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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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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김해 김씨 집성촌(원주시 귀래면 용암리)
모악산아래 추천 0 조회 74 17.10.05 15: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원주마을 탐구:  김해 김씨 집성촌
사라져 가는 집성촌-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용암1리
2008년 10월 27일 (월) 10:22:02 고민교 객원기자
   
 
  ▲ 귀래면 용암1리 전경  
 

귀래면 용암1리 김해김씨 안경공파 집성촌은 누렇게 익은 벼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주변 산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용암리는 용바위로 유명하다. 능안골 골짜기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30척(尺, 약10m) 정도 되는 용암이 있는데 용(龍)의 형체를 띠고 있다고 하여 용바위로 불리고 있다.

용암1리는 지둔, 동막, 생산마을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입구에는 당위쉼터가 있는데 그 옆에 있는 동원상회는 김해 김씨 원주시종친회 김긍수 회장이 운영하는 가게다.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150여 가구 중 2/3가 김해 김 씨였지. 지금은 80여 가구 중 50가구 정도가 김해 김 씨여" 김 회장의 말이다.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오지 중 오지다. 한참 유명세를 탔던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등장하는 마을은 아니지만 그곳처럼 도시와는 동떨어진 외딴 마을이다. "옛날에는 길이라고는 소달구지 겨우 다닐만한 길이 전부였지. 20리나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도 모두 걸어서 다녔어. 메뚜기도 잡고 뱀도 잡고…그땐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김 회장은 먼 산을 바라보며 어릴 적 마을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마을로 통하는 차 한 대 다닐 만큼 작은 길에 아스팔트를 포장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산골짜기여서 논이 많지 않다보니 주로 담배, 고추, 삼 등을 재배해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동막마을 서북쪽 산숫골에 사당
 
동막마을 서북쪽 산숫골에 사당이 있다. 용안사(龍安祠)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사당은 대지가 16만여 ㎡로 널찍하다. 맨 위쪽에 사당이 있고 그 아래쪽에 제실과 수련원이 있다. 수련원은 시제를 지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문중들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1970년대에 지은 사당은 2000년에 단청을 새로 단장해 깔끔하다.

이 사당에서는 안경공파 중시조 김영정을 모시는데 음력 10월 7일에 시제를 지낸다. 이때는 전국에 흩어져 사는 안경공파 후손 300여명이 모여든다. 시제는 이 마을 최대 행사다. 손님 접대하랴, 제사 준비하랴 힘들겠다는 말에 "조상님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다 핏줄인데…오히려 즐겁지요" 용암리 종친회장을 맡고 있는 허영택(71) 회장의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해 김씨 종친회장의 성이 허 씨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김수로왕과 아유타국의 허 황후가 공주 2명과 왕자 10명을 낳았는데 두 아들이 허 황후 성씨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한 핏줄이라 것. 때문에 김해 허 씨와 김해 김 씨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허 회장은 자신이 김해 김 씨 종친회장을 맡은 최초의 허 씨일 거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제실(족보가 여기에 보관되어 있다)에 마련돼 있는 예복을 입어야 하는 등 전통적인 제사방식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시제가 있는 날은 동네잔치가 열리는 날이다. 이날은 종친뿐 아니라 마을사람들도 함께한다.

이곳 미륵산 아래 산숫골은 산소가 많아서 산숫골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보니 김해김씨 산소가 많이 모여 있다. 사당 왼편으로 9대조 이하 조상들 산소가 자리하고 있고 1대조부터는 커다란 능(陵)이 있는 앞산 능안에 모셔져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이장하고 남아있지 않다. 허 회장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을 수행했던 광해군의 외숙 의현공(毅顯公)이 이곳에 묻혀 있었는데 광해군이 그 정을 못 잊어서 능을 쓰도록 했다고 한다.

   
 
  ▲ 9대조 이하 산소들이 모여 있는 산숫골. 산소가 많아 산숫골이라 불린다.  
 


17대 종손 김영내 씨 500년 집터 고수
 
사당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동막골에는 17대 종손부부가 살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김영내(74) 할아버지. "나는 이 곳을 떠나고 싶었어. 큰 도시에 나가서 살고 싶었지. 그 때마다 집안어른들에게 야단을 맞았지. 이곳을 지켜야 할 사람은 종손인 나밖에 없다는 거야. 종손인 게 원망스러웠지리 뛰쳐나갈 용기는 없었지. 지금은 눌러앉기를 잘했다 생각해"

종가집이어선지 마당에는 곱게 껍질을 깍은 감들이 햇빛을 받아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풍성한 인심은 마당 앞 배 밭에서 딴 배와 도토리묵에도 배어 있었다. "이 집터는 500년 내력이 있는 곳이야. 집이야 다시 짓고 다시 짓고 했지만, 터는 변하지 않았거든."

중시조인 김영정은 이곳에 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곳으로 입향하게 된 것은 그의 아들 김세균 때문이었다. 서울에 살고 있던 아들이 연로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쓸 묘 자리를 찾아다니다 단양이 좋다는 얘기를 듣고 배를 타고 단양으로 가는 중 중간에 노가 부러졌다. 할 수 없이 뭍에다 배를 대고 노를 만들 생각에 산속 깊이 들어가게 된다. 상수리나무나 가시나무가 노를 만드는데 좋았기에 굵고 큰 나무를 찾아 가다보니 능안까지 오게 됐고 능안을 본 순간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 세균은 능안에 묘를 쓰고, 지금 이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게야. 내가 이곳을 떠나지 못한 이유도 그 얘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인지도 몰라"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지. 담배는 부론면과 귀래면 일대에서 재배한 것을 최고로 쳤거든. 담배 팔아 애들 교육 시켰어. 담배 수확량을 최고로 수확해서 상을 받은 적도 있으니까 죽지 않을 만큼 일한 셈이지. 조상님이 물려주신 땅이 있었기에 열심히 일만하면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복을 받았다는 생각도 했고…"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목소리에서 종손이라는 책임감이 흠뻑 묻어났다.

그러나 자식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 산다. 마을 전체에 젊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김 할아버지는 아들에게만은 종손으로서 이곳에 눌러앉아 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세월이 변해도 전혀 발전하지 않는 이곳에서 살라고 할 수가 없었단다. 다만 나이가 들어 일손을 놓으면 조상이 대대로 물려준 이 집에서 여생을 마치기를 바랄뿐이다.

 


 

김해김씨 안경공파

안경공파는 고려 김목경의 파조다. 중조 영정(永貞)은 경파 파조 휘 목경의 7세손이며, 금녕부원군 보의 후손이다. 대사간 대사헌. 지돈녕. 전라관찰사를 지냈고 시호는 안경(安敬)이다. 아들 세균은 통훈대부. 승문원봉교를 지냈고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세권은 영변도호부판관을 지냈으며, 3세손 익수는 공조판서를, 종수는 시정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4세손 희철은 첨정을 지내고 영돈녕 해녕부원군에 봉해졌다.

용암리에는 김수로왕을 시조로 75세손. 안경공파 김영정의 중시조로 19대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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