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장로 대통령 만들기, 한국 교회 희망인가?
황영철
(자유기고가,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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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도박사 김영삼 장로가 청와대 점령고지를 향해 세 번째 도전한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 또 다시 기독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한국 교회는 자뭇 흥분하고 있는 듯싶다. 김영삼은 자유당 정권의 공천에 의해 약관 26세 나이에 국회의원이 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해 야당 제1인자로 자처해 왔지만, 또 다시 본고향으로 돌아가 최후 승부수를 던졌다. 과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한국교회 주체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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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의 정치적 무능인가, 김영삼의 노련한 정치코미디인가?
축제무드로 치르고자 하는 계획은 빗나갔지만 어쨌든 민자당은 경선으로 차기 대통령 후보를 뽑았다. 민자당 하는 일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했는지, 이종찬 씨가 경선을 거부함으로써 김영삼 씨가 후보로 결정되기 직전까지도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 김영삼 씨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는 두고 봐야 알지 않겠느냐?”는 반응이었다.
민자당 경선과정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민자당의 다소 유치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 전체 과정의 불공정성이 뻔히 보임에도 그것이 지극히 민주적인 절차인 것처럼 국민이 봐 주기를 바라다니, 아직까지도 국민을 저 정도로 대우하는 하는 생각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은 과정은 국민들로 하여금 민자당에 더욱 환멸을 느끼게 만들어서 민자당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것 같다.
둘째로 5공화국 말기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씨 손을 들어주던 모습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도대체 전두환 대통령이 누구 손을 들어줄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였는데, 마침내 노태우 씨 손이 올라갔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마치 코미디 한 편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가졌을 것이다. 사실 그 시대는 정치 코미디가 따로 필요 없던 시기였다. 날마다 정치란을 읽으면 그것 자체가 아주 익살스러운 코미디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6공 말기 모습이 비록 유치하기도 하고, 불만족스러운 면이 많지만 5공에 비하면 나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직 코미디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번째로는 6공 말기에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레임덕” 현상이다. 이것도 5공과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다. 이종찬 씨 경선 거부는 당 총재인 대통령에 대한 전적인 도전이었다. 물론 이종찬 씨는 앞으로 여러 형태 압력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도전이 가능한 상황이란 6공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노태우 대통령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유부단함, 굉장한 내용이 있는 것같이 말하는데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여러 가지 발표들, 국민에 대한 어리석은 이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제스처들,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무능력······.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모든 요소들은 그의 권위를 실추하는 데에 기여했고, 그렇게 실추된 대통령 권위는 도리어 집권당 내에서 당 총재인 대통령에 대한 도전을 가능케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면 노태우 대통령이 좀 더 권위를 상실해서 대통령이 실제로는 고급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해될 수 있었다면, 우리나라 민주화는 더 빨리 왔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면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무능으로 인해, 적어도 민자당 내 민주화를 가속화해 준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태우 대통령 그런 정치 스타일이 그의 무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손주환 씨 말대로 “국가의 민주화를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는지는 역사가 지난 다음에야 좀 더 정확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왜곡된 기독교인의 정치의식은 종교분쟁을 몰고 온다.
그러나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 결과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관심이 있는 까닭은 차기 대권 주자로 뽑힌 김영삼 씨가 잘 알려진 대로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영향력이 큰 교회 장로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도리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면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교회가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씨가 자의에 의해서건, 그의 참모들에 의해서건, 아니면 권력에 빌붙어서 무엇인가 얻으려는 넋 빠진 어떤 목회자에 의해서건,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만회하려는 의도에서, 혹은 유리한 상황에 아예 쐐기를 박겠다는 생각에서거나 자신이 신자이며 장로라는 사실을 근거로, 또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아무래도 우리나라 기독교에 더욱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더욱 나아가서 신자가 대통령이 돼야 이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암시를 주면서 한국 기독교계에 대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갑론을박하다가, 마침내 그래도 기독교 교인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순진한 생각에서 그를 지지하기로 교회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불교는 불교 대표를 내고, 가톨릭은 가톨릭 대표를 내어서ㅡ이번 선거에서 안 되면 최소한 다음 선거에서라도ㅡ 우리나라는 종교분쟁에 휩싸이는 것이다. 물론 그 덕택에 지방색은 없어질지 모르지만 더욱 맹목적이고 더욱 심각한 분열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번 대선에서 종교와 정치적 지지를 뒤섞는다면, 그것은 일제 신사참배를 따르기로 결정한 과거 한국 기독교 공식 결정에 버금갈 만큼 한국 교회에 치명적인 해를 미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지지를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승만 정권 실정을 통해 뼈아프게 경험했다. 한 사람 신앙과 그의 정치적 탁월성은 별개이다. 이 점에서 얼마나 냉정해야 하는지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종교적 정서는 자신과 같은 종류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어느 정도 기울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평가할 때, 그것이 지방색이나 학연이나 지연을 따라서 정치적 지지를 결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어떤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할 때에 그 결정 근거는 같은 종교가 아니라 바른 정치여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지상적 형태의 국가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기독교인 대통령이 나와야 할 까닭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이미 과거 민족복음화 운동 속에서 아주 조야한 형태로 표현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말세에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택하시고 그 사회를 복음화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국가를 세우게 하고, 그 다음에 이 나라를 세계선교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까닭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온갖 형태로 기괴하게 왜곡된 성경 해석이 그 근거로 제시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 주장을 하던 선교단체가 지금 어떤 모양이 돼 있는가? 그런데 이런 주장이 만약에 다시 등장하고, 교회가 그 주장에 동조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교회가 얼마나 연약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증명이 되고 말 것이다.
셋째, 교회가 정치판 희생물이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물론 신자는 정치에 대해 토론도 하고 비판도 하며 바른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도록 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활동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회조직으로서 교회는 그 자체 구조적 독특성을 가지며, 그 구조적 독특성에 따른 고유한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바른 정치가 어떤 것이어야 함을 선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어떤 입후보자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능하다면 성명서라도 내서, 우리나라 교회는 후보자에 대한 지지와 그의 신앙을 뒤섞지 않을 것임을 천명해 둠으로써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오류를 미리 방지해 두고 싶은 심정이다.
넷째, 그럼에도 신자는 성경의 원칙에 입각해 자신이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구약에서 배울 수 있는 바람직한 국가 모습은 의와 공평에 의해 다스려지는 상태이다. 구약 가르침에 의해서든지, 혹은 보편적인 원칙에 비춰 보든지, 의로운 사회의 척도는 그 사회의 약자들이 얼마나 그들 권리를 보장받느냐에 있다. 선지자들은 이 약자를 고아와 과부라는 관용적인 말로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죄악을 타매할 때에 선지자의 지적은 그들이 사회의 약자를 보살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돈의 힘이나 권력의 힘에 의해 법이 강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되고 재판의 판결이 굽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런 사회의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신다고 외쳤다. 그러므로 의와 공평의 원칙을 가능한 한 정치적으로 구현하려는 사상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일차적인 기독교적 시험을 통과한 사람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지지할 입후보자를 결정함에서도 성경적인 원칙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기독교인을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각자가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가지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첫째는 기독교인 정치가를 지지하는 것을 성경적 원칙으로 간단히 판단하는 안이함이다. 둘째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 입후보자를 종교를 까닭으로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어리석음이다.
*{복음과 상황}에서 옮겨 옵니다. 1992년에 지인에게 복사물로 받은 글이기 때문에 옮긴 쪽 같은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합니다. 선거가 있을 때면 읽는 글입니다. 여러 해 묵은 김장 김치처럼 입맛을 돌게 하는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