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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 크라나흐 작, 1543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또는 Lud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
1483년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출생하다. 부패한 로마 가톨릭에 대항해 성경의 권위를 다시 세운 종교 개혁자이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할 수 없이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고, 자신이 설교자, 박사, 교수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삶 가운데 그가 행했던 일들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교회가 새로워졌을 뿐 아니라, 성서 번역, 많은 저작 활동, 작곡과 설교를 통해 사회와 역사가 바뀌고, 잃었던 많은 것들이 되살아났다.
생애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 (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 좋은 자리를 얻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이 대학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 trivium. 문법, 수사학, 변증법)과 사학 (四學 - quadrivim.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각기 마친 후 1502년 9월에 문학사 학위를,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비학교를 마친 루터는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루터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수도승이 되겠습니다.”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전혀 주저하지 않았다.루터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95개 논제중세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된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어거스틴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면죄부는 카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다. 한편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와 성인들에 의해 축적된 선행의 보고(寶庫)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죄를 지은 이는 보속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면죄부를 돈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하였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 연옥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테첼은 신자들을 유인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레데릭 현자가 작센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다. 교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68조). 마지막 논제에서 루터는 기독자는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내린다.
종교개혁애당초 학자들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전 유럽에 미치게 된다. 95개 논제 발표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카톨릭 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어거스틴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어거스틴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여기서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알려진 자신의 신학 원칙을 발표하면서 스콜라주의의 ‘영광의 신학’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추기경은 1518년 10월 12 - 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교회회의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카톨릭의 성사들보다 오히려 ‘믿음’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다음 해 초(1519년 1월) 교황청의 특별한 호의의 징표인 황금 장미를 가진 밀팃츠가 선제후에게 나타났다. 그는 선제후가 루터를 추방하라는 카예탄의 요구를 이미 거부한 것을 모르고 루터를 추방하거나 로마로 압송할 경우 선제후에게 있을 유익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루터를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 요청에 따른 만남은 허락되었다. 회합을 가진 두 사람은 이제 이후로는 피차 공적으로 침묵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엑크가 침묵을 깨트리고 루터를 공격하자 루터는 동료인 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찌히로 따라가 그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1519. 7·4 -14). 잉골슈타트의 교수였던 엑크는 자신의 대학이 아닌 라이프찌히 대학을 교묘하게 비텐베르크 대학의 도전자로 끌어들였다. 이 두 대학은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공작령의 작센과 선제후령의 작센을 대표하는 대학들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콘스탄스회의(1414 - 18)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엑크가 주장하는 “로마에의 순종”(Romana obedienia)보다 자신의 입장이 더 기독교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카톨릭(보편적)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루터가 교황뿐만 아니라 공의회의 권위마저 부인하는 것으로 만천하에 드러나 교황과의 결렬은 공개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이 논쟁을 계기로 해서 루터는 작센의 게오르그 공작과 같은 이의 적수가 되었으나, 한편 그의 단호한 태도는 멜랑히톤 같은 이를 우군으로 얻었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루터에 대한 기대도 증대시켰고 그에 대한 공격도 가속화 시켰다. 엑크는 라이프찌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이끌어냈다.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Exurge Domine, 주여! 일어나소서!)에서 교황 레오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하였다. 교서는 루터의 작품 중에서 41개 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정죄하면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 루벵에서 불탄 사건 이후 그리고 파문 위협을 담은 교서가 아직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 성(城)의 엘스터 문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 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의 화형식을 12월 10일 거행했다. 이로써 루터와 로마 사이의 모든 다리도 불에 타 버렸다.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는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 ‘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는 1521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되었다. 자신에 대한 파문은 루터의 영혼 깊숙히 상처를 내었다. 사실 루터는 면죄부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에도 교황에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면죄부의 오용들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바로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로마를 적그리스도에게 넘겨주었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그 때 루터는 비로소 교황청에 반격을 결심한 것이었다. 따라서 루터가 과거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급작스레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관계에서 돌아선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자기는 철저히 외면을 당하였으며 세 번이나 출교를 당하였다고 하였다.“1518년 슈타우피츠는 수도원에 대한 순종의 서약으로부터 나를 풀어주면서 아우그스부르크에 혼자 내버려두었다. 그리고나서 교황이 자신의 교회로부터 나를 끊어버렸고, 마지막으로 황제가 그의 제국으로부터 끊어버렸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영접하셨다.” 마지막 말은 시편 27:10에 대한 암시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교황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현자를 선두로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가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카를5세 황제는 루터에게 신변의 안정 보장을 약속하면서 루터에게 1521년 3월 6일, 초청장을 보내었다. 황제의 안전 보장은 믿을 바가 못되었다. 선제후의 궁전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였다. 결국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루터가 선택할 몫이었다. 루터는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서 보름스로 갔다. “우리는 보름스에 입성할 것이다. 지옥의 모든 문들과 하늘의 모든 권세들이 막으려고 할지라도 … 거기서 우리의 사명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슈팔라틴도 그의 결연한 모습을 감지했다.“그는 보름스로 가려고 한다. 그곳의 지붕위에 있는 기왓장의 수만큼이나 마귀들이 있을지라도….” 보름스에 1521년 4월 16일 도착한 루터는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하였다. 트리에르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물었다. 1.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2. 그대는 이 책들에서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첫 번 질문에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라 시인하고 자신이 쓴 책들이 더 있다고 대답했다. 두번째 질문에 루터는 하루의 여유를 구했다 루터는 4월 17일 저녁에 비엔나의 요하네스 큐스피니아누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날에 있었던 일과 다음 날 있을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 순간 나는 황제와 사절들 앞에 서서 철회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 … 내일 나는 철회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이 하루 이상은 허락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한 영원히 한 글자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 다음날(4월 18일) 루터는 황제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카를 황제는 루터에 대한 신분 안전 보장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루터가 3주 이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도중에 설교와 저술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루터는 아무도 모르게 동료들과 함께 보름스를 떠났다. 길을 가던 중 루터는 프레데릭 현자가 미리 주선한대로 위장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갔다. 여기서 루터는 게오르그 기사 행세를 하며 10개월간 지냈다. 한편 루터가 보름스를 떠난 후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서 루터를 법에서 추방된 자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법적으로는 누가 그를 살해한다고 해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가르침은 파리, 루뱅, 콜로뉴 대학 신학부로부터도 정죄당하였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강제된 휴가’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이 기간을 성경 주해, 카톨릭 학자들과의 서면 논쟁, 논문 저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번역에 사용하였다. 이 성경은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9월 성경(September Bibl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독일어 번역 성경은 루터 이전에도 있었으나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경은 독일에서 진정한 국민의 책이 되었다. 그는 번역 일을 훌륭히 수행하여 ‘독일의 나이팅게일들이 로마의 방울새들 만큼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을 위해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슈팔라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성서 번역의 원칙을 알 수 있다.“우리들은 당신에게 때때로 적합한 단어를 물어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단순한 말을 가르쳐 주십시오. 궁정이나 성 안에서 쓰는 말은 사절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순성으로 유명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그의 대학교수 동료인 칼슈타트가 교회를 무력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세 명의 ‘츠비카우의 예언자들’도 합세를 했다. 성만찬에서는 그때까지 평신도에게 거부되었던 포도주도 제공되었으며, 혁신적인 예배의식과 예복이 도입되었고, 미사를 거행하던 수도사들은 돌에 맞았으며, 성상들은 교회에서 제거되고 불태워졌으며 소요가 일었다. 루터는 믿음의 일로서 시작한 자신의 일이 오해받고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끼자, 12월 중 비텐베르크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5일간 머물다 돌아갔다. 이 때의 느낌을 슈팔라틴에게 쓴 편지에서 루터는 저들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강제 조항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나는 어느 누구도 폭력과 피흘림을 가지고서 복음을 위해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말씀을 통해 세상은 정복되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구원받으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부흥한다.” 소요가 계속되자 루터는 자신의 망명지를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교회에서 8일간 연속해서 설교하였다. 말씀만이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안녕과 질서가 복구되었던 것이다. “요약하여, 나는 말씀을 설교하리라. 나는 말씀을 말하리라. 나는 말씀을 적으리라.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도 강제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으리라. 믿음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지 강제되거나 강압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개혁의 원리 : 하나님의 말씀루터의 개혁 운동은 1517년- 20년 사이에, 카톨릭과의 단절 과정을 겪었으나, 한편 개혁 진영 내부 세력들과의 차별화 과정도 겪었다. 먼저 칼슈타트, 뮨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운동과의 차별화(1521-25), 다음으로는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자들과의 차별화(1524-25)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종교개혁의 급속한 발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긴 했으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라든가, 인문주의적 계몽, 그리고 사회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이 과정들에 있어서 공통점은 루터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전통을 성경 위에 올려 놓은 로마 카톨릭에 대해 루터는 ‘성서만으로’를 주장하였고, 열광주의자들의 주관적인 계시이해에 대해서는 성경의 객관적인 말씀을 주장하였으며,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확실성을 주장하였고, 복음을 정치적 운동에 오용하는 농민들에 대해서 복음은 오직 양심만을 상대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만 된다면 그 결과는 저절로 온다고 확신하였다.“나는 면죄부와 모든 교황주의자들을 반대하였으나 결코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잠을 자거나 친구들인 립과 암스도르프와 함께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시는 동안 말씀은 교황을 철저히 무력화 시켰다. 그 어떤 군주나 황제도 그 정도의 해를 입힐 수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말씀이 다 했다."
결혼과 죽음루터는 1525년 6월 13일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49 - 1552)였다. 루터는 자신이 결혼하려는 목적이 늙으신 아버지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나는 내가 가르쳐 온 것을 실천으로 확증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복음으로부터 오는 그렇게 커다란 빛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심한 이들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행동을 뜻하셨고 또 일으키셨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에 빠졌다’거나 욕정으로 불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그러나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 다 반대를 하였다. 동료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마귀가 웃을 것이며 그 자신이 그동안에 이루어 놓은 일을 다 헛수고로 만들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특히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그의 결혼선언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됨으로 해서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농민전쟁도 복음을 독재 체재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 교황은 세속권력에 대한 우위권을 주장하였는데, 이제 농민들은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복음의 이름으로 칼을 손에 쥐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다른 세상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바로 결혼하였다. 하나님이 오시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결혼을 하는 것이 원수 마귀를 대적하는 한 방법이라 믿었다. “나는 내 결혼식으로 천사들을 웃게 하고, 마귀들을 울게 했다.”
루터와 음악루터는 음악이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하였다. 음악은 신학과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영혼을 고치고 영들을 소생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음악이 없으면 인간은 목석과 마찬가지이지만 음악이 있으면 마귀를 멀리 보낼 수 있다. 루터는 이것을 영적인 고통 가운데에서 직접 경험하였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러나 음악을 멸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은 음악의 이 유익을 몰랐다. 그들은 오르간을 마귀의 유산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중요하게 보며 무한히 아낀다.”고 하였다. 한편 루터는 카톨릭교회에서 한정된 이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오던 찬송을 만인의 소유물로 돌려주었다. 이전의 그레고리안 찬트에서는 예배시 회중은 잠잠히 있고 성가대의 전문가들만이 송영을 번갈아 불렀다. 그러나 루터는 일반 회중도 찬송을 부를 수 있게 예배 의식을 개혁하였으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비롯하여 많은 찬송곡을 작사, 작곡 하였다. 그의 곡들은 ‘코랄’이라는 장르로 자리 잡는다. 그는 자신의 ‘작고 못생긴 목소리’를 불평했지만 플루트와 류트를 연주하는 능수능란한 음악가였다. 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찬송의 능력을 믿었다. 찬송은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배운 이들에게도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가장이 가족에게 찬송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루터의 신학 사상믿음만으로! sola fide 은총만으로! sola gratia 성서만으로! sola scriptura 루터의 종교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었다. 그의 개혁 작업의 핵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고 그 위에 자신의 종교를 쌓아가려는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중세 카톨릭 교회라고해서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또한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믿음의 중요성에 무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급진적이었던 것은 이 말들 앞에 붙은 한 작은 단어, “오직”(sola) 이었다. 루터는 카톨릭 교회가 이것들을 말하면서도 실은 그 밑바닥에는 인간중심의 종교가 사로잡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럼으로 해서 저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하면서도 그 성경을 해석하는 교황의 권위를 그 위에 세웠으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이 율법의 의를 쌓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능력’으로만 이해하였고,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처음에는 시작하다가 어느덧 ‘선행으로 형성된 믿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은 그 문자가 자명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서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해석자도 중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성서만으로!),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보시는 ‘호의’로 이해하였고(은혜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단번에 모든 율법을 성취하며 인간을 의롭게 한다고 하였다(믿음만으로!). 하나님 중심의 원칙 하에서 나온 이 세 가지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만으로’의 원칙이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다. 곧, 신구약을 통털어 성경의 본문 안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빼보라. 그리하면 성경에서 무엇을 더 찾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은혜만으로’는 대속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절대적 중요함과 또한 충분함을 주장하였고, ‘믿음만으로’는 율법의 종결자로 오시며 그 요구를 ‘텅 비게’ 하시는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전제로하는 것이다.“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은 교리뿐만 아니라 윤리, 문화, 정치에까지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루터는 이 조항 위에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고 그 중요성을 강변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더 이상 의롭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를 드릴 필요가 없다. 대신 그는 그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베푼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안에서 충실할 때 누구보다도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율법의 완성인 이웃 사랑(갈 5:14)을 실천하는 것이다. / 위키백과
용기를 주소서 / 마틴 루터
루터 번역성경(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
어느 날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나라의 꿈을 꾸었다. 그가 황금 유리가 깔린 찬란한 보석길을 따라 하늘나라에 도착했을 때 천국의 수위천사가 정중하게 마중하여 주었다. 웨슬레는 마음에 궁금해하던 한 질문을 수위 천사에게 던졌다. "천사님, 나와 더불어 영광스러운 감리교 운동을 하던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얼마나 왔습니까?" 웨슬레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천사의 답을 기다렸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천사는 한참이나 하늘나라 명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감리교인 명단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웨슬레는 큰 충격과 실망 속에 빠지고 말았다. '나의 신앙에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선교활동은 결국 실패한거야. 그렇다면, 칼빈의 교리가 맞았나 보다. 천국은 온통 칼빈 주의자들로 가득 차있겠구나' 웨슬레는 천사에게 힘없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장로교인은 얼마나 있습니까?" 천사는 다시금 생명책을 꺼내어 보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장로교인은 한 사람도 없소." '장로교인도 천국에 없다니, 그렇다면 우리들의 종교개혁은 실패를 해 버렸구나. 결국 하늘나라는 천주교인으로 가득 찼겠구나. 그 어려운 종교개혁을 이루었는데 어찌된 일인가' 기가 막힌 웨슬레는 다시 천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는 모두 천주교인들만 있습니까?" "여기 이 생명책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천주교인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드디어 웨슬레는 흥분되었고 천사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이오? 불교인입니까? 아니면 회교도들입니까?" 천사는 조용히 펼쳤던 생명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요한 웨슬레를 바라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여기는 그리스도인들뿐이오!" 천사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는 사라져 버렸다. 종교개혁은 중세기 로마교권이 부패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루터 이전에도 많은 개혁을 외친 교회지도자들이 있었다. 얀 후스를 비롯한 위클리프 등 여러 개혁들이 개혁을 시도한 적은 있었지만, 많은 추종자들이 따르지 아니하여 한 순간에 그치지 말았다. 개혁을 시도한 개혁자들은 개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의 부패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셨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가 비덴베르크 대학 정문에 카톨릭의 부패에 관해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부착한 것을 기폭제가 되어 시작된 것이다. 그 중에도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면죄부 판매 때문이었다. 당시 도미니크 종단의 사제 테첼이 간교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이 면죄부를 사게 되면 연옥의 고통에서 면제된다고 구원의 교리를 사람의 방법으로 미약한 성도들을 현혹시켰다. 면죄부를 판 돈은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지금의 바티칸시티에 있는 성당으로서 교황이 기거하고 있음) 증축에 사용한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 수익의 절반은 호헨쫄레른 가문의 브란텐 부르그의 알베르크가 모인츠의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용된 빚을 갚는데 쓰여졌다고 밝혀진 적이 있다. 여기에 분노한 마틴 루터는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치게 되었고,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때 루터가 황제의 소환을 받아 보름스 의회에 서면서 "교황에게건, 의회에게건 난 내 신앙을 버릴 수 없다. 그들의 오류가 빈번하며 서로 모순된다는 것은 대낮처럼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증거를 받아 확신하는 나는 결코 철회할 수 없다. 내가 여기 섰으니 딴 길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쳤다. 또 보름스에 가는 것은 생명에도 위험이 있으니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보름스에 있는 모든 기왓장이 다 마귀가 되어 나를 공격한다 해도 나는 가겠노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여파가 쯔빙글리의 믿음과 요한 칼빈의 지성이 함께 유럽을 휩쓸었고 존 낙스로 하여금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요한 웨슬리로 하여금 영국 감리교회를 창립하게 했고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 큰 부흥의 불길을 당기게 하였다. 당시 수도사들이 진정한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고행으로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려 했고, 기도문을 읽어도 그 내용이 어느 성경에 기초한 것인지도 몰랐다. 심지어 고급 사제들이 대낮에 창녀들과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설을 믿고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권위가 더 앞섰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주님께서 외치신 종교개혁의 중심은 무엇이었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종교개혁의 주제는 무엇인가? 첫째/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One Lord 구원은 오직 유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교황이나 신부가 주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고행으로 죄사함 받는 것도 아니며 면죄부를 산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요? 어떠한 위대한 인물도 대신할 수가 없다. 자수성가한 인물도 대신할 수 없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일지라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다. 우리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의 유일한 대속주가 되시고,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고, 유일하게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정신과 신앙은 세상 끝 날까지 교회가 보존해야 될 중심사상이다.
둘째/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One Bible 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Back to the Bible)고 역설했다. 교황의 권위도 성경의 권위보다 앞설 수 없다. 성경 외에 그 어떤 사람의 철학도, 사상도, 문헌도, 다른 경전도 우리 구원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없다. 참고는 될지언정 신앙의 표준도 구원의 표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표준이며 신앙의 대상이 되며 신앙의 고백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장자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호세아 선지자는 그 이유를 밝혔다.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너희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이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으며(호4:1)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외쳤다. 1927년 쥘리앵 방다에 의해 출판된 <지식인의 반역>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행군 도중 자꾸 뒤쳐지는 동료를 구타하는 병사를 보고 톨스토이가 꾸짖었다. '친구를 그렇게 대하다니 자네는 성경도 안 읽었나?' 그러자 병사는 '상관께서는 군대의 규율을 안 읽으신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세를 바로잡으려는 톨스토이의 질책과, 엄격한 징벌로 기율을 잡으려는 부하의 책임 의식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가? 아니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가? <지식인의 반역>의 저자 쥘리앵 방다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 50년 이래 유럽에서 이름을 떨친 모럴리스트의 대부분이 -이상하게도 프랑스에서는 작가들이- 성서를 비웃고 군대의 규율을 읽도록 인류에게 권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무엇을 책망하셨는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2-9)고 꾸짖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무엇을 꾸짖었는가?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오늘날의 장로들의 유전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학자들의 주석, 신학자의 해석과 교의, 교단들의 헌법과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때와 똑같이 성경의 권위보다 주석이나 헌법 그리고 학자들이 만든 교리가 더 권위가 있다. 교단에서 목사나 직분자들을 징계하는 표준은 성경이 아니라 교단의 헌법이나 교리이다. 그리고 성경보다 교단의 헌법이나 교리를 위배했을 때 정죄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는 것이 주목할 일이다.
장신대 출신의 이동진 목사는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라는 논제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성령에 의하여 계시하시는 계시의 종교'라고 히10:16절을 제시했다.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그는 이어서 '기독교란 하나님이 당신의 뜻들인 하나님의 법을 성도들의 심령에 계시를 통하여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고 인도하는 종교이다. 계시란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고전2:7)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전달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분으로써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통달의 영이시며 또한 계시의 요소와 속성을 갖고 있는 계시의 영이시다(고전2:10). 하나님의 전지성 안에는 밝혀지지 않은 세상의 비밀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진지성인 비밀에 대한 지혜, 지식...등 모든 것은 성령의 3대 원리(가르치고, 생각나고, 평안) 중 하나인 가르침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달된다(요16;13). 하나님의 전지성을 끝없이 펼쳐진 다함이 없는 무한한 운동장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인도란 캄캄한 어둠속의 후레쉬와 같아서 성도 각자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부르짖고, 찾고, 구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는 부분적인 전지성인 것이다. 이러한 전지성을 가지고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생각나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요14:26-27)고 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계시로 인도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계시와 예언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계시의 성격에 따라서 예언이 될 수도 있다. 계시에 대하여 교리주의자들은「계시는 사도시대의 계시록으로 끝났다」라고 하며 성경이외의 계시는 더 필요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대한 대단한 오해이다. 성경 안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과 예언서 안에는 그 모든 계시와 예언을 성령으로 다시 각자에게 직접 계시 즉 성령의 인도해 주겠다는 것이 새 언약의 주요 핵심 골자'라고 제시했다. 오늘날의 계시는 66권외에 새로운 성경을 만들기 위한 계시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성경에 근거한 계시는 오늘날도 계속 되어야 한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성령의 계시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모든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표준은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말세에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세에 부어주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성경을 재조명해야 새로운 교회, 새로운 개혁, 새로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 셋째/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받는다-One Faith 구약이나 신약에서 선포한 구원받는 선행 조건은 우리들의 믿음이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가장 크게 강조했던 것도 역시 '오직 믿음'(Sola Fidei)이었다. 우리도 구원받는 것은 면죄부를 사는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고행을 행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당시 교인들은 죄를 지으면 고행을 해야 죄가 없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성계단」을 맨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모래알이나 유리조각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입을 계단에 맞추었다. 지금도 이태리나 스페인에 가보면 그렇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여기에 강력히 반발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경의 말씀을 강조하고 외쳤다.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강력하게 성경대로 주장했다. 사도 바울은 엡2: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했고, 9절에서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에서 어떤 선행을 조건으로 제시하신 적이 없다. 구원은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율법의 할례를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침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물 속에 잠겨 침례를 받음으로, 아니면 카톨릭의 주장대로 고행의 대가로 받는 것도 아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를 지적으로 정적으로 동적(의지적)으로 인정하고 고백하여 시인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갈 2:16절을 통해 재차 강조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했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성경을 통해 선포하신 예수 십자가의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또는 선지자나 주의 종들을 통해서 선포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선포하신 말씀을 지적으로 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아멘하여 순종으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처럼 그리고 신약의 제자들처럼 믿음의 증거를 나타낼 때 구원을 확증하게 되어진다. 믿음의 말씀, 믿음의 기도, 믿음의 은사, 믿음의 순종만이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으로 정적으로 동적으로 믿으시기를 축원한다. 넷째/오직 성령을 받아야 한다-One Spirit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대속의 사명을 다하시고 부활 이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500여 성도들을 모아 놓고 간곡하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그때에 주님도 동문서답을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여기서 주님의 간곡한 부탁의 핵심이 무엇인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성령의 불세례를 받으라는 것은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 성령의 은사를 받으라는 뜻이다. 왜 주님은 간곡한 부탁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했을까? 주님의 제자들은 왜 성령을 받아야만 하는가?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서야 주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았다. 첫째/성령을 받아야만이 거듭나기 때문이다. 새 마음을 가지는 것, 새 사람이 되는 것,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할례 받는다고 되는 일인가? 율법을 지킨다고 되는 일인가? 성형 수술한다고 되는 문제인가? 어느 어리석은 사람처럼 성전환 수술한다고 되는 문제인가? 지식으로도, 과학으로도, 철학으로도, 권세를 가진다고 할지라도, 침례(물세례)를 수 십 번 받는다고 되는 문제인가?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닌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이 된다는 새로운 소식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말하기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성령으로 되느니라"(슥4:6)고 했다. 예수님의 제자 게바는 어떻게 거듭났는가? 성령을 받고 베드로로 거듭났다. 우레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거듭났다. 자기중심적 사고로 살았던 사울이 성령을 받고 나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작은 자 바울로 새롭게 태어났다. 새롭게 태어난 바울을 보고 온 유대인이 놀랐다. 그를 경계했던 제자들도 놀랐다. 그는 고백하기를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성령의 은혜로-①카리스:성령을 받은 증거(싹) ②카리스마:성령의 나타남의 은사(잎과 꽃) ③카리스마타:성령의 작용으로서 결과 (열매)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바울의 고백 핵심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요, 모든 사역도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둘째/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의 역사이다. 바울은 고전12:3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을 나의 대속자로 믿고 나의 구세주로 의지하며 나의 영원한 생명과 나의 신랑 되신 주님으로 믿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가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알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보편적인 사람들이 그리고 타종교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말하는 일이 흔히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라 마귀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분별해야 한다. 셋째/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이다. 바울은 롬8:15절에서 그리고 갈4:6절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했다. 더욱 확증적인 말은 롬8:16절에서 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더 나아가 이 사실을 보증하는 일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 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 5:5, 엡1:13, 14, 요일3:24) 넷째/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은 더욱이 성령의 권능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사명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은 우리의 힘이나 지식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힘이나 지식으로 전하는 복음은 변질되는 우려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강권하신 이유를 이제 알 수 있다. 성경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자기 힘으로 사명을 한 적이 있나요? 역시 바울도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강권한 것은 자기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우리에게 권면한 것이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싶나요? 성령을 충만히 받기를 기도하라.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에 증인이 될 수 있다. 다섯째/하늘에 영원한 집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의 힘이다. 바울은 고후 5장에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해서 전하면서 이 일을 이루고 이 일에 보증이 되는 것도 성령이라 하셨다.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후5:5)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자격에서 육체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고 바울은 말한다. 따라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타내신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꾼이 될 수 있다. 이 시대를 개혁하는 일꾼은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과 함께 세상을 개혁하는 일꾼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과거나 지금이나 성령과 함께 세상과 교회를 개혁하는데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 특별히 종교개혁 정신과 배치되는 이단 신학,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배격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지켜나가야 한다. 특히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세계 종교를 하나로 만들어 사탄에게 경배하게 만들려고 기독교의 유일 사상을 흔들고 혼란스럽게 급기야는 부정하게 하려는 음모가 시작되었다. 현재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마귀의 소굴로 만들고 교회를 근본적으로 흔들며 파괴하려는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신학, 해방 신학, 민중 신학, 여성 신학, 후기 근대주의 신학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배격해야 교회가 살고 사도행전적 교회를 회복하고 사도들의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 1973년 방콕에서 열린 WCC 대회에서 복음화와 선교는 의미없는 일이라고 선언하고 해방이 참된 선교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의식화 교육이나 해방운동을 위해서 선교비를 지출하면서 영혼 구원이나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지불정지 명령을 내렸다. 1976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대회에서는 한국의 이화여대 조직신학 교수인 정현경은 한풀이 춤을 추면서 하갈의 영과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여! 어서 오라고 했다. 그는 성령을 동양의 氣로 설명하고 해석하여 교계를 어지럽힌 적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유일사상을 위협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의 바른 길을 나쁜 길로 미혹하고 호도하는 사상과 세력이 있다.
첫째/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사상이다. 이 이단 신학사상은 지금까지 내려온 전통적인 진리를 모두 거부하는 사상이다. 특히 홍정수 교수에 의해 한국에 널리 영향을 미치게 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으로 해석하고, 홍해 바다 이적을 갈대밭으로 해석했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많은 사상을 주장했다. 결국 그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처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후기 근대주의 신학사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 과학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으로 해석하여 유일사상을 부정하려는데 있기 때문에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 둘째/종교 다원주의 사상이다. 이 사상은 카톨릭 신학자들 중심으로 나타난 신학사상이다. 카톨릭이 부패해지면서 결국 하나님의 유일 사상을 부정하고 타종교와 같이 모든 신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최근에는 인도 신학자들을 통해 세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을 우리나라 학자들과 목회자들로 받게 되었다. 다원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류영모, 함석헌, 유동식, 변선환, 이현주, 길희성, 오강남 교수등이 있다. 시간상 이들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해줄 수 없어 아쉬움이 있지만, 종교 다원주의 사상은 21세기의 무서운 악이요 독이다. 다원주의 사상에는 무서운 함정이 숨어있는 사상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핵심 사상은 무엇일까? 절대 진리는 없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 고전 13:11절을 들어 어린아이일 때는 배타주의 신앙이며,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다원주의 신앙이 된다. 이들은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보지 않고 상징적으로 보는데 있다. 셋째/여성 신학 사상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도할 때 하나님 어머니라고 해야 한다. 요즘 현대에 와서 여성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을 여성 중심으로 정립하여 여성의 한을 풀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이로 인해 남자를 사랑하고 존경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복수의 대상, 증오의 대상, 공격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극단적인 여성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도 부활도 천국도 지옥도 부인하는 사례도 있다. 여성 신학은 21세기의 아주 위험한 사상이며 여성의 한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 <천국이 있는 풍경>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마르틴 루터 성지 (아이슬레벤,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성)
아이슬레벤 루터 생가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루터가 1483년에 태어나 1546년 63세에 생애를 마감한 것은 아이슬레벤이었으나, 그가 활동한 중심 비역은 비텐베르크였다. 마르틴 루터는 때때로 태어난 고향을 방문할 때가 있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생가는 1689년에 화재로 거의 전소되어 1693년에 재건되었다. 생가가 재건될 때, 위층은 안뜰 쪽으로 아케이드만큼 불거져 나왔으나, 후기 고딕 양식의 중심 부분은 보존되었다. 의자가 딸린 현관, 입구의 각진 곳을 깎아 낸 평평한 천장, 1층의 아래쪽 계단 등 이전 건물의 요소가 새로운 건물에 도입되었다.
아이슬레벤 거리의 루터 동상(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아이슬레벤 거리의 루터 동상
<루터의 생가 아이슬레벤>
루터의 생가
루터의 생가
아이슬레벤 루터 생가
아이슬레벤 루터 생가 지역 모형(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의 생가
루터의 생가
루터 부모(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 부모
루터 아버지(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루터 어머니
루터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1525년 6월13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이때 루터의 나이는 42세, 신부는 16세 아래인 26세였다.
마틴 루터
멜랑흐톤
멜랑흐톤 루터의 평생 동역자였던 멜랑흐톤이다.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의 그리스어 주임교수로 부임했던 천재적인 학자였다. 그는 본래 신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대학에 와서 루터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운동에서 충실한 루터의 동지가 되었다.
대석학이었던 멜랑흐톤은 루터가 그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어학 대가였던 멜랑흐톤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터성경’을 오늘날까지 독일 사람들의 사랑 받는 번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루터 곁에 충성스런 동역자 멜랑흐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비텐베르크시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과 멜랑흐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어, 종교개혁이 두 사람이 함께 이룬 대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이슬레벤 루터 임종의 집>
아이슬레벤 루터가 임종한 집
루터가 임종한 집은 별 흠집 없이 보존되고 있다. 이곳에는 루터의 초상화와 오리지널 편지, 복제 데스 마스크가 있다. 용골 모양 아치로 테를 두른 의자가 딸린 현관이 파사드를 장식한다. 특히 임종의 방을 포함한 각 방은 역사적인 고증을 거친 치밀한 복원 작업을 통해 추억의 장소답게 꾸며져 있다.
아이슬레벤 루터가 임종한 집
아이슬레벤 루터가 임종한 집
루터가 임종한 방 데스 마스크가 있는 루터의 임종의 방.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한 안드레아스 성당에서 가까운 장소에 있다.
마틴 루터, 크라나흐 작, 1543
루터의 친필
루터의 친필(출처- 정해은 목사)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루터가 청소년기를 지낸 곳(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독일의 중부 알프스라 할 수 있는 튀링겐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아니제나흐 시, 루터와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다섯번의 체류를 통하여 깊은 인연을 갖게되는데, 이는 루터 어머니의 고향이라서 친척들이 많이 있음에 연유한다고 볼 수있다.
루터가 15세이던 1498년부터 1501년까지 교구학교인 St George School을 다니며, 루터의 학교생활은 근면 건실하여 선생들로부터는 물론 학우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어 작곡은 비평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곡을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종종 이 도시를 회상하며 ‘오 나의 사랑스런 도시여!’ 하곤 했다.
1521년[38세]에는 보름스의 제정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어,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죠지 교회 (Georgenkirche)에서 설교를 한다. 그리고 위장납치되어 은둔하고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그는 신약성경을 헬라어 원전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 역작을 남긴다.
1529년[46세]에는 마르부르크에서의 종교논쟁에 참여키 위해 가는 길에, 그리고 노년인 1540년[57세] 지방감독이었던 J. Menius의 집에 3주간 머무르며 교제를 나눈다.
이러한 루터 기념관들은 잘 관리되고 있으며, 그중에도 루터의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Luther House는 독일의 전통 가옥으로서 문화재로 보전이 되고 있으며, 또한 유물 및 기념품들이 안에 전시되어 볼수있다. 예를 들어, Lutherstube(공부방)에서는 루터의 학창시절을 볼수있고, 2층으로 올라가면 개신교 목사관의 역사를 볼 수있다. 카알 광장(Karlplatz)에는 루터 생전의 모습을 실제 크기로 성경을 손에 들고있는 동상을 볼 수 있으며, 동상의 받침대에는 루터가 아이제나흐에 체류한 기간들이 부조되어있다.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 박물관
<아이제나흐 죠지 교회>
죠지 교회(출처- 정해은 목사)
아이제나흐 광장 옆 루터가 설교하였던 George교회는 연중 무휴 관람할 수 있다. 이 교회는 루터가 1521년 보름스의 제정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어,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죠지 교회 (Georgenkirche)에서 설교를 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위장 납치되어 은둔하고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그는 신약성경을 헬라어 원전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 역작을 남긴다.
설교단
죠지 교회
죠지 교회
죠지 교회
마그데부르크, 루터가 공부한 도시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곳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공사중)(출처- 정해은 목사)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마틴 루터
마틴 루터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구 교회
벼락이 떨어진 곳과 회심 서약을 한 교회 제단
<바르트부르크성>
바르트부르크 성
루터의 일기 "독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기위해 머물렀다는 일기"(출처- 정해은 목사)
바르트부르크성(출처- http://blog.naver.com/hmlee6542)
보름스 종교재판에서 촬스5세 황제는 1521년 5월 26일 루터의 나이 38세 때, 교황과 마찬가지로 루터를 파문했다.
'마틴 루터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정원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말 것이며, 그를 숨기지 말고, 은밀하게 공공연하게 말로나 행위로써 그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추종하거나 지지하거나 혹은 원조하지 말 것이다. 그를 잡을 수있는 곳에서는, 그를 붙잡아 제어하고 생포하여 단단히 결박한 다음 우리에게 압송해야 한다.'
이때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납치극’을 벌여 루터를 그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채에서 가명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한 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루터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약 성경 전체를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했고, 곧 이어 구약 번역도 시작되었다. 경이롭게도 총 12년이나 걸려 1534년 9월[51세] 최초의 완역본인 비텐베르그 성경이 출판되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 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프레데릭 공, 바르트부르크성으로 루터를 피신케 하고 돌보아주었다.
바르트부르크성(출처- http://cafe.naver.com/stronghold)
바르트부르크성
바르트부르크성
예배실
예배실
강단보
독일어 성경 번역 방(출처- 정해은 목사)
독일어 성경 번역 방
바르트부르크성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방
전시실
루터의 번역성경(출처- 정해은 목사)
루터의 번역성경
루터 번역성경(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마틴 루터
마틴 루터
마틴 루터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출처: 성화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