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 이세민은 병법에 능통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제왕 이었는 바, 그가 병법에 관하여 이정 장군과 나눈 담론을 기록한 책이 `이위공 문대'이고, 정치에 관한 언행을 편찬한 책이 `정관정요'다.
서기 598년 수나라 양제 휘하의 무장이었던 이연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617년 5월 태원에 서 아버지와 함께 거병, 천재적인 용병술로 수군을 물리치면서 산서를 남하하여 11월에 수도 장안을 함락하고 실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 이듬해 당왕조를 세운 부친에 의해 상서령 및 대장군의 요직에 임명되고 진왕에 봉해진다.
이세민은 성채를 쌓고 병사들을 충분히 휴식시키면서 적이 먼저 오기를 기다렸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기병으로 보급로를 교란하여 군량이 떨어진 적이 퇴각하기 시작할 때 모든 역량 을 집중하여 추격하는 방책을 써 설거부자, 유무주, 두건덕, 왕세충 등의 군벌을 차례로 격파함으로써 당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그가 병법에 해박하고 통솔능력이 뛰어났다는 사실은 `이위공 문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상편에 보면, “내가 수나라 송로생군을 격파할 때 접전 초기에는 우리 의병이 불리하여 약간 물러났소.
그래서 내가 직접 정예기병을 이끌고 적의 측방으로 돌격하였소. 그 결과 나는 송로생의 군을 사로잡게 되었던 것이오. 이것은 정병이요, 기병이요?”하고 묻는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기병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지만, 통솔면에서 들여다 보면 전투 초기에 적에게 패하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달려나가 전세를 반전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통솔관은 중편에서 “장수는 형벌을 가혹하게 하고 법을 엄하게 하여, 사졸들로 하여 금 장수인 자신을 두려워하게 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말을 나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을 볼 때 위엄보다는 자애를 중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절도가 있는 군대는 무능한 장수가 지휘하더라도 적에게 패하지 않고, 절도가 없는 군대는 유능한 장수가 지휘하더라도 적을 이길 수 없다'고 한 제갈량의 말이 결코 불변의 정론은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군의 절도도 중요하지만 장수의 역할을 대단히 중요시한 것 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장안 궁전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제거(현 무문의 변)하고 당나라의 2대 황제가 되었다. `정관정요'를 통해 제왕으로서 그의 통어 사례 한가지만 소개하겠다.
정관 원년, 당조 창업에 공로가 있는 중서령 방현령을 형국공에, 병부상서 두여회를 채국공에, 이부상서 장손무기를 제국공에 봉하여 훈공 제1등으로 하자 그의 숙부인 희안왕 신릉이 불평을 털어놓으면서 말했다.
“수나라 말 고조께서 태원에서 의군의 기치를 치켜들 때, 나는 병력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포상하시는 것을 보니, 방현령이나 두여회 등은 다만 문서나 뒤적이던 문관들로서 나와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자들이 아님에도 훈공이 제1등이라니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태종이 말한다. “국가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일은 오직 상벌뿐입니다. 방현령 등은 싸움터 에서의 공로는 없지만 전쟁 중에는 대장의 본영에서 책략을 세우느라 애썼고, 난이 끝난 뒤 에는 국가 경영을 위해 방책을 확립하는 등의 공적이 큽니다. 한나라 소하는 싸움터에서의 군사적인 공로는 없었지만 전시에는 후방에서 지령을 발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의 고조를 천자로 추대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공이 한조에 있어서 가장 으뜸 되는 이유입니다.” 그는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는 말을 실천하여 23년 동안 `정관의 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고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