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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금강정 앞 덕포리 동강변 풍경. | 영월읍 덕포리 동강변 덕포나루터는 교통수단이 미처 발달하지 못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월읍에서는 뗏목과 배를 이용해 서울까지의 뱃길을 통한 상업 물물교역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사라진 덕포나루터와 주변 동강에서의 60년대까지의 풍속 여행을 떠나 보자.
여름 백사장 물놀이… 겨울 스케이트·썰매 수량 현재보다 5배 수질 청정 물장수 성업
조선 중종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월읍 영흥리 금강정에서 바라다본 덕포리의 풍경에 대해 “강 건너로는 상덕촌(尙德村)이라는 마을이 있어 초가집과 울타리들이 뽕나무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하며 그 남쪽 밀적포(密積浦)에는 나무들이 울창하여 마을의 연기와 물기운이 은은히 가리우고 어른거려서 그 곳을 바라 보면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다”고 묘사했다.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의 영월대교 위쪽인 상덕촌과 아래 밀적포에서 각각 덕(德)자와 포(浦)자를 따서 덕포리로 정해졌으며 덕은 크다라는 뜻이다. 덕포라는 지명은 남한강 상류가 되는 동강의 갯가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며 예전에는 나루터가 있어서 남한강을 이용한 물자 수송을 담당했다.
옛날 유일한 운반수단으로 영월을 비롯한 정선과 평창지역에서 출하된 목재는 뗏목으로, 담배 등 농산물은 배로 운반했다. 특히 담배는 당시 경기도 용인과 영월에서만 생산됐다고 한다. 덕포나루터에는 뗏목과 배를 만드는 작업으로 이른 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흥청거렸다. 담배 싣는 배의 길이는 40척, 폭은 8척이나 되는 큰배였으며 한번 조선작업이 시작되면 많을 때는 10여척을 헤아릴 정도로 큰 일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선(商船)은 여름철 홍수가 나서 강물이 많을 때 정성을 다해 출범제(出帆祭)를 지내고 출발하게 된다. 배에 담배와 콩 등 농산물을 가득 싣고 550리 거친 물길을 떠난 배는 일주일 이상이 걸려 서울 광나무에 도착한다. 담배는 물주에게 인도하고 콩과 옥수수 등의 곡식은 곡물상에 팔아 넘긴 뒤 소금과 광목 등 생필품을 사서 싣고 돌아온다. 이 때 주민들은 나루터에서 돌아오는 배를 기다려 광목과 소금, 석유 등 생필품을 보급 받는데 일반 부보상 보다 가격이 저렴해 인기가 높았다.
50년대 이후 신작로가 본격적으로 개설되고 서울과 영월을 잇는 철도가 잇따라 개통되면서 이같은 풍경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러나 60년대까지만 해도 동강 상류 평창과 정선에서 생산된 소나무와 참나무 등의 목재들은 동강을 따라 떠내려와 쇠줄이 설치된 덕포나루터에 자연스레 모여졌다. 이들 목재로 나루터 강변이 꽉 메워졌다. 목재용은 뗏목을 타고 서울 광나루까지 운송되고 탄광 갱목용은 트럭을 통해 인근 광산으로 운반됐다.
또 영월읍 삼옥리와 거운리·문산리 주민들은 유일한 교통수단인 뗏목에 옥수수와 감자 등의 곡물을 싣고 나루터에 도착한 뒤 읍내에서 쌀로 교환하거나 생필품을 구입해 되돌아 갔다. 아니면 동강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에 지게로 물건들을 져 날라야 했다.
당시만 해도 동강의 수량은 현재보다 5배 이상 풍부해 나루터 백사장에는 파도가 칠 정도였다고 한다. 수심도 깊고 더없이 청정한 수질을 유지한 데다 상수도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물지게를 이용한 물장수도 성업중이었다. 물장수들은 강물을 지고 가가호호 방문해 미리 준비해 놓은 옹기에 물을 붓고는 물값을 받았다.
마을에 별도의 샘물이 없었던 영흥리와 덕포리의 아낙네들은 사계절 내내 나루터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빨래를 했다. 여름이 되면 남녀 노소 구분없이 수많은 인파들이 백사장을 찾아 물놀이를 즐겼으며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얼음을 깨고 긴 대창으로 길이 50∼80㎝의 잉어와 누치 등을 잡아 올리면 구경꾼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 금강정 앞 동강에서는 해마다 겨울이 찾아 오면 40∼50㎝의 눈을 치우고 400m의 스케이트 트랙을 만들었다. 그리고 평창과 정선은 물론 멀리 원주와 홍천에서도 선수들이 출전하는 스케이트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또 지역대회를 통해 배출된 선수들은 도·중앙단위 각종 대회에도 출전할 만큼 기량이 뛰어났다. 당시 영월지역의 스케이트 동호인들은 300여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지역대회 출전 선수는 100여명, 도와 중앙대회 출전은 50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엄인호 영월군 기획감사실장은 “영월초교 6학년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해 영월공고 재학시절에는 평소 갈고 닦은 실력으로 전국빙상대회 스피드스케이트 500m와 1500m부문에 출전해 메달을 따기도 했다”며 “스케이트와 축구공이 없는 아이들은 어린 아이 주먹만한 돌멩이로 얼음축구를 했으며 앉은뱅이 썰매와 속칭 외발이를 신나게 탔다”고 회상했다. 그는 “해빙기에는 도끼로 가로 세로 10m의 얼음을 잘라 얼음배를 타는 위험 천만(?)놀이도 즐겼다”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사라진 풍경들이다. 각종 개발 행위에다 최근 수년간은 도암댐 방류수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동강은 우리에게서 이들 모두를 빼앗아 갔다.
영월/방기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