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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신앙
“ 법화경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범부승의 스승이신 법화대종사께서는
법화경의 신앙(本名法華信仰入門)을 우리말로 번역하시면서 책머리(譯序)에 “세존출세본회의 목적인 중생성불의 대이상(大理想) 대공덕(大功德)의 법화경을 우리나라에 광전(廣傳)하고자 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중장범부승(重障凡夫僧)의 촌지(寸志)로 어찌 다 할 수 있으리오. 오로지 사관격고창제(事觀擊鼓唱題)를 불행으로 하여 수행고심 하던 중 우연히도 이 소책자(本名法華信仰入門 中川日史著)를 읽으니 역자가 평소 지향하던 바와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여 이를 소개키로 하고 역자가 일찍이 번역 간행한 법화 삼부경 및 한원문(漢原文)을 삽입하였다. 또 간혹 역자의 의견을 참가하였음을 저자와 아울러 독자 제현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법화경을 광선유포 할 시절이니 이 훌륭한 양서를 여러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소개 연재하는 바입니다.
2007.4.17. 행일 합장
법화경의 신앙
교판(敎判)
제一장 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뜻은 각각 다르다.
여래세웅(如來世雄)이 법이 자재(自在)함과 같이 설한 바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음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다 능히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제함이나 그러나 처음은 중간이 아니요 중간은 끝이 아님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그러나 뜻은 각각 다름이 있느니라. (무량의경 설법품 三七八面)
불교의 연구는 경전에 의해야 할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경전을 읽는데 있어서 우선 첫째로 마음 깊이 생각할 것은, 그 가운데 설하여 있는 교상(敎相)을 밝혀야 할 것이다.
교상이라 함은, 그 조직이라든지 체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교의 성립 또는 교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니, 교상을 충분히 밝히지 않는다면, 그 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연구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교상을 밝히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하고, 약해서 교판(敎判)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여래 종파(宗派)는 각각 독특한 교판에 의해 석가세존 일대의 경전의 가치를 비판하고 내용을 해석하여, 수많은 경전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경전이라고 생각되는 경전을 선택하여 자기 종파의 의경(依經)으로 하고 있다.
천태종(天台宗)은 법화경을, 화엄종(華嚴宗)은 화엄경을 진언종(眞言宗)은 대일경(大日經)을, 정토종(淨土宗)은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선택한 것 등은, 어느 것이나 다 각자의 교판에 의해 조사(祖師)가 선택한 의경이다.
하나의 종파가 성립함에는 반드시 그 독자적인 교판이 필요하며, 교판을 하지 않고서는 한 종으로서 독립할 수 없다.
한말로 불경이라고 하지만, 그 수는 대단히 많다. 그 많은 경전 가운데는 八만의 법문(法門)이라고도 하는 만큼 온갖 교가 다 설하여 있으니, 거기에는 소승(小乘)이 있고 대승(大乘)이 있으며, 권교(權敎)가 있고 실교(實敎)가 있으며, 방편(方便)이 있고 진실(眞實)이 있어서, 말이나 글자만으로는 그 내용이나 가치를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세존께서 직접 설하신 교이므로, 그 한자 한 구절이 다 사람을 인도하신 거룩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물은 비록 다 같이 씻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샘은 못이 아니요, 못은 강하(江河)가 아니며, 시내는 바다가 아니니라.」(무량의경 설법품 三七八面)
하신 것과 같이, 물은 본래 더러움을 씻으며 물건을 뜨게 하는 성질이 있어 어떠한 곳에 있든지 그 본성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한 대야의 물은 겨우 작은 물건을 씻을 수는 있어도 큰 옷을 빨 수는 없다. 또 냇물에는 조그만 배는 띄울 수 있어도 큰 기선은 띄울 수 없다.
세존의 교도 이와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사람으로 하여금 악에서 선으로 사도(邪道)에서 정도(正道)로 어두움에서 광명으로 인도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 인간사회에 태어나신 근본 목적을 밝히시고, 미혹된 중생의 무명(無明)을 끊어 부처님과 같이 성불하게 하는 교는 어느 경에나 다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많은 경전 가운데서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거룩한 어느 한 경전에 있을 것이다.
다 같이 세존께서 설하신 경(經) 교(敎)라 할지라도, 일대 五十년 동안의 설교 가운데는 초 중 후(初中後)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내용도 다른 것이 있다. 만일 교판을 소홀히 하고,「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뜻은 각각 다르다」는 말씀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것을 중히 여기고 큰 것을 잊을 것이며, 권(權)으로써 실(實)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련상인(日蓮上人)은「선(善)이라 할지라도 대선(大善)을 깨뜨리는 소선(小善)은 악도(惡道)에 떨어지리라」고 경고하였다.
불교를 연구함에 있어서 교상을 밝히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더욱이 법화경을 연구하려는 사람은, 중국의 천태대사(天台大師)의「다른 경을 폄에는 교상을 밝히지 않을지라도 그 뜻이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을 펌에 있어서 교상을 밝히지 아니하면, 그 글의 뜻에 어긋나리라」고 한 말이며, 일련대사의「교의 얕고 깊음을 알지 못하면 이치의 얕고 그 글의 뜻에 어긋나리라」고 한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법화경을 의지하는 경전(依經)으로 하여 한 종파를 연 천태대사와 일련대사가 운용(運用)한 교판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한 종파가 독립함에는 반드시 교판이 필요하므로, 각 종파는 각기독자적인 교판을 가지고 있다.
화엄종(華嚴宗)
화엄종은「오교실종五敎十宗)」이라 하여, 세존 일대의 모든 경을 세로 다섯으로 나누고, 거기에다 십종(十宗)을 가로 배당하였다. 그리하여 화엄경을 가장 뛰어난 경전이라 하고, 화엄종(華嚴宗)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하고 있다.
진언종(眞言宗)
진언종은「현밀(顯密)」의 두 교를 가로의 교판으로 하여 법화경 등의 현교(顯敎)는「응신(應身)」곧 현신불(現身弗)이신 석가여래께서 설하신 것이요, 대일경(大日經)의 밀교(密敎)는 「법신(法身)」곧 이상불(理想弗)이신 대일여래(大日如來)께서, 설하신 것이라, 현교는 밀교보다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세로의 교판으로서「십주심(十住心)」을 말하여 인간의 정신의 발달을 심리적으로 十단계로 나누어, 거기에다 모든 교와 모든 종지를 배당하고, 그 가장 높은 제 十위에다가 진언종을 올려놓았으니, 진언종의 의경인 대일경을 자연 가장 뛰어난 경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정토정(淨土宗)
정토정은「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자력문(自力門)과 타력문(他力門)」등의 명목으로써 모든 경전을 비판한다.
그리고 성도, 난행 자력은 다른 경전에서 설한 깨달음의 길로서 범부인 우리들, 특히 말법(末法)의 중생에게는 인연이 없는 수행(修行)이다. 말세의 중생은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설해 있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의지해서, 정토 이행, 타력에 의해 왕생극락(往生極樂)을 기약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경에 설한 바야말로 글자 한자 모르는 말법의 중생이 구원받을 수 있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 밖의 다른 여러 종파도 각기 다 교판이 있으나 이 세 종파가 대표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꽃이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는 중에서 가장 학문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은 천태대사의 교판이요, 가장 뜻이 분명하고 합리적인 것은 일련상인의 교판일 것이다. 천태대사와 일련상인의 교판은 그의 독자적인 교판이기는 하지마는 결코 그 분들의 독단(獨斷)은 아니다.
천태종(天台宗)
천태대사의 교판은 이를 오시팔교(五時八敎)라고 하는데, 오시(五時)라 함은 세로 세존일대 五十년의 모든 경을 설하신 시기를 다섯으로 구분한 것이니, 곧 화엄시(華嚴時),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가 그것이다.
화엄시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아함시에는 아함경(阿含經)을,
방등시에는 대일경(大日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경(藥師經)등 통틀어 대승(大乘)이라 불리고 있는 많은 경전을, 반야시에는 반야경(般若經)을, 법화열반시에는 법화경(法華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설하셨다는 것이다.
화엄시는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후 최초의 21일 간이고, 아함시는 그 뒤 12년간이고, 방등시는 그 다음 8년간이고, 반야시는 그 다음 22년간이고, 법화열반시는 끝으로 8년간으로서 五十년이 된다.
이 시기의 구분은 대체로 교리의 얕고 깊음과 일치하는데, 우유를 정련(精練)하는 五단계에다 비유하였으니,
첫째는 유미(乳味) - 화엄경(華嚴經),
둘째는 낙미(酪味) - 아함경(阿含經),
셋째는 생소미(生蘇味)- 방등경(方等經),
넷째는 숙미(熟米) - 반야부(般若部),
다섯째는 제호미(醍醐味) - 법화경(法華經)으로서 법화경이 가장 뛰어난 경이라고 하였다.
이 세로의 교판에 대하여 가로의 교판을 팔교(八敎)로 나누었으니, 팔교라 함은 설법하는 방법에 관한「화의(化儀)의 사교(四敎)」와 설법의 내용에 관한「화법(化法)의 사교(四敎)」를 말한다.
화의의 四교란,
첫째는 돈교(頓敎)이니, 처음부터 대뜸 대승의 깊은 교를 설하는 것이요,
둘째는 점교(漸敎)이니, 작은 교에서 큰 교로, 얕은 교에서 깊은 교로 들어가는 것이요,
셋째는 비밀교(秘密敎)이니, 법을 듣는 사람을 서로 알리지 않고, 교도 서로 알리지 않고 각각 따로 설하는 것이요,
넷째는 부정교(不定敎)이니, 듣는 사람은 서로 알고 있으나, 설하는 교는 남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설하는 것이다.
화법의 四교란,
첫째 장교(藏敎) - 소승교(小乘敎),
둘째 통교(通敎) - 소승에게도 대승에게도 통하는 교,
셋째 별교(別敎) - 앞뒤의 관계없이 설하는 대승교(大乘敎),
넷째 원교(圓敎) - 완전(完全)하고 원만(圓滿)한 교의 네가지다.
위의 八교에다가 세존 一대의 모든 경전을 배당하여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인데, 법화경은 八교 가운데 넣기에는 너무나 존귀하고도 월등히 뛰어난 경전이라 하여「초팔제호(超八醍醐)의 묘경(妙境)」이라고 판단한 것이 천태대사의 교판이다.
일련종(一連宗) - 일련대사의 교판(敎判)은「종교의 오강(五綱)」또는「오의(五儀)」라고 하여, 「교(敎)」,「기(機)」, 「시(時)」, 「국(國)」,「서(序)」의 다섯 가지 대강(大綱)에 의해 세존 일대의 모든 경을 가로세로 비판하고, 천태대사와 같이 최고의 경전, 최승의 교로서 법화경을 들고 있다. 그리고 「종지(宗旨)의 삼비(三秘)」로 본문(本門)의 본존(本尊),
본문(本門)의 제목(題目),
본문(本門)의 계단(戒壇))을 세우고 있다.
교강(敎綱)이란,「명교(明敎)」라 하여 경전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요,
기강(機綱)이란,「감기(鑑機)」라 하여 인심의 움직임을 심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요,
시강(時綱)이란,「찰시(察時)」라 하여 시대의 변해 감을 사회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요,
국강(國綱)이란,「지국(知國)」이라 하여 국가의 특질(特質)을 민족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요,
서강(序綱)이란, 「고서(考序)」라 하여 교화(敎化)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서, 이 다섯 가지 비판기준(批判基準)에 비추어 최고의 교를 찾아내는 것이다.
매우 달의적(達意的)이니 종교의 선택과 종교를 포교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경전에 대한 가치판단의 방식이라 하겠다.
제二장 마땅히 요긴한 진실을 설하부처님이 설하신 바의 법을 마땅히 온 힘을 다하여 믿을지니라. 세존은 오랫동안 법을 설한 후에야 마땅히 요긴한 진실을 설하느니라. (방편품 三一面)
세존께서 중생을 교화 하시는 데는 하나의 의식(儀式)이 있고 작법(作法)이 있는데 이것을「전권후실(前權後實)이라고 한다. 먼저 권교(權敎) 곧 방편(方便)을 설하시고, 나중에 실교(實敎) 곧 진실(眞實)을 설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유독 세존만의 교화 방법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교화 방법이요 작법이다. 과거세에 나오셨던 부처님이나, 현재 시방국토(十方國土)에 나타나 계신 부처님이나. 미래에 나오실 부처님이나, 부처님으로서의 의식은 다 같다.
이것을「오불동도(五佛同道)의 의식儀式)」이라고 하는데, 五불이란, 총제불(總諸佛), 과거불(過去佛), 현재불(現在佛), 미래불(未來佛) 및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말하는 것이다.
이 五불동도의 의식에 대하여는 방편품(方便品) 가운데 자세히 설해 있다. 세존께서도 이 의식으로 중생을 교화하셨다. 세존께서 필바라수(畢婆羅樹 -뒤에 보리수라 함) 아래에서 무상보리(無上菩리)의 문을 여시고 부터 법화경의 회상(會上)에 이르기까지 四十二년 동안에 설하신 교는 다 권교이니 곧 방편이었고, 이제 법화경에 이르러 진실을 설하려 하시매「마땅히 온 힘을 다하여 믿을지니라.」(방편품 三○面)
고 설법을 듣는 대중에게 크게 결심할 것을 경고하셨다. 이때 이 자리에 모인 사리불(舍利弗)등의 대중이,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족(具足)한 도를 듣고자 하나이다.」(방편품 三三面)
고 간청하시니, 그제서야 세존께서는 비로소 一체의 권설(權設), 일체의 방편(方便)을 버리시고, 이 위에 다시없는 진실의 교를 설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법화경이다.
물론 세존의 교화 의식에도, 천태대사의 교판 화의의 四교 중에 돈교(頓敎)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뜸 단도직입적으로 대승의 깊은 교를 설하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수한 시기, 특수한 곳, 특수한 사람을 위해 예외로 쓰신 방법이다. 통틀어 말하면, 전권후실(前權後實)은 일반을 교화하는 보편적인 방법인 것이다. 가령 우리가 남의 자녀를 교육하는데도 대개는 이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닐까? 학교 교육을 보더라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차례로 하고 있으며, 다시 한 학교의 교육과정을 보더라도 一학년, 二학년, 三학년의 순서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천재를 교육함에는 위와 같은 순서를 따르는 교육과정은 필요치 않을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방법은 역시 전권후실의 교법에 의해 차례차례 순서를 밟아서 마지막 단계에 오르게 하는 길이다.
그러면 왜 전권후실의 작법(作法)이 필요한가? 그것은 다음의 경문으로 분명히 알 수 있겠거니와, 한말로 하면, 세존께서 출세하신「본회(本懷)」- 근본목적의 교를 설하시기 위한 준비로서, 四十여년에 걸쳐 많은 경을 설하신 것이다. 세존께서 출세하신 근본목적은 일체 중생을 다 같이 성불시키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는 유일의 교인 법화경에 들어오게 하시려고, 그 준비로서 四十여년 동안 여러 경을 설하신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법화경은 큰 탑(大塔)이요, 다른 경전은 발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법화경과 다른 경전과의 관계를 일련대사는「큰 탑을 쌓으려면 큰 재목보다 먼저 발판에 쓰일 작은 재목을 많이 모아서 발판을 만들고 나서 한 길 두길 쌓아 올린다. 이렇게 하여 탑이 다 되면 발판은 무너뜨려 버린다. 발판은 일체경이요, 대탑은 법화경이다. 부처님께서 먼저 일체경을 설하신 것은, 법화경을 설하시기 위해 먼저 발판을 마련하신 것이다.」라고 하셨다.
세존께서는 법화경에 이르러 대탑을 만든 후에 발판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이「방편을 버리고 정직하게 다만 무상도를 설하노라」(방편품 五四面)
이처럼 전권후실은 부처님의 설법 의식인 것이다.
제三장 성품과 욕망이 같지 아니하므로 가지가지 법을 설함이니라.
부처님의 눈으로써 일체의 모든 법을 관하였으되 가히 선설하지 아니하였노라. 어찌하여 그러 한고, 모든 중생의 성품과 욕망이 같지 아니함을 알았음이다. 성품과 욕망이 같지 아니하므로 가지가지로 법을 설함이니라.(무량의 경 설법품 三七七面 )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신 후 四十二년이라는 오랜 동안을 출세의 본회(本懷)이신 중생 성불의 도를 밝히지 아니하신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설하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세존께서는「아직 너희들에게 성불의 도를 얻는 것을 설하지 아니하였노라. 일찍이 설하지 아니한 까닭은 설할 때가 되지 않은 연고이니, 지금이 바로 이 때라 결정 코 대승을 설하노라. (방편품 四三面)
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교화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자연계에 있어서나 인간사회에 있어서도 때가 이르고 이르지 아니함과 기회가 익고 익지 아니함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봄은 씨를 뿌릴 때요, 가을은 곡식을 거둘 때다. 빨리 수확하려고 겨울에 씨를 뿌려도 싹은 트지 않을 것이요, 가을이 되기 전에 거두어도 곡식은 얻지 못할 것이다. 닭이 때를 알리는 것은 새벽이요, 그 한그루의 나무를 옮겨 심는 데도 때를 맞추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고 있다. 인간사회에 있어서도 때가 돼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세존께서는 출세의 본회이신 一체중생이 성불하는 대사를 일찍이 설하지 아니하신 까닭을「설할 때가 되지 않은 연고이니라.」고 하시고 때를 기다리신 것은 마치 추운 겨울에 씨를 뿌리는 수고만 있고 공이 없는 어리석은 일을 피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四十二년 동안이나 대사를 설하실 시기가 이르지 않았을까?
그것은 법을 듣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대사를 설하여도 이익이 없고, 들어도 알지 못할 것이니, 존귀한 법을 설해야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세존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보리(無上菩리)를 여시고, 곧 미혹한 중생에게 무상(無上) 정각(正覺)의 도롤 설하시려 했으나, 중생의 근기(根機)가 구구하여, 욕망도 소원도 사상도, 이상도 천차만별(千差萬別) 가지각색이어서, 모처럼 무상보리(無上菩리)의 대사를 설할지라도 중생이 그 근기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여 헛수고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설하지 아니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중생의 근기를 바로 잡으시고자, 四十二년 동안에 많은 八만대장경의 대부분을 설하신 것이다.
중생이 정각(正覺)의 교를 듣고서 깨달아 알 수 있게 된 때에 「지금이 바로 이 때」라고 시기가 왔음을 선언하시고 비로소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밝히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생각하건대, 세존의 슬하에 모여든 많은 불제자 가운데는 대사를 들으면 곧 신해(信解)할 수 있는 지혜가 깊은 보살중(菩薩衆)도 있었을 것이니,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 전에 출세의 본회를 밝히신 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세존께서「여래는 높고 존귀하며 지혜는 심원(深遠)하여 오래도록 이 요긴한 법을 침묵하고 속히 힘써 설하지 아니하였노라. 지혜 있는 이가 만일 들으면 곧 능히 믿어 해득할 것이나, 지혜 없는 자는 곧 의심하여 영원히 잃게 되리라. (약초유품 二六面)
고 설하셨음과 같이,
근기가 아직 미숙한 이승(二乘)들은 대사를 들을지라도 신해를 얻지 못할뿐더러, 도리어 의혹을 품어 믿지 아니하는 죄과를 범하지나 않을까하고 설하시기를 꺼려하셨던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나 지혜로운 사람보다는 무지한 사람이, 어진 사람보다는 어리석은 사람이 더 많은지라, 이러한 까닭으로 세존께서는 성불의 묘법을 함부로 설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것도 부처님의 자비를 중심으로 하여, 세존 일대(世尊一代)의 교법(敎法)을 우러러 보면, 여기서 모든 경전의 설상(說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각각 그 경전에 설해 있는 내용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제 四장 四十여년에 아직 진실을 나타내기 아니하였노라.
가지가지의 법을 설하되 방편력으로써 하였으니 四十여년의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노라. 이런고로 중생이 도를 얻음에도 차별이 있어 속히 무상보리를 이룩하지 못함이라. (무량의경 설법품 三七七面)
법화경을 설하시기 전 四十二년 동안에 설하신 보든 경전은 중생의 근기와 중생의 욕망 등에 알맞도록 설하신 교인지라, 중생의 근기는 천층만층이요, 욕망은 가지각색이니 이에 응해서 설하신 교가 역시 천자만홍(千紫萬紅) -여러 가지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교상(敎相)이 여러 가지라면 그 내용이 또한 많고 복잡하게 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중생의「성품과 욕망이 한량이 없는 고로 설법도 한량이 없느니라. 설법이 한량이 없는 고로 그 뜻도 또한 한량이 없느니라.」 (무량의경 설법품 三七四面)
고 설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四十여년의 모든 경전에 설해 있는 교는 그 하나하나가 각각 다르고 독립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일관성(一貫性)과 통일성(統一性)이 없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람을 인도하는 교의 취지에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갑에 대해서는 저렇게, 을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한 것이요, 높은 데 서서 전체를 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설법을 듣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도 가지가지여서, 어느 누구 한사람도 무상보리(無上菩리)를 얻지는 못하였다. 요컨대 과거 四十二년동안에는 세존 출세의 본회(本懷)를 아직 밝히지 않았다고 선언하신 것이 이것이다.
원래 세존의 설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수타의(隨他意)」교요, 하나는「수자의(隨自意)」의 교이다. 수타의의 교란, 설법을 듣는 중생의 근기와 욕망에 따라 그에 알맞게 설하신 교요, 수자의의 교란, 설법을 듣는 사람의 근기나 욕망에 관계없이 세존자신의 의사에 따라 설하고자 하시는 바를 그대로 설하신 교이다. 앞의 것을 방편교(方便敎)라 하고, 뒤의 것을 진실교(眞實敎)라 한다. 방편교는 또한 권교(權敎)라고도 한다. 그러나 방편교라고 해서 허망하거나 거짓이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세상에서는「거짓말도 한 가지 방편」이라는 말을 하는데, 거짓과 방편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불교의 방편은 절대로 허위가 아님을 거듭 말해 둔다,
법화경의 제二품을 방편품(方便品)이라고 하는데, 방편에 대한 의(義) 이(理)의 뜻에는 셋이 있다.
첫째는「법용방편(法用方便)이니, 방(方)은 법(法)이고, 편(便)은 용(用)으로 세존의 교화 방법을 말함이요,
둘째는「능통방편(能通方便)」이니, 깨달음의 전당(殿堂)에 이르는 문을 말함이요,
셋째는「비묘방편(秘妙方便)이니, 방(方)은 비(秘),편(便)은 묘(妙)의 뜻으로 출세의 대사를 밝히지 않고 설하는 것을 비(秘)라 하고, 그것을 밝히어 설하는 것을 묘(妙)라고 한다. 방편품의 방편은 이 셋째의「비묘방편」인 것이다.
첫째는 방편(方便)의 두 글자를 해석한 것이요, 둘째는 의해(義解)요, 셋째는 의해(意解)인 것이다. 아무튼 불교에서 말하는 방편은 진실이 밑받침되어 있지만은 허위는 전혀 진실의 밑받침이 없는 것이다. 허위는 단지 허위에서 출발하여 허위로 끝날 뿐이다.
세존께서 四十二년 동안 설하신 모든 경전이 방편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장차 진실의 교인 법화경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큰 자비가 밑받침되어 있는 것이고 절대로 허위가 아닌 것이다. 방편은 앞서 비유해 말한 탑을 세우는 데의 발판과 같은 것이다.
발판은 탑이 완성된 다음에는 허물어 버릴 것이요, 탑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 아니지마는, 그것이 없이는 탑을 이룩할 수 없다. 이것을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四十여년에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노라」는 말씀은, 옛날부터「權實榜示)의 글」이라 하여 권교(權敎)와 실교(實敎)를 구별하는 표주(標柱)가 되었다. 이표주가 세워진 무량의경(無量義經)이전의 一체경은 권교이고, 이 표주를 경계로 해서 그 뒤에 설하신 법화경이야말로, 세존께서 출세하신 본회(本懷)를 말씀하신 경이다.
각 종파의 법사들은 이 경문을 몹시 꺼려서 심지어는 무량의 경을 거짓 경전(經典)이라고까지 말하여, 이것을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와 반대로, 법화종에서는 이것을 「비목법문(費目法門)」이라고 한다. 아무리 사나운 소라도 코뚜레(卑目)를 잡히면 어린아이에게도 순순히 끌려가는 것과 같이, 다른 종파의 이름 있는 학자가 아무리 가지 종파의 의경(衣經)을 찬양하고, 자기 종파의 교의(敎義)를 높이 평가하여 웅변을 토할지라도,「그러면 당신의 종지(宗旨)의 의경은 四十二년 이전의 것인가 이후의 것인가?」하고서는 이름도 없는 법사에게도 꼼짝을 못하게 된다.
아무튼 이 경문이「권실방시(權實榜示)의 표주(標柱)」가 되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
제五장 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위함이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가지가지의 인연과 비유의 말씀과 방편을 가지고 법을 설하심이 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위함이라고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더냐.(비유품 六七面)
방편의 교는 중생의 근기와 중생의 욕망 등에 따라 수타의(隨他意)로 설하신 것이므로 상대자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자연 인연도 설하시고 비유로도 말씀하시게 되며, 또 말도 상대에 따라 가지가지로 바꾸어 쓰시게 된 것인데, 이렇게 하신 것이다. 一체중생으로 하여금 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 곧 무상보리(無上菩提)로 이끌어 가고자 하신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쓰이고 있는 말이나 글은 한도가 있는 것이어서,「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뜻은 각각 다르다」는 이치대로, 글이나 말은 같아도 그 내용은 때와 곳과 사람에 따라 자연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의 습성(習性)으로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같은 글이나 말은 그 내용도 같은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데에서, 경전의 가치 판단에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아뇩다라삼막삼보리」라는 문구는 四十二년의 모든 경에도 있고, 법화경에도 있다. 그러나 그 글자는 같지만 그 뜻과 내용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 같은 법화경 가운데서도,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뜻으로 씌어 있다.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미혹하여 있기 때문에, 법화경 이전의 여러 경전으로도 무상보리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성불하는 대사는 오직 법화경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법화경 이전의 모든 교는 법화경에서 밝히신 정각(正覺)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의 방편의 설(說)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존께서「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심은 오직 이 一 승법만이 진실이니, 달리 둘이 있다면 진실이 아니니라. 끝까지 소승으로 중생을 제도하지 아니하느니라.」(방편품 四三, 四四面)
고 하신 것과 같이,
모든 경은 중생을 법화경으로 인도하기 위한 교일 뿐, 법화경의 설법만이 세존 출세의 본회(本懷)요,「오직 이 一승법만이 진실」인 것이다.
진실이란, 성문중(聲門衆)에 대한 교와 연각중(緣覺衆)에 대한 교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의 궁극(窮極)의 교화는 소승의 교로써 하시는 것이 아니라, 중생 성불의 길은 유일의 대승인 법화경에 의해서만 이룩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생각이 좁고 욕망도 작아 눈앞의 작은 깨달음밖에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이러한 사람에게 대뜸 높고 큰 이상을 말해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니, 이들에게는 우선 작은 교를 설하시는 것이다. 작은 교를 설하시는 것은, 상대자의 근기를 길러 준 다음에 진실인 정각(正覺)의 교를 설하시기 위한 것이다. 곧,「작은 법을 즐겨함을 아시고 방편력으로써 그 마음을 조복하신 후 큰 지혜를 가르치시나이다.」(신해품 一○五面)
인 것이다.
만약 세존께서 소승의 교로만 끝마치셨다면, 부처님께 스스로「만일 소승으로만 교화하여 혼자만이 가진다면 나는 곧 간탐(慳貪)에 떨어지리니, 이와 같이 함은 옳지 않느니라. 」(방편품 四四面)
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것은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세존께서 사십(四十)이(二)년 동안 설하신 방편의 교는 법화경에서 밝히신 무상보리에 이르는 문(門)이요 계단인 것이다.
제六장 오직 一승법만이 있다.
十방 불토에는 오직 一승법만이 있고 二승도 없고 또한 三승도 없느니라. 부처님이 방편으로 설한 것은 제하노라.(방편품 四三面)
세존一대에 설하신 경전의 수는 五千여권이니 七千여권이니 하는 만큼 대단히 많다. 또 八만四千의 법문(法門)이라고도 하지만, 이것도 대체를 말한 것이고, 만약 그 하나하나를 센다면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수없이 많은 법문은, 마치 하늘을 찌를 듯한 큰 나무의 가지와 잎이 한 줄기에서 뻗어 나간 것과 같이, 세존 출세의 본회의 교인 법화경을 근본으로 하여 가지가지로 설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많은 교가 통일성(統一性)이 없고 산만(散漫)한 것 같이 보이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불교에는「하나에서 여럿이 나오고, 여럿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여, 세존의 설법은 이 원리 원칙에 따라 설하신 것이다. 삼론종(三論宗)은 이 하나에서 여럿이 나오고 여럿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원리에서 세존 일대의 설법을 비판하여,「근본법륜(根本法輪)」「지말법륜(枝末法輪)」「섭말귀본법륜(攝末歸本法輪)」의 교판(敎判)을 세우고 있다.
이 교판으로 생각나는 것은, 주자(朱子)가「사서(四書)」의 하나인「중용(中庸)」의 서문(序文)에서 말하기를「이 책은 처음에는 한 가지 이치를 말하고 다음에는 흩어져서 만 가지가 되고, 끝에 가서는 합하여 도로 한 가지 이치가 된다.」고 한 말이다. 곧 중용은 우선 지성(至誠)의 일리(一理)를 내세우고 그 다음에는 지성의 일리에서 인간으로서 실천해야 할 온갖 윤리도덕(倫理道德)을 가르친 다음, 마지막에 가서는 본래의 지성의 일리로 결론지었다는 말이다.
세존의 설법도 이와 같아서 출세하신 근본이상(根本理想)을 토대로 하여 八만四千의 법문(法門)을 설하시고, 그 八만四千의 법문은 마지막에 가서는 출세의 본회인 一체 중생이 성불하는 대도에 귀결되어 있다.
무량의경(無量義經)에는「무량의(無量義)는 한 법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어떠한 경전의 어떠한 교도 법화경에서 선언하신 출세의 본회인 중생이 성불하는 대도(大道)의 한 법에서 갈려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수없이 많은 교를 한데 결집(結集)하여 통일시킨 법화경이야말로 진실로 세존 출세의 본회인 지극 대승의 경전이다.
모든 경전에 설해 잇는 많은 교를 대강 정돈한다면, 그것은 세 가지로 된다.
그 하나는 성문중(聲門衆)에게 대하여 설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연각중(緣覺衆)에게 대하여 설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보살중(菩薩衆)에게 설하신 것이다.
이것을 삼승교(三乘敎) -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 이라 한다.
승(乘)이란, 교(敎)라는 뜻이다. 세존께서는 중생을 교법(敎法)이라는 배에 태워 가지고 미혹의 이편 언덕에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괴로운 바다를 건너 깨달음의 저편 언덕으로 건네어 주시는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교를 승(乘 - 타는 것에 비유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교는 다만 위에 말한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세존께서는 보살로부터 지옥에 이르는 구계(九界)의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시기 위해 각각 그 세계에 몸을 바꾸어 나타나셔서 교를 설하시는 것이므로, 위의 삼승(三乘)외의 천인승(天人乘 ), 인간승(人間乘), 수라승(修羅乘), 축생승(畜生乘), 아귀승(餓鬼乘), 지옥승(地獄乘)의 여섯 가지가 더 있다. 그러나 보통은 이 여섯 가지를 위의 세 가지에 포함시켜서 三승으로 부른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이들 三승에 대해 어떠한 교를 설하셨던가? 여기서 그것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으나, 그 대강을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하자. 먼저 성문(聲聞)에게는
一, 주로 인생이란 곧 고(苦)라는 것,
二, 그 고가 생겨나는 원인,
三, 고를 이겨낸 세상의 모습,
四, 그리고 그 고를 이겨내는 길,
이 네 가지의 교를 가르치셨는데 이것을 사성제(四聖諦)라 한다.
제(諦)라 하는 것은「심실(甚實)」하여 허(虛)가 아니 것」으로서 곧 위의 네 가지 교는 거룩하고 심실 하여 결코 허망(虛妄)하지 않다는 것이다 .
다음 연각(緣覺)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깨달음도 미혹함도, 어느 것이나 다 열두 가지 인연에 지배된다고 하셨다.
십이인연(十二因緣)은
一,「무명(無明)」- 과거의 번뇌.
二,「 행(行)」- 과거에 한 행동.
三,「식(識)」-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가는 순간.
四,「명색(名色)」-태 안에서 발달하는 마음과 몸.
五,「육입(六入)」- 태 안에서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가 자라는 것.
六,「촉(觸)」- 세상에 나서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것.
七,「수(受)」-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껴 아는 것.
八,「애(愛)」- 희망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
九,「취(取)」- 사랑하여 가지는 것.
十,「유(有)」- 애(愛)와 취(取)의 행동에 의해 갚음이 결정되는 것.
十一,「생(生)」- 미래의 생활.
十二, 노사(老死)」- 미래의 과보(果報).
의 열두 가지로서, 이 열두 가지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통하여 서로 인(因)이 되고 서로 과(果)가 된다고 설하셨다.
맨 처음의 무명(無明)을 수행(修行)의 힘으로 제거했을 때에 오도(悟道)의 인연이 작용 한다는 것이니,
「무명(無明)이 멸하면 곧 행(行)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곧 식(識)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곧 명색(名色)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곧 육입(六入)이 멸하고, 육입이 멸하면 곧 촉(觸)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곧 수(受)가 멸하고, 수가 멸하면 곧 애(愛)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곧 취(取)가멸하고, 취가 멸하면 곧 유(有)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곧 생(生)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곧 노사(老死)의 우비고뇌(憂悲苦惱)가 멸하느니라.」(화성유품 一四八面)
고 설하셨다.
끝으로 보살(菩薩)에게는 생사의 바다를 건너는 수행(修行)으로
一. 보시 ; 남을 도와줄 것.
二. 지계 ; 도덕을 굳게 지킬 것.
三. 인욕 ; 어떤 고난도 참을 것.
四. 정진 ;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힐 것.
五. 선정 ; 一심으로 노력할 것.
六. 지혜 ; 미망(未忘)된 마음을 없이할 것.
의 여섯 가지를 들어 설하셨는데, 이것을「육바라밀(六바羅密)」이라고 한다.
바라밀이란,「건너편 언덕에 이른다.」다시 말하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三승의 대중에게 각각 사성제(四聖제)와 십이인연(十二因緣)과 육바라밀(六바羅密)을 설하시어, 대중으로 하여금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려하신 것이 곧 四十二년 동안에 설하신 여러 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으로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이로써 진실의 무상보리를 얻을 수는 없다. 진정한 정각(正覺)에 이르는 길은 한층 더 높은 교이니, 이것을「일불승도(一佛乘道)라고 하며, 법화경의 교의(敎義)가 바로 이것이다.
세존께서는 이 삼승의 교로 성문, 연각, 보살을 각각 따로 우선 괴로움의 세계에서 밖으로 이끌어내시어, 거기서 비로소 一승의 교에 태워 가지고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게 하려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三 승의 교는 一승의 교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설하신 것이 저 유명한 비유품의「三界火宅)」또는「삼차대차(三車大車)」라는 비유의 설법이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어떤 나라에 한 사람의 큰 부자가 있어, 한없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고, 어마어마하게 큰 집안에는 숱한 하인이 있었다. 또 많은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불이 일어나서 집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크게 놀란 부자는 아들들이 위태로움을 깨닫고「불이 났다 빨리 나오너라.」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아들들은 불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기뻐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불길은 차차 버져서 대들보가다 떨어지려했다. 부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을 구원해 내려고 이리 저리 궁리하다가 한 방편을 생각해냈다. 그는 아이들이 평소에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 하던 것을 생각하고,「얘들아, 너희들이 가지고 싶어 하던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가 지금 문 밖에 있다. 빨리 나와서 좋은 것을 골라가져라 우물쭈물 하다가는 못가진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들들은 앞을 다투어 대문 밖으로 뛰어 나와,「아버지, 양의 수레는 어디 있습니까, 사슴의 수레는 어디 있습니까, 소의 수레는 어디 있습니까, 어서 주십시오.」하고 수레를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불속에서 나와 안전한 곳에 이른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준 수레는 양의 수레도 아니요, 사슴의 수레도 아니요, 소의 수레도 아니요, 휘황찬란하게 온갖 보물로 장식한 아주 크고도 아름다운 흰 소가 끄는 대백우차(大白牛車)였다. 뜻밖에 생각지 않았던 좋은 수레를 얻은 아들들의 기쁨은 비할 데 없이 컸다.
이 비유의 불난 집이란, 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하는 따위의 괴로움이 가득 찬 현 세계를 지적함이요, 부자는 세존이시고 아들들은 중생을 가리킨 것이다.
세존께서는 우리 미혹한 중생을 괴로움의 세계에서 구원해 내시고자, 화재의 위험함을 알려주셨지만, 중생은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으므로, 하는 수없이
성문을 위해서는 사성제(四聖제)의 교를,
연각을 위해서는 십이인연(十二因緣)의 교를,
보살을 위해서는 육바라밀(六바羅密)의 교를 설하시어,
우선 그들로 하여금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런 다음에 다시 一승의 교로써 우리 중생을 다 함께 성불의 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양의 수레란 성문승(聲聞乘), 사슴의 수레란 연각승(緣覺乘), 소의 수레란 보살승(菩薩乘)을 비유하신 것으로서, 三승이 사람들이 각각 그 교에 의해 미혹의 세계,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왔을 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신 대백우차야말로, 일불승(一佛乘)의 교 법화경의 교인 것이다.
세존께서 출세하신 본회는 이 一불승인 법화경으로써 중생을 인도하고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었으나, 중생의 근기와 욕망이 구구하고 같지 아니하여, 一불승을 구하지도 않고 설해도 이해하지 못하는지라, 그래서 우선 성문연각 보살의 三승고로써 중생을 인도하신 것이다.
세존의 본회인 수자의(隨自意)의 교는 一불승의 법화경의 교 이외에는 없고, 三승의 교는 一불승 가운데서 꺼내어 설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三승은 방편의 교요, 오직 一승만이 진실의 교(敎)인 것이다.
이「일승은 진실이요, 삼승은 방편(一乘眞實三乘方便)」이라는 대사를 드러내 좋지 않으신 四十二년 동안의 교 그것은 방편이었고, 一승만이 진실이라고 밝히는 것을「개삼현일(開三賢一) : 三을 열어서 一을 나타낸다고 하여 법화경 전편 二十八품 중 방편품을 중심으로 한 절반 十四품을 적문법화경(迹門法華經)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시방불토(時方佛土) 가운데는 일승법(一乘法)만이 진실이요, 二승도 없고 三승도 없고 법화경 이외의 교는 모두 방편이며, 一불승인 법화경에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교임이 분명하다.
이「개삼현일(開三顯一)」을 설하신 경문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처음 三승을 설하여 중생을 인도한 연후에 오로지 대승으로써 제도하며 해탈하게 함이라」(비유품 七七面)
「여래가 방편의 힘으로 一불승」을 분별하여 三승으로 설함이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허망함이 없느니라. 다른 법이 없고 오직 一불승만이 있을 뿐이니라.」(방편품 四○面)
「모든 부처님은 방편력을 가지고 분별하여 三승을 설하심이나 오직 一불승만이 있을 뿐이라」(화성유품 一七二面)
「十방세계를 두루 찾아 구할지라도 다시 다른 법은 없으리니」(비유품 八五面)
등등, 이밖에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제七장 여래의 설법은 같은 상이며 같은 맛이다.
여래의 설법은 같은 상이며 같은 맛이니 이른 바 해탈상이며 이상(離相)이며 멸상(滅相)이니 마침내 일체 종지(種智)에 도달함이니라.(약초유품 二四面)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존의 설교에는 방편의 설법과 진실의 설법이 있는데, 아무리 방편의 교가 여러 갈래로 갈리어 있다 할지라도, 그 교화의 목적은 일관성(一貫性)이어서 一체중생으로 하여금 한 결 같이 성불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교화의 목적에서 본다면, 겉으로 보아 가지각색인 것 같아 보이는 방편의 교도, 교로서의 진정한 상(相)은 하나요. 그 맛도 한가지여서,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 미망(迷忘)을 여의고, 생사를 멸해서, 一체종지(種智)라고 하는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하건마는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듣고서 가지가지로 판단하고, 그에 따른 깨달음도 가지가지인 것은, 교로 인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과 판단과 지혜가 각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빛깔도 같고 맛도 같지만, 그 비를 받은 풀이나 나무는 각각 그 종류가 다르고 그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소나무는 푸르게 자라고, 단풍나무는 붉게 자라며, 해바라기는 크게 자라고, 채송화는 작게 자라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부처님의 평등의 말씀은 한 맛의 비와 같음이라. 중생이 성품에 따라 받아 가짐이 같지 아니함은 저 초목의 받는 바가 각기 다름과 같음이라」(약초유품 三○面)
고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같은 상이요 같은 맛이건마는 듣는 중생의 마음이 가지가지여서 각각 달리 해석하고 각각 달리 깨닫는 모양을 설하신 것이 약초유품(藥草喩品)의
「운우약초(雲雨藥草)」또는「삼초이목(三草二木)」이라는 비유의 말씀이다. 유마경(維摩經)에「부처님께서는 하나의 음성으로써 법을 설하시되 중생이 각자의 마음에 의해 각각 달리 해득한다.」
고 하신 것과 같이, 부처님의 설법은 진실로 한 상이며 한 맛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의 본회인 교가 一체중생의 성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떠한 방편의 교도 그것은 진실의 교인 법화경에서 갈려 나간 것임을 알 것이요, 한없이 번져나간 四十二년 동안의 모든 경들이 필경에는 법화경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알 것이요,「종일출다 종다귀일(從一出多 從多歸一)」의 一이야말로 다음 아닌 법화경의 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개삼현일(開三顯一)」이라는 것도 이해하게 되어 불교는 결코 산만하거나 뒤죽박죽인 것이 아니라, 정연하게 통일되어 있고 훌륭한 조직으로써 설하신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때문에 우리가 경전을 읽을 때에는 어떤 경우에라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읽을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제八장 이미 설하였고 지금도 설하며 앞으로도 설하리라.
내가 설한 경전이 한량없어 千만억이니 이미 설하였고 지금 설하며 앞으로도 설하리라 그러나 그 중에서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움 이니라. (법사품 一八五面)
七千 여권이나 되는 많은 경전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가장 뛰어난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불교를 연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맨 먼저 알고자하는 바 일 것이다.
이에 대한 세존의 대답은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멸도(滅度)하신 지 三千년이나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신도 사이에서는 아직도 확정을 보지 못한 형편이다. 참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다. 이러한 불가사의가 실제로 존재해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각 종파의 조사(祖師)들은, 자기 종파를 개창(開創)함에 있어 그 근본이 될 경전, 의거(依據)해야 할 경전, 곧 의경(依經)을 정했다. 그리하여 그 경전을 모든 불경 중에서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거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화엄종(華嚴宗)은 화엄경(華嚴經)을,
진언종(眞言宗)은 대일경(大日經)을,
정토종(淨土宗)은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천태대사(天台大師)와 일련대사(一連大師)는 다 같이 법화경(法華經)을 의경으로 하여 한 종파를 개산(開山)하였다.
이 조사들이 각자의 의경을 모든 경전 가운데서 가장 높은 경, 가장 뛰어난 경, 가장 거룩한 경이라고 선정(選定)함에는 각각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은 새삼스러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일련대사는 말하기를「세상을 보매 모두가 제각기 나도 나도 하지마는 나라의 주인은 단 한 사람뿐이다. 두 사람이라면 나라가 평온하지 않을 것이요, 한 집안에 주인이 두 사람이 있으면 그 집은 반드시 파멸할 것이다. 일체경(一切經)도 또한 이와 같지 않겠느냐. 어느 경이건 한 경만이 一체경의 대왕(大王)이실 것이련마는」(三八面)
이라고 말한 것처럼, 모두가 한 교주(敎主)께서 설하신 경전이다. 아무리 그 수가 많다고 할지라도,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거룩한 경전이 둘이고 셋이고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이 어떤 경전이건 간에 최고의 경전은 단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판 바와 같이, 각종파의 의경은 각각 다르고, 또 제각기 그 경전이 최고의 경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우리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미혹이 생겨난 근원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가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조사들의 개인적인 차이, 곧 그의 심경(心境), 환경(環境), 소원(所願), 전통(傳統), 사설(師說)등등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의경으로 정한 그 경전에는 다「이 경이 一체경 중에서 제 一이다.」하는 뜻의 문구가 있어서 이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확실히 이 두 가지가 조사들이 의경을 선택할 때에 크게 영향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의 이유는 그만두고, 둘째는 이유에 대해 좀 검토해보기로 하자. 여기서 우리는 먼저 一체의 사견(私見), 아견(我見), 선입견(先入見)을 버리고, 또 어떠한 조사, 어떠한 학자의 말일지라도 一체이에 구애되지 말고, 오직 경문에만 의하여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잃고서는 끝내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이야말로 부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가장 근본이 도는 조건이다.
이제 각 종파의 의경을 들추어 보건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어느 경이나 다「이 경이 일체경 중에서 제일이다.」하는 뜻의 구절이 있음을 본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일(一切)라는 두자의 내용이다. 이 책 첫머리에서 말한,「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뜻은 각각 다르다.」의 말씀을 미루어 생각해야 하리라. 다같이「일체」(一切)가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뜻과 그 내용은 때와 곳과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이다.
一체라고 하였을 지라도 그 一체가 세존일대(一代)五十년 동안에 설하신 모든 경전을 가리키는 가 아닌가에 따라 그 一체의 범위는 달라진다.
어느 한 경전을 중심해서 생각할 때, 그 경전을 설하신 당시를「현재」로 하고, 그 이전을「과거」로 하고, 그 이후를 「미래」라 한다면, 세존 一대의 五十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기로 구별될 것이다. 그리고 각 경전에 있는 一체라는 구절이, 과거에 설하신 경전의 一체를 말씀하신 것이거나, 또는 현재 설하고 계신 경전의 一체를 말씀하신 것이거나, 아니면 미래에 설하실 경전의 一체를 말씀하신 것이요, 一대 五十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삼시(三時)에 걸쳐서 설하신 경전 전부를 통틀어서 지적하신 一체가 아니라면 그것은 그때그때만의 一체요, 진정한 一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법화경 이외의 모든 경전에 있는 一체는 세존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삼시를 통틀어서 말씀하신 一체가 아니다. 과거에 설하신 경전의 一체이거나, 또는 과거와 현재까지의 경전의 一체일뿐, 미래의 것에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 경전이 一체경 중에서 제 一이라고 했더라도, 그것은 그 당시까지의 경전 중에서 제 一인 것이요, 세존 一대
五十년 동안의 모든 경전 중에서는 제 一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법화경에는 앞에 든 바와 같이「내가 설한 경전이 한량없어 千만억이니 이미 설하였고 지금 설하며 앞으로도 설하리라. 그러나 그 중에서 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움이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곧 세존께서 스스로 법화경이야말로 일대 五十년의 과거 현재 미래의 三시에 설하신 一체의 경전 중에서 첫째가는 묘경(妙經)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설(已設」이란, 법화경 이전에 설하신 一체의 경전을 말씀하신 것이요,「금설(今設)」이란, 방금 설하신 무량의경(無量義經)등 一체의 경전을 말씀하신 것이요,「당설(當設)」이란, 법화경 이후에 설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열반경(涅槃經)등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은 세존께서 설하신 一체의 경전 중에서 제 一가는 묘경(妙經)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법화경이야말로 一체의 경전 가운데서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거룩한 경전, 그야말로 제왕경(帝王經)의 문(文)이라고 한다.「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란, 불교에서는「초승(超勝)」이라는 말과 뜻이 같은 말인데, 높은 교가 설해 있는 경전일수록 범부에게는 믿기 어렵고 이해가 어려운 것이니, 그러므로「이 법화경이 가장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는 말씀은 곧「이 법화경이 제一이다.」하는 뜻으로 해서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친히 경전 중에서 법화경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세존 一대 五十년의 一체 경전 중에서 제 一
이라고 선언하셨는지라, 일련대사가「대저 이 법화경은 이금당(已今當)의 삼설(三設)을 구별하여 이전의 경은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 파하고, 서로 비슷한 경은 금설(今設)의 문으로써 이를 책하고 이후의 경은 당설(當設)의 문으로써 파함이니, 실로 三설은 제 一의 경이다.」
라고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하겠다.
아무튼 교상(敎相)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불교를 연구함에 있어서나, 신앙함에 있어서나, 또는 널리 포교함에 있어서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법화경인 까닭으로 세존께서는,
「내가 불도를 위하여 한량없는 국토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널리 모든 경을 설하였으나 그중에서 이 경이 제일이니라.」
(보탑품 二○三面)
하시어, 성도하신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디서 어떠한 교를 설하였을지라도 이 법화경에 미치는 경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숙왕화야, 비유하건대 일체의 냇물이나 강물이나 모든 물 가운데서 바다가 제일이듯이 이 법화경도 또한 이와 같이 모든 여래가 설한 경 가운데서 가장 깊고 큼이니라.」(약왕품 三一四面)
고 말씀하셨다.
법화경은 一체경의 근간(根幹)이니 모든 경전의 생명수이다 소승경(小乘經)이라고 일컫는 아함경(阿含經)도 법화경에 의해 정속(整束)된다면, 그 가운데 법화경의 정신이 약동하고 있어 단순한 소승의 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만일 이 깊은 경을 들으면 성문의 법을 결정해 마치느니라. 이는 모든 경의 왕이니」(법사품 一八七面)
라고 설하셨으니, 아함(阿含)이 곧 법화요, 법화가 곧 아함이라는 오묘(奧妙)한 뜻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 오묘한 뜻을 터득한다면 스스로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불교의 연구는 물론 경전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불가능하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연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해 나는 주저하지 않고「아함경과 법화경」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불교를 연구하고 불교에서 신앙을 구하는 것은 생활의 지도원리(指導原理)를 발견하고 인생행로의 광명을 찾아내기 위해서이다. 생활이란 하나는 현실적(現實的)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상적(理想的)인 것, 이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생활에 대하여 아함경은 현실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법화경은 이상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경전에 의해 생활의 지도원리를 알아야 한다. 또한 생활의 이 양면은 따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 생활과 이상 생활이 합해져서 일체(一體)가 되어야 한다. 이 현실과 이상의 생활이 합친 것을 불교에서는「연꽃이 물에 있음과 같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의미로 아함경과 법화경에서 생활의 지도원리를 발견하고 인생행로의 광명을 얻었다면 불교 연구의 목적은 우선 이루어진 셈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불교에 八만여의 법문이 있다고 하지만 그 중심은 아함경과 법화경이니 이 두 경을 제외하고는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 두 경외에 많은 경전이 있지만, 그러한 경전의 연구는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함경과 법화경을 내어놓고는 불교는 성립되지 않지만, 다른 경전이 있고 없음은 불교의 성립을 근본적으로 좌우하지는 못하리라. 불교의 연구에 뜻을 두는 사람은 특히 이 점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경전을 들추어본 사람들이 이 「아함이 곧 법화」「법화가 곧 아함」이라는 중요한 점을 잊고 있기 때문에 아함경에 설해 있는 말씀에 기울어진 사람은 아함경이야말로 세존께서 친히 설하신 것이고 법화경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여 이른바「대승은 불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가하면 또 법화경에 설해있는 말씀에 기울어진 사람은 아함경은 일상생활의 지도에 그치는 것으로서, 법화경에서 본다면 그것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 이라고 하여 헛되이「대승자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양쪽에 다 잘못이 있다. 다 같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 설법하신 참 뜻을 알고자하는 우리는 이 아함이 곧 법화요 법호가 곧 아함이라는 중요한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경전 사이에 혈맥(血脈)이 서로 통하는 연구를 하여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불교는 법화경과 아함경으로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많은 경전들이 다 필요치 않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대저 우리들의 사상과 생활은 넓은 들 가운데 외로이 서있는 단 한 그루의 큰 나무와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있는 큰 나무는 참으로 웅대하다. 그러나 아무리 웅대하다 할지라도 단 한 그루만이 외따로 서 있는 것은 도무지 풍치가 없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을 줄 것이다. 아무래도 그 웅대한 것에 풍치를 주는 무엇이 있어야 어울릴 것이다.
법화경을 웅장하게 큰 나무와 같다면, 이 거목(巨木)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여러 경전이 혹은 작은 나무가 되고 혹은 풀이 되고 혹은 돌이 되고 해서 이루어진 큰 정원 그것이 바로 불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은 다른 모든 경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와 동시에 다른 모든 경은 법화경을 떠나지 못하나. 알기 쉽게 말하면, 법화경은 다른 모든 경을 종합하여 통솔하는 경전이요, 다른 모든 경전은 법화경에 따르고 시중드는 경전이니, 이와 같이 각기 그 분수를 지킴으로써 불교는 우리에게 건전한 사상과 아름다운 진리의 생활을 하게 해 주는 것이다.
불 타(佛 陀)
제一장 모든 부터님이 세상에 나오심을 만나기가 어렵다.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함이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고 모든 박덕한 사람은 한량 업는 百千만억겁을 지나서 혹은 부처님을 친견한 자도 있고 혹은 친견하지 못한 자도 있음이라. (수량품 二五三面)
인간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지금 사라져가고 있는 것의 하나가 있다. 거룩하다고 고맙다 하는 감격해하는 마음, 감사하다는 마음이다. 사람에게 고맙다는 감격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싸움만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낮이나 밤이나 줄곧 싸우는 소리 불평 하는 소리 부르짖는 소리만 듣고 지낸다. 진실로 인생은 싸움으로 시작되어 싸움으로 끝나는 것 같은 인상이 날로 걸어가고 있음은 서글픈 일이다. 불교에서는 싸움을 아수라(阿修羅)이라고 한다. 싸움판은 바로 수라계(修羅界)인 것이다. 사람들은 한쪽으론 전쟁을 포기하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쪽으론 투쟁을 시인하고 있다 슬픈 일이지만 현사회의 실정은 이러한 착각(錯覺)을 일으키게 한다.
전쟁과 투쟁과의 사이에 과연 얼마만큼이나 차이가 있을까? 무기를 들었다는 맨손이라든가 하는 것은 표면에 나타난 아주 사소한 차이이고, 그 정신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유독 고용인과 사용인 사이 뿐 아니라. 오늘날은 현 사회 전반에 걸쳐 투쟁만능의 세상이다. 나라와 나라사이의 전쟁이 죄악이라면, 개안과 개인사이 단체와 단체사이, 사회와 사회사이의 투쟁도 무서운 죄악이다. 이와 같은 죄악의 투쟁이 일어나는 것은, 양편에다 고맙다 감사하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에서는「희유(稀有)」라는 말을 많이 쓴다. 희유란, 고맙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서, 드물게 있는 일이니 고맙고, 고마운 일이니 드문 것이다. 일련대사는「받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서 어찌 헛되이 할 것 이뇨.」하였는데, 사람으로 태어나고 부처님을 만나서 법을 듣는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고마운 일이니,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덕이 없고 업이 무거운 사람은 百千만억겁(劫 )이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부처님을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우담바라(優曇바羅)의 꽃을 보는 것보다도, 외눈박이 거북이가 물에 떠 있는 나무 구멍을 마나는 것보다도 더 희귀하고 고마운 일로서,
경전에「부처님을 만나기가 어려움이 우담바라의 꽃과 같으며, 또는 외눈의 거북이가 바다에 뜬 나무 구멍을 만나는 것과 같나이다.」라고 하였고,
또「세존은 심히 희유하심이라. 오래고 먼 세월에는 한 번 나타나셨도다.」(화성유품 一四一面)라고 하였다.
참으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시는 것은 아주 오랜 동안에 한번 있는 매우 드문 일이다.
우담바라화(優曇바羅華)는 서응화(瑞應華 또는 靈瑞華))라고 번역하는데, 이 꽃은 三千년에 한번 핀다고 하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는 전조(前兆)라고 한다. 외눈의 거북이 바다에 뜬 나무....라고 하는 것은, 바다 밑바닥에 사는 외눈의 거북이, 햇빛과 따뜻한 것이 그리워서 千 년에 한번 물위에 올라왔을 때, 마침 그 곳을 흐르고 있는 전단목(栴檀木)의 구멍에 들어가 앉아 햇볕을 쬠을 말한 것이다. 千년에 한번 나오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인데, 마침 그때 거기에 나무가 떠있기는 더욱 어렵고, 떠있는 나무를 만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희귀한 전단목이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며, 또 설혹 전단목이라 하더라도 그 나무에 구멍이 있기를 어떻게 바라랴. 그 위에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니 그야말로 전연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우담바라 꽃이며 거북의 뜬 나무는 한없이 고마운 것을 비유한 것으로서, 이 비유로써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을 만나기가 얼마나 드문 일이며 고마운 일인가를 말한 것이다. 이처럼 희유한 부처님의 출세를 만나 그 교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는 이 비유로 부처님을 만나 뵙기가 어려움을 누누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도 또한 부처님을 만나 뵙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일로서, 일련대사는「땅에 바늘을 세워 놓고 대범천궁(大梵天宮)에서 실을 늘어뜨려서 실수 없이 실을 바늘구멍에 꿸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인생을 가벼이 여기거나 소홀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희유한 인생으로 태어난 고마움에 감격하는 데에 인생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요, 따라서 이 희유한 인생을 취생몽사(醉生夢死) -아무 뜻도 없이 흐리멍덩하게 마쳐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도 하게 될 것이다.
유교(儒敎)에서「하늘과 땅 사이 만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 고 한 것도 그러한 사상에서 나온 말이요, 불교에서 수유(須臾)의 생명의 존귀함 또는 일념돈오(一念頓悟)를 자주 설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부처님을 뵙게 된 것을 감격하고 감사하며, 불법을 만나 듣게 된 것을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 곧 불교 신앙의 출발점인 것이다.
제 二장 나는 이 여래다.
나는 이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다. (약초유품 二三面)
이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의 열 가지를 부처님의 십호(十號)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여러 가지 높은신 덕을 칭송하여 붙인 부처님의 칭호(稱號)이다.
첫째의「여래(如來)란,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라는 인도 말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여(如)는 진여(眞如) 또는 깨달음이니, 그 진여의 세계에서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인간 세계에 탄생해 오신 분이란 뜻이다. 부처님의 칭호로서는 세존(世尊)의 명호와 함께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불리어지는 명호(名號)이다.
원래 다타아가도는 다타(多陀)와 아가도(阿伽度)의 둘이 합쳐진 것인데, 아가도라는 말 가운데 갔다(去)와 온다( ) 의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이 글자의 뜻에 따라 다타아가도를 번역한다면, 여거(如去)와 여래(如來), 다시 말하면 진여의 세계로 가고 진여의 세계에서 온다는 두 가지 뜻을 한데 합친 말이라 하겠다. 또한 이 말은「항상 여기 있다」라는 뜻도 된다.
둘째의「응공(應供)」이란, 공양을 받을 분이다. 공양을 받으셔야 할 분이다. 하는 이니,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으실만한 높은 덕이 있으시다는 말이다.
셋째의「정변지(正徧知)」란, 부처님의 정각(正覺)의 지혜는 바르고 널리 퍼져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찬탄한 것으로서, 부처님은 아뇩다라 삼막삼보리의 지혜를 갖추신 분인 것이다.
넷째의「명행족(明行足)」이란, 과거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숙명통(宿明通), 현재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천안통(天眼通), 미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누진통(漏盡通)의 삼명(三明)에 통달한 힘을 갖추시어 이로 말미암아 행하시는 행동이 바른 분이라는 뜻이다.
다섯째의「선서(善逝)」란, 무명(無明)과 번뇌(煩惱)를 끊고 능히 깨달음의 세계 진여의 세계로 들어가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여섯째의「세간해(世間解)」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에 걸치어 모든 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일곱째「무상사(無上士)란,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높으신 분이니, 그 위에 다시없는(無上) 대인(大人), 대사(大士), 성인(聖人)이시라는 뜻이다.
여덟째「조어장부(調御丈夫)」란, 말이나 소나 코끼리를 길들이는 조어사(調御士)에 비유해서,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어두운 중생이라도 잘 교화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아홉째의「천인사(天人師)」란, 부처님께서는 모든 천인(天人)과 인간을 가르치시는 스승이시라는 뜻이다.
열째의「불세존(佛世尊)이란, 부처님은 깨달은 분(覺者)이시니, 세상에서 존경해야 할 것이며, 또 존경을 받으셔야 할 성인이라는 뜻이다. 이 十호는 어느 것이나 다 부처님의 덕을 찬탄한 칭호이니 그 하나하나가 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 베푸시는 자비를 각각 그 형태에 따라 붙인 칭호라 하겠다.
세존께서는
「나는 법왕이라는 법에 자재하니 중생을 안온하게 하고자 세상에 나옴이니라.」(비유품 八七面) 고 하셨고,
또 그 중생을 제도하심에 있어서,「나는 이 일체를 아는 자이며 일체를 보는 자이며 도를 아는 자이며 도를 여는 자이며 도를 설하는 자이니라.」(약초유품 一一面)고 당당히 선언하셨다.
「일체지자(一切智者)란, 모든 것에 통달(通達)하는 일체지(一切智), 도종지(道種智),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하는 세 가지 지혜를 다 갖춘 대지혜자(大智慧者)이고,「일체견자(一切見者)」란, 육안(肉眼 - 人問의 눈), 천안(天眼 - 天人의 눈), 법안(法眼 -二乘의 눈), 혜안(慧眼 -보살의 눈 ), 불안(佛眼 - 부처님의 눈)의 다섯 가지 눈을 갖추어 가져 모든 것을 다 올바르게 보는 대식견자(大識見者)이고,「지도자(智道者)」「개도자(開道者)」「설도자(說道者)」란 미망(迷妄)을 떠나서 깨달음에 들어가는 도를 마음으로 알고(知道), 몸으로써 열고(開道), 입으로써 설하여(說道) 중생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복덕이 구족하시어 인간과 천인에게 존경받는「양족존(兩足尊)」이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시는 것은 마치 큰 구름이 패연하게 비를 내리어, 거의 말라죽게 된 풀과 나무를 적시어 깨어나게 함과 같이, 一체중생을 구원하시어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여기 말한 중생이 얻는 즐거움이란, 모든 세간과 모든 출세간에 다 미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중생이 제도되는 모습을 부처님께서는「나는 여래양족존(兩足尊)이라 세간에 출현함이 마치 큰 구름과 같아서 메마른 일체중생을 충족케 하며 윤택케 하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게 하며 안온함과 세간락과 열반락을 얻게 하노라」(약초유품 二七面 ) 고 하셨다.
통틀어 인간의 괴로움이라 하면, 그것은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마음의 고통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양면의 쾌락을 다 만족시키고자 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불교에서는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쾌락을「세간락(世間樂)이라 하고, 정신적인 마음의 쾌락을 열반락(涅槃樂)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이 두 가지 소원을 들어 주시려고 출세하셨으니, 우리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아간다면, 곧 이 두 가지 소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앞의 것은 현재를 중심으로 한 생활의 만족이요, 뒤의 것은 미래를 중심으로 한 성불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법화경 신앙의 공덕을「현세에서 편안하고 후생에는 좋은 곳에 난다」(약초유품 二四面) 고 하셨다.
확실한 법화경 신앙의 공덕은 현세와 내세에 다 미치는 것이다.
제三장 그 몸이 있지도 아니하며 또한 없지도 아니하다.
그 몸이 있지도 아니하며 또한 없지도 아니하며 인(因)도 아니요 연(緣)도 아니며 나도 아니며 너도 아니며 모나지도 않고 둥글지도 아니하며 짧거나 길지도 아니하며 나오지도 아니하며 숨지도 아니하며 생하지도 멸하지도 아니하며 만드는 것도 아니며 일으키는 것도 아니며 들게 되는 것도 아니며 앉는 것도 아니며 누운 것도 아니며 다니는 것도 머무는 것도 아니며 움직임도 아니며 구르는 것도 아니며 한가함도 고요함도 아니며 앞으로 가는 것도 아니며 머물러서는 것도 아니며 편안하지도 위태롭지도 아니하며 옳은 것도 아니며 옳지 않은 것도 아니며 얻지도 잃지도 아니하며 저것도 아니며 이것도 아니며 떠나지도 오지도 아니하며 푸르지도 않고 누르지도 않고 빨갛지도 않고 희지도 아니하며 붉지도 아니하며 보랏빛이나 가지가지의 빛깔도 아님이라. (무량의경 덕행품 三六七面)
부처님의 묘하신 상(相 -모습 )은 존엄(尊嚴)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우리들이 상상할 수도 없고 말로 형용할 수도 없고 붓으로 기록할 수도 없지만, 옛날부터 법부와 다른 점「삼십이상(三十二相)」을 들었고, 다시 세밀하게「팔십종호(八十種好)」를 말하기도 한다. 얼굴모습을 상호(相好)라고 하는 것은 이 삼십이상의 상(相)과 팔십종호의 호(好)의 두자를 따서 합친 것이다.
팔십종호는 너무 번거로워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 三十二상만을 적어 본다면, 경전에 따라 한둘 차이는 있지만 대강 다음과 같다.
족안평상(足安平相), 족하천폭윤상(足下千輻輪相), 수지섬장상(手指纖長相), 수족유연상(手足柔軟相), 수족만망상(手足縵網想), 족근만족상(足근滿足相), 족부고호상(足趺高好相), 천여녹왕상(천如鹿王相), 정립수마슬상(正立手摩膝相), 음마장상(陰馬藏相), 신종광상(身綜廣相), 모공생청색상(毛孔生淸色相), 신모상미상(身毛上靡相), 신금색상(身金色相), 월광일심상(圓光一尋相), 피부세연상(皮膚細軟相), 칠처평만상(七處平滿相), 양액만상(兩腋滿相), 신여사자상(身如師子相), 신단직상(身당直相), 견원만상(肩圓滿相), 사십치구족상(四十齒具足相), 치백제밀상(齒白濟密相), 치아백정상(齒牙白淨相), 협여사자상(頰如師子相), 설상득상미상(舌上得上味相), 광장설상(廣長舌相), 범음심원상(梵音深遠相), 안색여금정상(眼色如金精相), 안첩여우왕상(眼睫如牛王相),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정상육계상(頂上肉髻相).
용녀(龍女)의 찬불게(讚佛偈)에
「미묘하고 깨끗한 법신(法身)三十二상을 다 갖추고 八十종호로써 법신을 장엄하이니」(제바달다품 二一一面) 라고 한 것과 같이, 이 三十二상과 八十종호로 존귀한 법신의 몸을 갖추신 것이 부처님의 묘상이므로, 그것은 도저히 입이나 붓으로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모습인 것이다.
이와 묘한 상은 깊은 지혜, 무한한 자비, 넓고 큰 공덕의 결과이고, 또 그 하나하나의 상은 지혜며 자비며 공덕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컨대, 미간(眉間)의 백호상(白毫相)은 때로 광명을 놓으사 동방의 세계를 비추시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무상정변지(無上正遍知)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희유한 묘상이므로 용이하게 말할 수 없지만, 묘장엄왕(妙莊嚴王)은
「여래는 심히 희유하심이라. 공덕과 지혜를 가지신 까닭에 머리 위의 육계에서 광명을 놓으사 밝히 시도다. 그 눈은 길고 넓으시며 감청색이고, 미간의 백호상은 희기가 구슬이 모여 이룩된 달과 같으며 이는 빽빽하며 항상 광명이 있고 입술 빛은 붉어서 좋음이 빈바라와 같음이라」(묘장엄왕품 三五一面)
고 찬탄하여, 육계, 백호, 눈, 이, 입술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가를 표현하였다.
부처님의 모습을 이렇게 三十二상과 八十종호로써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대충 말한 것이요,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더할 수 없이 묘하신 세존의 상은 이 三十二상이나 八十종호로써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부처님의 묘상은 진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경전에는 비(非)....... 이렇게 부정(否定)하는 글자를 연이어 써서 모든 것을 부정한다.
모든 것을 다 부정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無)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물론 무가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나면 그 부정의 밑바닥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솟아날 것이다 그것은 절대 (絶對)이다. 절대는 생각을 초월하고 글을 초월한 것이다. 세존의 묘상은 절대이어서 인간이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비 비 비....라 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리하여 그 밑바닥에서 생겨나는 절묘한 상을 상상해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아름다운 뛰어난 미인을 대한다면, 문인(文人)이나 묵객(墨客)은 감히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만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절세(絶世)의 미인이니 경국(傾國)의 미인이니 하는 미인은 도저히 그 미(美貌)를 다 말로나 붓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피부의 빛깔 하나만 하더라도 흰가 하면 희지 않다. 붉은가 하면 붉지도 않다. 그럼 검은가 하면 검은 것도 아니다. 희지도 붉지도 검지도 않으면 도대체 무슨 빛깔인가? 그것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좋은 빛깔이라고 그저 찬탄할 뿐이다. 흰빛도 부정하고 붉은 빛도 부정하고 검은 빛도 부정하고 모든 빛깔을 다 부정하지만, 그 부정하는 가운데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묘한 빛깔이 크게 떠오르는 것이다. 눈썹모양, 눈매, 코, 입모습 등도 마찬가지다. 그 모양을 어떻다고 규정지어 아름다움을 표명할 수는 없다. 그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양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세존의 묘상도 절대의 아름다움, 절대의 거룩함, 절대의 자비로움을 갖추고 계시기 때문에, 三十二상이나 八十종호로서는 그 대강은 표명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세존의 모습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
제 四장 내가 본래 서원을 세웠다.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나와 같이 평등하여 다름없게 하려 함이라. 내가 옛적에 소원한 바와 같이 이미 이제는 만족함이니, 일체중생을 교호하여 다 불도에 들게 함이라.
(방편품 四四面)
세존께서는 이 세상에 출세하신 목적은 一체 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시는데 있다. 그러나 중생이 가지고 있는 괴로움도 열사람이면 열사람이 다 다르고 또 얻고자하는 즐거움도 백사람이면 백사람이 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남녀, 노소, 지위, 신분, 환경 등등에 따라 각각 다른 가지가지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시고 소원을 풀어 주시고자 가지가지의 교를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출세하신 본회(本懷)나 목적은, 각인각색의 괴로움을 개별적(個別的)으로 하나 제거해 주시고 각인각색의 소원을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이루어 주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괴로움을 제거해 주시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소원을 주시어 진정한 즐거움의 경계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세존의「본서원(本誓願)」이라고 하는데 세존께서는「모든 부처님의 본래 서원이 내가 행한 바의 불도를 널리 중생으로 하여금 또한 같이 얻게 하고자 함이니라.」(방편품 五○面)
고 하셨다.
곧 수행해서 얻으신 불도를 一체 중생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다 얻게 하시는 것이 부터님의 본래의 서원이신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 본서원을 이루시고자 四十二년 동안이나 여러 가지로 방편으로써 중생을 인도하셨고 법화경에 이르러 비로소 一채 중생이 성불하는 큰 도를 밝히어 설하셨다.
그리하여 중생을 다 불도에 들게 하시어 부처님 자신의 본서원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셨다. 이러므로 법화경이야 말로 세존께서 출세하신 본회(本懷)의 경이 되는 것이다.
제五장 매양 스스로 이 같은 생각을 한다.
매양 스스로 이 같은 생각을 하되 어떻게 하여서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어 속히 불신(佛身)을 이룩하게 할까 하노라. (여래수량품 二五七面 )
부처님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은 본서원(本誓願)을 근본으로 하여, 전후 五十년의 교화 설법을 하신 것이므로, 때와 곳과 사람에 따라 설법의 방법과 그 내용에 다른 점이 있다 하더라도 설법하신 그 가운데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변함이 없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불도에 들어오게 해서 하루라도 빨리 성불의 대사를 이룩하게 해야겠다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깊으신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매양 스스로 이 같은 생각을 하되 어떻게 하여서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어 속히 불신을 이루게 할까 하노라.」하신 말씀을「매자(每自)의 비원(悲願)」이라고 하여 세존의 무궁한 큰 자비를 말씀한 오묘한 글이다.
많은 경전 가운데는 어디나 많은 부처님 많은 보살들의 자비가 설해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마흔 여덟 가지 서원(四十八願),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열두 가지 대원(十二大願)과 같은 것이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보살 중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일곱 가지 재난(七難), 세 가지 해독(三毒), 두 가지 요구(二求)에 대한 공덕은 널리 신앙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공덕들도 거룩한 것이지만, 세존의 이 매자의 비원에 비하면 문제가 안 된다. 경전에는 세존의 五백 가지의 대원도 설해 있지만 五백이건 千백이건,「매양 스스로 이 같은 생각을 하되...」하시어, 어떻게 하면 일체중생을 불도로 이끌어서 성불케 할 수 있을까 하시고, 낮이나 밤이나 항상 중생을 구원하시는데 마음을 쓰시어 잠시도수지 않으신 매자의 대자대비를 생각할 때에 참으로 존귀하기 한이 없고 거룩하기 그지 없다. 모든 경전에 설해 있는 모든 부처님 모든 보살의 자비는 세존의 이 매자의 비원의 일부분을 잠시 그러한 형태로 나타내 보이신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세존의 자비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법부의 습성(習性)으로서, 조그만 친절이라든가, 약간의 사랑, 가령 아이들이 이웃 사람에게서 과일이라도 받았을 때에는 몹시 기뻐하지만, 끊임없는 사랑, 가령 부모의 무한한 사랑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그 사랑에 대해서는 감사하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 쉬운 것과 같이 또는 전등의 빛이나 난로의 따뜻함에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태양의 빛이나 열의 고마움에 대해서는 뜻밖에 무관심한 것과 같이, 아미타불의 四十八원이나 약사여래의 十二대원, 관세음보살의 七난 三독 二구는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세존의 이 무한한 대자, 무궁한 대비에 대해서는 감격하지 못하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이러한 그릇된 생각으로 해서, 불교 신앙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이 문란하여지는 것이다. 뜻있는 불자는 깊이 유의해야 할 일이다.
일련대사는「저물어가는 허공의 구름과 먼동이 트는 새벽 달빛조차도 마음을 나타내는 듯하거늘 무슨 일을 하든지 어느 때라도 후세를 생각하라. 꽃 피는 봄날이나 눈 내리는 아침에도 이를 생각할 것이며, 거센 바람이 불거나 구름이 이는 저녁에도 잠시도 잊어버리지 말라. 나오는 숨이 들어오는 숨을 기다리지 않는 도다. 어느 때인들「매자작시념(每自作是念)」(수량품)의 비원을 잊으리오. 어느 날인들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방편품)의 경을 가지지 않으리오.」라고 가르치고 있다.
제六장 이 三계는 다 내가 둔 바이다.
이三계는 다 내가 둔 바이니 그 가운데 중생이 다 나의 아들이라 지금 이곳에 모든 환난이 많음이나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능히 구호함이니라.(비유품 八四面 )
이와 같이 무궁한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해 주시는 세존의 큰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
진실로 사대성문(四大聲聞)의 가섭(迦葉)존자, 수보리(須菩리)존자, 가전연(迦전)존자, 목련(目蓮)존자들이,
「세존은 큰 은혜이시니 우리들을 불쌍히 생각하시어 희유한 일로 교화하사 이익 되게 하시니, 한량없는 억겁에들 누가 능히 갚으리오. 수족으로 받들고 머리 숙여 예배하고 공경하며 일체를 공양할지라도 능히 다 갚지 못하오리다.」(신해품 一一○面)
라고 한 것과 같이, 부처님의 큰 은혜는 한량없는 오랜 세월을 두고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스러지도록 받들지라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옛날부터 세존께서는 중생을 건지시기 위해「사바세계를 내왕하시기 八千번」이라고 일러오지만, 八千번은 고사하고 그 수는 만번 十만번 그 끝이 없을 것이다.
「내가 석가여래를 뵈오니 한량없는 겁에 어려운 일을 행하시어 공을 쌓으시고 덕을 쌓아서 보살도를 구하시되 일찍이 그 침이 없음이라. 중생을 위하는 고로」(제바품 二一○面)
라고 한 것과 같이. 전 세계의 모든 산천과 국토에 비록 겨자씨만한 작은 땅이라도 세존께서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 심혈(心血)을 기울이시어 보살도(菩薩道)를 수행하신 곳 아닌 데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세존의 자비를 활동은,「부처님의 일을 하되 일찍이 잠시도 쉬지 아니하느니라.」(수량품 三五二面)
한 것과 같이 처음이 없는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오늘부터 끝이 없는 미래까지,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려는 세존의 자비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 잠시도 수지 않으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려는 세존의 자비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룩하고 큰 은혜이신 세존과 우리들 중생은 저 까마득하고 오랜 옛날부터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세 가닥의 깊은 인연관계가 맺어져 있으니, 이것을 세존의「주(主)사(師)
친(親)의 삼덕(三德)」이라고 한다. 세존은 우리 주이시고 스승이시고 어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장(章) 첫머리에 든 비유품의 한 구절은 이 깊은 뜻을 말씀하신「삼덕유연(三德有緣)의 문(文)」이라고 하는데,「삼계(三界)란「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곧 물욕(物慾)에 지배되는데 욕계, 물욕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육체에 좌우되는 색계, 그리고 육체의 지배에서도 완전히 해방된 무색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에 구애할 필요 없이 미혹한 중생의 一반세계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아유(我有)」란 이 세계는 다 세존이 소유임을 말씀하시어 주인의 덕(主德)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의 아들(아子)」이란 중생을 다 세존의 사랑하시는 아들임을 말씀하시어 어버이의 덕(父德)을 말씀하신 것이다.
「구호(救護)」란 불난 집(火宅)와 같은 괴로운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말씀하시어 스승의 덕(師德)을 이름이니, 一체중생은 세존의 이 세 가지 덕에 쌓여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일련대사는 말하기를「대저 一체중생이 존경할 바가 셋이 있으니, 이른바 주(主) 사(師) 친(親)이 이것이며 - 」라고 했으니, 주덕(主德)은 「권위(權威)」요, 사덕(師德)은 「교화(敎化)」,「친덕(親德)」은「자애(慈愛)」로서, 세존의 이 세 가지에 둘러싸여야만 비로소 사람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그 중의 어느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자녀를 기르는 데 있어서 권위와 교화와 자애의 세 가지가 따르지 아니하면 결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없다. 잘못을 타이를 때에는 권위로써 하고, 인도할 때에는 교화를 중심으로 하고, 친근(親近)할 때에는 자애로써 한다. 교화와 자애를 잊고 다만 꾸짖기만 해서는 자여의 마음은 비뚤어지기 쉽다. 자애와 권위가 없이 다만 가르치기만 해서는 교화는 철저하게 되지 않는다. 권위와 교화가 없이 다만 귀여워만 한다면 그것은 인간 본능의 애착인 것이다. 다만 이 세 가지가 어떠한 정도로 어떠한 비례로 작용(作用)해야 할 것인가는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오늘날 사회가 혼란해지고 세상의 질서가 어지러워진 가장 큰 원인은 위에는 주 사 친의 세 가지 덕을 한 몸에 갖춘 위대한 인격자가 없고 아래에는 권이를 두려워하고 교화를 존경하고 자애를 친근히 여기는 정직하고 순진한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법률을 엄하게 세울지라도, 아무리 규칙을 치밀하게 정할지라도, 위아래에 그러한 결함이 있고서는 세상은 절대로 화목하게 질서 있게 되지 않을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덕을 한 몸에 갖추시고 중생을 제도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시다. 불교의 많은 경전에 여러 부처님의 이름이 설해 있지만 이렇게 세 가지의 덕을 가지신 부처님과 우리들과 서로 인연이 있음(三德有緣)을 선언하신 부처님은 오직 세존 한 분 뿐이시다. 일련대사는「석가불만이 홀로 주 사 친의 삼의(三儀)를 갖추고 계시다.」고 하였다.
제 七 장 지금까지 겨우 四十여년이 지났다.
여래께서 태자로 계실 때 석씨(釋氏) 궁성을 나오시어 가야성을 떠나 멀지 않은 도량에 앉으사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룩하셨나이다. 이때로부터 지금까지 겨우 四十여년이 지났거늘 세존께서는 어찌 이 짧은 시간에 큰 불사(佛事)를 하셨나이까.(종지용출품 二四五面)
이와 같이 세 가지 덕으로 인연이 깊으신 세존께서는 중생 제도의 손길을 펴심에 있어서 부처님으로서의 신분(身分)을 두 방면으로 밝히셨으니, 하나는 인도에 탄생하신, 사실상(史實上)으로 이 세상에 몸을 나타내신 부처님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적(信仰的)으로 영원불멸의 본지(本旨) - 근본을 밝히신 부처님이다. 앞의 것을 「적불(赤韍)」이라 하고, 뒤의 것을 「본불(本佛)」이라 한다.
적불로서의 세존은 지금으로부터 二千五百 여 년 전에 인도의 석씨(釋氏 - 석가종족)의 궁성(宮城)인 가비라위성(迦毗羅衛城)의 성주(城主) 정반대왕(淨飯大王)의 태자 실달다(悉達多)로 태어나시었다. 열아홉 살 때 법을 구하여 대궐을 떠나시어 널리 당시의 바라문(婆羅文)의 대가며 학자들을 찾아가 수행하셨다. 그러나 十二년의 오랜 동안의 고행도 아무런 보람이 없어 마침내 혼자 깨달으실 것을 굳게 결심하시고 마하타국(摩아陀國)의 서울 가야성(伽倻城) 가까이 있는 이련선하(이連禪河). 기슭 훗날에 보리수라고 말하게 된 필파수(畢波樹) 아래에 법좌(法座)를 잡으시었다. 三十살 때 크게 깨달으시어 불타의 자리에 오르셨다. 라고 한다. 세존의 탄생, 출가, 성도 등의 연대(年代)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옛날부터의 통성(通說)에 좇기로 한다.
법화경이 이외의 경전에서의 세존은, 설하신 바가 다소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것이나 다 위에 말한 역사상의 부처님이시니,
「내가 일찍이 도량 보리수 밑에 앉아서 六년만에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룩하여 얻었느니라.」(무량의경 三七七面)
고 하신 것과 같이, 보리수 아래에서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신 부처님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법화경도 앞의 부분에서는 다른 경전들과 같이 그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 四十여년 전에 정각(正覺)을 여신 부처님으로 되어 있다.
법화경은 七권 또는 八권 三十八품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四十품을 「적문법화경(迹門法華經)」이라고 하고 뒤의 四十품을 본문법화경(本門法華經)이라고 한다. 적불의 자격으로 설하신 것이 적문 법화경이요, 본불의 자격으로 설하신 것이 본문법화경이다.
이장(章) 첫머리에든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의 구절은 미륵보상(彌勒菩薩)의 말씀인데, 이것은 사실(史實)이므로 부인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과연 四十여년 전에 보리수 아래 도량에서 비로소 정각을 여신 부처님이실까? 여기에 불교의 큰 문제가 잠복해 있다. 이 큰 문제에 대답하시기 위해, 세존께서는 친히 다음 장과 같은 대사를 선언하시게 되었으니 이것이 본불의 선언이다.
제 八장 나는 실로 성불해 옴이 한량없고 가이 없는 百千만억 나타유겁이니라.
지금의 석가모니불은 석씨의 궁전을 나와 가야성을 떠나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함이라. 그러나 선남자야, 나는 실로 성불해 옴이 한량없고 가이 없는 百千만억 나유타겁이니라.(여래수량품 三五○面)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존께서는 가비라위성에서 실달태자(悉達太子)로 태어나시어 도를 구해 十九살 때 출가, 三十살에 성도하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므로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법화경도 절반을 지나 제 十六품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이르리 세존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나 석가모니불을 지금부터 四十여년 전에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으로 성도한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내가 성불해 음으로부터 지낸 바의 모든 겁수는 한량이 없는 百千만억 아승지라.」(여래수량품 三五六面) 하시어 수없이 오랜 세월을 지나 오셨다고,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대사를 선언하셨다. 진실로 세존께서 성도하신 것은 「무량무변 백천 만억 나유타겁」이전 태초(太初)의 일이셨다.
「나유타(那由陀)란 백억 또는 千 억이라는 뜻이요 「아승지(阿僧祗)」란 한량없다는 뜻으로, 다 엄청나게 많은 수를 말하는 것이다. 「겁(劫은 겁파(劫波)라고 하여, 불교에서 해수를 계산하는 기준인데, 우리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없이 오랜 시간이다.「인수겁(人壽劫)」,「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등 여러 가지 비유로써 설해 있는데, 여기 인수 겁만을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의 정명(定命) 八만살에서 시작하여 百년마다 한 살씩을 감하여 정명이 열(十)살이 되면 다시 百년마다 한 살씩을 더하여 도로 八만살의 정명에 이르는 동안을 한 겁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약 一六○○만년이 된다.. 이 겁(二六○○만년)의 수가 또 무량百千만억재아승지(無量百千萬億載阿僧祗)라 하였으니 그 수는 아무도 상상 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구원무시(久遠無始)의 옛날(遠劫)」인 것이다. 이 엄청난 해수를 비유로써 말씀하신 것이 저 유명한 여래수량품의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의 비유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 구성설(構成設)의 하나에 수미산설(須彌山設)이라는 것이 있다. 세계의 한가운데 수미산(須彌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 둘레는 바다인데 수미산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섬이 하나씩 있다. 이것을 「수미(須彌)의 사주(四洲)」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그 남쪽의 섬으로서 염부제(閻浮提)라고 부른다. 이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사주(四洲)를 통틀어서 한 세계라고 한다.
이러한 세계가 千이 모인 것을 소천세계(小天世界)라 하고, 이 소千세계가 千이 모인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라 하고, 이 중천세계가 또 千이 모인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대千세계에는 소千 중千 대千의 세千이 들어 있으므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도 한다.
어떤 이가 있어, 이 三千대세계를 가루로 만들어 가지고 동으로, 동으로 나아가 五百千만억 나유타아승지의 나라를 지나가서 그 가루 하나를 떨어뜨리고, 또 五百千만억 나유타아승지의 나라를 지나가서 다시 그 가루 하나를 떨어뜨리고, 이렇게 하여 가루로 만든 三千대千세계가 다 없어졌을 때, 그 가루를 떨어뜨린 나라오 그냥 지나쳐 온 나라들을 모두 합쳐 가루를 만들어서 그 가루를 만들어서 그 가루 하나를 한 겁에 비유하여 계산한 겁의 수효보다도 세존께서 정각(正覺)을 여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이 더 오래다고 하는 것이니, 세존께서 성도하신 때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 비유는 수를 설하신 것이지만, 실은 수에 빙자하여 「비수(非數)」를 말씀한 것으로서 구원(久遠)의 옛날, 다시 말하면 「처음이 없는 처음(無始의始)」을 말씀하신 것이다. 세존께서는 다시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수명을 이룩한 것이 지금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였으며, 다시 위에서 말한 수의 곱이니라.」(여래수량품 二五二面) 하시어 구원으로부터 오늘까지보다도 오늘부터 미래의 수명이 더 길다고 하였으니, 미래도 역시「끝없는 끝(無終의 終)」에 계속되는 것이다. 세존께서 친히 머물러 계시어 영원히 멸하지 않은 (常住不 )부처님이심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을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세존의 수명을 설하신 경전은 법화경 여래수량품 이외에는 없다.
종교로서의 불교의 가장 큰 일은, 구세주이신 불타(佛陀)란 어떤 분인가 하는「불타론(佛陀論)」인데, 여기에는 부처님의 수명에 관한 문제가 중심이 된다. 만약 구세주이신 부처님이 무상(無常)이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의 모든 문제는 이 부터님의 수명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처음이 있는 것은 끝이 있고 처음이 없는 것은 끝이 없다. 부처님께서 항상 계시다면 처음이 없고 끝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 필수조건(必須條件)을 충족(充足)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여래수량품에 설해 있는 본불 세존의 수명인 것이다. 일련대사는 여래수량품으 거룩함을 「일체경(一切經)」가운데 이 수량품이 없다면 하늘에 해와 달이 없고 사람에게 혼백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나는 성불함이 심히 오래 되고 멀어서 수명이 한량없고 아승지겁에 항상 머무르며 멸하지 않느니라.」(여래수량품 二五二面)
하신 이 대선선언이 없다면, 불교는 종교로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불멸상주(不滅常住)의 부터님이시기는 하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여래는 모든 중생이 작은 법을 즐겨함은 덕이 엷고 업이 무거운 자로보고 이 사람을 위하여 내가 젊어서 출가하여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고 설하였느니라.(여래수량품 二五一面)
하신 것과 같이 이 사바세계에 탄생하시어 시성정각(始成正覺)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시성정각은 역사적 사실이므로 이것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중생이 덕은 엷고 번뇌의 업이 무거워 얕은 교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교화의 방편으로 이 같은 방법도 취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이르렀으므로 시성정각의 방편의 옷을 버리시고 구원실성(久遠實成) 본불(本佛)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이다.
제七장 혹은 자기의 몸을 설하며 혹은 다른 사람의 몸을 설한다.
혹은 자기의 몸을 설하며 혹은 다른 사람의 몸을 설하며 혹은 자기의 몸을 보이며 혹은 다른 사람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의 일을 보이며 혹은 다른 사람의 일을 보이느니라.
기 구원실성(久遠實成)인 본불께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모습을「삼륜(三輪)」의 묘화(妙化)」라고 한다. 三륜이란,「의륜(意輪)」과「구륜(口輪)과「신륜(身輪)」의 세 가지인데, 윤(輪)은「윤보(輪寶)」라 하는 것이다.
윤보란, 사천하(四天下)를 통할(統轄)하는 대왕이라고 일컫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가진 무기의 하나로서, 전륜성왕이 정의에 항거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를 토벌할 때 많은 무기 가운데서 이 윤보가 맨 먼저 나아가 높고 낮고 울퉁불퉁한 땅을 평정하세 한 다음에 왕의 수레가 나아간다는 것이다.
세존의 몸, 입, 마음(身 口 意 )의 묘화(妙化)는 사람들 마음의 악하고 추하고 삿된 모든 것을 제거하여 편안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 작용을 윤보에 비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것을 법륜(法輪)을 글린다고 하여, 이미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세존의 三륜은 우선 안으로「매자(每自)의 비원(悲願)」의 의륜(意輪)이 움직이고, 그것이 겉으로 활동을 일으켜서, 구륜(口輪)의「설법(說法)」으로 되며 신륜(身輪)의「화신(化身)이 된다.
「능히 한 말씀으로써 널리 모든 중생의 여러 가지 말에 응하며 능히 한 몸으로써 百千만억 나유타의 한량없고 수없는 항하사의 몸을 보이느라.」(무량의경 三八○面)
이라고 하신 것과 같이, 구륜은 설법의 범음(梵音)의 한 말씀이 능히 一체중생의 욕성(慾性)에 따라 八만四千의 법문(法門)이 되며, 신륜은 묘한 작용이 능히 한 몸으로써 千百만억 나유타 한량없이 많은 항하(恒河)의 로래 수효와도 같이 수없이 많은 권화(權化)의 몸을 나타내시어, 그 오묘(奧妙)한 활동은 도저히 범부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혹은 자기의 몸을 설하며 혹은 다른 사람의 몸을 설하며...」의 구절은 「수량육혹(壽量六或)의 법문(法門)」이라 하여, 세존의 구륜(口輪)과 신륜(身輪)의 오묘한 작용을 말씀하신 것으로,「설(設)」은 구륜의 작용이요,「시(示)」는 신륜의 작용이다.「자기의 몸(己身)」,「자기의 일 (己事)」은 부처님으로서의 몸과 행동하시는 일이요,「다른 사람의 몸(他身)」, 「다른사람의 일(他 事)」은 구계(九界)의 중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각각의 세계에 맞추어 나타내시는 몸과 그 행동(하시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구륜의 설법은 五千(혹은 七千여권)의 경전으로 되어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우리가 볼 수 있으나, 우리는 이 눈으로 화신(化身)을 실제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전에는 가지가지로 몸을 나타내시어 중생을 구원하시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 자세히 설해 있음을 볼 수 있다.
법화경에도「이 보살은 가지가지의 몸을 나타내시어 곳곳에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 경전을 설하느니라.」 (묘음보살품 三二五面)
고 하여 묘음보살(妙音菩薩)이 혹은 법왕(法王)혹은 제석(帝釋) 혹은 자재천(自在天)등등, 서른네 가지의 몸으로 변하여 나타남을 말했고, 또 관세음보살도 서른세 가지의 몸으로 변신하여 중생을 구원한다고 했다. 한낱 보살로서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구원(久遠)의 본불이신 세존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일련대사는「관음도 오히려 三十三신을 나타내고 묘음도 三十四신을 나타내시거늘, 교주이신 세존이야 어떤 몸으론들 못 나타내시랴.」했고, 또 「풀과 나무도 되실 수 있는 수량품의 세존이시다.」라고 했다. 대사는 또「수적(垂迹) 화광(和光)은 이것이 다 본지(本地)」라고 했다. 화광이란, 곧 「화광동진(和光同塵)」으로, 부처님께서 혁혁한 위풍(威風)을 감추시고 괴로운 이 세상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 틈에 나시어 중생을 구원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수적(垂迹)이라고 하며 화광(和光)이라고 하며 동진(同塵)이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 항상 대자대비를 우리들 위에 부어 주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제 十장 나무석가모니불
저 모든 중생이 허공 가운데서 나는 소리를 듣고 사바세계를 향하여 합장하고 이와 같이 말을 하되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하며, (여래산력품 三○一面)
이처럼 세존의 삼륜(三輪)의 묘화(妙化)는 실로 한없이 큰 것이어서, 중생이 법을 구하면 부처님께서는 불안(佛眼)으로써 그들의 신해(信解)하는 능력이 날카로운가? 둔한가? 깊은가? 옅은가? 등을 판단하시어, 그에 따라 부처님으로서 명호(名號)며 재세(在世)며 또는 멸후(滅後)의 시대가 길고 짧음 등을 가지가지로 설하시는 것이다. 곧 세존께서는 법화경에 「만일 어떤 중생이 나의 처소에 오면 나는 부처님의 눈으로써 그의 신심과 모든 근기의 날카롭고 둔함을 관해서 응하여 제도될 바를 따라 곳곳에서 스스로 설하되 이름이 같지 아니하며 연기(年紀)가 크고 작음이라.」(여래수량품품 (二五一面)
고 하셨다.
여러 경전에 나타나 있는 많은 부처님은 세존께서 중생의 근기나 욕망 등에 따라서 화의 방편으로 나타나신 것으로서, 세존이외에 따로 있는 부처님이 아니다. 아미타불도 약사여래도, 그 밖의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도 실은 세존께서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그때그때 방편으로 그러한 명호(名號)를 말씀하신 것뿐이다. 구원(久遠)의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화해 오시는 중간에는「내가 연등부터님 등을 설하였으며」(여래수량품 二五一面)
라고 하셨는데, 이「연등불 등」이라는「등」자 가운데는 일체의 다른 부처님의 이름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여래수량품에는「내가 연등부처님 등을 설하였으며」라고 있으나, 다른 경전의 세존의「본생담(本生譚)」- 전생의 이야기에 의하면, 연등불은 세존께서 과거의 세상에서 수미타(須彌陀)라고 일컫던 수행 시대(修行時代)의 스승으로서, 수미타는 신명(身命)을 다 바쳐 부터님께 공양하고자, 어떤 때는 머리털을 땅에 깔고 진흙에 엎드리어, 부터님께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진흙을 밟지 않고 지나가시기를 소원하는 등 가지가지로 수행했으므로, 그 공덕에 의하여 성불의 수기(授記)를 받아,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되셨다고 하였다. 법화경 서품(序品)에도 연등불의 이름이 나오는데 물론 세존과는 딴 부처님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연등불을 여래수량품에서는 실은 나 석가모니불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그런 이름을 내세운 것뿐이라고 밝히셨다. 따라서 앞에 말한 본생담 같은 것도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해 방편으로 설하신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로 교화된 세계 곧「화연(化緣)의 법계(法界)」에는 여래수량품에서 구원실성(久遠實成)을 선언하신 이상 본불 석가모니불 이외에 다른 부처님은 없다. 세존이야말로 하늘 높이 떠 빛나는 달이요, 보든 부처님은 지상의 모든 물에 비쳐 있는 그 달의 그림자인 것이다. 이것을「일월만영(一月滿影)」이라고 한다. 하늘의 달인 구원의 본불이신 세존을 잊고 그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물속에 비친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나 대일여래에게 넋을 읽고 있는 가 종파 사람들의 어리석음이여! 제종의 학자들은 마치 물속의 달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세존은 하늘에 높이 떠 있는 달이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일만 물에 떠있는 그림자」라는 말은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화연(化緣)의 법계(法界)에는 오직 세존 한분 뿐으로서, 불교도가 귀의(歸依)할 대상인 부처님은 이 석가세존 이외에 없다. 그 실례를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에서 보이셨으니 세존께서 일체 중생이 성불하는 최대의 양약(良藥)인 묘법연화경을 본화지용(本化地涌), 상행(上行)등 보살들에게 주실 때 법계의 중생들은 합장하고 사바세계를 향해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하고 귀명(歸命)하였다.
「이 때 十방 세계는 통달해서 걸림이 없는 한 불 국토와 같음이라.」(여래신력품 三○二面)
의 상을 나타내셨다 .이것은 바로 화연의 법계에는 부처님은 오직 세존 한 분 뿐임을 실증(實證)하신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또는 신앙적으로나 세존을 중심으로 한 불타론(佛陀論)을 확립하여 꿈에라도 다른 부처님으로써 세존을 낮추는 것과 같은 하극상(下剋上)의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되겠다.
제 十一장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심히 깊고 한량이 없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심히 깊고 한량이 없느니라. 그 지혜의 문은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움이니. (방편품 二七面)
흔히들, 종교는 사랑이다. 지혜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고 한다. 세존께서도「여래는 사랑(慈)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럴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그저 지혜는 필요치 않다고 한다면, 그 말을 그대로 동의할 수는 없다.
불교는 지혜를 존중한다. 세존의 정각(正覺)이란 큰 지혜다.
무상정변지 (無上正徧智 - 阿耨多羅三藐三菩提)인 것이다. 우리가 괴로움에서 시달리고 악으로 기울어지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악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나 악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말을 하는데 중국의 정이천(程伊川)이라는 사람은 「이(理)를 깊이 깨달으면 반드시 행하게 된다. 알고서 행하지 못하는 수는 없다. 알고서 행하지 못함은 오직 이를 앎이 옅기 때문이다. 아무리 배고플지라도 바곳(草烏 -독 있는 풀)의 뿌리는 먹지 않고, 사람은 물과 불(水火)을 밟지 않나니, 그것은 오직 위험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착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은 오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지혜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행동이 차차 나아질 것이다, 알고 있으면 행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배고플 지라도 저 맹렬한 독이 있는 풀뿌리는 먹지 않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이라도 까닭 없이 물속으로나 불 가운데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독약을 먹으면 죽고, 물에 들어가면 빠지고, 불에 들어가면 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아직 그것이 악임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란,「보통 지혜(常智)」요 아직「진실한 지혜(眞智)」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라고 했다. 희랍의 소크라테스도 이와 비슷한 「지덕합일(智德合一)」을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미망(未妄)에서 벗어나려면 절대로 지혜가 필요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미개오(轉迷開悟)」는 지혜의 작용이다. 세존의 예지(叡智)는 법계의 참 모습(眞相)이며 우주의 원리 법칙(理法)등, 모든 것을 다 깨달으신 것이다. 법화종에서는 법계의 근본묘리를「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하는데 이 묘리를 회득(會得)한다면 그것이 바로 정각(正覺)인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 일념삼천의 묘리를 깨달으시어 정각을 성취하셨으니, 그러한 지혜가 바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 무상정변지(無上正徧智)인 부처님의 지혜인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들 범부는 세존처럼 법계의 참 모습(眞相)을 알아낼 만한 예지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끝없이 미혹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세조께서는 이 가엾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친히 정가그이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곧 부처님의 정각인「열반의 철학」을 「열반의 종교」로 하여 중생에게 주신 것이다. 일련대사는 이와 같은 관계를「일념삼천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부처님께서 큰 자비를 일으키시어 묘법연화경 다섯 자를 주머니 속에 이 구슬을 넣어 말세(末世)중생의 목에다 걸어 주신다.」고 했다.
불교의 구제(救濟)라 함은 말할 것도 없이 세존의 대자대비의 품에 안기는 것이지만, 이 구제를 시궁창에 빠져있는 아이를 마른땅에 꺼내 놓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물론 구제란 세존의 자비의 손에 이끌려 나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개도자(開道者), 설도자(說道者)이신 세존에 의해 열리고 설하신 정각(正覺)으로의 길을 우리들 자신이 찾아 나아가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말하자면 앞의 것은「타력(他力)」, 뒤의 것은 「자력(自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힘이 한데 합쳐서 하나가 되었을 때, 「묘력(妙力)」에 의해 우리는 미혹에서 밝은 길을 찾아서 마침내 성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다만「사랑」이라고만 해서는 부족하다. 지혜도 극히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을「각자(覺者)」라고 번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자(聖者)이시며 각자(覺者)이시며 법왕(法王)이신 세존의 불혜(佛慧)는 우리들 범부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한없이 넓고 한없이 크고 한없이 깊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지혜는 심히 깊고 한량이 없느니라.」한 것은 「실지(實智)」이니, 지혜의 본바탕은 헤아릴 수 없이 심히 깊은 것임을 말하는 것이요, 「그 지혜의 문은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움이니라.」한 것은「권지(權智)」인, 지혜의 작용이 심히 오묘함을 말한 것이다. 실지는 세로로 한없이 깊고, 권지는 가로로 한없이 넓어서, 범부의 상상조차 허락하지 않는 부처님의 지혜인 것이다.
이 권지의 작용이 많은 교훈이 되어 경전이 되었다. 그것은 중생의 근기며 욕망이 한이 없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생각하는 바와 행동이며, 지혜 욕망은 물론, 과거의 세상에서 한 일까지도 죄다 알고 계시어, 그에 따라서 교를 설하시는 것이므로, 법화경에「세존께서는 중생이 마음 깊이 생각하는 바를 아실 것이며, 또 행할 바의 도를 아실 것이며, 또 지혜를 아시오리다. 욕망과 낙과 닦은 복과 전생에서 행한 바의 업을 세존께서는 이미 다 아시오니, 마땅히 무상 법륜을 전하옵소서.」(화성유품 一三六面)
「여래는 진실과 같이 三계의 상을 알고 보아 세상에 혹은 물러가고 혹은 나옴이 없느니라. 또는 세상에 있는 자도 멸도하는 자도 없음이나, 실(實)도 아니고 허(虛)도 아니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느니라. 三계를 三계로 보는 것과 같지도 아니함이니, 이와 같은 일을 여래는 밝게 보아서 착오가 없음이라」(여래수량품 二五二面)
고 하셨다.
이 경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터님께서는 미혹의 세계인 이 삼계(三界)의 진상을 살펴보시고서 삶과 죽음에 얽매이지 않으시어, 세상에 계시건 멸을 취하시건, 범부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실(實)이니 허(虛)니, 평등(平等)이니 차별(差別)이니 하는 어느 한쪽에 사로잡히어 중도(中道)을 잃으시는 일이 없다. 범부가 이 세상을 보고 그릇된 생각을 하는 것과는 달라서 조그만 실수도 잘못도 없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달관(達觀)하고 계시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무궁한 권지(權智)를 응용하시어 교화를 베풀어 주신다. 그 방편의 운용(運用)은 참으로 광대하여 끝이 없다. 이와 같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證得)하신 세존의 부처님의 지혜(佛慧)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하며, 부처님의 수명(佛壽)도 또한 불멸상주(不滅常住)이신, 구원(久遠)으로부터 영겁(永劫)에 까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 무한한 부처님의 지혜와 무궁한 부처님의 수명이야 말로, 본불 석가모니불을 사모하여 따르는 데 있어 가장 큰 두 가지의 일이므로, 우리는「지혜의 광명으로 한량없이 바치되 수명이 수없는 겁이니」(여래수량품 二五八面)
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제十二장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다.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어 법을 설하여 교화함이니라. 또 다른 곳 百千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나라에서도 중생을 인도하여 이익케 함이니라.(여래수량품 二五一面)
썩 오랜 옛날에 깨달음(正覺)을 여신 세존께서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하고 계실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어 법을 설하여 교화하고 있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는 무엇에다 비유해서 형용할 말조차 없을 만큼 고마우신 말씀이다. 이 경문을 읽고 감격하지 않는 사람은 법화경의 신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불교신도라고 내세울 자격조차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진실로 세존께서 교화하신 중심은 바로 사바세계의 우리들이다. 물론 많은 다른 국토(國土)에도 구제의 손길을 펴 주시지만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이 사바세계인 것이다. 지금부터 약 三千년전에 인도에 태어나신 까닭도 이 경문을 뵈오면 스스로 명백해질 것이다. 세존께서 이 사바세계에 탄생하시어 전후 四十二년 동안, 중생을 인도하시기 위해 많은 경전을 설하시고, 사람들의 근기가 차차 바로 잡혀지자 법화경을 설하시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법계(法界)의 모든 중생이 사바세계를 향해 합장하고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하고 귀명(歸命)하였다. 그것은 시방(十方)의 모든 세계가 이 사바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정토(淨土)가 도어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일체의 부처님은 석가모니불게 통일되고, 시방세계를 중심으로 해서 통일되어, 동쪽에 약사여래도 없고, 서쪽에 아미타불도 없다. 따라서 약사여래의 정토도 아미타불의 정토도 사라져버리고, 부처님은 시성정각(始成正覺) 곧 구원실성(久遠實成 )의 본불(本佛)석가모니불이시며 불국토(佛國土 )는 사바세계, 곧 상적광토(常寂光土)의 묘경(妙境)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그리어 나타낸 것이 바로「대만다라(大曼茶羅)」이다.
「모든 중생의 가지가지의 성품과 가지가지의 욕망과 가지가지의 행과 가지가지의 기억하고 생각함이 분별이 있는 고로, 모든 선근(善根)을 나게 하고자 여러 가지의 인연과 비유와 말로써 가지가지의 법을 설하며 부처님의 일을 하되 일찍이 잠시도 쉬지 아니하느니라. (수량품 二五二面 )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구원한 옛날부터 이 사바세계에 계시어 중생을 교화하셨으니, 모든 사람의 성정(性情), 욕념(欲念), 행동(行動0, 사상(思想), 판단(判斷)등이 각각 다른 대로 그에 따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말로써 교를 베푸시어 아직 이때까지 한 순간도 불사(佛事)를 수신 일이 없이 항상 여기 머물러 계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오랜 동안 미망(迷妄)에서 깨어나지 못하므로,「내가 항상 이에 머물러 있어 모든 신통력으로써 전도된 중생으로 하여금 비록 가깝게 하나 보이지 않게 하노라.」(수량품 二五六面) 하신 것과 같이 부처님의 거룩한 상은 우리들의 눈앞에는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진심으로 정직하고 성심껏 오직 법화경을 믿고 가르치신 대로 수행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일련대사가「석가모니불께서는 법화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는 입멸(入滅)을 취하시고, 이 경을 믿는 사람들 앞에는 비록 입멸하신 후라도 부처님이 계신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불멸의 본불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우리들 앞에 나타나 주실 것이다.
그것은 「중생이 이미 신복(信伏)하여 질직(質直)해서 뜻이 부드러우며 일심으로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스스로 신명을 아끼지 아니함이라. 이 때 나와 여러 중승(衆僧)이 함께 영축산에 나와서,」(여래수량품 咿唔七面)
하신 말씀으로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천태대사와 같은 이에게는「영산일회 엄연미산」이라 하여, 세존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는 광경이 세존 당시 그대로 눈앞에 나타나 보였다고 한다.
제 十三장 항상 여기에 있어 멸하지 아니한다.
이때 내가 중생에게 말하되 항상 여기에 있어 멸하지 아니하건만 방편력을 쓰는 고로 멸(滅)과 불멸(不滅)이 있음을 나타내노라. (여래수량품 二五七面)
세존께서는 무시(無始) 무종(無終) 영원히 항상 머물러 계시어 없어지지 아니하신다. 그러면 그러한 부처님께서 어찌하여 입멸(入滅) - 돌아가시는 것일까? 확실히 이것은 커다란 의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시는 것은 죽음이라고 하지 않고「열반(涅槃)」이라고 한다. 그러면 열반과 죽음과는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형상은 같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 여기서 열반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할 겨를이 없거니와, 열반과 죽음의 차이를 쉽게 말해서 열반은 생사를 내 뜻대로 자유로이 지배하는 것이요, 죽음은 그와 정반대로 생사에 내가 지배되는 것이다. 하나는 생사를 지배하고, 하나는 생사에 지배되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나시고자 할 때에 나시고, 돌아가시고자 할 때에 돌아가시는 것이니, 이것이 곧 열반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난 것은 우리가 나고 싶어서 난 것이 아니라 낳아진 것이다. 죽기 싫어도 죽지 않을 수 없어 죽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죽음이다.
세존께서도 인간 세계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오신 이상 돌아가실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라서, 역사적으로 보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니, 세존의 입멸에 대한 아무런 의문도 일어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세존의 입멸을 말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열반의 내용에 따라 해설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세존의 입멸은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니,「방편의 힘을 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방편을 쓰셨을까? 그것은 어리석은 중생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인간에게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많건 적건, 어떤 사람에게나, 사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결점이 있다. 사람에 대해서나 일에 대해서나, 또는 물건에 대해서나, 같은 것에 오랜 동안 접촉하고 있으면 무엄해져서 존중한다든가 고맙다든가 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일반의 나쁜 버릇이다. 부처님께 대해서도 항상 가까이 뵈옵고 끊임없이 교훈을 받고 있으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교만한 마음, 방자한 마음, 게으른 마음이 생겨서,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만나기 어려운 일을 만났다는 생각을 않게 된다. 그 결과는 교훈을 듣고도 착한 일에 힘쓰려는 마음이 차차 없어져서, 마침내는 악도(惡道)에 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래서는 부처님께서 항상 이 세상에 계시는 고마운 일이 인간에게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다.
「만일 여래가 항상 있어 멸하지 않음을 보게 되면, 곧 교만한 생각을 일으키어, 싫어지며 게으름을 품어서 만나기 어려운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리라.」(여래수량품 二五三面)
「모든 비구야, 여래를 얻어 보기가 어렵다고 하면 이 중생들이 이 말을 듣고 반드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서 마땅히 마음에 연모하는 생각을 품고 부처님을 갈앙해서 선근을 심으리니, 이런고로 실로 멸도하지 않건만 그러나 멸도한다고 말하느니라.」(여래수량품 二五三面)
「항상 나를 보는 까닭으로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내며 방일하고 五욕에 착해서 악도 중생에 떨어지느니라.」(여래수량품 二五九面)
등등, 그 점에 대해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언제나 늘 계시리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세존께서 갑자기 입멸하시니, 중생은 깜짝 놀라, 비로소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존경하기를 잊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깨닫고 반성하여,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은 세속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부모가 계실 때는 그 사랑에 허물없이 되어 이르는 말도 잘 듣지 않던 아들이 뜻밖에 아버지가 죽고 나면 놀라서 그제야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여래수량품에는 독약을 먹고 본심(本心)을 잃은 아들들이 뜻밖에 먼 곳에 가 있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만약 아버지가 계시면 우리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생각하시어 능히 구해서 지켜 주시련만 지금은 우리를 버리시고 먼 다른 나라에 가셔서 세상을 떠나셨도다.」(여래수량품 二五五面)
하고 슬퍼하여 마침내 본심으로 돌아갔음을 설하셨는데, 중생은 부처님의 입멸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만나기 어려움을 알고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근(善根)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므로, 불멸의 세존이시기는 하지만, 방편으로 입멸의 살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항상 계시는 몸이지만,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입멸을 보여주시는 것을「현멸(現滅)의 대자(大慈)」라고 한다. 현멸의 대자 - 중생을 위해 나타나시고 사라지시고 하는 이 자비야말로,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이다. 이러한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세존께서 입멸하신 진정한 뜻은 끝내 깨닫지 못할 것이다.
제十四장 나의 이 땅은 안온하고 천인이 항상 가득참이라.
중생이 겁이 다 하여 큰 불에 타려할 때에도 나의 이 땅은 안온하고 천인(天人)이 항상 가득 참이라. 원림과 모든 당각은 가지가지의 보배로 장엄되고 보배나무에는 꽃과 열매가 많아 중생이 즐거이 놀 곳이니라. 모든 하늘이 하늘 북을 치고 항상 여러 가지의 기악을 지으며 만다라의 꽃을 내려 부처님과 대중에게 흩음이라. 나의 정토(淨土)는 헐리지 않건만 그러나 중생은 불에 다 타니 근심과 두려움과 모든 괴로움이 이와 같이 가득 참을 봄이라.
불교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법문이 있다. 같은 것이라도 보는 사람의 과보(果報)의 차이로 그것이 달리 보인다는 것이다. 같은 물이라도 천인(天人)은 감로(甘露)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물고기는 거처하는 집으로 보고, 아귀(餓鬼)는 불로 본다고 한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상식으로는 부정(否定)할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즐거웠던 일이 어떤 때에는 괴로워 보이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싫던 것이 어떤 때에는 좋게 보이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흔히 하는 말로「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일 똑같은 것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각각 달리 느낀 경험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즐거울 때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하는 술도 슬플 때에는 같은 분량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환경과 감정에 따라서 그 결과도 또한 달리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다만, 물질적(物質的)으로나 기계적(機械的)으로나 또는 생리적(生理的)으로만 다룰 수 없는 미묘한 작용이 있다.
이러한 이치를 불교에서는「의정불이(依正不二)」라고 한다. 의(依)는「의보(依報)」정은「정보(正報)」이니 의보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말함이요, 정보란 우리들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의보와 정보와는 불이(不二)이므로, 인간에게는 인간의 환경이 있고, 보살에게는 보살의 환경이 있고, 부처님에게는 부처님의 환경이 있으며, 또한 지옥에는 지옥의 환경이 있는 것이다. 이 의정불이의 이치로, 인간의 의보로서의 이 사바와, 부처님의 의보로서의 이 사바는 다 같은 사바세계이지만, 그 양쪽에 나타나는 상에는 천양(天壤)의 차가 생기는 것이다. 이 사바세계가 좋지 못한 과보(果報)의 인간, 죄가 많은 우리들 범부에게는 괴로움과 죄악이 가득 차고 추잡하게 더럽혀진 예토(穢土)이지만, 부처님에게는 그러한 예토가 아니라 정토(淨土) 적광(寂光) 극락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악으로 더럽혀진 우리 인간에게는 이 땅은 세계 파멸의「겁화(劫火)」에 다 없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때라도 본불 세존의 불국토(佛國土)로서의 이 땅에는 아무런 이변(異變)도 없는 상적광토(常寂光土)로서의 불토(佛土)인 것이다. 예토나 정토가 다 이 사바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마경(維摩經)에는 「만일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하거든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 마음이 맑고 흐림에 따라 곧 불토도 깨끗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같은 국토(國土)라도 자기 마음이 맑고 흐림에 따라 정토로도 되고 예토로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련대사는「물어 왈(問日), 법화경의 수행은 어느 국토에서 기약할 것인가? 대답하여 왈(日), 법화경 二十八 품의 중추인 수량품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다.’고 하셨고, 또 ‘나는 항상 이곳에 머물러 있다.’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나의 이 땅에서 안온하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본지구성(本地久成)의 원불(圓佛) 곧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이 이 세계에 계시다는 것이다. 이 국토를 버리고 어느 국토를 원할 것이냐, 그러므로 법화경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 머물러 있는 곳 곧 사바세계를 정토로 생각할 것이다. 어찌 번거롭게 다른 국토를 취할 것이냐? 고 했다. 이 말에 의해 볼지라도 사바세계를 떠나 먼 곳에 확실치 않은 정토를 취할 것인가? 약사여래의 정토며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등을 설하신 것은 오직 방편으로 하신 것이요, 실재하는 정토는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에 이르러 사바세계를 중심으로 해서「통일불토(通一佛土)가 나타난 이상에는 법계(法界)는 다 사바세계이니, 우리 인류가 다 함께 법화경을 수행해서 불과(佛果)를 성취한다면 이 땅 사바는 곧 적광(寂光)의 정토로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야말로 본불 석가모니불의 청정(淸淨)한 낙토로서, 천인(天人)이 가득 차고, 원림(園林)이며 당각(當刻)들로 가지가지 보배로 장식되고, 각종 나무에는 가지가 짖어지게 맛있는 과일이 열리어, 진실로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낙토인 것이다. 천인이 쳐올리는 천고(天鼓)의 묘한 소리와, 그들이 춤추는 기악(伎樂)의 아름다움에, 게다가 하늘꽃(天華)은 부처님과 사람들 머리위에 비 오듯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본불의 불괴(不壞)의 정토가 죄 많은 우리들 범부에게는 고민이 가득 찬 예토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오로지 과보가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久遠)이신 본불의 정토는 바로 이 사바세계다. 법계(法界) 곧 사바요, 사바 곧 적광(寂光)의 이 사바세계에 계신 세존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는 변일체처(邊一切處)라고 번역한다. 흔히 이 비로자나불을 화엄경의 대불(大佛)이니 법신(法身)의 대일여래(大日如來)니 하는 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일체의 부처님을 통일하고 법계를 사바세계에 개현(開顯)하시어 이곳을 정토로 해서, 무시(無始)에서 무종(無終)까지 항상 머물러 계시는 본불 석가모니불이야말로 진정 비로자나불이다. 그 본불 세존께서 사시는 불국토인 사바세계는 우리의 눈에 비치는 그런 땅이 아니고「사덕(四德)」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사덕(四德)이란「상덕(常德)」「낙덕(樂德)」「아덕(我德)」및 정덕「(淨德)」의 네 가지인데,「사덕바라밀(四德波羅密)」을 생략한 말이다. 바라밀(波羅密)은「도피안(到彼岸)」 - 깨달음의 저편 언덕에 이른다고 번역한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상바라밀(常波羅密)이라고 함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덕을 말하는 것이요,
낙바라밀(樂波羅密)이라 함은, 괴로움을 이겨내고 생사를 초월한 극락의 덕을 말하는 것이요,
아바라밀(我波羅密 )이라 함은,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더러움을 버린 무구(無垢)의 덕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덕으로 장엄(莊嚴)된 불괴(不壞)의 정토야말로, 본불이신 세존의 불토국(佛國土)이다. 그 오묘한 상을 관보현경(觀普賢經)에는, 「석가모니불을 비로자나변일체처 라고이름 하느니라. 그 부처님의 머무른 곳을 상적광(常寂光)이라 하느니라. 상바라밀(常波羅密)에 섭성(攝成)되어 있는 곳, 아바라밀(我波羅密)에 안립(安立)되어있는 곳, 정바라밀(淨波羅密)의 유상(有相)을 멸하는 곳, 낙바라밀(樂波羅密)의 몸과 마음의 상(相)이 머무르지 않는 곳, 유(有)와 무(無)의 모든 법의 상을 보지 못하는 곳, 여적해탈(如寂解脫)과 반야바라밀이니라.」(관보현경 四二六面)
고 하셨다.
사바 곧 적광의 정토야말로, 바로 우리가 기꺼이 구해야 할 불국토요, 이밖에 불교인이 구할 정토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질없이 동쪽에서 약사여래의 정토를 찾고 서쪽에서 아미타불의 정토를 찾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법화경의 정토론(淨土論)에 자각(自覺)하지 못한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정토는 법화경에서 설하신 이 사바 곧 적광의 불국토이고 이 밖에는 단연코 없다.
교 법 (敎 法)
제一 장 이름만이라도 얻어 듣기 어렵다.
이 법화경은 한량없는 나라에서 다만 이름만이라도 얻어 듣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얻어 보고 받아 가지고 읽고 외움이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심을 만나 뵙는다는 것은 외눈의 거북이 떠 있는 나무의 구멍을 만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과보(果報)가 좋아서, 다행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때에 났다고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자리에 나아가 법문을 듣는다는 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모든 선사(先師)며 대덕(大德)들이다「받기 어려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서 어찌 헛되이 할 것이냐.」고 경계하였다.
진실로 부처님의 출세에 나서 직접 설법을 듣는 인연의 고마움과 감격은「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이 멀고 만나기가 어려우니라. 설혹 세상에 출현하셨을지라도 이 법을 설하기가 어려우며, 한량없고 수없는 겁에 이 법을 듣기도 또한 어려우며, 능히 이 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도 있기 어려우리라.」(방편품 五五面)
하신 것과 같이 희유하고도 거룩하며 고마운 일이다.
교도 많고 경전도 수 없이 많다. 물론 어느 경전이든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며 얕고 깊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가벼운 것을 버리고 무거운 것을 따르며 얕은 것을 버리고 깊은 것을 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보물산에 들어가서 하잘 것 없는 돌덩어리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결과가 될 것이다. 일련대사는 「같은 신앙을 한다면 대승(大乘), 소승(小乘), 권교(權敎), 실교(實敎) 중에서 모든 부처님이 출세하신 본의(本意)이며 중생이 성불하는 바른 길인 일승일선(一乘一善)을 믿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八만四千의 법문 중에서 부처님께서 출세하신 목적이시며 이상인 중생이 성불하는 교를 택해야 한다. 부처님의 교라고 해서 그러한 차이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가져서 구슬 대신에 돌을 가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세존께서「이같이 묘한 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때를 당하여 이를 설하시나니 우담발화 꽃이 때에 한번 피는 것과 같으니라.」(방편품 三六面)
하신 것과 같이 세존 일대의 경중의 경인 법화경을 설하심을 듣기란 三千년에 한번 피는 우담발화 꽃을 보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니 하물며 받아 가지고 읽고 외움이랴! 그것은 어떻다 말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세존께서 출세하신 때에 나지도 못했으니 물론 친히 설하시는 법문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존께서 입멸하신 지 三千년 가까운 지금 세상이 나서 책으로 되어 남아 있는 교훈을 직접 손에 들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심으로 믿어 교에 들어가서 세존께서 출세하신 본회이신 중생 서울의 경인 법화경에 귀의 할 것을 서원(誓願)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경이 많다 하더라도 출세의 본회경(本懷經)은 법화경이다. 법화경을 수행할 수 있는 기쁨은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 해서 무방할 것이다. 일련대사는「나서부터 六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을 보았으나 가장 기쁜 것은 법화경이 제일이라는 경문이다.」라고 하여 법화경을 만나 얻은 법열(法悅)은 마치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서 부모를 본 기쁨이나, 여러 해 적에게 잡혀 있던 몸이 풀려서 고향에 돌아와 처자를 만난 기쁨에 비유하였다. 이와 같이 법화경을 수행하고 신앙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며 그 이름을 듣는 것조차 희귀한 일이다.
제二장 모든 보살이 행하는 처소에 머무른다.
이 경은 본래 모든 부처님의 집으로부터 와서 일체 중생의 보리심을 일으키는 데로 가서 모든 보살이 행하는 처소에 머무느니라. (무량의경 十공덕품 三八六面)
세존께서 출세하신 본회경(本懷經)이요, 중생이 성불하는 대도인 법화경을 수행하여 몸으로써 증득하려면「내(來), 지(至), 주(住)의 삼의(三儀)」라고 하는 대의(大義)가 필요하다. 도대체 법화경은 어디서 흘러 왔을까? 다시 말해서 법화경의 유서(由緖), 계통(系統)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당신과 같이 되게 하고자 하신 세존의 대자대비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마음을 집으로 한 법화경은 사람들이 위로 보리(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구도(求道)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그에게로 흘러들어가고(來), 이 보리심을 일으키어 잠시도 잊지 않고 정각(正覺)에 이르는 보살행을 수행한다면(至), 그 장소 그 사람에게 머물러(住), 교로서의 빛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 내(來), 지(至), 주(住)의 세 가지가 하나로 되어야만 비로소 법화경의 참다운 가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세존의 대자대비의 심륜(心輪)은 일순간도 쉬지 않고 회전하고 있으며 법화경의 공덕과 교훈은 밤낮 없이 콸콸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 흐르는 길이 과연 활짝 열려 있는 것일까? 다행히 길이 열려 있더라도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흐름이 중단되어 끝내 큰 못이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발심하는 사람은 적지 않지만 한 때 타오르다가는 곧 꺼져버리는 폐단이 있다. 그래서 일련대사는「여기 법화경을 믿는 사람이 있다. 혹은 불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고 혹은 물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다. 불과 같다고 함은 들을 때는 타오르는 불길 같다가도 오래 되면 버리는 것이요 물과 같다 함은 언제나 끊임없이 믿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물과 같이 수행하는 신앙이라야만 법화경은 오래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화경이기 때문에 세존께서도 중생의 보리심(菩提心)과 그 수행이 능히 법화경을 받아 가질 수 있는가 어떤가를 확인하시기 전에는 쉽사리 설해 주시지 않는다.
그래서「이 경은 모든 부처님의 비요지장(秘要之藏)이라, 분포(分布)해서 함부로 사람에게 주지 말지니」(법사품 一八五面)
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四十二년이란 오랜 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굳게 감추어 두시고 다만 방편으로써 가지가지를 설하시어 중생의 근기를 바로잡고 욕망 등을 정리하신 다음에 비로소 법화경을 설하신 것이니 「이 법화경은 모든 여래의 제一의 설이며 모든 설법 가운데서 이것이 가장 깊으니라. 맨 끝으로 설해 줌은 저 힘이 강한 왕이 오래도록 지키던 밝은 구슬(明珠)을 이제야 주는 것과 같으니라. 문수사리야, 이 법화경은 모든 부처님 여래의 비밀히 감추어 두었던 바니 모든 경 가운데서 가장 그 위에 있음이라. 오랜 세월에 수호해서 함부로 선설하지 아니하였다가 비로소 오늘에야 너희들에게 주어 이를 널리 펴게 하노라」(안락행품 二三一面) 고 하시어「상투 속의 명주(髻中明珠)」의 비유로써 법화경의 존귀함을 밝히셨다.
사천하(四天下)를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불순한 자를 토벌하고 나서 부하 장수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에는 금, 은, 유리들의 七보와 옷, 장식품 또는 논밭, 집, 성읍(城邑)등 온갖 것을 각기 그 공에 따라 상으로 나누어 주지만 왕이 상투 속에 감추어 둔 명주(明珠)는 좀처럼 주지 않는다. 만일 이 명주를 함부로 준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므로 이 명주만은 그야말로 월등히 뛰어난 공을 세운 사람이라야 비로소 주는 것이다. 법화경은 바로 전륜성왕 상투 속의 명주이다. 그러므로 좀처럼 설하지 않은 것이다.
四十二년 동안의 교화로 중생의 근기가 겨우 바로 잡히어 세존 출세의 본회를 듣고서 이를 이해하고 환희하여 능히 수행을 감당할만하다는 것을 아신 다음에야 비로소 법화경을 설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 비장(秘藏)하신 묘경인 법화경은 오랜 동안 소중히 간직하셨다가 여기서 비로소 중생 성불의 바른 직통의 길로서 설하신 것이다.
제三장 모든 법의 실상을 능히 연구하여 다 함이라.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법의 실상을 능히 연구하여 다함이니라. 이른바 모든 법이 이와 같은 상(相)이며 이와 같은 성(性)이며, 이와 같은 체(體)며, 이와 같은 역(力)이며, 이와 같은 작(作)이며, 이와 같은 인(因)이며, 이와 같은 연(緣)이며, 이와 같은 과(果)며, 이와 같은 보(報)며, 이와 가튼 본말구경(本末究竟)등 이니라.
이렇게 설하신 법화경은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바로 세존께서 증득(證得)하신「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설하신 것이니, 다시 말하면 세존의 정각(正覺)의 지혜 위에 비친「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모든 사물(事物)의 실상 곧 참된 모습을 아는 것이 정각이요 성불이므로 법화경이야말로 중생이 성불하는 최고의 경전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제법의 실상이란 어떤 것인가? 물론 우리는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참된 진리를 분명히 밝히신 것이 유명한「십여시(十如是)」라고 하는 이「이른바 모든 법이 이와 같은 상이며 이와 같은 성이며 이와 같은 체며...」의 경문이다. 제법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 부처님이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들 인간의 하잘것없는 지혜로 그것을 구명(究明)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다. 세존 스스로도 제법의 실상은 다만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알 따름이요 중생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시어 많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지혜 있다는 사리불(舍利弗)이 설해 주시기를 거듭 간청하여도 「아서라 그만두어라. 더 말하지 말라」(방편품 三三面)
하시고 듣지 않으셨다.
그러나 설해야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지금 설할 때는 되었고 또 사라불이 재삼 간청하기도 하여 세존께서는 그 간청을 끝내 거절하고 설하지 않는다는 것도 본의가 아니고 또한 출세하신 목적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하시고 그 일단(一端)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십여시(十如是)이다. 천태대사는 이것을 의문(依文)으로 해서 모든 물질의 성립과 존재와 소멸을 말하여 이른바「일념삼천론(一念三千論)」을 제창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원래 불교는 처음 설하신 소승(小乘)이라고 하는 아함경(阿含經)에서부터 실대승(實大乘)인 마지막의 법화경의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대사(大事)를 설하셨는데 결국은「인과(因果)」라는 것을 설하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과의 이법(理法)이야말로 불교의 근본이 되는 이법이요 최고의 원리이다.
이 인과의 이법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존재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나니 우리는 이 이법에 모든 것이 성립되고 존재하고 소멸함을 인식(認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인과의 理法을 떠나서는 모든 것의 성립도 없고 존재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또 우리가 모든 것의 상(相)을 인식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 인과의 이법은 다만 자연계(自然界)를 지배할 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이 다 이 이법 아래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법은 자연계에서도 인간계에서도 범할 수 없는 철칙인 것이다.
속담에도「뿌리지 않은 씨는 나지 않는다.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둔다.」하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인(因)은 반드시 과(果)를 가져오고, 과에는 반드시 인이 있다. 그리고 인(因)과 과(果)와는 서로 응해서 콩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난다. 악한 원인(惡因)은 괴로운 결과(苦果)를 낳고 착한 원인(善因)은 즐거운 결과(樂果)를 낳는 것이 인과의 철칙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는 꼭 이 인과의 이법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결코 적지 않다. 악한 짓을 하면서도 편안하게 살고 있으며 착한 일을 하면서도 평생을 불행하게 마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과의 이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런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를 부인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六十평생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말도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다만 현재의 六十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는 구원(久遠)의 태초(太初)로부터 미래는 영겁(永劫)인 먼 훗날가지 계속되는 것이므로 현세의 六十년은 이 불멸의 생명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재인 지금을 구원의 과거와 영겁의 미래의 연결해서 그 전체를 인과의 이법으로 바라본다면 저 인과경(因果經)에「과거의 인을 알려고 한다면 현재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미래의 과를 알려고 한다면 현재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한없이 엇갈리는 인과의 관계는 부처님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얼른 보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고 다만 우연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도 부처님의 눈에는 규칙 바르게 인과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과의 이법을 부인하고「인과발무(因果發無)」를 말하는 외도(外道)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이 인과의 이법을 더 높여서 그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 곧 십여시(十如是)다. 우선 십여시가 각각 가지는 그 뜻을 대강 말해 보기로 한다.
「여시상(如是相)」이란, 외부에서 보아 분별할 수 있는 모든 본래의 형상(形相)이다,
「여시성(如是性)」이란, 속에 있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모든 것의 본래의 성질(性質)이다.
「여시체(如是體)」이란, 상(相)과 성(性)을 다 갖춘 모든 것 그 자체(自體)이다.
「여시력(如是力)」이란, 모든 것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能力)이다.
「여시작(如是作)」이란, 모든 것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작용(作用)이다.
「여시인(如是因)」이란, 모든 것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제일원인(第一原因)이다.
「여시연(如是緣)」이란, 모든 것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제이원인(第二原因)이다.
「여시과(如是果)」란, 제一원인에 의해 생기는 결과(結果)다.
「여시보(如是報)」란, 제二원인에 의해 생기는 결과이다.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이란, 상(相)에서부터 보(報)까지의 아홉 가지는 상반(相半)되는 일이 없이 서로 응해서 악(惡)의 상은 성, 체, 역, 작, 인, 연, 과, 보가 다 같이 악이요, 그와 반대로 보(報)의 선(善)은 과, 연, 인, 작, 역, 체, 성, 상이 다 같이 선이다. 처음의 상은 선이고, 마지막의 보는 악이요, 마지막의 보는 선, 처음의 상은 악이라 함과 같은 일이 절대로 없는 이치를 등(等)으로써 말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 중에서 인, 연, 과, 보의 네 가지 관계는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지만 인종(人種)도 다르고 또 같은 인종이라도 한 사람 한사람 그 용모며 체격이며 성품 등등이 각각 달라서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인(因) 곧 제一원인은 같아서 다 같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연(緣) 곧 제二원인이 가지각색으로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각각 다른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제一원인의 결과로서의 과요 낱낱이 다 다른 것은 제二원인의 결과로서의 보로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이 十여시를 대강 설명한 것이다. 모든 것의 성립도 존재도 소멸도 인과의 이법(理法)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우리가 모든 것을 보는 데도 인과의 이법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인과의 이법은 세간(世間)의 일이거나 출세간(出世間)의 일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것을 다 지배한다.
우리의 성불도 이 이치를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으니 불인(佛因)은 불과(佛果)를 낳고 불과는 불인에 의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불인과 불과를 설하시어 사람들에게 반성과 노력 참회와 정진을 권하신 것이 곧 법화경이다.
이와 같이 인(因)과 과(果)와는 서로 상응(相應)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생겨나는 것(成), 존재하는 것(住), 이(異), 멸(滅)의 어느 것이나 因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A와 B의 성 주 이 멸에 차이가 있는 것은 A B가 각각 다른 인과의 이법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이 생기는 데는 악의 十여시가 작용하고 선이 생기는 데는 선의 十여시가 작용한다. 악의 결과에 선의 인은 없고 선의 인에 악의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치를 우리 자신의 말과 행동에 비추어 반성해서 참회하고 정진하는 것이 곧 불도를 닦고 수행하는 것이다.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낳음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이 머무름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다르게 함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멸함이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능히 악법(惡法)을 낳게 하며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능히 선법(善法)을 낳게 함이라. 머무르는 것도, 다르게 되는 것도, 멸하게 되는 것도 또 다시 이와 같음이라.」(무량의경 설법품 三七四面)
하신 것은 이와 같은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제四장 여래에게 있는 일체의 법
여래에게 있는 일체의 법과 여래에게 있는 일체의 자재한 신력과 여래에게 있는 일체 비요(秘要)의 장(藏)과 여래에게 있는 일체의 심심(甚深)한 일을 다 이 경에서 펴고 보이고 나타내고 설함이니라.(여래신력품 三○二面)
이와 같은 대사(大事)를 설하신 법화경이기 때문에 이 법화경을 세존의 본회경(本懷經)이라고도 하고 모든 부처님의 비요(秘要)의 장(藏)이라고도 한다.
법화경을 펴면 세존 일대의 모든 경이 되고 다시 더 펴면 법계(法界)일체의 법문이 된다. 또 법계의 모든 교훈은 일대의 여러 경에 수록되어 있고 일대의 모든 교훈의 전부가 법화경에 포섭되어 있으므로 세존께서 가지고 계신 일체의 법 일체의 불가사의한 힘 일체의 비요의 장, 일체의 대사가 하나도 빠짐없이 이 법화경 가운데 분명히 설해 있다.
이「여래에게 있는 일체의 법」의 법문에 의해 천태대사는「오중현의(五重玄義)」라는 유명한 교의(敎義)를 설하였다. 오중현의란,「명(名), 체(體), 종(宗), 용(用), 교(敎)」의 다섯 가지 유현(幽玄)한 의의 (意義)를 말한 것이다.
「여래에게는 있는 이체의 법(如來一切 有之法)」은 명현의(名玄義)요,
「여래에게는 있는 이체의 자재한 신력(如來一切自在神力)」은 용현의(用玄義)요,
「여래에게는 있는 이체 비요의 장(如來一切秘要之藏)」은 체현의(體玄義)요,
「여래에게는 있는 이체의 심심한 일(如來一切甚深之事 )」은 종현의(宗玄義)요,
「다 이경에서 펴고 보이고 나타내고 설함(皆於此經宣示顯說)은 교현의(敎玄義)이니,
곧 세존께서 증득(證得)하신 일체의 법은 다 이 묘법연화경의 이름 아래 포섭(包攝)되었고, 세존께서 가지고 계신 불가사의한 힘은 다 이 묘법연화경에 의해 중생이 의혹을 끊고 신앙을 가지게 하는(斷疑生信)데 있고, 세존이 법화경에서 말씀하신 모든 법( 法)의 실상(實相)이야말로 모든 것의 진정한 체(體)요, 세존께서 중생이 성불하는 유일한 도(道 )라고 밝히신 불인(佛因) 불과(佛果)의 일승의 이치야말로 교라고 이름 붙은 모든 교가 종지(宗旨)로 삼고 간요(肝要)로 여기는 것이다.
이 명 체 종 용의 네 가지 대사를 빠짐없이 설하여 밝히신 교가 바로 법화경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앞서 말한「초팔제호의 묘경(超八醍醐妙經)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세존께서 본화 상행(本化上行), 무변행(無邊行), 정행(淨行) 안립행(安立行)보살 등에게 특히 말법(末法) 세상에서 법화경을 널리 펼 대도사(大導師)로 정하시고 친히 주신 대법(大法)이 바로 이 명 종 용 교의 다섯 가지 대사가 다 포함되어 있는 이 묘법연화경이다. 이것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끊어 없애는 유일한 양약(良藥)이다. 말법의 중생이 생사를 여의는 데는 이 묘법연화경 다섯 자의 양약 이외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련대사는「지금 말법에 들어오면 여경(餘經)도 법화경도 결국은 나무묘법연화경 일 뿐이다.」라고 했다. 진실로 묘법연화경을 성심으로 수행하는 것이 법화경 신앙의 생명이다. 곧 우리는 이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받아 가지고 믿음으로써 세존의 정각(正覺)의 대사를 모조리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제五장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적하다.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적하건만 바꾸어 말해서 머무르지 아니하며 순간순간에 나고 멸한다고 설하였노라.(무량의경 설법품 三七八面)
불교는 무(無)다 공(空)이다 하여 소극적이라고 비평하는 말을 곧잘 듣게 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불교는 「무아(無我)」니 「아공(我空)」이니 하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나 이것을 소극적이라고 하는 것은 당치 않은 말이다.
우리들 모두가 정말로 무아가 되고 아공이 될 수 있어야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진정한 평화와 즐거움이 올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두가 「나(我)」에 얽매이고 「사(私)」에 사로잡혀서 맹목적으로 사리(私利), 사욕(私慾)을 쫓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가 온통 싸움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존께서 이 사바에 계실 때에도 그러한 풍조(風潮)가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운한 일이지만 이것이 아마 인간 본래의 모습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교단(敎團)에 들어오려는 사람에게 대해 제일 먼저 아집(我執)을 버려야 한다고 무아(無我)를 설하셨고, 자기 자신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아공(我空)을 가르치신 것이다. 사람들이 아집을 버리고 무아가 되었을 때야말로 비로소 아름답고 즐겁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꺼리는「나」란,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에 더렵혀진「소아(小我)」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아집이 맹렬한 형세를 떨치고, 또한 「공(空)」의 사상은 원시불교(原始佛敎)가 대승불교(大乘佛敎)에로 찬란한 발전을 이룩하게 한 불교의 독자적인 위대한 사상이다. 그 내용과 조직과 체계는 불교철학(佛敎哲學)으로서 세계 사상계의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불교의「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을「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제행무상이란「고(苦)」를 말하는 것이요,
제법무아란「공(空)」을 말하는 것이요,
열반적정이란「낙(樂)」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삼법인에 따라 수행하는 불교도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소원인 괴로움을 없이하고 즐거움을 얻으려면 모름지기 몸과 마음을「공(空)」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은 불교 성립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다시 한 걸음 나아가 말한다면 공의 이치야말로 불교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제三장에서와 같이 법화경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십여시(十如是)로써 설한다. 그 십여시의 이치를 한말로 간단히 말하면「진공모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일체의 법이 공(空)함을 관하되 실상(實相)과 같이 하여 전도(顚倒)하지 말고 동(動)하지도 말며 퇴(退)치 말며 전(轉)하지도 말며 허공과 같이 해서 있을 바의 성품은 없음이니 일체의 말도 도(道)도 끊어져서 생(生)하지도 않고 나(出)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고 이름도 없고 상(相)도 없고 실로 소유(所有)도 없고 헤아림도 없고 끝도 없고 거리낌도 없고 장애도 없음이라. (안락행품 二二二面)
하신 말씀에도 공의 뜻이 은연중 나타나 있다.
세존께서는 제법의 생(生), 주(住), 이(異), 멸(滅)의 네 가지 상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결국 돌아가는 곳은 공(空 )이라 하시어 어느 한 가지 일정한 상에 집착하는 것을 허용(許容)하시지 않았다. 일체의 법의 진실한 상은 허공과 같아서 그것은 말이나 글로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이며 결국 제법의 실상은 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모든 것의 상은 공적(空寂)한 것으로서 언제나 일정한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신진대사(新陳代謝)한다. 시시각각으로 나고 멸하고 일어나고 쓰러지고 한다. 바로 공인 것이다. 그러나 공은 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공이다.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것 다시 말하여 유와 무를 지양(止揚)한 것 양기(兩棄)한 것이다 유와 무를 다 같이 긍정(肯定)하고 또 다 같이 부정(否定)한다.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하다. 또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이것이 공이다.
이렇게 추상적(抽象的)으로만 말해서는 이른바 헛된 이론(理論)으로 희롱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므로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말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물의 모양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물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공(空)이다. 그러면 모양이 없는 것인가? 아니다, 모양이 있다. 이 지구 위에 형체가 없는 물은 하나도 없다. 산골짜기나 시내나 강에 흐르고 있는 물, 못이나 호수나 바다에 괴어 있는 물 수증기가 되고 안개가 된 물 구름이 되고 비가 된 물, 혹은 눈, 서리 얼음 따위가 된 물....., 그 어느 것을 보아도 각각 형체를 가지고 있다. 둥근가 모졌는가, 긴가, 짧은가 어떤 모양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반드시 모양이 있다. 물은 그릇의 둥글고 모진(方 )데 따른다는 속담과 같이 물은 그때그때 어떤 형체든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현실로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이고 어느 것도 물의 참 형상이 아니다. 물의 본래의 모양은 공이다. 만약 고정(固定)되어 있는 모지다가 둥글다든가 길다든가 짧다든가 하는 일정한 형체가 있다면 모진 것은 둥글게 둥근 것은 모지게 변하지 못할 것이다. 물이 그릇에 따라 모양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은 물의 본래의 형체가 공이기 때문이다. 공의 뜻은 이러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법의 실상도 공이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들 인간의 마음에도 적용(適用)된다. 인간의 마음도 또한 공이니, 불교에서 쓰는 말로 하면「무기(無記)」다.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하고 표현해 기록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천태대사나 일련대사의 교의(敎義)에 의하면 그것은 십계호구(十界互具)다. 이것은 다시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이론으로 전개(展開)되는 것이니 한말로 해서 역시 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이 사람의 마음도 온갖 인연에 의하여 온갖 상으로 변한다. 위로는 부처님으로도 되고 아래는 지옥도 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한 「아(我)」이건만 우리는 현재의 소아(小我)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진정한「나」로 착각하고 그 나 만에 집착하여 익애(溺愛)하는 데서 세상에는 아(我)와 아와의 싸움이 아욕(我慾)과 아욕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모든 것이 공임을 말씀하시고 이를 미루어「아공(我空)」을 가르쳐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삼법인(三法印)의 둘째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공의 뜻을 올바르게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니 이것을 깨달아 알면 인생의 괴로움의 상과 그 괴로움의 원인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괴로움을 이겨낸 세계 그 괴로움을 이겨내는 길을 깨달아서 자연 수행을 부지런히 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공의 사상은 자연에 대해서나 인생에 대해서나 그 참된 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잡이가 된다. 우리가 범부의 눈으로 보아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인했을 때 거기에 일체의 모든 것이 참된 상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다. 집착된 나인 소아(小我)를 버리지 않으면 참된 나인 대아(大我)는 나타나지 않는다.
일체를 부인하고 공에 철저했을 때, 그것은 허무(虛無)가 아니라, 공의 깊은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참된 상을 가지고 나타나 온다. 이것을「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실재(實在)인 것이다.
이와 같이 법화경은 진공모유를 설한다.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란 이 진공묘유의 상임을 알아야 한다. 앞서 말한 부처님의 상도 이 진공묘유의 법칙에 의해 생각해 알아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제六장 빛과 향기와 아름다운 맛을 다 구족함
모든 방법에 의해서 좋은 약초의 빛과 향기와 아름다운 맛을 다 구족한 것을 구하여 방아에 찧고 체로 쳐서 화합하여 아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고 이런 말을 하되 이는 크게 좋은 약이라 빛과 향기와 아름다운 맛을 다 구족하였으니 너희들은 잘 먹고 속히 고뇌를 제하고 다시 모든 환난을 없이하라.(여래수량품 二五四面)
법화경은 세존의 본회경(本懷經)이요, 모든 경의 왕이다. 그러면 법화경二十八품 가운데 교법(敎法)으로서의 중심이 어디에 있으며 요긴한 중에서도 요긴한 것은 무엇일까? 천태대사가「한 자 한 자가 다 진실로 부처님이요, 이 부처님의 설법이 중생을 제도하신다.」고 한 것과 같이 그 전체가 묘경(妙經)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법화경 七권 二十八품 八만九千三百八十四자(字)중에서도 가장 요긴한 것 가장 중요한 글자가 있을 것이니 그 가장 요긴한 것 가장 중요한 글자를 찾아서 그 대표적인 것을 파악(把握)하여 신앙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할 것이다.
물론 법화경 六만九천三백八십四자는 그 어느 한 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요긴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이다. 앞서도 잠깐 말한 바와 같이 세존께서 말법(末法)의 중생에게 펴 주시기 위해 본화상행보살(本化上行菩薩) 지용보살들에게 부촉하신 요법(要法)은 바로 이 묘법연화경이었다.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야말로, 법화경의 핵심(核心)이요, 세존 일대(一代) 교법 중의「교법왕(敎法王)」이다. 묘법연화경이 교법왕인 까닭을 밝히는 데는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가운데 설하여 있는「양의양약(良醫良藥)」의 비유로써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쉽겠으므로 여기서 대강을 말하여 보기로 한다. 어떤 곳에 훌륭한 의사가 있었다. 그는 깊은 학식과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을 만이 고쳐서 명성이 높았다. 그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의사가 외출하고 집에 없는 동안에 잘못하여 아들들이 독약을 먹었다. 맹렬한 독이 곧은 온 몸에 퍼져서 모두들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했고 심한 아이는 기절하였다. 때마침 의사가 돌아와 이 모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들들은 괴로운 중에도 아버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서「아버지, 우리는 어리석게도 독약을 먹었습니다. 빨리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다. 아버지는 평소의 경험으로 이것저것 빛이며 향기며 좋은 값 비싼 약재를 써서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약을 만들어 주면서「자, 어서 이약을 먹어라 이것은 썩 좋은 약이다. 먹으면 곧 아픔이 멎을 것이다.」하였다. 중독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아들들은 곧 그 약을 먹고 당장에 아프던 것이 나았다. 그러나 몹시 중독되어 본심까지 잃은 아들들은 아버지를 보고 기뻐하며 살려달라고 하지만 좋은 약을 좋은 약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의사는 저 아이들은 본심을 잃어서 이 좋은 약을 먹지도 않는 것이다. 무슨 방편을 서서 먹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보고 「나는 지금 급히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늙어서 언제 어디서 죽을는지 모르겠다. 이 약을 여기 두고 가겠으니 꼭 먹도록 해라. 아픈 것이 곧 나을 것이다.」하고는 길을 떠났다. 얼마를 가다가 사람을 집으로 보내서 아들들에게「아버님은 객지에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이 그립거든 두고 가신 이 약을 곧 잡수시오.」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본심을 잃었던 아들들도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아버님이 계셨더라면 우리를 구원해 주실 터인데 지금은 멀리 가셔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우리는 의지할 데가 없게 되었다하고 몹시 슬퍼했다. 이 놀라움 때문에 제 정신이 돌아 그 제서야 아버지가 두고 간 약을 먹었다. 그랬더니 그 심하던 독약 기운이 가시어 병이 나았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자(父子)가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였다.
이상이「양의(良醫) 양약」비유의 줄거리다. 양의는 곧 세존이요, 아들들은 곧 일체 중생이요, 독약은 우리 중생의 번뇌이니 곧 무명이요 양약은 곧 묘법연화경이요, 양의의 죽음은 곧 세존의 입멸이요, 집으로 심부름 보낸 사람은 부처님의 사자(使者)곧 말법 세상에 출세하는 본화 지용 보살을 비유한 것이다.
무명의 독약을 마시고 미혹의 세계를 헤매고 있는 중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존께서는 인간세계에 나시어 수많은 교훈을 설하신 것이니 이는 방편의 웬만한 약으로서 뿌리 깊은 무명으로 인하여 본심까지 잃은 사람들 특히 말법 중생을 고칠 수는 없다. 그것은 양약 중의 최고의 양약이 아니면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모든 방법에 의해 좋은 약초의 빛과 향기와 아름다운 맛을 다 구족한 것을 구하여 방아에 찧고 체로 쳐서 화합하여」하셨음과 같이, 四十二년 동안의 어려운 경은 물론 법화경 가운데서도 빛과 향기와 맛을 다 갖춘 교를 골라서 이것을 다시 방아에 찧고 체로 쳐서 조합(調合)하여 좋은 약으로 만들어 중생에게 주신 것이 바로 묘법연화경 다섯 자의 제목이다. 세존께서 손수 만드신 교법왕(敎法王)인 묘법연화경으로서만이 말법 중생의 뿌리 깊은 무명을 없이할 수 있는 것이다.
세존의 교법은 어느 것 하나 중생의 미혹을 제거하는 양약이 아닌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해서 각자의 병을 고쳐 왔다. 그러나 묘법연화경 이외의 교법은 가벼운 병은 고칠 수 있지만 가장 근간(根幹)이 되고 있는 무명이라는 독약에 취하여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거리를 헤매고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를 초월하여 정각(正覺)에 들어가게 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오직 묘법연화경만이 가능할 뿐이다.
四十二년의 모든 경으로 우선 가벼운 병은 고쳤을지라도 이승(二乘)들은「영불성불(永不成佛)」의 무리로서 언제까지나 성불할 수 없다고 하신 그들이 법화경에 이르러서야 원품무명(原品無明)을 끊고 무상보리(無上菩提)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세존께서는 우선 사리불(舍利弗)에게 화광여래(華光如來)로 성불할 것을 수기(授記)하시고 이어서 차례차례 모든 二승들에게 성불할 것을 허락하셨다. 실로 묘법연화경이야말로 양약 중의 가장 좋은 양약 말하자면 만병통치(萬病通治)의 양약으로 낫지 않는 병이 한 가지도 없다. 그야말로「또는 해가 능히 모든 어두움을 제하는 것과 같이 이 경도 또한 이와 같이 능히 일체의 착하지 못한 어두움을 제하느니라.」(약왕보살 본사품 三一五面)
고 하신 좋은 약이다.
세존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법화경이라는 좋은 약에 의해 구원을 받았지만 앞의 비유에서 본심을 잃은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기뻐하면서 구원해 달라고 했지만 먹으라는 약은 먹지 않은 것과 같이 어떤 사람은 모처럼 주신 법화경을 믿지 않았다.
본심을 잃은 아들들이란, 세존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구원받지 못하고 입멸하신 뒤 특히 말법의 오늘 날에 태어난 우리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같이 괴로운 우리를 위하여 세존께서는 「이 좋은 약을 지금 여기 남겨두니 너희는 반드시 먹되 차도가 없을까 근시하지 말라」(여래수량품 一五五面)
고 유언을 하시고 비멸현멸(非滅現滅)의 입멸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부처님의 사자(佛使)로서 본화상행 지용보살등에게 말법시대에 법화경을 널리 펼 것을 위촉(委囑)하셨다.
만약 세존께서 이 양약 곧 법화경을 남겨놓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생사의 괴로운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다행히 양약은 남겨두셨다. 부처님의 사자로 천태대사며 일련대사들의 뒤를 이어 양약을 먹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 나아감을 얻는다면, 저 비유에서 병이 나아 아버지를 다시 만남과 같이 본불 구원살성(久遠實成)의 석가모니불을 친히 뵈올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도다. 묘법연화경이여! 양약 중에 가장 훌륭한 양약 만병통치의 양약이요, 일체의 교법 가운데서 교법왕(敎法王)인 묘법연화경이여!
승 가 (僧伽)
제一장 지금이 바로 이 때다.
누가 능히 이 사바 국토에서 널리 묘법연화경을 설하겠느뇨? 지금이 바로 이때라. 여래는 오래지 않아 마땅히 열반에 들리라. 부처님은 이 묘법연화경을 부촉하고자 있느니라.(견보탑품 二○○面)
불교란 어떤 것이냐 하고 묻는다면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석가세존의 교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저 석가세존의 교라고만 해서는 정확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교단적(敎團的) 그 내용을 말한다면 불교가 성립함에는 세 가지 큰 요소가 있으니,
그 하나는 불(佛)이요,
그 하나는 법(法)이요,
그 하나는 승(僧)이다.
이 세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만 비로소 불교가 된다. 이것을 삼보(三寶)라고 한다. 인간 사회의 보배라는 뜻이다. 불교의 성립을 역사적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다. 세존은 실달태자(悉達太子)의 신분으로서 도를 구하고자 궁성(宮城)을 떠날 결심을 하시고, 부왕이신 정반왕(淨飯王)께 말씀드렸지만 물론 허락하실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태자께서 도를 구하고자 하시는 결심은 견고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열아홉 살 되시던 해 二월九일 밤, 마침내 혼자서 몰래 성을 빠져 나오셨다. 부왕은 크게 근심하고 사방으로 사람을 놓아 찾아서 간곡한 말로 돌아오라 하였으나, 태자는 지금 한때 부왕의 명령을 어기고서라도 후에 깨달음을 얻어서 부왕을 인도하여 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고 하면서 듣지 않고, 정 그러시다면 가비라위성에 무상(無常)의 바람이 불어 들어가지 못하도록 굳게 보루(堡壘)를 쌓아 주십사고 하셨다.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라 하더라도 또한 나라의 힘을 몽땅 기울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부왕도 마침내 하는 수 없이 단념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늘날까지 고생을 모르고 온 태자가 혼자서 돌아다니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 평소에 왕자를 가장 가까이 모시어 친히 지내던 학우(學友) 교진여(敎陣如)등 다섯 사람을 보내서 모시고 함께 수도하게 하였다. 그래서 태자는 이 다섯 사람을 데리고 돌아다니며 바라문(婆羅門)의 학자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또한 고행(苦行)의 생활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무리 고행을 쌓아도 그 고행으로는 정각(正覺)을 얻을 수는 없었다. 고행으로 인해 몸이 이렇게 쇠약할 데로 쇠약해져서는 깨달음을 열 수가 없었다. 우선 몸이 건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신 태자는 먼저 니련선강(泥連禪江)에서 목욕하시어 몸을 깨끗이 하셨다. 그리고 마침 그 때 강변을 지나가던 목장의 여인이 바치는 우유를 받아 잡수시었다 이것을 본 교진여 등은 깜짝 놀라 태자가 악마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이젠 함께 수행해야 보람이 없을 것이라고 태자를 버리고 가버렸다.
단 혼자 고독하게 되신 태자는 필바라수(畢波羅樹 (뒤에 菩提樹라고함) 아래에 법좌(法座)를 만드시고 그 자리에 앉으시어, 내 원을 성취하지 못하면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금강(金剛)과 같이 굳은 결심을 하시고, 조용히 선정(禪定)의 경지에 들어가시어 마침내 정각을 성취하셨다.
이리하여 불타(佛陀)의 지위에 오르신 세존께서는 정각을 성취하신 이 법열(法悅)을 전의 스승이었던 바라문의 노사(老師)들에게 나누어 주시려 하셨으나, 그들은 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면 고행을 함께 했던 교진여 등 다섯 사람에게 나누어 주리라 하시고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녹야원(鹿野苑)을 찾아가셨다. 교진여 등은 어디까지나 태자가 악마에게 속아 현혹(眩惑)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설혹 다시 만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도 하지 않으리라 서로 맹세하고 있었는데 정작 정각을 이룩하신 세존을 뵙자 그 거룩하심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서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일제히 부처님의 발아래 엎드려 예배하였다.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해 사성제(四聖諸)의 교, 곧 인생과 괴로움의 모습,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을 없이한 경지(境地)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는 길을 간절히 설하셨다. 그들은 세존의 말씀에 깊이 감등되어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제자가 될 것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세존이신 부처님(佛),
사성제의 법(法),
다섯 사람의 승(僧)
곧 삼보(三寶)가 출현하여 여기에 불교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불교가 성립한 역사다. 그렇기 때문에 승은 불, 법과 함께 불교 성립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한 요소(要素)이다.
일련대사는「나무가 없다면 불이 있을 수 없고, 육지가 없다면 초목이 나지 못하리라. 부처님과 법이 있다 할지라도, 출가한 승이 있어서 배우고 익혀 전하지 않았으면, 정법(正法)과 상법(像法)의 二천년을 지난 이 말법(末法) 세상에까지 전하지 못했으리라.」고 하여 승이 거룩한 까닭을 설명하였다. 그러므로「파화합승(破和合僧)」-승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아라한(阿羅漢)을 죽이고 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내는 네 가지 큰 죄악과 함께「오역죄(五逆罪 )」라 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는 죄라고 한다. 범어(梵語)의 승가(僧家)를 생략해서 「승(僧)」이라고도 하고, 또는「화합중(和合衆)」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세 사람 이상이 모여 서로 도와가며 불도를 수행하는 단체라는 뜻이다. 승려(僧侶)의「여(侶)」도 무리(衆)라는 뜻이다. 지금 머리 깎고 먹물 들인 옷을 입고서 독신으로 수행하는 사람을 승이라고 하지만, 승의 뜻은 이러한 것이나 요컨대 세존의 제자가 되어 교를 받들어 수행하고 또 그 교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 그것이 승려(僧侶)이다. 따라서 승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교를 스스로 수행함은 물론 교를 널리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입멸하실 것을 미리 아시고, 입멸 하신 후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널리 전할 임무를 맡기시려고 「누가 능히 이 사바 국토에서 널리 묘법연화경을 설하겠느뇨? 지금이 바로 이때라.」하시고 마땅한 사람을 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승려의 중요한 사명은 교를 널리 펴서 전하는 일이다. 특히 입멸하신 후 세존 출세의 본회경인 법화경을 펴는 데 대해서는 세존께서도 각별히 마음을 쓰시어,「내가 멸도한 후에 은밀히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능히 법화경의 다만 한 구절을 설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곧 여래의 사도(使徒)가 여래가 보낸 바로서 여래의 일을 행함이니, 어찌 하물며 대중 가운데서 널리 사람을 위하여 설함이라.(법사품 一八二面)
하시어,
입멸하신 후 단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은밀히 법화경의 한 구절만이라도 설하여 들려주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여래의 일(如來事)」을 행하는 것이라고 찬탄하셨다.
부처님의 이 말씀만큼 법을 펴는 사람의 수효에도 들지 못하는 우리들의 용기를 돋구워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법화경의 단 한 구절을 은밀히 한 사람에게만 이야기해 주어도 그것은 여래의 사자로서 여래의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칭찬하셨으니 그 얼마나 분에 넘치는 고마운 말씀인가?
여래의 일이란 여거(如去), 여래(如來)의 행동이다.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下化衆生)하고자 하는 발심(發心)을 실천하는 것이다.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제자로 자처(自處)하는 사람은 이 부처님의 말씀에 감명하여 법화경을 널리 펴서 불제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이루기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제二장 四도사가 있다.
이 보살 대중 가운데 四도사(導師)가 있으되 첫째 이름은 상행(上行)이요, 둘째 이름은 무변행(無邊行)이요, 셋째 이름은 정행(淨行)이요, 넷째 이름은 안립행(安立行)이라. 이 四보살이 그 대중 가운데에서 가장 상수(上首) 창도(唱導)의 스숭이라. (종지용출품 二三八面)
널리 불제자(佛弟子)라고 하면 승려이거나 속인이거나를 물론하고 불교신도는 모두가 불제다. 승려는 출가(出家)한 제자요, 속인은 재가(在家)한 제자인 것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출가한 제자 - 머리를 깎고 사사를 입고서 불도를 수행하고 펴는 일에만 종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좁은 의미의 불제자는 다시 세존 재세 당시의 제자와 입멸하신 후의 제자로서 나뉘어 진다. 앞의 것은 세존께서 이 세상에 머무르실 때에 나서 친히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수행하고 포교하는데 종사한 사람들이요, 뒤의 것은 입멸하신 후에 나서 경정에 의해 수행하고 그 경전 가운데 설해 있는 교훈을 다른 사람에게 펴서 알리는 사람이다.
출가한 제자 중에서 상위(上位)에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 보살에도 역시 세존 재세시의 보살과 입멸하신 후의 보살이 있다. 미륵보살과 같은 이는 재세시의 보살이요, 용수보살 천친보살 마명보살 등은 입멸하신 후의 보살들이다.
다시 제세시의 보살을 나눈다면 역사상에 실제로 있는 보살과 신앙상의 보살의 두 가지가 잇다. 미록보살등은 전자에 속하고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등은 후자에 속한다. 또 이들을 합쳐서 세존과의 사제(師弟)의 관계로 보아, 다시「본화(本化)의 보살」과「적화(赤化)의 보살」과 타방래(他方來)의 보살」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본화의 보살이란, 구원(久遠)의 오랜 옛날에 세존의 교화를 받은 보살이다. 적화의 보살이란, 구원의 옛날부터 오늘까지 사이에 세존의 교화를 받고 있는 보살이다. 타방래의 보살이란, 다른 국토에서 사바세계에 와 있는 보살이다.
그런데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세존의 구원실성(久遠實成)이 현설(顯說)되어 있어, 법계(法界)의 중생이 모두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하고 세존께 귀명(歸命)할 것을 맹세하고 十방세계가 다 하나의 불토(佛土)가 되어 나타난 이상, 일련대사는「대일여래,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의 모든 부처님은 우리들의 본사(本師) 교주(敎主)이신 세존의 소종(所從)이다. 하늘에 있는 달이 모든 물에 비친 것이 이것이다.」한 것과 같이 부처님까지도 세존의 그림자이므로 보살에 이 땅의 보살이니 저 땅의 보살이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그 모두가 세존의 제자인 것이다. 일련대사가「부처님은 구원의 부처님이시니, 적화(迹化)란 이러한 모든 보살들은 스스로 수행하여 정각을 얻으려고 정진(精進)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불제자로서의 첫째 되는 사명이 대법을 널리 펴는 것 특히 법화경의 선포이므로 그들은 각기 세존께서 입멸하신 후의 홍법(弘法)을 부촉(咐囑)하여 주실 것을 청했고, 또 홍법할 것을 서원하는 것이었다.
위에 말한 세 종류의 보살 중에서 본화의 보살이야말로 세존의 구원(久遠)한 수제자(首弟子)로서, 법화경의 설법이 차차 진전(進展)해서 이제 그 절정에 이르러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을 설하시기 직전의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 이르자 갑자기 영축산(靈鷲山)위의 법좌(法座)에 보기에도 장엄하고 거룩한 상으로 한량없이 많은 대보살이 나타났다. 그 수는 한량이 없어 미륵보살까지도
「내가 항상 모든 나라를 다녔사오나 일찍이 이런 일은 보지 못하였으며 나는 이 대중 가운데서 한 사람도 알지 못하나이다.」(종지용출품 二四一面0
하였을 정도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미륵보살이 여러 사람을 대신해서 세존께 이 여러 큰 보살들을 교화하신 부처님은 어느 부처님이며 그 국토는 어디며 호지(護持)하는 법은 무엇이며, 또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별안간 나타났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다. 세존께서는,「나 석가모니불이 정각을 열고 이 사바국토에서 교화한 제자들이니라.」
고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세존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셨지만 부처님과 이 보살들과를 비교해 보면 도리어 세존은 스물 대여섯밖에 안된 청년 같고 보살들은 백살이나 된 늙은이와 같았고, 또 세존께서 성도하신 지가 겨운 四十여년밖에 안되었는데 그 짧은 동안에 이처럼 많은 보살들을 어떻게 교화하셨을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미륵보살은 그 대답만으로는 세존께서는 입멸하신 후 사람들이 의심을 가지고 법을 깨뜨리는 죄를 범할까 두려워하고 걱정이 되어,「비유하건대 만일 빛이 아름답고 머리는 검어 나이 스물다섯 된 사람이 百살된 사람을 가리키어 이는 나의 아들이라 하고 그 百살 된 사람이 또 아니 젊은이를 가리키어 이는 나의 아버지라 말하며 우리를 낳아서 길렀다 하면 이 일은 믿기 어려우리다.」(종지용출품 二四六面)
하고 다시 세존께 여쭈어 보았다.
이 본화의 보살들이 여기 불려 나온 이유는 세존께서 친히 구원실성(久遠實成)을 선언하시기 위함인 동시에 입멸하신 후 말법에서 법화경을 펼 것을 부탁하시기 위해서였다.
이 보살들 가운데 상수(上首)로서 존귀한 네 사람의 보살이 있었다. 곧 상행보살(上行菩薩), 무변행보상(無邊行菩薩), 정행보살(淨行菩薩), 안립행보살(安立行菩薩)의 네 사람이니 이들을 특히 「본화(本化)의 사대보살(四大菩薩)」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시 신앙의 대상인 본존(本尊)에 대하여 말해 두고자 한다. 불교의 신앙에 대상을 삼보(三寶)라고 한다. 불보(佛寶), 법보(法寶),승보(僧寶)가 그것이다. 앞서도 잠시 말했거니와 승보란 광의(廣義)로 말해서 일체의 불제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신앙의 객체(客體)로서의 승보는 단순히 승가(僧家)라고만 해서는 옳은 대답이 못된다. 법화경신앙의 대상인 본존 가운데 권청(勸請)되어 있는 승보를「협사(俠士)」라고 하는데 알기 쉽게 말한다면 부처님께 시중드는 사람으로서 특별한 지위에 있는 승보다.
같은 세존이지만 소승(小乘)의 세존,
법화경 전반(前半)의 세존,
후반(後半)인 본문(本門)의 세존 - 이렇게 세존께서 처해 계신 위치에 따라 각각 그 협사가 다르다. 일련대사는「소승의 세존은 가섭(迦葉), 아난(阿難)을 협사로 삼으셨고, 권대승 및 열반경 적문의 세존은 문수(文殊), 보현(普賢)을 협사로 삼으셨다.」하였다. 본문의 세존의 협사는 곧 위에 말한 상행 무변행, 정행, 안립행의 四대보살이다.
이와 같이 협사가 각각 다른 것은 마치 공무원의 지위에 따라 그 비서의 자격도 각각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세존도 소승의 교주의 자격으로 계실 때에는 성문(聲門)인 가섭존자나 아난존자 등의 협사가 모시고 권대승 열반경 적문 법화경의 교주의 자격으로 계실 때에는 구원실성의 본불이시기 때문에 성문이나 적화의 보살은 협사로 있을 자격이 없고 구원의 제자인 본화(本化)의 대보살이 협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래수량품에 의해 세우고 나타낸 일련대사의 종교의 본존인 대만다라(大曼茶羅)의 삼보 중의 승보는 본화의 四대 보살로 되어 있다.
세존의 부르심에 따라 법화경의 설법 회상(會上)에 나타난 본화의 보살은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사바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세존의 분신(分身) -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통력(神通力)으로써 시방국토(十方國土)에 고루 나타나시어 교를 설하시므로 이것을「분신불(分身佛)」이라고 한다.- 의 모든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곳이건 부처님의 신칙을 받들어 법화경을 널리 펴고 자기 자신도 진정(眞淨)한 대법인 법화경을 받아가지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옮겨 쓰고 공양할 것을 맹세하여「세존이시여, 우리들이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세존의 분신(分身)이 계신 국토 멸도하신 곳에서 마땅히 널리 이 경을 설하오리다. 어찌하여 그러한고 우리들도 또한 스스로도 이 진정(眞淨)의 대법을 얻어서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옮겨 써서 이를 공양코자 하나이다.」(여래신력품 三○○面)
하였다.
세존께서는 그 청을 받아들이시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법화경의 대사를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에다가 결부(結付)시켜서 위촉(委囑)하시고, 멸도하신 후의 세상에서 법화경을 설하게 된 인연과 순서와 내용 등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말씀하신 대로 편다면, 해와 달의 광명이 땅위의 모든 어두움을 없이하는 것과 같이, 그 사람은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모조리 없애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마침내는 불과(佛果)를 얻을 보살로서 일불승(一佛乘)의 도에 들어가게 할 것이라고,
「여래가 멸도하신 후 부처님께서 설하신바 경의인연과 차례를 알아서 뜻에 따라 진실과 같이 설하리라. 일월(日月)의 광명이 능히 모든 어두움을 제하는 것과 같이 이 사람이 세간에서 행하여 능히 중생의 어두움을 멸하고 한량없는 보살을 가르치어 마침내 일승(一乘)에 머무르게 하리라.」(여래신력품 三○四面)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일월의 광명이 능히 모든 어두움을 제하는 것과 같이 이 사람이 세간에서 행하여 능히 중생의 어두움을 제한다.」하신 말씀은 옛날부터 상행보살 등이 부처님의 신칙을 받들어 세존께서 입멸하신 후의 세상에 나서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을 예언하여 찬탄하신 말씀이라고 일러 온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일본(日本)에서는 법화경의 신앙상으로는 일련대사를 상행보살의 후신(後身)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부처님의 말씀은 또한 일련대사가 말법의 세상에 나서 법화경을 펼 것을 예언하신 것이라고 한다.
제三장 지금 너희들에게 부촉하노라
내가 한량없는 百千만억 아승지겁에 이 얻기 어려운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법을 닦고 익혔노라. 지금 너희들에게 부촉하노니 너희들은 마땅히 받아가지고 읽고 외워서 널리 이 법을 선포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듣게 할 것이며 알도록 할지니라.(촉루품 三○五面)
상행(上行)등 본화의 보살에게 입멸하신 후 말법에서 법화경을 펴라는 명령을 내리신 세존께서는 이어서 불가사의한 일을 나타내시어 여러 적화(赤化)의 보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무량 백천만억아승지라는 오랜 세월을 수행하시어 얻으신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법인 법화경을 너희들에게 부촉하니 널리 펴라고 하셨다.
보살들은 이 말씀을 듣고,
「세존께서 교칙하심과 같이 마땅히 갖추어 받들어 행하겠나이다. 오직 세존께서는 원컨대 염려하지 마옵소서.」(촉루품 三○六面)
하고, 말씀대로 받들어 행하겠나이다하고 곧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적화의 보살들에게 부촉(付囑)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본화의 보살과 적화의 보살에게 각각 부촉하신 것은 세존께 깊은 생각이 계셨던 것이다 본화의 보살에게 부촉하신 것을「별부촉(別付囑)」이라고 적화의 보살에게 부촉하신 것을「총부촉(總付囑)」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여러 가지 틀리는 점이 있으니 같은 법화경을 펴라는 부촉이라도 별부촉은 본문(本門)을 중심으로 한 법화경을 펴라는 명령이고, 총부촉은 적문을 중심으로 한 법화경을 펴라는 명령이다. 시대적으로 말한 것이요 뒤의 것은 상법(像法)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세존께서 입멸하신 후의 시대를 세 구분으로 나누는데 입멸하신 이튿날부터 一千년동안을「정법시대(正法時代)」라고 하고, 그 다음 一千년 동안을 「상법시대(像法時代)」라고 하고, 정법과 상법의 二千년이 지나간 다음부터는 통틀어「말법시대(末法時代)」라고 한다. 이상 세 시대는 또한 각각 여러 가지 틀리는 점이 있다.
정법의 시대에는「교(敎)」곧 세존의 교와「행(行)」곧 교대로 행하는 수행과 증득(證得)이 있으니, 수행의 결과로서 깨달음의 세 사지가 갖추어지고,
상법의 시대에는 교와 행은 있으나 증득이 없고,
말법의 시대에는 교만 있고 행과 증득이 다 없다. 요컨대 말법에는 세존의 교는 경전으로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교대로 수행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전혀 없는 탁세(濁世)요 말세(末世)라는 것이다.
말법인 지금은 오탁(五濁)의 악한 세상이라고 일컫는데 (오탁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려 한다.) 세존 당시와 지금과 비교를 하여 보다면 인간의 지혜는 놀랄 만큼 진보하여 과학에 관한 지식은 비교도 안될 만큼 발전하였다.
그러나 신앙면이나 도덕면을 살펴본다면 시대가 갈수록 점점 더 못해져가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지금의 말법을 탁악세(濁惡世)라고 한다. 그러한 시대의 교화에 종사하는 사람은 본화의 보살과 같은 위대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되고, 또 그 교도 양약 중에서도 최대의 양약이 아니고서는 비뚤어진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다. 따라서 다 같이 법화경을 펴라는 부촉이시지만, 상법과 말법과는 그 펴는 사람에는 본화(本化)와 적화(赤化)의 차가 있고, 그 교에는 본문(本門)과 적문(迹門)의 차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화의 보살이 말법 세상에 나타나서 펴는 법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본문의 법화경 특히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다. 이에 비해 적화의 보살이 맡은 책임은 매우 관대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법화경을 설해 줄 것이요, 그렇지도 못하여 법화경을 가르쳐 주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법화경 이외의 다른 경전을 설해 주어야 한다고,
「미래 세상에서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여래의 지혜를 믿으려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위하여 이 법화경을 연설하여 얻어 듣게 하고 알게 할 것이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한 까닭이니라. 만일 중생이 있어 믿지 않고 받지 않는 자에게는 마땅히 여래의 다른 깊은 법 중에서 보이고 가르쳐서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할지니라.(촉루품 三○六面)
이렇게 지시하셨다. 일련대사의 교의(敎義)를 믿는 사람은 이 점에 대해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
말법에서 법화경을 펴는 데는, 상대자가 믿건 안 믿건, 순연(順緣)이건 역연(逆緣)이건, 어떠한 경우에라도 다른 경전의 교리를 설하지 말고, 오로지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설해야 한다. 말법의 중생이 구원받을 수 있는 양약은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連華經) 일곱 자 이외에는 없다. 일련대사가「말법의 법사(法師)는 대개가 사람의 근기(根機)를 알지 못하나니, 근기를 모르는 고로 강력히 다만 실교(實敎)를 설할지니라.」「역연(逆緣)」을 위해서는 다만 묘법연화경의 다섯 자를 들려주고 설하라.」그리고「방법(謗法)의 중생에게는 오로지 법화경을 설하라.」한 말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본화와 적화의 임무에는 이와 같은 차이가 있으므로 말법의 세상에서 삿된 지혜 있는 사람을 상대해서 법을 펴자면 그 방법이 자연「절복(折伏)」으로 될 수밖에 없고 상법의 세상에서 비교적 순박한 사람을 상대해서 법을 펼 때에는「섭수(攝受)」로 된다.
절복이란, 적극적으로 상대자의 잘못을 지적해서 바로 잡게 함이요, 섭수란, 잠시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관용(寬容)의 태도이다.
제四장 신명을 아끼지 아니하오리다.
오직 원컨대 세존이서어 근심하지 마옵소서. 우리들이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마땅히 이 경전을 받들어 가지고 읽고 외우고 설하오리다. 후의 악한 세상의 중생은 선근이 적고 증상만이 많으며 이익의 공양을 탐내며 착하지 못한 일이 늘어 해탈에서 멀리 떠나 비록 교화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우리들이 마땅히 큰 인욕의 힘을 일으켜서 이 경을 읽고 외워 가지고 설하고 옮겨 쓰고 가지가지로 공양 하되 신명(身命)을 아끼지 아니하오리다.(지품 二一四面)
본화의 보살에 대한 별부촉(別付囑)은 그렇거니와 법화경 회상(會上)의 법좌(法座)에는 본화와 적화 이외에 타방래(他方來)의 많은 보살은 물론 사리불(舍利弗), 가섭(迦葉), 수보리(須菩提), 가전연(迦전), 목련(目蓮)등을 비롯하여 성불의 허락을 얻은 많은 이승(二乘)들이며, 학(學), 무학(無學)의 사람들이며, 또 마하바사바제(摩하波사波提), 야수다라비구니(耶輸多羅比丘尼)와 그 권속(眷屬)이며 심지어 국왕 대신 거사(居士)등의 재가(在家)의 대중들도 많이 있었다.
세존께서는 이들 법화경에 입신(入信)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세존께서 세상에 계신 동안이나 입멸하신 후에라도 법화경을 펼 것을 부탁하시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법화경 청문(聽聞)한 것을 기뻐하였고, 기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은 생각에 불타서 각기 자기 능력에 따라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법화경을 펼 것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말법 악세에 법화경을 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여간한 결심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말법세의 사람은 선근(善根)은 심지 않고 이양(利養)이나 명문(名聞)을 중히 여기고 혹은 제법 깨달음을 얻은 양 자만하는 증상만(增上慢)을 품은 사람뿐이므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세존의 본회인신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법화경을 펴려면 큰 인내력 및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러한 결심을 하고서 법화경의 행자로서의 굳은 각오를 말씀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고,
「세존이시여, 우리들도 또한 마땅히 다른 국토에서 널리 이 경을 설하오리다. 어찌하여 그러한고 이 사바세계에는 사람은 폐악함이 많고 증상만을 품어서 공덕이 천박하고 성념과 탁함과 아첨과 바르지 못함으로 마음이 진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지품 二一五面)
고 하여,
자기의 힘이 미치지 않음을 알고 다른 국토에 가서 법화경을 펼 것을 맹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법화경을 청문(聽聞)한 사람은 한 사람의 낙오자(落伍者)도 없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서 법화경 펼 것을 서원(誓願)하여, 불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포교를 실천해서 불교신도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말씀드렸다.
제五장 사자왕과 같으리라.
하늘의 모든 둥자가 위하여 시봉하리라. 칼과 막대기로 때리지 못하며 독(毒)도 능히 해치지 못하며 만일 사람이 미워하여 꾸짖으면 입이 곧 막히리라. 언제나 두려움 없음이 사자왕과 같고 지혜의 광명은 해가 비침과 같으리라.(안락행품 二三四面)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말법 악세에 법화경을 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무한한 인내력(忍耐力)과 인욕력(忍辱力)이 있어야 하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든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한다. 그처럼 어려운 일이므로, 그것을 실행한다면, 세존의 커다란 수호를 받을 수 있다.
세존께서는 법화경을 펴는 사람의 이와 같은 순교(殉敎)의 정신을 칭찬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법화경을 펴는 사람은 반드시 불, 보살, 제천선신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하늘의 모든 신이 좌우에서 받들어 모시고 시중들어 설사 칼이나 몽둥이로 해치려고 해도 몸에 해가 미치지 않는다. 독약을 먹어 해치려 해도 목숨을 잃는 일이 없다. 만약 법화경 행자를 욕하고 꾸짖는다면 그 자의 입은 막혀버릴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법화경을 수행하고 펴는 사람은 마치 사자가 모든 짐승의 왕으로서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어떠한 곳에 있을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법화경을 몸으로 체득해서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이므로, 그 사람의 지혜는 마치 해와 다이 밝은 빛으로 어두움을 없이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의 삿된 마음 악한 마음을 비추어 없애 줄 것이다.」하고 칭찬하시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법화경을 펼 것을 극력 편달하시었다.
이 세존의 말씀을 듣고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세존께,
「그 사람이 만일 법화경의 한 구절이거나 한 게송을 잊어버린 것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이를 가르치고 같이 읽고 외워서 돌이켜서 통리(通利)케 하오리다.」(보현보살 권발품 三五五面)
하여 만약 법화경 행자가 설법하는 자리에서 법화경의 한 구절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을 때에는 그 행자와 함께 그 구절을 생각해내도록 하겠다고 맹세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어,
「세존이시여, 후五百세의 흐리고 악한 세상에서 이 경전을 받아 가지는 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수호해서 그의 쇠환(衰患)을 제하고 그로 하여금 안온을 얻게 하며 잘못을 엿보는 자에 편리를 얻지 못하게 하오리다.(보현보살 권발품 三五四面)
하여 후의 五百년(세존 입멸 후 2500년 즉 지난 말법 세상에서 법화경을 수행하고 펴는 사람을 수호하여 편안하게 해주고 만약 행자의 틈을 엿보는 악마가 있을 때에는 자기의 힘으로 단연코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세존의 가호(加護)와, 보현보살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선신(善神)들의 수호(守護)는 말법에서 법화경을 수행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거룩하고도 마음 든든한 일이냐?!
일련대사의 유문(遺文)을 읽어보면 「제천동자 이위급사(諸天童子 以爲給使)」,「도장불가 독불능해(刀杖不加 毒不能害)」,「유행무외 여사자왕(遊行無畏 如師子王)」등의 경문을 여러 곳에서 볼 수 가 있으니, 대사의 환난(患難)이며 법난(法難)에 대한 인욕 인내의 굳은 각오와 불보살 제천선신의 가피가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우리들도 이러한 가호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 고난과 싸워서 큰 법을 펴고자하는 각오가 견고해질 것이다.
여기「후五百세」라고 한 것은 말법의 세상을 가리킨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존께서 입멸하신 후를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세 시대로 나누는데 다시 정법의 一千년을 전후의 각 五百년으로 상법의 一千년을 전후의 각 五百년으로 나누고, 거기에 말법의 처음 五百년을 합하여 다섯 개의 五百년이 된다. 이것을 「다섯 개의 오백세 (五箇五百歲)」라고 하고, 말법의 처음 五百년을「오오백세(五五百歲)」라고 한다. 五五百세 또는 후五百세라고 하며 그것은 말법의 처음인 동시에 이로써 말법의 전체를 표시하기도 한다.
제六장 선지식은 큰 인연이다.
마땅히 알라 선지식은 큰 인연이니라. 즉 교화하고 인도해서 부처님을 친견케 하고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느니라. (묘장엄왕 본사품 三五一面)
법화경을 설하신 대로 수행하고 교훈대로 남에게 전하는 사람은 일체 중생의 복전(福田)이요, 도사(導師)요, 의지처(依止處)라고,「너희들은 이제 참된 부처님의 아들이라, 넓고 큰 대자비로 능히 깊은 고를 뽑아 고책에서 구해내는 자이라. 일체 중생의 복전이며 널리 일체를 위하여 크고도 좋은 도사가 되었으니 일체 중생이 크게 의지할 곳이며 일체중생의 큰 시주다. (무량의경 三九九面)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복전(福田)에다 씨를 뿌리고 도사(導師)에게 인도되어 의지할 곳(依止處)으로 가서 머무르고 대시주(大施主)에게서 혜택을 받아야만 비로소 불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악전(惡田)이 있고 악사(惡師)가 있으며, 괴상한 의지처가 있고 추잡한 시주가 있다. 그런데 얼른 보아 이러한 악전이 도리어 양전(良田)으로 보이고 악사가 도리어 정사(正師)로 보여서 매우 믿음직스럽게 생각되어 사람들은 이에 유혹돼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일련대사는「지금 이 때는 법사(法師)에는 정사(正師), 사사(邪師), 악사(惡師)가 있음을 알아서 사악(邪惡)한 사람을 멀리하고 정선(正善)한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설혹 덕(德)은 사해(四海)와 같고 지혜는 일월과 같다 할지라도 그가 법화경을 비방하는 악사임을 알았을 때에는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경고하였다.
참으로 「스승은 바늘과 같고, 제자는 실과 같다.」- 선이건 악이건 제자는 스승의 자취를 따르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복전, 정사, 옳은 의지처, 옳은 대시주를 구해야 한다. 「三년을 배우느니보다, 三년을 스승을 찾는 것이 낫다.」하는 옛말은 확실히 훌륭한 말이다.
또한 불도를 수행하는 데는 선지식(善知識)이 필요하다. 선지식이란, 수행해 나가는 동안의 동반자이다. 일련대사는 이것을「단순한 스승도 아니요 단순한 제자도 아닌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니, 때로는 주인이 되고 때로는 동반자가 되어 수행을 도와주는 것이 곧 선지식이다.
불도를 수행하는 길은 아득하게 멀고도 한없이 험하다. 이런 멀고도 험한 길을 가자면 혼자서는 길을 잘못 들거나 걸려 넘어지기 쉽다. 그러한 때에 굳게 손을 잡아 이끌어 주는 선지식이 있다면 그 얼마나 마음 든든할 것이냐? 일련대사의「성불하는 길에 선지식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한 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앞에 든 묘장엄왕 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의 일절은 바로 선지식의 중요함을 설하신 것이다.
법화경의 제二十七장인 이 본사품은 사견(邪見)에 떨어진 묘장엄왕을 전세에서 함께 불도를 힘쓰던 세 사람의 동료가 한 사람은 왕비가 되고 두 사람은 아들 형제로 태어나 온갖 방법을 다해 인도해서 사악한 마음을 돌이켜 그 당시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운뢰음숙왕화지불(雲雷音宿王華智佛)께로 인도하여 그 교화를 받게 하였으므로 왕은 부처님께 귀의할 것을 굳게 맹세하여 숙왕화지불로부터 사라수왕불(紗羅樹王佛)로 성불 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게 됨을 설하신 것이다. 숙왕화지불은 왕의 귀의를 기뻐하고 또 왕비와 두 왕자의 선지식으로서의 덕을 찬탄하여「선지식은 큰 인연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것이 어찌 묘장엄왕에게만 한한 일이랴?
우리들도 불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선지식이 얼마나 긴요한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다. 법화경 안락행품(安樂行品)에도 수행하는 사람은 외출할 떼에 두 사람이 동행하라고 하셨고 부득이 혼자 갈 때는 부처님을 염(念)하라고 하셨으니 이는 곧 부처님과 동행하라 하신 것이다. 수행하는 도중에 있는 행자는 동행자가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극히 중요한 선지식이지만 말법 세상에서 이것을 찾아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련대사는「말법에서 진정한 선지식이 있으니 이른바 법화 열반이 그것이다.」라고 하여 사람에게서 선지식을 찾아도 지금의 세상에는 악지식이 많고 선지식은 밝은 하늘에서 별을 얻어 보는 것보다 더 얻기 어려우므로 사람을 떠나 법화경과 열반경을 선지식으로 우러러보고 세존의 교의 참뜻을 참아서 설하신 대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였다.
제七장 하나는 석가모니불게 받들어 올리다.
관세음보살이 모든 四중과 하늘 용 인비인 등을 불쌍히 생각하여 그 영락을 받아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석가모니불게 받들어 올리고 하나는 다 보불탑에 받들어 올림이라.(관세음보살 보문품 三三五面)
물론 불교에만 한한 것은 아니지만 불교 특히 법화경의 신앙에는「대의명분(大義名分)」을 밝혀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대의명분을 어지럽히는 것을「하극상(下剋上)」이라 하는데 아무리 왕성한 마음으로 신앙을 힘쓴다 하더라도 거기에 하극상이 있어서는 도리어 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신앙의 대의명분이 오늘날엔 거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고려(高麗)중엽 이후부터 특히, 조선조(李朝)초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쓰게 되고부터 오늘날까지 그러한 풍조(風潮)가 그냥 계속되어 와서 바로잡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역자 주) 일본에서도 역시 오래 전부터 그러했던 모양으로 일련대사 당시에도 불교의 신앙에 대의명분이 없어 무서운 하극상의 죄를 범하고 있었다.
또 그 당시는 정권을 잡은 자들의 횡포로 말미암아 국민도덕의 면에서도 하극상이 심해, 그래서 일련대사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을 제시(提示)하여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나라가 망할 것을 경고했다. 여기서 국민도덕에 관한 것은 논외(論外)로 하고 불교 신앙의 대의명분이란 어떤 것인가를 좀 알아보기로 하자. 불교 신앙의 대의명분을 구명(究明)하는 데는 이 관세음보살 보문품(普門品)의 일절이 가장 적절한 경문이 아닌가 한다.
경전 가운데는 많은 보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그 보살들에게는 각각 어떤 공덕이 있는가를 설해 있어서 이로써 사람들의 신앙을 모으고 있다. 물론 때와 사람과 곳에 따라 다르지만 통틀어 말하여 이 많은 보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모으고 있는 이는 관세음보살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따라서 이 보살의 영험기(靈驗記) 따위가 옛날부터 꽤 많이 책으로도 되고 구전(口傳)의 전설로도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또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당우(堂宇)가 전국 방방곡곡 없는 데가 없다.
이러한 관세음보살이므로 경전 가운데에도 매우 많아서 혹은 독립된 경전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혹은 어떤 경전의 한 장(章)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법화경 가운데도 관세음보살 보문품이라는 한 품이 있다. 이 보문품은 많은 관음경(觀音經)중에서도 가장 많이 독송되고 가장 깊이 신앙되고 있다.
「그러나 가령 四월八일 성탄절에 관세음보살의 명호만을 부른다든가 관음경을 독송한다는 것은 마치 대통령의 탄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어떤 딴 사람의 공로를 치하하는 것과 같아서 그것은 불교 신앙의 대의명분을 문란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결국은 하극상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불교신도라면 먼저 교주이신 석가모니불게 정성과 신앙심을 회향(回向)해야 할 것이다.」(역자 주)
법화경의 보문품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시어 나무관세음보살을 입으로 부르면 큰 불 큰물, 나찰(羅刹), 칼과 몸 등이 악한 귀신 가쇄(枷鎖), 원적(怨賊) 등의 일곱 가지 재난을 모면할 수 있으며 마음으로 염하면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의 세 가지 독을 제거할 수 있고 몸으로써 예배하면 아들을 낳으며 땋을 얻는 공덕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또한 보살이 서른세 가지의 몸으로 변하여 중생을 구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관세음보살의 권능(權能)이 한없이 큼에 감격한 무진의보살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관세음보살께 공양하고자 몇 억만큼인지 그 값을 알 수 없는 목에 걸었던 보배 영락을 벗어가지고 관세음보살의 앞으로 나아가「인자(仁者)시여, 이 법에 의하여 드리는 진귀한 보배 영락을 받아 주옵소서.」(관세음보살 보문품 三三四面) 하고 바쳤으나 관세음보살은 그것을 받으려하지 않았다. 무진의보살은 거듭 받아주기를 원했지만 관세음보살은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세존께서는 무진의보살의 심정을 어여삐 여기시어 관세음보살을 돌아보시고 무진의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서 영락을 받으라고 하셨다. 관세음보살은 세존의 말씀에 황공하여 곧 그 영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몸에 지니지 아니하고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세존께 올리고 하나는 다보여래의 보탑(寶塔)에 바쳤다.
보문품의 내용은 이상과 같이 간단한 것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심히 중요함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어찌하여 관세음보살은 무진의보살의 영락을 받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가 현재 보살이기 때문이다. 또 그 자리에는 세존이 계시므로 좋아라고 넓적 받아서는 세존께 대하여 무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존의 허락이 있은 다음에야 받았다.
이것이 부처님과 보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의인 것이다.
법화경에서의 여래수량품과 관세음보살 보문품의 위치 및 세존과 관세음보살의 지위 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보문품을 독송하여도 그것은 수박 겉핥기요, 또 관세음보살을 지나치게 존경하는 나머지 오히려 구원(久遠)의 본불이신 석가모니불의 위치보다 높이 모시어 신앙해서는 그야말로 불교 신앙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하극상(下剋上)이 될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존경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보살은 어디까지나 보살이다. 그러나 보살은 어디까지나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뛰어난 공덕도 세존의 대자대비의 광명 가운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존께서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유일한 양약으로 정하신 묘법연화경의 힘을 힘입지 않고서는 관세음보살의 권능도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련대사는「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면 나무아미타불의 힘도, 나무대일진언(南無大日眞言)의 힘도 관세음보살의 힘도, 그 밖의 모든 부처님 모든 경 모든 보살의 힘도 죄다 묘법연화경의 힘에 가려져 버린다. 저 여러 경은 묘법연화경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희작(戱作)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절들을 살펴보건대 신중불공(神衆佛供)이니, 칠성불공(七星佛供)이니, 용왕불공(龍王佛供)인, 지장불공(地藏佛供)이니, 산신불공(山神佛供)이니 하여, 본존인 교주 석가모지불은 도리어 모시지 않은 절을 가끔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예배도 않고 관세음보살에게만 예배를 한다든가, 부처님을 모셔놓고 그 앞에서 관음주력(觀音呪力)을 한다든가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하극상이 아니다. 이야말로도 불교 신앙의 대상조차도 분간하지 못하는 짓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이 장차 법멸(法滅)의 인연이 되지나 않을까 몹시 염려되는 바이며 또한 현재와 같이 불교가 쇠퇴해진 원인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아미타불의 제자도 아니요, 약사여래의 제자도 아니요, 관세음보살의 제자도 아니요, 지장보살의 제자도 아니요, 화엄신중의 제자도 아니다. 칠성각(七星閣)이나 산신각(山神閣)의 수직인(守直人)은 더욱 아니다.」(역자 주)
말법세상의 우리가「숭앙(崇仰)하는 바는 오직 구원실성의 석가모니불이요, 믿는 경은 오직 실대승 말세 구원의 경이며 성불의 정법(正法) 법화경」이다. 불교신앙의 대의명분을 문란하게 하거나 하극상의 죄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스님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었으나 그간 궁금했던 부분이 시원스레 뚫리는 기분입니다. 참으로 신심이 솟구칩니다. 열심히 배워 나가겠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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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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