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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5년 ‘대구인혁그룹’ 연구
윤정원, 경북대, 2020. 08, 304쪽
* 이 논문의 소중함은 내용의 수집과 정리 그리고 배열에만 있은 것만이 아니라, 논자의 기나긴 노력과 시간의 과정에 숨결과 온기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먼저 가신 분들에 대한 정을 내면에 삭히면서 살아온 자들의 이야기를 엮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가 아니라, 그 활동들이 어제로부터 이제에도 심층으로 흘러서, 아제인들이 살아갈 방향과 덕목을 제시해 주는 것이리라. 학문의 기나긴 길은 작물을 경작하는 농부의 심정과 같다고들 하는데, 자료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를 새기면서도 일정한 양에 수렴을 하는 노력은, 농부가 씨를 뿌리고 잡초도 뽑아야지만, 속아주기도 하고, 곁가지를 치기도하며 제대로 모습을 갖추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리라. 논자 윤정원의 소중한 결실에 찬사를 보낸다.
추억들의 단면들이 오래 지나 흐릿해지고 사라져가는 듯하지만, 기억의 역동성은 생명의 이어짐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사대부중의 기억 속에 흐트러져 흐르고 있지만, 저 밑바탕에서 아우성치다가, 어느 땐가 밀고 나오려는 용출선처럼, 끊임없이 균열의 틈새로 열기를 뿜어올리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인권과 사법의 대결이 오래되었고, 자연권과 국가법의 사건으로 안티고네 이야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삶의 고비마다 자유, 평등, 인권이라는 자연권은 심층에서 표면으로 솟아나려 하였고, 고착된 사회체제에 저항하며 삶의 과정에서 우여곡절, 망설임, 지체, 맴돌이하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양상이다.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은 자연권을 지닌 인민의 덕목이며, 삶의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권능이다.
* 대구인혁그룹은 도예종, 서도원의 민민청경북도맹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사회당 그룹(강창덕으로 대표), 통민청그룹(이재문으로 대표), 대구지역 학생민통련 그룹(정만진으로 대표), 노동운동가 그룹(나경일로 대표) 등이 인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대구인혁그룹의 인적구성은 1964년 상반기부터 1967년 무렵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이에 대구인혁그룹은 1971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운동 방향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 고민의 연장선은 학생운동과의 연계, 전국 회의구조체계의 완비로 이어졌다. 보다 장기적으로, 보다 신중하게 운동 주체를 재생산하고 운동이념을 구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학생운동과의 연계는 대구인혁그룹 내에서도 이견이 치열했지만 결론적으로 여정남을 매개로 경북대 이념서클로 연결되었다. 전국 회의구조체계는 경락연구회의 운영이었다. ... 대구인혁그룹의 이념 지향성은 통일문제를 근본 문제로 두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지향하였다. 대구인혁그룹의 사상과 활동은 혁신세력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 이념적 흐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대구인혁그룹의 사형집행의 여파는 두 가지 상반된 효과를 가져왔다. 사회운동 주체들에게는 정권을 향한 분노를 더욱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전국 지명수배 되었던 이재문이 경북대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조직하여 반정부활동을 이어갔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반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에 있어서 정부가 의도한 대로 공포심을 심어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민들은 독재정권의 잔학성에 무력감을 실감하고 있었다. 한편 공포심을 넘어서 대구 경북의 박정희 신화가 남긴 유산은 길게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민중은 변역의 시대에 징후처럼 흐르고 있듯이. (55RKI)
I. 머리말 ····· 1
1. 문제제기 ··· 1
2. 연구동향 ··· 6
3. 연구자료와 방법 ···· 14
II. 1960-61년 대구사회운동과 ‘대구인혁그룹’ 기반구축 ···· 27
1. 운동주체의 형성과 운동노선 ···· 27
1) 1960년대 초 대구 혁신세력 지형 ····· 27
2) 혁신세력의 정치세력화 ···· 34
3) 혁신세력의 운동노선 ··· 45
2. 대구사회운동의 조직과 활동 ··· 49
1) 통일⋅사회운동단체의 결성 ···· 49
2) 통일⋅사회운동단체의 활동 ···· 73
3. 대구인혁그룹 기반구축: 민민청경북도맹의 연대활동 ··· 84
1) 연대활동을 통한 기반구축 ···· 84
2) 대구인혁그룹의 60년대 초반 사회인식 ··· 94
III. 대구인혁그룹 형성과 반독재민주화운동 ··· 105
1. 박정희정권의 반정부세력 제거과정 ···· 105
1) 쿠데타 세력의 숙청작업과 대구사회운동의 모색 ··· 105
2) 민민청 · 통민청 통합운동 전개와 1차인혁당사건 ··· 121
2. 대구인혁그룹 형성과 확장 ··· 144
1) 형성: 지역 기반으로 구성된 그룹 ···· 144
2) 사회인식: 자주통일론과 반독재민주화 ··· 150
3) 확장: 학생운동연대와 전국화 모색 ··· 159
3. 대구인혁그룹의 장기집권저지운동 ··· 168
1) 후보단일화 운동과 부정선거규탄운동 ··· 168
2) 3선개헌 저지운동의 전개 ··· 174
3) 71년 대선과 민주수호경북협의회 활동 ···· 183
IV. 대구인혁그룹의 전국사건화, 인혁당재건위사건 ··· 202
1. 유신체제 수립과 학생운동의 도전 ··· 202
1) 유신과 긴급조치시대의 개막 ···· 202
2) 학생운동의 도전, 경북대 민청학련사건 ···· 209
2. 대구인혁그룹으로 조작된 인혁당재건위사건 ···· 217
1) 공안사건 만들기: 배후조직의 급조와 배제전략 ··· 217
2) 정세관 차이가 만든 서울행과 전국사건화 ···· 225
3)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실체: 조작으로 완성된 공안사건 ··· 237
3. 사형집행과 그 여파 ··· 252
1) 사형선고의 배경 ··· 252
2) 사형집행을 둘러싼 의혹 ··· 265
V. 맺음말 ··· 272
【국문초록】 ··· ⅰ
【부록1 : 4・19혁명 시기 대구지역 주요단체의 인물 】 ··· 277
【부록2 :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제6조특수반국가행위위반 관련자 명단】 ·· 281
【참고문헌】 ··· 285
【Abstract】 ··· 300
*** 내용 중에서 ***
I. 머리말 ····· 1
대구인혁그룹은 도예종, 서도원의 민주민족청년동맹경북도맹(이하 민민청경북도맹)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사회당경북도당 그룹(강창덕으로 대표), 통일민주청년동맹 그룹(이하 통민청, 이재문으로 대표), 대구지역 학생민주통일연맹 그룹(이하 학생민통련, 정만진으로 대표), 노동운동가 그룹(나경일로 대표), 여정남 등 경북대 이념서클이 인적으로 이념적으로 결합되었다. (5)
연구사적 의의
첫째, 1960-1975년 대구혁신세력의 활동을 통해 당시 혁신세력의 지역적 성격과 의미를 규명한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 둘째, 본 연구는 혁신세력의 흐름 속에 있는 대구인혁그룹의 이념 지향성을 알아보는데 의의가 있다. .. 셋째, 대구인혁그룹 활동을 현재적 의미와 가치에서 재조명해 보는데 의의가 있다. .. 넷째, 197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의 주도세력은 혁신세력에서 학생과 재야세력으로 이행했다. 그러므로 한국 현대사에서 대구인혁그룹의 운동사적 위치는 마지막 혁신세력으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있다. 대구인혁그룹의 활동을 추적하는 것은 혁신세력 운동이 어떤 ‘변화와 한계’를 가졌는지를 파악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12-14)
3. 연구자료와 방법
본 고는 국가기관의 조사보고서, 사건 관련자의 증언과 구술 자표집, 재판기록과 수사기록 등의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고자 한다. (14)
먼저 1차인력당사건 1974년 인혁당재건위사건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20명의 ‘증언’과 사건 관련자들이 남긴 ‘구술자료’이다.(17)
표1. 구술증언 참여자의 구성 및 상태(증언채록 시점 기준, 가나다순)[20명],
강기룡, 경대 정외과 1972,
강창덕, 대구 상업학교 수료(1948)
권오봉, 경북영해 성내보통학교(1925졸)
김기곤, ?-?
김성희, 경대 농학과(1962)
나경일, 일본 팔번(八幡) 고등학교(1945)
림구호, 경대 물리학과(1967)
류근삼, 대구 계성중 졸(1957)
서동훈, 대구 미래대 전교수(서도원 유족)
신동숙, 초등 교사역임, 도예종 유족
이강철, 경대 정치학과(1966)
이일재, ?-?
이창훈, 경희대 지리학과(1987), 4.9평화통일재단 사료실장.
이현세, 경대 지리학과(1987)
임규영, 경대 일반사회교육(1971)
장주효, 경대 정치학과(1962)
정만기, 경대 정외과(1969)
정화영, 경대 정외과(1967)
황철식, 경대 불어과(1971)
함종호. 경대 도서관학(1976). (18-19)
본 고(稿)도 이런 한계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주요 구술증언자가 생존해 있지 않아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본 연구의 구술증언이 가지는 가장 큰 한계이다. (20)
본 연구에서는 박정희정권이 반대세력 제거를 위한 전략으로 ‘배제’와 ‘낙인’ 두 개의 전략을 기본 축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이를 통해 정원의 통치전략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24)
이러한 통치 기법은 독재정권 등에 맞서 규범적으로 정당한 민주화 투쟁을 시도하는 민주 시민들을 마치 척결되어야만 할 반국가적 공고의 적으로 오인(誤認)토록 만드는 ‘낙인효과(labeling effect)’[딱지붙이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26) [운동가(le millitant)의 제거는 일제의 독일의 인식론 철학과 미국의 논리분석 철학의 지식론이 형이심학을 거짓, 악으로 모는 주지주의적 사고에 복속되어 빚는 비극이다. 이들은 허무주의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대립적 철학에게 공포와 위협으로 딱지붙이기에 열심이다. 이에 복속을 넘어서 자발적 예속으로 이끄는 철학이 관념론, 독단론, 인식론이며, 자각하지 못하는 통속적 유물론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제국에 기댄 마름철학들이 넘쳐나서, 대립 또는 반대 방향을 제거하였으나, 새로운 경향으로 규소의 시대에 별종이 표면 밑에 널리 퍼지고 있는 중이다. (55RKG)]
II. 1960-61년 대구사회운동과 ‘대구인혁그룹’ 기반구축 ···· 27
1. 운동주체의 형성과 운동노선 ···· 27
1) 1960년대 초 대구 혁신세력 지형 ····· 27
한국전쟁 이후에도 대구를 대표적인 ‘야당도시’, ‘진보적 도시’로 주목받게 만든 것은 50년대 진행된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 등의 투표 결과였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정치행태에 실망한 대구시민은 대통령으로는 이승만에게 표를 주었지만 부통령으로는 이승만의 지지를 받은 무소속 함태영이 아니라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을 지지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국적으로는 자유당이 압승하였지만 대구에서는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후보가 모두 당선되었다.3) / 가장 주목할 만한 선거는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였다. 이때 대구시민은 이승만 정부가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진보당 조봉암 후보에게 전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주었다. (28)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은 경주 최부자 후손이며 독립운동가인 최준을 비롯한 경북지역의 독지가들이 중심이 되어 대학설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1947년 3월 대구문리과대학으로 개교하였다. 1947년 9월 22일 재단법인 대구대학 설립, 대구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청구대학은 항일운동가 최해청이 1948년 9월 대구문리과전문학원 야간부를 대구 종로에서 개교한 후 1950년 4월 25일 재단법인 청구대학으로 변경하였다. (29)
당시 대구의 대표적인 혁신세력은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경근, 조카 안민생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가 그룹, 김달호와 이동화 등의 진보당 그룹, 1956년 진보당 결성과정에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민주혁신당을 결성한 서상일 그룹, 근로인민당 출신의 류한종, 사대당에 참여하였으나 1960년 7⋅29 총선 이후 사회당으로 결집된 신대영 등의 정당그룹과 전국노동자평의회 출신의 이일재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그룹이었다. (32-33)
2) 혁신세력의 정치세력화 ···· 34
4・19혁명 이후의 혁신세력은 활동 방향과 조직노선에 따라 크게 두 세력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치세력화를 위한 혁신정당 결성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운동을 주도한 통일⋅사회운동세력이다. (34)
4・19혁명 이후 혁신세력의 첫 결집은 4월 21일 서울에서 민족건양회의 긴급정치모임이었다. 박진, 조윤제, 이종률 중심으로 혁신세력이 참석한 긴급정치모임을 ‘4월 목요회의’라고 부른다. 이날 모임의 핵심 안건은 4⋅19혁명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를 사회변혁의 계기로 삼는다는 것이었다.16) 이 모임을 시작으로 대구, 부산, 서울 등지로 혁신세력 모임이 확산되어 갔다.
선거결과는 혁신정당의 참패였다. 전국 233석의 민의원 의석에 혁신정당은 사대당이 4석, 한국사회당이 1석으로 모두 5석에 그쳤다. 대구에서도서상일만 당선되었을 뿐이다. 나머지 5개의 지역구는 모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 7⋅29 총선을 통한 혁신세력 정치세력화의 좌절은 첫째 민주당 후보에 비해 낮은 인지도를 가진 후보가 출마하였고, 둘째 조직력과 자금력도 미흡하였으며 셋째 사대당이 민주당과 비슷한 선거공약으로 참신한 인상을 주지 못했으며, 마지막으로 유권자의 의식 속에 반공이데올로기 정서가 깊이 침투해 있었다는 점을 주요 패배요인으로 들 수 있다. (38)
7월 25일, 대구 시내에는 누가 작성하고 배포했는지 알 수 없는 ‘용공분자 규탄’ 유인물이 배포되어 유권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이미 6월 중순에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선거를 앞두고 혁신세력을 가장한 공산계열의 침투를 막겠다고 하면서 혁신세력을 내사한다는 내용을 언론에 흘려 유권자들이 가지고 있는 용공의 우려를 더욱 키우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33)
7⋅29 총선 이후 새롭게 재편된 혁신정당 중 사회당 결성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당은 중앙당의 명망가에 의존해 조직된 정당이 아니라 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출신들과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좌익계 그리고 구 근민당 계열인 중도 좌익운동 관련자들의 참여에 의해 1960년 7⋅29 총선 이후 형성된 정당이다.38) 창당은 근민당계의 유병묵, 최백근, 류한종이 주도하였다. 사회당 조직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통일운동 조직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이하 민자통) 결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데 있다. 민자통 결성식에 참석한 대의원 1,200여 명 가운데 8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회당 당원이었다. 사회당이 민자통 결성을 중요하게 인식한 것은 사회당 강령을 실천할 수 있는 반제민족통일전선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42)
3) 혁신세력의 운동노선 ··· 45
혁신세력은 자신들의 운동 노선, 이념적 지향을 사회민주주의 노선, 민주사회주의 노선, 또는 사회적(的)민주주의, 민주적(的)사회주의라고 하였다.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는 개념이 일치하는 용어가 아님에도 제2공화국 시기 혼용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45)
2. 대구사회운동의 조직과 활동 ··· 49
1) 통일⋅사회운동단체의 결성 ···· 49
통일을 염원하는 열기는 대구에서도 높아져 통일운동 관련 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 이 시기 대구지역에서 경북민족통일연맹(이하 경북민통련)을 비롯하여 민주민족청년동맹경북도맹(이하 민민청경북도맹), 경북통일민주청년동맹(이하 경북통민청)이 대표적인 통일운동 단체였다. 대학생 통일운동조직으로는 ‘학생민족통일연맹(이하 학생민통련)’이 결성되었으며, 각 분야의 사회운동단체들과 정당들은 강한 연대활동으로 통일운동을 진행했다. (51)
표 II–1. 경북시국대책위원회의와 경북민통련 임원
<경북시국대책위원회> 1960년 10월 22일~1960년 11월 26일
위원장: 안경근, 부위원장: 권계환, 김성달, 정태흠.
상무위원: 안경근, 정태흠, 문창호, 변신덕, 안잠, 권계환, 전능, 최해청, 양호민, 방한상, 백기만, 김창엽, 김영모, 류한종, 강대징, 장상호, 안민생, 김세형, 성희경, 백갑진, 김영식, 조규찬 이용선, 한위술, 김성달. (53)
② 경북민통련과 민족자주통일운동중앙협의회[민자통](54)
민자통은 중앙협의회와 경남⋅전남⋅전북⋅충남 등의 5개 도협의회를 구성하면서 전국적인 차원에서 혁신세력을 포괄하는 조직이 되었다. 민자통은 한국사회를 정치적⋅경제적 ‘식민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며, 사회변혁 노선은 당연히 ‘민족자주화운동’ 노선을 견지하였다. ... 1961년 2월 25일, 1,5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경운동의 천도교 강당에서 민자통중앙협의회가 창립되었다. 결성 당시 21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참여하였다. (56)
③ 학생 민통련의 조직 59
1961년 5월 무렵까지, 18개 대학과 1개 고등학교(대구 경북고)에서 학생 민통련 조직이 결성되었다. 대학생들은 통일논의의 확산을 위해 민족통일연구회와 같은 학습조직을 추가로 결성해 통일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통일의 필요성을 알리는 각종 홍보활동도 전개하였다. (59)
1960년 11월 4일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소속 대학생 30여명이 경북대 민족통일연맹 발기대회를 열었다. 며칠 뒤 11월 10일 ‘민족통일촉진학생연구회’가 20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결성되었다.결성식에서 ‘현실성 있는 통일방안 강구, 남북문화⋅경제 교류’를 주장하였으며, 미국에 대해 ‘종속적 대한정책을 시정하라’는 내용을 담은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이 조직은 서울대 민통련이 조직된 이후 지역에서는 최초로 결성된 단체였다. 11일에는 지프차에 스피커를 장치하여 “통일 없이는 민족의 살 길이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방송을 진행하였다. (60)
(2) 사회운동단체의 결성 60
① 교원노조와 피학살유족회의 결 60
② 전국노협 대구지부와 민주노조 대구시연맹의 결성 65
③ 민주민족청년동맹경북도맹의 결성 68
민민청은 일제강점기부터 민족주의운동을 해 온 부산대학교의 이종률교수와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정치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 정치조직을 뒷받침하고 사회운동을 지도해갈 청년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결성된 조직이다. 1960년 6월 12일 부산상공회의소 강당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고, 이 자리에서 명칭을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으로 확정지었다. (68)
민민청의 경북조직은 대구경북지역 청년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등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1961년 1월 4일 민민청경북도맹을 발기하고 3월 4일 대구시내 동성로에 위치한 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이날 선출된 임원은 표Ⅱ-3과 같다. (69)
표Ⅱ-3. 민민청경북도맹 임원
위원장: 서도원, 간사장: 도예종, 부간사장: 이대룡, 부위원장: 박지수, 통제위원장: 박상홍, 사무국장: 송상진, 연구위원장: 김충섭, 조직국장: 권달섭, 투쟁국장: 강왕수, 투쟁국장: (2대악법반대학생투쟁위원장) 정만진 (69)
출처: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혁명재판사』 3집(1962), 「경북민민청」 재판기록 구성.
위 표에 나타난 임원 외에도 홍보나 조직을 담당한 임원도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는 없다. 민민청경북도맹의 회원이었던 류근삼은 학생 민통련에 소속된 학생들 중 다수가 회원이었다고 기억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69)
서도원과 도예종, 송상진은 이종률과 이미 교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종률은 한국전쟁이 벌어질 무렵 서울에 거주하면서 대구 소재 청구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1⋅4후퇴 때는 대구에 와서 하기락(전 계명대 철학과 교수. 아나키스트 운동가)을 만나 교류하였으며, 그의 권유로 경남 함양군 안의중학교에 재직한 경력이 있다.또한 1956년에는 대구의 대표적인 야당지인 영남일보의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대구지역 혁신세력과의 인적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70-71)
도예종 등은 출판사 사무실에서 지인들과 ‘이승만 독재, 장기집권 기도는 어떻게 분쇄해야 하는가’, ‘사회변혁은 어디서부터 추동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를 심도 깊게 토론하였으며, 부교재 판매를 위해 부산에서 지내면서 부산지역의 몇몇 청년들과 교류했다는 증언이 있다.127) / 대구가 지금보다 도시의 크기나 인구가 훨씬 작았던 50년대 말 60년대 초에 도예종이 야당지로 정평이 나 있는 『영남일보』 논설위원 이종률을 몰랐을 리가 없고, 그렇지 않다면 부산에 있는 동안 부산 지역의 혁신세력들과 교류를 도혁태의 증언에 근거해 추정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대구지역에 연고를 가진 이종률은 서도원, 도예종과 민민청경북도맹 결성 이전부터 교분을 가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러므로 도예종 등은 이종률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에서 민민청을 결성한 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보면서 통일운동의 확장을 위하여 민민청 경북조직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였을 것이다. / 민민청경북도맹은 강령과 깃발, 조직의 노래가 있었으며, 회원 가입 시 가입원서를 작성하는 등 비교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조직이었다. (71)
이는 도예종, 서도원 등 민민청경북도맹원들이 조직의 위상을 민민청부산경남도 맹처럼 대중조직 형태로 두고자 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산에서 민민청을 결성한 시기보다 무려 8개월이나 경과한 후인 1961년 3월 초가 되어서야 민민청경북도맹을 결성한 점, 결성 전에도 이미 지역사회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제반 집단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회원이 가입된 경북민통련의 활동을 지원한 점 등을 보아 민민청경북도맹의 조직위상을 대중조직보다는 제반 통일운동의 실무를 책임지는 활동가 그룹으로 위치 지우려 한 것이 아닌가 유추해 볼 수 있다.그러나 경북의 다른 지역에 조직 건설은 목표에 두고 있었다. 민민청이 안동, 경주에도 만들어져서 안동(풍산시장) 등지에서 민민청경북도맹의 회원들이 지역으로 가서 정치연설 등을 하였다고 하지만 다른 지역 조직에 대한 사료는 찾을 수 없다.133)
2) 통일⋅사회운동단체의 활동 ···· 73
이 시기는 경북민통련, 민민청경북도맹, 경북통민청, 사회당경북도당이 결성되기 전이다. 이들 단체는 민자통에 가입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통일방안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론이었다. (75)
1961년 3월 1일은 4・19혁명 이후 처음 맞게 되는 3・1절이었다. 경북민통련과 사회운동단체들의 3・1절 기념행사가 준비과정에서 방해를 받게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61년 3월 1일 지역 조간신문 광고면에 ‘민주수호사회단체연합기구’(이하 연합기구)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하여 경북민통련 주도의 통일추진대회를 비난하는 광고가 실렸다.
(2) 2대악법반대운동 79
[1961] 3월 31일 대구시 동문동 노동신문사에서 ‘2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노동학생단체공동투쟁위원회(이하 2대악법반대공투위)’가 구성되었는데 소속단체는 다음과 같다.
경북민통련(안경근), 경북교원노동조합연합회, 민주민족청년동맹경북도맹(서도원), (경북)통일민주청년동맹(우홍선),경북학생2대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정만진), 혁신당⋅사대당통합추진위원회(박지수), 민족통일연맹(성희경), 민족자주통일협의회(변신덕), 대구시노동조합연맹(한위술), 경북노동조합연합회(김증도), 사회당경북도당, 통일사회당경북도당.
3. 대구인혁그룹 기반구축: 민민청경북도맹의 연대활동 ··· 84
1) 연대활동을 통한 기반구축 ···· 84
민주당 정부의 교원노조 불허 방침과 함께 진행되는 방해와 탄압에 대해 대구의 혁신세력 인사들이 일제히 교원노조지원 투쟁에 나서면서 정부와의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1961년 2월 8일 대구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민민청경북도맹, 3개 대학 학생대표, 노동조합협의회, 경북민통련, 사회당 인사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원노조 지원을 위한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간담회를 통해 2월 9일 ‘경북교원노동조합지원투쟁위원회’(이하 지투위)가 결성되었다. 지도위원은 안경근이 맡았고 안중근의 오촌인 안문식도 위원을 맡았다.민민청경북도맹의 도예종과 송상진도 참여 조직 실무를 민민청경북도맹이 맡기로 하였다. (86)
1961년 2월 25일 민자통이 결성되었다. 민자통 중앙조직의 실무를 담당한 그룹은 민민청과 통민청이었다. 해방 후 가장 큰 규모의 통일운동 조직인 민자통에서 민민청과 통민청 회원들은 조직 운영을 위해 문건작성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민민청경북도맹의 도예종이 민자통 중앙조직의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는 사실과 민민청, 통민청 출신들이 성명서작성, 언론 기고 등을 주로 맡았다는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88-89)
표 II-7 자통중앙협의회 임원 중 민민청. 통민청회원
- 도예종, 김상찬, 하상연, 김달수, 우홍선(우동흡 禹東邑) 박중기, 김영배
부산과 서울에서도 민민청과 통민청의 통합논의는 있었다. 통합은 쉽지가 않았는데 서울지역에서 통합논의 과정은 반발이 심했다. 서울에서 통합이 힘들었던 것은 ‘주도권 문제’ 때문이라고 김한덕은 진술하고 있다. 통민청과 민자통에서 활동했던 김한덕에 의하면 나름 자기조직의 정통성을 주장하지만 민민청 주도권에 무게가 실린다고 판단한 통민청의 반발도 있었으며, 비밀조직으로 운영되던 통민청의 조직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두 조직의 통합은 대구에서만 유일하게 성공하였다. / [1961년 3월] 민민청경북도맹과 경북통민청 통합과정에서 주요 쟁점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는 문제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이 합의한 내용은 한국사회에서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은 동시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지만 현 단계에서는 민족문제가 전략적으로 상위에 놓인 과제라는 것이었다. (91)
2) 대구인혁그룹의 60년대 초반 사회인식 ··· 94
(1) 민족경제형성을 통한 민족혁명론94
통일사회운동단체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분단된 현실에서 오는 문제’로 보고 있다.이들은 민족경제형성을 통한 민족 자립 혁명론으로 이를 위해서 반드시 통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민민청경북도맹도 ‘분단의 종식’과 ‘통일달성’을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94-95)
김금수의 증언은 도예종과 서도원이 글을 쓸 능력이 없다는 의미보다는 당시 글을 쓸 여력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김영춘이 실제 누구이든지 그의 글은 민민청경북도맹과 통일운동가들과 대구지역 식자층 사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영춘의 글은 민자통, 민민청, 통민청의 통일론과 같은 남북협상론을 주장하고 있다. ... (100)
III. 대구인혁그룹 형성과 반독재민주화운동 ··· 105
1. 박정희정권의 반정부세력 제거과정 ···· 105
1) 쿠데타 세력의 숙청작업과 대구사회운동의 모색 ··· 105
자료 III-1 <위험인물 예비검속 계획> 공문
이 계획서 안에 4. 예비검속 대상 및 범위
사회당, 사대당, 혁신당, 이주당(二主黨), 민족통일학생연맹, 악법반대학생투쟁위원회, 범민족청년회의,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국토통일학생연맹, 조국통일전선, 계랑단(契娘團), 전국양민피학살유족회, 한국중소산업인연합회, 교원노조, 통일민주청년동맹, 민족민주청년동맹, 전국학생혁신연맹(이상 18개 정당 및 사회단체)
중앙은 정⋅부위원장 및 상임부서책임자 전원
지방은 정⋅부위원장 및 조직, 재정, 선전의 책임자 (106)
당시 민족일보사건으로 체포되었던 조용수와 중앙사회당사건 최백근은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되었다. / 쿠데타 세력에 의해 혁신세력, 혁신정당, 학생들의 활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많은 사람이 구속되었고, 구속을 면한 이들도 쿠데타 세력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받아야 했다. 쿠데타 세력은 혁신세력에 대해 과거보다 더욱 강력하게 용공분자 –친공분자 – 공산주의자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 한국전쟁 이후의 혁신세력은 휴면기와 잠깐 동안의 활동기, 그리고 오랜 동안의 탄압, 투옥을 여러 번 거듭하면서 후속 세대를 양성해내지 못한 채 자연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 ... 이러한 통치 방식은 독재정권 등에 맞서 규범적으로 정당한 민주화 투쟁을 시도하는 민주 시민들을 마치 척결되어야만 할 반국가적 공공의 적으로 오인(誤認)토록 만드는 ‘낙인효과(labeling effect)’에 기반을 두고 있다. (113) [사유의 전복이 필요하다. 부일파, 숭일파, 종일파를 친일파로 부르지 말자.]
2) 민민청 · 통민청 통합운동 전개와 1차인혁당사건 ··· 121
대구혁신세력에게 박정희는 그의 가족사로 인해 정치적 성향을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는 경북 선산(지금의 구미)지역 출신으로 둘째 형인 박상희가 10월사건으로 군경토벌대에 총살을 당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은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경북지구피학살유족회 활동을 하였다. 가족 중 박상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박정희는 남로당 활동 경력까지 갖고 있었다. 군부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는 류근삼의 증언은 당시 대구혁신세력이 쿠데타의 성격과 박정희의 성향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2)
사회당 전남도당에서 활동하던 김세원의 증언에 따르면 사회운동 주체들은 5⋅16쿠데타를 군사독재라고 판단하였고 새로운 정세에 대응할 조직의 필요성을 공유하였다. (124)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가 “선량한 학생을 충동시켜 국가전복을 책동했다”는 혐의로 전 민자통 조직부위원장이며 민민청경북도맹 간사장이었던 도예종을 1964년 7월 6일 수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정권이 발표한 1차인혁당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의 첫 공안사건이었다.
위의 표를 통해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는 민민청의 대구그룹, 부산그룹(암장그룹)과 통민청, 학생 통일운동 그룹 등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기자 등의 전문가와 정당 활동가들이 참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는 4⋅19혁명 이후 전개되었던 통일운동의 흐름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심 재판부는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들에게 당초의 반국가단체구성죄(국가보안법위반)를 철회하고 대신 “북괴를 고무 찬양하였다”는 반공법 혐의로 재판을 진행하였다. 재판부는 1965년 1월 20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도예종⋅양춘우 2명을 제외한 나머지 11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사건의 실체와 성격규명도 중요하지만 운동사적 의의도 주목해야 하는 점에서 1
차인혁당사건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4⋅19혁명 공간에 등장하였던 통일운동의 흐름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입장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 /두 번째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사건은 이후 1974년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직접적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박정희정권 시기 가장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인혁당재건위사건은 민청학련사건 배후단체로 조작되었는데, 조작을 위한 1차인혁당사건이 호출되었다.(143-144)
2. 대구인혁그룹 형성과 확장 ··· 144
1) 형성: 지역 기반으로 구성된 그룹 ···· 144
5⋅16쿠데타 이후 대구지역의 진보적인 사회운동 그룹은 대략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민민청경북도맹그룹이다. 둘째는 대구 노동운동 활동가를 중심으로 엮인 이일재그룹으로 이후 이 그룹은 남조선해방전략당(이하 전략당) 사건에 연루되었다.셋째는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사건 그룹이다.(145)
도예종, 서도원의 민민청경북도맹을 중심으로 한 대구사회운동 주체의 인적확장은 ‘경북반독재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추진위원회 활동이 마무리되는 1968년 초형태가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민민청경북도맹을 중심으로 사회당 그룹(강창덕으로 대표), 언론계 그룹(이재문으로 대표), 대구지역 학생민통련 그룹(정만진으로 대표), 노동운동가 그룹(나경일로 대표), 경북대 이념서클(이재형, 여정남으로 대표)이 인적으로 결합되어 정세를 공유하며 활동을 도모했다. 1968년 대구는 통혁당과 해방전략당사건의 여파로 이일재그룹과 통혁당그룹이 깨어지고 대구의 진보운동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은 서도원, 도예종으로 대표되는 민민청경북도맹 그룹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147)
2) 사회인식: 자주통일론과 반독재민주화 ··· 150
1971년 4월의 「반독재구국선언문」은 박정희정권을 반민족적 정권이며, 정보기관
을 통해 국민을 억압하는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154)
3) 확장: 학생운동연대와 전국화 모색 ··· 159
1967년 대구지역에서 대선을 앞두고 반독재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야당후보단일화를 우선 목표로 삼은 조직결성은 대구지역이 최초였다. 이 시기부터 대구인혁그룹이 구체화되고 인적관계가 확대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직에 5⋅16쿠데타 직전 통합에 합의하였던 민민청경북도맹과 경북통민청의 서도원, 송상진, 하재완, 이태환, 전재권, 정만진, 조만호, 이재문 등이 활동하였다. 노동운동가 권오봉, 정당운동을 하였던 강창덕, 민간인학살피해자 유족회 활동을 하는 이복녕 등이 야당 단일후보추진위원회에 결합하면서 공동행보를 취하였다. 이후 해방전략당사건 연루자 나경일, 남민전의 백종호 등 인적구성은 확대되어 갔다.(159)
대구인혁그룹은 비합법활동 중에도 조직운영과 홍보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구 와룡산에서 염소농장을 운영했다. 운영자금은 이재문이 마련했고 농장경영은 이재문과 류근삼이 맡았다. 그리고 나경일은 대구 봉덕시장에 와룡산목장 직매장을 개설해서 염소뿐만 아니고 닭, 개도 함께 팔아 자금을 모았다. 와룡산의 염소농장은 대구인혁그룹의 모임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이곳은 인혁당재건위사건과 경북대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의 구술증언과정에 종종 등장하는 장소 중의 하나였다. (161)
여정남은 군 제대 후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인 하재완의 집에서 1968년경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한 시절이 있었다. 김성희는 “하재완씨 집에 입주한 것은 혁신세력 선배들의 고려인 것 같았고, 군 제대 후 선배들과 교류하면서 확실히 운동에 대한 입장이 바뀐 것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여정남이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선배 정만진을 만난 이후였다. 정만진은 1차인혁당사건,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이며 제2공화국 시기 대구대학 학생으로 ‘민민청경북도맹’의 투쟁국장과 ‘2대악법반대학생공동운동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중 집회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여정남은 대학에 입학한 후 정만진으로부터 집중적인 학습 지도를 받았을 것이라는 주변 증언이 있다. (162)
‘경락연구회’는 4・19시기 사회당활동을 거쳐 남민전사건에 연루된 김세원의 증
언이 유일하다. ... / ‘회사’는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위장으로 비합법 조직활동을 서포트할 공개된 사업활동을 의미하였다. 이는 장기적 안목으로 운동조직을 창조해야하며 이 조직은 노출되거나 파괴당할 위험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 맞춘 것이었다. 회사의 목적은 민족전통의학과 자연건강요법의 범민족 건강강화 교양사업과 전 민족의 보건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요지로 결정했다. 회사의 명칭은 ‘경락연구회’로 하였다. 회사 설립에 맞게 서도원은 대구에서 침술소를 운영하였으며, 동양전문대학(경희대학교 한의학과 전신)을 나온 부산의 이영석은 한의원을 개업하였다. / 서도원, 이수병, 우홍선, 김세원, 이영석 5인이 전원 모이는 전원회의는 년 2회(3월, 9월)로 하고 각기 다른 지역의 3인이 만나는 것은 3개월에 1회, 2인이 만나는 것은 월 1회로 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돌발 사태 시에는 비상회의를 개최하였다. (165)
1974년 3월 23일 전원(경락연구회)이 서울에 모였다. 서도원이 3월 21일 경북대 데모를 통해 기관에서 학생운동권 내부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구실로 이용될 학생데모를 중단시키는 안으로 이틀간 논의. 직접적 연계가 없으므로, 서울과 대구 등의 학생데모는 중단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166)
3. 대구인혁그룹의 장기집권저지운동 ··· 168
1) 후보단일화 운동과 부정선거규탄운동 ··· 168
표 III–5. 경북 반독재재야민주세력 단일후보 추진위원회
위원장: 류한종, 부위원장: 조용만, 대변인: 강창덕(대구인혁그룹), 섭외담당: 이재문(대구인혁그룹), 운영위원: 류한종, 서도원(대구인혁그룹), 송상진(대구인혁그룹), 하재완(대구인혁그룹), 도혁택(대구인혁그룹). 정만진(대구인혁그룹), 조만호(대구인혁그룹), 이태환(대구인혁그룹), 전재권(대구인혁그룹), 나경일(대구인혁그룹), 안민생, 박삼세, 권오봉, 이복녕, 김종(증)도, 김호일 외 다수. * 출처: 강창덕 「아! 4월 9일이여」, 실록, 민청학련4(학민사, 2005)
하지만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정권이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방학이 시작되고 [1967] 7월 8일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소속 학생들을 간첩단으로 조작한 동백림사건 발표 이후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173)
2) 3선개헌 저지운동의 전개 ··· 174
하지만 모든 공화당 당내 인사들이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저지하려는 공화당 내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당 내부의 정지작업이 필요했다. 국민복지회사건과 4.8항명사건은 공화당 내 사전정지 작업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174)
특히 경북대에서 진행된 3선개헌 반대집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에서 ‘악덕재벌 타파하여 자유경제체제 확립하라’는 요구가 제기된 점은 주목된다.178) 학생들은 박정희정권이 주창한 조국 근대화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그동안 민중이 정치 박해와 경제 빈곤을 감수해 왔으나, 그 성과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일부 이익집단의 비합리를 위해 허망하게 희생되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178)
이 시기 대구사회운동 역량은 정치와 언론, 지식인들과 결합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환경도 마련할 수 없었으며, 박정희정권의 ‘근대화’와 ‘반공’ 논리와 맞설 수 있는 ‘대항담론’을 만들지 못하고, 박정희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넘어 종신집권으로 가려고 3선개헌을 만들려고 한다는 3선개헌의 본질을 천명하고 반박정희정서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182)
3) 71년 대선과 민주수호경북협의회 활동 ···· 183
3선개헌을 단행하여 박정희는 3선에 도전하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71년 대선을 쉽게 치룰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3선개헌이 국민투표까지 거치면서 성공하였고, 1968년 연이어 터진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은 박정희정권의 권력을 반공과 안보 중심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그리고 야당의 분열은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191) 미국도 박정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대선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183)
야당의 치열한 대통령 후보 결정 과정을 거쳐 김대중이 당선된 후 1970년 10월부터 시작된 선거유세가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은 과거 대통령 선거에 비해 정책선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선거전을 펼쳤다.(183)
반면 1971년 4월 18일, 71년 대선에서 가장 주목할 김대중의 발언이 나왔다. 김대중은 이날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10월 유신을 예측한 것처럼 ‘총통제’ 발언을 했다. 총통제 발언은 전날인 4월 17일 대구유세에서 처음 제기된 후 18일 30만 서울 시민 앞에서 “이번에 정권교체를 못하면 영구집권의 총통제가 실시되어 선거도 없을 것이라는 확고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정권교체를 호소했다. (185)
1971년 4월 22일 오전 11시 현대예식장에서 경북협의회 결성식을 개최하였다. 서울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결성대회를 열게 된 경북협의회는 ‘권리회복 총궐기 호소 민주수호 경북대회’란 제목으로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전 국민은 주권자의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민주적 기본권 회복에 총궐기를 하자”고 호소했다. (191)
4월 25일은 김대중후보의 대구 유세일이었다. 투표일은 불과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194)
한편 1971년 개학과 더불어 교련 철폐 운동을 전개해 나가던 경북대는 교련 철폐 투쟁이 약간 소강상태를 보이는 4월 20일부터는 대통령선거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4월 20일 경북대와 전국 13개 대학 학생 대표들은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여 그동안 치열하게 전개되던 교련철폐투쟁을 잠시 멈추고 선거가 끝날 때까지 공명선거운동에 나서기로 하였다 (196)
정사회에서 서클명을 바꾼 경북대 이념서클 정진회는 4월 7일 ‘반독재구국선언 사건’, 일명 정진회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을 주도해 나가던 학생 대다수가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재판에 넘겨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197)
“선전부장인 이재문이 준 서적 『들어라 양키들아(Listen Yankee)』를 통해 월남전의 진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공동대표인 류한종의 말씀으로 박정희의 친일매국 행적과 배신과 비인간성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서도원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민족의 평화통일과 인간존재의 문제에 새 지평을 열수 있게 되었다. 민수협 결성을 준비하면서 정만진, 김승균(대구사대부속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 졸업. 1차인혁당사건 관련자) 등에게서 4・19시기 대구지역 혁신운동에 대해 들었다.”
대구는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공화당후보에게 준 지역이었다. 그러나 [1971] 총선에서는 5개 선거구 중에서 북구에서 출마한 민주공화당 강재구만 당선되었고 4개 선거구는 모두 야당인 신민당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특히 대구 남구선거구에서 출마한 국회의장 이효상의 낙선은 큰 뉴스거리였다. (199)
IV. 대구인혁그룹의 전국사건화, 인혁당재건위사건 ··· 202
1. 유신체제 수립과 학생운동의 도전··· 202
1) 유신과 긴급조치시대의 개막 ···· 202
박정희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후 오후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202)
유신체제기 동안 발생한 문제의 하나는 ‘긴급조치권’의 남발이었다. 1974년 1월 8일의 긴급조치 1호 이후 1975년 5월 15일 긴급조치 9호까지 발포되었다. 이 중 유신체제를 비방하거나 반유신 활동 규제에 관한 긴급조치는 1호, 4호, 9호이다. (207)
2) 학생운동의 도전, 경북대 민청학련사건 ···· 209
대구에서는 경북대가 반유신 시위의 포문을 열었다. 경북대의 대표적인 반유신 시위는 1973년 11월 5일과 1974년 3월 21일의 시위이다. 1973년 11월 5일 경북대에서 일어난 반유신 시위는 10월 2일 서울대 시위 이후 지역 대학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유신반대 시위이었다. 경북대 반유신 시위는 이념서클 한국풍속연구회(이하 한풍회)가 중심이 되고, 한풍회 전신 서클인 정진회 회원 정화영(정치학과 67, 정진회 회원) 등이 준비하였다.
경북대와 서울대의 운동주체들은 1974년 2월 10일, 경북 달성군 하빈면 강창나루터 부근의 음식점에 경북대의 이강철(정외과66), 정화영, 임규영, 황철식과 서울대의 유인태, 김재근, 전홍표가 참석하는 확대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 모임은 1974년 상반기 반유신 시위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참여한 이들은 다음과 내용을 합의하였다. (212)
1974년 3월 초 대전에서 진행된 전국 대학 모임에서 1974년 반유신 시위의 시작을 가장 먼저 지원한 대학이 경북대였다. 경북대 임규영이 자진해서 3월 18일에 반유신 시위를 시작하겠다고 통보하였다. 반유신 시위는 지역대학에서 먼저 시작해서 전국단위로 확산되는 전술이 의미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참가한 이들도 경북대 시위에 연이어 하겠다고 결의하였다.서울대의 황인성, 전홍표도 주된 시위는 서울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서울의 역량을 아끼기 위해 시위의 불길을 경북대가 먼저 당기길 원했다. (213-214)
시위는 선언문만 배포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반유신 활동에 조금이라도 참여를 하면 군사재판을 받는다는 내용의 긴급조치는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차단시키는데 강한 효력을 발휘하였다. (214)
이후 서울에서 시위가 연이어 발생하자 조사를 받던 경북대생 중에서 선별된 12명은 3월 31일 서울구치소로 압송되었다. / 소위 경북대민청학련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이처럼 1973년 11월 5일과 1974년 3월 21일의 반유신 시위이다. 대구지역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는 모두 경북대 출신으로 대부분 이념서클인 한풍회와 한풍회의 전신 서클인 정사회, 정진회 소속 회원들이었다. (215)
박정희대통령은 4월 3일 밤 10시,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였다.45) 이 조치는 민청학련과 관련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회합⋅통신⋅편의제공 등으로 구성원의 활동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할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것이다. (216)
2. 대구인혁그룹으로 조작된 인혁당재건위사건···· 217
1) 공안사건 만들기: 배후조직의 급조와 배제전략 ··· 217
정보기관의 조작에 첫 번째 필요요건은 ‘용공성’이었다. 정보기관의 용공 조작관련 자료로 중정이 작성한 ‘수사상황보고(92보)가 있다. 이 자료는 민청학련사건 관련자와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수사지침의 주요 방향 제시를 보여준다. 수사초점의 주요 내용으로
1. 관련자(특히 주동자)는 공산주의 사상의 보지자임을 입증하고
2. 이들이 작성, 배포한 유일물의 작성 경위와 초안을 무엇을 보고 만들었나는 것을 추궁하여 공산주의자임을 입증하고
3. 조직체계 전모를 구명, 발본색원할 것 (219)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는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975년 2월 15일 사건 발생 10개월 만에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되었다. 이에 반해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들은 석방대상에서 모두 제외되었다. (220)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는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집단’이라는 인식을 시민들 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이들을 철저한 용공집단으로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정권이 이들을 배제집단으로 설정하여 용공집단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정황은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정부장의 민청학련사건 수사 중간발표 언론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223-224)
박정희정권이 선택한 배제 전략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저항 세력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여 탄압, 배척하는 통치술이다. 비판적 세력을 반공이데올로기로 포획하여 ‘용공화’ 시키고, 이들을 어떤 응징도 허용되는 배제집단으로 만들어버리는 통치 기법은 독재 정권 등에 맞서 정당한 민주화 투쟁을 시도하는 집단을 국가적 공공의 적, 비국민으로 만드는 ‘낙인효과(labeling effect)’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224)
2) 정세관 차이가 만든 서울행과 전국사건화 ···· 225
경북대 정치학과 62학번인 여정남은 1960년대 말부터 74년대 초반 경북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여정남이 1973년 11월 5일 전개되었던 경북대 반유신 시위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긴 목적에 대해 당시 대구지역 혁신세력 인사들 내부에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정남에게 학생운동의 전국화를 맡게 하여 직접적이고 강력한 반유신운동을 전개하자는 주장과, 여정남을 청년운동으로 이전시키고 학생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발굴하는 등 보다 장기적인 반유신운동 전략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측간의 이견이 있었다.70)
장기항쟁론자였던 이재문과 림구호는 1973년 11월 5일 경북대 반유신운동에 대해 지역대학에서 최초로 반유신운동을 펼친다는 의미는 있으나 학생들의 희생만 낳는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재문과 림구호는 학생운동의 기본 조직 보전을 위해 당시 경북대 학내 조직을 맡고 있던 임규영에게 빠질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반해 투쟁론의 입장이 강한 하재완 등은 여정남을 통해 선언문과 자금을 제공하는 등 경북대 11월 5일 반유신운동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시국을 보는 관점의 차이는 1974년 초에도 이어졌다. 반유신운동의 전개에 대해 투쟁론의 입장이었던 여정남의 ‘봄 투쟁론’과 림구호의 ‘9~10월 유엔총회 시점’까지 추이를 보자는 신중론의 입장으로 갈라져 있었다. (228)
여정남의 서울행은 하재완의 강력한 건의에서 시작되었지만 곧바로 도예종과 서도원은 여정남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여정남의 서울 거주가 확정되자 서울에 거주하는 이수병과의 연결은 하재완의 부탁으로 서도원이 하였다.이수병은 제2공화국 시기 경희대 민통련의장이었기 때문에 민자통 활동을 한 도예종과 인맥이 형성되어 있었고, 서도원과는 혁명재판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함께 수형생활을 한 인연으로 더욱 각별한 사이였을 것이다. 서울에 온 여정남은 1974년 1월 4일 이수병을 만났고, 3일 후 이수병은 여정남을 경기여고 물리교사였던 김용원에게 소개했다. 이수병은 5⋅16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으로 수감생활을 한 이력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정보기관의 감시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보다 김용원에게 여정남을 부탁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였다. (230)
[1974] 4월 17일 경북대 출신 민청학련 관련자 이강철이 중정에 검거된 후 고문 끝에 여정남을 만나기로 했다고 진술했다. 곧바로 당일 오후 세시 여정남이 중정에 검거 되었다. 중정은 여정남으로부터 서울에서의 활동지원을 이수병과 김용원으로부터 받았다는 진술을 받아냈다.곧바로 이수병과 김용원이 검거당하였고, 이들에게서 도예종과 서도원이 여정남 서울행에 관련이 있다는 진술을 받아내는 과정을 밟았다. 4월 20일 도예종과 서도원이 대구 북부경찰서 대공과에 체포되었다. (231)
“4월 24일 저녁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가니 이미 책상 위에는 다음 날 발표할 사건 전모를 여러 장 그려놓고, 수사관들이 자기네들끼리 수정하기도 하면서 완성하는 그런 단계에 있었다. … 나의 배후세력이라고 그려놓은 세 분류가 있었는데, 첫 번째가 인혁당이었다. 여정남씨를 통한 인혁당이 나의 배후라고 했지만 그 당시까지는 인혁당이 뭔지도 몰랐다. … 아무튼 그런 도표를 보고 깜짝 놀랐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도표를 그려서 우리 사건을 엄청나게 확대 발표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런 짐작을 했다”.
경북대 출신의 여정남이 체포된 후 서울 행적을 추적하는 가운데 이수병과 김용원의 이름이 거명되면서 중정이 배후조직을 조작하기 수월해진 것은 확실하다. 김용원은 1차인혁당사건 당시 구속수사를 받은 적이 있었으며, 이수병과 김용원의 인적 관계 속에는 1차인혁당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도예종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재완은 4월 28일 중정에 검거되었는데 소위 북한방송 청취노트가 중정에 압수되면서 사건의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방송노트 회람 명단 제시를 요구받으면서 대구인혁그룹이 줄줄이 검거되는 상황이 되었다. 5월 2일에는 송상진, 전재권, 조만호, 정만진, 이재형, 림구호가, 5월 8일에는 강창덕, 나경일이 검거되었다. ...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구성을 북한방송 청취노트를 회람한 사람 중심으로 확정하였다는 세간의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노트와 관련이 없지만 대구인혁그룹으로 활동한 이태환도 검거되었다. ...(233)
대구인혁그룹은 4월 16일 여정남이 검거되고, 4월 25일 중정부장 신직수의 발표를 보고도 피신하지 않았다. 모두들 자신이 중정이 발표한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구속 25명, 수배 1명(이재문)으로 총 26명이다. (234)
표 Ⅳ-1.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공소장 순서와 형량배치 참고) [스물여섯 명]
1 서도원 1923 경남 창녕, 2 도예종 1924 경북 경주, 3 하재완 1932 경남 창녕, 4 이수병 1938 경남 의령, 5 김용원 1935 일본, 6 우홍선 1930 경남 울주, 7 송상진 1928 대구 대구, 8 전창일 1921 함남 북청, 9 나경일 1930 일본, 10 강창덕 1928 경북 경산, 11 이태환 1926 대구, 12 김한덕 1932 부산, 13 이성재 1929 서울, 14 유진곤 1937 경남 김해, 15 김종대 1936 경남 진주, 16 조만호 1935 경남 의령, 17 정만진 1940 대구, 18 이재형 1939 경북 영천, 19 림구호 1948 대구, 20 황현승 1935 충남 당진, 21 이창복 1938 황해도평산, 22 전재권 1928 대구, 23 이현세 1949 대구, 24 장석구 1921 서울, 25 이재문 1934 대구, 26 여정남 1944 대구. (234-235)
3)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실체: 조작으로 완성된 공안사건 ··· 237
사건 관련자들이 쓰는 진술서는 본인의 자필로 쓰기 때문에 마치 자신의 행위를 사실 그대로 썼다고 오인될 소지가 있다. 공안사건에서의 진술서 작성은 우선 수사관에 의해 구두로 사전 조사를 받은 후 대강의 진술서 내용의 틀을 요구받고 이를 근거하여 작성된다. 이 과정에서 조사관은 원하는 내용을 진술받기 위하여 협박 등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심지어 고문 등의 반인권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또한 사건관련자 전체의 진술서가 통일되어야하기 때문에 다른 관련자가 쓴 자술서를 수사관이 가지고 와서 똑같이 맞추어 쓸 것을 강요받는다. 이렇게 작성된 진술서를 근거로 진술조서를 구성한다. 진술조서는 본인이 쓴 진술서의 공증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239)
인혁당재건위사건은 구체적인 정황과 물증 없이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증거품인 하재완과 송상진이 작성한 북한방송 청취 노트는 용공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재완과 송상진은 1972년 2월부터 3월 중순까지 20여 일간 북한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의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문’을 방송으로 청취한 후 노트를 작성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 노트는 사건 관련자들이 북한과 연계 있는 인물로 중정이 조작하기에 유력한 증거가 되어 버렸다. / 하재완과 송상진은 왜 북한방송을 들었으며, 방송 내용을 작성하고 회람시켰을까? ‘혁명적 민주기지론’이었던 북한의 통일정책은 ‘제5차 당대회’에서 이른바 ‘지역혁명론’으로 전환하였다.104) 지역혁명론은 남한에서의 혁명은 남한의 혁명세력이 주체가 되어 수행한 후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 혁명을 진행시킨다는 내용이다. 북한 통일정책의 변화를 남북한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북한의 대남정책이 기존의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변화됐다는 것, 즉 남한 혁명주체를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통일과정에서 남한의 자생적 운동을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북한의 통일정책의 변화는 남한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분석과제로 인식되었을 것이므로 이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제5차 당대회 보고문은 중요한 자료로 회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41)
“내가 아는 내 둘레 있는 과거 혁신당을 만나 보는 작업이고 그 다음은 어떤 식의 서클이라도 형성하여 그 다음 단계인 혁신정당의 결성이란 순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꼭 인혁당을 왜 재건해야 되는냐 이미 무섭게 알려진 어마어마한 정당이 아니고 위에서 말한 순서에 따라 조직생활을 같이 한 인혁의 인사를 한번 만나보자. 그러면 그 사람들은 현실을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현실에 대처할 것인가를 토론해 보자는 것입니다.” (242)
“재판정에서 지하 비밀당을 만들어 국가를 변란시키고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검찰의 공소 내용을 시인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250)
1심공판이 끝나고 제출한 항소이유서와 상고법원인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는 사건 관련자들이 사건과 관련되어 강압 없이 직접 쓴 유일한 글이다. 대구지역 관련자 중 사형집행을 당한 5명의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를 중심으로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중정이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한 행위를 살펴보고자 한다. (250-251)
변호인 황계룡은 도예종의 공소사실 중 사법처리가 끝난 1차인혁당사건을 추가 기재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였다.검찰 공소장에 1차인혁당사건에 등장하였던 북파간첩 김상한과 월북한 김배영을 도예종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적시하였다. 1차인혁당사건 재판과정에서 혐의가 없다고 판결받은 사건을 다시 조작하려는 중정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의 의도는 도예종과 사건 관련자들을 북한과 직접 연계되어 있다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모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재판은 이런 모략이 밝혀지기는커녕 판결을 통해 확정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252)
3. 사형집행과 그 여파 ··· 252
1) 사형선고의 배경 ··· 252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진행되었다. 법정에는 가족, 기자, 국제사면위원회를 대표하는 변호사 등 약 70여 명으로 선발된 방청객만이 참석하였다. 여전히 외신기자는 방청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255) [천야가 앞으로 올렸다]
1991년 이후 대구 시민사회에서 진행하는 추모행사와 추모비의 비문 내용을 둘러싸고 입장차이가 조금씩 드러났다.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둘러싼 ‘기억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유족들은 “고문에 의한 수사 끝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희생되신 여덟 분과 인혁당 관련 인사들의 명예를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회복”을 주장했다.사회운동단체들은 8인이 가진 운동사적 의미는 통일운동 · 민주화운동 과정에 죽음을 맞이했으므로 열사정신 계승이라는 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253-254)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에 있어 모든 집단이 가진 공통분모는 ‘인권’문제였다. 이는 종교계가 주도하는 입장이었지만 사건의 본질을 잘 모르는 시민사회에서도 지지를 받았던 입장이었다.132) 이 외 사형집행을 둘러싼 논의는 대체로 ‘정권살인’과 ‘사법살인’ 두 가지 축이 있다. 정권살인은 사형집행이 철저히 박정희 정권의 의지라는 점에 주목하고 사형의혹을 밝히는 작업은 박정권의 문제의 본질을 밝히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254)
사형이 전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사법살인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성숙되지 못한 민주제도, 사법제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에서조차 보장된 피고인들의 접견권도 박탈당했으며, 모든 재판과정이 비공개원칙으로 진행되었고, 변호사들은 재판기록의 열람을 금지당하거나 방해받았다. (255)
사형집행의 여파는 두 가지 상반된 효과를 가져왔다. 사회운동 주체들에게는 정권을 향한 분노를 더욱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전국 지명수배되었던 이재문이 경북대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조직하여 반정부활동을 이어갔던 것으로 확인되다. 사형집행 다음 날인 1975년 4월 10일 천주교정의사제구현단이 주재한 기도회 자리에서 ‘살인독재정권 타도’라고 쓴 현수막이 걸리기도 하였다. 이와 반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에 있어서 정부가 의도한 대로 공포심을 심어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민들은 독재정권의 잔학성에 무력감을 실감하고 있었다. (255)
대법원 판결 후 18시간이 지난 4월 9일 오전 4시,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을 사형 집행장으로 이동시켰다. 집행은 오전 4시 55분 서도원을 시작으로 30분 간격의 차이를 두고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의 순으로 진행되었다.군법회의법 제494조, 제497조, 제499조와 제500조에 의거하여 집행되었지만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260)
이러한 이례적인 법 집행을 두고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 하였다.인혁당재건위사건 8명의 사형 집행은 다른 정치범들의 집행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261)
2) 사형집행을 둘러싼 의혹 ··· 265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중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이 집행까지 갔던 배경에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낮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점도 있었다.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이 관련되면 언론의 집중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정부는 곤혹스러운 지경에 놓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65)
이러한 문서의 발행⋅접수 시간의 불일치는 대법원의 판결과는 상관없이 박정희 유신정부가 이미 처형을 확정하고 집행 절차를 강행한 것으로 밖에는 다른 설명을 할 수 없는 부분이다. (267)
특히 도예종은 서도원과 함께 주요 주모자로 판결을 받았는데 집행 순위는 맨 뒤로 밀려나 있다. 통상의 관례와 다른 집행철자는 이 집행이 자연스러운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형집행과 관련해서 몇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우선 처형 순서의 결정은 누가 했으며 어떤 기준이었는지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반유신 여론, 박정희대통령의 분노, 정권의 불안정성, 미국의 눈치를 덜 보고 국내정치를 전유할 수 있었던 국제 정치환경은 사형선고를 가능하게 만들었겠지만, 굳이 전례없이 18시간 만에 집행을 실행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271)
V. 맺음말 ··· 272
대구인혁그룹의 실체와 활동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게 본 논문이 가진 한계이다. 대구인혁그룹 주요 관련자는 사형집행을 당했거나 출옥 후 고문후유증으로 생존하지 않는다.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들의 증언충돌도 있다. 이는 아직 정확히 증언할 수 없다는 증언자의 자기검열 때문이다. ... / 이런 한계의 보완을 위해 1979년 발생한 남민전사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전국 수배가 되었던 이재문과 경북대 이념서클 출신 등이 대거 연루되어있기 때문에 대구인혁그룹의 보다 자세한 실체와 이후 행보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6-277)
(24:08, 55R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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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전현수(田鉉秀, 1961-) 경북대 사학과 교수. <해방 직후 북한의 사회경제개혁(1945-1948), 러시아, Lomonosov Moscow State University, 박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1962 윤정원(尹靜媛, 1962-) 경북대, <1960-1975년 ‘대구인혁그룹’ 연구, 경북대, 2020, 전현수> 「1차인민혁명당사건과 도예종의 활동」(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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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서도원(1923년 3월 28일-1975년 4월 9일, 당시 52세), 경남 창녕,
1924 도예종(1924년 12월 25일-1975년 4월 9일 당시 51세), 경북 경주,
1928 송상진(1928년 9월 18일- 1975년 4월 9일 당시 47세), 대구,
1931 우홍선(1931년 출생, - 1975년 4월 9일 당시 44세), 경남 울주,
1931 하재완(1931년 1월 10일- 1975년 4월 9일 당시 43세), 경남 창녕,
1935 김용원(1935년-1975년 4월 9일 당시 40세), 일본,
1936 이수병(1936년 12월 1975년 4월 9일 당시 39세), 경남 의령
1945 여정남(1945년 5월-1975년 4월 9일 당시 30세).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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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안희제(安熙濟, 1885-1943) 백산(白山), 독립 운동가. 경남 의령 출신,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 1930년대 들어 만주로 망명, 1931년 대종교에 입교,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체포,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 시간 뒤에 사망했다. 대종교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
1887 서상일(徐相日, 1887-1962)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동암(東菴). 대구 출신. 서봉기(徐鳳基)의 아들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
1896 안경근(安敬根, 1896-1978)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 안중근의 사촌.
1899 조봉암(曺奉岩, 1899-1959)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죽산(竹山). 경기도 강화군, 일제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 1958년 5월 국회의원선거에 지역구후보를 내세워 원내 진출. 1958년 1월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진보당원 16명과 함께 검거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1959년 7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1902 산수(山水) 이종률(李鍾律, 1902-1989), 부산대학 정치학과 교수, 1960년 10월 30일 “민족통일대강연회”를 시작으로 자주적 통일운동 전개.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결성(박진(朴震), 박래원(朴來源), 문한영(文漢榮) 동지들과) <소설가 김정한, 이주홍, 무용평론가 강이문도 참여한다. 민민청은 서울, 대구로 지부를 넓히며, 한국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부산: 김상찬(金相賛), 대구: 서도원(徐道源), 도예종(都禮鍾), 서울: 이수병(李銖秉), 김금수(金錦守)]
1905 최해청(1905-1977) 경북 경주출신, 청구대학 설립자.
1907 이동화(李東華, 1907-1995) 평남 강동, 일제강점기 좌익지하운동 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1952년 경북대교수, 1954년 성균관대 교수 .. 『이동화 평전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생애-』(김학준,민음사,1987)『참여와 저항의 두 개의 초상 류달영·이동화』(김종찬,민족지성, 1986)
1911 안민생(1911-) 황해 신천,
1912 김달호(金達鎬, 1912-1979) 경북상주, 일본 쥬오(中央)대학교 법학부를 중퇴, 민족항일기에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 사법과합격, 해방 이후 사회대중당 중앙집행위원장, 제5대민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1912 하기락(河岐洛, 1912-1997) 경남 함양, 철학자, 언론인, 아나키스트. 1935년 일본에 유학하여 이후 입학한 와세다 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하며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40년 하이데거 연구로 졸업논문을 완성하고 귀국하였다. 1947년 대구대 교수 경북대, 동아대, 계명대 교수. [이종률 보다 열 살 어리다]
1913 류한종(1913-) 경남 의령, 인민근로당
1913 김성달(1913-) 대구, 금성골덴 공장경영.
1914 송남헌(宋南憲, 1914-2001), 대구사범 출신, 독립운동가, 교육인, 통일운동가, 근현대사 연구가. 김규식의 비서실장,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 한 길,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하여>
1914 최백근(1914-) 전남 광양 고량면 태인도, 1960년 사회당준비위 구성,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세력에 의해 교수형
1920 박상홍(1920-) 경남 창녕, 민민청 경북도맹 통제위원장.
1920 김세진(1920-1972) 경북 예천, 월북, 1960년 남파, [김영춘 또는 김봉춘인지 알 수 없음].
1923 이일재(1923-2012)
1927 강창덕(姜昌德, 1927-2021), 경북 경산, 정치대학 정치학과를 졸업(1952), 1987 ‘민족자주평화통일회의’(민자통),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1928 하정기(1928-) 경남 창녕, 민민청 경북도맹 회원.
1930 조용수(趙鏞壽, 1930-1961) 언론인. 민족일보 창간 발행인. 박정희의 5·16 군사 세력에 의해 교수형, 2008년 1월 16일에 법원 재심 결과 무죄와 국가 배상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1930 나경일(1930-2010)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재심도 무죄. / 부인 김재원(1935-2022) 향년 88세. 카톨릭신문 기자.
1931 김상찬(金相贊, 1931-) 부산 동아중학교,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1931 김세원(金世源, 1931-) 전남 화순, 남민전, 수기 비트(일과놀이, 1993) (이재문의 이야기가 나온다, 레포, 윤상원)
1932 최일(1932-) 대구, 경북통민청 위원장.
1932 도혁태(1932-) 경주, 민민청 경북도맹 회원.
1934 이재문(1934-1981) 호 중덕, 경북 의성, 경북대 정외과, 경북통민청 회원, 남민전 전사,
1934 하상연(河相演. 1934-2000) 경남 하동, 부산대 정치학과, ‘민족문화협회’ 업무주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결성,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도예종과 청년모임을 같이함, 『자주 통일』의 편집장. 동생: 하일민
1934 박현채(朴玄埰, 1934-1995) 경제학자. 1950년에서 1952년사이 빨치산 소년돌격부대 문화부 중대장.
1934 김질락(1934-1972) 경북 영천군, 서울대학교 문리대, 1967(서른셋) 월북하여(5월 5일~5월 28일) 평양에서 약 20일간 머물면서 노동당에 입당,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사형.
1935 강왕수(1935-) 경남 합천, 민민청 경북도맹 투쟁국장.
1935 조만호(1935-) 경남 의령, 민민청 경북도맹 회원.
1937k 김금수(金錦守, 1937-) 경남 밀양, 부산고등(‘암장’(巖漿)결성), 서울대 사회학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003. 3.22일 노사정위원장(장관급)에 김금수(金錦守·66)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1939 이재형(1939-2004) 경북 영천, 경북대 정치학과, 정사회-정진회, 경북통민청회원.
1940 정만진(1940-1998) 만주 흑룡강성(대구 남구), 대구대 법학과, 민민청 경북도맹 투쟁국장.
1940 하일민(河一民, 1940-) 경북대학교대학원 철학 박사, 부산대 철학과 대학교수,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1940k 김정강(金正剛, 1940-) 서울대 정치학과 ‘불꽃회’. 학생운동 리더·좌파 활동가에서 우익으로 '전향'
1941 류근삼(1941-) 경북 달성, 민민청 경북도맹 회원.
* 증언자들
강기룡, 경대 정외과 1972,
강창덕, 대구 상업학교 수료(1948)
권오봉, 경북영해 성내보통학교(1925졸)
김기곤, ?(s.t.)
김성희, 경대 농학과(1962)
나경일, 일본 팔번(八幡) 고등학교(1945)
림구호, 경대 물리학과(1967)
류근삼, 대구 계성중 졸(1957)
서동훈, 대구 미래대 전교수(서도원 유족)
신동숙, 초등 교사역임, 도예종 유족
이강철, 경대 정치학과(1966)
이일재, ?-?
이창훈, 경희대 지리학과(1987), 4.9평화통일재단 사료실장.
이현세, 경대 지리학과(1987)
임규영, 경대 일반사회교육(1971)
장주효, 경대 정치학과(1962)
정만기, 경대 정외과(1969)
정화영, 경대 정외과(1967)
황철식, 경대 불어과(1971)
함종호. 경대 도서관학(1976)
** 연구 성과물들
1951 허일태(許一泰, 1951-), 동아대, <Die Verfolgung Unschuldiger, § 344. StGB(독일 형법상 無告한 者에 대한 형사소추), Bayerische - Julius - Maximilian Univ. Wuerzburg 1984, Friedrich-Wilhelm Krause>「인혁당재건위사건과 사법살인」, 『동아법학』(동아대학교 밥학연구소, 2007)
1956 조희연(曺喜昖, 1956-) 사회학자, 제20·21대 서울특별시교육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의 상임의장, 『현대 한국사회운동과 조직』
1960 안재성(1960-) 경기도 용인,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 『경성트로이카』, 『황금이삭』, 『연안행』, 『사랑의 조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명시』. 평전으로 『이관술 1902-1950』,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실종 작가 이태준을 찾아서』,『이일재, 최후의 코뮤니스트』(인문서원, 2016),
1960 선우현(鮮于賢, 1960-), 충주교육대, <합리성이론으로서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서울대, 1998, 차인석,> 한국사회에서의 낙인효과와 적대적 배제 정치- ‘종북좌파’/‘친일독재’ 세력을 중심으로 – 2018, 철학연구, 대한철학회.
1961 이동진(李東振, 1961-) 경북대교수, <[미기재], 서울대, 2000, 장경섭.> 「기억의 “인혁당”: 기억운동과 기억 체제 사이」, 『사회와 역사』(한국사회사학회, 2009)
1962 김선미(金善美, 1962-) 부산대 사학과 강사. <이종률의 민족운동과 정치사상, 2008, 부산대, 최원규>, 『산수 이종률 민족혁명을 향한 道程, 2009』(김선미 저) 출간.
1963 김일수(1963-) 경운대학교 조교수, <서상일의 정치.경제이념과 활동, 2001, 성균관대, 서중석>
1965 류동민(柳東民, 1965-) 충북대, <가치이론의 정합성과 분석적 의의에 관한 연구, 서울대, 1994, 김수행.>
1971 오승용(吳承容, 1971-) <한국 분점정부의 대통령-의회관계 연구: 입법과정을 중심으로, 2003, 전남대, 김광수.>, 「국가폭력과 가족의 피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중심으로」, 『담론201』(한국사회역사학회, 2008).
1973 오제연(吳?淵, 1973) 성균관대 교수『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서울대, 2014, 김인걸>
이호중(?-?),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혁당재건위 재심무죄판결의 의미와 사법과거청산의 과제, 포럼진실과정의, 과거청산 포럼자료집, 인혁당 재심 무죄판결의 경과와 의의, 2007.0426 - 51 (26 pages), 이호중, 「인혁당재건위사건 재심무죄판결의 의미와 사법과거청산의 과제」, 『기억과 전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강왕수(?-?), 『사단법인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구술자료집』(미출간); 류근삼 구술.
2001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선인, 2001년 11월 30일, 490쪽(제1부 김정강, 제2부 윤 식, 제3부 이항녕, 제4부 강성원, 제5부 신영길).
2005 재경대구민주동우회 민청학련⋅인혁당진상규명위원회 편, 인혁당 사건, 그 진실을 찾아서(2005).
2017 청춘, 시대를 깨우다: 경북대학생운동사 1946~1979(삼천리, 2017), 여정남기념사업회,
(27:35, 55R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