 일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또 헌병 사령부에서는 김성주가 서북청년단 부하들을 동원하여 대한청년단과 모의, 국가변란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죄명도 새로운 발표했다.
새로운 죄명이 발표된 후 초조해진 가족들은 4월 24일 김성주가 구금되어 있는 서울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그러나 형무소를 지키는 헌병들은 김성주가 형무소에 있지 않다고 했다. 가족들은 이어 헌병 사령부에 가서 문의했으나 그곳에서도 모른다고 했다.
5월 6일 언도공판일, 상오 11시 재판장 김학성 대령과 3명의 심판관 및 법무사, 검찰관들이 출석, 공판 진행 준비를 했으나 피의자가 출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헌병 사령부와 형무소로 연락했으나 아무런 통고도 받지 못한 채 오후 늦게 폐정했다.
5월 10일 국방부 보도과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담화를 발표했다.
“1954년 5월 6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김성주의 피의 사실을 인정하여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언도공판날 법정에도 나오지 않았던 피고인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 김성주가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자 그의 가족들은 1955년 1월 국회에다 진상조사를 청원했다. 그 청원에 따라 구성된 특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김성주의 무죄가 확실해지자 원용덕 사령관은 헌병 사령부 제5부장 김진호 중령에게 재조사를 명령했다. 김진호는 4월 16일 아무런 법적 절차도 밟지 않고 김성주를 형무소에서 헌병 사령부로 끌어내와 무자비하게 고문하면서 새로운 자백을 강요했다. 고문 끝에 졸도한 김성주를 취조관들은 담요롤 돌돌 말아 시멘트 바닥에 방치했다. 김성주가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자 취조관들은 담요 위로 물을 끼얹었다. 그런데 물에 젖은 담요가 몸에 달라붙는 바람에 김성주는 질식해서 죽고 말았다. 당황한 취조관들은 김성주를 암매장한 뒤 상부에다가는 옥사했다고 보고했다.
이것이 김성주 고문 살해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런데 4․19 후, 이 사건을 재조사할 때 붙들려 온 원용덕은, 김성주를 조사하라는 지시는 이승만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승만은 왜 김성주를 ‘극형에 처하라’고 했을까. 검찰에 증인으로 나온 이기련(당시 포병학교 부교장) 예비역 대령은 ‘당시 헌병 총사령부 모 중령을 통해 김성주가 김구 살해의 이면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밖에 김성주와 같이 서북청년단 운동을 같이 해온 강태학, 유인규 등도 “김구 선생 살해 내막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승만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거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성주는 김지웅․안두희와 매구 가까운 사이였고 암살에 직접 간여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로 측면 지원을 해준 걸로 알려져 있다. 암살 행동대 가운데 2명은 김성주가 추천한 사람들이라고 하며 알려진 대로 안두희 석방운동도 맹렬히 벌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 라이벌인 문봉제와 겨루면서 암살에 직접 관여한 사람들과 사이가 벌어졌다는 데 있었다. 옛날의 동지들이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동지였던 시절에 공유했던 비밀이 김성주의 재앙의 근원이었다. 사이가 나빠지면서 김성주는 암살 배우자들을 비난하며 다녔고 그것이 그들의 귀에 포착되었던 것이다. 암살자 일당에게 김성주는 제거해야만 될 시한폭탄이었다.
암살자 일당이 김성주를 제거한 과정을 보노라면 전율이 느껴진다. 고문, 조작, 죄목 날조, 거짓 증언, 모살....
그러나 이 몸서리쳐지는 과정이야말로 이승만 정권의 숨김없는 모습이다. 음모와 살인교사의 능수들이 장관이며 사령관직에 앉아 정적들을 교묘히 제거하면서 이 나라를 썩어빠진 독재 정치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음모는 음모를 낳는다. 하나의 음모를 가리기 위해 더 많은 음모가 동원되고, 그리하여 최초의 음모마저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깨지고 부딪히다 마침내는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명언>
나무에 오름에 가지를 잡는 것은 족히 이상한 것이 아니며,
벼랑에서 손을 놓은 것은 가히 장부로다.
백범 선생이 사춘기 시절 과단성을 그리기 위해
항상 마음속에 새기던 말 -『백범일지』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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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의 음모
지금까지 우리는 암살자 일당이 퍼낸 『시역의 고민』을 통해, 그들 자신의 언어로 표현된 암살의 동기를 살펴보았다. 또한 암살 이후 안두희 처리를 둘러싼 여러 수상쩍은 정황을 살펴봄으로써 음모자들의 윤곽을 대강 밝혀 보았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때이다.
누가 백범을 죽였는가?
홍종만씨는 1974년 고백수기에서 암살을 공모한 사람들을 이렇게 열거했다.
정치인으로는 한민당 사람들이 의심이 갔다. 특히 김준연씨가 의심이 갔다. 김지웅이가 김준연¹ 씨 말을 많이 했고 또 자주 만났다. 그가 직접 꾸몄는지는 모르지만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사건 후에도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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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¹ 일제 치하에서 ML 당 당수를 지낸 경력이 있으며 이후 전향하여 한민당 총무로 활동하였다. 암살 음모의 열쇠를 쥐고 있는 짐지웅은 평소 자신을 김준연의 비서로 자칭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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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포병의 장은산 사령관이 직접 지휘한 건 안두희한테 들어서 잘 안다. 그리고 경찰도 개입했다. 김지웅이 당시 시경국장이었던 김태선² 씨와 자주 만났다. 그리고 장관급으로 신성모가 가담했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 주석
(김태선² 암살 당시 서울 시경국장. 홍종만의 증언에 따르면 김지웅이 김태선으로부터 돈을 자주 받아 왔다고 하며 암살 당일 9시에 시경 간부들을 비상소집하였고 저녁에는 종로경찰서장을 시켜 민간인 행동대원들을 종로서에 격리․수용시켰다. 또한 경교장 습격 시도 땐 작전 계획을 짜는 데로 참가했다고 한다.
“습격하기 위해 경교장으로 가는 도중 안두희가 이런 말을 했다. 안두희와 김지웅, 장은산, 김태선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그날의 작전 모의가 잇었던 모양인데 시경 국장이던 김태선이 경교장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관 두 명을 죽이고 들어가라고 했단다. 그러나 안두희가 그 제안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관으로 안 들어가고 뒷담을 넘어 들어가게 되었다”홍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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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19 직후 고정훈³ 씨는 신성모 국방장관과 임병직 외무부장관 그리고 김준연, 장은산, 김지웅을 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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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훈³ 고씨는 해방 후 미소 공동위원회의 미국측 통역을 맡았고, 이후로도 미국에 전달되는 문서를 번역하는 등 정부 수립 과정에서 미국의 정보원 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 5월 4일 기자회견을 통해 암살 내막을 최초로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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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장흥 전 헌병 사령관은 한민당, 88구락부, 서북청년회, 신성모를 사건의 주모자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증언을 포함하여 이제까지의 여러 증언에서 배후세력으로 거명되거나 의심받은 사람을 모두 적어 보면, 신성모, 채병덕, 전봉덕, 원용덕, 김창룡, 장은산 등의 군수뇌부, 김태선, 최운하, 노덕술 등의 경찰수뇌부, 김준연․임병직 등의 한민당 정치인, 브로커 노릇을 한 김지웅․김성주 등이다. 말하자면 군부, 경찰, 한민당, 극우단체로 이루어진 반민족 연합전선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 심증만 있었을 뿐 뚜렷한 증거가 없었던 미국과 이승만의 개입설을 안두희가 1992년 9월에 확인해 주었다.
미국의 개입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이미 제1장에서 언급하였기에 여기서 재론은 않겠다. 다만 여기서는 당시 미국의 정보기관이 여러 정당․단체에서 정보원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는 것, 국내 미국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라는 미군 중령이 조병옥․장택상의 소개로 일찍이 안두희를 접촉한 후 그 밑의 중위가 거의 매일 암살 전까지 안을 만나 왔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백범을 ‘대한민국에 해를 끼치는 암적인 존재’라고 비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언젠가 미국 정부문서보관소 같은 데서 백범 제거 계획이 나올’ 때까지는 미국의 개입 여부는 일단 그 정도로 덮어두기로 하고 결론적으로 암살의 모의와 결행 과정을 재구성해 보기로 하자.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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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8구락부
앞서 암살배후자로 거명된 사람들은 거의 다 소위 88구락부의 맹원으로 알려져 있던 사람들이다. 88구락부라는 이름은 이 그룹이 주로 종로구 팔판동 8번지에 있는 허정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88구락부’가 정확히 언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시작되었는지는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다. 대개는 신성모가 내무장관에서 국방장관으로 승격된 직후부터 군부와 경찰의 정보관계 핵심자들이 좋게 말해서 ‘정보교류’를 위해 어울린 것으로 짐작한다.
신성모 국방부장관,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하여 김태선 등의 경찰 수뇌부, 신성모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던 김창룡, 우익단체 출신의 청년 장교가 많이 집결된 포병 사령부의 사령관 장은산, 헌병 사령부의 전봉덕, 그리고 군부와 경찰을 오락가락 하는 고급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주요 면면들이었다. 그 외에 친일 경력이 있는 한민당 주요간부와 정계의 거물들도 몇 명(김모, 윤모)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관계기관대책회의’ 또는 정계․경찰․군부를 망라한 이승만 정권 실세들의 비공식적인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정보를 다루는 핵심 요직의 인물들이 모인 자리라 여기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보의 조작․통제가 가능했다. 더구나 여기에 망라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들이야말로 이승만 정부의 통치이념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는 전위들임을 알 수 있다. 신성모 정도를 빼고는 전부 칠일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 한결같이 광신적인 반공사상으로 무장하고 있다(친일경력이 화려한 사람일수록 반공에 철저했다. 반공이 친일을 면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상류층의 서북청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당연히 민족양심세력의 구심이었던 김구를 원수처럼 여겼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당시 떠돌던, 김구와 한독당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이는 여러 가지 소문들의 진원지가 바로 이 88구락부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장안에는 김구와 한독당에 대해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지 모르는 온갖 모략성 소문이 난무했다.
“백범이 남북협상차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과 모종의 밀약을 하고 돌아왔다 하더라.”
“한독당 정치자금은 공산당이 제공한 것이라더라. 이북에서 넘어오는 상인들을 수사기관에서 체포해 보면 대부분이 금, 은, 인삼 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남한에서 팔아 그 돈을 김구의 한독당에 줄 계획이었음이 밝혀졌다더라.”
“전번에 춘천 북방에서 육군 2개 대대가 월북한 것은 김구의 은밀한 지시로 이루어졌다 하더라.”
“국회 소장파 의원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건 김구라더라. 당국에서는 경교장을 덮치고 싶어도 김구 선생의 체통을 생각해서 망설이고 있다고 하더라.”
그들이 이런 소문을 퍼뜨린 까닭은 불문가지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김구와 한독당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최대의 위협세력은 한민당이 아니라 김구다. 김구와 한독당을 그대로 놔두면 내년(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큰 변수가 생긴다.”
“김구는 북괴 김일성과 내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박사를 꺾을는지 모른다.”
이들은 이승만과 그야말로 생사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마음도 그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승만이 김구를 대단히 부담스러워하고 없어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걸 재빨리 간파하고 그에 부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백범을 암살하되 이승만의 입장을 난처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각본을 짜냈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다.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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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승만의 내락
그들의 이런 상황 판단과 그들이 치밀한 의도 아래 조작해 낸 정보들은 필경 이승만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로 조소앙의 증언(백범 살해 후에 털어놓은 비화)이 있다. 조소앙은 백범 암살이 있기 얼마 전에 경무대로 이승만을 방문했다고 한다. 시국담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이 백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백범이 공산당과 내통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립네다. 참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백범의 민족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아닙네다. 백범이 남북협상이다 뭐다 하고 평양에 다녀온 후로부터 생각이 좀 달라지고, 백범 주변에 빨갱이가 잠입했다고 합네다.”
“저도 남북협상하려고 평양 갔다 왔지만 그럴 계제(*階梯)가 못됩니다. 누가 백범을 모략하는 소리겠지요.”
“내가 듣기로는 심상치 않습네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으니 백범이 몸가짐을 신중히 해야 할 겁니다.”
조소앙은 이대통령의 이런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음날 경교장에 들러 백범에게 경무대에서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백범, 신변을 조심하고 당분간은 자중하도록 하시오.”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우남(雩南)이 나를 해치겠소. 나는 은퇴한 정객이나 마찬가진데.”
“백범, 사람 마음은 믿을 수 없는 것 아니겠소.”
“나야 언제 죽어도 한이 없는 사람이오. 우리 모두 중국에서 몇 번씩 죽었던 몸이잖소.”
“농담할 때가 아니오. 백범! 우리가 언제 우리 한 목숨 잘되라고 독립운동을 했소? 아무쪼록 조심해야겠소.”(『비화 제1공화국』동아일보사)
조소앙이 밝힌 이와 같은 이야기는 백범 암살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이승만이 백범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제3자에게 드러낸 유일한 객관적 자료이다.
이승만은 군부와 경찰의 정보관계자들로부터 김구 선생과 한독당에 대한 갖가지 보고를 들었고 또 그들이 살해도 불사할 만큼 백범에 대해 극도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인지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이승만이 직접적인 살해 지시는 안했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지시나 다름없는 암묵적 교사를 했거나 아니면 그런 흉계를 짐짓 모른 척해서 실행토록 했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이승만은 최소한 살인방조의 죄는 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이승만이 살인을 적극적으로 교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안두희를 직접 만나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잘하라”고 말할 때 이승만은 과연 일개 소위에 불과한 안두희가 왜 국방장관․육참총장과 함께 경무대까지 왔는지 몰랐을까?
이승만의 전력을 보면 능히 암살을 교사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승만은 젊어서부터 권력 지향적이고 자기 위에 누가 있다는 걸 못 참는 성격이었다. 그는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 이경선(李敬善)과 김해 김씨 사이의 독자로 태어나 19세까지 전통 교육을 받았으며 그 사이 입신출세를 위해 몇 년에 걸쳐 과거를 보았으나 그때마다 낙방했다. 결국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움으로써 개화의 물결과 접하게 되고 드디어는 국정 개혁을 부르짖으며 개화파에 가담한다. 독립협회의 일로 7년의 옥고를 치른 뒤 1904년에는 독립 호소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갔다. 미국에 머물며 프린스턴 대학 등에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는데 바로 이 시기에 일생의 밑천이 될 ‘외교’와 정치 술수를 익혔다고 한다.
리처드 알렌은 이승만의 재미 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그의 수학과 여행은 미국과 유럽의 정치사상을 섭취하는 기회가 되었다. 하와이에 있는 망명 결사 내부의 혹심한 파쟁을 통해서 그는 음모와 암살을 무기로 하는 정치 집단 사이에서의 생존 수단을 채득하였다. 내부적인 정쟁만 배웠지 문명적인 정치 경륜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불행이었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해 간 것은 1913년이었는데, 그 뒤 25년간의 미국생활 동안 그는 동포사회 내부를 분열과 분쟁으로 점철시켰다.
이승만의 하와이 시절에 대해 김원용의 『재미 한인 50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문필을 가지고는 민주주의를 구가하면서 뒤에서는 실정과 여론을 무시하고 입으로는 도덕이나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 행동 면에서는 폭력단의 보스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동포들을 폭력으로 억누르고, 민족의 단결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파벌을 조장하는 선봉장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단체나 조직의 장으로 받들지 않으면 반드시 그 조직을 파괴하거나 분열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이승만은 가는 곳마다 분열을 몰고 다녔다. 미국에서는 초기에 미국내에서 무장 독립군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자기를 하와이에 초청해 준 박용만과 다투고, 실력 양성에 애쓰는 안창호와 불화하였다. 또 나중에는 미 정부내에서 자신과 막상막하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한길수를 공산당으로 몰았다.
1919년 3․1운동의 성과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미국을 떠나 임정의 임시 대통령, 구미위원 부위원장 또는 한국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함으로 참여했는데, 거기서도 논란․분열을 일으켰다. 노혁명가인 국무총리 이동휘가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고 공산주의자로 몰고 국무위원제는 ‘러시아의 공산당 제도’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침체되어 가고만 있던 독립 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 넣은 김구의 테러 행위를 비난하였으며, 이청천 등의 무장 유격 운동도 비판하였다. 자신의 노선인 ‘외교 제일주의’와 어긋난다는 게 그 주된 이유였다.
또 임시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좌우합작을 시도하였으나 이승만의 맹렬한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1940년 한국독립당 창당 때에도 이승만의 반대로 좌파와의 연합은 무위로 끝났고, 1941년 12월 미․일전쟁이 발발하여 역시 좌우합작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이승만만은 맹렬히 반대하였다.
실로 ‘자기를 단체로 조직의 장으로 받들지 않으면 반드시 그 조직을 파괴하거나 분열시키는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하니만큼 당시 유일하게 자신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압도적 신망을 얻고 있던 백범과 한독당을 이승만이 얼마나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지는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평생 이승만을 수행한 미국인 로버트 올리버가 쓴 이승만의 전기에 따르면 이승만은 해방 후, 중국의 백범이 장재석의 지원을 받아 자기보다 먼저 귀국해 정치기반을 닦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을 느낀 나머지 누구보다 먼저 귀국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미 그때부터 백범을 자신의 숙적으로 여기고 견제했던 것이다. 암살이 일어나자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게 ‘이승만이 기어이 김구를 죽이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간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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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거물급 정치 브로커 김지웅
이승만의 허락을 받아 냈다고 생각한 88구락부의 멤버들은 암살 모의를 직접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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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암살 음모의 진행과정과 이후 꾸려진 행동대의 동태를 일일이 보고․기록한 일지가 있다는 증언이 있다. 4․19 후 진상규명 특위 간사 김용희씨에게 암살 당시 국방부 제4국 정보과장이었던 김명욱 대위가 접근, 음모의 진상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자료를 넘겨주는 대가로 2천만 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일지를 작성한 당사자이며 그 일지의 제목은 백범의 이름을 약간 변형시킨 『白峰日誌(백봉일지)』라고 밝혔다 한다. 협상 도중 연락이 끊겨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이 안 된 상태이다. 그러나 행동대원이었던 홍종만․오병순의 증언에 따르면 행동대원들이 합숙했던 후암동 아지트가 김명욱의 동서의 자택이었다고 하므로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또한 암살 후 김지웅은 행동대원들을 비밀보호 차원에서 안두희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따로 격리․합숙시켰는데 그 장소도 후암도 아지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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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의 실무 총책임자는 김지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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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웅) 김지웅은 4․19 직후인 1960년 8월에 일본으로 밀항했으며, 1965년 “김구 암살의 배후자였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죽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공식적으로 일본에 정치 망명을 신청하였다. 이 신청은 논란 끝에 받아들여졌고 김은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다. 그런데 1988년 76세의 나이에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숨진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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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나 경찰의 수뇌부가 직접 일을 주도한다는 건 여러 모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길 경우라도 쉽게 꼬리를 감출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일을 원만하게 추진할 능력도 갖춘 사람이 요구되었다. 공식적인 직책이 없으면서도 군부와 경찰, 정계의 실력자들과 두루 통하는 김지웅이야말로 최적격자였다. 그는 행동대원들을 모으고 관리하는 일, 계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을 군부와 경찰을 오가며 조정하는 일, 사후처리 등등을 맡아 발로 뛴 야전사령관 격이었다.
김지웅은 거물급 정치 브로커로 알려져 있다. 고향은 안두희․홍종만과 같은 평북 의주였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찍 만주로 건너갔다. 중국 북양(北陽) 대학을 다니다 그만두고 서북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뒤에는 왕금산(汪金山) 이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개명해 중국 제29구로군에 근무했다고 한다. 1937년 대위로 제대한 뒤 중국군 정보부에 들어갔으며 그때부터 정보를 팔아먹는 첩자 노릇을 시작했다.
그 뒤 북경에 친일 화북 정권이 수립되자 같이 군대 생활을 하던 중국군 장교 몇 명과 함께 친일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며 화북 치안군을 만드는 데 앞장 서 중국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는 또 만주사변이 터진 다음 중국 남경에 왕정위(汪精衛) 친일 정권이 들어서자 친일 정권의 중요 직책에 기용되었다. 중국인과 한국 독립 운동가들의 동태와 정보를 수집하던 김지웅은 중국에 와 있던 나카야마(中山) 일본 공사를 알게 되었으며 의형제까지 맺었다.
일본 공사와 가까이 지내면서 김지웅은 한국 광복군과 임시정부 주변에 접근, 일본 첩자 노릇을 했다. 그러다 이러한 사실이 한국인 사회에 알려지자 그는 왕정위 정권을 떠나 중국 제4방면군 제1독립여단장(준장)으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뒤 제4방면군이 국민당 정부의 제5로군으로 편입되자 제5로군 대령으로 공산당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뒤 김지웅은 장개석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는 바람에 만주의 천진에 내리게 되었다. 김지웅은 중국군 준장 차림으로 천진에 상륙했다고 하는데 이때가 1946년 12월이었다.
그는 과거의 경력을 감추고 고향인 의주로 갔으나 곧 정체가 탄로나 버렸다. 그러자 그는 다시 만주로 도망갔고 만주, 심양 등지를 배회하다 5개월 후에 다시 귀국하여 월남했다. 월남할 때 달고 온 계급은 중국군 소장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중국에서 익힌 정보꾼 으로서의 자질이 알려져 마침내 헌병 사령부의 촉탁 문관으로 취직이 되었다. 정식으로 어느 관서에 근무한 일은 없으며 단지 헌병 사령부와 경찰국을 출입하는 것을 내세워 그 기관의 고문이라고 자칭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창룡 소령을 알게 되었으며 같은 고향인 서북청년단 부단장 김성주도 만났다. 김성주를 통해 신성모 국방장관을 사귀게 되었으며 그의 개인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지웅은 전 ML당 당수이며 국회의원인 김준연을 알게 되었고 국내 정계에 얼굴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런 그의 전력으로 미루어 암살 시나리오도 아마 김지웅이 짰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지웅은 우선 암살을 직접 결행할 하수인을 고르기 위해 가장 악랄한 반공 테러조직이었던 서청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먼저 고향이 같은 홍종만에게 접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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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홍종만 안두희 장은산
홍종만은 8․15 해방 직후 월남해서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태평로 특별분회를 맡고 있었다. 그는 1948년 11월 같은 서청단원이면서 한독당에 가입해 있던 백영호의 소개로 동료 30여 명과 같이 한독당에 입당해 있었다.
어느 날 한독당 백영호씨가 김지웅이란 사람을 내게 소개했다. 1949년 2월 하순으로 생각된다. 몸이 좋고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김지웅은 나와 몇 번 만나 뒤, 어느 날 “비밀히 말할 것이 있다”면서 시청 뒤 내 집으로 찾아와 “김구 선생이 중국에 있는 자기 양자격인 김은충 육군소장을 시켜 모택동에게 손을 잡자고 제의하는 편지를 전달하려 한다”고 귀뜸했다. 그때만 해도 반공이라면 물불을 못 가리던 나는 김지웅의 말에 넘어가 김구 선생이 빨갱이와 손을 잡을 수 있느냐고 속으로 분개했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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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대해선 다른 설도 있다. 즉 홍종만은 원래 서북청년단의 문봉제, 김성주에게 접근시키기위 해 북에서 남파한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청원들에게 꼬리가 잡혀 구속되자 그 이전에 이미 88구락부에 속해 암살을 모의하고 있던 김지웅이 홍을 암살에 이용하기 위해 손을 써서 빼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던 백운규(白雲圭) 옹이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돈이 없어 치료도 못하고 있는 걸 알고 그에게 의도적으로 홍종만을 접근시켜 환심을 사게 하였다. 홍종만은 김지웅이 대 준 돈으로 백옹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그 가족도 돌봐주었다. 감격한 백옹은 홍종만을 한독당에 소개, 입당시켰다. 이렇게 해서 홍종만을 계획적으로 한독당에 심어 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홍종만의 고백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일부 윤색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홍종만은 이러한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다. 이 문제는 배후세력들이 암살 모의를 짜고 실제로 행동에 착수한 게 언제인지, 그리고 안두희가 그들에게 의해 암살자로 지목된 게 언제인지, 애초부터 행동대들의 집단 범행과 별도로 안두희의 단독범행을 추진했는지의 여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더 파헤쳐 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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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만은 백범을 모략하는 김지웅의 술책에 마음이 흔들린데다가 김지웅이 돈을 물쓰듯하는 데 빠져 곧 김지웅의 부하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
나는 반공정신에만은 투철했다. 그래서 그 후부터 한독당내에서 얻어지는 정보를 김지웅에게 알렸고 또는 내가 직접 김태선 시경국장을 찾아가 알렸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그리고 어느 날 홍종만은 김지웅에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안두희를 소개하였다
김지웅은 안두희를 만나보고 난 뒤 퍽 호감을 갖는 눈치였으며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 후 우리 세 사람은 요정 등에서 자주 어울렸으며 김지웅에게 용돈도 받아썼다.
김지웅은 우리를 만날 때마다 백범 선생의 사상 이념에 대해 심하게 비판했고 욕도 했다. 우리를 이용하기 위해 우선 한독당의 노선에 회의를 품게 해서 사상적으로 돌려놓게 하는 비상한 머리를 썼던 것 같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첫눈에 안두희의 이용가치를 알아본 김지웅은 안두희를 손에 넣기 위해 특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나는 그 당시 부대 내에서 숙식했기 때문에 일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번 씩 밖에 집에 안 갔다. 그런데도 내가 나오는 날이며 어떻게 그 시간까지 귀신같이 알고선 나를 기다리고 있곤 했다. 그리곤 무교동 낙지 골목이나 은근짜 술집에 데리고 가서 밥이며 술을 사 주곤 했다.(안두희, 1992. 9. 23 진술)
김지웅은 홍종만에게와 마찬가지로 안에게도 백범과 한독당에 대한 갖가지 모략을 마치 자신만 알고 있는 큰 비밀인 양 귀뜸해 주는 한편, 안이 소속되어 있는 포병 사령부 장은산에게 안의 이용가치를 알려 측면지원하게 하였다. 만주군 출신이었던 장은산은 일찍이 만주에 있을 때부터 김지웅과 잘 아는 사이였으며 포병 사령부에서 둘이 노는 게 여러 사람에게 목격될 정도로 절친한 관계였다. 장은산은 안두희를 전속부관으로 발령 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조치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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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함정
이어 김지웅은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시키려 했다. 그러나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는 현역군인은 정당 가입이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홍종만과 안두희는 계속 졸라댔다. 그래도 승낙을 하지 않자 홍종만은 당원증 용지를 몰래 빼내 마치 안두희가 비밀당원인 것처럼 당원증을 만들고 ‘비’자 도장까지 새겨 찍었다. 그들이 굳이 당원증을 만든 것은 암살 후 군인을 정당에 입당시켰다 하여 한독당을 와해시키려는 공작의 일환에서였다.(1992년 9월 23일 안두희 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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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의 입당과 비밀당원증을 둘러싸고는 이제까지 이와 다른 내용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즉 처음엔 입당을 거절했던 김학규가 홍과 안의 간청에 못 이겨 당원증을 발급해 주었으며 당원증 위에 찍히 ‘비’자도 홍과 안이 자꾸 졸라 별 생각 없이 당의 서류를 분류랄 때 찍은 ‘비’자 도장을 찍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김학규가 재판정에서 한 진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전언론인 오소백씨가 남긴 공판 취재기에는 김학규씨가 이렇게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검사 : 안두희를 아는가?
김학규 : 안다
검사 : 어떻게 아는가?
김학규 : 홍종만을 통하여 안다.
검사 : 언제부터 아는가?
김학규 : 나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했다. 3, 4월경에 입당 수속을 하게 하였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교부케 했다.
변호인 : 당원증은 어떤 당원증을 주었는가?
김학규 : 보통 가지는 당원증을 주었는데, 그 후 홍종만을 통하여 ‘비’자 도장을 찍어 달라고 요구하기에 무의식적으로 찍 어 주었다.
변호인 : 비밀당원이 있지 않은가?
김학규 : 한독당엔 비밀당원이 없다.
그러나 당시 김학규 조직부장 밑에서 조직부 차장을 지냈던 이시찬옹은 “훗날 감옥에서 풀려난 김학규 부장에게 직접 물어 본 결과 당원증 자체를 발급해 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법정에서의 진술은 사 실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안두희가 1992년 9월 23일 내막을 실토함으로써 이시찬옹의 증언이 사실임이 판명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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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모든 것은 김지웅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비밀당원증을 소지하게 된 안두희는 계속 김학규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한편 백범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간청했다. 일제시대 때 아버지가 독립군 자금을 냈으며, 월남하면 백범 선생을 한 번 꼭 만나 보라고 했다는 능청스런 거짓말까지 해낸 결과 마침내 김학규의 안내로 경교장을 방문하여 선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안두희는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도 같은 거짓말을 하면서 선생께 친필 휘호를 간청하였다. 선생으로서야 안두희의 말을 의심할 까닭이 없었다. 일일이 확인할 길이야 없지만 군자금을 보내 주었다니 격려와 함께 휘호를 내려 주었다. 일이 뜻대로 되어 가자 안두희는 홍종만과 어울려 김학규를 만난 자리에서 더욱 의도적인 발언을 흘리곤 했다.
“나는 가장 훌륭한 사수이다.”
“어떤 기회에 당에서 명령만 내리다면 포구를 이대통령 계신 경무대로 돌려 포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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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만날 적마다 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선생의 증명서까지 얻어 달라고 말하여 왔다. 그러므로 나는 그이후로는 홍종만을 통하여 나를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요구했고 사건 발생 약 1개월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김학규의 법정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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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암살행동대
후일 한독당을 ‘정부 전복을 노리는 공산주의 동조당’으로 몰아 와해 시켜 버릴 함정을 파는 한편으로 김지웅은 암살행동대로 조직하였다. 당시 시청 뒤 피난민 합숙소에 있던 홍종만의 집에는 의주 출신의 서청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홍종만이 서청 종로지부 태평로 분회 회장이었고 분회의 사무실이 바로 피난민 아파트 안에 있었으므로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서청단원으로 있다가 입대한 오병순․강창걸 등의 포병 장교들과 한국용․이춘익․독고녹식․정익태․한봉수 등이 특히 홍종만과 가까웠다. 이들은 김지웅이 갖다 주는 돈을 홍종만과 함께 받아 쓰면서 김지웅의 수족이 되었다. 김지웅이 시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태세가 갖추어졌다. 이들은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계동에 있던 김지웅의 집이나 홍종만의 집, 또는 북창동의 아지트에서 자주 모였다.
김지웅은 이들이 자유스럽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특별 야간 통행증도 경찰에서 떼다 주었으며,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길까 봐 경찰을 시켜 이들 행동대원들의 동태를 감시, 보고하도록 하였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는 것을 확인한 김지웅은 88구락부 모임에다 경과를 보고하고 1949년 4월 초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그 동안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던 장은산도 이때부터는 적극적인 지휘․감독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하들 상당수가 암살행동대에 참여하고 있는 터라, 그들에 대해서는 김지웅과 의논해 직접 지시를 내렸다. 장은산 밑에서 정보참모 김천근 중위가 심복으로 있었으며 그는 주로 비밀연락 책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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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후 검찰에서 암살진상을 제조사할 때 김천근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 확보되었다.
“안두희가 헌병대에 구속되자 나머지 행동대원 10명을 김천근 중위가 데리고 왔다. 10중대 28호 지프차에 이들을 싣고는 김중위는 ‘사령관의 명령이다. 어디다 이들을 숨겨 주어라’해서 정보과 옆방에 2일간 숨겨 준 사실이 있다.” (신북철, 암살 당시 포병 사령부 정보처 선임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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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 행동대원 열 사람 중에는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만이 권총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안두희가 우리에게 45구경 권총의 성능에 대해 설명해 주어 내가 “우리 전부 권총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 했다. 그랬더니 김지웅은 곧 장은산에게 말해 안두희를 시켜 45구경 권총 아홉 자루를 보내 왔다. 행동대원 중 민간인인 우리들은 불법소지인지도 모르고 그 권총을 신이 나서 품고 다니게 됐다. 우리 행동대원들이 무기를 지급받게 된 것은 바로 백범 선생이 암살당하기 두 달전쯤인 1949년 4월경의 일이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행동대원들은 이 권총으로 정릉 골짜기에 사격 연습을 하러 다녔다.
그때까지도 홍종만과 안두희를 제외한 나머지 행동대원들은 자신들이 김구 선생 암살 음모에 이용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을 훈련시켜 김일성을 죽이러 이북에 보내거나 빨갱이를 잡는 데 이용할 것 정도로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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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만은 1974년. “사건 얼마 전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암살 음모에 이용되리라는 걸 알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가 김학규에게 매우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안두희를 소개시켰으며 또한 당원증까지 빼돌렸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홍종만의 증언이 신문에 공개된 후, 당시 미국에 있던 박동엽씨는 “홍종만은 고백한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걸 다 털어놓지 않았다”며 “나머지 알고 있는 부분도 마저 털어놓도록 호소하는 편지를 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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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또 다른 음모
그러나 행동대의 수장 격이라 할 수 있는 홍종만도 모르는 게 있었으니 암살 배후자들은 행동대의 집단범행과는 별도로 일찌감치 단독범행을 따로이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김지웅은 홍종만에게서 안두희를 소개받은 후 대뜸 안의 영웅심, 대담함, 맹목성을 꿰뚫어 보았다. 그 동안 수하로 거느리게 된 여러 행동대원들에 견주어 특별히 쓸 만 한 놈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행동대를 이용한 집단범행을 그대로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은밀히 안의 단독범행도 준비했다. 집단범행은 범행에 가담하는 인원이 많아 관리하는 데 공이 많이 들고 비밀을 지키기도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누가 언제 뜻하지 않게 실수를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경찰을 시켜 동태를 감시하고는 있었지만 못 미더운 구석이 있었다.
준비야 철저할수록 좋은 것이었다. 집단범행과 단독범행을 다 준비해 놓았다가 상황을 봐 가며 적절히 대처하자는 게 김지웅의 모사꾼다운 판단이었다. 어느 쪽이든 성공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김지웅은 다른 행동대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하면서 안두희를 특별관리 하였다(안두희가 자신이 홍종만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되는 걸 대단히 싫어하고 ‘홍종만 패거리’들을 늘 한 수 아래의 교양 없는 깡패들처럼 취급하는 까닭도 어쩌면 여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장은산도 김지웅의 작전에 적극 손발을 맞추었다. ‘김구를 제거하는 사람은 민족의 영웅’이라며 안두희의 범행을 부추겼다.
그러나 영웅심에 사로잡혀 잘난 척하던 안두희도 막상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를 자기 손으로 죽인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죽고 나서 영웅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안두희가 결단을 못 내리고 계속 미적대자 장은산은 “우리 뒤에는 높은 사람이 있다. 아무 걱정 말고 결행만 하면 편안한 여생을 누릴 수 있다”며 안두희를 격려했다. 그리고는 결행을 촉구할 속셈으로 신성모․채병덕 등에게 무언가 그럴 듯한 보장을 해줄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성모․채병덕은 안두희를 경무대로 데려가 이승만을 만나게 해준 것이다.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이제 범행을 더 이상 미룰 여유가 없었다.
안두희의 범행을 재촉하는 한편으로 김지웅은 행동대의 집단범행도 그대로 밀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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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가 배후세력들로부터 단독범행을 지시받은 때가 언제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이제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2차 습격 시도가 실패로 끝난 6월 25일 밤이라고 추측해 왔다. 가장 유력한 증인인 홍종만도 그렇게 증언하였다(그러나 홍종만의 고백수기를 살펴보면 그도 암살 음모의 전모를 다 알지는 못했다는 심증을 주는 대목이 여럿 나온다). 그러나 나는 안두희가 일부터 과격한 발언을 하며 김학규에게 접근한 것이라든지 백범으로부터 친필 휘호를 받아 챙기고 미리 비밀당원증을 위조해 가지고 있었던 점 등을 살펴볼 때 이미 그 전에 배후세력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992년 9월 23일, 안두희는 마침내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었음을 자백했다. 위의 서술은 전적으로 그날 있었던 안두희의 진술에 근거를 두고 재구성한 것이다. 물론 안두희가 이튿날 ‘고문에 의한 것’이라며 진술을 번복해 버렸기 때문에 엄밀히 하자면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안두희가 진상을 완전히 털어놓을 때까지는 나의 이런 주장은 여전히 ‘정황에 근거한 추측’의 대열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빨리 진상조사가 이루어져 안두희의 ‘번복 없는 진술’을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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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교장 습격작전
드디어 ‘때’가 왔다. 6월 23일, 중앙중학교 근처의 2층집에서 행동대원들에게 저녁을 잘 먹인 김지웅은 백범 살해 지시를 내렸다. 6월 23일 밤에 결행된 1차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첫째, 6월 23일 밤 행동대원들이 경교장을 습격하여 백범을 살해한다.
둘째, 수사당국에서는 국회 공산당 프락치 사건으로 수배 중인 김약수 국회부의장이 경교장에 은신 중이었으므로 부득이 강제수사를 집행했다고 발표한다.
셋째, 이 강제수사과정에서 큰 소동이 벌어져 김구 선생이 오발이나 유탄에 맞아 죽은 것처럼 꾸민다.
넷째, 김약수가 사전에 기미를 알고 뒷담으로 도망쳤다고 해명하기위하여 경교장 뒷담 쪽에 도망친 듯한 흔적을 남겨 놓는다.
이날 행동에 나선 대원은 안두희를 위시해서 한경일, 오병순, 강창걸 등 군인 4명과 이춘익, 정익태, 한국용, 홍종만 그리고 운전사 허모씨등 9명으로 정해졌다.
처음에는 스리쿼터를 타고 가기로 했으나 허씨나 정익태가 스리쿼터 운전에 서툴러 지프차 2대에 나누어 타고 행동에 나서기로 하였다.
우리 행동대원 일행은 두 대의 지프차에 나누어 타고 밤이 어두워 경교장 근처까지 다다랐다. 우리는 신문로 마루턱과 서대문 네거리 사이를 몇 바퀴 돌며 경교장 주의의 분위기를 살폈다. 인적은 뜸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두희는 당초 김지웅에게 경교장을 습격할 땐 정문 보초순경 두 명을 살해하고 막 바로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으나 무너진 뒷담 쪽을 통해 들어가도록 행동방침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 거리에서 차에서 내려 경교장 뒷담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담 벽이 무너져 내린 돌 깎는 장소가 있었다.
안두희가 앞장을 서서 경교장 뒷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안두희가 섬뜩 놀라 다시 돌아 나왔다. 들어가다 보니 황소만한 셰퍼드 한 마리가 매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안두희는 다른 행동대원 일행을 담 밖에 숨어 있게 한 뒤 어디로 가더니 조금 있다 쇠고기튀김을 사 왔다. 안은 담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 셰퍼드가 있는 쪽으로 튀김을 던졌다. 그러나 개가 그것을 먹으려 하지 않고 짖으려고 으르렁대기 시작하자 우리는 다시 담 밖으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오병순이 먼저 “오늘은 틀렸으니 가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너도나도 “가자” “가자”하고 의견이 일치되어 그날은 실패하고 돌아오고 말았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암살행동대의 1차 시도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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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원 병점고개작전
이날 습격이 실패하자 장은산은 그중에서 자신의 직속 부하인 안두희, 오병순 등을 서울대 병원 입원실로 불러 노발대발하며 야단을 쳤다.
“이 새끼들아. 갔으면 무조건 해야지. 사람이 많다고 그냥 와? 거기 있는 것들 다 없애 버리면 될 거 아냐.”
한편, 홍종만은 24일 아침 한독당 종로 사무실로 나갔다. 지난밤에 혹시 이상한 눈치라도 채 지 않았나 걱정되어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10시쯤 김학규 부장이 오더니 뜻밖의 특종 정보를 전해 주었다.
백범 선생이 6월 25일(다음날) 건국실천원양성소 개소식(실은 10기생 입소식이었다)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 편으로 공주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종만은 이 사실을 즉시 김지웅에게 알렸다. 그러자 김지웅은 공주행 길목에서 지키고 있다가 백범을 처치해 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2차 때의 행동대원은 나와 안두희, 한국용, 오병순, 강창걸과 운전사 등 6명으로 줄였다. 지프차 1대에 탈 수 있는 인원으로 제한했다.
우리 행동대원은 아침 일찍 서울 출발, 수원 근처 병점고개에 가서 잠복했다. 지프차는 길가에 세워 두고 고장이 난 것처럼 잭으로 한 쪽 바퀴를 들어 올려 두었다. 백범 선생이 탄 차가 스쳐 가려 할 때 안두희와 오병순이 가로막아 무조건 차내로 총을 쏴 백범 선생을 살해하고 차에 불을 지름 다음 도망치기로 계획이 짜여졌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2차 계획은 더욱 치밀했다. 서울, 공주 사이를 몇 번씩이나 오르내리며 지형을 정찰하고 현장을 답사한 끝에 수원과 오산 사이의 병점고개가 선택되었다. 그리고 범행 후에는 공산 게릴라 지리산 반도 일파가 여기까지 나타나 학살을 자행한 것처럼 위장하기로 했다. 또 헌병인 것처럼 복장을 위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1차 습격이 끝난 뒤 헌병 장교들이 현장검증하는 척하면서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까지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2차 계획 때는 홍종만을 빼고는 행동대원이 모두 현역 군인들로 추려졌다. 좀 더 믿을 만한 사람으로만 행동대를 축소, 정예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계획은 역설적이게도 경찰의 충성심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6월 24일 밤 공주 현지에서 전화가 왔어요. 25일 개소식 행사가 현지 경찰서장이 집회허가를 해주지 않아서 무기연기 되었다는 기별이었습니다. 그래서 25일 아침 백범 선생님께서 세수를 하시려고 내려오시기에 오늘의 공주 행차는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퍽 언짢아하시는 표정이시더니 ‘일선 경찰까지 그러는가? 하기야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경찰도 별 수 없겠지’ 하셨습니다.(비서 선우진의 증언)]
[이리하여 백범의 공주행은 취소되었다. 그런 와중에 마침 임정 부주석이었던 김규식(金奎植)박사(당시 민족자주연맹 위원장)가 찾아왔다. 백범은 김박사와 오전 내내 환담을 나눈 다음 낮에는 이병찬(李秉讚), 정인권(鄭寅權), 장예욱(張禮郁)씨 등 오랜 동지들의 권유로 한강으로 뱃놀이를 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백범 선생이 탄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초조하고 배도 고프기도 하여 근처 오이 밭에 들어가 오이를 따먹기도 했다.
두 시간은 더 지났을까. 멀리 서울 쪽에서 한 대의 지프차가 달려왔다. 그 차에 타고 온 사람은 당시 포병 사령부 장은산 밑에 있던 정보참모 김천근 중위였다. 그의 말이 “백범 선생의 공주행이 취소됐으니 그대로 올라가자”는 것이었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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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네 번의 총소리
2차 시도까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다가 공교롭게도 이날 저녁 김약수가 종로에 있는 첩의 집에서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김약수 체포를 명분으로 경교장을 습격하는 따위의 계획은 완전히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한편 작전이 실패한 뒤 포병 행동대원들은 장은산의 병실로 불려 들어가 다시 불호령을 들어야 했다. 그 자리엔 김지웅도 함께 있었다. 김지웅은 침착했으나 장은산은 혼자 길길이 날뛰었다.
“이 새끼들아, 정보를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이게 뭐야! 이렇게 몇 번씩 몰려다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끝장이야! 내일까지 못 해치우면 너희들을 내가 해치우겠다.”
한바탕 야단을 맞고 다른 대원들이 모두 나간 뒤 장은산은 안두희만을 따로 불러들였다.
“다음번에는 김구가 죽든지 네가 죽든지 둘 중의 하나다.”
하루라도 빨리 김구를 없애야 하는데 여러 명을 움직여 일을 치르자니 번거롭고 불안했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 즉 단독범행을 지시한 것이다. 김지웅의 치밀한 준비가 돋보이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를 대비하여 김지웅은 안두희를 특별 관리해 왔던 게 아닌가!
장은산은 “내일 12시에 해치우라”고 시간까지 못 박아 버렸다. 안두희도 이제는 더 이상 미적거릴 수 없었다. 장은산이 “계속 미루면 네가 백범 암살을 기도했다고 폭로해 버리겠다.”는 위협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안두희의 범행 결행이 확실해지자 김지웅은 군부․경찰의 수뇌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사후 처리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리고 안두희, 장은산과 함께 범행 계획을 점검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병점고개에서 돌아온 후 장은산은 안두희를 불러 3차는 그가 단독으로 행동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안두희가 백범을 암살하러 경교장에 나타나는 이날 아침 일찍 미리 현장 분위기를 살피도록 한독당원인 나를 경교장에 보내게 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두희가 “홍종만보다 내가 경교장 내부구조를 더 잘 안다”고 말하자 3차 범행은 전적으로 안두희 혼자에게 맡겨졌다.(동아일보 홍종만 고백수기)]
한편, 병실을 물러 나와 합숙소로 돌아간 오병순은 이날 저녁 생각을 바꾸게 된다. 자기 손으로 차마 백범을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른 대원들이 술 마시고 노는 동안 숙소를 몰래 빠져 나와 아현동 고개에 있던 자신의 누님 네 집으로 갔다. 누님을 시켜 고향친구인 김정진 소령과 최병권 두 사람을 데려오라 했으나 마침 김정진 소령에게만 연락이 닿았다. 오병순은 김정진에게 음모의 내막을 알리고 빨리 박동엽 선생께 이 사실을 전해 김구 선생을 보호할 수 있게 하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25일 저녁, 김정진을 통해 박동엽씨에게 ‘사지가 떨리는 불길한 정보’가 닿게 된 것이다.
드디어 26일 아침 안두희는 태평로 집을 떠나 먼저 계동 김지웅의 집으로 지프차를 몰았다. 그런데 도중에 운전사 허하사가 자칫하다 어린애를 칠 뻔하였다. 가뜩이나 불안했던 안두희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그래서 지프차를 놔두고 다른 차편으로 오전 11시 중앙고교 근처에 있는 김지웅이네 집엘 들러 함께 경교장 앞에까지 가 자연장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 안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고 이때 김지웅이 안두희를 안심시켰다.
“봐라. 저 사람들이 다 너를 보호할 사람들이다. 너는 틀림없이 살 테니까 안심해라. 이 주변을 우리가 포위하고 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안두희는 경교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네 번의 총소리가 울렸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www.koreakjh.net 민족정기구현회
1.<더 파헤쳐야 할 문제들>
지금까지 우리는 여러 직․간접 관련자들의 증언과 미흡하나마 지금까지 받아 낸 안두희의 진술을 토대로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교사․모의․실행․은폐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내용을 272쪽에 실린 범행체계도로 정리하여 보았다.
이제까지 나온 거의 모든 증언과 자료를 수집․검토해 볼 때 이 범행체계도는 진실이라고 단언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진실에 가까운 추정도 진실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배후세력에 관한 한 ‘정황증거에 의한 심증’이 아니라 ‘물증에 근거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에는 아직 더 파헤쳐 내야 할 부분들이 많다. 그리고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진상규명 작업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그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 진상의 완전한 규명을 위해 반드시 파헤쳐야 할 문제들을 간추려 본다.
[1] 미국의 개입 여부
안두희는 1992년 4월 12일의 증언에서, OSS의 모 중령과 만나 백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는 백범을 불랙 타이거라 지칭하고 국론통일을 방해하는 암적인 존재라고 규정함으로써 제거되어야만 될 인물이라는 암시를 주었다고 밝혔다.
해방 뒤의 정국에서 미국의 정보기관이 남한의 정계․군부․경찰․우익단체 안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면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 당시 미정보기관 G2가 작성한 보고서에 실린 김구에 대한 평가가 안두희를 만난 모 중령이 했다는 말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 또 그 이후로도 남한 정세가 미국의 뜻과 어긋나게 진행된다 싶으면 여러 가지 정치 공작을 시도했다(부산 피난 시절의 ‘이승만 제거 작전’, 4․19 뒤의 ‘장면 정부제거 작전’등)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미국이 이승만과 군부 등에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김구 선생의 제거를 암시하거나 또는 지원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데 과연 그러한가.
[2] 이승만의 직접 교사 여부
이승만은 암살이 있기 일주일 전 경무대에서 신성모․채병덕이 데리고 온 안두희를 만나 “높은 사람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격려하였으며 사건 수사 때에는 김학규를 비롯한 한독당원 7명에 대한 영장을 직접 검찰총장에게 청구하였다. 이로 미루어 이승만은 단순히 암살의 묵인․방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교사까지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과연 그러한가.
[3] 배후세력의 모의 과정
안두희를 감형․석방시키고 6․25 직후 부산에서 안두희를 만나 “그동안 수고했다”며 금일봉을 건네 준 신성모 국방장관, 안두희의 수사를 직접 지휘하고 사전에 구형량을 조절하려 했던 채병덕 참모총장, 사건 뒤 안두희의 신병을 안전하게 빼돌리고 범행 현장인 경교장을 봉쇄한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포병 행동대원들을 직접 지휘한 장은산 포병 사령관, 재판 과정에서 안두희와 그 변호인들을 일방적으로 옹호한 원용덕 재판장, 범행 뒤 안두희를 극진히 보호하고 장은산을 살해하면서까지 진상 은폐에 힘쓴 김창룡 특무대장 등 암살 음모의 실행 과정을 총지휘한 정치 브로커 김지웅, 핵심 배후세력들은 각각 언제 어떤 과정으로 모의에 가담케 되었으며, 그들 내부의 지휘 체계는 어떠하였나.
[4] 경찰 수뇌부의 음모 가담 여부
암살의 실무 총책임자 김지웅을 자주 접촉해 자금을 건네주고, 범행 5시간 전에 미리 비상을 내렸으며, 사건 후 민간인 행동대원들을 종로경찰서로 위장 연행해 보호했을 뿐 아니라 사찰과장 최운하를 시켜 행동대원들이 장은산으로부터 받아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수거한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은 암살 모의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는가.
[5] 한민당 정치인들의 음모 가담 여부
평소 김지웅과 친밀히 지낸 김주연, 안두희의 감형․석방에 영향을 끼친 윤치영 등 당시 백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며 극렬 비난했던 한민당의 주요 간부들은 암살 모의에 가담하거나 또는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는가.
[6] 실행 과정에서의 하수인들의 역할
안두희는 한독당 입당과 비밀당원증의 소지 경위, 단독범행을 지시받은 시기 등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홍종만을 비롯한 다른 증인들의 증언과 상반되는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 배후세력들간의 모의 과정과 더불어 하수인들인 안두희․홍종만․김성주․암살행동대원들 간에 있었던 암살 실행 과정도 더욱 상세하게 규명되어져야 한다. 김지웅은 언제 어떤 방법으로 홍종만․안두희를 포섭하였고, 안두희가 단독범행을 지시받은 시기는 언제이며, 안은 암살 음모의 진상을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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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요 등장인물
강용주 : 암살 당시 서대문경찰서 형사주임. 현장에서 암살범 안두희를 연행하려다 헌병대의 요구로 안두희를 넘겨 주었다.
강창걸 : 포병 소위. 암살행동대의 일원이었다.
강홍모 : 육군 대위. 암살 당시 헌병 사령부 특별수사대 근무. 암살 직전 경교장에 들러 백범을 만나고 휘발유를 얻어 갔다.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고정훈 : 전 민사당 당수. 4․19 혁명 후 최초로 신성모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와 친일파들의 모임인 88구락부가 암살을 모의했다고 폭로하였다.
김계원 :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장은산 포병 사령관 밑에서 부사령관을 지냈으며, 6․25 때 포병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6월 27일 석방된 안두희의 신병을 대전에서 인수하였으며, 안두희의 군 복귀를 주선하였다.
김명욱 : 암살 당시 국방부 제4국 정보과장. 육군 대위. 암살단원들을 후암동에 있는 자신의 동서 집에 합숙시키고, 행동대의 동태를 감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보고서의 명칭은 ‘백봉일지’(白峰日誌)라고 전해진다. 이제까지 언론이나 추적자에게 거의 노출되지 않은 인물이다.
김병삼 : 헌병대 대위. 암살 당시 헌병대 순찰과장으로, 백범이 암살되기 1시간 49분 전인 상오 10시 45분에 헌병대에 비상을 걸었으며, 현장에서 안두희를 채포하고, 경교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 암살사건 후 신성모 국방장관의 비서로 영전하였다.
김성주 : 암살 당시 서북청년회 부단장. 88구락부의 하수인으로 배후에서 행동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암살 이후 암살 배후세력과 틈이 벌어져 헌병대에서 모살당했다.
김승학 : 호는 희산(希山). 독립운동가. 박동엽씨와 함께 6월 25일 경교장을 찾아가 암살음모 정보를 전해 주었다.
김안일 : 암살 당시 육군 SIS 대장. 사건 당일 부하들과 함께 우연히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했다.
김약수 : 초대 국회부의장. 김구 선생을 초대 대통령으로 옹립하려고 노력하다가 이승만의 미움을 받아 소위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김용희 : 1960년 4월에 결성된 ‘백범 살해 진상규명 투위’ 간사. 1961년 4월 17일 종로에서 안두희를 붙잡아 검찰에 인계하였으며, 암살 행동대원인 홍종만을 설득하여 1974년 5월 백범 암살사건의 진상을 일부 고백케 했다.
김익진 : 사건 당시 검찰총장. 이승만의 지시로 담당 최대교 검사장을 제치고 김학규 등 한독당 간부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정진 : 육군 소령. 암살 행동대 오병순 소위로부터 암살 계획을 제보받고, 곧 은사인 박동엽에게 전달, 백범 암살을 막으려 했다.
김준연 : 암살 당시 한민당 총무간사로서 88구락부 맹원으로 전해진다. 평소 김지웅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음모에 깊숙이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김지웅 : 평북 의주 출신으로 왕정위 괴뢰정권 밑에서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비밀을 탐지해 일본에 제공하는 밀정이었다. 해방 후 신성모, 김창룡 등의 신임을 받아 거물급 정치 브로커로 행세하였다. 암살의 실무총책임자였다. 4월혁명 이후 일본에 밀항, 망명하였으며 1988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김창룡 : 암살 당시 1연대 정보참모. 대위. 체포된 안두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으며, 이후 특무대장이 되자 안두희의 군 복귀와 승진을 주도했고, 예편 뒤에는 안의 군납사업을 도왔다. 1956년 암살당했다.
김천근 : 암살 당시 포병 사령부 정보참모. 장은산의 심복으로 군인 행동대원 관리와 비밀연락을 맡았다. 2차 살해 계획 시 병점까지 가서 김구의 공주행 취소를 알렸다. 장은산의 심복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암살 내막을 상당히 소상하게 알고 있을 인물이다.
김태선 : 암살 당시 서울시경국장. 친일파 모임인 88구락부의 회원으로, 백범이 암살되기도 전에 서울시경에 비상을 걸었다. 암살 행동대원인 홍종만의 증언에 따르면 자금을 지원하여 주었다고 한다.
김학규 : 암살 당시 한독당 조직부장. 홍종만의 소개로 안두희를 백범께 소개시켰고 암살자들이 위조한 비밀당원증에 근거해 살인교사자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노덕술 :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일제 때는 고등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고문 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좌익 척결’에 앞장 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안두희가 헌병대 문관으로 근무할 때 헌병대 부산지구 특별수사대장으로 있었다.
노엽 : 암살 당시 SIS 중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명령으로 SIS 대장 김안일을 제쳐놓고 안두희를 취조했으며, 채병덕에게 직접 보고했다. 사건 축소․은폐의 하수인이다. 일제 말기 원산헌병대 특무조장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독고녹식 : 암살 행동대원.
문봉재 : 암살 당시 서북청년회 단장. 암살사건 이후 이승만의 측근으로 행세하며 치안국장,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박동엽 : 암살 당시 대광고교 교감. 제자인 김정진 소령을 통해 행동대원 오병순 소위가 전해 준 암살 계획을 듣고, 암살 전날과 암살 당일 경교장에 찾아가 제보했다. 사건현장을 목격한 중요한 증인이다.
신성모 : 암살 당시 국방장관. 암살 주모자로 사건 이후 안두희를 감형시켜 석방시키고 군에 복귀시켰다. 4월 혁명 후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 일어나자 충격을 받아 실신, 급사했다.
오병순 : 암살 당시 육군 포병 소위. 행동대에 가담했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김정진 소령을 통해 박동엽에게 암살을 음모 계획을 제보했다.
오석만 : 암살 당시 헌병 중위. 암살 당일 헌병사령부 당직사관으로, 4․19뒤에 당직사관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범이 암살되기 훨씬 전인 10시 30분에 비상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헌병대로부터 파면당했다.
원용덕 : 암살범 안두희 재판의 재판장으로 안두희에게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안두희의 군 복귀를 주선했고, 안이 예편한 후에는 헌병사령부 문관으로 채용했다. 후에 헌병 총사령관으로 승진하여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이승만의 지시로 서북청년회 부단장 김성주를 모살했다.
윤치영 : 전 공화당 의장. 안두희의 감형․석명과정에 관련되었다.
이국태 : 백범의 비서. 암살 당일 경교장에서 근무했다.
이시찬 : 암살 당시 한독당 조직부 차장.
이진용 : 암살 당시 SIS 중위. 사건 당일 김안일과 함께 경교장에 들렸으며, 노엽과 함께 안두희를 취조했다.
이춘익 : 암살 행동대원
이풍식 : 백범의 비서. 암살 당일 경교장에서 근무했다.
장석인 : 전 헌병 사령관 장흥의 조카. 이태원 육군형무소에 근무하면서 안두희의 호화판 수형생활을 목격했다.
장은산 : 암살 당시 포병 사령관으로 김지웅과 함께 암살음모를 총지휘했다. 백범 암살 후 이승만 정권의 논공행상에서 소외되자 암살 전모를 폭로하겠다고 위협, 김창룡에 의해 투옥되어 6․25동란 와중에 의문사했다.
장흥 : 백범 암살 당시 헌병사령관이었으나 전봉덕에게 사령관직을 빼앗기고 강원도지구 병사구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자서전을 통해 백범 암살이 신성모의 지령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전봉덕 : 일제 때 경기도경 경무과장을 지낸 친일 관리. 장흥 헌병사령관을 몰아내고 헌병부사령관에서 현병사령관으로 승진.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은폐․조작하였다. 88구락부의 맹원으로 알려져 있다.
정익태 : 암살 행동대원.
조소앙 : 독립운동가. 암살 얼마 전 경무대에서 이승만으로부터 백범에 대한 불길한 이야기를 듣고 백범에게 전해 주었다.
채병덕 : 암살 당시 육군참모총장. 88구락부의 회원으로, 사건 뒤에 장흥 헌병사령관을 제거하고 전봉덕 부사령관을 사령관으로 임명, 암살 배후를 은폐했다. 안두희 재판 때 검찰관 홍영기에게 압력을 가해 형량을 조절하려 했다.
최대교 : 사건 당시 서울지검 검사장. 이승만․신성모가 암살에 연루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주요한 증언을 남겼다.
최운하 : 수도경찰청 사찰과장. 일제 고등경찰 출신으로 김태선과 함께 김지웅, 안두희 등을 접촉했다.
한격만 : 암살 당시 서울지방법원장. 이승만의 압력으로 한독당 간부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한경일 : 포병 소위. 암살 행동대원.
한국상 : 포병 소위. 암살 행동대원
한국용 : 암살 행동대원
한봉수 : 암살 행동대원. 이후 경찰 신분으로 김지웅의 경호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영기 : 1949년, 군법회의에서 안두희를 담당했던 검찰관. 육군 소령. 암살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안두희를 철저히 조사했다. 재판에서 중형을 내리려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협박을 당했으며, 재판이 끝난 뒤 지방으로 좌찬되었다.
홍종만 : 암살 행동대원.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와 동향인 것을 빌미로 한독당에 입당, 백범 및 한독당의 동정을 염탐하여 김지웅․김태선 등에게 알려 주고, 안두희를 1974년 5월 『동아일보』와의 회견을 통해 암살의 배후를 폭로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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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리를 끝내고서
백범 암살의 진상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나온 증언 및 자료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사건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이다. 암살 행동대의 일원이었던 홍종만씨의 증언, 은사였던 박동엽씨를 통해 전해진 행동대원 오병순의 증언, 그리고 암살자 안두희의 진술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4․19 뒤에 결성된 ‘백범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의 조직적인 조사 활동 및 당시 동 규명투위의 촉구로 시작된 검찰의 진상 제조사 때 확보된 증언들이다. 5․16으로 조사작업이 중단되어 버려 통탄스럽기는 하지만 1년여에 걸친 규명투위의 헌신적 활동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구체적인 증언들이 많이 확보되었다. 이때 확보된 증언 가운데는 핵심 배후세력의 주변에 있던 인물들의 증언들이 상당수 있다.
세 번째는 언론의 추적 보도나 기획 기사에서 밝혀진 증언․자료들이다. 여기에 속한 것들은 연루 혐의자들의 증언에서부터 정계 비화 형식으로 소개된 정황 증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이다.
마지막으로 직접 관련자는 아니지만 직책상 암살 진상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 또는 사건 처리에 간여하게 되었던 사람들의 폭로에서 드러난 자료들이 있다. 고정훈, 장흥, 최대교 씨 등의 증언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증언들 가운데는 서로 상충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행동대원으로서 1,2차 암살 시도에 함께 가담했던 홍종만․오병순의 증언도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한 진실성 여부가 의심스러운 증언도 있으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윤색한 증언, 불확실하거나 구체적이지 못한 것, 근거가 부족한 증언도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 증언들이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에서 일관성 있게 확보된 것들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경로로 수집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존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검토한 뒤에 권중희 선생이 받아 낸 안두희의 진술을 뼈대로 하여 씌어진 책이다. 따라서 기존의 증원과 자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증언과 자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의혹이나 문제점을 추적해서 확인하거나 ‘수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설혹 추적․확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많은 증언자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또한 권중희 선생이 그간 안두희에게서 받아 낸 진술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안두희의 진술을 토대로 암살의 진상을 완전히 밝힐 수 있을 만큼 종합적이고 세밀하지는 못했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권중희 선생이 받아 낸 안의 진술은 미국과 이승만의 개입 여부처럼 몇 가지 핵심적인 사항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그렇게 된 것은 권중희 선생이 처함 불가피한 조건 때문이었다. 개인의 힘으로 제한된 시간 안에 노회한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하여 ‘종합적이고 세밀한’진술을 받아 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 속에서나마 가급적 주관적인 판단이나 추정을 배제하고 관련자의 직접 증언이 있고 객관적인 근거가 확보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중요한 증언일 경우엔 반드시 출처를 밝혀 놓았고 증언이 엇갈리거나 불확실할 경우엔 주를 이용해 문제점을 밝혀 놓았다.
여러 가지 자료를 읽고 비교․검토하면서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진상을 밝힐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암살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40년이 넘도록 진상을 밝혀 내지 못하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뒤집어엎는 데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열정’이라는 걸 권중희 선생한테서 배울 수 있었다.
권중희 선생은 북가좌동의 두 칸 전세방에서 산다. 그러나 권중희 선생은 ‘열혈’이라는 수식어가 더할 수 없이 어울리는 그런 분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며 논리정연한 이론이나 치밀한 상황 판단에 앞서 전후좌우 돌아볼 겨를 없이 달려드는 저돌성, 불의 앞에서는 냉정한 분석이나 평가에 앞서 통분과 비분강개의 부르짖음이 먼저 터져 나오는 직설의 단순명료함,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장을 보는 초지일관, 이런 권중희 선생의 특성은 전시대 애국자들의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의를 보았거든 행할 것이요, 일의 이루고 못 이룸을 따지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다.”
이는 권중희 선생이 가장 존경하는 백범이 스물한 살 때 치하포의 객줏집에서 번복하고 있는 일본 육군 중위 쓰지다를 살해할 결심을 할 때 독백한 말이다.
바로 이것이다. 비록 치밀함은 부족할지 모르나 전투적 민족주의자, 백범주의자로서의 그런 열정이 아니고서는 가난한 집안 살림도 내팽개치고 그렇게 집요하게 안두희를 쫓아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권중희 선생의 애국적 열정에 힘입어 자료정리를 거들긴 했지만 허술한 작업으로 누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된다. 하루빨리 선생의 이 분투에 응당한 진상규명 작업이 이루어져 암살의 진상을 완벽하게 규명한 책을 직접 쓰실 수 있게 되기를 빈다.
1993년 8월
유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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