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문학기행 8] - 30년 만에 찾은 보성 다원
피톤치드의 보고 삼나무 숲
남도문학기행의 가장 포인트가 될만한 곳이 바로 녹차의 고장 보성에 가서 녹차밭을 구경하고 녹차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낙안 읍성에서 만난 친구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차에 올라 간곳은 어제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바로 녹차 밭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바로 식당에서 아침을 먹기 시작하였다. 어제 저녁과는 달리 조금은 식사가 부실한 편이라고 할까? 아침이라서 그런지 반찬이 좀 줄었다 싶었다.
아침을 서둘러 먹고 버스로 출발을 하여 보성을 향해 가는 동안 칠동 부근을 지나면서 대종교의 창시자이신 홍원 나철선생님의 생가 부근을 지나게 되어서 마이크를 잡고 나철 선생에 대한 것을 내가 직접 설명을 해드렸다.
입구의 녹차밭
“우리 서대문구 홍은동에는 벽산아파트와 유원 아파트 뒤쪽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대종교 본산]이 있습니다. 이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이 바로 이 벌교읍 칠동리ㅎ라는 곳입니다. 대종교는 종교라기보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세운 일종의 항일 단체이었습니다. 항일을 위해 민족정기를 받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국조 단군을 모시는 것으로 종교의 근본을 삼았고, 이런 정신이 바탕이 되어서 31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 중 상당수가 대종교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만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시던 독립투사들은 대부분이 대종교와 관계를 가지고 대종교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독립군 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정기를 찾자는 항일종교이었던 대종교가 받드는 단군상을 학교에 세웠다고 이것이 우상이라고 특정 종교에서 목을 자르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종교이기 이전에 민족을 지키려고 나섰던 대종교, 그리고 그러한 정신으로 세운 단군상이 수난을 당하는 모습은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녹차 밭 앞에서 어색한 포즈를--참 무드 없죠?
하는 설명을 해드리자 회원들은 박수로 감사를 표시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이미 버스는 조성면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른 들판을 보며 감탄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저기 보이는 것은 일본에 의해서 간척지로 개발한 예당 간척지입니다. 이곳에서 생산 되는 예당쌀은 한 때 부산에서 가장 고급 쌀로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수에서 배로 부산으로 실려 가는 모든 쌀은 모두 예당쌀이 되어서 팔리기도 하였습니다.”
하는 설명을 하고 나서 잠시 후 나의 목교 득량국민학교를 지나게 되었다. 이제는 폐교가 되어 버린 나의 모교 이었다. 다시 보성강 발전소를 보면서
대한 다원의 녹차밭 전경
“저기 보이는 것은 보성강에서 수평으로 굴을 뚫어서 보성강의 물을 쏟아 내는 저수조입니다. 저곳에서 떨어지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발전을 하고 발전기를 돌리고 내려온 물은 바로 예당 간척지를 적셔주는 농사용으로 쓰기 위해서 만든 것 이였습니다.”
하고 설명을 끝내자 쇠실 앞을 지나게 되었다.
녹차밭 앞에서 전문가가 잡은 배경
“지금 달리는 차창이 오른쪽을 보십시오. 잘 안 보이는 저 마을이 쇠실이라는 마을입니다. 길가에 있지만 마을이 잘 안보여서 난리시에 피난처로 유명한 곳입니다. 백범 김구성생님이 인천 감옥에서 탈옥을 하여서 피신을 하실 때에 이 쇠실마을에서 몇 개월 동안 피신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떠나실 ㄸ째 주인댁의 처녀에게 자기가 있는 동안 많은 일을 하게 해드려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을 정표로 주고 가셧다고 합니다. 나중에 백범 선생님이 귀국을 하여서 이 마을을 찾았을 때는 보성에서 이 마을까지 길바닥을 황토로 깔아서 환영을 하였다고 하는 마을입니다. 후일담으로 그 처녀의 손자를 김신장군이 공군참모총장이던 시절에 불러서 공군본부에 근무케 하여 보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는 설명을 마치고 나니 그럭재를 벌써 넘어섰는데 난생 처음 보는 도로가 연결이 되어서 보성 시내를 거치지 않고 직진하여 회천 쪽으로 달리게 되어 있었다.
가는 길목 마다 보성녹차축제인 다향제 안내표시가 되어 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다원을 향해 달려갔다. 다향제가 열리는 곳은 한국소리문화ㅣ공원이라 명명 되어 있는 대한다원의 입구에서 오른쪽 산골짜기에 새로 조성된 곳이었다. 너른 광장과 소리문화관 등의 시설이 가득 들어선 이곳은 산골에 작은 공연장이고 축제의 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차에서 내리는 우리에게 보성문화원에서 나오신 분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참으로 장관인 녹차밭 모습
일단 우리는 약 40여분의 시간이 남아서 우선 다원을 구경하고 9시 40분에 모여서 축제장으로 가서 차 만들기 체험활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선 대한다원으로 들어가서 유명한 다원의 풍경을 보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올라갔다. 그러나 아내가 힘들어하여서 높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늦어져서 시간에 쫓기기 까지 하였다. 일단 대한다원의 대표적인 풍경인 언덕배기 다원과 삼나무 숲을 구경하고 사진을 몇 장 찍은 다음에 서둘러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너무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이 되는 대로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 담아오려고 노력을 했지만 너무 바쁜 일정이어서 아쉽기만 하다. 1973년 대한다원의 둘째 따님이 6학년 이어서 학교 밴드부의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년 담임이라고 한번 초대를 받아서 왔다가 간 이후로 오늘 처음 방문이니 무려 36년 만인 셈이다. 내 고향이 보성인데 36년 만에 찾아 왔으니 이산가족의 만남보다 더 어려운 만남인 셈이다. 이런 생각으로 다원을 보니 내 고향이 대한 미안함이 앞서서 조그만 것이라도 하나 빠짐없이 챙기고 살펴보고 싶어 졌다.
다원의 모습을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담아오려고 했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야 한다니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다향제가 개막식을 갖는 날이라서 군수님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를 하고 비서관에게만 왔다 간다고 전화로 녹음을 해두고 행사장을 지났다.
2009.5.12. 11: 14'<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