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사이군의 忠臣(충신) 김선지 조선시대 500년의 처음은 태종(太宗)때에 힘으로 나라를정리하였고 문화로 이룩된 기반은 세종(世宗)이 세웠다. 고려(高麗)의 충신들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이조에 참여하기를 꺼렸고 세종(世宗)때와서야 그 후손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니 유능하고 안정된 정사는 이때서야 비로소 서광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김선지(金善之)는 대대로 명문의 가정에서 후예로 이어받은 그 후손이었다. 사람이 정직하고 정의심 강한 그였으므로 벼슬길에 오르는 것보다 학문을 익혀 배움의 길에서 일생을 보내려 하였으나 여러 집안사람들의 권고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세종(世宗)을 받드는 충신들이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었으니 그도 그속에서 한몫을 한다는 것이 영광스럽기도 해서 조용히 출사르 해선 교리자리에 앉았다.
그가 교리로 있으면서 조정에 드나들 때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같은 위대한 선비와 접촉하게되어 그들과 학문을 나누며 정사를 논하는 것을 기꺼움으로 알고 지냈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기쁘기만 하였으며 그들의 대화속엔 항시 부강을 누릴 우리나라의 현실이 있었으니 일하는 보람을 느끼며 살았었다.
그들의 기꺼움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은 김종서(金宗瑞)장군이 북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두만강(豆滿江) 압록강(鴨綠江)근처에 국경선을 쳤을때의 기꺼움이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외침이없이 살게 되었다고 기꺼워 하였으며 이제부터는 내실을 기해서 나라안을 튼튼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조정의 중신들도 힘을내어 일을 하였으며 이제부터는 잘 살게 되었다고 모두 기꺼워 했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백성을 보살피는 힘이 더욱 강해진 것도 내외로 안정된 정세가 있었고 뒷바라지를 잘하는 충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500년의 기틀을 잡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오래가지않고 나라를 바로 세운다음 승하 하시게 되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돌아가시자 온 백성들이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백성들은 너나 할것없이 슬픔에 젖어 있었으며 이제까지 이룩한 유업을 어떻게 계승할것인가가 큰 문제였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돌아가실 때 말하기를 어린 단종(端宗)을 잘보살펴서 더욱 이 나라를 빛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중신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더욱 나라일을 보살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왕 단종(端宗)은 임금자리에 오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거기다가 정권에 야심을 품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자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가진 모사를 하므로 중신들은 당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단종(端宗)곁에 있는 중신들을 없애기로 하고 영의정(領議政)황보인(皇甫仁)을 비롯하여 명장으로서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김종서(金宗瑞)장군을 차례로 죽였다.
칼잡이를 고용해서 중신들을 차례로 죽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단종(端宗)을 그 어린왕을 강원도(江原道) 영월로 보내서 죽게 하였으며 나라에서 큰 일을 하는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도 희생을 시켰던 것이다. 처음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박팽년(朴彭年)같은 중신에겐 큰 벼슬을 주어 시골로 내려보냈으나 충의심이 강한 박팽년은 끝내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위업을 계승하는 것만이 옳은 일이라고 충신들과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한양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나라일을 걱정할 때 김선지(金善之)와도 상의를 하였었다. 김선지(金善之)는 전적으로 그들의 일에 동의하였으며 이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것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물러가는 것이라고 했었다.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사육신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역적행위를 하였다하여 그들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않고 이슬로 사라지자 김선지(金善之)도 벼슬을 팽게쳐버리고 하향하여 버렸다.
그는 고향에 머무르면서 항상 선왕(先王) 세종대왕(世宗大王)을 생각하였고 단종(端宗)을 생각하였다. 단종(端宗)을 강원도(江原道) 산속에서 죽였을 때 선왕(先王)을 죽인 놈이 어떤 놈이냐고 소리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왕위에 오르자 스스로 세조(世祖)라 칭하였고 천하의 간신 한명회(韓明澮)같은 무리들과 폭력정치를 하니 김선지(金善之)는 오히려 산속에 묻혀있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는 산속에 살면서 어린왕 단종(端宗)의 죽음을 애석해한 나머지 단종을 위해 제사도 지냈으며 끝내 나의 임금님은 단종(端宗)이라고 고사하였었다. 세조(世祖)는 왕위에 올라서 자기를 반대하는 무리들은 닦치는대로 없앴다. 김선지(金善之)도 세조가 옛날의 충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인다는 말을 들었다. 하루에도 몇사람씩 불려가선 그들의 손에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나라를 올바르게 세워야겠다고 동으로 서로 뛰어서 선비들을 모아 세조(世祖)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누가 나쁜가? 세상에 아무리 정권이 탐이난다해도 단종(端宗)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그야말로 살인자가 아니냐고 울분을 토했다. 오래토록 참고있었던 선비들도 기치를 높이드는데 찬동을 했다. 오직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많은 찬동을 얻고 거사하려 하였으나 한 선비의 배신으로 그는 병자년(丙子年)에 발각되어 세조(世祖)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는 그래도 일을 거사하기 위해 뛰었다. 그러나 일이 터지면서 선비들이 몸을 사리게되고 호 응하는 사람들이 차츰 줄어가자 그는 통분한 나머지 자살을 하고말았다. 옳은 마음 고운 마음을 간직하고 생전 부정을 모르는 그는 끝내 자기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하니 그를 따르던 선비들도 풍지박산하고 말았다.
그가 죽자 그의 아내 유씨(兪氏)도 남편뒤따라 죽으니 충신은 이렇게 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키다가 죽었다. 김선지(金善之)는 보령(保寧)이 낳은 충신(忠臣)이다. |