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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신뢰시 : 23편
1. 시편 23편의 특성 : 목자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시편에서 23편은 장르의 구분에서 ‘찬양시’로 불리는가 하면, ‘간구와 신앙시’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는 ‘신뢰(신앙)시’로 다룬다. 시편 23편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즐겨 암송하는 시편의 대표적인 시이다.
시편 23편은 이 글로 시작되고 있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에서 보게 되듯이 시편 23편의 제목이 된다. 시편 23편은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심’을 깊이 신뢰함을 찬양하는 노래말의 시이다. 이러한 시편 23편은 모두 6절의 짧은 구절로 되어 있으나, 각 구절을 단락으로 분류하여서 그 내용이 지닌 의미를 살펴 볼 수 있다. 시편 23편을 이해하는 학자에 따라 단락 구분은 1-2절, 3-4절, 5-6절 셋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1-4절, 5-6절 둘로 구분할 수 있기도 하나, 여기서는 각 구절의 내용 구분에 의해 여섯으로 나누며, 각 단락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붙여 볼 수 있다.
․ 1절 / 목자이신 여호와에 의해 부족함이 없는 시인
․ 2절 /시인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하나님
․ 3절 /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하나님
․ 4절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시인을 지킴에 있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 5절 / 주께서 차려 주신 잔칫상에 앉아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는 시인
․ 6절 /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존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시인
2. 시편 23편 해설
2-1. 목자이신 여호와에 의해 부족함이 없는 시인(23:1)
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은 첫 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시의 저작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왕 다윗이 지은 시이다. 한글성경은 시의 저작자가 다윗인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다윗의 시]라고 괄호처리하고서 1절을 시작하는 것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 원문은 1절의 시작이 “다윗의 시”(A Psalm of David)로 문장을 시작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첫 절을 시작함으로써 시인인 다윗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자신에게 목자이심을 말하였다. 이는 시인인 다윗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묶어서 그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있는 양떼의 하나임을 의식하고 있는 것에서 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과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31)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시인을 향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이처럼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함에는 양에게서 목자의 존재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주는 것에 있다. 이는 목자에 사용된 원문의 단어가 ‘돌보다’, ‘먹이다’, ‘양육하다’, ‘다스리다’, ‘관계를 맺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을 목자가 양을 돌보고 먹이듯이 양육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이는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므로 그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있는 양인 자신은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는 끝 절인 6절에서 그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를 말해주면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자신과 함께 하면서 끊기지 않고 계속될 것이기에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였다.
2-2. 시인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하나님(23:2)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의 2절은 1절에서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면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시인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것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다윗의 목자가 되셔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에게 있어 온 그를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목자가 양떼 – 다윗과 이스라엘 –를 위해 해 주고 있는 모습을 떠 올리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알려 주시고 있다.
목자는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배불리 맘껏 먹게 하며 마실 물이 평화로이 누워 쉬게 해 준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2절). 하나님께서 시인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먼저 말씀해 주시는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와 동의적 대구를 이루어 그 광경을 더욱 선명히 해 준다. 목자는 양떼를 먹이가 풍부한 푸른 초장과 마실 물이 넉넉한 물 가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순간을 노려 공격하는 사나운 맹수에게 해를 당하지 않도록 안전히 양떼를 지킨다. 그런 까닭에 목자는 양떼가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히 물을 마시며 평안히 쉴 수 있게 보호자가 되시며, 또한 목자는 양떼가 안전히 쉴 수 있는 평온한 거처가 되신다. 그러므로 목자와 함께 하는 양은 부족함이 없다.
시인인 다윗이 이러한 표현의 시를 지을 수 있은 것은 그 자신이 경험한 목자적 삶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싸우게 될 때 사울 왕에게 한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사무엘상 17:34-37에서 다윗은 사울 왕에게 말하기를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말하였었다. 다윗은 자신이 목자로서 아버지의 양떼를 이끌며 안전히 지킴에 있기도 하였으며, 또한 자신이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와 돌봄에 있는 양으로 있기도 하였었다. 그런 그는 4절에서 보게 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원수의 목전’에 있는 위험한 상태에 처하며 해를 당하는 일을 겪었으나, 그 모두에서 자신을 안전히 이끌며 돌보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를 경험하였다. 다윗이 시인으로 시편 23편을 짓게 된 것은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그 여호와께서 또한 온 이스라엘의 목자이심을 백성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목자로 따르며 그분의 인도와 보호 안에 있게 하고자 하였다.
2-3.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하나님(23:3)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본 절은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시인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 그렇게 하시는 목적을 알려 준다. 그런데 개역(개정) 한글성경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번역하여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가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목적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다른 번역 한글성경도 대체적으로 취하고 있는 입장이다.1)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 원문은 운율이 2+2+2의 세 운율로 되어 있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가 첫째 단락의 운율 단위를 이루고, “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가 둘째 단락의 운율 단위를 형성하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가 마지막 셋째 단락의 운율을 형성하고 있어서 “그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그가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이다. 그래서 “그(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나(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나(시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으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는 시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적인 동시에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목적인 것이다. 번역 영어성경에서 NASB는 이러한 2+2+2로 된 원문의 구조를 충분히 살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그가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the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라고 번역하였다. 이 번역의 입장을 취한 한글성경은 현대어성경2)과 가톨릭성경3)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또한 시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이곳에서 소생시킴에 있는 ‘내 영혼’은 인간의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에서 ‘영혼’으로 표현되지만, 이 뜻으로만 번역해서는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본문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문맥에 의해서 번역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단어는 ‘영혼’이란 번역 외에도 ‘생명’을 비롯해서 ‘마음’, ‘몸’, ‘기력’으로도 번역되어 인간의 전존재와 관련해서 사용된다. 본문의 구절에서는 ‘영혼’으로의 번역보다는 ‘생명’으로 번역함이 더욱 그 의미를 잘 살린다. 왜냐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에서 의도하는 ‘내 영혼’은 몸과 대조되는 개념인 영혼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때문이다. 즉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을 지칭한다. 양은 물가에서 물을 먹고 초장에서 풀을 먹어 활력과 힘을 회복함에 있게 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 생명을 소생시키시고’라고 번역함이 좋다.
그리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에서 ‘의의 길’(개역, 개역개정, 한글킹제임스, 킹제임스흠정역)의 ‘의’는 ‘올바름’, ‘의로움’, ‘공정함’의 뜻을 지닌 것에서 문자적인 직역은 ‘공의로운 길’인데, ‘의로운 길’,4) ‘바른 길’,5) ‘똑바른 길’,6) ‘곧은 길’7)로 각각 번역되었다. 이는 앞서에서 하나님께서 목자이신데 따라 양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너그럽게 베풀어주셨다는 점을 밝힌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힘을 주며 또한 소생시켜서 그들에게 해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치워주시므로 그들이 평탄하고 곧은 길로 평안히 해 주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도 그들에게 부족하지 않은 것에서 ‘쉽고 평탄한 길’, ‘곧고 평탄한 길’이 되심을 뜻한다. 그런데 이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표현은 이 어구만으로는 이것이 무엇을 가지고서 해 주시고 있는 말인지를 명확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원문의 의해서 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원문으로 보면 의의 길로 말해지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다. 이는 이 ‘길’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원문의 단어가 주로 좁은 길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를 떠 올리게 한다. 해서, 누구에게나 이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만을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 그들은 심히 적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온 길의 끝은 ‘생명’이다. 이렇게 생명으로 들어가는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에서의 ‘인도하신다’에 사용된 원문의 단어는 ‘앞서가다’, ‘안내하다’란 뜻으로 목자가 양을 이끌고 앞서가는 모습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인에 앞서 계시며 먼저 그를 인도하시고 의로운 길로 안내하시기 때문에 의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의 길’과 그 길로 ‘인도하신다’는 함께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기 15:13, 32:34, 신명기 32:12, 느헤미야 9:12에서 보게 되는 것으로, 시인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을 의식하고 있는 것에서 이다.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인도되었던 광야는 목자되신 하나님이 자신의 양들에게 드러내신 의의 길이었다. 광풍에 의해 거센 풍랑이는 바다에서 물결이 부딪혀 물이 배에 들어와 가득하게 됨으로 배가 곧 가라앉을 것 같은 상태에서도 예수께서 배 고물에 머리를 기대고 주무시고 계셨으며,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곧 바다에 빠져 다 죽게 생겼는데 어찌하여 자신을 돌보아주지 않느냐고 아우성칠 때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고요하게 하신 것(마 8:23-27; 막 4:35-41; 눅 8:22-25)에 있은 평온이 시인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되신 하나님에게서 본 의의 길이었다. 그 의의 길로 인도 받아 시인 또한 걸음에 있어 이 시를 지음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또한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적 혹은 동기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이다. 즉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그 양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심에 있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셔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분 – 목자 – 이신지를 알게 해 주시고 계신 것이다. 야곱은 요셉에 의해 애굽에 들어와 바로(왕) 앞에 있게 되면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여 말하기를,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라고 말하였으며, 애굽에서 십칠 년을 더 살고 일백사십 칠 세에 눈을 감아 열조에게로 돌아간 것(창 47:28; 49:33)에서 보게 되듯이 험악한 생애를 살았으나, 이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게 해 주시는 ‘나의 하나님’이심을 보며 체득하는 세월을 살게 해주시는 것이었다. 야곱의 일생은 순탄치 않은 험악한 세월을 사는 것이었으나 그 세월은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을 걷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인생을 통해 눈으로 뵌 하나님 안에서 평안히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눈을 감음에 있었다. 사도 야고보는 야곱이 살아왔던, 그리고 그의 조상 이삭이 살아왔고, 또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살아온 믿음에 있는 하나님을 설명하여 주는 것에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약 2:22)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주님이심을 언약을 주시고 이를 행하여 가시는 것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시고 이것에 그의 믿음이 있게 하여 그와 함께 하는 믿음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이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심에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복음의 진리를 받아 이를 알고 그 믿음에 있으면 그가 하나님께 가진 깊은 신뢰는 굳은 의존에 있을 것이다. 해서, 사도 바울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라고 하였으며,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1:23, 2:6-7) 라고 하였다. 이로써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감사를 드리자. 그리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히 12:28).
2-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시인을 지킴에 있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23:4)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본 절에 이르기까지의 1-4절을 보면, 첫 절에서부터 다음 구절로의 진행은 내용이 구체화되는 발전되는 성격을 띤다. 즉 뒷 절은 앞 절의 내용이 설명되는 진전을 보인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구체적 설명이 2절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신다”라고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임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 본 4절에서는 3절에 따라상반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말하고 있으며, 하반절에서 그 이유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밝혀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문에 의한 직역에서 확인된다. “비록 내가 흑암의 골짜기로 걸을지라도 나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합니다.” 서명수8)는 이를 다음과 같이 사역하였다. “죽음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본 절 상반절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그림자’, ‘그림’을 뜻하는 단어와 ‘죽음’, ‘죽는 것’, ‘죽음의 영역’을 뜻하는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죽음의 (짙은)그늘’, ‘흑암’을 의미한다. 개역(개정) 한글성경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번역했으며, 가톨릭성경은 ‘어둠의 골짜기’, 공동번역, 쉬운성경은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 새번역성경은 ‘죽음의 골짜기’, 현대어성경은 ‘죽음 그늘 드리운 골짜기’, 바른성경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 우리말성경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깊은 골짜기’, 현대인의성경은 ‘죽음의 음산한 계곡’, 한글킹제임스성경은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 킹제임스흠정역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등으로 각각 번역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2절에 나오는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 가’란 표현과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대조되는 장소적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3절에 나오는 ‘영혼의 소생’, ‘의의 길로의 인도’와도 정반대되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시인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과거의 상황에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 닥칠 현실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 상황이 닥쳐 죽음에 처해지는 위험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시인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할 것임을 강하게 말해준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해가 시인을 불행하게 하지 못한다. 해를 당함에서 그와 함께 하서서 그를 건져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대함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해지는 고난과 환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건져 주신 구원의 은총을 바탕으로 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놓이는 상황에 처해질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입는 해에 두려움에 있지 않은 하나님께 대한 굳은 신뢰와 그로 인한 의존에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하반절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원문에서 ‘왜냐하면’, ‘그러므로’, ‘~때문에’라는 뜻으로 주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 나타내 주시고 있는데,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문장의 고리로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가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함께 하심은 시인으로 하여금 이제와 앞으로 환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 이처럼 환난 속에서 담대할 수 있는 근거인 ‘주님의 함께 하심’은 시인이 친히 환난의 현장에서 체득한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함께 하심은 구약과 신약 모든 성경에 걸쳐 ‘임마누엘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시인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환난과 곤고 가운데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출 33:14; 신 31:6-8).
그러므로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주님이 함께 하신 임마누엘 신앙에 있는 까닭임을 밝히면서 주님이 시인에게 어떻게 함께 해 오셨으며 또한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를 두 가지를 들어 말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고대 팔레스틴에서 목자들은 거의 공동적으로 몇 가지 목양도구들을 휴대하고 다녔다. 그 중에서 목자의 대표적인 목양도구는 지팡이와 휴대하기 간편한 가죽 행랑이다.9) 그런데 시인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말함으로써 목자는 지팡이 외에 막대기를 하나 더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지팡이는 가늘고 길며, 막대기는 그보다는 짧고 굵다. 그런데 목자가 지니는 지팡이와 막대기에 대해서는 목자가 사용하는 두 종류의 도구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하나의 도구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나의 도구로 보는 견해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따로 따로 변별되는 서로 다른 것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 거의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들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이라 본다. 서로 다른 둘로 보는 견해는 주의 지팡이는 목자가 자신의 몸을 의지하는 도구로 쓰기 위해 지니고 다녔으며, 막대기는 양을 헤치는 짐승으로부터 지키고 돌보는 도구로 쓰기 위해 지녔다고 본다. 김성진10)은 목자가 지닌 도구가 둘일지 아니면 하나일지에 대해서는 이것이 목자를 연상시키는 상징법으로 사용되었기에 이 두 도구의 정체에 대한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하나의 도구이든 또는 둘의 도구이든 그 쓰임새에서 첫째 용도는 목자의 지팡이의 성격으로, 둘째 용도는 목자의 막대기의 성격으로 각각 쓰이는 것에 있었다.
이렇게 지팡이와 함께 막대기를 몸에 지니는 것은 목자가 거친 들을 거닐 때 짚고 다니고, 풀숲 등을 헤쳐 볼 때 쓰는 용도만 아니라, 양을 몰고 가는데 사용하는데 고집 센 양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자꾸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갈 때 둥그렇게 굽은 손잡이 부분으로 양의 목을 감아 양 무리 안으로 끌어들일 때 유용하게 쓰이는 교정 및 형벌의 용도로도, 그리고 목자가 양의 생명을 노리는 야생 짐승을 방어하고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무기의 용도로도 쓰이는데, 사나운 짐승이 숨어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양을 물어뜯으려 할 때 직접 맞서 후려치고 휘둘러 물리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러므로 목자들에게 있어서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양의 필수 도구이다.
그런데 본 시편에서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말해주는 것은 시인에게 주께서 함께 계시다는 위안을 주는 것에서 이다. 시인에게 함께 계시는 주님은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상징되고 있다. 즉, 주께서는 시인을 지키고 돌보는 지팡이요 막대기로 함께 하고 계시다. 그런 까닭에 양들에게 있을 수 있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우는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고 맹수에게 물어뜯기고 먹히는 해를 당할 위험한 상태처럼 시인 또한 그 상황에 닥쳐있을지라도 시인에게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은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함께 계실 것이 약속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죽음을 당할 수 있는 해로부터 건져주실 주님이 계심을 든든히 의지하고 있음은 그에게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온함에 있게 한다. 그러므로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사나운 맹수들로부터 양들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쓰이는 용도에 있는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에 의해 주께서 함께 계심은 시인에게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고 있는 ‘안위’, 곧 ‘위안(위로)’이 되고 있는데, 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해 있음에서 해를 당하는 것으로부터 그에 대한 두려움에 있지 않는 요인이 되고 있다.
2-5. 주께서 차려 주신 잔칫상에 앉아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는 시인(23:5)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편은 5-6절에 이르러 상황이 전환된다. 앞서 1-4절은 시인에게는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으로 인해서 시인이 처한 그를 대적하는 원수를 비롯한 악한 자들로 인해 고난과 환난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 겪는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 점층법에 의해 잘 표현이 되었다고 하면, 본 구절에서부터는 목자되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시인이 그분에게 있음으로 해서 누리는 행복한 기쁨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한 것에서 5절에서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어떤 의미에서 해 주시고 있는지를 알기가 어렵다. 먼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에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는 “내 원수가 보는 앞에서”이다. 그리고 ‘내게 상을 베푸시고’에서 ‘상’은 표창(表彰)과 같은 “상(賞)”을 일컫는 말이 아니고 밥상과 같은 식탁(食卓)을 말하는 것으로의 ‘상(床)’, 또는 ‘잔칫상’을 말하는 것으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귀한 음식들을 상에 잘 차려 놓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주께서 나를 위하여 상을 차려 주셨다/잔치를 베풀어주셨다”를 말한다. 이는 개역(개정) 한글성경 외의 다른 한글성경의 번역에서 확인된다.
킹제임스흠정역.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한글킹제임스. “주께서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 앞에 식탁을 마련하셨나이다”
바른성경. “주께서 내 원수들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쉬운성경.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우리말성경. “주께서 내 적들 앞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현대인의성경. “주께서 내 원수들이 보는 가운데 나를 위해 잔치를 베푸시고”
현대어성경.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 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새번역성경.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공동번역.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가톨릭성경.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그리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도 이 글의 번역 문자로만 보면 잘못 이해하거나 이해하기가 어렵다. 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지려면 원문에 의해서 보거나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앞서 상반절의 번역 한글성경에서 보았듯이 다른 번역 한글성경과 대조하여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개역(개정) 외의 다른 한글성경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를 본다.
킹제임스흠정역.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한글킹제임스.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바른성경.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칩니다”
쉬운성경.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 득 채워주십니다”
우리말성경.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칩니다”
현대인의성경.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셨으니 내 잔이 넘치는 구나”
현대어성경.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넘치라 하고 부어 주시네”
새번역성경.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공동번역.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가톨릭성경.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다음으로,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 의해서 보면,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기름’은 일반적으로 ‘향유’, ‘감람유’를 의미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귀한 손님에게는 그의 머리에 값비싼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다(참조. 시 45:7; 133:2; 눅 7:46). 손님이 집으로 들어올 때, 주인이 입구에 서서 그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그를 정중하게 맞아들였던 것이다. 때로는 들어오는 손님에게 향수를 뿌려 주기도 했다. 시인은 이를 염두에 두고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시인은 또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단지 기름을 머리에 바르는 정도가 아니라 풍성하게 부어주셨음을 뚜렷이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시인을 매우 존귀하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해에 의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마치 어떤 아버지가 그 손을 내밀어 자기 아이에게 음식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고통이나 어려움 없이 자신에게 생계를 제공해 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많은 악의에 찬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시기하며 자신의 파멸을 바라고 있고 어쩌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탈취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계속 그에게 후하게 나타나시며 선을 베풀어주신다는 깊은 생각에서 이 혜택을 이끌어내고 있다.‘기름’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습관과 관련된다. 우리가 알기로는 고대에는 큰 잔치 때에 향유가 사용되었으며, 자기 손님에게 이 향을 발라주지 않게 되면 그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풍성한‘기름’의 저장과 넘치는‘잔’이 단순한 일상생활의 공통적인 필수품에 대한 공급이 아니라 그 이상의 풍성함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성경 역사가들의 기록처럼 다윗이 풍성하게 공급받았던 왕실의 부를 칭송하는 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윗이 받았던 것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혜택에 의해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친절하고 후덕하신 아버지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본을 통해서 부요한 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권면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더욱더 감사를 돌리면 돌릴수록 하나님은 그들을 진수성찬으로 먹이신다고 말한다.
칼빈의 설명에서 보는 대로 시인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묘사하는 표현이 있게 된 배경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셔서 그가 있는 왕궁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부요함에 있게 하신 것에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에서 이 싯귀의 배경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 왕의 질투와 미움을 받아 10년에 이르는 세월을 도망하며 피신에 있었다. 그리고 또한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는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일시 몸을 피하여 있게 되었다. 그 때 다윗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주께서 내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를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사울 왕의 박해로 피신해 있을 때에도, 그리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몸을 피해 있을 때에도 각각 있었다(삼상 21:1-6; 삼하 17:27-29). 그때 한 입 문 떡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신하와 병사들 모두의 생명을 보존시키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에 있는 부요함이었다. 다윗은 그렇게 자기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이들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잔치상을 잊지 않았다. 그러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있으면서 누리는 풍성한 상(床)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고 있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후히 대하시는 은덕임을 생각하고, 이를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나타내었다. 이에 대해 서명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이해를 주고 있다.
5절은 1-4절과는 전혀 다른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1-4절이 목자와 양의 관계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반면, 5절은 매우 다른 분위기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원수들이 죽이려고 뒤쫓아 오는 급한 상황 속에서 어느 집으로 뛰어들어 피신하였는데, 집주인이 도망자의 목숨을 자기 목숨처럼 여기고 적극적으로 그를 보호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이처럼 접대 받고 있는 모습은 “내 원수의 목전에서”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원수’에 해당하는 단어는 단순히 시인의 대적자가 아니라 늘 그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그를 뒤쫓는 행동을 하고 있는 대적자로서 지금도 시인의 생명에 위해를 가하기 위해 계속해서 뒤쫓아 오고 있는 대적자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서 그 대적자들은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이 사용되어서 지금도 시인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뒤쫓아 온 자들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무리들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끊임없이 대적하는 원수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리고 ‘~의 목전에서’는 ‘~의 반대편에서’(in front of , in sight of, opposite to)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식탁을 차린 것은 대적하는 자들이 저 건너편에서 보고 있는 가운데 그 손님 바로 앞에 차린 것이다. 시인이 대적자들을 피해 주인의 집에 들어왔을 때 그 주인은 대적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시인을 지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히 접대하였으니 이는 대적자들이 보고 있는 목전에서였다. 한 부유한 주인이 자기 집으로 들어온 그의 손님을 아낌없이 즐겁게 해 주는 것에 반해, 그를 대적한 원수들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을 통해서 시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보호, 보존의 “은혜들”과 “유익”을 강화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에게 있은 일의 경험에서 목자되신 하나님 안에 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하나님의 식탁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쉬는 것(relaxing)’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더 바이저(Artur Weiser)는 주님의 집에서 주님께서 차려 주시는 만찬상 앞에서 누리는 즐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거룩한 의식은 집행이 되었고 노래 소리는 다 지나갔다. 회중들은 축제 제목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후(시편 45:7; 누가복음 7:46과 비교하라) 하나님의 집에 마련되어 있는 즐거운 제사 음식상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초대 받은 손님으로서 그러한 음식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이고 즐거운 일인가(시편 15:1과 비교하라).
시인은 원수들을 피해 하나님의 집에 찾아들었다. 하나님은 그 시인을 박대하여 쫓아내지 않고 손님으로 맞이하며 식탁으로 안내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머리에 향기 풍기는 기름을 바르며 귀중한 손님으로 정중히 맞이하셨다. 식탁으로 안내 받은 시인은 자신을 위해 정성스럽게 차린 주인의 음식과 가득 채워 대우하는 잔을 대하며“실로 내 잔이 넘칩니다”하며 감격과 감사를 표한다. 시인은 식탁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접대를 대한 것이다. 이 광경을 번역 영어성경에서 GNB와 LB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잘 표현하였다.
주께서, 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저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고, 저를 귀중한 손님으로 환영하여 주시고, 제 잔이 철철 넘게 부어주셨습니다.(You prepared a banquet for me, where all my enemies can see me; you welcome me as an honored guest and fill my cup to the brim.)
주께서, 제 원수들 앞에서, 저를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 주십니다. 주께서 저를 손님으로 환영하셨고, 베푸신 복이 넘칩니다 (You provide delicious food for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have welcomed me as your guest; blessings overflow!)
2-6.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존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시인(23:6)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인은 자신을 식탁으로 인도하는 주인에게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참목자상을 보았다. 그러한 그는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현대어성경은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 듯 그들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넘치라 하고 부어 주신다며 “아, 그 누가 이렇듯 행복하리오. 이처럼 포근하리오. 주님의 손길 살아 생전 끊이지 않으리니 이 목숨 살아 숨 쉴 동안에 주님의 전에 오래도록 살으리이다”라고 하였다. 시인이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할 것이라며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을 표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작하신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언제나 계속될 것이어서 사는 모든 날 동안 깊이 신뢰하는 것에서 이다. 그러한 시인은 1절에서 보는 바인“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살아 숨 쉬는 동안에 하나님의 집에 오래 거할 것이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을 시로 적어 이스라엘에게 전하여 알리고 노래하여 부름에 있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또한 자신을 따라 목자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넘침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그분의 인도와 보호 속에 살도록 하였다.
3. 시편 23편의“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에 나타내신 메시야 예언의 성취
3-1. 메시야 예언의 성취로 있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시편 23편은 다윗이 지은 시로 찬양시, 또는 간구와 신앙시의 성격을 가지나, 이 시는 메시야 – 그리스도 - 에 의해서 성취하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그 믿음에 있게 하는 예언적인 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10:7-21에서 시편 23편에서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라고 하신 목자이신 그 여호와가 다름 아닌 자신이심을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이다. 그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그 양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목자는 그러한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양을 지키는데 목자는 자기 생명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한 목자와 삯을 받으며 일하는 자는 구분이 된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자기 양도 아니기에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이 사실을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유대인 지도자들에게서 각각 여실히 보았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푼다. 다윗의 시에서 보는 다윗과 이스라엘이 겪었던 상황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에게는 모든 약함과 병 듦과 눈 멈과 귀 멈과 귀신 들림에 있은 자들에게 행해진 구원에 의해서 나타났다.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이적의 능력을 행하여 고치셨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진실로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을 보았다. 목자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그들에게 거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어서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신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직무를 하나님께 바쳐 행하지를 않았다. 유대인 지도자로 불리는 직분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짐에 있는 자로서가 아닌 실상은 삯꾼이었으니, 그들은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지도 않았으며(눅 7:46), 백성을 자기 양으로 여기지 않는 까닭에 약함과 병 듦과 눈 멈과 귀 멈과 귀신 들림의 모든 비참함이 보여주는 인간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며 그 모두로부터 구원하고자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침에 있어야 할 대제사장, 백성의 장로, 서기관이 아닌 삯꾼인 까닭에 백성들에게서 삯이 되는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재물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3-2.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시작이요 마지막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신 하나하나 모두에서 유대인들은 다윗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겪었다. 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져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진실로 함께 하시니, 진실로 평생에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심에서, 그리고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게 해 주심에서,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시며 풍성한 식탁으로 안내하고 잔을 가득 채워주심에서 묘사되고 있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풍요하여 넘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에 믿음을 갖게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헌신제사의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공급되어지는 생명의 떡을 먹음에 있고 생명의 음료를 마심에서 시작됨이 영원히 끊기지 않고 계속되어 마지막이 되니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계신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함에 있게 된다.
요한계시록 21:1-7 /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2:1-5 / "1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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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번역성경)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바른성경) “내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쉬운성경)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은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말성경) “내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현대인의성경)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구나.” (공동번역)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한글킹제임스) “그가 내 혼을 소생시키시고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킹제임스흠정역)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2) “내게 생기 불어넣으시고 똑바른 길로만 이끌어 주시니 주님이 아니고서야 주님의 이름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리.”
3)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4) 우리말성경, 현대인의성경
5) 번역성경, 가톨릭성경
6) 현대어성경
7) 공동번역
8) 협성대학교 구약학 교수
9) 지팡이 외의 가죽 행랑의 용도는 목자가 양떼를 몰고 다니면서 시장할 때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음식(주로 마른 빵)과 약간의 헝겊과 노끈, 그리고 적당량의 매끈매끈한 돌맹이들이 들어 있다. 헝겊과 노끈은 양이 가파른 언덕에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져 상처를 입었을 때 싸매어 주기 위한 것이고, 돌맹이는 양들을 해칠 들짐승들이 멀리서 기회를 엿보며 배회할 때 던져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할 때 쓰인다. 목자들의 이와 같은 행장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 장면에서 볼 수 있다(삼상 17:39-40).
10)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