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복(愚伏)선생의 생애(生涯)
1. 생애(生涯)
우복선생은 명종 18년(1563) 9월 14일에 탄생하여 인조 11년(1633) 6월 17일에 서세(逝世)하기까지 만 70년을 일기로 한다. 50년에 가까운 오랜 관직생활에서도 개인의 사유재산을 축적하지 않아, 태어나서 성장한 고향 청리면 율리(栗里)에도 넉넉한 생활기반이 없고 벼슬을 다하고 돌아와 세상을 떠난 자리 사벌면 매호리1)에도 변변한 주거도 없었다. 오직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구현되어 인간이 정도(正道)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에만 가치를 두는 청빈하고 정의로운 일생을 살았다.
선생의 생애를 시기별로 구분해보면 그 일생의 뜻있는 역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70년 생애를 8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별세하신 이곳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가. 제1기 (成長期 ; 出生〜20세)
우복선생은 명종 18년(1563) 9월 14일 상주군 청리면 율리2)에서 찬성공(贊成公 휘;汝寬)과 합천이씨 사이에 2남 2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촉망을 받아 종조부(諱;國成, 號;復齋, 參奉)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 일곱 권을 읽고 내용을 잘 기억하여 칭송을 받았고,
8세 때는 소학(小學)을 읽고 외우며 오묘한 뜻을 깨우쳐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16세 되던 해에 처음 진사초시(進士初試)를 거쳤다.
18세 때는 상주목사로 부임한 서애(西厓 諱;柳成龍)선생을 찾아가 사제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서애선생은 새 제자를 만난 즉시 그 정중한 행동과 영특함을 알아보았고 이후 서애선생의 수제자로 학맥을 이어 유학사에 뚜렷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2) 출생하신 이곳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나. 제2기 (出仕初期 ; 초급관료시기 ; 20세〜28세)
20세에 또다시 진사초시를 거치고 21세 때에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와의 혼인하였는데 이듬해 상배(喪配)하는 불운을 겪고 25세에 진성 이씨(眞城李氏)3)와 재혼하였다.
24세 봄에 정시(庭試)에서 소과에 입격하여 진사4)가 되고, 그 해 가을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5) 부정자에 등용됨으로써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관직은 주로 학문에 비중을 둔 청환직(淸宦職)이었다.
26세 때에는 예문관(藝文館)6)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종사랑; 9품)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대교(待敎; 통사랑; 정8품)로서 경연(經筵)7)에 입시(入侍)하였는데 강론에서 임금님(宣祖)의 질문에 원로 경연관들이 대답하지 못한 것을 말단 관직자가 설명함으로써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듬해(27세) 봄에 무공랑(정7품)으로 승진되고 봉교(奉敎)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독서당에서 사가독서8) 하였다. 이에 더하여 정3품 당상관 이하 현직 관료를 대상으로 치르는 과거시험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함으로써 더욱 촉망을 받게 되었지만 사람 추천을 잘못하여9) (李震吉 誤薦) 문책되었다가 임금님의 배려로 다시 서용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3) 父는 校尉 潔, 祖父는 察訪 壽琴, 曾祖父는 參判 松齋公 堣, 外祖父는 東萊 鄭英
4)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는 小科(생원과․진사과)와 大科(文科라고도 함)와 武科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소과에는 初試와 覆試가 있었고 복시에 합격하면 生員이나 進士가 되었다. 생원이나 진사는 학자로
인정받는 자격이며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이 동시에 주어졌다.
5) 조선시대 외교에 관계되는 문서를 맡아 본 관청
6) 조선시대 制撰(임금의 말씀이나 명령의 내용을 신하가 대신 짓는 것)과 辭令(국정의 모든 문한)을
관장하던 관청
7) 임금 앞에서 經書를 강론하는 것 또는 그 자리
8) 젊은 문관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골라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학문을 닦게 하는데 湖堂이라고도 함.
대제학을 천거할 때 호당 경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하였다.
9) 조선시대에는 관직자를 채용하기 위한 명단을 작성할 때 현직자들이 삼배수로 추천하여 그 명단 가운데
선발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현직자는 늘 필요한 만큼의 인원을 의무적으로 추천해야만
되었는데 이때 선생이 추천한 문제된 인사는 정여립의 생질인 李震吉을 추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진길은 우복선생과 같은 해인 선조 병술년 別試文科에 乙科로 급제하였다.
다. 제3기 (隱居一期; 28세〜32세)
28세 때인 1590년(선조23) 6월에는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諱;汝寬)이 향년 60으로 별세하였다. 그해 7월 장녀(노소재의 손부)가 출생하였다.
30세 때(1592년) 임진왜란이 나서 국토가 유린되매 병정을 불러 모으고 김광복(金光福) 김사종(金嗣宗)과 함께 왜적에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안령산(安嶺山)전투에서 어머니(합천 이씨)와 동생(興世)을 전란에 잃었다. 선생도 왜적의 화살에 맞아 절벽에 떨어져서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였다.
이후 의병활동은 계속되었고 김각(金覺)‧송량(宋亮)‧이전(李㙉)‧이준(李埈) 등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소모관으로 상의군(尙義軍)이라는 조직으로 대항하였다. 현재 대구시 동구 만촌동 망우당공원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라. 제4기(出仕二期 ; 侍講 및 承旨時期 ; 32세〜37세)
32세에는 이러한 의병활동의 공로로 예조좌랑(禮曹佐郞)에 배명되고 곧 병조좌랑으로 전보되었다가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고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겸직되었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쳐 다시 수찬에 제수되는 등 여러 임무를 바쁘게 수행하였다. 이때 왜란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임금께 나아가 다음과 같은 치도(治道)를 진언하였다.
“옛날부터 큰 임금의 근본치도(根本治道)는 오직 학문(學問)에 있으니, 이른바 학문이란 선왕(先王)의 말씀을 이어받고 경전(經典)의 해석에 통달할 뿐만 아니라 사변지실(思辨之實)10)이 점차 쌓임으로써 학문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고 이러한 전후의 혼란기에는 급선무가 성학(聖學)의 근본인 ‘역(易)’의 사상을 닦는 것이고 또 적을 토벌하는 뜻을 밝혀 놓은 ‘춘추(春秋)’의 공부에 힘쓰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임금님(宣祖)은 이를 받아들이고 칭송하여 선생을 「국사(國士)」로서 호칭하게 되었으며 하루도 경연을 떠나지 말라고까지 하였다.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11)과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12)도 “정경세는 참으로 시강의 인재(侍講才)”라고 칭송하였다.
10) 깊은 생각과 분별하는 능력이 쌓이는 것
11) 이원익(1547-1634) 字는 公勵 號는 梧里 諡號는 文忠. 선조 인조 때의 名臣으로 여러 번 영의정을
역임하면서도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광해군 때는 폐모론에 반대하여 귀양 간 일이 있고
인조반정 후에는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죽이고자 할 때 이를 말린 큰 정승.
12) 이항복(1556-1618) 字는 子常 號는 白沙. 諡號는 文忠. 선조 때의 명신.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과의
일화로 유명하다. 벼슬은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지내고 이조판서 영의정에 이름. 광해군의 폐모론을
반대하여 북청에 유배 중 별세. 이때 우복선생과의 신의 있는 친분관계를 밝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렇게 관인으로서 탁월한 능력과 학문적 명망이 누적되는 가운데 33세 때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문학(文學)을 겸직하고 성균관 직강을 거쳐 8월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이것은 경연을 떠나 있지 못하도록 하는 임금님의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4세 때는 이조좌랑에 제수되면서 시강원 문학을 겸하였다. 5월에는 이조정랑(吏曹正郞)의 요직에 배명되었다. 6월에는 어사(御史)로서 영남지방을 순시하였는데 예안에서 송재고택(松齋古宅)을 방문하고 도산서원에 참배하였으며 8월에 복명하였다.
35세 때에는 전시(殿試)‧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 등 각종 과거시험에 시관(試官)이 되었고 그 해 장자(심;杺)가 출생하였다. 7월에 의정부 검상(檢詳)에 제수되었다가 곧 바로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으며 춘추관 편수관, 세자시강원 문학,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9월에는 또다시 어사(御史)가 되어 영서(嶺西)지방을 순시하였다. 12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승진되었다.
36세 되는 1598년 1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어 곧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2월에 우승지 3월에 좌승지가 되었다. 4월에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였으며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를 겸하였다. 경상도 일대가 임란의 병화가 가장 심했던 곳이었으므로 시의 적절한 시책을 펴 피폐한 민생을 안정시키었다. 5월에 상주에 들러 추증(追贈)13) 사실을 가묘에 고유하고 6월에 예천, 9월에 진주와 삼가를 거쳐 군병을 정비하였다.
이 무렵 칠년에 걸친 대란을 수습한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선생이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관계에서 물러나게 되자, 선생도 국사(國事)가 바른 길로 지향하지 못함을 탄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고 고향(尙州 栗里)으로 돌아왔으나 사직의 청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발령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심심산골에 우복산장(愚伏山莊)의 터를 잡았는데 이 때 우산(愚山)과의 첫 인연이 이루어졌다.
38세 때에는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어 이 고을 사람들이 싸움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나쁜 풍습이 있어 이를 일신하였다. 또 그 다음 해에는 좌승지(左承旨),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해 겨울에 부름을 받아 잠시 상경하였다가 다시 귀향하였다.
13) 높은 벼슬을 하면 돌아가신 부모, 조부모에게 관직이 추증되는데 추증된 관고(官誥)의 부본을 쓴 누런
종이를 무덤 앞에 태우는 일을 분황(焚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