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선도(群仙圖, 국보 제139호), 이 그림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가 1766년 봄에(32세) 그린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중의 대표작으로 김홍도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132.8센티미터, 가로 575.8센티미터지만 원래는 8폭짜리 병풍으로 그려진 것을 6.25 사변을 겪으면서 3개의 족자로 분리 표구되어 지금에 전한다.
그림에 나타난 신선들은 중국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인물들로, 실제로는 살았던 시대가 서로 다르나 8선(八仙)이란 개념으로 통합되어 마치 동일 시대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림은 삼 천년에 한 번 열린다는 천도 복숭아[蟠桃(반도)]가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서왕모(西王母)의 집에 익었다고 하자, 신선들이 약수(弱水)의 파도를 건너 초대되어 가는 모습이다. 그림은 배경이 일제 생략된 채 신선과 그를 모시는 동자를 세 무리로 나뉘어 옛 사람의 시각 습관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진시키고 있다. 특히 행진 방향에 따라 인물의 숫자를 줄인 것은 시선을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주목시키게 하고, 등 뒤에서 부는 바람으로 옷자락이 힘차게 나부껴 그림 전체에 생동감과 박진감을 불어넣었다.
신선들의 이름은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으로 추측할 수 있다. 먼저 오른쪽의 무리에서, 외뿔소를 탄 노자(老子)가 일행을 선도하고 그 뒤로 두건을 쓴 종리권(鍾離權), 두루마기에 붓을 든 문창(文昌), 복숭아를 손으로 받쳐 든 동방삭(東方朔)이 보이고, 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호리병을 들여다보는 이철괴(李鐵拐)와, 맨 머리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여동빈(呂洞賓)도 보인다.
가운데 족자에는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탄 장과로(張果老), 딱다기를 치는 조국구(曹國舅), 어고간자(漁鼓簡子:竹筒)와 술통을 든 한상자(韓湘子)가 보인다. 그리고 여신선을 표현한 왼쪽 족자에는 영지를 허리에 매달고 곡괭이에 꽃바구니를 매단 꽃의 여신, 남채화(藍采和)와 복숭아를 든 하선고(何仙姑)가 보인다.
이 그림은 종이 바탕에 먹을 주로 해서 청색· 갈색· 주홍색을 곁들여 그렸는데, 인물의 윤곽은 굵은 먹선으로 빠르고 활달하게 그리고, 얼굴· 손·기물들은 정확하고 섬세하게 처리하였다. 또 옷은 담청을 주로 해서 엷은 음영만 나타내고, 얼굴은 담갈색으로 처리하였다. 화면의 하단에 '丙申春寫(병인춘사)' 라는 관기(款記)와 '士能(사능)'이라는 호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金弘道印'·'士能'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전체적으로 인물만을 배치한 구성과 제각기 살아 넘치는 인물의 묘사력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서화와 술을 사랑한 풍류객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으로 인물· 산수· 화조·풍속화에 모두 능한 천재 화가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사람으로 자(字)는 사능, 호는 단원·단구(丹丘)·서호(西湖)등 여러 개를 썼다. 단원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그의 호를 따서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이다.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도 좋았으며 넓은 마음씨에 성격까지 활발해 신선과 같았다고 전한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분[梅花盆栽]을 팔고 있었다. 매우 기이한 것으로 가지고는 싶었으나 김홍도는 살 돈이 없어 안타깝게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삼천 냥을 보냈다. 그러자 김홍도는 이 천냥을 들여 매화를 사고, 팔 백냥으로 몇 말의 술을 사서는 벗들을 모아 매화를 감상하는 술자리를 열었다. 그리고 나머지 이 백냥은 쌀과 땔감을 사는 밑천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 생계조차도 되지 못했다. 이 일화를 통해서 김홍도의 통 크고 멋스러운 풍류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궁중의 화원이 된 김홍도는 그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29세 때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는 영광까지 누렸다. 기예를 인정받은 김홍도는 이듬해에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게 된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는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금강산과 관동팔경들을 두루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받쳤다. 이는 지방을 직접 돌며 산천 경개를 감상할 수 없는 임금의 처지를 생각해 화원으로 하여금 승경(勝景)을 대신 그려 오게 한 것이다. 40대 후반에 든 김홍도는 충북 연풍(延豊) 현감에 제수 되어 약 3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이는 화원에게는 파격적인 영광으로 그만큼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대변한다. 연풍은 경상도 문경과 지척인 고장으로 높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인 작고 아늑한 고을이다.
늙도록 아들을 두지 못한 김홍도는 연풍에 머물며 상암사(上菴寺)에 치성으로 불공을 드려 김양기(金良驥)을 얻었다. 그러나 두 해에 걸쳐 삼남 지방에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자 김홍도는 실정(失政)의 책임을 지고 벼슬을 사직 당했다. 그 후 그의 만년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다만 병과 가난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만 전한다.
병풍에서 그림만 떼어오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군선도가 19세기에 들어 순조와 철종 조의 세도 정치와 민란, 그리고 후반기에 제국주의의 침략과 약탈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필자가 자료로서 확인한 것은 고작 일제 시대의 일로 합천에 사는 임상종(林尙鍾)이 소장하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그는 호가 해려(海旅)로 천 석지기의 부자였다고 한다. 고서화 수집에 깊이 빠진 임상종은 가진 재산을 처분하며 고서화를 사 모았고, 마침내 돈이 떨어지자 남의 돈까지 빌려다 투자를 했다.
여기저기서 빌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임상종은 급기야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최상규(崔尙奎)에게 군선도를 비롯한 고서화를 맡기고는 계속해서 돈을 빌려 썼다. 당시에 남에게 돈을 빌려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자가 월 2할에 가까워 5달만 지나면 원금의 곱이 되었던 시절이다. 마치 밑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으로 늪에 빠진 임상종은 더 이상 빚을 갚을 길이 없자, 파산선고를 했다. 그러자 개인으로써는 유래가 드물게 수집했던 3백여 폭의 고서화가 이자와 원금 대신으로 고스란히 최상규에게로 넘어갔다. 욕심이 부른 파멸이었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에 임상종의 손아귀에는 손바닥만한 고서화 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추의 한을 품은 채 1940년 눈을 감았다.
고리대금업자 최상규는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으로 곧 임자를 찾아 나섰다. 그때 소문을 듣고 군선도를 차지한 사람이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차남인 민규식(閔奎植)이었다. 일부에선 이 그림을 김용진(金容鎭, 1878∼1968)이 소장하다가 민규식에게 양도했다고도 한다. 김용진은 19세기말에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金炳國)의 양손자로 1905년 관직을 떠난 뒤에는 오직 서화 수집에만 전념한 사람이다.
민영휘는 19세기 후반부터 일제 강점기를 통해 온갖 영화를 누린 인물로, 명성황후가 집권할 당시에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로 소문났었다. 갑오개혁이 있고서는 유배까지 가지만, 1910년에는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까지 받아 친일파로 행동했다. 그는 일본을 등에 업고서는 장안의 갑부가 되었다. 권력과 돈을 이용한 그가 천일 은행(天一銀行)과 휘문학원(徽文學院)을 설립한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민규식 또한 장안의 거부로 소문났고, 그가 고서화를 수집하자 골동계에 소문이 금세 퍼졌다. 그의 부인은 일본인이었다.
민규식이 소장하던 군선도가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1951년 1.4후퇴 직후의 부산에서 였다. 당시 부산은 인민군 치하에서 숨죽여 살았던 서울의 기라성 같은 수집가들이 1.4후퇴를 기해 소장품을 몽땅 싸 들고 내려와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던 때였다. 수장가들은 골동 가게에 모여 전세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소장한 고미술품도 팔고 샀다. 어느 날, 부산 시청 앞 대로변에 자리잡은 고두동(高斗東)의 가게에 낮선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인가 코를 훌쩍이더니 빰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민규식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가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오랫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고두동이란 골동상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눈물을 훔쳐 낸 부인이 두루말이에 싼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천하의 명품인 군선도가 나왔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혹시 이것이 병풍 아니였나요?" 그러자 민규식의 부인이 또 다시 울먹였다. "예. 본래 병풍이었는데 피난 보따리에 병풍을 넣을 수 없어서 그림만 오려 가지고 내려 왔습니다."
민규식의 부인은 급한 김에 병풍에서 그림만 떼어 둘둘 말아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또 다시 치마를 끌어다 얼굴을 감쌌다. "그런데 팔려고요?" 그녀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이 그림은 고미술품을 취급하던 장석구(張錫九)에 의해 5백만 환에 이야기되었지만 너무나 어이없게도 군선도는 일본으로 밀반출되고 말았다. 전세가 불리하자, 민규식의 부인은 군선도를 팔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동경한국은행에 근무하던 아들에게 보냈다. 김홍도의 대작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때, 그 사실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이 손재형이다.
국보급 문화재의 반출에 대해 그는 가슴을 치며 통탄하고, 하루빨리 되찾아 오라고 민규식의 부인을 다구첬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본으로 전보를 쳤다. 하늘이 도왔던지 이 그림은 그때까지 팔리지 않은 채 그 아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9.28수복으로 한국의 정세가 안정되자 군선도는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온 군선도를 손재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당한 값을 치르고 인수했다. 그후 군선도는 '세한도'와 마찬가지의 경위를 거쳐 이병철에게 양도 되었다. 군선도는 1971년 12. 21일 국보 제139호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호암 미술관에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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