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湖南歌)1)를 구성지게 부르며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피날레 부분에서 우리는 단가(短歌)의 희열에 빠져 깊은 감동에 젖을 즈음 이윽고 남평(南平)에서 막을 내린다.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고향을 보랴하고 제주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갈 제-(中略)- 여산 석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꽂았으니, 대장부 할 일이 이외에 또 있는가 삼천리 좋은 경(景)은 호남(湖南)이 으뜸이라 거어드렁 거리고 살아보세)
남평, 과연 이곳은 어떤 곳인가?
우리는 남평의 역사를 얼마나 바로 알고 있었는가?
해방 후 우리는 광복의 혼란 속에서 우리고장 남평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미처 정리도 하기 전에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귀중한 자료들이 일시에 소실(消失)되는 불운을 겪었다.
어린시절 막연하게 아주 오래된 일 같은, 모두들 기억 속에서 사라진 전설을 이야기 하듯 어른들의 구전(口傳)으로만 듣던 남평의 역사이야기는 옛적에는 현(縣)이었다가 군(郡)이었다가 면(面)으로 바뀐 것 말고도 영평(永平)이라는 지명이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던 것 같다.
이제, 남평초등학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남평초등학교의 개교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고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백방(百方)으로 찾아서 모아 정리하던 중 우리가 그동안 매우 궁금해 했던 우리고장의 역사를 찾게 되어 수집된 사료(史料)들을 이 기회에 일관성 있게 정리하여 본다.
도도히 흐르는 대하(大河), 영산강(榮山江)은 오늘도 지석강(砥石江)2)과 황룡강(黃龍江)이 합류하여 나주평야를 촉촉하게 적시며 흘러가는데 그 상류시점의 사시사철 맑은 지석강물과 강변의 하얀 모래언덕하며 푸른 솔숲을 이웃하여 생활한 남평인들의 가슴에는 지석강(砥石江)의 그림이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자리 잡고 앉아 있다.
매양 눈만 뜨면 바라다 보이는 월연대(月延臺)3)의 의연한 산세(山勢)는 남평인들 모두에게 학창시절 학교의 교실 창문에서 혹은 운동장에서 어린 동심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심어주고 도닥여 주는 거산(巨山)이었음에 장성한 후에도, 노년의 세월에 접어들었어도 항상 추억의 깊은 중심에서 요동을 치고 있다.
아름답고 위대한 남평(南平)은 우리들이 태어나 배우고 자라난 곳, 이후 더러는 밖으로 흩어져 살아왔을지라도 꿈속에서도 다시 그리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것을, 남평(南平)은 남평인(南平人)들을 언제까지나 가슴에 보듬어 지켜보고 있으리라.
2. 사실(史實)
가. 역사․지리적 특징
남평(南平)은 선사시대 그 이전부터 지석강에 연결된 하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기름지며 물의 양이 풍부하여 농경사회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수많은 부족들이 정착하여 취락이 형성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그 흔적들이 강 상류지점에서 수없이 발견되고 있다.
남평현(南平縣) 각지의 유서 깊은 고을마다 사찰(寺刹)과 불상(佛像), 입불(立佛), 와불(臥佛), 석탑(石塔), 사우(寺宇), 제(齊), 정자(亭子), 고가(古家), 전적(典籍), 석비(石碑), 고성(古城), 서원(書院) 등 그 외 다수의 문화유적들이 널리 산재해 있고 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도곡(道谷)의 고인돌 군(群)도 선사시대의 사료로서 남평에 바로 이웃하여 있다.
한양에서 전주, 무진주를 지나 호남 남부 지방으로 통하는 지리적인 접근성을 살펴볼 때 반드시 남평을 경유하여 영암, 강진, 해남, 장흥, 제주도 등으로 향하는 도로가 일찍부터 발달하여 교통의 중심 망(網)으로, 물류의 이동의 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가장 오래된 도로는 현재 남평의 소재지를 지나 산포의 산제, 다도삼거리, 봉황삼거리, 세지 동창을 지나 남도의 해안을 잇는 통로인데 이 길은 근세 영산강에 다리가 놓이고 신작로와 철도가 놓이기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남도(南道)의 “한양(漢陽) 길”이었다.
또 남평에서 지석강 능주 보성 장흥 등지를 잇는 “동남(東南) 길”. 남평에서 광촌 노동 화순 동복 순천 여수 등지를 잇는 “동행(東行) 길”. 남평에서 대촌 서창 송정 영광 고창 등지로 잇는 “북행(北行) 길”. 남평에서 금천 나주 함평 무안 목포 등지로 잇는 “서행(西行) 길”들, 이 모두가 일찍부터 발달한 육로 길이었고 예로부터 근처의 큰 고을은 남평을 중심으로 반경 30리(里) 안에 걸쳐있어 이 지역이 사통팔달의(四通八達) 행정의 중심지로 현청(縣廳)과 객사(客舍), 역(驛), 원(院)이 성업을 하였고 그에 맞추어 상업과 물류유통의 종합구실을 할 수 있는 5일장인 “남평장(南平場)”은 일찍부터 개장되어 강경장4)과 더불어 호남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물류유통의 중심지로서 구실을 하여왔다.
나. 역사의 부침(浮沈)
1928년 홍승복(洪承復) 등이 수보간행(修補刊行)한 남평읍지(南平邑誌)5)에 나타난 남평현의 건치연혁(建治沿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남평은 역사상 한반도 남부에서 지리적으로 천혜의 맑은물이 흐르는 강과 기름진 평야와 교통의 요충지를 점한 지역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취락을 이뤄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으며 부족들이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백제(百濟)시대에는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나주(羅州)와는 별개의 국방, 교육, 행정, 경제, 문화 등 전라도 지방의 중심역할을 하여온 지역이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에도 전략적 요충지로서 군사 주둔지인 십정(十停)의 하나인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6)이 설치되어 통일신라시대의 군대를 양성 주둔시켰던 곳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는 미동부리현을 현웅현(玄雄縣)으로 하였고 이후 오산현(烏山縣)이라고도 하였다.
<표 1> 삼국시대의 십정(十停)
10정의 명칭
옷깃색
경덕왕
이전 지명
경덕왕
이후 지명
고려때
지명
오늘날의 위치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흑(黑)
미동부리
현웅(玄雄)
남평(南平)
전남 나주 남평
참량화정(參良火停)
〃
참량화
현효(玄驍)
현풍(玄風)
경북 달성 현풍
소삼정(召參停)
〃
소삼
현무(玄武)
召參部曲
경남 함안 군북
음리화정(音里火停)
청(靑)
음리화
청효(靑驍)
청리(靑理)
경북 상주 청리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
고량부리
청무(靑武)
청양(靑陽)
충남 청양 청양
거사물정(居斯勿停)
〃
거사물
청웅(靑雄)
청웅(靑雄)
전북 임실 청웅
남천정(南川停)
황(黃)
남천
황무(黃武)
이천(利川)
경기 이천 이천
골내근정(骨乃近停)
〃
골내근
황효(黃驍)
여주(驪州)
경기 여주일대
벌력천(伐力川停)
녹(綠)
벌력천
녹효(綠驍)
홍천(洪川)
강원 홍천일대
이화혜정(伊火兮停)
〃
이화혜
녹무(綠武)
안덕(安德)
경북 청송 안덕
고려초에는 다시 영평현(永平縣)으로 부르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무주 도독부(현 광주광역시)에 속해 있던 영평현을 남평현(南平縣)으로 고쳐 나주(羅州)의 임내(任內)에 속하게 하였다.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년)에는 나주가 전국 8목 중의 하나인 나주목이 될 때 남평군으로, 나주목의 5개 군(郡)중의 하나가 되었고 고려 명종 2년(1172년)에는 남평현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나주목에서 능성목(현 능주)으로 분리하고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는 능성목에 속해 있던 화순현에 감무를 두면서 남평현을 겸임하게 하였다가 조선 태조 2년(1393년)에 나주목에 계수관(界首官)을 두었을 때 남평현은 3군 8현 중의 하나인 현(縣)으로 나주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는 화순에 겸임하였던 감무를 분리하여 남평현에 별도의 감무를 두게 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는 남평현의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바꾸고 조선 태종 15년(1415년)에 능성현에 속해 있던 철야현(鐵冶縣)이 남평현에 속하게 되었다.<세종실록지리지 권 151>
첫댓글※2. 史實 가.[역사 지리적 특징]의 <머릿말 표>내용이 나오지 않아서 삽입합니다. ※ 본래 南平이라 함은 현 나주시 5개면(금천,산포,다도,봉황,남평)을 통칭한 지명(地名)이었는데, 현재의 南平은 일제강압(日帝强壓) 후 1914년 일본총독부에서 전국의 행정개편을 단행할 당시, 남평군청(南平郡廳)소재지 지역인 현재의 위치로 축소하여 남평면으로 변경였기에 여기서 [남평의 역사]라 함은 분리 이전의 5개 面의 통합된 역사-지리임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참고
첫댓글 ※2. 史實 가.[역사 지리적 특징]의 <머릿말 표>내용이 나오지 않아서 삽입합니다. ※ 본래 南平이라 함은 현 나주시 5개면(금천,산포,다도,봉황,남평)을 통칭한 지명(地名)이었는데, 현재의 南平은 일제강압(日帝强壓) 후 1914년 일본총독부에서 전국의 행정개편을 단행할 당시, 남평군청(南平郡廳)소재지 지역인 현재의 위치로 축소하여 남평면으로 변경였기에 여기서 [남평의 역사]라 함은 분리 이전의 5개 面의 통합된 역사-지리임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