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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원의광(源義光)의 묘소에 가셔야지요.”
봉대가 넋을 잃고 있을 때 주지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울렸다. 정중히 합장하는 주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침을 삼키는데 가죽만 남은 주지의 목덜미가 꿈틀거렸다. 이마와 목덜미를 수건으로 훔치면서 주지가 앞장서 나무계단을 내려갔다.
신라선신당 앞쪽 울창한 숲을 지나 산기슭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5분 남짓 걸어 오르니 큼지막한 묘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묘소 주위를 에워 싼 울타리에 이끼가 싱싱했다. 묘소 인근 샘에서 솟은 맑은 물이 졸졸거리며 흘렀다. 어른이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우뚝 솟은 비석이 봉대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묘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이 자란 이끼가 비석 하단부를 휘두르고 있었다. 주지와 다케다를 따라 합장하고 참배했다.
“여기가 원의광의 묘소입니다. 일본 건국 시조의 후예이자 다케다 집안의 조상입니다. 이름 뒤에 신라삼랑(新羅三郞)이란 칭호를 씁니다. 원의광이 신라삼랑이란 호칭이 붙은 것은 그가 신라선신당에서 성인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케다가 말했다.
“요시다, 조상의 묘에 왔으니 한 번 더 참배해야지.”
“예?”
“신라삼랑이라 하지 않느냐?”
“예? 예.”
벙벙한 봉대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잘했다.”
그때 주지가 싹싹한 어조로 말했다.
“과거 신라선신당 주위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천황도 해마다 이곳을 참배하곤 하였습니다.”
“흠─.”
다케다는 나직한 헛기침만 할 뿐 대꾸가 없다. 심호흡 한 번 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주지에게 재촉했다.
“스님, 내려가시지요.”
“여기에 오면 누구나 옆에 흐르는 샘물을 마셔야 한답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주지는 다케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샘물을 두 바가지 떠다가 다케다와 봉대에게 각각 내밀었다. 봉대는 정중히 두 손을 모은 뒤 단숨에 들이마셨다.
“이 샘은 언제 마셔도 일품이야.”
다케다가 중얼거리면서 내리막길로 앞장섰다. 봉대는 뒤를 따르면서 다케다가 무엇 때문에 이곳을 방문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침묵하는 스승에게 이유를 물을 만큼 자신이 없었다. 훗날 알게 됐지만 다케다는 특별히 일이 없으면 매년 한 차례씩 신라선신당에 들러 참배했다. 교토에 오기 어려우면 아오모리(靑森)에 있는 신라선신당을 참배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라진 스승
이상한 일이었다. 빌딩이라도 삼킬 듯 불던 바람이 밤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잦아들었다. 전날 오후 태풍이 서울을 관통했다면, 창문이라도 덜덜 거리며 울어야 했다. 수락산 아래 전깃줄이라도 윙윙거리며 울었어야 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전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밤새도록 원고를 읽느라 줄곧 깨어 있었는데도 바람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새벽녘 잠이 들었다가 오전 10시쯤 눈을 뜨고 집을 나섰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햇살이 눈부셨다. 폭탄을 투하하며 북진하는 폭격기 편대처럼 밀려들던 먹구름은 온데간데없었다. 하도 잠잠하여 라디오를 틀었으나 전날 몰아친 태풍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뿌리째 뽑힐 듯하던 가로수도 이파리만 살랑거렸다. 병원 중환자실 앞에서는 이승희 사범과 김정의 둘째딸 슬랑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슬랑은 나를 보자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렸다.
“차도는 좀 있어?”
“조금 전 의식이 돌아오긴 했나 본데 좀 더 두고 봐야 한다는군.”
“언니가 불쌍해 죽겠어요. 아버지랑 둘이 사는 바람에…….”
슬랑은 못내 괴로운 모양이었다. 슬랑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치원에서 생활하면서 보육교사 일을 하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수술 경과가 좋다니 좀 기다려 보지.”
“…….”
“참, 아버지 소식은 좀 알아봤어?”
“연락이 안 돼요. 친인척 어른들한테 모두 확인했는데 소용이 없었어요. 혹시 달성 고향이라도 가셨나 해서 먼 일가 어른들께도 여쭤봤는데 거기도 안계셨어요. 벌써 사흘째 연락이 안 되는데 어쩌죠?”
슬랑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나는 슬랑을 안심시키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그동안 경험으로 미뤄 김정이 이런 방식으로 훌쩍 떠나 버릴 위인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김정은 어디를 가더라도 철저하게 연락처를 남기고, 그것도 연락이 끊어질세라 이중삼중 연락처를 확인하고 움직이는 치밀한 성격이었다. 그런 김정이 기이한 문구가 쓰인 『빌랑대』 책자 두 권과 원고 뭉치만 달랑 남기고, 사흘씩이나 연락이 두절됐다는 것은 신변에 뭔가 중대한 변화가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슬랑과 함께 병원 인근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밝터에 도착했더니 이영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식이 끝났습니다. 집을 좀 치우죠.”
사건이 발생한 거실에서 마른 피를 닦아내는 작업은 이만저만 고된 일이 아니었다. 슬랑은 걸레를 빨면서 내내 눈물을 삼켰다. 걸레로 닦아 욕조에서 빨기를 수십 번 되풀이해도 바닥과 벽에 묻은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페인트로 벽면을 다시 칠하기로 하였다. 슬랑이 일러 주었다.
“지하실에 페인트칠 하는 롤러와 붓이 있을 거예요. 아버지가 전에 거기서 꺼내 오는 걸 보았거든요.”
지하실 불을 켜고 사다리를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더니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이 나타났다. 지하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푸집이었다. 김정이 무예수련을 위한 도구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거푸집은 가짓수만큼 형태도 다양했다. 여기저기 각종 공구 통이며, 페인트 통, 책걸상이 뒤엉켜 있었다.
“잠깐만요.”
내가 페인트 통과 붓을 찾아 막 올라가려는데 이영철이 소리쳤다.
“혹시 최근에 지하실에 있는 물건을 옮긴 적이 있습니까?”
“그건 모르죠. 하지만 여기 있는 물건을 왜 옮기겠습니까, 쓸 만한 거라곤 거푸집밖에 없는데. 거푸집은 새로 수련기구를 만들 때 필요하잖습니까. 최근에 수련기구를 만든 적이 없으니 옮길 이유가 없다고 봐야죠.”
“여길 좀 보세요.”
이영철이 책상 위에 난 먼지 흔적을 가리켰다.
“여기는 먼지가 그득한데 이쪽은 깨끗하잖습니까? 이건 누군가 최근에 움직였다는 말이거든요.”
“…….”
“지난번에 족자하고 진검 두 자루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있다면 여기 있지 않을까요? 나 같으면 여기에 감춰 둘 것 같은데.”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 훔치러 온단 말입니까?”
“그건 모를 일이죠. 참, 김정 선생님은 아직 연락이 안 되고 있죠?”
“네, 아직요.”
슬랑이 대답했다.
“이건 오랜 형사 생활에서 갖는 직감인데……. 김정 선생님의 연락이 끊긴 것과 이번 강도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왠지 모를 낌새가 느껴진다니까요.”
“아무튼 찾아보죠. 선생님이 사흘씩이나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는 처음이니까. 내일까지 연락이 안 되면 실종신고라도 해 두죠. 어디선가 경찰에 의해 발견되면 그때 연락을 받을 수 있도록.”
이영철은 내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고 나서는 능청맞은 농담으로 슬랑을 위로하면서 집 안을 깨끗이 칠했다. 새로 칠을 하고 집기를 정리하고 나니 새로 이사온 집 마냥 산뜻해졌다.
“앞으로 어떡할 거야? 집에 들어올 거야, 아니면 유치원에 계속 있을 거야?”
“당분간 유치원에 있다가 언니가 퇴원하면 같이 있을 게요.”
내 물음에 슬랑이 답변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이니까 당분간은 경찰 순시가 잦을 겁니다. 도둑이 들거나 하지 않을 테니 당분간 비워 둬도 무방할 겁니다.”
이영철이 슬랑을 안심시켰다. 모처럼 육체노동을 벌인 탓에 전신이 나른했다. 목이며 어깨도 뻐근했다. 나와 이승희, 이영철 세 사람은 밝터 인근의 칼국수집에서 막걸리를 주문했다. 일한 뒤에 마시는 탓에 막걸리가 감칠맛을 냈다.
“어제 태풍 안 불었어?”
“서해바다로 빠져나갔잖아. 몰랐어?”
“그래서 그렇게 조용했나?”
“바람이 불긴 불었지. 하지만 태풍의 세력이 급작스럽게 약해지면서 인근에 피해는 전혀 없었나보던데.”
오후 9시쯤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동안 지난 이틀 일이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제 일이 한 달쯤은 된 듯하였다. 느닷없는 강도 출현에 종적을 감춘 김정. 과연 주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잠자리에 누웠더니 김정을 만난 22년 전 기억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우연
내가 김정을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초겨울이었다. 목사가 될 꿈에 신학교에 진학했다가 자퇴를 하고, 휘청거리고 있을 때였다. 대안 없이 자기 길을 포기한 자에게는 오직 황망함과 암울함이 있을 뿐이었다. 서울 영등포에 사는 형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암담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땅거미가 짙게 깔린 청량리 시장 뒷골목에서 한바탕 후련한 싸움을 목격하게 됐다. 그 우연이 인연이 되고 필연이 되었다. 그날따라 부는 바람은 유난히
*
“저런 멍청한 놈, 그것도 못 집어넣어?”
“어이구 속터져. 저 새끼 빼 버려.”
“감독부터 바꿔 버려야 한다니까, 한심한 놈들.”
1982년 11월 25일 서울 청량리의 한 작고 허름한 지하다방은 사내들의 고함 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다방 내부는 흐릿한 조명에 퀴퀴하고 비릿한 악취가 떠돌고 있건만 서른 명 남짓한 사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축구 시합을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요란한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했다. 사내들은 한국 선수가 일본 골문을 향해 슈팅을 날릴 때마다 악을 쓰듯 소리쳤고 볼이 엉뚱하게 빗나가기라도 하면 으레 육두문자였다. 수비가 뚫리거나 패스하다가 공을 빼앗기면 당장 부숴 버릴 기세로 탁자를 두들겼다. 사내들이 흥분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숙명적인 일본과의 일전에서 한국이 1대 2로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한국 팀의 고질적인 골 결정력 부족을 질타했고 손님들도 이에 질세라 불만을 욕설로 토해 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나운서와 손님들의 고함은 불협화음을 내는 합창이 되어 갔다.
*
“어이, 반갑다, 친구. 하하하.”
언제 들어왔는지 고향 친구 최홍진이 어깨를 툭 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권위고 체면이고 깡그리 상실한 채 미친 듯이 고함치는 사내들에게 주의를 빼앗겨 그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음이다.
“자네 그 백만 불짜리 목소리는 여전하군 그래.”
“하하하, 그래? 고맙다.”
최홍진은 속초에서 중학교와 고교시절을 함께 지낸 친구였다. 그는 고교시절 고향에서 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싸움에는 휘말리지 않는 평범한 학생 축이었다. 물론 다른 친구들은 나를 하고자 하는 일에 아주 고집스럽다고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창동 사는 누이 집에 들러 며칠 묵어 갈 계획으로 지금 막 속초에서 상경하는 중이라고 했다.
“시끄러운데 있지 말고 어디 조용한 데로 옮기지.”
주위 소란에 자신의 목소리가 묻히는 걸 느꼈는지 최홍진이 제안했다.
“5분 후면 끝날텐데 결과나 보고 나가지.”
“그럴까?”
시큰둥하게 대답은 하고서도 그의 입에서는 불평이 그치지 않았다.
“다방이 완전 축구장으로 탈바꿈했군.”
그것도 잠시, 한일축구 정기전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호루라기가 울렸다.
“저 자식들, 순 똥볼만 차더니 결국 깨졌군. 조선 축구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니까. 자, 나가자. 어디 가서 소주라도 한잔 해야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
“참, 술은 안 마시던가? 그래도 일단 나가지.”
날개를 펼친 어둠이 건물을 하나둘씩 삼켜가고 있었다. 청량리 시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인들이 철시(撤市)한 자리에는 대여섯 개의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포장마차 틈새에서 흘러나온 백열등 불빛이 군데군데 깃드는 어둠을 교란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깔끔해 보이는 포장마차를 하나 골라 들어서자 손바닥만한 흑백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사내가 반갑게 맞았다.
“소주 한 병하고 오징어 한 마리 데쳐 주세요.”
묵은 때가 반질반질한 나무의자에 걸터앉으면서 최홍진이 익숙한 말투로 소리쳤다.
“안녕허슈? 소주 한잔 하러 왔시다.”
그때 조금 전 다방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던 사내 다섯이 뒤따라 들어오며 왁자그르르 소리쳤다.
“아휴, 오랜만이여. 그동안 뭐 하느라 그렇게 뜸했는가?”
주인아주머니는 반가움에 호들갑을 떨었다. 포장마차가 일순 왁자지껄해졌다. 사내들은 여전히 한일전 축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해 댔다.
“그 새끼들, 쪽발이 놈들한테 지다니,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게 말이야.”
“다시는 축구를 안 볼 거이다. 나가 축구를 보면 성을 갈 거이다. 성을…….”
그때 넉살 좋은 최홍진이 나섰다.
“자, 형씨들, 축구도 졌는데 같이 건배나 합시다. 맺힌 건 풀어야지요?”
그칠 줄 모르고 축구 얘기에 열을 올리던 사내들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 좋시다.”
“그럼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지화자.”
“좋다!”
한 잔을 냉큼 털어 넣자 이번에는 저편에서 병자처럼 야윈 사내가 나섰다. 볼에 그림자가 질 만큼 광대뼈가 불거지고 콧날 또한 독수리 부리처럼 뾰족한 젊은이였다.
“워메, 참말로 형씨, 썩을 놈들이 쪽발이 새끼들헌테 허벌나게 져부렀는디 지화자는 무슨 지화자라요 잉? 나가 ‘에라이’ 해블 거잉게 형씨들이 ‘씨부럴’ 허면 안 되것소?”
첫댓글 신 선생님~~~소설 연재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근데 이왕 올리실거면 제때제때 올려 주심 감사하겠음다...
신 선생님의 글을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이니까 이해 해 주세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