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는 진(晉)나라의 대부 조(趙), 위(魏), 한(韓) 3가문이 주(周)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시작되었다. 한·위·조가 후(侯)라고 칭했다는 것은 단순히 하극상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고, 주왕이 이를 인정하고 스스로 종법제(宗法制)를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중요하다. 이윽고 강력한 제후는 왕을 칭하게 되어 이 때에 명실공이 주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봉건제도가 붕괴해 버린 것이다. 얼마 후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향해 제각기 왕을 칭하였다.
춘추시대 초에 140여 개국이었던 도시국가의 거의 모두가 이 때에는 7개 강대국의어느 한 영토에 편입되어 버렸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였으며 문후(文侯)·혜왕(惠王)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음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서 비로소 진·초·연·제·한·위·조의 7웅이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어졌다. 그 중 진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소위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4군(君)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전국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전국시대가 되자, 사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인다. 그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이 때까지는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將軍)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에 의해서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서주(西周)로부터 춘추시대에 걸쳐서는 정치·군사 양면에 있어서 대부가 세습적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전국시대가 되자 정치·군사가 분리되고 저마다의 책임자가 필요에 따라서 군주에 의해서 임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주권(君主權)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官僚軍)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진에서는 다른 나라의 출신자까지도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했다. 내정개혁을 단행한 상앙,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시황제의 승상이 된 여불위(呂不韋) 등이 모두 다 그러했다. 춘추 말기에 나온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그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하나하나의 나라를 초월하여 공통된 문화·사상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자기의 영지(領地)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던 대부 계층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또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이 변동기의 자극을 받아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 국경을 초월한 대상인의 활발한 교류로 국경을 넘어 몇몇 나라에 판로를 가진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판매하여 큰돈을 벌었다.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상업 수공업자들의 재산은 때로는 왕후(王侯)와도 필적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일이 통관세(通關稅)를 필요로 하는 국경(國境)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국경이 없는 중국의 통일을 이면에서 촉진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이와 같은 것은 대상인들이 전국을 유세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분립한 강국이 대립·항쟁하는 반면에 있어서는 문화, 경제의 면에서 이미 중국을 하나의 세계로서 성립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춘추시대의 후반 이래, 청동기의 명문(銘文) 같은 장식성(裝飾性)이 강한 문자(文字)에는 지방색(地方色)이 엿보이지만, 평소에 죽간(竹簡) 등에 씌어진 문자에는 상당히 통일성이 엿보이는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기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달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사회의 일대 변혁 및 눈부신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이 시기에 있어서의 생산력의 현저한 발달이었다. 이 생산력의 발달 요인은 춘추시대에 시작된 우경(牛耕)의 보급과 전국시대에 보급된 철제농구의 사용이었다. 철제농구 이전의 농구는 거의가 석제나 목제였으며, 그것은 토질이 부드러운 황토지대에서의 경작에는 그런대로 쓸 수가 있지만 수목을 베어내고 새로 경지(耕地)를 일굴 때는 극히 비능률적인 농구였다. 이 곤란을 타개하며 개간을 용이하게 하고 심경(深耕)에 의한 토지의 생산력을 증대시켜 준 것이 철제농구이며, 그 사용을 계기로 농업은 놀랍게 진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시대의 전반(기원전 6, 7세기경)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이때 제나라 동종(銅鐘)의 명문(銘文)에 ‘제철 노예 4천명’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영 제철사업은 꽤 대규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괭이, 삽, 가래 같은 농구의 주조는 전국시대에 들어와서 발달된 것 같다. 우경과 철기가 보급되어 생산이 부국강병의 근본으로 장려되자 이제까지 돌보지 않던 황무지까지 개척되며, 그로 인하여 관개용 수로나 제방을 쌓는 토목공사가 일어났는데, 이것도 또한 철기에 의지하게 되어 농업생산은 한층 더 발달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전국 칠웅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제사를 끊으면 나라의 조상으로부터 저주받는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하게 멸해 버리는 일은 그만큼 많지 않고, 또 멸망해도 부흥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용서가 없어져, 한번 전쟁에 지는 일은 나라의 멸망에 직접 연결되었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점차 7개의 대국들이 강자로 부상되어 갔다. 그 7개의 나라를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부른다.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에 온 힘을 다하여 치국에 힘써 진나라를 무시했던 제후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승복시키고 아래로는 영을 내려 인재를 찾았다. 위(衛)나라 출신 상앙을 중용하여 기원전 359년과 기원전 351년 두 번에 걸쳐 변법을 시행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급속하게 국력이 신장되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효공 11년 기원전 350년 함양으로 천도하고 진나라 역사상 최초로 군자를 위한 부세를 징수했다. 대외적으로는 초나라와 화친하고 한(韓)과 맹약을 맺고, 다시 진(秦), 조(趙), 제(齊) 삼국동맹을 맺어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위나라를 동서에서 협공하고자 했다. 여러 번에 걸친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낙수(洛水) 이동의 땅을 개척했다. 전국 초기 초강대국이었던 위나라는 진나라의 동진정책에 밀려 그 도성을 하동의 안읍에서 동쪽의 대량으로 옮겼다. 병이 들어 비교적 젊은 나이인 44세에 죽었다.
진 혜문왕 영사(秦惠文王 嬴駟, ? ~ 기원전 311년)는 진나라의 제 26대 군주이다. 효공의 아들. 무왕 탕(武王 蕩)과 소양왕 직(昭襄王 稷)의 아버지.
아버지 효공의 방침을 계승해, 파촉(巴蜀)을 정복해 진의 국세를 더욱 높였다. 재위 때에 진으로서는 처음으로 왕호를 사용했으므로, 왕호 사용 이전의 혜문군이라고도 불린다.
상앙 숙청
태자 시절 상앙의 변법을 어겨, 그 벌로 부역과 스승인 공자 건(公子虔)과 교육 스승인 공손 가(公孫賈)가 각기 코를 자르는 형과 문신을 새기는 형에 처해졌다. 또 시종인 축환(祝懽)이 처형된 과거가 있었다. 태자는 그것을 원망하여 효공의 사후에 상앙에게 죄를 씌워 상앙을 거열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상앙의 변법은 그대로 사용해, 기본적인 국정 방침은 효공 시대와 다르지 않았다.
장의 등용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에 의해, 큰폭으로 국력을 증강하여, 주변에 있는 나라는 이것을 무서워해 주나라에 주어야 할 선물이 주어지는 만큼 강해졌다.
이 국력을 바탕으로 모략가인 장의를 등용하고, 종종 위, 제, 초나라등을 토벌해, 기원전 324년에 왕호를 사용했다.
기원전 318년에 한, 조, 위, 연, 제나라의 5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나라에 쳐들어왔으나, 혜문왕은 저리질(樗里疾)에 군사를 맡겨 이들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파촉의 병합
또 기원전 316년에는 관중(진의 본토)의 배후지인 파촉을 병합한다.이 지역에는 삼성퇴문화(三星堆文化)를 근본으로 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가 번창하고 있었고, 이 나라는 주나라에 복속하고 있었다. 촉 정벌 전에 장의와 사마착(司馬錯)에게 촉을 취해야할 것인가를 자문했는데, 장의는 이것에 반대해 나라의 중앙인 주나라를 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사마착은 촉을 취하고 배후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문왕은 사마착의 의견을 채용하고 촉을 정벌해, 진은 큰 곡창지대를 얻었다. 또한 장강 하류에 있는 초에 대하여 강을 사용한 진나라군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어, 이전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초나라 토벌과 한중군 설치
그리고 기원전 312년, 초나라가 진나라에 쳐들어가 왔을 때에는, 반대로 초의 한중 지방에 쳐들어가, 그 땅에 한중군을 설치한다. 그 후, 초가 다시 침공해 왔을 때에는, 함양에 가까운 남전(藍田)의 땅에서 이들을 격파했는데, 이 사건은 초나라 쇠망의 전초가 된다.
혜문왕은 다음 해인 기원전 311년에 사망했다. 상앙을 미워하면서도 그 법은 보관 유지한 일은, 같은 국정 개혁의 기수인 오기를 살해한 초나라가 그 후, 오기의 개혁의 성과를 파기한 일과 비교할 때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한 파촉을 병합한 일은, 진이 최강국으로 성장한 요인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후 4대의 왕을 거쳐 중국의 통일국가 진나라가 결성되며, 이 때의 왕을 진시황제라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