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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왕발의 등왕각서와 하목정
프롤로그
중국에는 ‘중국삼대명문中國三大名文’으로 알려진 유명한 문장 세 편이 있다. 제갈공명의 ‘출사표’, 이밀의 ‘진정표’, 한유의 ‘제십이랑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이 삼대명문을 두고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고, 진정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며, 제십이랑문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우애가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 외에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글 중에는 소동파의 ‘적벽부’와 왕발의 ‘등왕각서’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출사표’·‘적벽부’·‘등왕각서’를 중국삼대명문이라고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시와 문장을 선별해 수록한 고문진보古文眞寶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명심보감에도 등장하는 ‘등왕각서’. 이번에는 ‘등왕각서’에 대해 알아보자. 하목정이란 정자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등왕각서’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명심보감에 등장하는 등왕각
명심보감明心寶鑑 「순명편順命篇」에 이런 문장이 있다.
時來風送騰王閣시래풍송등왕각
좋은 때가 오면 바람이 일어 등왕각으로 보내주지만
運退雷轟薦福碑운퇴뢰굉천복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천복비에도 벼락이 떨어진다
위 문장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쉽지 않다. 글자 수는 비록 열 네 자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숨은 뜻은 수백 수천 글자로도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자가 소리글자인 한글과는 달리 뜻글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수백 수천 글자로 쓰인 긴 스토리도 한 두 글자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 한자다.
먼저 ‘시래풍송등왕각’이란 문장부터 알아보자. 중국 당나라 초에 ‘왕발王勃’이란 인물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왕발에게 서둘러 배를 타고 등왕각으로 가라고 했다. 다음 날이면 등왕각에서 큰 잔치가 열리는데 그 곳에 가서 글을 지으면 만고에 길이 이름을 남길 것이라 했다. 하지만 왕발이 있는 곳에서 등왕각까지는 뱃길로 700리[참고로 낙동강이 700리다], 하루 만에 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왕발이 배에 오르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다. 왕발은 때마침 불어온 바람 덕분에 하루 만에 등왕각에 이르러 그 유명한 ‘등왕각서’를 지을 수 있었다. 이처럼 명심보감에 나오는 ‘시래풍송등왕각’은 시운時運이 좋으면 하루만에 700리를 갈 수 있었던 왕발처럼 일이 성사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문장이다.
‘운퇴뢰굉천복비’는 무슨 뜻일까? 천복비는 중국 강서성 천복사에 있는 비석으로 당나라 때 이북해가 짓고, 명필 구양순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북송시대 초기 재상을 지낸 구준寇準에게는 문정文正이란 문객門客이 한 명 있었다. 가난한 생활을 영위하던 문정은 당대 최고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범중엄에게 시로써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범중엄은 그에게 기회를 주고자 천복사비문을 탁본해 오면 큰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문정은 범중엄의 제안대로 천복사비문을 탁본하기 위해 수 천리를 달려 천복사에 도착했다. 하지만 천복사에 도착한 문정의 눈앞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져 있었다. 수 천리를 달려 천복사에 왔는데 하루 전날 천복사비에 벼락이 떨어져 비가 그만 산산조각 난 것이었다.
문정의 ‘운퇴뢰굉천복비’는 왕발의 ‘시래풍송등왕각’과는 반대로 운이 따르지 않으면 제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명심보감에 나오는 이 문장이 운수만 믿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운수 따지지 말고 먼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그 나머지는 그냥 하늘에 맡기란 뜻이다. 왕발은 힘든 것은 알았지만 일단 배에 올라 도전을 했고[진인사], 결과는 하늘의 뜻을 따랐다.[대천명] 명심보감 「순명편」은 하늘의 명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는 위태롭지 않고 복이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왕발의 등왕각서
등왕각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남창시南昌市 장강[양자강] 지류인 간강赣江 변에 있는 누각으로 악양루, 황학루와 더불어 중국 강남 3대 누각으로 불린다. 등왕각은 당나라 때인 653년 이 지역에 봉해진 당 고조 이연의 아들 이원영에 의해 처음 건립됐다. 등왕각이란 이름은 ‘등왕의 누각’이란 뜻. 여기서 등왕은 이원영을 말한다. 이원영이 처음에 지금의 산동성 등주 왕으로 봉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등왕각은 이후 전란으로 여러 차례 파괴와 재건이 반복됐다. 지금의 것은 1989년 재건된 것으로 무려 29번째 재건이다.
왕발王勃[650-676]2)은 당나라 초기 뛰어난 문장가 4인을 뜻하는 ‘초당4걸初唐四傑’ 중 한 명이다. 동시에 수나라 말 저명한 학자 문중자文中子 왕통王通의 손자이자, 당나라 초 문인인 왕적王績의 종손從孫이다. 구당서 「왕발전」에는 “왕발은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글의 구상은 막히는 법이 없고 글에 대한 정감도 아주 빼어나 형들과 더불어 글 짓는 재주가 비슷했다. 이를 두고 부친의 친구 두이간은 ‘왕씨 집안의 보배로운 세 그루 나무[王氏三珠樹]라’ 칭송했다”는 내용이 있다.
2) 왕발의 출생연도는 647년, 649년, 650년 등 자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처럼 왕발은 6세에 이미 천재로 이름이 났고, 14세 때는 그를 알아본 우상右相 유상도의 추천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15세에 천자가 주재한 대책對策 시험에 합격해 조산랑이란 벼슬을 받았고, 17세 때 유소과幽素科3)에 급제했다. 이후 황족인 패왕 이현의 눈에 띄어 왕부王府의 수찬修撰을 맡았다.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투계鬪鷄’[닭싸움]에 빗대 황족 영왕을 비판하며 쓴 ‘격영왕계문檄英王鷄文’이 고종 황제의 노여움을 사 중앙관직이었던 왕부에서 쫓겨났다. 이후 사천 지방을 떠돌던 그는 괵주[지금의 하남성 영보현 남쪽]의 참군이 됐다.
3) 당나라 때 설치된 과거시험 중 하나. 666년(건봉 원년) 당나라 고종의 명으로 설치됐다.
그런데 괵주 참군으로 있을 때 또 일이 일어났다. 그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관노官奴 조달曹達을 숨겨준 일이 있었는데, 그 사실이 드러날 지경이 되자 그만 조달을 죽여 버린 것. 이 사건으로 그는 또 다시 관직에서 쫓겨나 옥살이를 했다. 이 일로 그의 아버지 왕복치王福畤 또한 옹주[지금의 섬서성 중부와 감숙성 동북부] 사공참군에서 교지[베트남 북부지역] 영令으로 좌천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교지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배에서 바다에 떨어져 죽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이쯤에서 운이 좋으면 바람이 불어 등왕각으로 보내준다는 ‘시래풍송등왕각’ 이야기를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사실 ‘시래풍송등왕각’은 명나라 말 소설가 풍몽룡馮夢龍의 성세항언醒世恒言 중에 실려 있는 「마당신풍송등왕각馬當神風送滕王閣」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발이 장강을 여행 중이었다. 그가 남경을 출발해 뱃길로 강서성 팽택에 있는 마당산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파도가 일어나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왕발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자리에 앉아 시를 한 수 지었다. 왕발의 태도에 감동한 마당산 산신은 그에게 “내일 중양절을 맞아 등왕각에 큰 행사가 있으니 가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창까지는 700리 뱃길이라 하루 만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와 왕발이 탄 배를 단 하루 만에 등왕각까지 보냈다.
중국 한나라 말 위·촉·오 삼국의 치열한 패권쟁탈전을 다룬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는 서진시대 진수陣壽[233-297]가 지은 정사 삼국지를 뼈대로 한 대중소설이다. 유비·관우·장비·제량공명·조조 등 수 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해, 지략과 무공을 펼치는 흥미로운 스토리로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불후의 명작이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정사 삼국지보다 인기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재미를 위해 허구라는 요소가 가미된 까닭이다. 이처럼 왕발의 등왕각 스토리도 소설가 풍몽룡에 의해 스토리가 더해지고,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과 붓을 거치면서 기존 스토리에다 재미와 흥미적 요소가 한층 더해졌다. 현재 전해지는 왕발의 등왕각 스토리는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671년(당 고종 2). 홍주 땅을 다스리던 염백서閻伯嶼가 허물어진 등왕각을 다시 수리하고, 그해 중양절[9월9일] 많은 손님을 초청해 성대한 낙성 기념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염백서는 자신의 사위인 오자장吳子章의 글 솜씨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염백서는 사위 오자장에게 미리 등왕각 서문을 지으라고 말해 두었다. 잔치가 열리자 염백서는 초청한 손님들 앞에 종이와 붓을 내놓고 오늘의 등왕각 잔치에 대한 글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염백서의 의도를 눈치 챈 손님들은 아무도 글을 짓지 못했다.
이때 왕발은 자신 때문에 교지령으로 좌천된 아버지 왕복치를 만나기 위해 장안을 떠나 이동 중에 있었다. 어느 날 왕발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 등왕각으로 가서 글을 지으라고 했다. 하지만 등왕각까지는 700리 뱃길로 하루 만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왕발이 배에 오르자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바람 덕분에 왕발은 등왕각 잔치에 늦지 않고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 왕발의 나이는 22세. 잔치 참석자 중 나이가 가장 어렸다. 왕발은 자신 앞에 염백서가 내민 종이와 붓이 오자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이를 지켜본 염백서는 왕발의 글이 너무 궁금했다. 글이 완성된 후 왕발의 글을 읽어 내려가던 염백서는 어느 구절에 이르러 더 이상 감흥을 참지 못하고 “과연 천하의 천재로다”며 감탄했다. 염백서가 감탄한 구절은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과 긴 하늘은 한 빛을 이루었네]”이었다.
왕발의 등왕각 스토리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등왕각서'로 염백서를 놀라게 한 왕발은 곧장 자신의 길을 떠났고, 글을 읽던 염백서는 갑자기 다시 왕발을 찾았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왕발이 지은 '등왕각서'에는 서문과 함께 시가 한 수 있었다. 그런데 시를 읽던 염백서가 급하게 사위 오자장을 불러 왕발을 다시 모셔오라고 했다. 시 마지막 구 “함외장강(?)자류(檻外長江(?)自流”에 글자 한 자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발을 데려오는 동안 잔치자리에 있던 이들은 비어 있는 한 자를 두고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독獨’ 아니면 ‘일一’이란 의견이 많았다.
오자장을 만난 왕발은 다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대신 오자장의 손바닥에 글자 한 자를 써주면서 “염백서가 보기 전에는 그 누구도 먼저 봐서는 안 된다. 절대 손바닥을 펴지 말라”고 했다. 등왕각으로 돌아온 오자장은 왕발의 말대로 장인인 염백서 앞에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손바닥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염백서는 나이 어린 왕발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에 다시 사람을 보내 왕발을 잡아오게 했다. 황당한 마음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한참 동안 살피던 오자장.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비어 있었던 한 글자가 ‘빌 공空’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왕발의 등왕각서와 등왕각시 탄생에 얽힌 스토리다. 자신의 시 마지막 구 글자 한자까지도 그냥 넘기지 않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남긴 왕발. 그의 ‘등왕각시’를 한 번 감상해보자.
등왕 높은 누각 강가에 임했고 滕王高閣臨江渚(등왕고각임강저),
옥소리 방울 소리 가무도 사라졌네 佩玉鳴鑾罷歌舞(패옥명란파가무).
아침에는 단청한 마룻대에 남포 구름 날아가고 畵棟朝飛南浦雲(화동조비남포운),
저녁에는 주렴 걷으니 서산에 비 내리네 朱簾暮捲西山雨(주렴모권서산우).
떠도는 구름은 연못에 비쳐 날마다 한가롭고 閑雲潭影日悠悠(한운담영일유유),
만물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몇 해나 지났던가 物煥星移度幾秋(물환성이도기추).
누각 안에 있던 주인[이원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閣中帝子今何在(각중제자금하재),
난간 밖의 장강만이 부질없이 절로 흐르는구나 檻外長江空自流(함외장강공자류).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
천재는 단명이라 했던가. 27년이란 짧은 생을 살다간 비운의 천재 문장가 왕발.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삶이 짧지만 굵었다는 사실이다. 초당4걸 중 한 명이요, 만고에 길이 남을 명문 ‘등왕각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등왕각서 만큼이나 그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 또 있다. 바로 ‘복고腹稿’라는 단어다. ‘왕발=복고’라는 말의 출처는 중국 역사서인 신당서 「왕발전」이다.
왕발은 글을 쓸 때 처음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먼저 먹을 여러 되 갈아 놓은 다음, 술을 마시거나 이불을 쓰고 드러누워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바로 붓을 들고 단숨에 글을 써 내려갔는데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왕발을 보고 ‘배[복] 안에다 원고[고]를 쓴다’고 했다.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 왕발은 글을 쓰기 전에 먹물을 충분히 만들어 놓고는 놀거나 잤다는 거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바로 붓을 들고 일필휘지 써내려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글을 써내려가면서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발의 글 솜씨를 보고 마치 붓을 잡기 전에 뱃속에다 미리 원고를 써놓은 것 같다고 해 그를 ‘복고’라 불렀다는 것이다.
왕발이라는 이름을 후세에까지 널린 알린 ‘등왕각서’. 앞서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350년 전 등왕각에서 일어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살펴봤다. 홍주 수령 염백서는 왕발이 지은 ‘등왕각서’를 읽다가 ‘낙하여고목제비 추수공장천일색’이란 대목에서 “과연 천하의 천재로다”며 감탄했다. ‘하목정’이란 이름이 바로 이 문장에서 ‘노을 하’, ‘따오기 목’ 두 자를 가져온 것이다.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과 긴 하늘은 한 빛을 이루었네’
실제 하목정 모습이 그렇다. 저녁노을이 들면 가을 강물과 하늘이 붉게 물들고, 그 사이로 물새가 둥지를 찾아 날아오른다. 십리명사가 사라지고, 강물 위로 성주대교가 놓이고, 강변에는 온통 비닐하우스 천지인 지금의 하목정 풍경도 이러할진대, 그 옛날 하목정 풍경은 과연 어떠했을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풍광이었을 것이다. 왕발의 ‘등왕각서’ 하이라이트 구절에서 ‘하’, ‘목’ 두 글자를 빌려 이름한 하목정. 하목정 창건주 이종문은 하목정의 아름다움이 중국 간강赣江 가에 서 있는 등왕각 못지않음을 이 두 글자에 담은 것이었다.
노을에 붉게 물든 산, 하산霞山
하목정이 자리한 동네는 자연부락명으로 하산 또는 하목정이라 부른다. 하산 아래 있어 하산이요, 하목정이 있어 하목정이다. 하산은 하목정 뒷산인 구봉산 남쪽 끝자락을 말한다. 구봉산은 강 건너 성주 쪽에서 바라보면 좌우로 봉우리 아홉 개가 펼쳐져 있어 구봉산九峯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 구봉산의 별칭이 하산이다. 하산이라 불리는 것은 노을 질 무렵 노을빛에 반사된 구봉산이 붉은 색을 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산은 동쪽인 대구 쪽에 있고 저녁노을은 서쪽인 성주 쪽으로 진다. 이때 서쪽으로 지는 해가 붉은 노을을 만들어 내면 노을빛은 낙동강과 구봉산을 붉게 물들인다. 그래서 ‘노을 하’ 자를 붙여 하산이라 한 것이다. 한편 하산을 다른 말로 적산赤山 혹은 단산丹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또한 노을에 붉게 물든 산이란 뜻이다.
에필로그
언젠가 한문을 전공한 한 선생님의 강의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전 세계를 통틀어 불과 100년 전 자신의 선조가 남긴 기록을 읽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우리나라는 한문은 고사하고 한자 교육조차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계가 인정하는 한글의 우수성을 폄훼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1446년(세종 28) 세종대왕이 창제해 반포한 우리 문자 한글. 그로부터 575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세계 그 어느 곳에도 한글만큼 21세기 최첨단정보통신시대에 최적화된 문자는 없다. 그런데 만약 우리나라가 한글에다 한자·한문 능력까지 겸비했다면 어땠을까? 이왕이면 다홍치마요, 쌍권총이라고. 한 자루 총보다는 쌍권총이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한자·한문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던 옛 선비들은 사람을 직접 만나보지 않고도 상대방을 정확하게 판단했다. 바로 ‘호號’ 때문이었다. 두 세 글자로 이뤄진 호는 지금의 표현을 빌자면 아주 고차원적 상징이자 심벌이었다. 수 백, 수 천 글자로 풀어내야하는 내용을 단 두 세 글자에 압축해서 담아버렸으니 말이다. 호는 대개 스스로 짓는다. 그래서 호에는 그 사람의 철학이나 삶의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을 수밖에 없다. 옛 선비들은 그것을 읽어내는 눈이 있었다.
‘하목정’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에게 하목정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1,350년 전 인물인 왕발과 그의 작품 ‘등왕각서’를 소환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쉽지 않다. 보다시피 필자도 ‘왕발’과 ‘등왕각서’를 설명하는데만 글자 수 1,639자, 200자 원고지 44장 필요했으니 말이다. 옛 선비들은 ‘하목’ 두 글자만해도 충분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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