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5칙 향엄상수香嚴上樹
香嚴和尙云, “如人上樹, 口啣樹枝, 手不攀枝, 脚不踏樹.
樹下有人, 問西來意, 不對卽違他所問, 若對又喪身失命, 正恁麽時, 作麽生對.”
無門曰, 縱有懸河之辨, 總用不著. 說得一大藏敎, 亦用不著.
若向者裏對得著, 活却從前死路頭, 死却從前活路頭. 其或未然, 直待當來問彌勒.
頌曰, 香嚴眞杜撰, 惡毒無盡限, 啞却衲僧口, 通身迸鬼眼.
본칙
향엄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수행은)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거나 발로 나무 가지를 밟지 않고,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있는 것과 같다. 더구나 이때 어떤 사람이 나무 아래에서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다고 하자. 대답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질문을 피하는 것이요, 대답을 하면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된다. 이때 어떻게 응대해야 하겠는가?”
무문 화상이 평하시기를,
물 흐르듯 막힘없는 유창한 말솜씨도, 현란하게 쏟아내는 팔만 사천 법문도 여기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만약 여기에 잘 대응할 수 있다면, 죽어있던 것들을 살릴 뿐만 아니라 살아있던 것들을 죽이게 될 것이다. 혹 대응할 수 없다면 때를 기다려 미륵에게 물어보라.
게송으로 가로되,
향엄은 참으로 황당무계하여 그 악독함이 끝이 없네, 선승의 입을 틀어막아 벙어리로 만들 뿐 아니라 온 몸이 귀신의 눈으로 번뜩이게 하네.1
I. 배경
I)『위산록僞山錄』은 향엄지한(香嚴智閑, ? ~898) 선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사는 등주鄧州사람으로 속성은 유劉씨이며, 법명은 지한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의 문하에서 수행하다가 후에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키가 7척이나 되었다고 하며,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하였으며 학문은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여러 차례 위산 선사에게 참문 하였는데, 묻고 대답하기를 마치 병의 물을 쏟아내듯 하였다. 그러나 위산은 그의 학문이 건성일 뿐이요 근원은 깊이 통달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하루는 위산 선사가 향엄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전부 듣고 본 것뿐이다. 지식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 그대가 태어나기 전, 동과 서를 구별하지 못했을 때의 그대 모습을 말해 보라(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이에 향엄은 대답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있다가 특유의 지식과 말재주를 동원하여 몇 마디 했으나 모두가 엉터리였다. 향엄은 마침내 스승에게 답을 일러주실 것을 청하니 위산 선사가 말했다. “내가 말하면 옳지 않다. 스스로가 일러야 그대의 안목이니라.”
이에 향엄은 방으로 돌아와 모든 서적을 두루 뒤졌으나, 한마디도 대답에 맞는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고로 그는 책을 몽땅 태워 버리려고 하였는데, 책을 태우려는 것을 보고 달려온 학인이 자기에게 책을 달라고 하자 향엄이 말했다. “내가 평생 동안 이것 때문에 피해를 보았는데 그대가 또 피해자가 되려는가?”
향엄은 한 권도 주지 않고 몽땅 불태워 버리며 말했다. “금생에는 불법을 바로 배우지 못했다. 그동안 나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 여겼는데, 오늘 위산 선사께 한 방망이 맞았으니, 그런 생각이 깨끗이 사라졌다. 이제는 평범한 대중으로 여생을 보내리라.”
향엄은 이런 각오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스승 위산 선사에게 하직하고 향엄산으로 들어가 옛날 혜충(南陽慧忠, ?~775) 국사國師가 살던 터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서 풀을 베다 무심코 던진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크게 깨달았다. 이어 게송을 읊었다. 그 유명한 향엄격죽香嚴擊竹이다.2
一擊忘所知 일격망소지 한 번의 딱! 소리에 알려던 것 다 잊었으니,
更不假修持 갱불가수지 다시는 닦을 필요 없게 되었네!
動容揚古路 동용양고로
안색을 움직여서도 옛 길을 선양하여,不墮悄然機 불타초연기 이제 다시 실의에는 떨어지지 않으리라.
處處無踪迹 처처무종적 가는 곳 어디에도 자취 없고,
聲色外威儀 성색외위의 빛과 소리 그 밖에서 모든 행위 이루어지니
諸方達道者 제방달도자 제방의 도를 아는 이들은
咸言上上機 함언상상기 모두가 상근기라 하리라.
그리고는 위의를 갖추고 멀리 위산이 있는 곳을 향해 향을 피우고 오체투지의 예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진실한 선지식께서 큰 자비로 이 어리석은 중생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말씀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3
위산 선사가 그 말을 전해 듣고서 말씀하셨다. “향엄이 깨쳤구나!” 그러자 앙산(仰山慧寂, 803~887)이 “이는 알음알이로 지은 것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 볼 터이니 기다리십시오.” 하고는 향엄에게 가서 물었다. “스승님이 사제의 오도송을 칭찬하시던데 그대가 한번 해 보게나.” 이에 향엄이 일전의 게송을 다시 읊었다. “이는 오랜 훈습으로 기억하였다가 지은 것이다. 만일 바른 깨침을 얻었다면 따로 한 마디 해 보게!” 이에 향엄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去年貧未是貧 거년빈미시빈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고
今年貧始是貧 금년빈시시빈 금년의 가난이야말로 비로소 가난일세.
去年貧 거년빈 작년 가난은
猶有卓錐之地 유유탁추지지 송곳 꽂을 만한 땅이라도 있었건만
今年貧錐也無 금년빈추야무 금년에는 꽂을 송곳조차 없네!
이를 듣고 앙산이 말하길 “사제가 여래선如來禪은 깨쳤다고 하겠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라고 하자 향엄이 다시 게송을 읊었다.4
我有一機 아유일기 나에게 한 기틀(마음)이 있어
瞬目視伊 순목시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네!
若人不會 약인불회 만약에 알아보지 못한다면
別喚沙彌 별환사미 따로 사미(중)라 부르지 마오.
이에 앙산이 돌아와 위산 선사에게 알렸다. “기뻐하십시오.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깨쳤습니다.”5
앙산이 말한 여래선이란 원래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한 선을 일컫는데 앙산이 여래선과 구분하여 조사선을 말한 뒤부터 여래선은 깨달음이 깊지 못한 선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무비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설을 붙이셨다.
직지에 소개된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선가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말이다. 스승인 위산영우 선사와 앙산혜적 선사의 가풍을 함께 일컬어 위앙종潙仰宗이라는 선가 5종의 하나를 수립하였는데 앙산 선사가 향엄 선사를 인가하는 대목이다. 송곳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여래의 경지와 조사의 경지가 다를 리가 없지만 앙산 선사는 조사선을 더 높이 표현하고 있어서 후대까지도 그 말에 쫒아 조사선을 높이 보는 경향이 있다. 사실 불교의 완성은 후기 대승불이다. 즉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가르침이 불교의 완성이며 경전의 완성이다. 그런데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특유의 선도仙道와 융합하면서 인간정신의 궁극을 선불교에 두는 경향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사선이니 여래선이니 하는 이야기가 성행한 것이다.
한편 『선禪의 황금시대』의 저자 오경웅吳經熊(John C. H. Wu)은 ‘위앙종이 선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은 앙산이 여래선과 조사선을 구분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넘어 부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기존의 부처에 대한 신비와 권위 등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부처는 가라! 내가 바로 부처’라는 자신감에 찬 떳떳한 선언인 것이다.
위의 두 편의 시를 통해 우리는 선의 양대 세계를 맛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는 고도의 정신생활을 표현한 것이긴 하나, 그것은 아직도 신앙과 명상 및 고행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어서, 이 단계에선 아직도 애써 심사숙고하고, 경전에 나오는 계율과 교훈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래선이다.
두 번째 시는 자신의 <참나>인 속인의 사람에 대한 직설적인 통찰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앙산은 이를 <인위人位 - 존재의 범위>라 하여 <신위信位 - 신앙의 범위>와 구분하였다. 이는 관념이나 이성이나 윤리 등을 초월한 순수한 영적 깨달음의 경지에 속한다. 둘째 줄에 나오는 “단번에 <그伊>를 알아본다.”가 바로 이 시의 핵심이다. 한자의 <伊>자는 <그他> 혹은 <그것那箇> 그리고 <이것此>과 같은 뜻으로 선사들이 신비한 <참나>를 가리킬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이러한 속안의 <참나>가 여러 선종의 주춧돌이긴 하지만 우리들 안에 있는 영적 불씨를 강조한 것은 위앙종의 공헌이다. 우리는 이 속안에 있는 불씨를 통해 <그伊>를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으며, <그>가 곧 우리 자신임을 확신 할 수 있다. 이 신령스런 불씨 즉 신비한 깨달음을 <기機>라 한다면 우리의 <참나>는 본래적 존재 즉 <체體>이며, 깨달음 이후의 모든 행위와 언어는 <참나>의 작용 즉 <용用>이다. 이 <참나>와 <도>의 관계는 인도의 브라만 철학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관계와 똑 같다.6
송곳 꽂을 땅도 없고 거기다 송곳마저 없다면, 이제는 주관도 객관도 아무것도 모두 다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홀가분할까 홀가분하다는 생각조차 없는 걸림 없는 수행을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계는 좋으나 아직 찌꺼기가 남아있다. 작년이니 금년이니 수행의 정도를 비교하는 마음에다 땅이니 송곳이니 하며 장황하게 수행의 진전을 자랑하고 있다. 수행을 통해 점진적인 깨달음을 얻는 여래선의 경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그럼 두 번째 시는 어떠한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으니 대단하다고 하겠지만 순간 역시 상대적 차별심에 빠져 버렸다. ‘한번은 직접 만나야 하겠지만, 만났다고 하면 이미 둘이 되어 버린다.’는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의 평이 생각나는 대목이다.7 향엄 스님의 게송에서 ‘若人不會 別喚沙彌’에 대해 “나에게도 대기(大機)가 있어 눈을 껌벅이고 그를 보았는데,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여 달리 사미를 부른 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단지 사족을 붙였을 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혹은 <나>와 <그>가 보통명사인 “사미”라고 부르는 순간 분별심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통합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나(我)와 그(伊)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면서 둘이다.
여기서 나는 작은 나(Atman)를 그리고 그는 큰 나(Brahman), 즉 산스크리트어 부타타다타(Bhutatathata), 한자로 여여如如, 진여眞如, 도道, 임제의 무위진인無位眞人, 본래면목 등을 말한다. 그런데 나와 그에 대한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의 오도송은 그 심오함을 더한다.
‘그는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에서 절정을 이룬다.8
동산은 영원한 본래면목을 꿰뚫어 알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현실로 내려와야 제대로 본래면목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그는 고고하되 세속을 버리지 않고 세속의 나로 돌아온다. 운문 선사는 말한다.
법화경에 말씀하시길, 이 세상의 모든 언어와 현실 생활이 실상(實相, 본질)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 일러 보라. ‘비비상천非非想天’에서 지금 몇 사람이나 물러났는가?9
운문 선사는 ‘과연 몇 사람이나 소승적인 깨달음의 극치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의 경지에서 물러나 ’현실 생활과 본질이 둘이 아닌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이 세상으로 되돌아왔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 나는 로스 알토스에 앉아 있다. 내일 아침엔 샌프란시스코에 있게 될 것이다. 로스 알토스에 있는 “나”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나”사이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그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여기서 오리는 존재의 자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대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어떤 속성도 없다. 내가 “그대”라고 말할 때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도 독립돼 있고 나도 독립해 있다. 둘은 다른 순간 속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전혀 다른 들이란 뜻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의 존재이고 같은 존재다. 우리는 같으면서 또 다르다.10
2) 향엄 선사가 대오大悟한 후에 개당開堂을 하니 위산 선사가 편지와 주장자를 보내왔다. 이를 받고 선사는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울었다. 옆에 있던 제자가 놀라서 물었다. “스님께서는 왜 그렇게 우십니까?” 그러자 향엄 선사 “겨울에 할 일을 봄이 되어서야 시키는구나.”라고 하였다.
3) 한 스님이 선사께 물었다. “어떤 것이 소리 이전의 한 구절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가 묻지 않을 때에 대답하리라.” “지금 대답해주십시오.” “지금은 묻고 있느니라.”
4) 『선문염송 ․ 염송설화』「600. 여인如人」11
향엄(香嚴)이 시중하여 말하였다.
“마치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서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손으로 가지를 휘어잡거나 발로 가지를 밟지 않았거늘, 밑에서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다고 가정하자. 대꾸하지 않으면 묻는 이의 뜻에 어긋나고, 대꾸하면 자기의 목숨을 잃는다. 이럴 때 어찌해야 좋을까?”
그때 호두(虎頭)라는 상좌(上座)가 있다가 나서서 말하였다. “나무에 오른 뒤는 묻지 않겠습니다. 나무에 오르기 전의 소식을 화상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선사가 깔깔대며 크게 웃었다.
분양소(汾陽昭)가 송했다.
향엄이 가지를 문 일을 사람들에게 보이니
동포(同袍)들이 참된 소식 깨닫게 하려는 뜻이다.
망설이면서 도리어 말을 따라 찾으니
목숨 잃고 죽은 이들 티끌과 같다.
분양이 그대들에게 하늘 길을 열어 주리니
구름 걷힌 먼 하늘에 달빛이 새롭다.
설두녕(雪竇寧)이 송했다.
향엄이 나무 위에서 파도를 일으키고
나무 밑에서 근원을 다해 웃으면서 대답한다.
나무에 올라 위로 향한 일을 밝힌다 하여도
어찌 고요한 살바하(薩婆訶) 와 같을 수 있으리오.
설두현(雪竇顯)이 염하였다.
“나무 위에서 말하기는 쉽거니와 나무 밑에서 말하기 어렵다. 노승이 나무에 오를 터이니 한마디 물어보라.”
지해일(智海逸)이 상당하여 이 이야기를 듣고 연이어 설두의 염을 들어 말하였다.
“설두 노장이 평소에 고금에 우뚝하게 우주 안을 혼자 걷는다 여겼는데, 모르는 결에 향엄에게 홀리어 나무에 올라가서는 아직껏 발을 땅에 대지 못하고 있다. 안목을 갖춘 납자는 가려보라.”
II. 사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배용균 감독의 영화 제목이다. 현실을 떠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산사에 들어가지만, 깨달음이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데 있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89년 8월 13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표범상을 수상, 한국 영화 70년 사상 처음으로 세계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영화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여하시달마서래의如何是達磨西來意> 혹은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에서 빌려온 것이다. ‘동쪽으로 간’거나 ‘서쪽에서 온’거나 마찬가지이니 뜻 또한 같다. 전하는 말로는 달마가 40년 동안 스승인 반야다라를 섬겼는데, 하루는 달마가 스승에게 묻는다. “저는 이미 법을 얻었는데 이제 어느 나라에 가서 교화를 해야 합니까?” 스승은 “그대가 나의 법을 이어받았으나 너무 멀리 교화하러 가지 말고, 내가 열반에 들고 나서 6, 7년 후에 중국에 가서 법음을 베풀도록 하라.”
하지만 실재적인 이유는 앞 칙에서도 밝혔지만 당시 중국의 서쪽 중앙아시아는 여러 왕조가 다투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인도 역시 불교가 쇠퇴하던 때로, 불교학의 많은 엘리트들이 돌파구를 찾아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당시 중국 양나라는 불교를 숭상하여 많은 불교계 인재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달마도 이 때 중국으로 들어온다.
중국에서도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섰을 때, 중국의 선사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이는 전반적으로 왕조가 바뀌면 종교계 또한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가 망하면서 불교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불교가 꽃을 피우게 된다. 20세기 들어서는 티베트가 중국에게 점령당하면서 티베트 승려들이 서구로 망명하는데, 티베트 불교가 현재 서구 사회에 퍼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는 ‘선원에서, 불법의 근본이 되는 뜻을 이르는 말로, 조사祖師 달마가 전한 불법의 의취意趣’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는 청정한 본심을 가르치기 위해 달마가 중국에 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불법의 이치가 묻는 말로 변한 것이다. 즉, ‘불법佛法의 대의大意는 무엇인가?’, ‘불교의 근본원리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인가?’와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으며 후일 선문답의 정형구定型句로 된다.
『벽암록』의 저자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가 “<여하시조사서래의>라는 물음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착어하였듯, 이 질문은 선어록의 단골메뉴로 약 220회 이상 등장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답이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의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잣나무>13이다.
조주선사는 <판치생모板齒生毛>14라고 답하기도 하셨는데, 기록에 나오는 <조사서래의>의 시원始原은 탄연坦然이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과 함께 숭산혜안 국사15를 찾아가 물은 것이『종경록宗鏡錄』16 제97권에 전한다.
노안(老安)국사
5조(五組) 홍인(弘忍) 대사의 법을 잇고 숭산(嵩山)에 있었다. 탄연(坦然)이라는 선사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했다.
“자기의 뜻은 묻지 않고 남의 뜻은 물어서 무엇 하려는고?”
“어떤 것이 탄연(坦然)의 뜻입니까?”
“그대는 비밀한 작용이 필요하니라.”
“어떤 것이 비밀한 작용입니까?”
이에 노안 선사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니, 탄연이 얼른 깨달았다.17
<여하시조사서래의>라는 물음에 노안국사는 왜 자기 자신의 뜻(의지)은 묻지 않고 남의 뜻(의지)을 묻느냐고 되묻는다. 자기의 ‘서래의’는 묻지 않고 왜 남의 ‘서래의’를 묻느냐는 것이다. 선에 있어서는 남의 의지는 의미가 없다. 자기의 의지가 중요하다.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도 이 질문에 대해 “바로 그대의 뜻은 어떤가?”라고 반문하고 있다.18 부연하면 왜 자기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느냐는 것이다.
서주舒州 천주산天柱山 숭혜(天柱崇慧, ?~779) 선사의 대답은 매우 시적이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흰 원숭이 새끼를 안고 푸른 봉우리를 돌아오고, 벌 나비는 초록빛 꽃술 사이에서 꽃가루를 물어온다.”19
이 게송은 후일 호남성 협산夾山 영천원靈泉院의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 선사에 의해 인용되어 더욱 유명해진다. 선회선사에게 한 무명승이 “무엇이 협산경夾山景입니까?”라고 묻자, “원포자귀청장리猿抱子歸靑嶂裏 조함화락벽암전鳥啣花落碧巖前”20이라고 대답하는데, <협산경계夾山境界>라는 화두로 잘 알려진 이 게송에서 선종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인『벽암록碧巖錄』의 ‘벽암碧巖’이 유래한다.
이『벽암록』에는 세 개의 <조사서래의> 선문답이 소개되어 있다.
제17칙 향림좌구성노香林坐久成勞
어느 스님이 향림 화상에게 질문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향림 화상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앉아서 좌선하니 피곤하군.” 21
제20칙 용아서래무의龍牙西來無意
용아 화상이 취미 선사에게 질문했다.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무엇입니까?” 취미 선사는 “나에게 선판(禪板)을 건네주게나.”라고 말했다. 용아 화상이 선판을 취미 선사에게 갖다 드리자, 취미 선사는 선판을 받자마자 곧바로 후려 쳤다. 용아 화상은 말했다. “치는 것은 선사 마음대로 치시오. 그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습니다.”
용아 화상은 다시 임제 선사에게 질문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임제 선사는 말했다. “나에게 방석을 건네주게!” 용아 화상은 방석을 임제 선사에게 갖다 드리자, 임제 선사는 곧장 후려쳤다. 용아 화상은 말했다. “치는 것은 선사 마음대로 치시오. 그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습니다.”
제73칙 마조사구백비馬祖四句百非
어떤 스님이 마조화상에게 질문했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떠나서 화상께서는 저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바로 가르쳐 주십시오.” 마조화상은 말했다. “나는 오늘 피곤해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지장(智藏)에게 물어보게나!” 그 스님이 지장스님에게 질문하니, 지장은 말했다. “왜 마조화상께 묻지 않는가?” 스님은 “화상께서 스님께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지장이 말했다. “나는 오늘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懷海) 사형에게 묻도록 하게!” 스님은 회해스님께 묻자, 회해스님은 “나는 그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스님이 이러한 전후 이야기를 마조화상께 말하자, 마조화상은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라고 말했다.22
재미있는 것은 제20칙에 등장하는 용아(龍牙居遁, 835~923) 화상이 후에 동산(洞山良价, 807~869) 선사를 참문하여 똑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동산 선사가 “동구의 물이 역류하게 되면 그때 가서 그대에게 말해주마.”23 라고 말하자 곧바로 깨달아, 동산의 법을 잇고 조동종曹洞宗 선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 선사는 “서쪽에서 오신 데는 뜻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와 비슷한 문답이 『임제어록臨濟語錄』에도 보인다.
질문,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의지意志는 무엇입니까?” 임제스님이 대답했다. “만약 의지가 있다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질문했다. “이미 의지가 없었다면 어떻게 二祖 慧可는 불법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임제스님이 대답했다. “얻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질문, “이미 얻지 못했다면 어떤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하는 의미입니까?” 임제스님이 대답했다. “그대들이 일체의 여러 곳을 향해서 불법을 구하는 마음을 쉬지 않고 있기 때문에 조사께서 ‘한심스러운 장부야!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찾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빛이 나온 곳을 향해 빛을 되돌려 비추어 보고(回光返照), 다시는 밖에서 달리 법을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身心)이 조불(祖佛)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에 번뇌망념의 일이 없으며, 비로소 진실을 체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4
의지란 ‘지성과 감정의 복합체’이며, 항상 목표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의지가 있으면 목표가 생기고 그런 마음으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즉 무엇을 얻고자 하였다면 그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조차 구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얻겠다는 생각은 이원적 상대성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혜가가 얻은 것은 얻을 것도 본래 없는 텅 빈 본바탕이었으므로 결국 얻은 것이 없다고 하겠다. 적어도 허망한 분별이나 망상은 얻지 않았으므로 얻지 않았다고 했을 수도 있겠다. 결국 내가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내가 바로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이 <조사서래의>의 본뜻이라고 하고 있다.
그대가 관념적으로 흐를 때 마음속에 뭔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두게 되고 만일 거기에 도달하게 되면 또 다른 얻겠다는 생각이 이상을 만들어 내곤 한다.
(중략)
그대의 성취 목표는 항상 저 앞에 있어서, 그대는 언제나 미래 속에 들어있는 어떤 이상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끝나고 말 것이다.25
만일 깨달음을 “얻고자” 애쓴다면 그 역시 업의 한 부분일 뿐으로 그대는 업을 짓고 업에 끌려가고 있는 셈이며 좌복 위에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셈이 된다. (중략) 요점은 우리가 도달하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우리의 원래 성품에 대한 강한 확신과 수행에 대해 가지는 성실성이다. 그대의 바른 노력이다.26
그는 말한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체가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수행 속에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특별하게 어떤 것을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 성취하려고도 하지마라. 그대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나니. 그냥 가라.
생사사대生死事大
싯다르타는 출가를 막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생로병사가 없게 해줄 수 있는가?”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싯다르타는 인간적 고뇌에 빠진다.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인간 육신의 무상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涅槃)을 얻기 위해서이다.27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28
싯다르타의 출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 해결에 있었다. 생로병사라고는 하지만 결국 ‘죽음(死)’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죽음의 문제에 싯다르타 역시 고뇌했고 그 의문을 풀려고 출가한 것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기존의 다양한 수행들을 경험하고 나서도 의문이 해결되지 않자 자리에 앉아 사색에 들어간다. 싯다르타가 좌선을 통해 얼마만큼 죽음에 문제에 접근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깨달음 이후 우리가 일상적인 지각이나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는 것이다.29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정각의 내용은 다양하게 설명되지만, 근본적인 내용은 연기緣起의 도리이다. 깨달음으로 인해 삼명육통三明六通이 생겨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은 연기다. 연기는 모든 것이 서로 조건 지워져 생겨난다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모두가 인과 연의 관계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도리다. 인간의 한계적 삶을 제공하는 죽음에 대한 의식도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애착을 원인으로 생겨난다고 연기는 가르친다.
연기의 이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12연기설에 의하면 인간의 고통은 근본적으로 삶의 이치 즉 연기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 연기법이야말로 부처님이 인류에게 던지는 지혜와 자비의 메시지인 셈이다.30
그의 사상은 불교라는 종교로 체계화되었고, 중국에 들어와 기존의 중국사상과 융합하면서 중국에 뿌리를 내린다. 내세來世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던 중국에 기존의 불교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정토신앙을 심어놓았고, 천태종, 삼론종, 법상종, 선종 등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중 선종은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가 되었는데, 죽음보다는 현실의 삶에 무게를 두고 있는 선종도 죽음의 문제에는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현각玄覺31이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을 친견하고 나눈 <생사사대生死事大>32 화두를 비롯하여 <마대사불안馬大師不安>, <향엄상수香嚴上樹> 그리고 <도솔삼관兜率三關> 등 화두 속에 끊임없이 생사에 대해 문답하고 있다. 그러나 역으로 그 화두들 속에는 선사들의 생사문제에 대한 견해가 들어 있고, 그 해결에 대한 열쇠 또한 내장 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화선 수행을 통해 선사들의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접할 수 있다.
『벽암록』 제3칙 마대사부안馬大師不安, 마조화상의 병환
마조도일화상이 병환으로 몸이 편치 않았다. 원주스님은 마조화상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는 요즈음 법체가 어떠하십니까?” 마조화상이 대답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이네.33”
『벽암록』 제29칙 대수겁화통연大隋劫火洞然, 대수화상의 시방세계를 멸망시키는 불길
어떤 스님이 대수법진 화상에게 질문했다. “시방세계가 종말하게 될 때 일어나는 맹화(猛火)는 일체의 모든 것을 불태워 삼천 대천의 시방세계가 멸망하게 되는데, 이것(본래면목)도 파괴됩니까?” 대수 화상이 말했다. “파괴된다.”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도 따라 갑니까?” 대수 화상이 말했다. “그도 따라 간다.34” 35
생사문제를 말이나 문자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자 이 화두를 통해 정면으로 돌파해 보자. 옛 선사들이 죽음을 어떻게 통찰했는가를......
III. 참구
이 정섭박사는 「간화선 수행론 연구(박사학위 논문)」에서 이 화두를 ‘진퇴양난형’이라 구분하였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게 해 생각을 끊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화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사람들은 진퇴양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생각을 끊게 하려했는데 오히려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철저히 그 상황에 처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로 처했다면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고의 과정이 마냥 쓸데없는 일은 아니다. 인인지이도자 인지이기(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36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쓸데없어 보이는 사고의 과정을 거쳐 명쾌한 해답에 이르는 것이 바로 간화선 수행이기 때문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사에 자유로운 경계를 한번 철저히 참구해 보시라.
선은 상식이다. 상식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서는 안 된다. 자 철저히 그 상황에 처한 즉심을 제시할 곳에 제시하시라. 어떻게 응대해야 생사대사生死大事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IV. 착어
五言.
V. 재독
여러분이 그 나무에 매달려 있다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VI. 감상
한 낮 햇살에 정자에 누웠더니, 산들 바람에 잠이 솔 솔 오는구나!
쏴아~쏴아~ 폭포소리에 깨어보니, 부는 바람에 나뭇잎 한들~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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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달 노사님은 ‘通身迸鬼眼’을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눈만 껌벅거리며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네!’라고 착어하셨다.
2. 위앙종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매력으로 사람을 끈다. 임제종이나 운문종처럼 절박하거나 날카롭지도 않고, 조동종처럼 치밀하지도 않으며, 법안종처럼 기지가 번득거리지도 않는다. 반면에 위앙종은 다른 파에 비해 매우 심오하다. 향엄이 깨닫게 된 과정이 그 대표적인 예다. (오경웅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 177.)
3. 이와 비슷한 사례로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와 스승인 운암담성(雲岩曇晟, 780~841) 선사와의 일화를 소개한다.
동산 스님이 운암 선사의 기일에 재를 올리는데 어떤 중이 묻기를,
“화상은 운암에게 어떤 법을 받았습니까?” “같이 있기는 하였지만 아무것도 받지 못했노라.”
“그런데 어째서 운암의 재를 올립니까?” 이에 동산 스님은 “나는 선사의 도덕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요,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무 것도 설說하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길 뿐이다.”라고 한다.
이어 “운암을 긍정하십니까?”라고 묻자 동산 스님은 “반은 긍정하고, 반은 긍정하지 않느니라.”라고 대답한다.
“어째서 전부 긍정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전부 긍정하면 선사를 저버리는 것이니라.”
4. 仰山云, “如來禪, 卽許師兄. 祖師禪, 未夢見在.
5. 仰山云, “且喜師兄, 會祖師禪.”
6. 오경웅 지음, 류시화 옮김,『선의 황금시대』 pp. 170~172.
7. 무문 화상이 평하여 말씀하시기를, 모름지기 선을 참구하려거든 제대로 참구하여야 하고, 깨달음 또한 제대로 된 깨달음이어야 한다. 오랑캐를 한번은 직접 만나야 하겠지만, 만났다고 하면 이미 둘이 되어 버린다. 無門曰, 參須實參, 悟須實悟. 者箇胡子, 直須親見一回始得, 說親見, 早成兩箇. (『무문관無門關』 제04칙 호자무수胡子無鬚).
8. 동산이 운암(雲岩曇晟, 780~841) 선사에게 물었다.
동산: "화상께서 돌아가신 뒤 누가 '화상의 초상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운암: "그런 사람에게는 '다만 이런 사람이었네'라고 대답하게." 동산이 멍하니 생각에 잠기니
운암: "이 일을 이해하려면 자세히 살펴야 되느니라."
동산이 의심을 완전히 풀지 못하고 운암을 떠나 가다가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대오大悟하였다. 이에 게송을 지으니 선종오도송의 효시가 되었다.
切忌隨他覓 迢迢與我疏다른데서 그를 찾지 마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我今獨自往 處處得逢渠이제 나 스스로 혼자 가니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그는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應須與摩會 方得契如如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
참고로, 선도회에서는 무문관 1독을 통해 본래면목을 만나고, 2독을 통해 세속의 나로 돌아온 경계를 참구한다.
9. 원오극근 저, 석지현 역주, 『벽암록』 33칙.
10. 순류 스즈끼 지음, 강연심 옮김, 『禪 (Zen Mind, Beginner's Mind) 』 p. 150.
11. 혜심 ․ 각운 지음, 김월운 옮김, 『선문염송 ․ 염송설화』「600. 여인(如人)」에서 가려 옮김. pp. 388~391.
혜심(慧諶, 1178∼1234)은 고려 중기의 스님으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송광사)의 제 2세 법주였다.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시호는 진각국사眞覺國師이다. 문하에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夢如와 진훈眞訓, 각운覺雲, 마곡麻谷 등이 있었다.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은 진각국사 혜심이 선문禪門에 전해지던 부처와 조사들의 염拈과 송頌 등 1,125칙을 수집해서 30권으로 묶은 책이다. 뒤에 제자인 각운覺雲이 347칙을 첨가하여 1,472칙으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주해를 붙인 것이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이다. 30권으로 엮었다.
12. 살바하薩婆訶는 薩婆若의 오기나 다른 표현으로 보이며, 일체지一切智, 모든 것을 아는 사람, 부처님의 뜻이다.
13.『무문관無門關』 제37칙 정전백수庭前柏樹, 『종용록從容錄』 제47칙 조주백수趙州栢樹.
14. 板齒生毛, 앞 이빨에 털이 났느니라. 판치는 앞 이빨을 뜻한다.
15. 숭산혜안(崇山慧安 또는 노안老安, 대안, 도안, 582-709?)는 5조 홍인(五祖弘忍, 601~674)의 법사法嗣이다. 대체적으로 홍인의 제자로 혜능과 신수 2대 제자만 알려져 있지만, 혜안선사는 국사로서 승려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권의 귀의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형주 옥천사의 주지 직위를 대통신수에게 양보하고 숭산에 들어가 산신들에게 보살계를 설한 신이한 인물로 전한다. 저명한 화엄학자이자 선사인 규봉종밀은 혜안선사에 대해 ‘혜안의 도와 덕이 깊으며 지절이 고고한 인품은 당시 비교할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측천무후(測天武后, 624~705)는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는데, 측천무후가 “물에 들어가는 위대한 사람을 본다(入水見長人)”이라고 감탄한 일화가 전한다.
16.『종경록宗鏡錄』은 오대五代로부터 북송北宋에 걸친 선승禪僧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의 저작으로, 100권으로 되어 있다. 영명연수는 선종5가禪宗五家의 일파인 법안종法眼宗에 속하며, 천태天台, 화엄華嚴, 법상法相 등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융화회통融和會通하게 하려는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한 선승이다.
17. 정수선사靜修禪寺 문등文僜 지음, 김월운 번역,『조당집祖堂集』제3권 「노안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