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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롬 6:1-11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성도 찬송: 5, 46, 447장 교독문: 벧전 2:1-10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도의 관계
성도의 구원은 시간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구원의 원인은 창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이유는 이미 삼위 하나님 사이의 구원 언약으로 성도의 구원이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다고 성경이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시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도의 부르심을 완성하시고, 현재에 이르러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효력 있는 부르심,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확신의 믿음과 회개의 역사를 경험하여 성도의 자리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이 지상의 삶에서 성도에게 보여주시는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총이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 역사의 시작일 뿐이다. 성도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이 믿음을 갖게 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고 성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이유는 분명히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기 위함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요 16:13-14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성령 하나님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성도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이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엡 2:18을 보면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선언을 바울이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연합이라고 생각하면 ‘하나 됨’ 또는 ‘일치 됨’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조금 더 생각할 내용이 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 또는 사상들은 ‘신과의 합일’을 연합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그 육신의 죄 됨을 벗어버리고 영적으로 순결한 상태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 이것을 신과의 합일, 하나 됨, 영적인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속하시는 작업을 마치신 후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붙이시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령 하나님의 이 작업은 나의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흡수되어 이제부터 예수께서 나를 통하여 사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비적인 연합을 오해하는 것이며, 신과 인간의 하나 됨에 해당할 뿐으로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라는 말을 사용한다(롬 6:3). 이때 합한다는 것은 성도의 삶에 그리스도에게 흡수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죽음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고, 또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롬 6:4-5에서 말한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건너고 부활의 자리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으로, 그리하여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도의 인격이 융합되어 인간의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비적으로 연합되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이며,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의 몸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연합에 대해 롬 6:7에서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의롭다 하심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법적인 상속자로 인정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맏아들로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따라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이 부활의 열매가 되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법적인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갈 3:15; 히 9:15-20).
따라서 성도가 구속함을 받은 후, 성령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심과 믿음을 갖게 하신 사역으로 성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발자취를 지나 이제는 죄의 몸이 죽어 의의 몸으로 변화되는 연합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어떤 신비적인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우리의 인격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새로운 생명이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다.
요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두 구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구원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살며, 그 결과 서로의 안에서, 서로를 위해서 살게 되며, 그리하여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이제부터 능동적으로 의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평생토록 그분에게 붙어 있어, 그리하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온전히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구원하심을 얻어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부르심을 받고, 거듭난 후에 믿음과 회개함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하여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그렇게 고백하는 자가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을 나의 주인이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가리라는 고백을 하는 자리로의 이전함에 있다. 이러한 따라감은 그저 그분을 닮아감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삶의 목표가 되는 것으로, 내가 나의 삶의 목표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보여 주신 것이 가장 복된 삶인 것을 인정하는 삶으로의 변화인 것이다. 이 변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시작은 아니다. 신앙생활은 말 그대로 사는 것인데,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아직 정식으로 성도의 삶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시작을 위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의 개념을 바꾸어주시는 과정인 것이다. 이 과정은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좌정하시어 그 생각이 거듭난 자로서의 방향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시느냐 하면, 우리가 이전에는 죄의 노예로써, 사망 아래에서 살고 있었지만, 거듭나고 믿음을 받은 성도는 그러한 자리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다른 자리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 변화가 무엇인가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이 바로 거듭난 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가져야 할 바른 연합의 생각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분의 삶에 성도가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됨을 인정하여 그분 안에만 가장 복 됨이 있음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결국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그분이 보여 주신 삶의 모든 것이 내가 가장 가치 있게 여겨야 할 것으로 인정하여, 세상에서의 비교를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성도가 실제로 그의 신앙의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가지고 있어야 할 바른 기초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가 아니라 실제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어떤 신비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많은 분들이 신앙한다는 것을 어떤 신비적인 것에 몰입하여 나의 것은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나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렇게 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이 추구하는 것으로 비성경적인 내용일 뿐이다. 오히려 이러한 신비적인 연합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요, 그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요, 그분의 재림이 나의 영원한 안식임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가장 복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가 신앙의 출발점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마음 가짐인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새로운 순종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믿음의 본질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으로서, 세상의 판단과 편견과 이념과 추구를 따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분 안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벧전 2:7-8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이 두 구절의 의미는 단순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을 계속 함으로써, 그리고 열심으로 그 고백을 주장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받은 은혜를 나누는 교제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듭난 후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장 존귀한 분임을 고백하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분을 버렸지만,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그 어떤 보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가장 보배이심을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연합은 성도의 삶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이 삶은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리라는 다짐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연합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게 되면, 성도의 삶은 단순히 무언가를 열심히 하게 되고, 그 열심을 통하여 즉 자기의 공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의 삶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삶이며,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우리의 공로 없이 무상으로 받은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벧후 1:4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이 약속을 받은 우리가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성도의 삶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의 기초이며, 이를 기반으로 성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이것이 바로 칭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